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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정신현상학』 200주년의 헤겔

테리 핀카드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 이제이북스 2006

 

 

이종구 李鐘求

전 언론인, 한국헤겔학회 회원

 

 

135-329

2007년은 헤겔의 『정신현상학』 출간 200주년이 되는 해다. 원고가 완성된 것은 출간 전해인 1806년 10월 나뽈레옹이 예나 전투에서 승리하기 바로 전날 밤이었다. 이날 헤겔은 예나 시내를 지나가는 나뽈레옹을 창밖으로 내다보면서 ‘세계의 영혼’(Weltseele)이라고 지칭했다. 비슷한 시기인 1807~8년 사이에 베를린에서 피히테(J.G. Fichte)는 14회에 걸쳐 ‘독일민족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을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피히테는 문화주의나 역사주의, 더구나 인종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그의 ‘독일민족의 선택’이라는 표현은 종교개혁과 자꼬뱅주의를 결합하는 심원하게 보편주의적인 것이었고 ‘원민족’(Urvolk)은 주체의 활동성이라는 혁명적 이상의 순수한 표현이었다. 부르주아(시민)의 정체성은 피히테나 헤겔은 물론 당대 개혁적 지식인 모두가 확립하고 다져나가야 할 과제였다. 전대호 태경섭 공역의 우리말본으로 1088면에 달하는 『헤겔, 영원한 철학의 거장』(Hegel, 이하 『헤겔』)은 200년전 서구지성의 사회사 내지 이념의 발생사(계보학)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준다는 점만으로도 추천받을 만하다.

후기를 포함한 16개 장의 『헤겔』은 5장(정신현상학), 8장(논리학), 11장(법철학), 14장(미학 종교철학 역사철학 등)을 중심에 놓고 무수한 일화들로 얼개지어 이러한 면모를 생생하게 한다. 두가지만 소개해보자.

일화 1   베를린대학에서 헤겔에게 미학강의를 듣고 있었던 작곡가 멘델스존은 1829년 3월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두번 공연해서 크게 성공했다. 두번째 공연이 끝난 뒤 베를린 유명인사들의 축하만찬에서 헤겔은 자신과 멘델스존 사이에 자리잡은 출연가수의 부인 테레제 데프린트(Therese Devrient)를 끊임없이 지분댔다. 테레제가 멘델스존에게 “내 옆에 있는 이 얼간이가 누구냐”고 물었다. 멘델스존은 잠시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며 “당신 옆에 앉은 얼간이는 그 유명한 철학자 헤겔이오”라고 소근댔다.(796~97면) 7개월 뒤 헤겔은 베를린대학 총장에 취임한다.

일화 2   1821~23년에 베를린대학 학생이었던 낭만주의 시인 하이네(H. Heine)는 “당시 헤겔을 비굴한 자로 생각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고 뒷날 회상했다. 하이네가 이성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동일시하는 『법철학』 서문의 유명한 문장에 불만을 토로하자 헤겔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그 말은 또한 이성적인 모든 것은 존재해야 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다”고 대꾸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헤겔은 “황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두사람의 대화를 들은 유일한 사람이 좀 멍청한 휘스트 카드게임 친구들 중 하나였음을 알고 헤겔은 평온함을 되찾았다.(635면)

당시의 베를린, 프로이쎈에서 진행되고 있던 억압은 거의 모든 개혁주의자들을 공직에서 몰아냈다. 헤겔이 죽은 지 12년 뒤 오랫동안 정신병에 시달리던 횔덜린(F. Hölderlin)은 헤겔이 어떤 사람이었느냐는 문인 크리스토프 슈밥(Christoph T. Schwab)의 물음에 “절대자”라고 답변했지만, 일화 1은 이 절대자가 지극히 보통 사람이었다는 것을, 일화 2는 그 보통 사람이 어떠한 고난 속에서 당대의 근대성을 형태화했는가를 일별하게 한다. 사실 헤겔은 나뽈레옹이 집권하게 되는 1799년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이후 “우리는 혁명의 소설을 완성했다. 이제는 혁명의 역사를 시작해야 한다”는 프랑스 국민회의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한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의 실천 내지 정치가 부분적으로 이룬 것을 사상으로 완성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는 분명 헤겔 사유의 보수적인 측면이다. 아니 보수적이라기보다는 프랑스혁명의 이념을 현실에서 폭력에 의해 추상적으로 반복하게 하지 않고 법으로, 교양·문화로 구체화(육화)해야 한다는 것이 헤겔의 믿음이었다. 그의 말년에 해당하는 1830년에도 영국 개혁입법과 프랑스 7월혁명에 대해 반대입장을 표명하는 등 헤겔은 이 믿음을 일관되게 유지했다.

근대정신인 계몽은 결단과 용기의 결핍으로 인해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미성숙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칸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근대라는 용어는 시대마다 새롭게 형태화하는 내용과 시대 구획과 관련해서 그것을 반성한 내용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후자의 입장에서 보면 근대는 당대의 역사성을 이루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의 당파성,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다. 알뛰쎄르(L. Althusser)가 헤겔 철학을 훌륭한 이데올로기론으로 간주하고 칸트가 변증법을 가상의 논리라고 보는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라고 말할 수 있다. 발리바르(E. Balibar)의 ‘자유의 당파’나 데리다(J. Derrida)의 ‘정의의 당파’도 헤겔적 의미의 현실에서는 ‘자유 또는 정의란 이름’의 당파성을 함의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들뢰즈(G. Deleuze)의 ‘의미-문제적인 것’ 역시 그것이 명제화, 즉 언어화할 때 공리계(합리화-억압)의 정립-고정화라는 문제를 지니게 된다.

