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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민 영 閔 暎
1934년 강원도 철원 출생. 195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斷章』 『냉이를 캐며』 『엉겅퀴꽃』 『바람 부는 날』 『流沙를 바라보며』 『해지기 전의 사랑』 등이 있음.
열풍 속에서
이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은 한때
내 굳어버린 정신의 암반 위에
뜨거운 용암을 쏟아부었다.
저 남녘땅 이름 모르는 과수원에서
가슴에 총알 맞고 쓰러진
애젊은 전사의 비장한 모습도 보여주었고,
난파선 옆 모래펄에서 그물을 깁는
늙은 아비의 기다림에 지친 모습도 보여주었다.
석유불 가물거리는 부엌에서는
허리 굽은 어미가 그나마 살아남은
식구들을 위해 저녁밥을 짓고 있었고,
고향을 등지고 떠난 막내아들은
태백산 탄광의 후미진 막장에서
탄 아닌 목숨을 캐고 있었다.
모두가 외롭고 가난한 풍경이지만
아, 그래도 그때만은 아직
죽지 않고 새 하늘을 바라보려는
강철 같은 의지와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도시의 구역질나는 하수구에서
살을 녹이는 칼바람을 맞으며
노동을 하고 있는 나에게는
아무런 소망과 의욕도 없다.
하루의 고된 일을 마치고 돌아와 누운
한평짜리 쪽방의 밤은 쓸쓸하기만 하고,
잔재주 부리며 배부른 자들이 벌이는
난장판 축제와 아귀다투는 장면이
내 잠을 악몽처럼 어지럽히고 있다.
저 건너 막다른 골목 안 집에서는
카드빚에 쫓긴 중년의 가장이
처자식을 죽이고 불 질렀다는
끔찍한 소문도 들려오고 있건만,
오늘도 강 건너 고급 요정에서는
프랑스 산 늙은 양주와 곰 발바닥
바닷가재 요리가 잘 팔린다고 한다.
신령님(저는 당신의 이름을
이렇게밖에 부를 수 없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증오의 죄와
살생의 업을 짓지 않고 살아가려는
중생이 어찌하여 저 미쳐버린
광란의 열풍 속에서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까?
마음속에 깃든 죄의 유혹을
당신이 손에 든 석장의 위력으로
멀리 물리쳐 보낸다는 나의 신령님,
미망의 피연못 속에서 흐느껴 우는
이 몸을 일으켜 세워주시고
진흙탕 속에서 피어오른
연화세계로 이끌어주십시오.
외침
철야작업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붉은 신호등이 켜진 건널목에서
싸늘한 새벽바람에 몸을 떨며 서 있을 때
어디선가 벼락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같이살자는데왜이렇게힘이드냐!
―다같이살자는데왜이렇게힘이드냐!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린 줄 몰랐다.
그 소리의 주인이 누구인 줄도 몰랐고
수없이 반복되는 외침에 귀가 아팠다.
그러다가 한참 뒤에
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고
횡단보도가 눈앞에 열렸을 때
내 곁을 바람같이 스치고 지나가는 그를 보았다.
아래위에 검은 운동복을 입고
뒤통수가 벗겨진 겉늙은 사내,
맨발에 슬리퍼, 휘청거리는 몸동작.
그가 누구일까?
나는 일찍이 그를 본 적 없고
나 사는 동네의 주민도 아니다.
이 새벽에 날 도와주려고 찾아온
귀한 손님은 더더욱 아니다.
그가 누구일까? ……나는 모른다.
다만 조금 전에 그가 달려간
건널목 이편에 서서 내가,
그가 던지고 간 이 시대의 화두를
앵무새처럼 되뇌고 있을 뿐이었다.
―다 같이 살자는데 왜 이렇게 힘이 드냐!
―다 같이 살자는데 왜 이렇게 힘이 드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