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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나리오
조영수 曺姈秀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3. 1985년생. ddongnu198@hanmail.net
상처에 바르는 사랑
씨놉씨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남고생 연진과 여대생 성아에게는 남 모르는 상처가 있다. 연진은 아빠가 누군지 모르는 미혼모의 아들이고, 그나마 유일한 식구인 엄마에게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 성아의 상처는 부모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자식에게 엄청난 폭력이라고 믿는 성아. 늘 도망가려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붙잡으려는 아빠 사이에서 상처는 깊어만 간다.
성아의 스물한번째 생일, 성아의 아빠 병수는 성아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좋아하는 곰인형을 사가지고 귀가한다. 즐거운 날이지만 생일상 앞에서도 아빠 병수와 엄마 연희는 멀찍이 떨어져 앉아 성아만 바라본다. 둘이 대화를 나누거나 시선을 맞추는 일은 없다.
엄마 연희는 가장 친한 친구인 도희와 함께할 때는 늘 밝은 표정이다. 오랜 시간 단장을 하고 집을 나서는 연희의 뒤를 밟는 성아. 엄마가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고 믿는 성아는 연주회장 앞에서 도희와 만나는 연희를 보고 안심한다. 그리고 연주회장 앞에서 우연히 연진과 마주친다. 연진은 성아에게 왜 남의 엄마를 훔쳐보고 있느냐고 묻고, 성아는 저기 우리 엄마도 있다고 말한다.
연진은 수업이 없는 토요일에는 요리학원에 간다. 아줌마들이 곁에 몰려와 어린 남학생이 왜 요리를 배우냐고 호기심을 보인다. 연진은 도희와 둘이 살면서 엄마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거의 먹지 못했다. 그래서 요리를 배웠고 식사준비는 항상 연진의 몫이 되었다.
어느날 아침, 연희는 쪽지 한장을 성아에게 남기고 사라진다. 병수는 또다시 연희를 찾기 위해 나서고, 도희도 연락이 끊긴 연희를 백방으로 찾기 시작한다. 성아는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고 부리나케 달려간다. 연희의 급작스런 죽음을 확인하는 성아. 먼저 와 있던 도희는 병수도 중환자실에 있다고 말한다.
성아는 꿈을 꾼다. 언제나처럼 누군가와 도망치는 연희, 그들을 쫓아 달리는 병수의 모습이다. 꿈에서 깨어난 성아. 둘러보니 낯선 방이다. 밖으로 나가자 죽을 끓이고 있는 연진의 모습이 보인다. 연진은 성아의 앞에 죽을 놓아준다. 성아는 울음을 터뜨린다. 연진은 별말 없이 묵묵히 성아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세 사람의 동거가 시작된다. 그리고 도희를 사랑하는 경비원 지훈은 이런 세 사람을 늘 지켜봐준다.
고통과 외로움 속에 도희의 집에서 지내면서 겨우 회복해가는 성아는 여전히 기운이 없고 고통스러운 모습이다. 연진은 자신이 차려준 밥상 앞에서 축 처진 모습으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성아에게 불쑥 청혼한다. 그런 연진에게 성아는 자신은 여자를 사랑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3년 후, 연진과 성아는 친구 같은, 남매 같은, 연인 같은 부부가 되어 있다. 사랑해서 한 결혼이라기보다는 서로를 치유하기 위한 결혼이다. 그저 함께 밥이나 먹으며 위로하며 살기 위해서다. 연진은 원하던 대로 식품영양학과에 다니게 되었다. 성아는 유치원 선생님의 꿈을 버리고 경호원이 되고 싶은 마음에 경호학과를 목표로 태권도나 유도 같은 무술을 배우고 수능준비에 전념한다. 성아의 꿈을 위해 도희와 연진은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를 해준다. 한창 대학생활을 즐길 시기에 연진은 성아를 위해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함께 밥을 먹어준다. 성아는 병수를 자신의 아버지처럼 좋아하는 연진이 고맙다.
성아는 결혼과는 별개로 여자를 사랑하고자, 스스로 동성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만큼 자신의 엄마가 사랑했던 남자, 아빠 말고 다른 남자를 사랑했던 엄마를 증오하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 마음 먹은 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연진과 성아는 서로 의지하고 지탱해주며 살아간다. 연진은 성아가 만나는 여자들을 보면서 질투를 하고, 성아가 길에서 맞는 여자를 구해준다고 나섰다가 싸움에 휘말려 경찰서까지 가게 되는 것을 보며 화를 내기도 한다. 성아는 연진의 보살핌이 고맙지만 미안할 뿐이다. 사랑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려운 감정들을 가지고, 늘 그렇게 함께 밥을 먹고 서로를 찾고 상처를 보듬어주며 시간을 보낸다.
세 사람에게 가장 의지가 되는 사람은 도희가 사는 아파트의 경비원 지훈이다. 도희, 연진, 성아는 각자 힘들거나 고민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지훈을 찾는다. 그럴 때마다 지훈은 따뜻하게 이들을 감싸준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맨손으로 도희의 차를 깨끗하게 닦아주는 남자다. 세 사람 모두에게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성아는 무사히 입학시험을 치르고 경호학과 학생이 된다. 평화로운 하루하루가 흘러가다 어느날 병원에서 전화가 온다. 그나마 살아 있던 병수가 죽게 되자 성아는 또 한번 큰 상처를 받는다. 밥을 먹을 수도 웃을 수도 없어진 성아. 연진은 최선을 다해 성아를 보살펴준다. 연진의 관심 덕분에 성아는 예전보다 잘 버텨내고 연진을 위해 밝아지려고 애쓴다.
집안 청소를 시작하는 성아, 처음으로 도희의 방에 들어가본다. 기분 좋게 도희의 방을 청소하던 성아는 우연히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상자 속에는 도희와 연희의 옛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이나 편지, 일기장이 들어 있다. 미소를 지으며 일기를 읽어보던 성아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진다. 일기장에는 연희와 도희, 즉 엄마와 시어머니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때마침 방으로 들어온 도희는 상자를 열어본 성아의 모습에 놀란다. 성아는 도희를 뒤로하고 짐을 꾸려 집을 나선다.
