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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평화의 시각에서 다시 보는 일본의 ‘근세화’
탈아적 역사이해 비판
미야지마 히로시 宮嶋博史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일본 토오꾜오(東京)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교수 역임. 주요 저서로 『양반』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朝鮮土地調査事業史の硏究』 등이 있음. miyajima@hanmir.com
☐ 창비 독자를 위해서
이 글은 일본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잡지 중 하나인 역사학연구회의 『역사학연구(歷史學硏究)』 2006년 11월호에 게재된 졸고 「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の‘近世化’-日本史硏究批判」을 필자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내용은 원래의 논문과 똑같은데 독자의 편의를 생각해서 일본사 관련 용어 등 일부에 설명을 보충했다.
이 글의 취지는 일본 국내의 일본사 연구를 비판하기 위해 그 전형적인 예인 일본의‘근세화’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룬 것이다.1 특히 그‘탈아(脫亞)’적인 일본사 이해에 촛점을 맞춰서 비판했는데, 한국 독자를 위해서는 약간의 부연이 필요하겠다.
원래의 논문은 게재된 잡지의 성격상, 일본 독자를 대상으로 일본에서의 일본사 연구를 비판한 것이므로 한국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이 글의 논의가 한국에서의 한국사 연구와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비판한 문제점 중 몇가지는 한국에서의 한국사 연구에도 해당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두가지 점에 대해서 말해두고 싶다.
하나는‘봉건제’의 문제이다. 일본사 연구에서의‘봉건제’론은 이 글에서도 지적한 대로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등장한 담론으로, 당초부터 극히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주지하듯이 한국사 연구에서도 한국사의 특정 시대를‘봉건제’시대라고 파악하려는 경향이 존재한다. 이것은 일제시대에 일본인 연구자가 주장하던 한국사 이해에서의 정체성론의 일종이랄 수 있는‘봉건제부재론’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것으로서, 1930년대 백남운(白南雲)의 연구 등이 그 선구적인 예이다.2
한국사에서의‘봉건제부재론’을 가장 먼저 내놓은 후꾸다 토꾸조오(福田德三)는‘봉건제’의 부재뿐만 아니라, 조선사회를 전(前)‘봉건제’사회(〓고대사회)라고 주장했으므로, 이것을 비판하기 위해 백남운이‘봉건제’시대의 존재를 제기한 것이었다. 따라서 백남운의 주장은 연구사적으로는 의미있는 것이었지만, 현시점에서 보면 일본‘봉건제’론과 같은 입장, 즉 유럽의 역사발전 과정을 모델로 일본이나 한국의 역사를 파악하려는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사에서 유럽적인 의미의 봉건제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과 한국사의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유럽의 봉건제는 고대제국이 붕괴하는 가운데 출현한 아주 특이한 체제이자 분열적인 체제였다. 그에 비해 중국에서도 후한 이후 분권적인 경향이 계속되었지만 수·당에서부터 송에 걸쳐 과거제도 확립과 그에 따른 지식인 관료에 의한 통치체제의 실현, 문관 우위체제의 실현 등 수많은 혁신이 추진됨으로써 분권화의 극복이 가능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중국의 체제는 유럽의 봉건제보다 수립되기 훨씬 힘든, 그러나 일단 확립되면 훨씬 안정적인 체제였다.3 고려왕조와 조선왕조, 특히 후자는 이러한 중국의 국제(國制)혁신에서 많은 것을 배워 여러 곤란을 극복하면서 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나갔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중국이나 한국의 역사를 유럽을 기준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전도된 방법으로서, 전형적인 유럽중심주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사나 한국사에서 유럽적인 봉건제시대를 설정하려는 시도의 최대 문제점은 그렇게 함으로써 일본사나 한국사의 개성적 전개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 단적인 현상이 유교, 특히 주자학에 대한 부정적 평가이며, 주자학 이념에 입각한 국가체제에 대한 관심의 저조함이다. 이러한 유교에 대한 부정적 평가, 즉‘유교망국론’이라 할 수 있는 관점이 일본사 연구에서보다 한국사 연구에서 더욱 심각하다고 여겨지므로 이 점을 두번째로 지적해두고 싶다.
조선왕조가 주자학 이념을 바탕으로 한 국가였기 때문에‘서양의 충격’에 대응하지 못했고 결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인식은 일본인이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주장하기 시작한 담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도 일본 학계에서는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일본은 유교의 영향이 적었기 때문에 재빨리 근대화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고, 교과서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현저하다. 이는 이 글에서도 지적한 대로 일본사 연구에서‘탈아’적 성격이 단적으로 표출된 것인데, 문제는 한국의 연구에서도 같은 경향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에서‘봉건제’의 존재를 주장하는 연구도, 유교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에 선 연구도 일찍이 일본인 연구자가 주장하던 한국사상(韓國史像)을 부정하려는 노력의 소산이지만, 그 방법 자체는 일본인에 의한 일본사 연구와 같은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이 점에 관해 자각하지 않는 한, 일본인 연구자가 주장하던 한국사상을 진정한 의미에서 극복하는 일은 어렵다고 보인다. (2007년 5월, 미야지마 히로시)
1. 들어가며
『역사학연구』 편집위원회가 이번 특집에 관한 기고의뢰문과 특집의 취지문을 보내왔다. 취지문의 내용을 보면서 역사학연구회도 크게 바뀌었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이 특집의 목적으로 “이 시기(16~18세기) 각 지역의 질서 형성의 다양한 모습에서 어떠한 공통의‘근세성’을 간파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국제(國制), 시장, 풍속론 등 다양한 시점에서 문제제기”를 할 것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연구사적으로 본 특집의 위치 설정은 기술되어 있지만, 왜 지금 이러한 특집을 기획하는지, 오늘의 일본과 세계의 상황에서 일본의‘근세화’를 생각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현재 진행중인 이른바 지구화를 응시하면서 그 역사적 기점을 근대의 출발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시기적으로 한층 더 거슬러올라가 탐구하려는 의도가 근저에 흐르고 있으리라고 상상할 수는 있다. 따라서 이번 특집의 현재적 의의가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고 하면 과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전후체제(戰後體制)가 큰 위기, 전환점을 맞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은 대단히 기이하게 느껴졌다.
