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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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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용 金兌墉

1974년 서울 출생. 『세계의 문학』 2005년 봄호로 등단. lynchbab@hanmail.net

 

 

 

편백나무숲 밖으로

H에게

 

 

나는 서른살이 되었고 나를 죽였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죽음 직전까지 나를 내몰고 싶었다. 그래서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나를 죽여줘요, 제발,이라는 말을 나로부터 듣고 싶었다. 듣지 못했다. 들을 수 없었다. 그 어떠한 말도. 심지어 단말마의 비명이나 신음소리 비슷한 것도.

죽이고 나서는 이상하게 슬픔이 밀려왔다. 나의 의도가 실패한 것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마음속에 더러운 비애의 감정이 소용돌이친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정말 더러운 비애,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더럽지 않은 비애란 어떤 감정일까, 하고 나는 되물어야 한다. 되묻고 되물을수록 더럽지 않은 비애가 어떤 감정인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비애란 더러워야 마땅하다. 더러운은 비애를 가장 잘 수식하는 단어가 분명하다. 더러운이란 단어는 오로지 비애라는 단어를 위해 유일하면서도 간신히 존재하고 있다. 비애란 언제나 더럽기 마련이다,라고 나름의 단정을 지은 나는 어떤 현상이든 사유든 끝까지 성찰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마는 나의 오래된 습관을 다시금 확인했다.

한참 동안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손바닥에는 붉고 푸른 멍들이 가득했다. 둔중한 무언가로 멍이 들 때까지 손바닥을 짓누르거나 쳐댄 것이다. 혹은 손이 아픈 것을 알면서도 뭔가를 붙잡고 오랫동안 매달려 있었는지도,라고 생각했으나 언제 어떻게 그런 일들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나는 기억에 의존하는 인간이 아니다.

내 손바닥을 혀로 핥아대며 왜 도무지 당신은 변하지 않는 거지요,라고 물었던 나를 기억했다. 기억에 의존하지 않는 인간임을 자부하는 나는 기억이 나면 저절로 그 기억이 멈춰버릴 때까지 내버려두는 습관이 있다. 기억에 꼬리라는 단어가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억의 꼬리의 꼬리를 물고라고 거듭 어울리지 않는 표현을 쓰면서 기억의 꼬리의 꼬리를 무는 상황을 내버려두었다. 마치 그것은 손바닥을 혀로 핥아대며 왜 도무지 당신은 변하지 않는 거지요,라고 끊임없이 물었던 나의 도무지 변하지 않는 태도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손바닥으로 나의 뺨을 후려치며 썩 꺼지지 못해,라고 말했다. 내가 들고 있는 가방은 베이지색 체크무늬였다. 가방에는 쓸모없는 단어사전이 들어 있고, 그것을 결코 읽지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뺨을 비비며 문을 열었다. 밖으로부터 차가운 바람이 마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양 쳐들어왔다. 몇분 동안 밖으로부터 쳐들어오는 바람을 온몸의 모공을 열고 흡수하려 애쓰며, 애처로워 보이도록 노력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 몸에 소름이 돋는다. 몸에 돋아난 소름을 도무지 견디지 못하는 나는 그만 문을 닫아달라고 말했다. 문을 닫았다.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다음과 같이 또다시 후회할 말을 하고 말았다. 도무지 변하지 않는 당신을 죽여야겠어요. 아니 가능하다면 죽음 직전까지 내몰고 싶어요. 그래서 당신으로부터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나를 죽여줘요, 제발,이라는 말을 듣고 말 거예요.

죽음이란 단어를 처음 접했던 날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죽음이란 말을 듣기 오래전부터 나는 죽음이란 단어가 없어도 죽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꿈을 통해 확인했다. 꿈속에서 나는 죽어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한참 들어 보였지만 분명히 나라고, 받아들이라고 나의 주검이 명령했다. 그 어떤 묘사를 통해서도 나는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없다. 내가 나를 설명하려고 들면 들수록 나는 나에게서 멀어진다. 언어의 도움을 빌려 나는 이런저런 외형을 가진 이런저런 인간이다,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더이상 내가 아닌 것이다. 다만 언어가 발화되기 이전, 문자화되기 이전의 나만 알아볼 수 있다. 그런 불명료한 태도에 있어 나는 나에 대해 누구보다 명료한 의식과 이미지를 갖고 있다. 나는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나라면 마땅히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거야. 봐라. 이게 나다.