성아는 여관에 방을 잡고 며칠 동안 앓는다. 성아가 떠난 것을 알게 된 연진은 큰 충격을 받는다. 연진은 여기저기 돌아다녀보지만 성아를 찾을 수 없어 절망한다. 얼마 후 사연을 알게 된 연진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에 누워만 있게 된다. 회복할 수 없이 큰 상처를 받은 성아는 겨우 몸을 추스르고 태권도장에서 유치부 가르치는 일을 맡기로 한다. 성아는 집을 나와서 거의 밥을 먹지 못한다. 무언가를 먹으려고 할 때마다 연진이 떠올라 먹을 수 없다. 물로 밥알을 삼켜보기도 하지만 다 게워낼 뿐이다. 연진 역시 밥을 먹지 못한다. 또 요리를 하지도 않는다. 도희네 집 부엌은 고요하고 쓸쓸해진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날 연진은 겨우 일어나 학교에 간다. 친구와 헤어져 걷던 중 교문 앞에서 풀썩 쓰러지고 마는 연진. 같은 시각, 성아도 유치부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쓰러진다. 성아와 연진은 각각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한다. 친구의 간호를 받으며 응급실에 누워 있는 성아. 친구를 등지고 누워 그동안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의 커튼이 확 젖혀지며 누워 있는 연진의 모습이 보인다. 둘은 마주 보고 웃는다.
다시 시간이 흘러, 행복한 얼굴로 봄나물을 무치고 있는 연진. 가족들을 부르자 살짝 배가 부른 성아가 나오고, 도희가 나온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지훈이 웃으며 나온다. 해맑게 웃으며 서로의 의자를 빼주는 가족들. 식탁 옆 벽에는 연희와 병수 부부의 사진이 액자에 걸려 있다.
* 지면사정으로 장편 씨나리오의 일부만 싣습니다. 전문은 대산문화재단 홈페이지(www.daesan.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편집자.
등장인물
윤성아(여) 21세. 유아교육과 학생. 긴 머리의 청순한 학생이었으나 계속되는 상처로 머리를 자르고 경호원이 되기 위해 다시 입시를 준비한다. 원래는 밝은 성격이었으나 부모를 잃고 난 후부터 점점 내성적이고 조용해진다. 윤병수, 김연희의 외동딸.
최연진(남) 19세. 식품영양학과를 지망하는 고등학생. 엉뚱하고 생각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속 깊고 배려심 많은 남자다. 애써 상처를 모르는 척하면서 살다보니 밝고 귀여운 성격이 되어버렸다. 편도희의 외아들.
윤병수(남) 46세. 성아의 아빠. 무역회사 중역. 평생 다른 곳을 보는 아내를 지켜내느라 무진 애를 쓰며 살아온 남자.
김연희(여) 44세. 성아의 엄마. 가정주부. 평생 남편 병수와 행복해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보이지 않는다. 늘 소녀 같은 이미지.
편도희(여) 44세. 연진의 엄마이자 연희의 친구. 미혼모로 연진을 키웠다. 항상 도도하고 차가워 보이는 이미지의 화려한 외모. 작은 까페 사장.
모지훈(남) 48세. 도희가 사는 아파트 경비원. 도희를 사랑하지만 묵묵히 바라보기만 한다.
#1 성아 집 부엌. 정오
햇살이 테이블 위를 가득 비추고 있다. 그 위에 하얀 밀가루 반죽, 달걀, 쿠키틀 등과 알록달록 예쁜 색깔 식기들이 있다. 성아와 연희의 웃음소리가 집 안을 메운다. 인상적인 성아의 새까만 긴 생머리. 성아는 테이블 의자에 쪼그려 앉아 있고 연희는 서 있다.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똑같은 티셔츠를 입은 성아와 연희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밀가루로 장난을 치는 모녀. 얼굴에 밀가루가 살짝 묻어 있는 성아. 쿠키틀로 밀가루 반죽을 정성스럽게 찍어낸다. 눈사람 모양, 별 모양, 하트 모양 등.
연희 곰 노래 불러줘.
성아 (입을 삐죽) 곰 노래라니. 제목 까먹었어? 배신! 배신! 이 윤성아가 재롱잔치에서 일등 먹은 명곡인데.
(성아, 옆 의자에 앉아 있는 커다란 하얀 곰인형을 쥐어박으며 못살게 군다. 심술부리는 성아를 보며 웃는 연희.)
연희 (미소) 뭐였지?
성아 맨입으로?
연희 청바지 사줄게.
(성아,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일어나 두 손을 모으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노래를 한다.)
성아 동그란 눈에 까만 작은 코 하얀 털옷을 입은 예쁜 아기곰
언제나 너를 바라보면서 작은 소망 얘기하지
너의 곁에 있으면 나는 행복해 어떤 비밀이라도 말할 수 있어
까만 작은 코에 입을 맞추면 수줍어
얼굴을 붉히는 예쁜 아기곰~
연희 (박수) 으아~ 내 딸 정말 너무너무 귀엽다.
성아 (앉으며) 이보셔요, 아줌마. 아줌마 딸 세상빛 본 지, 이십하고도 일년이 더 지났다구. 동요를 부르라고 시키기에는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머리가 너무 컸다고 생각하지 않으셩?
연희 (생긋) 까불지 마. 나한테 넌 평생 여섯살이야.
성아 엄마는 내가 그렇게 좋아?
연희 니가 날 좋아하는 게 좋아.
성아 누가 엄마 좋아한대? 왕비병. 메롱.
(성아, 짓궂게 웃으며 바지를 탁탁 털고 방으로 들어간다. 연희는 웃으며 쿠키를 오븐에 넣는다. 예쁜 쿠킹장갑과 안 익은 쿠키들의 모양이 앙증맞다. 잠시 후, 성아의 방문이 살짝 열리며 황토색 중간 크기의 곰인형이 등장.)
