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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요시모또 바나나 장편소설 『슬픈 예감』, 민음사 2007

탈정치화의 빈자리와 자연주의적 주술

 

 

김항 金杭

문학평론가, 토오꾜오대학 철학쎈터 특임연구원 ssanai73@hotmail.com

 

 

슬픈예감20세기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코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가 「사소설론(私小說論)」(1935)을 통해‘나’라는 근대소설의 실험을 해부한 이후, 일본의 소설과 평론은 자연주의라는 주술과 지난한 싸움을 벌여왔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에서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근대(소설) 비판(비평)은 이 자연주의 비판의 언저리에서 발화되어온 것이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요시모또 바나나(吉本ばなな)는 그런 근대 비판을 비웃기라도 하듯 새로운 자연주의를 거느리고 혜성처럼 등장했다. 한국에 뒤늦게 소개된 그녀의 첫 장편 『슬픈 예감(哀しい予感)』(김난주 옮김)은 그녀의 새로운 자연주의가 인간의 삶을 어떤 세계로 이끄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태생의 비밀과 남매간의 사랑, 아침 드라마의 소재로 익숙한 이 뒤틀린 설정이 요시모또 바나나의 손을 거치면 한 소녀의 자기 찾기 여정으로 순화된다. 그러나 이 자기 찾기는 세상의 숱한 성장소설처럼 자아를 옭아매고 기만하는 타인 및 사회와 다투는 데서 비롯되지 않는다. 소녀는 아무런 상처도 입은 바 없고, 그 누구와도 다투지 않는다. 다만 까닭 모를 불안과‘슬픈 예감’에 충실하게 행동할 뿐이다. 그럼에도 이 여정은 자아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변화시키고 잃어버린 자아를 되찾게 한다. 그러므로 소외와의 투쟁 없이, 즉 변증법 없이 자아와 세상은 지양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타자나 의식은 더이상 필요없다. 필요한 것은 자기만의 비법으로 자연의 진실을 찾아내는 연금술사 같은 손길뿐이다. 따라서 이 세계 안에 사람과 사람 사이의 투쟁, 즉 근대의 세속화된 정치가 자리할 곳은 없다. 그렇다면 요시모또 바나나가 자신의 세계에서 내쫓은 정치의 자리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르면 인간이 정치적 동물인 까닭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는‘밥’뿐만 아니라‘의미’와‘권력’이 필수요건으로 자리한다. 근대세계는 이 의미와 권력을 초월적인 자리에서 인간 사이의 관계로 끌어내린 시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문학의 꽃이라 불린 소설은 의미와 권력을 상실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더이상 신이나 자연 속에서 의미와 권력을 자리매김할 수 없는 시대의 산물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간은 자신이나 세계의 의미를 타인이나 사회관계에서 찾아내야 했고, 권력은 이미 주어져 거기 있는 힘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 지속시키고 있는 지배와 복종의 체계임을 인식해야 했다. 그래서 소설의‘나’는 의미를 찾고 권력관계를 바꾸기 위해서 과감히 지금 이곳의 삶과 대면하고 싸워야 했다. 근대소설이 제시하는 삶의 모습이 구원이든 몰락이든, 지금 이곳의 삶에 대한 상실의 경험을 수반하는 까닭이다.

