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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언희 金彦姬
1953년 경남 진주 출생.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트렁크』 『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뜻밖의 대답』이 있음. pitchblood@hanmail.net
정황 Q
가게 되면 앉게 되거든, 앉게 되면 먹게 되거든, 남김없이 먹어치우고 남김없이 게워놓아야 끝나거든, 밥상에
머리를 처박고서야 끝이 나거든, 벌어져야 하는 일은 벌어질 대로 벌어지거든, 내가 하는 짓을 벌건 대낮에
개가 하고 있거든, 모든 광경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이거든, 점점 살 곳이 없어지거든, 점점점 죽을 곳이 없어지거든, 뱃가죽과 낯가죽이
축축 늘어지기 시작하거든,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느낌이거든, 턱을 떨면서 다리까지 떨어야 하거든, 당신 말씀을
콧구멍으로 듣거든, 구멍이 웃기 시작하면 곤란하거든, 찌꺼기에게는 찌꺼기의 몫이 있거든, 헛소리만 하기에도
여생이 모자라거든, 이러다가 깨달을까봐, 이러다가 末日聖徒로 거듭날까봐 두려워지거든, 나의 은혜를 나만은
못 잊거든, 한날한시도 잊어서는 안되거든, 내 인생을 음담 아닌 다른 것으로 채울 순 없거든,
etc. 1
머리에 피가 안 도는 이유
입가에 프레파라손 연고를 바르는 이유
가위를 찾는데 애터지게 효자손이 나오는 이유
빤히 보면서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하는 이유
이 침대에서는 더이상 할 수가 없는 이유
싸이즈의 문제가 아닌 이유, 심지어는
根의 공식조차 모르는 이유, 이딴 게
뭐 하러 있는 이유
아무나 짓는 죄는 죄가 아닌 이유
택시를 타고도 갈 곳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
죽기 위해서건 살기 위해서건 하는 짓은 똑같은 이유
질문과 대답 사이에 몇십년이 지나가는 이유
뭐가 뭔지 모를 때까지 살아야 되는 이유
똥 누는 것도 열쇠가 있어야 하는 이유
히죽히죽 웃었는데도 복이
안 오는 이유, 하나같이
제 집 안방에서 客死하는 이유
죽은 어머니가 죽어라 쫓아오는 이유
외나무다리에서만 만나는 이유
사십년 동안 2학년인 이유
시가 내게 코를 푸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