전후체제의 기초가 된 평화의 이념이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 오늘날의 가장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요즈음의 움직임을 보면 일본 헌법이 구가(謳歌)하고 있는 평화라는 이념을 지키려는 결의가 얼마나 확고한 것인지, 매우 의아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후체제 혹은 전후민주주의가 왜 현재 위기적 상황에 처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각도의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역사 연구의 입장에서는 전후의 시작에 즈음해서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평화의 이념을 내세우는 데 공감했던 경위 그 자체에 포함되어 있던 다음 두가지 문제점을 재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헌법이 추구하고 있는 평화이념은 주로 2차대전 혹은 15년전쟁(1931년‘만주사변’에서 2차대전 종결까지의 전쟁)에 대한 반성에 의거한 것이었지, 메이지유신 이후의 일본근대사 전체에 대한 반성에 입각한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한층 더 거슬러올라가서‘근세’일본의 체제를 평화라는 관점에서 묻는 것은 의식조차 되지 않았다.
그 일례로 작년에 공표된 한일 양국간 역사 공동연구의 결과를 들 수 있다. 이 공동연구는 교과서문제를 계기로 발족한 것이었는데, 일본의 중세·근세를 대상으로 한 제2분과에서는 당연하게도 토요또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임진왜란)이 큰 테마가 되었다. 회의록을 보면, 한국측 연구자가 왜 이러한 전쟁을 토요또미가 일으켰는지 묻자 일본측 연구자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4 토요또미의 개인적인 성격 문제 혹은 전국시대의 통일과정 자체가 가지고 있던 필연적인 결과다, 무역의 이익을 요구했던 것이다 등 지금까지의 견해가 소개되고 있지만 일본에서의 무사의 등장과 무사에 의한 통일정권의 성립이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에까지 거슬러올라가 이 전쟁을 파악하는 논의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이 공동연구에 참가한 일본측 연구자의 문제라기보다는 일본 내의 일본사 연구 전체의 문제라고 보아야 한다. 평화라는 관점에서 일본의‘근세화’문제를 생각하는 현재적인 의의 중 하나는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전후 평화이념의 또다른 문제는 앞서 말한 것과도 깊게 관련되겠지만, 2차대전을 연합국, 특히 미국과 영국에 대한‘패전’이라고 파악함으로써 아시아에 대한 침략전쟁이라는 측면, 일본의 침략자로서의 측면에 대한 반성이 결정적으로 미약했다는 데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스스로를 서구 열강과 같은 입장에 놓고 자신들이 아시아를‘문명화’할 주체하고 인식하는 데서 기인한 것인데, 그러한 인식을 지탱하는 것이 일본사에 대한‘탈아(脫亞)’적인 역사인식이다. 따라서 일본의‘근세화’를 동아시아세계 속에서 검토하는 작업은 현재도 뿌리깊이 존재하는‘탈아’적‘근세사’이해를 비판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하겠다. 현재의 일본정부가 대미 일변도의 외교를 한층 강화하고 있는 것을 볼 때,‘탈아’의 문제는 낡았으면서도 새로운 문제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2. 현재도 계속되는 ‘탈아’적 일본사 이해와 ‘근세사’ 연구
일본사회의 역사적 전개를 중국이나 한국과의 이질성에 촛점을 맞추어서 파악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럽과의 유사성에서 파악하려고 하는 일본사 이해의‘탈아’적 경향은 아주 뿌리깊은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온 것이 일본‘봉건제’론이다. 일본‘봉건제’론이란, 일본의 역사에서 유럽적인‘봉건제’시대를 설정하면서‘봉건제’의 유무를 중국이나 한국과의 이질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함과 동시에,‘봉건제’시대가 존재했기 때문에 일본의‘근대화’가 가능했다고 하는 역사인식을 가리킨다.
이러한 일본‘봉건제’론에 대해 나는 이미 다른 글에서 비판한 적이 있다.5 즉 일본‘봉건제’론은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등장한 담론이며, 처음부터 이데올로기적인 성격이 강했다는 점, 그리고 일본사 연구에서‘봉건제’론의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시모다 쇼오(石母田正)의 『중세적 세계의 형성』에서 전개되고 있는 일본과 중국의 비교는 대단히 문제가 많다는 것, 전후에 접어들어 이시모다는 중국에 대한 인식의 잘못을 자기비판했지만 그 비판은 표면적인 것이었지 일본사 이해에 대한 자기비판은 아니었다는 것 등이 졸고의 주된 내용이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일본‘봉건제’론에 대해 재차 비판하지는 않겠지만,‘봉건제’론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일본사 이해의‘탈아’적 경향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 전형적인 예로 아미노 요시히꼬(網野善彦)의 담론을 검토하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아미노는 198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이 가장 큰 일본사 연구자이다. 아미노는 자기 연구의 출발점인 이른바 전후역사학을 성실하게 비판함과 동시에, 비농업민의 문제, 일본사에서의 지역적 편차 문제, 도시와 유통의 문제 등 종래의 연구에서는 간과되어온 주제에 주목함으로써 일본사 연구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었다. 게다가 천황제 문제에 시종일관 관심을 가지면서, 천황제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일본’이라는 국호(아미노에 의하면 왕조의 이름)의 성립을 문제삼아 먼 옛날부터‘일본사’라는 것이 존재하는 듯이 기술되어 있는 역사교과서를 비판하는 등 괄목할 성과를 거두어왔다.
이러한 아미노의 연구는 그 자신도 여러번 언급하듯이 전후역사학, 특히 그 대표적 학자인 이시모다의 연구를 비판하는 것이 주된 동기였음에도 불구하고‘탈아’적인 일본사 이해라는 면에서는 이시모다와 기본적으로 같은 입장에 서 있다고 판단된다. 아미노의‘탈아’적 일본사 이해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서 카와무라 미나또(川村溱)와의 대담을 기록한 『열도와 반도의 사회사』6를 들 수 있다.