200년 전 헤겔의 동시대인들에게는 부르주아의 정체성이 정의와 자유였지만 그가 『법철학』 보유(補遺)에서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지나쳐버린 천민(Pöbel)으로서의 우리 시대 대중의 눈에는 그것이 당파성이고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다. (쁘똘레마이우스가 천체운동의 여러 가설 중 천동설을 택한 것이 지구가 회전할 때 물체가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는 이유를 당시로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해관계가 착종하는 사회이론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요즘 포퓰리즘을 둘러싼 논쟁의 밑바닥에 깊숙이 깔린 것도 바로 이 문제일 것이고,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이데올로기를 ‘숭고한 대상’으로 지칭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정의-당파성 내지 이데올로기-당파성의 이중적 의미나 현실에서의 보편성 또는 합리성이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헤겔은 분명하게 꿰뚫고 있었다. “보편정신 또는 세계정신은 신과 같은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타나 있는 정신의 합리성이다. 보편정신의 운동은 자신의 본질을, 바꿔 말하자면 자신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운동이다.”(『역사에서의 이성』) 그래서 그의 말대로 (자신의 철학을 포함한) 그 어떤 철학이라도 그 시대의 철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 테리 핀카드(Terry Pinkard)는 의식(Bewußtsein)이라는 전통적 용어를 ‘마음가짐’(mindedness)으로,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을 ‘같은 마음가짐’(likemindedness)으로 그리고 정신을 ‘마음가짐-같은 마음가짐’, 즉 ‘나〓우리’(Ich-Wir)로 해석해서 상호주관성에 입각한 그 나름의 근대성(현대성)을 드러낸다. 의식철학의 입장에서도 법, 관습, 교육, 문화, 국가 등이 이렇게 간단히 표현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이 해석에 따른다면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바깥의 괴물을 이겨내는 일과 내 마음속 괴물의 퇴치”(백낙청 프레시안 강연 「한반도식 통일과 북의 핵실험」)는 동일한 것의 양면일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화한 이데올로기 또는 이데올로기장치는 안팎에 똑같이 포진하기 때문이다. 또한 근대 개념의 양면성으로 보면 통일담론의 근대국가와 평화담론의 ‘시민국가’(박순성 「북핵실험 이후, 6·15시대 담론과 분단체제 변혁론」, 『창작과비평』 2006년 겨울호) 역시 대칭적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양면일 뿐이다.

청년기의 헤겔이 씨름했던 실정성 극복의 과제, 그리고 그의 『법철학』을 관통하고 있는 ‘실정성 없는 실정법’(추상법이 아닌 실천적인 실정법)이라는 과제는 이러한 이중적인 ‘의미-문제적인 것’이다. 그것은 ‘머리 없는 신체’(대중)가 스스로의 머리(주권)를 형태화하는, 아니 지금껏 지녀온 머리를 새롭게 그리고 힘겹게 스스로의 힘으로 다듬어내는 과정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폭력의 정치’라는 개념이 뜻하는 것일 터인데,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모든 권리·제도 등을 미시적으로 분해(계보학적으로 분석)해서 실천적으로 재구성(deconstruction)하려는 로베르뚜 웅거(R. Unger)의 새로운 법철학적인 시도는 주목해볼 만하다. 인식론을 지각학(Aisthetik)으로서의 미학 내지 감성론(Ästhetik)으로 대체하려는 게르노트 뵈메(G. Böhme), 볼프강 벨쉬(W. Welsch), 마르틴 젤(M. Seel) 등의 의식철학적 접근들(김윤상의 논문, 『독일문학』 100호) 역시 그러하다. 이는 근대를 극복하려는 탈근대의, 우리 시대의 근대를 새롭게 형태화하려는 실천적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50년대의 헝가리·체코사태, 문화혁명, 베트남전쟁, 68혁명 이후 서구 지성계가 겪어온 이러한 과정을 200년 전 프랑스혁명 이후의 과정과 유비적으로 가늠할 틈새공간을 열어주는 핀카드의 『헤겔』은 분명 좋은 책이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50년대 말, 60년대 초 헤겔을 가르치던 한 선생님은 “논리는 살아 있다”고 말하면서도 변증법이건 인식론이건 그것을 ‘논리’로만 가르쳤지 ‘살아 있음’에 대해서는 함구하셨다. 선생님의 이러한 ‘순수철학’은 그분이 70년대 중반 유신시대에 대통령특보를 지내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학생들에게는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그래서 내가 핀카드의 『헤겔』의 의미를 그토록 되짚어보게 되지 않나 자문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점은 요즘 선생과 학생의 관계에서도 크게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일화 하나를 더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1841년 베를린정부는 완전히 보수주의자가 된 헤겔의 옛 친구 셸링을 베를린대학에서 헤겔이 맡았던 교수직에 앉혔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대학에 퍼져 있는 헤겔 범신론의 사악한 씨앗을 없애’는 것이었다. 헤겔이 죽은 지 꼭 10년이 되는 바로 다음날인 그해 11월 15일 셸링은 베를린대학 취임연설을 했다. 청강하던 쇠렌 키르케고르, 미하일 바꾸닌,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연설 내용에 실망하고, 각기 자신의 방식으로 헤겔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면서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은 훗날 실존주의, 무정부주의, 맑스주의의 초기 대표자들이 되었다(85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