성아 (곰인형 뒤에 숨어 목소리만 들린다) 엄마야, 제목은 예쁜 아기 곰~
(곰인형의 배에는 반창고가 십자로 붙어 있다. 곰인형의 배에서부터 커지는 타이틀. ‘상처에 바르는 사랑’)
#2 선물가게. 저녁
예쁜 물건들이 가득한 아담한 선물가게. 주인(젊어 보이는 40대 여성) 혼자 앉아서 손뜨개질을 하고 있다. 잠시 후, 딸랑 하는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병수가 들어온다. 주인, 하던 것을 의자에 두고 일어나 웃으며 병수를 맞는다.
주인 (절망스러운 듯) 오늘도 오고야 말았군. 오고야 말았어. 혹시나 했는데. 으으으.
병수 (멋쩍게 웃으며) 기억하고 있었어?
주인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 도로 애기로 만들려고 그래? 벌써 나이가 몇살이야?
병수 (검지 치켜세우며) 이번에 하나. (뒷머리를 긁으며 웃는다.)
주인 그래서, 오늘도 저거?
(주인이 가리키는 곳에 예쁜 곰인형이 가득하다. 병수, 고개를 끄덕인다. 주인은 곰인형을 끌어내린다.)
주인 생일날도 곰, 입학할 때도 곰, 졸업할 때도 곰, 여자 된 날도 곰…… 니네 가족 우리 집 물건 떼어다가 곰인형 가게 하려고 그래?
병수 아빠 엄마 늙어서 하늘나라 가면 자기를 지켜줄 유일한 거래, 곰인형이.
주인 어유, 애다 애야.
병수 우리 딸이 좀 귀엽지.
주인 (피식 한번 웃는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색? 이제는 고를 색도 없을걸?
(병수, 곰인형 쪽을 죽 둘러본다. 분홍색 곰이 눈에 띈다. 환하게 웃는 병수.)
#3 성아 집. 저녁
(초인종 소리. 성아, 방에서 달려나와 인터폰을 확인한다. 인터폰 화면 가득, 분홍색 곰이 보인다. 분홍색 곰은 화면 속에서 귀엽게 춤을 추고 있다. 활짝 웃는 성아. 점프. 거실. 잘 차려진 한상. 중앙에 생크림 케이크, 과일, 쿠키 등. 성아는 분홍색 곰을 껴안고 있다.)
연희, 병수 사랑하는 우리 딸~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가 끝나자 성아는 촛불을 훅 불어 한번에 끈다. 눈을 감고 소원을 비는 성아. 연희와 병수는 가끔씩 서로 바라보며 눈치를 본다. 무표정. 성아, 눈을 뜬다.)
병수 딸, 무슨 소원 빌었어?
성아 (케이크 속 앵두를 빼 먹으며) 예상 안돼?
(연희, 병수 서로 눈치 보며 움찔한다.)
성아 (혼잣말) 사랑하라고.
(타들어가는 색색의 초.)
#4 성아 방. 밤
(곰인형들 속에 파묻혀 침대에 누워 있는 성아. 침대 주변은 물론 방 안이 온통 곰인형으로 가득하다.)
성아 (천장 보며) 일곰아, 내 소원이 이뤄질까? 칠곰이 넌 어떻게 생각해? (노래하듯) 오곰이는 새침떼기. 육곰이는 먹보. 구곰이는…… 자니?
(스르르 감기는 성아의 눈. 죽 둘러앉아 성아를 지켜주는 듯한 곰인형들.)
#5 연희, 병수 부부 방. 밤
(서로 등지고 누워 있는 연희와 병수. 둘 다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다.)
병수 벌써 이십이년째네. 당신, 참느라 고생이 많아.
연희 이제 참는 것도 몸에 밴 거죠.
병수 그렇게 차곡차곡 일년 일년 참다보면 우리 성아도 늙고 우리는 가고 당신, 그 사람도 가고 (잠시 뜸) 그러겠지. 그렇게만 삽시다. 욕심내지 말고.
(눈을 감는 연희. 깊은 한숨을 내쉰다.)
#6 연진 집. 아침
(탁탁탁, 도마 위의 당근, 양파 써는 소리. 프라이팬에 당근과 양파 등을 넣자 촤악 맛있는 소리가 난다. 무표정하지만 열심히 요리중인 연진. 두른 앞치마가 코믹하다. 안 어울리는 듯 어울리는 듯. 연진이 요리를 하는 도중 도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다. 부스스한 모습. 잠옷 차림이다.)
도희 (못마땅한 듯) 아침부터 남자애가 부엌에서 뭐 하는 거야?
연진 보면 몰라?
도희 너 설마 요리학원 아직도 나가니? 엄마가 분명 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너 고삼 아니야? 수험생이 그런 학원 나가도 돼?
연진 난 수험생이 아니라 그냥 열아홉이야. 커피, 지금 줘?
도희 응.
(도희, 안경을 끼고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신문을 집어들어 읽기 시작한다. 도희 방에서 휴대폰 소리가 들린다. 도희는 방 안으로 들어가 전화를 받는다.)
도희 여보세요? 연희니?
(도희, 깔깔대며 방문을 닫아버린다. 연진, 씁쓸한 웃음을 짓는다. 신경질적으로 야채를 썬다. 보글보글 끓는 찌개. 점프. 식탁에 혼자 앉아 열심히 밥을 먹는 연진.)
#7 연희 차 안. 아침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 피아노곡. 이어폰을 꽂고 통화하는 연희. 연희의 승용차는 천천히 아파트단지를 빠져나가고 있다.)
연희 응. 오늘 저녁 아홉시야. 야, 표 구하느라 애썼다, 나. 착하지? 어, 이따 보자.
