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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언 바루마 외 『옥시덴탈리즘』, 민음사 2007
반서구주의마저도 서구에서 수입됐다?
성백용 成白庸
인하대 강사 sungby506@hanmail.net
아득한 옛날 동서양은 상대방을 반인반수(半人半獸)로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도 서로의 존재감을 거의 느끼지 못했기에 갈등이나 충돌이 있을 리 없었다. 개인, 사회, 문명을 막론하고 문제는 서로 얽혀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시작된다. 타자에 대한 편견은 저자 이언 바루마(Ian Buruma)와 아비샤이 마갤릿(Avishai Margalit)의 말처럼 인간 조건의 일부이기에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 해도, 단지 편견에 그치지 않고 집단적 광기와 폭력으로 나아간다면 그것은 인류의 공멸로 이어질 재앙이 될 수도 있다.
바로 이같은 문제의식에서 씌어진 『옥시덴탈리즘: 반서양주의의 기원을 찾아서』(Occidentalism: The West in the Eyes of Its Enemies, 송충기 옮김)는 서양에 대한 편견과 증오의 뿌리를 캐들어간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 옥시덴탈리즘은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나쁜 측면”과 짝을 이룬다. 즉 비서구세계에 비친 서양은 도시와 상인으로 함축되는 물질만능주의, 냉정한 이성(‘영혼 없는 계산기’), 이기적 개인주의, 세속주의, 속물근성 따위에 오염된 천박하고 퇴폐적이며 비인간적인 세계이다. 그런데 이같은‘서구의 질병’에 관한 담론은 다름아닌 유럽에서, 특히 프랑스의‘문명’과 계몽사상의 보편주의를 거부한 독일에서 발원하여 서구화 또는 근대화의 물결에 휩쓸리게 된 비서구세계로 전파되었는바, 이를테면 러시아의 슬라브주의, 일본의 군국주의, 마오이즘, 아랍민족주의, 이슬람근본주의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반서양주의의 근원에는 독일의 낭만주의, 반지성주의, 맑스주의 등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동서양을 넘나들며 반서구의식의 흐름을 거시적으로, 그리고 명쾌하게 보여준다는 미덕이 있다. 읽다 보면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대목이 적지 않고, 책을 덮고 나면 뭔가 가닥이 잡히는 듯한 느낌도 든다. 더욱이 세계화 물결을 타고 반미주의의 수위도 높아가는 요즘의 정세를 염두에 두면 한구절 한구절이 민감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긴장감만큼이나 아쉬움과 궁금증이 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옥시덴탈리즘이 유럽에서 연원했다는, 이 책의 가장 주된 테마를 들 수 있다. 저자들에 따르면 옥시덴탈리즘은 물질주의에 대한 성전(聖戰)으로 나타난다. 도시는 물신숭배가 판치는 바빌론이요, 마천루는 인간의 오만을 상징하는 바벨탑이라는 반(反)도시 정서가 근대 서구에서 부활하여 서양혐오증의 주요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도시와 물질주의를 경계하고 거부하는 정서로 말하자면 어디까지가 서양의 영향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뿌리깊은 문화전통의 일부가 아닌가? 상인을 안락하고 평범한 삶에 자족하는 소심한 존재로 폄하하며 숭고한 대의를 위한 자기희생을 찬미하는 영웅주의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보편적인 귀족이데올로기였다. 예컨대 근대 초 영웅심에 사로잡힌 서양의 정복자들이 거꾸로 그들이‘발견한’비유럽의 주민들에 대해 같은 편견을 품었을 것이다. 좋든 나쁘든 서양을 통해 배운 것이야 이루 헤아릴 수가 없겠지만, 서구의 근대성에 대한 저항과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마저도 서양에서 배워야 했다는 주장은 엄밀한 증거와 분석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비서구세계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논리로 여겨진다.