내 몸은 퉁퉁 불어 있었다. 하루 정도 물속에 잠겨 있다 나오면 이렇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몸은 불어 있는 동시에 몹시 건조하게 보였다. 손바닥으로 피부를 문질러보면 허연 각질들이 묻어나올 것만 같았다. 눈을 감고 있었는데 마치 상대방을 골려주기 위해 죽은 척하고 있는 것처럼 장난기가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꺼풀을 들어올려 동공을 확인했다. 동공은 붉고 누런색으로 변해 있었고 군데군데 균열이 나 있었다. 지나친 비유임에도 불구하고 동공이 편백나무 열매 같다고 생각했다. 손가락으로 동공을 찌르려다가 말았다. 손끝만 살짝 대도 끈적끈적한 액체가 터져나올 것 같았다. 내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누가 당신을 죽인 것일까. 나는 죽어 있는 나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반쯤 벌어진 입속에서 희미한 연기 같은 것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의미를 품은 언어였다. 수다스럽고 수치스러운 언어가 자신을 감추기 위해 위장한 생각지도 못한 연기 같은 물체였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확산하면서 형태를 달리하는 연기 같은 것의 태도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것의 태도는 끊임없이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언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몸을 바꾸는 것을 연상시켰다.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세상의 어떤 말과 언어에도 눈과 귀를 기울이거나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기를 주저한다. 그것은 나의 단어습득능력과 언어구사능력이 보통의 사람들보다 현저히 떨어진다고 스스로 판명했을 때부터 생긴 언어에 대한 혐오증에서 비롯된다고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자연스럽게 나는 언어로 해석되지 못하는 것에 관심을 더 기울였다. 그것은 알 수 없는 감각의 형태로 바뀌어 나에게 해석되지 않는 방식으로 해석을 거부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덜떨어진 이런 삶의 양식이 맘에 들었고 세계와의 모범적인 소통이라고 늘 생각했다.

연기 같은 것의 의미를 무시하고, 그것의 냄새는 참으로 고약할 것이라고 꿈속에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생각만큼 고약하지는 않았다. 아니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후각이 마비되었지만 자신의 후각이 마비되었다는 것을 애써 숨기려는 짐승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이게 도대체 무슨 냄새야,라고 중얼거렸다. 그러곤 절벽 아래로 떨어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자신을 가둔 뻔뻔한 풍경에 경멸의 시선을 던지는 자의 심정으로 죽어 있는 나에게 입을 맞췄다.

나는 죽어 있던 내가 막연하게 서른살일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확신을 서른살이 되기 얼마 전 얻게 된다.

당신이 나를 죽이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당신을 몹시 사랑해서가 아니라고, 나는 항변했다. 내가 가져온 가방은 체크무늬로 된 베이지색이었는데 그 안에는 쓸모없는 단어사전이 들어 있었다. 나는 당신을 떠나기 위해 당신에게 돌아온 것뿐이야,라고 말하면서 무릎까지 올라오는 등산양말을 발목까지 내렸다가 다시 무릎까지 올리는 동작을 반복했다.

서른살이 되면 나는 나에게 등산양말을 선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서른살이면 등산양말 하나쯤은 있어야겠지. 혹은 서른살이면 등산양말 하나를 가지고 있어야 마땅해. 아니면 서른살이 되어도 등산양말이 없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인생을 무의미하게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될 거야,라고 등산양말을 갖고 싶은 열망을 드러냈다. 서른살. 나는 나 자신에게 등산양말을 선물했다. 그것은 무릎까지 오는 것이었다.