이 기록에는 대담이란 형식으로 말미암아 아미노의 생각이 솔직하게 나타나 있는데, 그 내용은 문제가 꽤 많다. 아미노와 카와무라는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사회사를 다양한 각도에서 비교하고 있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무로마찌기(室町期, 14세기 중엽부터 16세기 중엽까지) 이후 승려가 일반 서민의 장례식에게 관여하게 되는 데 비해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을 확인하면서, 한국은 일본의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천황이 두명 병존했던 시대, 14세기 후반) 이전의 모습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7 또한 조선시대에 존재한 행상인인 보부상들이 왕권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는 것 혹은 현재의 한국의 장시(場市)에서 여성들이 상인으로서 활약하고 있는 것,8 조선에서는 전통적으로 호색문학(好色文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9 등에 대해 논하면서, 역시 일본 남북조 이전과의 유사성이 강조된다. 아미노가 여기서 거듭 일본의 남북조 이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아미노 사학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 즉 남북조시대를 전후해서 일본열도의 사회가 대전환을 이루었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비교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도출되는 것이다.
아마, 일본이나 유럽처럼 어느 시기에 사회구조의 대전환, 자연과 사회의 관계에 큰 전환이 일어난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차이는, 이러한 현상들에 잘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러한 사회의 전환과 관련하면서 호색문학이 발생해, 일본의 경우 그것이 우끼요에(浮世畵, 에도시대에 발달한 판화) 속에서‘마꾸라에’(枕畵, 춘화)라는 예술로까지 닦여져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0
즉 일본열도에서는 남북조시대를 전후해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회구조의 대전환이 일어났는 데 반해 한반도(그리고 아마 중국대륙도)에서는 그러한 대전환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아미노의 담론은 우선 사실 인식에서 조잡할 뿐 아니라 잘못된 부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비교되고 있는 한반도의 현상들은 대부분 19세기 말이나 현재의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먼 옛날부터 존재하던 것인지 아닌지는 전혀 문제로 여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보부상 이야기는 19세기 후반에 관한 것이며 장시에 대한 내용은 현재의 이야기인데 이것들이 마치 고대 이래 지속되어온 것처럼 대단히 비역사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장시는 압도적으로 남성들의 세계였고 따라서 주막도 존재해야만 했다. 장시에서 여성들이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라고 생각되는데 이러한 역사적인 경위가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게다가 완전한 사실 오인에 의거한 것도 많다. 그 대표적인 예로 문자의 보급에 관한 일본과 조선의 비교론을 들 수 있다. 아미노는 조선시대에 한글을 교육기관에서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는 사실 인식에 근거해서 카나(假名)가 넓게 보급되어 문자를 이용한 지배가 이루어지게 된 일본과 비교하면서, “일본의 남북조에 일어난 것 같은 대변화를 경험하지 않았던 조선, 한국 쪽에는 무(無)문자사회의 다양한 이질성이 넓게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네요”11 등과 같은‘대담한’발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오해인데 조선시대의 한자 학습서에는 개별 한자의 의미와 발음을 한글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교육기관에서 한글을 가르치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미노의 이러한 사실 오인 및 역사의식의 부족은 일본의 현상에 대해 말하는 경우에는 있을 수 없겠지만 조선, 한국에 관한 이야기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게다가 일본과의 비교가 아주 안이하게 행해지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수법은 아미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다른 글에서도 지적해둔 것처럼 이시모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문제이다. 즉 『중세적 세계의 형성』에서 일본과 중국을 비교할 때 핵심을 이루는 것은 중국에서는 동족단체[宗族]가 강고했다는 점인데, 그것이 송대 이후에 형성되기 시작한 새로운 시대의 산물이라는 것이 무시되어 마치 고대 이래 계속 이어진 것으로 보는 등 비역사적인 이해가 전제되고 있는 것이다.12
이처럼 아미노의 한일 비교는 상당히 문제가 많으며, 남북조 이후의 일본을 특별하게 볼 뿐만 아니라 일본을 유럽과의 유사성 속에서 파악하려는 그의 방식은 전형적인‘탈아’적 일본사 이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미노에게‘탈아’적 일본사 이해가 존재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아미노의 출세작이라고 할까, 그의 연구에서 큰 전환점이 된 것으로 알려진 『몽골내습(蒙古襲來)』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그리고 13세기 후반의 일본에서는, 이 양자(농업민과 비농업민-인용자)의 세계 그 자체에 큰 변화가 일어났음과 동시에, 양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분업체계에 중대한 전환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비농업민의 편력, 농업민의‘부랑성(浮浪性)’을 전제로 성립하던 체계는, 그 정착과 함께 질적인 전환을 이루게 되므로 농촌·어촌·산촌 그리고 도시의 분화가 이때 처음으로 명료하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중세사회의 변동이 이 전환을 배경으로 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나타나기 시작한 움직임은 무로마찌기를 넘어 근세·근대에 이르는 일본사회의 구성에 이어지는 것으로서, 같은 중세사회라고 해도 13세기 전반 이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재 우리의 생활에 밀착한 풍속·습관 등이 직접적으로는 무로마찌기까지 거슬러올라갈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 있는데, 그것(현재의 풍속이나 습관-인용자)을 13세기 전반 이전의 사회에 적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리고 조금 더 크게 말하자면,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제 민족-적어도 일본과 한국-에서 이 전환은 농업적 세계가 우세한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생각된다. 일본의 경우 몽골내습으로 출현한 몽골민족의 동아시아 지배는 그 방향에 꽤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었을까.13
나는 이러한 관점에 훨씬 매력을 느끼고 공감을 하는데, 만년이 될수록 아미노는‘탈아’적인 일본사 이해로 복귀해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탈아’적 일본사 이해가 그의 책을 베스트쎌러로 만든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아미노 자신은 본의가 아니었겠지만, 그의 저서가 베스트쎌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천황제 문제 혹은 일본이라는 국호 성립의 문제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후사학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가 제시하는 일본사상(日本史像)이 일본 국민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미노의 연구에서 일관된 주제는 천황제 문제였지만, 남북조를 전후해 일본사회가 대전환했다는 주장과 천황제의 지속이라는 문제가 어떻게 관련되었는지, 그는 결국 이 문제에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다음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아미노의 이해와는 완전히 반대로 천황제 존속의 문제는 오히려 일본사회에서의 대전환의 부재랄까, 불철저함의 소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본 것처럼 일본사 연구에서는 여전히‘탈아’적 일본사 인식이 압도적으로 우세할 뿐만 아니라 역사교과서에도 그것이 여실히 반영되고 있는데,14 극소수나마 이러한 일본사 인식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연구도 간신히 제기되기 시작됐다. 일본‘봉건제’론에 대해서 가장 명확하게 비판하고 있는 연구자는 호따떼 미찌히사(保立道久)다.
