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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수전 조지 『루가노 리포트』, 당대 2006

인류의 파멸을 기획하는 가상 전략회의

 

 

김종엽 金鍾曄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jykim@hs.ac.kr

 

 

21세기 자본주의의 유지 방안

『루가노 리포트』(The Lugano Report, 이대훈 옮김)의 독특한 구성에 대해서는 이미 입소문이 많이 난 터라 그 점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새삼스럽기는 하나, 아직 소문을 접하지 않은 이들도 꽤 있을 테니 먼저 책의 구성방식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 쑤전 조지(Susan George)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비판하는 점에서 많은 좌파 학자들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그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것의 폐해를 드러내는 식으로 작업하지 않았다. 발상을 바꾸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귀결을 그 체제의 승자들 관점에서 서술한다. 만일 체제 전체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 아둔하지 않은 지배자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은 이 체제의 존속을 위해 도전을 물리치고 약점을 보완하려 할 것이다. 이런 가정에 입각해서 저자는 현체제의 존속 방안을 연구하는 가상의 특별연구팀에 의한 가상의 보고서를 작성한다.

보고서들이 대개 그렇듯이 『루가노 리포트』 또한 문제진단에서 출발하는데, 그들이 찾아낸 체제의 위협요인은 생태계 파괴, 파괴적인 성장, 사회적 양극화와 극단주의, 지구화된 범죄와 금융체제의 위험 같은 것이다. 이런 것들은 자본주의체제의 비판자들이 말해온 것과 다르지 않다. 『루가노 리포트』는 정확히 비판자의 언술을 반복하며 이렇게 말한다. “시장은 인간이 생태적 한계점을 넘어서는 싯점을 알려주지는 못한다. (…) 경제는 사회의 핵심이다. 그러나 경제가 부수적으로 발생시키는 사회적 악영향이 경제적 수혜들을 파괴시킬 만큼 강력할 수도 있다.”(32면)

보고서의 다음 논의는 현체제의 관리씨스템이 이런 위협요인에 대응할 수 있는가인데, 결론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국제결제은행, 브레튼우즈기구, 세계무역기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제기구와 다국적기업들은 시장을 토대로 한 이 체제를 총체적으로 관리할 수도, 관리할 역량도, 관리할 의지도 없다.”(47면) “규칙과 제한이 없는 시장은 스스로 파멸할 수 있”(53면)지만, 현존 세계기구는 그런 규제를 제공할 수 없고 “주요한 시장 행위자들은 자신의 이익과 이 체제의 이익에 대해 분별력을 잃었다”(54면)는 것이다. 맑스나 월러스틴을 떠올릴 법한 진단이다.

하지만 체제 지배자의 관찰이 좌파의 비판과 일치하는 것은 여기까지이다. “지적 자유와 솔직함을 마음껏 발휘하고 감상주의를 자제”(72면)한 연구팀이 자신들의 진단에 입각해 제출한 해결방안은 전율할 만한 것이다. 그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세계적 수준의 양극화를 줄이고 새로운 일자리를 생태 재활용 영역에 제공하며, 국제적 금융거래세를 보강하는 것 등이 필요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런 정도의 정책, 좌파들이 지금까지 되뇌어오던 정책만으로는 현재의 도전을 극복할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은 현체제가 공급할 수 있는 복지와 재화에 한계가 있고, 그것이 불가피하게 무능력자와 실패자를 양산하는 기계라는 사실과 정면 대결해야 하며, 따라서 체제 존속을 위해서는 생산적인 개인대중을 소진시키는 기생충에 불과한 부적격자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삭막하고 황량한” 선택이지만 즉각 단행되어야 할 조치이며 “이 이외의 대안은 모두 환상이고 희망사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87면).

그들의 어림에 따르면 현재 60억 인구는 향후 20년 내에 40억 수준으로 감축되어야 한다. 이런 방대한 인구감축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의 인구감축 전략을 떠받쳐줄 “네가지 기둥”을 제시한다. 첫째는 이데올로기적 기둥이다. 서구 지배층조차 여전히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인권 개념을 폐기하고 시장주의를 통한 이데올로기적 전일화를 달성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승열패가 체제의 건강함을 나타내는 지표이자 체제를 움직이는 동인임을 모두가 받아들이게 하자는 것이다. 둘째는 경제적 기둥으로 세계은행과 IMF를 주축으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것이다. 이들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저임금과 빈곤, 영양 불균형, 매매춘 증가를 매개로 한 질병 증가, 공중보건의 후퇴를 동반함으로써 인구성장을 제어하는 것이다. 셋째는 정치적 기둥으로 세계체제의 정치원리를 국가간 체제로부터 다자간 경제협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심리적 기둥은 체제에 도전하려는 집단들의 연대를 약화하고 도리어 적대의식을 강화하게 하는 것이다. 심리적 기둥의 가장 유용한 도구로 적시되는 것이 “정체성의 정치”이다. 정체성의 정치는 사람들을 세계시민으로 결합하기보다는 억압과 멸시의 경험에 의해 잘게 쪼개버리기 때문이다.