등산양말을 신고 방 안을 거닐고 있으면 발바닥으로부터 뭔가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느낌이 든다. 처음엔 몹시 간지럽다가 좀더 시간이 지나면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만 같다. 정말 뜨겁게 시원했다. 나는 한번도 간지럼을 타본 적이 없고 피가 역류하는 경험을 해본 적도 없다. 어처구니없게도 뜨겁게 시원하다는 부당한 표현은 나에게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 간혹 나는 그렇게 나의 본성을 배반하면서 나를 드러내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경멸한다. 분명한 것은 에너지라는 것이다. 나는 서른살이다. 그리고 등산양말을 신고 있다,라고 중얼거리며 환희에 차 좁아터져서 결코 몇걸음 내디딜 수도 없는 방 안을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나서야 등산양말을 신은 나의 뜀박질은 비로소 끝날 수 있었다.

등산양말을 신은 채로 잠이 들었다. 몸을 웅크리고 자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아동용 침대를 사용하고 있다. 침대에는 만화캐릭터가 그려져 있는데, 그 만화영화의 주제가를 한없이 늘여, 마치 늘어날 대로 늘어난 음악테이프의 소리처럼 부르다 잠들곤 했다. 침대에 똑바로 누우면 무릎부터 침대 밖으로 뻗어나오게 된다. 그것은 정확히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비교적 정확할 정도로 등산양말의 길이와 같았다. 그러니까 더 정확하게 설명하면 등산양말을 신고 있는 나의 무릎 아래는 침대 밖으로 뻗어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침대 밖으로 나와 있는 무릎 아래의 다리는 마치 나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등판에 달린 버튼을 누르면 주먹이 나가는 로봇장난감처럼 나의 의식 꼭대기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버튼을 눌러 다리가 튕겨나가는 상상을 종종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다리가 자신의 주인이 누군인지 잊은 채 정처없이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을 동안 나는 두 다리가 없는 상태로 두 다리가 있던 상태를 떠올려보며 그때와 지금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하고 있음과 없음의 차이를 단 한번도 그런 적이 없지만 정신을 고도로 집중해서 밝혀볼 작정이다.

무릎을 침대 모서리에 튕겨대며 물장구를 치는 아이처럼 좋아라 했다. 주변에서 그런 장난을 하지 말라고 다그칠수록 이상하게 더 하고 싶어하는 아이의 심정에 충분히 공감하며 허공에 물장구를 오랫동안 쳤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도무지 믿기지 않지만 물장구를 칠수록 등산양말이 젖어들고 있다고 느꼈다. 허공은 물방울 하나 돋아날 틈도 없이 물로 꽉 차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물의 암벽을 기어올라갔다. 등산양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자꾸만 미끄러져 내 몸은 물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나는 등산양말이 오히려 등반에 방해된다는 나의 발상에 스스로 대견해하면서 물의 암벽 등반을 포기했다. 등산양말은 등산에는 유용할지 몰라도 등반에는 결코 유용하지 않다. 등산과 등반의 차이는 두 다리가 있는 것과 두 다리가 없는 것의 차이만큼은 아니지만 뭔가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며 나의 의식을 끈질기게 간지럽혔다. 그만 좀 간지럽혀라,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앞서 밝혔다시피 지금은 더이상 그런 사실을 믿을 수도 없고 믿지도 않는다.

서른살 생일날 나는 생일 케이크를 들고 편백나무숲으로 갔다. 숲 속의 빈터를 찾으려 했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숲은 전체가 텅 비어 있기에 빈터가 없었다. 도무지 내가 쉴 곳은 없구나. 편백나무숲에 저주를 퍼부으며 도로 숲을 나왔다. 숲을 나오자 숲 속의 빈터가 보였다. 숲 속의 빈터가 보이는 지점에 주저앉아 상자에서 생일 케이크를 꺼냈다. 생일 케이크는 내가 손수 만든 것이다. 생일 케이크 만드는 법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오직 나를 위해 생일 케이크를 만들었다. 별로 어렵지 않았다. 서른개의 초를 꽂을 수 있는 생일 케이크면 충분했다.

생일 케이크를 상자 위에 올려놓고 서른개의 초를 꽂았다. 초는 쉽게 꽂혔다. 정성스레 힘을 들여 하나씩 꽂으며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썼지만 너무나 쉽게 초가 꽂히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이렇게 무의미한 것이었나 하고 의아해했다. 다시금 나는 기억에 의존하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나의 신념을 배반하면서 기억에 은근슬쩍 의존해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는 동시에 기억에 의존하고 말았다.