나 역시 일본‘중세사’연구자로서 일본‘중세’사회가 유럽 봉건제와 비슷한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적인 사회구성은, 결코 봉건제라는 용어로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유럽과의 대비가 아니라 우선은 동아시아사회의 사회구성과의 상호 영향과 상호 대비 속에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일본 전근대사회의 총결산으로서의‘일본 근세(에도시대)’를 파악하는 정도(正道)이며, 세계사적‘근세’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일본 역사가의 독특한 책무가 아닐까? 그리고 그 작업은 아마도 에도시대를‘근세’라고 부르는 것 (한발 더 나아가 카마꾸라·무로마찌시대를‘중세’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정당한지를 검토할 작업을 포함한다는 것이 나의 입장이다.15
나의 이 글은 이러한 호따떼의 지적에 전적인 동의를 표하면서, 일본‘근세화’를 동아시아세계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때 유의해야 할 일은 일본‘근세화’의 문제는 항상‘근대화’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는 점이다.
앞서 논한 일본사 연구에서의‘탈아’적 이해는, 일본‘근대화’의 성공이라는 현실(이 현실도 한국이나 대만의‘근대화’, 중국의‘개혁·개방화’라는 사태 앞에서 퇴색해버렸지만)을 대전제로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과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일본‘근세’화의 부재 혹은‘근세화’로부터의 격리라고도 할 수 있는 파악방식이다.16 즉 중국이나 한국에서의‘근세화’의 영향을 심각하게는 받지 않았다는 사실 인식을 전제로 하면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파악해 그렇기 때문에‘근대화’를 신속하게 성공할 수 있었다는 역사 이해가 지금도 넓게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의‘근세화’와‘근대화’의 문제는 항상 짝을 이루며 이해되어왔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는 앞에서 소개한 호따떼의 제언을 받아들이면서, 일본의‘근세화’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동아시아세계의‘근세화’에 관해서 나 나름의 이해를 제시한 다음, 그것과 대비하면서 일본의‘근세화’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방향을 제시해보고 싶다. 우선은 중국의 경우이다.
3. 소농사회의 성립과 중국사회의 ‘근세화’
중국사 연구에서‘근세화’문제는, 주지하듯이 나이또오 코난(內藤湖南, 쿄오또대학 초대 동양사학과 교수)이 제창한 송대 이후 근세설 이래 긴 연구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현재는 많은 연구자가 그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나이또오의 송대 이후‘근세’설은 유럽에서의‘근세’〓르네쌍스를 기준으로 한 것이어서, 유럽 기준이라는 의미에서는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적어도 18세기 말까지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중국 전근대의 역사를 유럽 기준으로 파악하는 것은 완전히 전도된 방법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중국‘근세화’의 문제를 종래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파악해보겠다. 즉 소농사회(小農社會)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중국‘근세화’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소농사회론의 관점에서 중국의‘근세화’를 이해한다면, 그것이 단지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동아시아 규모로 연동되는 움직임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농사회론은 동아시아의 전통사회를 그 공통점에 주목하면서 파악하려는 데 그 최대의 목적이 있다.17
중국의‘근세화’를 소농사회론의 입장에서 파악할 때 그 핵심적 부분은 다음 네가지이다. 첫째, 경제에서의 집약적 벼농사 농법 확립, 둘째, 정치에서의 과거제도 확립과 과거 관료에 의한 집권적 국가 지배의 확립, 셋째, 사상에서의 유교혁신운동과 그 결과 등장하는 주자학의 형성 및 주자학의 국가이념으로서의 지위 확립, 넷째, 사회에서의 종법(宗法)질서 확립이다. 중국에서는 이 네가지가 서로 관련되면서도 독립된 움직임으로 송대부터 시작되어 명대에 들어서면서 완성된다는 것이 소농사회론의 입장이다. 먼저 사상문제부터 보기로 하자.
주지하듯이 주자학은 송대에 일어난 유학혁신운동으로서의 송학을 집대성한 것이다. 그리고 송학이란 송대에 전면적으로 확립된 과거제도와 함께 등장한 사대부층의 세계관임과 동시에 그들이 정치적·사회적·문화적 엘리뜨로서 존재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주자학은 이러한 과제에 가장 뛰어난 해답을 제시해주는 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양명학도 사대부의 사상이라는 면에서는 주자학에 대한 전면적 비판이었다고 보기 힘들다.
송학 및 주자학이 사대부층의 사상이었기 때문에, 그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대부라는 독특한 지배엘리뜨의 존재양식과 관련짓는 것이 필요하다. 출신계층 혹은 신분을 불문하고 개인의 능력을 근거로 과거시험에 합격한 다음 황제의 보좌로서 관료가 되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이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존재, 그리고 관료로서의 능력의 기준은 유교 고전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시험받는 도덕능력에 있어야 된다는 공통의 이해, 이렇게 해야만‘만세를 위해 태평성대를 열’수 있다고 하는 평범치 않은 자각 등 사대부는 세계사적으로 보아도 꽤 특수한 지배계층이었다고 할 수 있다.18 그러면 이 특수한 계층이 왜 송대에 형성되어 그 체제가 중국대륙에서 천년이란 장기간에 걸쳐서 존속할 수 있던 것일까? 그 근거를 주자학 이념을 바탕으로 한 국가체제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소농사회의 형성에서 구하려는 것이 소농사회론의 입장이다.