(방실거리며 웃는 연희. 병수와 있을 때만 빼고는 표정이 밝다. 연희의 차창 너머, 버스 정류장에 병수가 서 있다. 병수는 연희의 승용차를 보고 있지만 연희는 알아차리지 못한다.)
#8 고등학교. 낮
(쉬는 시간. 아이들은 저마다 끼리끼리 어울려 놀고 있다. 연진은 자리에 앉아 혼자 사탕과 초콜릿 등을 먹으며 무언가를 적고 있다. 아주 천천히 음미하며 먹는다. 뒷문으로 친구 현기가 들어와 연진의 앞에 앉는다.)
현기 (연진의 것을 빼앗아 먹으며) 새끼, 치사하게 숨어서 혼자 먹냐?
연진 미친놈. 내 자리에 앉아서 먹는 것도 숨어서 먹는 거냐? 무개념. (개의치 않고 계속 음미하며 먹는다.)
현기 (사탕 만지작거리며) 이런 거 하면 얼마나 받아?
연진 병아리 오줌만큼 받아.
현기 근데 이딴 걸 왜 하냐?
연진 돈 벌려고 하는 거 아냐.
현기 그럼?
(연진, 대꾸하지 않고 먹는 데 열중한다. 현기도 말없이 사탕을 집어먹는다.)
연진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에이씨!
현기 (깜짝 놀라서 움찔하며) 야, 나 하나밖에 안 먹었어. 뱉을까?
연진 기분 나빠. 이딴 걸 왜 만드는 거야. 이런 걸 누가 돈 주고 사먹냐고!
(현기, 당황한 표정으로 연진을 바라본다.)
현기 달달하니 맛있는데 왜 신경질이야?
연진 맛이 너무 유치해. 정말 유치한 맛이야. (투덜대며 교실을 나가면서) 유치 절정. 유치뽕맛.
(멍한 표정의 현기.)
#9 지하철 안. 오후
(사탕 모양 바탕의 십자수. 지하철 안은 오후 햇살로 환하다. 성아, 자리에 앉아 십자수에 열중하고 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할머니 한분이 타자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는 성아. 십자수 재료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진다. 정신없이 주저앉아 십자수 재료들을 챙기는 성아. 멀리 서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던 연진, 고개를 아래로 숙여 뭔가를 본다.)
연진 곰이다! 도시 한복판에 곰이 나타나다니.
(방어자세를 취하는 연진. 바보 같다. 연진이 본 것은 치마 속 성아의 팬티. 분홍색에 곰이 그려져 있다.)
#10 성아 집. 오후
(철컥 현관문이 열리고 성아가 집 안으로 들어온다. 성아는 자기 방에 들어가기 전에 부엌과 연희 방을 살핀다. 아무도 없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는 연희.)
연희 왔어?
성아 (어리광) 엄마!
(성아는 엄마의 품에 안긴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연희의 향기를 맡는 성아. 성아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주는 연희.)
성아 근데, 엄마 어디 나가?
연희 응. 친구 만나러.
성아 친구 누구?
연희 있어, 친구. 좋은 친구.
성아 엄마한테 친구가 어딨어! 엄마 왕따잖아. 피.
(연희, 성아에게서 떨어져 방으로 들어간다. 멍하니 서 있는 성아, 연희의 방문을 빠끔 열어 연희를 바라본다.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하는 연희.)
성아 (한참을 보고 있다) 엄마 화장하니까 너무 못생겼다. 찌질이 삐에로 같아. 메롱.
(문을 쾅 닫고 나가버리는 성아. 피식 웃는 연희.)
#11 성아 방. 오후
(곰인형 사이에 고개를 묻고 엎드려 누워 있는 성아. 옷도 벗지 않고 가방도 내려놓지 않은 상태다. 발버둥치며 짜증을 부리다가 벌떡 일어나 옷장에서 다른 옷을 꺼내 입는다. 서랍에서 썬글라스를 꺼내 쓴다.)
성아 (주먹 불끈) 잡히면 가만 안 두겠어!
연희 (목소리) 엄마 갔다 올게, 알아서 밥 먹어.
(성아, 문에 귀를 대고 밖의 소리를 듣는다. 철컥. 문 닫히는 소리. 문 잠그는 소리. 엘리베이터 도착하는 소리. 연희의 구둣발 소리. 엘리베이터 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 조용. 성아, 재빨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Ins. 계단으로 뛰어 내려가는 성아의 모습.)
#12 거리/택시 안. 저녁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저녁. 성아, 도로변에 택시를 세워둔 채 두리번거리고 있다.)
기사 (짜증) 에이,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예요?
성아 아, 아저씨 잠깐만요.
(이때 옆으로 연희의 차가 지나간다. 재빨리 택시에 오르는 성아.)
성아 (버럭) 아저씨! 저거예요! 하얀 거. 빨리!
(기사, 성아의 고함에 깜짝 놀라 가속페달을 밟는다.)
#13 연진 집. 저녁
(달달 볶이는 노란 은행알. 연진은 앞치마를 두르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서 하트 모양 프라이팬에 은행을 볶고 있다. 이쑤시개로 콕 찍어서 먹는 연진. 방에서 화려하게 치장한 도희가 나온다.)
도희 고추 떨어진다니까.
연진 걱정 마. 잘 붙어 있으니까.
도희 너는 맨날 그렇게 노친네 같은 간식만 해먹냐.
연진 인스턴트 음식은 정신건강에 해로워. 정자 수도 줄어든대.
도희 하여간 몸은 엄청 챙겨요.
연진 아프면 아픈 사람만 손해야. 누구 하나 대신 아파주는 줄 알아?
(고개를 끄덕이는 연진. 도희는 그런 연진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도희 (부엌에 걸린 거울을 보며) 니 아빠 얘기 하긴 정말 싫은데 한가지만 알려주자면, 넌 니 아빠 뒷모습을 많이 닮았어.
연진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얘기를 입 아프시게. 다 저녁에 어디 가?
도희 친구 만나러.