나는 나를 죽이고 말 것이다,라고 최초로 결심한 나는 편백나무숲을 거닐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편백나무숲으로 쫓겨난 것이다. 사실대로 말한다면 편백나무숲으로 도망친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나와 살고 있지 않았다. 나와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리던 나는 어느날 편백나무숲으로 도망친 것이다. 도망치는 것은 간단했다. 체크무늬 베이지색 가방에 도무지 쓸모가 없어 읽을 생각도 나지 않는 단어사전을 넣고 문을 열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편백나무숲은 편백나무숲이 아니다. 숲의 빈터를 편백나무가 숲의 허락도 없이 차지하고 있던 것이다. 편백나무숲을 거닐던 나는 가장 편백나무답게 생긴 편백나무 옆에 비스듬히 기대서 편백나무숲에서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약했는데 내가 한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냄새라서 더욱 고약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편백나무 냄새인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확신이 불현듯 들자 편백나무를 껴안고 얼굴을 비벼댔다. 끈적끈적한 편백나무 진액이 얼굴에 묻었다. 얼굴에 묻은 편백나무 진액을 닦아내기 위해 더욱 비벼댔지만 그럴수록 진액은 얼굴을 완전히 더럽혀볼 기세로 고집스럽게 들러붙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나를 죽여줘요, 제발.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얼굴로 편백나무에게인지 나 자신에게인지 모를 말을 해댔다. 결국 편백나무숲으로 도망친 나는 편백나무숲으로부터 도망쳐야만 했다. 어쩌면 나는 편백나무처럼 고집스러운 인간일지도 모른다,라고 자신을 반성할 기회와 필요가 있었지만 편백나무처럼 고집스러운 나의 본성을 지키기 위해 반성할 기회와 필요를 편백나무숲 밖으로 집어던졌다.

편백나무숲에서 도망친 이후 나는 오로지 서른살이 되기만을 기다리며 살아갔다. 왜 하필 서른살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막연한 어느 시기로 나의 살인적 충동을 미뤄보겠다는 심정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서른살까지 살지 못할 것이라는 불길하면서도 흥미로운 예감에 사로잡혀 있던 탓인지도 모른다. 내가 아는 그 어느 누구도 서른살에 죽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모든 인간은 서른살에 죽어야 마땅하다,라고 그 누구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서른살은 그만큼 막연한 생의 지점이다. 서른살이면 누구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무의미했나 의심해봐야 한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서른살이다. 인생은 무의미하다. 나는 나 자신을 죽이기로 결심했다. 내가 나를 죽이는 순간 어쩌면 인생은 더이상 무의미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삶이 모두 무의미했구나,라고 결론을 내린 나는 서른개의 초가 꽂힌 생일 케이크를 앞에 두고 쪼그려앉아 있었다. 나의 자세는 튀어오르거나 날아오르기 직전의 짐승 같았다. 잠시 동안 보이지 않는 끈에 발목이 묶인 가련한 짐승처럼 몸부림을 쳐보곤, 맹금류의 왕을 자처하다가 아주 사소한 실수로 함정에 빠진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는 새의 굴욕을 떠올렸다. 동족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구원을 요청하는 대신 차라리 죽을힘을 다해 혼자 벗어나려 애쓰다 죽어버리는 게 나았다. 편백나무숲 저편으로부터 오로지 모여 있을 때만 시끄럽게 지저귀는 새떼가 소스라치게 놀라 날아올랐으면 하고 상상했으나 숨막힐 듯한 정적만 주변을 싸고돌았다. 나에게서 벗어나려는 나와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간직해보고자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갈 무렵 오랫동안 닫혔던 입이 열렸다. 당신은 지상에 발목이 묶인 가련한 짐승이지요. 아니 한번도 왕의 역할을 해본 적 없는 맹금류의 왕이지요,라고 알 수 없는 형태의 허연 김을 내뿜으며 나에게 매몰차게 말했다.