소농사회론의 내용은 어떤 의미로는 극히 단순하다. 그 골격을 이루는 것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가장 중요한 면이라고 생각되는 두가지 특징, 즉 토지 지배가 국가에 집중되고 농민 소경영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달했다는 것에 우선 주목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단지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최대 특징이었을 뿐 아니라 근대 이후의 동아시아사회까지도 강하게 규정했다고 보는 것이 소농사회론의 핵심적 내용이다. 동아시아 전통사회의 두 특징 가운데, 더 기본적이라고 생각되는 농민 소경영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먼 옛날부터 건조지대에서는 밭농사가, 습윤지대에서는 벼농사가 나란히 지어져왔다. 주지하듯이 중국대륙의 황하문명은 건조지대의 관개 밭농사를 기반으로 한 것이어서 벼농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작았다. 이러한 밭농사와 벼농사의 비중이 역전되는 것은, 중국대륙에서는 송대 이후고 한반도·일본열도를 포함한 동아시아 규모에서는 16세기 이후다.
동아시아에서 이처럼 농업의 획기적 변화를 낳은 요인은 그때까지만 해도 산간의 작은 평야지역에서만 가능하던 이식식(移植式) 집약적 벼농사가 대하천의 하류 평야지역에서도 가능하게 된 것에 있었다. 중국대륙에서 이 변화는 송대에 시작되어 명대의 16세기에 이르러 장강(長江) 델타지역의 치수가 안정됨에 따라서 확립되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는 16~18세기에 기본적으로 같은 변화를 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집약적 벼농사의 획기적 확대가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고도의 토지생산성과 높은 인구밀도를 가져온 원동력이 되었다. 몽골제국의 성립과 함께 시작되어 16세기에 비약적으로 확장된 세계시장 형성의 움직임은 동아시아, 특히 중국의 부유함을 동경하면서 기동한 것이었는데, 중국의 부의 원천은 집약적 벼농사의 성립이었던 것이다.
집약적 벼농사의 발전은 단지 농업에서의 큰 변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사회체제나 국가체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예컨대 인구의 현저한 증가는 가족이나 친족제도의 변화와 깊이 결합되었으며 촌락이나 도시의 성격, 상업·화폐경제의 전개 등과도 관련되었다. 이러한 사회 전체의 변화 가운데 특히 중요했다고 생각되는 것은, 관료제를 토대로 한 집권적인 국가체제가 확립되고 이를 지지하는 주자학이 국가이념으로 정착되었으며 양자를 결합시키는 과거제가 확립되는 등 일련의 사태였으며, 더 나아가서 이러한 국가체제의 변화가 토지 지배의 국가적 집중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송대의 과거제 확립은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엘리뜨인 사대부계층의 발흥을 재촉했는데, 앞서 말한 대로 송학은 이러한 사대부층의 사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송대 국가의 운영원리는, 신법당과 구법당의 대립에서 볼 수 있듯이 중앙집권의 강도에 대해 아직은 유동적인 상황이었고 주자학이 국가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송대는 새로운 국가 지배원리의 모색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송·원 시대를 거쳐서 명대가 되어야 비로소 주자학이 국가의 기본이념으로서 정착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이처럼 새로운 국가체제와 그 운영원리의 확립에 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그 선진적인 성격 때문이었으며, 한국이나 일본의 정치조직이 중국의 예를 배우면서 국가체제를 구상할 수 있던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러면 중국에서 긴 모색기를 거치는 가운데, 왜 주자학이 국가운영의 기본적 이념으로 정착되었던 것일까? 그것은 주자학이야말로 소농사회에 가장 적합한 국가체제를 지지할 수 있는 이념과 구체적인 정책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집약적 벼농사의 발전은 농업경영적으로 보면 가족경영의 발전을 촉진했다. 즉 새롭게 획득된 농업생산력의 담당자로서는, 고용 노동력이나 예속적 노동력을 이용하지 않고 가족 노동력만을 이용한 경영이 가장 적격이었다. 화북(華北)의 농업은 그 기후적 조건 때문에 축력(畜力)의 이용이 불가결했고 가족경영은 적합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역축(役畜)을 소유한 대경영과 이를 보조할 노동력을 제공하는 영세경영 내지 예속적 노동력의 이중구조가 존재했던 데 비해, 집약적 벼농사의 발전은 이러한 이중구조를 해소함으로써 가족경영의 보편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송학, 특히 주자학은 이렇게 대두돼온 농민층을 어떻게 하면 지배할 수 있을지를 강하게 의식한 사상이었다. 주지하듯이 주자학은 생래적인 신분의 차이를 부정하고 배움의 차이에 의해 사회질서를 형성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귀족체제를 부정하면서 과거에 합격함으로써, 즉 실력에 의거해서 지배엘리뜨가 된 사대부층에 걸맞은 사상임과 동시에, 경영주체로 성장해온‘백성’의 존재를 인정해 그들을 통치하는 것을 자각적으로 추구하는 가운데 성립한 사상인 것이다.
게다가 집약적 벼농사의 발전은 가족경영의 발전을 가능케 했을 뿐만 아니라 지배층의 농업으로부터의 분리를 촉진했다. 중국 강남의 개발에 즈음해서는 사대부층의 역할이 컸는데, 일단 개발이 완료되면 그들은 농업생산에서 물러났다. 왜냐하면 집약적 벼농사에서는 가족경영이야말로 가장 높은 생산력을 실현하므로 사대부들은 스스로 농업에 종사하는 것보다는 지주로서 지대를 얻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과거 준비에 전념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같이 농업생산에서 유리된 사대부층은 동시에 농촌 지배를 위한 독자적인 기반도 상실하게 되었다. 사대부들은 지배엘리뜨이기는 하지만 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특권도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토지 지배는 완전히 국가에 집중·독점되는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어린도책(魚鱗圖冊)」이라는 중국의 토지장부는 이러한 토지 지배의 국가적 집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거기에는 업주(業主, 토지소유자)들이 모두 일률적으로 파악되어 있어서, 사대부라고 해도 일반 농민층과 마찬가지로 업주로 등록되어 있었다.