이런 네가지 기둥 위에 이제 인구감축 전략이 수립되는데, 보고서는 이 전략들을 요한묵시록의 네 기수(騎手)인 정복, 전쟁, 기근, 질병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한다. 묵시록의 네 기수는 사실 새로울 게 별로 없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대량의 인구를 제거할 수단으로 이만한 것이 있겠는가. 더구나 그들이 처음부터 나찌적인 인종청소와 자신들의 계획을 구별하면서 말했듯이, 현대의 인구감축 전략은 특별한 시설과 인력의 동원이 필요없는 저비용의 것이어야 하며, 희생자는 자기 성향에 의해 스스로 선택된 사람이어야 한다면, 이런 고전적 재앙이야말로 효과적인 전략이며 현대적 맥락에서 더 강력하게 출현할 수 있다. 예컨대 가난하고 인구 많은 나라에 전통적인 개발을 실시한다고 해보자. 그것은 강제이주와 탈농을 만들어낼 것이다. 거기에 무역자유화가 더해져 저가 농산물 수입으로 자작농이 뿌리뽑히고, 농업생산성을 높이려 도입한 현대적 농업이 작물 다양성을 축소하며, 유전자변형 종자의 도입이 슈퍼 잡초와 해충을 불러들여 대규모 기근을 야기할 것이다. 그로 인해 나빠진 영양상태는 갖은 질병을 부르고 AIDS 등이 확산될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외채 압박으로 구조조정을 실시하고 그로 인해 후퇴한 공공보건 써비스는 대중을 질병 앞에 무방비로 내몰 것이다. 여기에 정체성의 정치가 겹치면 급기야 내전의 불길이 타오를 것이다.

이런 재앙들에 대한 논의에 이어 피임과 낙태 문제 그리고 중국의 예외성을 다룬 부분이 나오지만, 내가 잠시 책을 덮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불편한 감정을 느낀 것은 이런 재앙을 다룬 부분에서였다. 저자는 책의 후기에서 이 책이 사람들을 전율케 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그의 의도는 충분히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의도가 달성된 이유는 그가 정말로 체제의 존속을 기획하는 지배자의 의도를 제대로 복원했기 때문이거나 이 책이 설정한 씨나리오가 체계적이기 때문은 아니다.

사실 이 책의 내용을 반박하는 것은 쉽다. 무엇보다 이런 보고서를 만들 연구집단 그리고 그들에게 이런 보고서를 요구할 지배집단이 존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따라서 이 책의 계획이 실행될 가능성도 없다. 현체제의 지배층은 피지배층만큼이나 분열되어 있고 정체성의 정치에 부심하고 있다. 한마디로 현체제 전체의 존속을 근심하는 현명한 중심은 없는 것이다. 체제의 중심 위협요인이 남반부의 증가하는 인구인지도 불확실하다. 체제를 위험에 빠뜨리는 원인은 오히려 중심부 국가간의 갈등 그리고 중심부와 반주변부의 갈등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우리의 정서를 위협하는 것은 조타수를 쥔 지배적 중심 없이 맹목적으로 운항하고 있는 현존 체제가 그런 중심을 가정하고 쓴 『루가노 리포트』가 제시하는 재앙을 이미 심각하게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최근 우리 사회의 상황도 불편함을 가중시켰다. 이 책이 그리는 참상에 한반도가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이후의 사회 양극화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정신적·도덕적 투항에 더해 최근 한미FTA 협상이나 북한 핵실험 같은 일들이 하나같이 이 보고서의 내용과 맞닿아 있다. 저자가 애써 관점을 바꾼 책을 써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자 한 이유는 체제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이 종종 빠져드는 편안함, 그러니까 실상은 효과없는 진부한 저항을 거듭하면서 저항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머무르는 고지식함, 순진함, 도덕적 자족감을 깨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지금 한반도에 사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자극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