연진 그 친구가 중년의 신사이길 바라며. 씨유 쑨.
(도희, 피식 웃으며 신발장에서 빨간 하이힐을 꺼낸다. 접시에 은행알을 담아 가지고 나와 집어먹으며 도희의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연진.)
연진 (거실 소파에 앉으며) 나이를 생각하셔야지.
도희 재수탱이.
(도희, 문을 쾅 닫고 나간다. 연진, TV를 보는 척하다가 프라이팬을 내려놓고 방에서 점퍼를 가지고 나온다.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연진. 딸깍. 문 잠기는 소리.)
#14 아파트 앞. 저녁
(지훈은 경비실에서 라면을 먹다가 도희가 나오자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온다.)
지훈 다 저녁에 외출하시네요?
(도희, 미소 짓는다. 얼굴이 붉어지는 지훈.)
도희 (자신의 빨간 승용차를 가리키며) 오늘도 저 몰래 닦으셨어요?
지훈 차가 혼자 찜질방 다녀오더니, 말끔해졌더라구요.
(지훈, 손사래를 치며 웃는다. 도희도 밝게 웃어 보인다. 경비실 옆에 세워둔 승용차에 오르는 도희.)
지훈 (꾸벅) 다녀오세요.
(시동을 걸고 서서히 출발한다. 도희의 승용차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고 출발하는 분홍색 스쿠터. 연진, 분홍색 헬멧을 쓰고 있다. 지훈은 다시 경비실 안으로 들어간다.)
#15 거리. 저녁
신나게 거리를 달리는 도희의 빨간 승용차. 그뒤로 연진이 탄 분홍색 스쿠터가 보인다. 어두운 밤, 어두운 톤의 차들 사이에 점을 찍어놓은 것같이 튀는 분홍 스쿠터.
#16 차 안. 저녁
(이어폰을 꽂고 통화중인 도희. 라디오에서는 경쾌한 느낌의 피아노곡이 흘러나온다.)
도희 오분 후면 상봉이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밥 사기. 좋지?
(싱글벙글 웃는 도희. 뒷거울로 보이는 연진의 분홍색 스쿠터.)
#17 예술의전당 주차장. 저녁
(연희의 하얀 승용차 옆에 바짝 붙여 주차하는 도희. 각자 자신의 승용차 운전석에 앉아 서로 마주보며 웃는다.)
도희 (입 모양) 밥 사!
(연희는 표 두장을 흔들어 보인다. 도희, 웃는다. 성아는 연희의 차 뒤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그러다가 도희의 차 뒤쪽으로 옮겨가 그 안에 탄 사람이 누군지 들여다보려고 애쓴다. 두 차에서 연희와 도희가 내리자 놀라서 몸을 웅크린다. 멀리서 스쿠터를 세워놓고 이 모습을 지켜보던 연진이 성아 쪽으로 다가간다. 연희와 도희는 계단을 올라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연진은 뚜벅뚜벅 걸어서 성아에게 간다.)
연진 (성아를 건드리며) 야! 너 뭐야? 뭔데 남의 차 안을 훔쳐봐? 니가 조선 여형사 다모야?
성아 (일어나며 다리가 저린지 코에 침을 묻히며) 아우, 다리야. 넌 뭐야? 남이사 차 안을 훔쳐보든, 화장실을 훔쳐보든. 뭔 상관?
연진 (약간 반가운 듯) 어? 곰이네?
성아 뭐?
#18 놀이터. 밤
(그네에 앉아 바나나우유에 빨대를 꽂아 마시고 있는 성아와 연진. 분홍색 스쿠터는 미끄럼틀 옆에 세워져 있다.)
성아 그래서, 빨간 아줌마가 니네 엄마라고?
연진 하얀 아줌마는 니네 엄마고?
성아 엄마를 왜 따라나왔어? 마마보이야?
연진 그럼 넌 왜 니네 엄마 못 믿고 미행하고 그러냐? 중년의 신사가 아니라 아줌마라 난 좀 실망했어. 어우 실망.
성아 (싱긋) 난 중년의 신사가 아니고 아줌마라 너무 다행이야. 그동안의 체증이 싹 내려가는 것 같다.
(정적. 바나나우유만 빨아먹는 이들. 성아, 그네에서 일어나 스쿠터 쪽으로 간다.)
성아 (발로 툭툭 차며) 하하, 분홍이라니. 어이없어.
연진 편견이야. 여자는 분홍, 남자는 파랑. 이건 거의 테러 수준의 편견이야. 세상을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보지 말라고. 그리고 너의 곰팬티보다는 나아.
성아 뭐라는 거야.
(성아, 스쿠터에 올라 달리는 시늉을 해본다.)
성아 달려, 달려! 붕붕!
연진 (피식 웃는다.) 정말 달릴래?
성아 사양. 분홍색 스쿠터는 정신건강에 해로울 것 같아. 나 갈래. 참, 그리고 되도록이면 너희 엄마가 우리 엄마를 너무 자주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빠가 외롭고 심심해해.
(성아, 손을 흔들고는 멀어진다. 연진은 멍하니 성아의 뒷모습만 바라본다.)
#19 성아 집. 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병수가 거실에 앉아 TV를 보며 라면을 먹고 있다. 성아,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가 병수의 옆에 앉는다.)
성아 회사에서 좋은 거 사먹고 오지 그랬어. 초밥이나 갈비나, 회 같은 거.
(성아는 소파에 등을 바짝 기대고 누워 입을 씰룩거린다.)
병수 (자상하게 웃으며) 아빠, 라면 좋아하잖아.
(병수는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맛있게 먹는다. 성아는 병수의 무릎을 베고 눕는다.)
성아 엄마는 아빠가 매우 자주 라면을 먹는다는 걸 알까? 직무유기야.
병수 라면이 왜. 그리고 엄마가 아빠 밥 차려주는 로봇은 아니잖아. 아빠는 나중에 성아가 남편 밥만 차려주는 로봇이 된다면 무지 속상할 거야.
