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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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 1집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등이 있음.

 

 

 

불의 유품

 

 

내 책상머리에 놓인 못난 돌멩이 하나

지난겨울 공단길을 지나다 주워온

모서리가 깨어진 작은 돌 하나

젖은 땅에 얼어붙어 있던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뜨거워져, 지난 시대 불의 유품인 양

체온으로 녹여 가지고 온 그것

 

언젠가 이 돌이 우리들 서러운 눈물에 젖어

울분의 주먹시위를 떠났으리라

복마전을 향해 날아갔을 작은 돌멩이 하나는

무기가 아니라 간절한 한송이 꽃이었으리라

그 작은 파열의 순간, 주저함과 두려움의 얼음문은 갈라지고

생존의 공포, 그 어둠을 산산조각

허공에 날려버리기에 모자람이 없었으리

노예노동으로나 부리던 억센 근육을 최초로

푸른 하늘로 솟구쳐보던 그 순간,

그것은 불의 발견이었다

 

그해 여름 그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숨죽이며 살았던 삼엄하던 유신시절

공장 정문 앞 너른 아스팔트 광장

죽은 자를 옮겨와서 거적을 덮어놓고

대여섯 가족들이 벌이던 시위

흰옷의 젊은 여자는 거적을 쓸어안고 울고

아이 하나는 여인의 치맛자락에 매달려 울고

나이 든 둘은 술에 취해 아스팔트에 머리를 박고

청년 하나가, 작열하는 8월 태양 아래 청년 하나가,

삼엄한 경비대를 향해 주먹을 부르르 떨며,

복받쳐, 입술을 깨물던, 그 청년의 손아귀에,

돌멩이 하나 들려 있었다, 한여름 땡볕 정오 무렵

그는 울분과 공포가 뒤섞인 채 못내 떨고 있었으나

끝내 그 돌을 던지지 못했다

땀에 흠뻑 젖도록 들려 있던 그 돌멩이 하나

그러고도 오랫동안 땅바닥에 밟히며 뒹굴 뿐이었던

그 돌멩이 하나

 

한 시대는 가고 그것은 불의 유품이 되었다

한때는 우리의 빈손이 그것을 얼마나 갈망했던가

뜨겁게 타오르던 그것이 길가 마른풀들과

가래침과 개똥과 함께 뒹굴고 있었다

 

아직 가야 할 많은 길들을 두고

돌멩이는 길모퉁이에서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우리도 인간이라고 외치던

돌멩이들의 작은 꿈은 다 무슨 인간이 되어 있나

그들 가운데 이제, 그들 가운데 이제

세상 변하지 말기를 아, 세상 변하지 말기를

지난 시간 자신과 같은 모습으로 돌을 집어든 자들을

비웃고 몰아내고 욕설을 퍼부어대던 자들

자신이 건너온 그 뱃줄을 끊어버리는 자들

이제 저들 가운데 누군가가 저들을 향해 돌을

집어들려고 하고 있으니 어쩌면 이 하나의 돌이

우리들 지난 모든 시간을 더럽히리라

 

그 불이 우리의 길을 밝혔으나

우리 안에 훨훨 태워야 할 것을 태워버리지 못하였네

나는 믿네, 타는 목을 축일 물잔 잡을 손이 없더라도

이 돌 하나는, 이 돌멩이 하나는

끝내 손에, 내 손에 들려 있기를

 

 

 

길의 숲

放下

 

 

새들에게도 처음엔 손이 있었다

높은 언덕에 살던 그들은

바람과 이웃해 살았으므로 알고 있었다

저 허공에도 길이 있는데,

그 길을 갈 수 없는 이유를

자신을 땅바닥에 바위처럼 붙들어둔 것은

중력장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손이라는 것을

 

새들에게도 원래 수천개 손이 있었다

세상이 자신을 잡고 있는 손이 천개

자신이 자신을 잡고 있는 손이 천개

자신이 세상을 잡고 있는 손이 또 천개

소유의 물목 없이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기에

 

그러나 새들은 알고 있었다

땅의 길을 걷는 자는 숲속에서

숲을 보지 못하듯이, 길 위에서는

길의 숲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길에도 길의 숲이 있음을

새들은 알았다

 

새들은 자신의 손들을 놓기 시작했다

수천개의 손을 다 놓았다

그 모든 손들을 다 놓았을 때

빈 허공은 오히려 바위 계단처럼 견고하였다

새의 손은 그 허공을 밟고 일어설 발이 되었다

그 수천개의 손이 바람의 계단을 밟을

바람보다 가벼운 발이 되었다

 

길이 어두운 것은

길의 숲을 보지 못하기 때문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