서른개의 초에 불을 붙이는 것은 서른개의 초를 생일 케이크에 꽂는 것처럼 수월하지 않았다. 첫번째에 이어 두번째 초에 불을 붙이면 이전의 촛불이 이내 꺼지고 말았다. 편백나무숲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는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기미는 없었다. 촛불이 흔들리지 않는 걸로 봐서는 바람이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숲은 바람으로 꽉 차 있을지 몰라도 숲 밖은 바람과 전혀 무관한 세계였다. 이곳은 숲의 외곽이고 바람이 침범하지 못하는 지역이다. 바람이 숲의 외곽에 닿으면 스스로 몸을 감추거나 녹아 없어지는 것이다. 초에 붙은 불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꺼져버리는 것에 대한 불만을 그렇게 숲과 바람의 억지관계를 만들며 참아냈다. 그러나 편백나무숲과 바람과 촛불이 도대체 무슨 사이란 말인가. 그들은 결코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아주 우연히 만나 잠시 동안만 같이 있다가 뒤도 안 돌아보고 헤어질 운명에 처한 관계일 뿐이다. 의문을 품을수록 불만으로 가득 찼던 기분은 점점 불쾌해지고 의문만 비대하게 몸을 부풀렸다.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란 이토록 위험천만하고 불가능한 것들뿐인가. 결국 세계가 권하는 모든 사건을 너무도 쉽게 포기하는 자의 표정을 지으며 단 하나의 초에 불을 붙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곤 이제 막 태어나자마자 세계의 진면목을 알아버린 인간처럼 입 안의 침을 가득 모아 촛불을 껐다.

어둠이 내리면 숲 밖으로 기어나오는 허기진 짐승들을 위해 오로지 하얀 크림으로만 만든 케이크를 두고 숲 밖을 빠져나왔다. 충혈된 눈으로 침을 질질 흘리며 으르렁거리다가 크림케이크에 이빨을 박는 짐승들을 상상하면서 나에게 죽음을 선고할 수밖에 없는 나를 결코 용서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왜 꼭 당신은 나를 죽여야만 하나요. 나에게 물은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견디기 힘든 기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설득해보려고 시도도 했었다. 기억에 의존하는 자신을 못 견뎌하는 나는 어느 순간 제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기억이라는 생물을 갑자기 존경하고 싶어진 것이다. 나는 왜 기억에 의존하는 자신을 못 견뎌하는가. 기억이 나쁜가. 기억은 왜 시간을 거슬러야만 하는가. 한번도 멍하니 수면 위를 바라본 적은 없지만 기억은 왜 수면 위에 떠 있지 않고 수면 아래서만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생명체의 씰루엣을 보이며 인간을 유혹하는가. 나에게도 어쩌면 기억하고 싶으면서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분명히 있을지 모른다.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 어느 순간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기억을 떠올릴 수 있다면 내가 왜 나를 죽여야만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기억을 하면 할수록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내가 기억하고 싶은 기억에서 멀어져 또다른 형태와 빛깔과 소리의 기억으로 변모하게 된다.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은 나쁘다. 기억이 정말 나쁘다면 나를 죽이기 전 마지막으로 나에게 기회를 주는 셈 치고 나쁜 기억을 떠올려보도록 하자. 내가 떠올릴 기억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을 기억한 것이어야만 한다. 반복하면 나는 기억하고 있지 않은 기억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눈을 감았다 뜨고 나면 어느새 서른살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을 때 나는 한통의 전보를 받게 된다. 전보를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전보라는 통신수단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에 참으로 의아해하며 한참 망설이다가 전보의 수령을 허락했다. 전보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돌아오라. 돌아오라.

글을 읽고 나니 어둠 속에서 편백나무가 아무도 몰래 자신의 썩은 가지를 스스로 부러뜨리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어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구나. 언어만이 사람을 죽일 수 있구나. 언어가 아니면 그 무엇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정확히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돌아오라니. 떠난 적이 없는 내가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나더러 죽으란 소리가 아니면 그 무엇이냐. 전보를 구겨버렸다. 그 누군가에게 불쾌한 나의 심정을 가능하다면 직접적으로 노출시켜 다음과 같이 전보를 보내야 마땅할 것이다.

떠나라. 떠나라.