(성아, 눈을 감는다. 병수는 성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성아 (들릴 듯 말 듯) 조금만 더 참아보자, 아빠.
#20 레스또랑. 밤
(늦은 시간이라 한적한 고급 레스또랑. 연희와 도희는 맛있게 스테이크를 먹는다. 도희에게 먹여주기도 하는 연희. 이때만큼은 가장 행복해 보인다. 밝게 웃는 연희.)
연희 우리 중학교 때 먹었던 밀가루 떡볶이만큼 맛있는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스테이크는 굿 초이스다.
도희 나랑 먹어서일걸. (와인 한잔 들이켜며) 내가 인터넷 다 뒤져서 찾아낸 곳이다. 어때, 이 언니의 섬세함이 새삼 감격스럽지 않니?
연희 웃겨.
(잔잔한 클래식 음악. 잘 차려진 음식과 레드와인. 고급스러운 의자와 테이블.)
도희 조금만 더 버텨봐. 너 요즘 너무 위태위태해 보여. 여태까지 잘해왔잖아. 병수씨처럼 좋은 사람 없다……
(도희, 말끝을 흐린다. 다시 시무룩해지는 연희의 얼굴.)
도희 으유, 저 기분파. 알았다, 알았어. 말 안할게. 샤따 마우스. 나 입에 지퍼 채운다. 지익.
(도희, 손으로 입을 스윽 문지른다.)
#21 경비실. 자정
(지훈, 크고 둥근 시계를 본다. 12시 20분. 작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본다. 고요하다. 지훈, 시집을 꺼내 들고 읽기 시작한다. 똑똑. 얼마 후 경비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문을 열자 불쑥 들어오는 분홍색 헬멧.)
연진 (고개를 숙이며) 아저씨, 죄송한데요. 얘 좀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집에는 못 데려가요. 내일 친구한테 반납해야 하는데, 스쿠터에 걸어두면 누가 훔쳐갈 것 같아서요. 딱 봐도 헬멧계의 얼짱이잖아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지훈.)
지훈 늦었구나. 엄마는 아직 안 들어오셨니?
연진 그건 저보다 아저씨가 더 잘 아시잖아요. 저 들어갈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연진, 터덜터덜 걷는다. 지훈은 오래도록 연진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22 주차장. 늦은 밤
자동차 소리가 들리자 졸다가 경비실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지훈. 도희가 주차를 한다. 도희는 내려서 지훈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까딱 숙이고 안으로 들어간다. 도희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지훈이 나와서 차를 닦기 시작한다. 입에서 하얀 김이 나오고 손이 벌게진다.
#23 고등학교. 아침
(등굣길. 활기찬 모습의 학생들이 재잘거리며 걸어온다. 분홍색 스쿠터를 타고 분홍색 헬멧을 쓴 연진이 등장하자 학생들이 속닥거리고 여자아이들 몇명이 꺅꺅거린다. 교문 안으로 들어가 오토바이를 세워놓자 뒤에서 선생 한명이 나타나 연진의 머리를 세게 때린다.)
지훈 폭주족이냐?
연진 (입 삐죽) 아얏. 이건 폭주가 불가능한데요. 그리고 저 범생이에요!
(선생,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들어간다.)
#24 고등학교/교실. 오전
(벌컥 문을 열고 터벅터벅 현기에게 다가가는 연진. 현기의 책상 위에 분홍색 헬멧을 세게 내려놓는다.)
현기 이 새끼야! 우리 홍이 얼굴에 상처나잖아. 여자애 얼굴의 상처는 치명적인 거야. (헬멧에 볼을 대고) 아유, 우리 홍이.
연진 (자기 자리에 앉으며) 이 새끼, 너 분홍이가 꼭 여자라는 법 있어? 그리고 스쿠터 색깔 바꿔라. 랑이로 해. 노랑이든 파랑이든.
현기 홍이가 어때서! 너도 예쁘다더니 갑자기 왜 변덕부리고 난리야.
연진 (진지) 홍이는 정신건강에 해로울 것 같거든.
(현기, 기가 막힌다는 표정. 이내 손수건으로 헬멧을 조심스럽게 닦는다.)
#25 성아 집. 꿈
(연희와 병수 부부 방. 문틈으로 연희와 병수를 보고 있는 열살 성아. 연희는 가방에 짐을 넣으며 뭐라고 말을 하고, 병수는 연희를 말리며 애원하고 있다.)
연희 십년 동안 힘들었어요. 나 좀 보내줘요. 나, 당신 정말 조금도 사랑하지 않아요. 다른 사람을 사랑해요.
병수 알아. 내가 사랑하면 돼. 여보, 내가 더 잘할게. 우리 좀더 애써보자.
연희 사랑은 애써서 될 일이 아니잖아요.
(연희, 가방을 들고 나오다 문 앞에 선 성아와 맞닥뜨리자 놀란다. 슬픈 표정의 성아.)
#26 성아 방. 정오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는 성아. 눈앞의 분홍 곰과 눈이 마주친다.)
성아 (곰에게) 왠지 크게 한방 먹을 것 같은 기분이야. 어쨌든 잘 잤니?
(침대에서 내려오는 성아. 책상 위에 놓인 쪽지를 본다.)
연희 목소리 엄마, 결국은 가방 쌌어. 20년 동안 쌌다 풀었다 했던 가방, 드디어 꾸려서 떠나. 태어나서 지금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미안해.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 용서해달라거나 이해해달라고는 안할게. 그 사람에게 가는 건 아니야. 내 딸이 딸 낳을 즈음에 꼭 돌아올게.
(털썩 침대에 주저앉는 성아.)
성아 (멍한 표정) 먹었다, 한방.
#27 요리학원. 낮
(탁탁탁탁. 도마 위에서 무채 써는 소리. 아줌마들 틈에서 꿋꿋하게 요리를 하고 있는 연진. 알록달록한 캐릭터 앞치마와 두건이 인상적이다. 진지하다. 아줌마들은 흘끔거리며 연진을 보며 웃는다. 한 아줌마가 다가와 말을 건다.)
