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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쑨 꺼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 그린비 2007

타께우찌 요시미라는 아포리아

 

 

백지운 白池雲

인천문화재단 책임연구원 jiwoon-b@hanmail.net

 

 

다케우치요시미타께우찌 요시미(竹內好)는 확실히 문제적인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주류 이데올로기 안에서 일본 근대를 비판하는 그의 독특한 입지 때문이다. 전후(戰後) 일본에서 아시아주의와 대동아공영권 사상을 부정했던 많은 비판적 지식인과 달리, 타께우찌는 오히려 그것을 사상으로조차 만들지 못한 일본 지식인들의 무책임함과 나태함을 비판했다. 침략주의의 양대 원류를 끝까지 놓지 않고 그 안에서 근대사상의 전통을 세우는 작업을 고집했던 탓에, 그는 그의 시대뿐 아니라 지금까지 일본 지식계에서 한마리‘고독한 늑대’로 배회하고 있다.

그런 타께우찌를 침략 이데올로기의 옹호자로 비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비판 역시 무책임함과 나태함이라는 그의 질타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타께우찌는 모두가 피해갔던 범죄의 현장을 끝까지 떠나지 않았다. 스스로가 공범임을 인정하면서 결과론에 의해 매장된 동기의 원초성에 매달렸다. 그런 시도가 위험하다는 것, 그리고 실패로 끝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음에도, 독성 없이는 어떤 사상도 형성되지 않는다고 믿었던 그는 “불 속에서 밤을 줍기”위해 몸을 내던졌다. 타께우찌에 대한 평가가 지금껏 일본사회에서 모호하게 유보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일본 근대를 비판하면서 그 구원을 염원했던 그의 작업은 바깥에서 비판하기는 쉬워도 안에서 맞서 싸우기는 힘들다.

그렇다면 타께우찌가 사상 혹은 전통으로 승화하고자 했던 침략 이데올로기에 의해 상처받은 아시아의 지식인은 어떨까.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의 실패한 논리를 사상으로 되살려내려 했던 타께우찌의 사유와 대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하물며 일본사회조차 오랫동안 침묵에 가둬온 그를 다시 현실로 호출하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던지는가. 적어도 두가지 과제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나는 일본 근대사상을 구원하려는 그의 시도를 역사적으로 재평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어떻게 동아시아의 지적유산 목록에 올릴 것인지 묻는 것이다. 중국 지식인 쑨 꺼(孫歌)의 저서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竹內好という問い)』(윤여일 옮김)을 나는 이런 맥락에서 읽고 싶다.

무엇보다 이 책은 타께우찌 요시미에 대한 충실한 해설서이자 그를 위한 변론이다. 체제와 반체제, 보수와 진보라는 이항대립의 구도에 희생된 타께우찌를 살려내는 것, 쑨 꺼에게 그것은 진보라는 정치 이데올로기 속에 사장된‘문학적’인간을 살려내는 작업이자 학문에 사상을 불어넣는 행위이며 개념을 넘어 역사 안으로 진입하는 자세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일본의 사상가 타께우찌가 중국의 사상가 루 쉰(魯迅)을 통과하여 만든 “주체성의 존재방식”에서 오늘에 유효한‘동아시아 사상’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상당히 야심찬 기획을 담고 있다.

그러나 사상가로서 타께우찌가 택했던 위험한 입장으로 인해, 그의 사유를 유산으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그와의 정면대결을 거쳐야 한다. 쑨 꺼 자신은 이 책이 “타께우찌 요시미와‘대결’한 기록”(25면)이라 말하고 있지만, 정작 이 책에서 대결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타께우찌의 주체형성의 정신과 태도로부터 동아시아의 역사를 다시 쓰자고 말하고 있지만, 주체형성 과정에서 타께우찌가 감행했던, 이른바 “불 속으로 뛰어드는” 모험이 발산하는 섬뜩한 독성을, 쑨 꺼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비껴갔다.‘문명개화’로 점철된 일본 근대에 저항하는 주체형성의 사상적 방법을 루 쉰, 나아가 아시아에서 찾았음에도 그것이 결국 아시아 침략 이데올로기의 원류인 대동아공영권 사상과 아시아주의를 복권하자는 것으로 귀결되는 타께우찌의 이율배반에 정면대결하기보다, 루 쉰의 방법이 타께우찌를 통해 아시아의 방법으로 확장되는 대목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타께우찌와 대결한다는 것은 그의 텍스트에 내재하는 균열을 정직하게 읽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께우찌의 주체형성의 사상적 기반인 내셔널리즘과 아시아가 서로에 의해 균열되면서 동시에 지탱되는 바로 그 지점을 짚어야 했다. 패전후 좌우익 모두가 괄호 안에 넣었던‘민족’과‘아시아’를 일본 근대주체 형성의 사상적 버팀목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타께우찌는 위험한 현실주의자다. 메이지근대로부터 대동아공영권 그리고 패전으로 이어지는 일본 근대의 위기의 핵심을 주체성의 결여로 보았던만큼, 그는 유럽이라는 타자를 전제한, 일본 국민이라는 내셔널한 경계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올바른 내셔너리즘” 역시 “민족을 사고의 통로에 포함하지 않거나 배제”한 근대주의에 저항하지만(『일본과 아시아』, 서광덕·백지운 옮김, 소명출판 2004, 399~401면) 결국 근대주의의 자장을 넘지 못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타께우찌는 국민주체를 세우는‘방법’으로 아시아를 가져옴으로써, 주체형성의 내셔널리즘이 울트라내셔널리즘(ultra-nationalism, 초국가주의) 혹은 근대주의로 떨어지지 않도록 절묘하게 붙잡는다. 그는 일본 내셔널리즘과 아시아 사이에서 위태로운 균형을 유지하는,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셔널리즘이라는 일국주의와 아시아라는 지역주의가 주체형성의 사상으로 위태롭게 공존하는 그 지점에 타께우찌 사유의 아포리아가 있다. 아시아로 내셔널리즘을 견인하려 했지만, 또다른 면에서 그의 아시아는 일본 국민주체를 세우기 위해 동원된 개념적 추상물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사상으로서의 아시아주의가 아시아 침략이라는 현실로부터 구분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도 그런 아포리아에 기인한다. 그런데 쑨 꺼는 타께우찌의 주체형성 작업에 노정된 이 모든 위태로움의 계기들을 뛰어넘어 그것을‘자기부정[挣扎]’이라는 “어디까지나 『루 쉰』 이래 일련의 저작에서 반복된 모띠프”(162면)로 읽음으로써, 탈근대적‘동아시아 사상’이라는 안전지대로 운반한다. 그녀는 “불 속으로 뛰어드는” 행위를 추상적인 역사철학으로 보편화할 뿐, 그가 건져내려고 했던 “밤”이 무엇이며 그것이 오늘날 동아시아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을 주는지 진지하게 묻지 않는다.

타께우찌를 재평가하는 것이 동아시아인이 함께 지어야 할 역사의 짐임을 환기했다는 것만으로도 쑨 꺼의 책은 의미가 있다. 그러나 타께우찌의 사유를 동아시아의 사상유산으로 삼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아포리아를 우리의‘물음’으로 삼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런 물음을 건너뜀으로 인해,‘일본과 아시아’라는 타께우찌의 위험한 현실주의 자리에‘중국과 아시아’라는 위험한 대국주의가 슬그머니 들어서고 있음을, 쑨 꺼는 의식하지 못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