전보를 받고 나서 애초에 돌아갈 곳이 어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쫓아도 쫓아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파리떼처럼 나를 귀찮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돌아갈 곳은 없었다. 아마도 돌아갈 곳이 설령 있다고 해도 막상 돌아갔을 때는 내가 돌아갈 곳은 이곳이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될 것이 분명하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예전에도 전보를 받은 적이 있다. 물론 그 전보는 나에게 온 것이 아니었다. 나와 같이 사는 사람에게 온 것이다. 그 사람은 평소 나에게 밥을 먹여주고 옷을 입혀주고 가끔은 나를 껴안고 아무 이유 없이 울기도 했다. 겨울이었다. 부엌에서는 감자 삶는 냄새가 진동했다. 사람은 잊을 만하면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들어가 냄비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감자를 한번 찔러본 뒤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평생 감자만 삶다가 나이가 들어버린 것만 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살아가고 있었지만 감자를 삶을 때면 마치 처음 삶아보는 것처럼 그랬다. 감자를 삶기 위해서는 적당한 불안감과 초조함이 필요한 것일까. 감자는 좀처럼 삶아지지 않는지도 모른다. 감자가 삶아지면 나는 감자를 먹게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마당의 평상에 앉아 있었다.

털모자와 목도리, 벙어리장갑을 끼고 마당에 사선으로 걸려 있는 전깃줄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전깃줄은 전기와 무관하게 빨랫줄 역할을 하고 있었다. 빨랫줄에는 몸이 반으로 접힌 채 꽁꽁 얼어 있는 등산양말만 걸려 있었다. 등산양말의 발끝에 매달려 있는 고드름이 녹아 방울져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어느 순간 목격했다. 일어나 빨랫줄 앞으로 다가가 등산양말에 매달린 고드름을 빨기 시작했다. 차가운 물이 혀를 녹이고 목구멍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만 같아 더 힘차게 빨아댔다. 고드름이 다 녹고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등산양말을 쪽쪽 빨아대던 나는 등산양말의 주인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고 새삼스러운 의문을 가졌다. 이토록 추운 날 등산양말도 신지 않고 세계의 어느 암벽을 오르고 있을까. 끊임없이 암벽에서 추락하면서도 오르려고 애쓰고 있는 등산양말의 주인을 떠올렸다. 떠오르지 않았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등산양말의 주인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등산양말의 주인은 내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발달되기 전 떠났다. 나는 언제쯤 저 등산양말을 신을 수 있어요, 하고 같이 사는 사람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사람은 이마로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서른살쯤이면. 그때까지 니가 살아 있다면 말이다.

이건 감자 타는 냄새가 아닌가. 마당으로 들어선 사람이 말했다. 사람은 제복을 갖춰 입고 시커멓게 때가 낀 흰 장갑을 끼고 있었다. 등에는 커다란 갈색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몹시 낡아 보였다. 사람은 나와 같이 사는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이름이 불린 사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몇번 다시 불렀지만 마찬가지였다. 나는 방문 앞으로 가 큰 소리로 말했다. 감자가 타요. 그제야 사람이 문을 활짝 열고 나와 부엌으로 달려갔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였다. 감자를 삶고 있는 냄비 뚜껑을 열다가 화들짝 놀라며 뚜껑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진동하는 냄비 뚜껑의 움직임이 정지할 동안 사람은 잊고 있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죽어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처럼 뒷목이 땅길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그것을 지켜보았다. 나와 사람은 그런 사람을 지켜보았다.