아줌마 아이고, 학생은 학교 안 가고 여기서 뭐 해?
연진 (요리에 집중) 요즘 고등학생들은 토요일에 학교 안 가걸랑요.
아줌마 그렇구나. 아니, 어린 학생이 요리를 다 배우고. 요리사가 꿈이야?
연진 아뇨.
아줌마 그럼 왜 요리를 배워?
연진 나중에 집에서 살림하고 마누라한테 돈 벌어오라고 하게요. 전 무한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걸랑요. 성격이 온순해서.
(아줌마들 자지러지며 웃는다.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의 아줌마들. 어깨를 한번 들썩한 뒤 다시 요리에 집중하는 연진. 튀기는 소리, 굽는 소리, 물 끓는 소리. 연진의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
#28 도희 까페. 낮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까페. 아기자기하면서도 씸플하다. 도희는 구석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있다.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별로 없다.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알바생이 전화를 받는다.)
알바생 사장님, 전화왔는데요.
도희 누군데?
알바생 신연희씨라는데요.
도희 연희가? 왜 가게로 전화를 했지?
(도희, 계산대로 다가가 전화를 받는다.)
도희 연희니? 왜 핸드폰으로 안하고? (자신의 핸드폰을 한번 보고) 아, 정말 꺼져 있네. 야, 너 울어? 너 어디야? 어디냐고! 빨리 말해, 인마.
(도희의 목소리가 커진다. 겸연쩍은 알바생. 손님 눈치를 살피며 메뉴판만 들여다본다.)
#29 병수 사무실. 오후
자신의 방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병수. 잠시 후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핸드폰으로 문자가 온다. 다른 전화를 받느라 확인하지 못하는 병수. 직원들과 이야기를 하며 정신없이 바쁘다.
문자메씨지. <엄마 날개옷 찾았어. 그리고, 날아가버렸어.>
#30 대학교정. 오후
(학생들이 붐비는 곳을 피해 조용한 벤치를 찾아 앉는 성아. 벤치에 기대앉아 목을 뒤로 최대한 젖혀본다. 잠시 후 친구 경미가 다가와 앉는다.)
경미 청승. 학교 좀 자주 나올 수 없니? 너무 오랜만이다.
성아 나 학교 관둘 거야.
경미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성아 변할 거야. 다시 공부해서 경호원 될 거야. 강해질 거야. 방 안에 곰탱이들도 다 버리고. 약한 거 이제 질색이야. 지겨워.
경미 평생소원이 유치원 선생님 돼서 애들하고 하루 중 열시간을 보내는 거라며.
성아 그렇게 잔잔하게 살기 싫어졌어. 막 살 거야. 보란 듯이 막 살아버릴래. 나쁜 것도 보고, 나쁜 사람들 만나면서 강해질 거야.
경미 (놀란 듯) 성아야.
성아 그렇게 간절히 바랐는데, 그렇게 애썼는데, 정 붙이며 살 수 있도록 내가 온갖 짓을 다 했는데. 결국 날개옷을 찾아버렸어.
(경미, 성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성아 오늘 자퇴서 내러 온 거야. 넌 꼭 유치원 선생님 돼. 간다.
(벤치에서 일어나 걸어가는 성아.)
#31 버스 안. 저녁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성아. 깔깔거리는 소리에 앞에 앉은 아빠와 어린 소녀를 본다. 아빠와 장난치며 노는 어린 소녀.)
병수 목소리 엄마는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야. 그래서 날개를 찾으면 날아가버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성아가 엄마 많이 사랑해주고 예쁜 짓도 잘해야 돼. 알겠지?
어린 성아 목소리 응~
(질끈 눈을 감는 성아.)
#32 연진 집. 저녁
(힙합을 틀어놓고 신나게 청소중인 연진. 문득 앞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도희 목소리 니가 딸이었다면 좋았을 거야. 그럼 니 아빠 생각도 덜 났을 거야. 내가 널 언제까지 책임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진은 다시 음악에 몸을 맡긴 채 몸을 흔든다. 점프. 탁탁탁. 요리하는 연진. 열심히 요리해서 한상 가득 차린다. 식탁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하려다가 도로 내려놓고 혼자 밥을 먹기 시작한다.)
#33 병수 사무실. 저녁
병수, 피곤한 기색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앉는다. 앉자마자 가족사진을 보며 웃는다. 연희와 병수, 열살 성아. 잠시 눈을 붙이고 있다가 휴대폰을 집어 문자메씨지를 확인한다. 질끈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는 병수. 부리나케 재킷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Ins. 거리를 달리는 병수의 차.
#34 몽따주. 저녁
연희를 찾아다니는 도희. 서점과 전통찻집, 지하철역을 헤맨다. 아무데도 연희는 없다. 맥 빠지는 도희. 차 안에 앉아 눈을 질끈 감는다.
(후략)
심사평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 씨나리오부문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응모자격을 장편 씨나리오로 한정한 것이다. 단편 씨나리오를 폄하하거나 상업적 논리에 근거한 선택이 아니라 100씬 안팎의 장편 씨나리오를 쓰는 데 들어가는 노력과 지구력을 정당하게 보아줄 잣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기성 작가들도 한편의 장편 씨나리오를 완성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에서 45편이라는 응모편수는 놀랍고도 반가웠다.
원고지 500매 정도 되는 장편의 호흡 속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방향을 잃지 않고,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흐리지 않으면서 각 인물에게 생명을 부여하여 살아 숨쉬게 만드는 것까지는 산문을 쓰는 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하지만 씨나리오 창작은 그에 하나를 더해야 하는데, 바로 ‘영상적 글쓰기’이다. 영상언어란 매우 까다롭고 구조적인 도구여서, 문자언어가 갖는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훌륭한 조력자가 되기도 하는 반면 때로 영상언어의 창작에 방해되는 문자언어를 억누르지 않으면 안되는 위협자가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응모자들은 문자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고 훈련이 잘된 학생들이었다. 그러나 영상적 언어를 다루는 데에서는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훌륭한 주제의식과 소재를 찾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으로 발전되지 못한 경우다.