유교는 원래 군현제(〓관료제)에 의한 국가체제보다는 봉건제에 의한 국가체제를 이상으로 삼았지만, 주자학은 관료제에 의한 국가체제를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관료제에 의거한 국가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방의 토착적 정치세력을 얼마나 억제할 수 있는가의 문제였는데, 앞에서 서술한 지배엘리뜨의 존재양식은 관료제적 국가체제에 대단히 적합한 것이었다 하겠다. 일찍이 중국대륙의 역대 왕조에서는 볼 수 없던 명대·청대의 안정성은 이렇게 해서 담보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4. 주자학 이념이 주도한 조선사회의 ‘근세화’
주지하듯이 1392년 성립된 조선왕조는 당초부터 주자학을 국가이념으로 내걸고 건국되었다. 그후 주자학적 이념은 국가체제·사회체제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해가게 되었는데, 이러한 한국사회의 전면적 주자학화에 대해서는 일본사회의 부분적 유교화, 주자학의 체제교학(體制敎學)으로서의 미확립이라는 현상과 대비해서 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의 다음 말이 그러한 이해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조선을 홍수형(洪水型)이라고 하며 일본을 누수형(漏水型)이라고 한다. 홍수형은 고도문명이 가한 압력 탓으로 벽이 무너져버려 동일한 문화권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미크로네시아군도(群島) 같은 경우에는 문화의 중심부로부터‘무관’혹은‘무관’에 가깝게 된다. 일본은 천장에서 비가 똑똑 새므로 병탄(竝呑)되지도 않고, 무관하지도 않으면서 이것에‘자주적으로’대응해나가 개조조치를 강구할 여유를 가지게 된다.19
이러한 이해는 언뜻 보면 옳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잘 생각해보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예컨대 한국을 홍수형이라고 할 경우, 신라나 고려시대에는 중국과 같은 문화권에 들어가지 않고 오히려 율령제 수용 등의 면에서 야마또(大和)국가와 유사한 구석이 많았던 데 비해 왜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부터 중국과 같은 문화권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중국의 국가체제나 사회체제를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과연 그리 쉬운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19세기에 근대 서구문명의 수용이 용이하지 않았던 것처럼 당시 최선진의 문명이라고 할 수 있는 송대 이후의 중국문명은 의도만 있으면 간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을까? 마루야마로 대표되는 종래의 이해에서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가 도외시된 채 조선사회의 중국화가 운운되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시작된‘중국화’과정은 결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를 어떻게 파악할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은 견해가 제시되어왔다. 한국 학계의 통설적인 이해는 고려 후기에 성장한 지방의 중소지주가 주자학을 수용하면서 조선왕조의 건국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즉 이 왕조교체는 지배적인 사회계층의 변동을 수반한 획기적인 것으로서, 그 변화를‘근세화’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 주류적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에 대해서 한국 내외에서 비판이 제기되었는데, 특히 미국 학계에서 반론이 강하다. 미국 학계의 비판적 의견을 대표하는 연구로 존 던컨(John Duncan)의 저서를 들 수 있다.20 던컨은 조선의 건국을 주도한 유교 관료층의 상당수는 고려시대에 벌써 중앙 정계에서 높은 지위에 있던 집안 출신이었고, 따라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는 지배층의 대폭적인 변동을 수반하는 것으로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고려 후기 지배층의 자기혁신으로 조선의 건국을 설명하는 것이 던컨의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던컨의 견해는, 부계 혈연조직이 존재하지 않았던 고려사회(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다)에 대해서 그 존재를 전제로 유력 가문을 분석하는 등 실증적으로는 아직 불충분한 면이 있지만, 조선 건국을 주도한 유교 관료층의 대부분이 결코 신진세력의 부류에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 관해서는 옳은 주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는 지배층 내부의 자기혁신 움직임이 그 기본이었다고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이러한 자기혁신을 가능케 한 요인은 던컨도 지적하듯이 몽골 세계제국의 붕괴와 거기에 연동한 국내외의 혼란이었다. 그러나 이 자기혁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은 주자학 이념에 의거한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국가모델의 수용이었으며, 그 모델은 명왕조에서 실제로 진행중인 프로그램이었다. 이에 관해서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가 정확하게 지적한 바 있다.
조선에서는 신유교의 도래와 함께 사회문제 전반에 대해서 행동하도록 촉구하는, 동참하지 않을 수 없는 이데올로기가 출현했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정치적 담론을 전에 없던 정도로 고무했다. 신유교는 사회적·정치적 혁신에 관한 명확한 교시를 포함하고 있어 고대 중국의 성인군자들의 모범적인 세계가 실현 가능하다는 희망을 갖게 만들었다. 그뿐 아니라 개혁을 향한 신유교의 추진력은 그 신봉자를 행동주의자로 바꾸어 사회변혁 프로그램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것을 요구했다. 조선 초기의 신유교 신봉자들은 행동에 대한 호소에 감염돼 조선사회를 유교화하는 개혁프로그램을 결정해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11세기 중국에서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 그들의 프로그램은 동아시아세계에서 가장 야심차고 창조적인 시도가 되었던 것이다.21
그러나 이 야심찬 프로그램의 진행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주 곤란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사회에는 주자학적 이념에 합치하지 않는 측면이 너무 많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우선 국가체제 면에서는 귀족적인 세력이 중앙 정계를 좌지우지했으며, 고려 초기부터 실시되어왔던 과거도 중국 당대와 마찬가지로 관료 등용제도로서는 제한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에 불과했다. 또한 지방 통치체제 면에서도, 고려의 군현제는 중국과 달리 통일적인 지방 지배를 위한 제도가 아니었고,22 지방사회의 실력자인 이족층(吏族層, 향리계층)의 존재가 중앙집권적인 지방 통치를 방해하고 있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회체제 면에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불교나 샤머니즘이 지배적이었는데, 무엇보다도 가족·친족의 구조가 유교·주자학이 전제로 하는 종법주의와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주지하듯이 유교, 특히 주자학에서는 국가체제가 부계 혈연원리에 따른 가족질서의 논리에 의거해 구상되고 있는데 당시의 사회에서는 부계 혈연원리를 바탕으로 한 가족·친족 결합이 지배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즉 가족의 구성은 일반적으로 부계 혈연구성원과 그 배우자뿐만 아니라 외가, 처가의 구성원을 포함했으며 결혼 후의 거주형태도 친가 거주, 외가 거주, 처가 거주 등 세 형태 중 임의로 선택되었던 것이다.23 게다가 부부관계에서도 일부일처제는 성립되어 있지 않았고, 귀족층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수의 부인이 존재했으며 부계 혈연관계 내부의 결혼도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비주자학적 국가체제·사회체제에 대한 전면적인 변혁은 먼저 국가체제의 변혁으로부터 착수되었다. 유교 교육의 진흥과 그것을 위한 학교제도의 정비, 유교 경전의 지식을 묻는 과거시험(문과)의 비중 증대 등이 건국 초기부터 도모됨과 동시에, 중앙관제의 정비나 언관(言官)의 권한 강화, 지방세력의 억압책 등이 실행되었다. 또한 불교에 철저한 억압이 가해지는 한편, 중앙 및 지방의 공적 제사가 유교식으로 치러졌을 뿐만 아니라, 종래의 민간 제사를 음사(淫祀)로 여겨 탄압이 가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여러 알력을 낳아, 우여곡절을 거치는 가운데 서서히 진전되어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최종적인 결과는 주지하는 대로 중국의 명·청 시대 이상으로 주자학적인 국가·사회체제로 귀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러한 사태가 생긴 것일까? 주자학 이념에 합치하는 소농사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고 파악하는 것이 바로 소농사회론의 입장이다.