사람은 사람에게 전보를 건넸다.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사람이 말하자 사람은 사람의 귀에 얼굴을 들이대며 속삭였다. 아마도 전보의 내용을 읽어주는 것을 넘어 또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추측될 정도로 사람과 사람의 사이는 너무나 친밀했다. 사람의 말을 듣고 사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몸을 부르르 떨며 휘청거리는 사람의 어깨를 잡아주려던 사람은 뒤로 물러섰다. 어깨를 잡아주면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몸 쪽으로 안겨올 것 같은 불편한 위기를 사람은 아마도 감지했을 것이다. 사람은 나에게로 다가와 몹시 가여워서 너를 동정하지 않고서는 내 마음이 편하지 않겠구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이 몹시 마음에 들어 계속 나를 그렇게 쳐다봐주세요,라고 무언의 시선을 전달했다. 사람은 곧 표정을 바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때가 잔뜩 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나의 볼을 어루만졌다. 사람은 부엌으로 들어가 시커멓게 탄 감자 하나를 집게로 들고 와 사람에게 건넸다. 사람이 사양하자 입에 처넣을 기세로 얼굴에 들이밀었다. 사람은 할 수 없이 감자를 건네받고 그것을 한입 베어물었다. 사람의 입 주변에 까맣게 재가 묻어났다. 사람의 눈치를 보며 감자를 입에 꾸역꾸역 처넣곤 다시는 삶은 감자를 먹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의 눈빛을 보이며 사람은 돌아서 밖으로 나갔다. 나는 까맣게 때가 묻었을 더러워진 나의 볼을 만지며 사람에게 물었다. 나는 언제쯤 저 등산양말을 신을 수 있어요. 사람은 뻔뻔하게도 너는 언제나 등산양말 타령만 하는구나,라는 시선을 던지곤 이마로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서른살쯤이면. 그때까지 니가 살아 있다면 말이다.

알 수 없는 기운에 식은땀을 흘리다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축축해진 몸을 끌고 방문을 열었다. 밖으로부터 울음이 섞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따라 마당의 뒤편으로 갔다. 사람은 마당 뒤편에 있는 고사 직전의 편백나무를 부둥켜안은 채 울고 있었다. 바람에 휘어지는 편백나무 가지가 사람의 어깨를 긁어대려고 집요하게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울음에 전 사람의 목소리가 어둠 속을 텅텅 울렸다. 어둠과 바람과 울음에 섞인 사람의 음성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나를 죽여줘요, 제발.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사람으로부터 받은 전보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너는 나를 몹시 사랑하니,라고 사람이 물었다. 사랑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데다가 몹시라는 수식어까지 달려 있어 몹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마터면 사랑이 뭔가요,라고 물을 뻔했다. 사람의 얼굴이 몹시 간절하고 몹시 애처로워 보여서 나는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니요, 나는 당신을 몹시 사랑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면 당장이라도 자신의 목을 조르거나 나의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나를 몹시 사랑한다면 내가 원하는 대로 따라주렴. 사람의 말에 따라 나는 마당 뒤편에 있는 편백나무 앞으로 갔다. 점프를 해서 편백나무 가지를 잡았다. 편백나무 가지를 잡고 눈을 감았다. 사람이 그만 내려오라고 말할 때까지 매달려 있기로 했다. 처음에는 사람을 몹시 사랑한다고 말한 죄로 벌을 받는 거라고 생각했으나 시간이 지나자 애초에 나란 사람은 편백나무에 매달린 기이한 열매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기로 했다. 손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아프고 겨드랑이살이 찢어질 것처럼 땅겨왔지만 참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항문을 통해 푹 삶아 으깨진 감자 같은 배설물이 쏟아져나오고 그것이 바짝 마를 동안까지 편백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어둠과 바람의 농도와 빛깔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내 육체는 이대로 썩어문드러져 고약한 냄새를 풍기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간간이 뭔가가 부서지거나 듣기 거북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어느 순간 편백나무 가지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투두둑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나는 바닥에 추락해 그대로 널브러졌다. 손바닥에는 붉고 푸른 멍들이 가득했다. 자신의 상처는 오로지 자신만이 치유할 수 있다고 믿게 된 짐승처럼 나는 내 손바닥을 핥았다. 결코 편백나무 가지를 놓지 않았는데 놓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사람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제야 사람을 몹시 사랑한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내가 사람을 몹시 사랑하는구나,라고 알았을 때 사람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방에는 베이지색 체크무늬 가방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가방을 열어보았다. 너덜너덜한 단어사전이 한권 들어 있었다. 누구의 것이었을까. 사람은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어쩌면 등산양말의 주인이 읽던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맞기를 갈망하며 첫장을 펼쳤다.

