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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19세기 영국의 ‘과학 지식인’과 과학자
폴 화이트 『토머스 헉슬리: 과학 지식인의 탄생』, 사이언스북스 2006
김재영 金載榮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 zyghim@snu.ac.kr
우리 시대의 과학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그리고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1860년 6월 30일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의 모임은 한해 전에 찰스 다윈과 앨프리드 러쎌 월리스(Alfred R. Wallace)가 발표하여 논란이 된 새 이론을 놓고 논쟁을 벌이며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론 발표 후 처음 있었던 논쟁이었는데, 이 모임에서 다윈의 진화론 지지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Thomas H. Huxley)와 옥스퍼드의 주교 쌔뮤얼 윌버포스(Samuel Wilberforce)가 격돌했다. 기조발표가 끝나자 주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만에 가득 찬 조소를 머금고 헉슬리에게 물었다. “선생이 원숭이에게서 물려받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선생의 조부를 통해서인가요, 조모를 통해서인가요?” 헉슬리는 일부러 느릿느릿 일어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는 원숭이를 조상으로 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모호하게 만드는 데 자신의 탁월한 재능을 이용하는 사람과 제가 생물학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얼마 전 타계한 고생물학자 스티븐 굴드(Stephen Gould)는 이 사건을 “진화론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라고 칭했는데, 그 덕분에 헉슬리는 ‘다윈의 불도그’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 사건은 과학과 종교가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흔히 언급된다.
『토마스 헉슬리: 과학 지식인의 탄생』(THOMAS HUXLEY: Making The “Man of Science”)의 저자 폴 화이트(Paul White)는 이러한 견해와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헉슬리와 윌버포스의 대결이 과학과 종교의 충돌이라기보다는 18세기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er)와 19세기 과학 지식인(man of science) 사이의 매너와 가치의 충돌 문제라고 본다(제2장). 자연철학자들은 복잡한 후원체계 속에서 혜택을 누리면서도 과학이나 새로운 지식에 대해 전문적인 이해를 갖추지 못한 채 사변적 논의를 전개하는 데 치중하는 반면, 과학 지식인은 자연지식의 특정 분야에서 전문가적 권위를 확보하는 데 더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 지식인은 20세기의 과학자(scientist)와도 다르다. 헉슬리에 따르면, 과학자는 “오로지 효용성에 의해 지배되는 미국 같은 나라에서나 그 값을 인정받”지만, 헉슬리 자신과 그가 속한 집단의 사람들은 “폭넓은 지식과 도덕적 무게를 지니며 일상의 제반 관심사들에 대해 의견을 표명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11면). 이것이 헉슬리가 말하는 19세기 영국의 ‘과학 지식인’이다. 물론 ‘과학자’라는 말 자체는 1830년대에 케임브리지대학 학장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이 처음 만들어낸 것이지만, 헉슬리로 대표되는 과학 지식인들은 ‘과학자’라는 인간형, 즉 “실험실을 기반으로 하는 전문 분야의 권위로 무장하고 문예활동과는 대척점을 이루면서 사회로부터 초연할 뿐 아니라 ‘가치’ 영역으로부터 ‘사실들’을 분리해내는 활동으로부터 그 권위가 흘러나오는”(17면) 새로운 인간형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 책은 언뜻 보면 19세기 영국 빅토리아기에 활동했던 헉슬리라는 한 해양동물학자의 전기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과학과 가정, 과학과 교육개혁, 과학과 문학, 과학과 종교, 과학과 사회 등의 복잡한 주제들이 19세기 영국이라는 무대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해갔는지 생동감있게 그려져 있다. 오늘날에는 잘 훈련된 전문인으로서 연구를 통해 수입을 보장받는 과학자의 위치를 당연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자’의 정체성은 19세기 들어 전문직업화 과정에서 막 만들어지는 중이었고, 헉슬리라는 인물은 그러한 과도기적 변화상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이다.
헉슬리가 5년 동안 군함 래틀스네이크를 타고 남반구를 다니며 약혼자 헨리에타 히손(Henrietta Heathorn)과 주고받은 편지에는 낭만적이고 이상주의적인 자연의 탐구자라는 이미지와, 후원자 없이 당장 생계를 위해 직업을 구해야 하는 젊은 동물학자의 모습이 대조되어 나타난다(제1장). “추상적인 진리의 위대한 영혼과 하나가 되는 듯한 감각”(50면)을 추구하기보다는 금전적 보상이나 가족을 부양하는 일에 더 매진해야 했던 헉슬리의 갈등은 “가정이라는 여성의 영역을 과학행위라는 남성적인 공적 영역에서의 투쟁을 위한 성스러운 기지”(358면)로 만들어감으로써 해소된다.
비록 윌버포스와는 격돌했지만 헉슬리는 반종교적인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종교개혁가에 더 가까웠다. 오랜 친구였던 성공회 사제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와 나눈 서한에서는 성서가 도덕교육에 중요하며 이를 역사적인 문서로 보아야 한다는 헉슬리의 생각이 분명히 나타난다(제4장). 그렇기 때문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이끌던 구세군의 종교에 대한 맹목적인 광신 같은 것들은 헉슬리의 신랄한 비판(제5장)을 피할 수 없었다. 어떤 이는 “실천가이며 사회문제에 대한 전문가”인 부스의 계획이 단지 “이론가, 과학자, 말의 유희를 즐기는 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의 승인을 왜 필요로 하는지(274면) 의심하기도 했지만, 헉슬리의 생각은 확고했다.
저자가 보여주는 헉슬리의 또다른 면모는 문학 지식인 내지 작가의 모습이다(제3장). 그는 과학지식과 관련된 저서들에 대해 비판적인 서평을 썼으며, 매슈 아놀드(Matthew Arnold) 같은 문학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다. 그들은 과학과 문학의 교육이 교육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역설했다. 1932년 출판된 『멋진 신세계』의 저자가 바로 토머스 헉슬리의 손자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최근 과학계에서 세계의 이목을 모은 줄기세포 조작사건은 헉슬리가 추구하던 ‘과학 지식인’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좋은 사례다. 한국사회에서 과학자의 이미지는 바로 헉슬리가 말한 ‘과학 지식인’이다. 많은 사람들은 과학자가 자신의 이권을 위해 과학적 진리마저 거스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작금의 과학자들은 더이상 ‘과학 지식인’의 자리에 서고 싶어하지 않는다. 예전에 ‘이공계 위기’라는 말이 세간에 나돌았을 때, 어떤 이들은 이를 과학기술자들이 가지는 계층적 권력의 변화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이공계 위기의 핵심은 ‘과학 지식인’의 역할을 포기하기 시작한 ‘과학자’의 자기 재규정에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