그런데 요시모또 바나나 작품의 영원한 테마인 삶의‘구원’은 이런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슬픈 예감』에서 구원은 소녀의 잃어버린 기억에서 비롯되는 불안과 함께한다. 소녀는 부모 동생과 함께 “스필버그 영화에 등장하는 행복한 중산층처럼 밝게” 살아왔지만(24면), “어린 시절의 기억뿐만 아니라,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 속에서 지내왔다(25면). 이 이상한 느낌의 정체는 그녀가 어릴 적 교통사고로 친부모를 잃어 지금의 부모에게 입양되었다는‘사실’의 망각이었는데, 소녀는 자기가 처한 공간에서 과거에 일어난 끔찍한 일을 볼 수 있다는 (초)능력으로 이 사실을 알게 된다. 어릴 적부터 어딘가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지금 이곳의 삶은 결국‘진짜’자신의 삶이 아니었던 셈이다. 여기서 그녀의 자기 찾기가 시작된다. 이모로 알았던 친언니를 되찾고, 동생으로 알았던 한 남자에 대한 연정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소녀는 “운명이란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줄어들지 않”았고 “늘어날 뿐”이다. 왜냐하면 소녀는 “이모와 동생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발로 언니와 연인을 발굴”(153면)했기 때문이다. 『슬픈 예감』에서 소녀의 어긋난 삶은 이렇게 구원된다.

하지만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는 이 구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구원이 지금 이곳의 어긋난 삶을 정지시키고 심판하여 다른 삶을 여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상실의 경험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즉 이모는 더이상 이모일 수 없으며, 동생은 더이상 동생일 수 없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줄어들지 않고 늘어날 뿐”이라면, 이는 작가의 과욕일까? 아니면 구원 이전의 삶도 이후의 삶도 모두 감싸안겠다는 그녀의 따뜻함일까? 과욕일 수도 있고 따뜻한 손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간에 여기에는 근대의 사회적 관계와 거기에서 비롯되는 갈등에 대한 외면이 자리한다.

『슬픈 예감』에서 등장하는 사회적 관계는‘가족’이다. 가족이란 핏줄을 중심으로 한 자연적인 공동체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법제도의 산물이다. 그래서 데리다(J. Derrida)는 모든 형제를‘의형제’(brother-in-law)라고 정의했다. 즉 핏줄은 법제도를 지탱하기 위한 논거일 따름이며, 법제도는 핏줄에 기초한 자연적 유대를 보호하기 위해 생긴 것이 아니다. 따라서 가족관계는 앞에서 말한 인간에서 유래한‘의미’와‘권력’의 산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가족관계의 혼돈과 단절은 의미와 권력이 논거를 잃어버렸을 때 발생하기 마련이고, 거기에는 갈등과 투쟁이 유발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녀의 가족은 그런 혼돈과 단절을 경험하지 않는다. 동생이 연인으로, 이모가 친언니로 바뀌어도 이 가족은 여전히 거기 그 자리에 있다. “내가 돌아갈 곳은 집밖에 없”기(152면) 때문이다. 따라서 핏줄의 유대가 붕괴해도 거기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저 집-가족은 이제 제도가 아니라‘자연’이 된다. 근대의 정치를 가능케 하는 인간의 제도, 즉 의미와 권력의 총체는 이제 스스로 만들거나 바꿀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다. 제도는 인위성을 상실하고 이미 거기 존재하는 자연이 되고 만 것이다.

요시모또 바나나의 정치에 대한 외면은 바로 이 제도의 자연화이다.‘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내가 관여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자연이 될 때, 나는 더이상 정치적 주체가 아니다. 나는 자연의 수수께끼를 나름의 비법으로 풀어나가며 스스로를‘구원’하는 존재가 된다. 그 와중에 바깥세상은 변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법으로 드러난 진실로 더욱 풍부해진다. 이 탈정치화된 세계에서 인간의 구질구질하고 지긋지긋한 욕설이나 애증은‘쿨’하게 사라진다. 그래서 이 세계는 여전히 구차하고 끈적끈적한 우리네 삶의 해독제일지 모른다. 이것이 먹고사는 일이 날로 까칠해져만 가고 타인을 독기로 가득찬 경쟁자로 여기게끔 하는 한국사회에서 요시모또 바나나의 소설이 인기를 끄는 까닭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새로운 자연주의가 까칠한 독기를 빼주기는커녕, 과다복용으로 인한 약물중독 현상을 낳지나 않을까? 일본사회가 자연주의라는 주술에 걸려 100년이 넘게 제도나 사물의 자연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