학생들의 다음 도전을 위해 또 한가지의 심사 소견을 이야기하자면 대사 표현력 훈련의 중요성이다. 사람이 태어나 대개 한두살이 지나면서부터 말을 하고, 깨어 있는 많은 시간 동안 말을 도구로 생활하기에 대사를 쓰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세계관과 자라온 환경, 교육수준, 나이, 성별이 모두 다른 각 등장인물들에게 그에 걸맞은 ‘말’을 물려주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만 방심하면 작가 자신의 목소리가 튀어나오거나 문어체적인 문장이 입말처럼 포장되어 대사인 양 따옴표 안에 들어가 있는 경우를 종종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점에서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을 고민하게 만든 작품은 「우리 햄」(윤지영, 동국대) 「망향의 섬 1609」(김주성, 연세대) 「상처에 바르는 사랑」 세 작품이다. 「우리 햄」은 우리 역사 속에서 치유돼야 할 상흔을 소재로 삼았으면서도 주제의식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톤을 유지한 수작이다. 하지만 시선의 방향이 있을 뿐 그 방향을 지지하는 의식이 성숙되지 않았기에 당선작에서 제외되었다. 「망향의 섬 1609」는 학생의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문장력과 여러 장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한 지점으로 모아가는 구성력이 탁월했으나 묵직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이 부족한 점과 영상언어보다는 문자언어에 집착한 점이 당선작이 될 수 없는 이유였다.
당선작 「상처에 바르는 사랑」은 얼핏 보면 지나치게 가벼운 톤으로, 대중적인 호기심에 부합한 아이콘을 활용한 작품으로 보이지만 ‘가족’과 ‘사랑’이라는 고전적인, 그래서 몹시 다루기 어려운 이야기를 나름의 진지한 고민 속에 풀어낸 것이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대학생만이 써낼 수 있는 감각적인 대사와, 관습적 표현을 슬쩍 비켜가면서 감정을 드러내는 세련된 화법은 심사위원들을 감탄하게 만들었다. 당선자가 폭넓은 소재를 찾아 꾸준히 자기개발을 해나간다면 우리는 또 한명의 훌륭한 씨나리오 작가를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당선작 한편만을 가려내야 하는 규정이 잠시 원망스러웠을 정도로 최종심 대상 세편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던만큼, 여기서 머무르거나 좌절하지 말고 꾸준하게 집필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목마르게 기다리는 것이 씨나리오 작가라는 것을 집필의 에너지로 삼아서.
│심산 김희재│
당선소감
12월은 좀 놀아볼까 한다. 근 3년간 내가 ‘제대로’ 놀았던 적이 있었나 떠올려본다. 그 시간 동안 스스로를 쪼아대고 다그치기 바빠서 한번도 마음 놓고 즐거워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나를 닦달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그랬다. 노는 것 따위는 인생에 절대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소모적인 일이라고 세뇌하듯이 읊조렸고, 그래서 그동안 즐거웠던 적도 거의 없었다. 한권의 책이라도 더 읽기, 한편의 영화, 연극이라도 더 보기, 신문도 꾸준히, 일기도 꾸준히, 하루 몇시간 이상 할애하여 글쓰기, 소재 찾기, 메모하기 등등 내가 봐도 수험생보다 더했다. 오죽이나 못나 보였을까.
당선소식이 알려지자 동기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하니까 되는구나.” 그렇다. 솔직히 나는 재능있는 인간이 아니다. 그저 노력하는 인간이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누군가 말했다. “근데, 노력하는 것도 재능 아니야?” 그래서 감사하다. 노력할 수 있는 재능이 있어서 감사하다. “거 봐, 노력하니까 되잖아!”라고 거드름 피우며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서 좋고, 자신들의 재능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동기들에게 어쨌든 하면 되더라 하고 말할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하다(물론 수상이 전부가 아니지만).
이 씨나리오를 쓰고 나서도, 한참 동안 친구들(등장인물)과 함께 살았다. 과장스럽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정말로 그랬다. ‘이런 상황이라면 그 친구들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까?’ ‘영화가 끝난 후, 이 친구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는 이미 내 손에서 마무리된 이야기의 이후를 궁금해하는 팔불출이 되어 있었다.
작가가 작품을 산고의 고통을 거쳐 낳은 자식에 비유하는 것만큼 상투적이고 개성 없는 표현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편 한편 글을 쓰다 보니 그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학창시절 나는 드럼 치는 걸 좋아했고, 록밴드 공연을 보러 클럽에 드나들었고, 수업시간에도 소설책을 꺼내 읽었으며, 카메라로 영상 만드는 걸 좋아했고, 봉사나 수화 동아리 등 공부만 빼고 다 열심히 하고 살았다. 그런데 그렇게 ‘잘’ 놀던 내가 그동안 참 못나게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번 당선에 너무 감사하다. 얼마간의 휴가를 얻은 기분이다.
자고로 노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제대로 하고 볼 일이다. 쭈뼛거리고 섰다가 넘어지거나 부러지는 것처럼 창피한 일이 또 있을까. 노는 법부터 차근차근 다시 배워야겠다. 그리고 운동화끈 조여 매고 다시 뛸 준비도 해야겠다. 어쨌든 나는 그런 모습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매번 피곤하다 바쁘다는 핑계를 믿어주면서 항상 지켜봐준 친구들, 나 휴가 받았으니까 같이 놀자.
가족들, 동덕여대 문창과 김사인, 하일지, 장정일 교수님, 문창과 동기들, 선후배님들, 조교 언니, 낙생, 화정 친구들, 심사위원 심산, 김희재 작가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영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