한국에서 주자학의 담당자로 등장한 것은 고려 말기의 신진 관료층이었다. 그들은 조선 건국 이후, 중앙 및 지방에서 지배세력의 지위를 굳혀가는 가운데 점차 특권계층화되었다. 즉 양반층의 성립이라는 사태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양반층의 성립과 그들의 존재양식의 특징이 주자학화의 양상을 결정지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조선왕조 건국을 주도한 집단은 이미 건국 이전에 과전법(科田法)으로 불리는 전제(田制)개혁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고려 말기에 문란했던 관료층에 대한 수조권(收租權, 국가를 대신해서 조세를 징수할 권리)의 분여(分與)를 국가가 강력하게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건국 이후에도 이 방침이 답습됨과 동시에, 관료에 대한 과전 지급뿐 아니라 정부기관이나 지방의 토착세력에 대한 수조권 분여도 축소·통제하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른바 국용전제(國用田制) 확립의 방향인데 모든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국가에 일원화하려는 정책이었다. 이 과정에서 수조권 분여의 특권을 향유하고 있던 계층의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관료층 중 일부는 이것을 억제하면서 국용전제를 추진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16세기 중엽에 수조권 분여가 완전히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양반층은 한편으로 특권화의 길을 걷는 것과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토지에 대한 특권을 상실하는, 자기모순적인 존재였다고 볼 수 있다.
양반층의 토지에 대한 특권이 부정되기에 이른 것은 관료제적 국가체제를 목표로 하는 주자학적 이념에 의거하는 것이었지만, 단지 이념만으로 이러한 대변혁이 진행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거기에는 그러한 정책을 가능하게 하는 현실적인 기반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기반이 바로 집약적 벼농사가 확립된 것과 그것에 기초해 양반층이 농업경영으로부터 물러난 것이었다. 양반계층은 지배층이면서도 토지에 대한 아무런 지배권·특권도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중국의 사대부와 같은 성격의 존재였던 것이다. 전면적인 주자학화는 이러한 양반의 존재양식으로 인해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조선시대의 양반은 중국의 사대부와 비교할 때 상당히 폐쇄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즉 그들의 지위는 세습적인 신분으로서의 측면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 수험자격의 신분적 제약이나 과거 합격자가 소수 가문으로 집중되는 현상 등에 양반층의 폐쇄적·신분적 성격이 전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주자학의 이념에 배치되었지만 조선왕조는 과거에 의한 지배엘리뜨의 유동성보다 안정성을 중요시했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주자학을 배워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자기의 존재이유로 삼는 양반층이 밀도 높게 존재하게 된 것이 주자학 이념을 전사회적으로 보급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사회의 주자학화를 생각할 때, 지배계층의 존재양식 문제와 함께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앞에서도 지적한 가족·친족의 문제이다.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나 처계와의 관계가 다같이 중시된 가족·친족관계는 16, 17세기에 크게 변해서 부계 결합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한편에서는 양반층이 폐쇄적인 신분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는 과정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집약적 벼농사가 확립됨에 따라 소농민 경영이 일반화되면서 농민세계에서도 가족이 경영단위로서 안정화되었으며 가계(家系)라는 관념이 보급되어갔기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했다. 즉 농민 소경영이 확립되어 있지 않던 단계에서 가족은 일시적인 동거집단으로서의 성격을 면할 수 없었던 데 비해서, 소농사회의 확립에 따라 농민 차원에서도 처음으로 가족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선조로부터 물려받고 자손에게 이어나가야 할 것이라는 관념이 현실화됐던 것이다.
앞서 밝혔듯이 주자학은 국가체제를 종법질서에 의거해 구상하는 사상이다. 그리고 그 점에 주자학을 이념으로 한 국가체제의 강인함과 취약함의 비밀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족이라는 아주 자연스러운 관계에 의거해 국가를 형성하는 것은 강력한 국가 지배를 옹호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가족을 규정하는 질서와 국가를 규정하는 질서는 현실적으로는 서로 모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국가질서와 종법질서의 관계는 중국에서도 큰 문제였는데, 중국의 경우에 관해서는 단조오 유따까(壇上寬)의 훌륭한 정리24에 나도 찬성하고 싶다. 그러나 덧붙여 다음의 두가지를 언급해두고 싶다.