옥시덴탈리즘을 모두 시기와 증오로 왜곡된 편견, 병적인 망상으로 치부하는 논법 또한 온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문명과 자유와 평화는‘서구의 가치’이며, 이를 부정하는 옥시덴탈리즘은 폐쇄된 사회로 귀결함을 전제한다. 실제로 저자들의 시선은 아싸신파(the Assassins)에서 카미까제, 킬링필드, 빈 라덴에 이르기까지 대개 극단적인 사례들에 쏠려 있다. 그러나 모든 옥시덴탈리즘이 이유없는 저항의 산물이 아니며, 모든 반서구주의자들이 계몽의 가치를 부정하며 죽음의 미학에 사로잡힌 테러리스트가 아니라는 것도 염두에 둬야만 균형잡힌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사실 물질과 정신, 또는 근대와 반근대 사이의 갈등은 이데올로기의 차원을 넘어 현실의 역관계와 맞물려 있다. 독일 낭만주의가 프랑스에게 당한 치욕의 부산물이듯이 반서구주의도 서구 패권의 부산물인 것이다.
물론 저자들도 이 상식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담론과 사상의 계보에 머물다 보니 엄연한 지배-피지배관계가 심리의 문제로 축소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군이 무슬림들의 기억에 남긴 깊은 상처를 덮어두고 이슬람권의 옥시덴탈리즘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상 후쎄인을 아랍의 구원자 쌀라딘으로 환생시킨 장본인은 십자군 발언으로 이슬람세계를 공분케 한 부시가 아니었던가? 독일 낭만주의에 실려왔다는 영웅주의가 시오니즘보다 더 큰 화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정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저자들이 이슬람 옥시덴탈리즘의 핵심으로 지목한 여성차별 전통-근대 유럽이라고 여기서 자유롭지는 않았지만-이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라 해도, 그런 지역에 미 여군이 투입되어 무슬림 청년들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태야말로 영웅주의를 부추기는 요인이 아닌가? 저자들의 지적처럼 “서양은 무엇보다도 물질적 안락, 개인의 자유, 그리고 평범한 삶의 의미를 약속함으로써, 유토피아에 대한 기대감을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92면)이 아니라 평범할지언정 평온했던 삶과 그 터전을 훼손한 것이 문제였다. 그럼에도 저자들은 서양 제국주의가 끼친 커다란 해악을 의식하고 있다고 해서, “과거 식민지였던 곳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끔찍한 일에 눈을 감아”(177면)서는 안되며, “비서구 독재자들이 드러낸 잔인함이나 종교혁명가들이 부추기는 자살테러가 미국 제국주의, 세계자본주의, 혹은 이스라엘 팽창주의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착각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간과한 것”(178면)이라고 주장한다.
평자가 보기에 서구의 군사적·정신적 제국주의의 배후에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작동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 책에서 논의하는 옥시덴탈리즘은‘반자본주의’로 바꾸어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이런 큰 틀에서 보면 옥시덴탈리즘이 서양에서 시작되어 비서구세계에 전파되었다기보다는 그 체제가 지리적으로 팽창하고 고도화해감에 따라 그에 대한 저항도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반물질주의가 서양에서 유입된 것이 아니라, 그 체제에 포섭된 비서구세계의 역사적 경험이, 고유한 전통의 일부였던 그런 정서를 서양에 투사하도록 했던 것이다. 반서구주의가 당시 유럽의 주변부에 속했던 독일에서 먼저 발생했다는 사실, 그리고 훗날에는 독일보다 뒤처진 동구의 유대인들이 독일인들을 영혼이 없는 서구인으로 바라보았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여하튼 저자들이 염려하지 않아도 그 체제가 존속하는 한, 비서구세계의 내정에 대한 서구의 개입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저자들의 논지에 공감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서 이 책의 우리말 번역은 꽤 시의적절하며, 국내 학계는 물론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 진지한 성찰과 논쟁거리가 될 만한 묵직한 주제와 과감한 견해들을 담고 있다. 특히 이 책에서 관심있게 다루어진 독일, 일본, 중국, 러시아, 이슬람의 사례에 관한 논의는 이들 분야의 연구자들이 두고두고 곱씹어봐야 할 여러 문제들을 던지고 있다. 아울러 서구문명에 대한 우리의 집단의식이 어떻게 진화했는가 하는 문제 또한 한국 근현대 연구자들에게 흥미로운 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