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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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陳恩英

1970년 대전 출생.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이 있음. dicht1@hanmail.net

 

 

 

나의 친구

 

 

별과 시간과 죽음의 무게를 다는 저울을

당신은 가르쳐주었다

가난한 사람의 감자와 사과의 보이지 않는 무게를 그리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곤충의 오랜 역사와 자본주의의 시간

우리는 강철나무 속을 갉아 스펀지 동굴로 만드는 곤충의 종족이다

어제 달에서 방금 떨어진 예언을 내가 만져보았거든

먼 우주에서 떨어진 꿈에는 언제나 무수한 구멍이 뚫려 있지

 

어둠속에서는 어떤 보폭으로

야광오렌지 알갱이를 터뜨려야 하는지

어떻게 기계와 자유가 라일락과 장미 향기처럼 결합하는지

우리가 인간이라는 창문을 열고 그토록 높은 데서 뛰어내릴 용기를 가질 수 있는지

 

대답의 끝없는 사막에

낯선 물음, 빛나는 피의 분수가 쉴새없이 솟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물론 모든 걸 그리는 건

내 마음 가득한 지하수, 어쩌면 푸르고도 고요했던 강물이겠지만

그곳에 무심코 던져진 돌멩이

강가에 이르도록 퍼지는 물음의 무한한 동심원을 만드는

 

너는 내 손에 쥐어질 얼마나 날카로운 칼인가

높은 기념비, 예술가들, 철학자들, 위대한 정치가들보다도

나의 곁에서

황금의 밧줄로 묶인 소박한 선물을 풀어놓을

 

우리는 어리석은 모세, 붉은 바다를 가르는 지팡이

확신의 갑옷 두른 모든 시대의 병사를

전부 익사시키는

 

그것을 믿자, 강철부스러기들이

우리를 황급히 쫓아오며 시간의 거대한 허공에

멋지게 흩어진다

죽음과 삶, 두 극의 자장(磁場) 사이에서

 

그것을 믿자, 숱한 의심의 순간에도

내가 곁에 선 너의 존재를 유일하게 확신하듯

 

친구, 이것이 나의 선물

새로 정의된 데카르트 철학의 제일원리다

 

 

 

봄에 죽은 아이

 

 

막을 수 없는 일들과 막을 수 있는 일들

두 손에 나누어 쥔 유리구슬

어느 쪽이 조금 더 많은지

이 슬픔의 시험문제는 하느님만 맞히실까?

 

부드러운 작은 몸이 그렇게 굳어버렸다

어느 오후 미리 짜놓아

팔레트 위 딱딱해진 물감들, 종이 울린 미술시간

그릴 것은 정하지도 못했는데

 

초봄 작은 나뭇잎에 쌓이는

네 눈빛이 너무 무거울까봐 눈을 감았다

 

좋아하던 소녀

저 부드러운 윗입술이 아름다운 아랫입술과 만나듯

너는 죽음과 만났다

 

다행이지, 어른에게 하루는 배고픈 개들

온종일의 나쁜 기억을 입에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그러니 개장수 하느님께 네가 좀 졸라다오

오늘, 이 봄날 슬픔의 커다란 뼈를 던져줄 개들을

빨리 아빠에게 보내달라고

 

세월이 어서 가고 너의 아빠도

말랑한 보랏빛 가지를 씹어 그걸 쉽게 삼키듯

죽음을 삼킬 테지만

 

그전에, 봄의 잠시 벌어진 입속으로

흰 프리지어 향기, 설탕에 파묻힌 이빨들

사랑과 삶을 발음하고

 

오늘은 나도 그런 노래를 부르련다

비좁은 장소에 너무 오래 서 있던 한 사람을 위해

코끼리의 커다란 두 귀같이 제법 넓은 노래를

봄날에 죽은 착한 아이, 너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