마당의 평상에 앉아 단어사전을 읽기 시작했다. 등산양말을 신을 수 있는 서른살쯤이면 단어사전을 완독할 수 있을 거라는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매일매일 그것을 읽고 이해하려 애썼다. 계속해서 읽을 수 없었다. 특정 단어를 읽게 되면 그 단어의 풀이가 이해되지 않아 풀이에 나온 단어를 다시 찾아야 했고, 다시금 단어의 풀이에 나오는 또다른 단어를 찾아 사전을 뒤적거려야 했다. 단어사전의 뒤로 갔다가 앞으로 갔다가 아래로 갔다가 옆으로 갔다가 위로 갔다가 하면서 세월을 탕진했다. 확고부동한 고정된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무의미한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가. 세계는 언어로 된 구성물이고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단어사전을 완독하는 것과 같다는 누구나 떠올릴 만한 하찮은 명제를 얻은 나는 단어사전 읽기를 포기했다. 단어사전에서 내가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는 죽음,이라는 단어뿐이었다. 단어사전에는 죽음의 뜻이 없었다. 죽음의 풀이는 누군가에 의해 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죽음은 오로지 죽음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인가. 세계로부터 버림받은 참담한 기분에 휩싸인 나는 베이지색 체크무늬 가방에 이제 더이상 읽을 필요가 없는 단어사전을 넣고 떠나기로 결심했다. 어쩌면 등산양말의 주인도 단어사전 완독에 실패하여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자 발바닥으로부터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몸 안에 충만한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어 편백나무숲으로 나는 떠났다. 내가 돌아왔을 때 나는 서른살이 되어 있을 것이다.

기억을 하고 나서도 나는 내가 왜 나를 죽여야만 했는지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한다. 애초에 대답을 원했던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나를 죽여야만 하는 참을 수 없는 충동을 지연시키기 위해 기억을 필요로 한 것일 뿐. 기억에 대해 기억하기 위해 특정하고 명료한 사건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인지도. 오로지 기억이 무엇인가를 밝혀내기 위하여.

기억의 꼬리를 잘라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기억이 자신의 꼬리를 자르지 않는다면 내가 잘라야 마땅하지 않은가. 내가 기억한 것은 내가 결코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이다. 기억은 몇개의 단어로 조작해낸 위태로운 구성물이다. 기억은 언어의 트릭과 뉘앙스에 불과하다,라고 나를 설득시켜야만 한다. 속지 마라. 기억에 의존해서는 안된다. 나는 그렇게 나약한 인간이 아니다.

나는 지금 아동용 침대에 누워 있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등산양말을 신고 있는 나의 다리는 침대 밖으로 나와 있다. 내 다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더이상 허공에 물장구를 칠 힘이 남아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 방 한구석에 놓인 가방은 베이지색 체크무늬다. 가방에는 이제 단어사전이 들어 있지 않아야 한다. 어둠 속에서 편백나무가 아무도 몰래 자신의 썩은 가지를 스스로 부러뜨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편백나무는 편백나무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할수록 생각은 점점 명료해지고 확고해진다. 어둠 속에서 편백나무가 결코 될 수 없는 나무가 아무도 몰래 자신의 썩은 가지를 스스로 부러뜨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가 됐다.

그래서 나는 서른살이었던가.

서른살이었다. 나는 나 자신을 죽였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은 없었다. 죽음 직전까지 나를 내몰고 싶었다. 그래서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나를 죽여줘요, 제발,이라는 말을 나로부터 듣고 싶었다. 죽음 직전까지 나를 내모는 방법을 떠올렸다. 나를 절벽의 끝에 몰아놓고 서서히 밀어버렸다. 두 다리가 떨어져나갈 때까지 도끼로 찍어댔다. 맨발로 암벽을 등반하면서 끊임없이 미끄러졌다. 겨드랑이가 찢어질 때까지 편백나무 가지에 나를 매달아놓았다. 단어사전의 인디언지(紙)를 한장씩 찢어 숨이 막힐 때까지 입속에 처넣었다.

내가 또다시 나를 죽이기 전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반복하자.

서른살 나는 나 자신을 죽였다. 죽어 있는 나를 바라보면서 왜 도무지 당신은 변하지 않는 거지요,라고 묻고 싶었다. 그때는 정말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결코 기억에 의존하는 인간이 아니다. 여전히 나는 인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쩌면 올해 나는 서른○살이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