첫째, 국가질서와 종법질서의 일치는, 그가 지적하듯이, 이상론이며 현실에서는 불가능함에도 그것이 단순한 이상론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정치를 움직이는 기능을 수행했다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 황제나 국왕의 전횡, 특권관료나 내시의 발호 등 국가체제에 큰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바로잡는‘용수철’로서, 즉 비판의 근거로서 이 이상론은 현실적으로 기능해왔던 것이다. 조선왕조에서는 특히 그랬다. 조선 건국을 주도한 정도전(鄭道傳)보다 고려를 지키자고 주장한 탓에 암살된 정몽주(鄭夢周)를 학문적 스승으로 받드는 사림파가 집권하게 되는, 보기에 따라서는 극히 기묘한 사태도 주자학적 이상국가론을 빼놓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주자학적 이상론은 이같이 현실의 국가를 비판하는 기능까지 수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둘째, 국가질서와 종법질서의 일치라는 이념은 종법질서의 담당자가 민중 수준에까지 확산됨에 따라 처음으로 전사회화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주지하듯이 고대 중국에서는 왕족과 제후 들만을 종법질서의 실천주체로 상정했다. 송대 이후 사대부도 종법의 실천주체로 인식되었지만, 서민은 여전히 종법질서에서 소외된 존재로 머물렀다. 중국에서는 명대 이후 종족의 형성이 본격화되지만 국가는 계속해서 종족 결합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비로소 청대가 되어서야 그것을 공인하게 되었다.25 그리고 이렇게 해서 주자학적 국가이념은 그 사회적 기반을 그전보다 훨씬 확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조선에서는 종족 결합이 당초부터 국가적 규제를 받지 않았고, 따라서 중국 이상으로 주자학적 이념이 사회 전반에 깊이 침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해온 것처럼 조선의‘근세화’는 주자학적 국가모델의 실현이라는 프로그램에 따라 추진되어 긴 시간을 거치면서 진행되었다. 즉 주자학이 현실을 변혁하는 동력의 역할을 완수했는데, 18세기가 되면 부계 혈연결합의 강화와 장자의 지위 강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균분상속이 지배적인 중국 이상으로 종법질서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전면적인 중국화와는 달랐다. 양반이라는 지배층의 존재양식이 그 차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데, 양반들은‘국속(國俗)’, 즉 조선의 독특한 풍속의 존재를 그 신분적 특권의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5. 동아시아적 동시대성이 결여된 일본의 ‘근세화’
중국과 한국의‘근세화’를 이렇게 이해할 때, 일본의‘근세화’는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그것은 동아시아 규모의‘근세화’라는 변동에 대해 일본은 대응할 수 없었다는 것, 즉 일본의‘근세화’는 동아시아적 동시성이 부족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 주자학의 존재는 일찍이 카마꾸라시대(鎌倉時代, 1192~1333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무사가 독자적 정권을 수립한 시대)에 알려졌지만, 주자학 이념에 의거하는 국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은 고다이고(後醍醐) 천황의‘켄무신정기(建武新政期, 고다이고 천황이 카마꾸라막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소농사회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이루는 집약적 벼농사의 형성이나 거기에 동반하는 지배층의 토지로부터의 분리 현상은 일본에서도 볼 수 있던 것으로서, 그것은 일본의‘근세화’를 크게 규정하기도 했다. 따라서 일본의‘근세화’는 소농사회가 형성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응할 국가 지배체제가 수립되지 않았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입장이다.
왜 일본에서는 소농사회에 가장 적합한 주자학적 지배체제가 형성되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주자학의 이념에 맞지 않는 존재인 무사(武士)에 의해서‘근세화’가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토요또미정권이나 그뒤를 이은 토꾸가와(德川家康)정권의 지배 근거는 무위(武威)였으며 무위에 의한‘평화’의 실현 즉, 천하총무사(天下柘無事, 국내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이념)였다. 이‘평화’의 내적 실체에 대해서 미즈바야시 타께시(水林彪)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토요또미권력이 사회를‘평화’화한 길은 사회평화화를 실현하는 두 형태 중에서 하나의 방식을 전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회의 평화화에는 군대 내적 평화질서의 원리가 군국주의 질서의 확립을 매개로 전사회로 확대되어나가는 위로부터의 길과, 폭력을 배제한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시장경제가 점차 발전해나가면서 이윽고 시장적 평화의 원리가 전사회를 감싸기에 이르는 아래로부터의 길이라는 두가지 길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두가지 길은 16세기 일본사회에서 실제로 대립적으로 존재했다. 전자는 전국 다이묘오(戰國大名)권력으로부터 오다(織田)·토요또미권력으로 이어져간 길이며, 후자는 촌락공동체간의 자주적 평화질서의 연장선상에 형성되는 국지적 시장권이 담당하던 길이다. 그리고 이 두가지 길이 대항하는 역사는 전자의 길, 즉 군국주의 국가의 확립에 의한 사회의 평화화가 승리하는 형태로 종국을 맞이했던 것이다.26
미즈바야시의 지적은 일본‘근세’의‘평화’의 질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한가지 간과된 것은‘평화’화의 또다른 길, 즉 중국이나 한국의‘근세화’와 그 속에서의‘평화’의 실현이라는 현상이다. 일본의‘근세’가 기본적으로 무위에 의해‘평화’가 담보되는 체제였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법으로써 이(理)를 깨되 이로써 법을 깨지 않는다”27는 법관념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일본의‘근세’를‘봉건제’의 확립이라든지‘집권적 봉건제’의 확립이라고 이해해서 그것을 긍정적으로 파악하려는 일본사 연구의 주류적인 입장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평화의 문제가 크게 부상하고 있는 현재, 일본‘근세’가 가진 부(負)의 유산을 자각하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고 나는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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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세라는 말은 원래 일본에서 근대와 같은 의미로, 즉 현재와 같은 시대라는 의미에서 사용되었는데, 중세 및 근대와 구별되는 하나의 시대로서 근세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러일전쟁 시기부터이다. 16세기 토요또미정권 성립 이후를 근세로 보는 것이 현재의 주류적 견해인데, 근세를 근대와 전혀 다른 반동적 시대로 보는 이해와 근대를 준비한 긍정적 시대로 보는 이해가 대립적으로 존재해왔다. 최근에는 후자의 이해, 즉 근세에 대한 긍정적인 이해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좌파적 연구자도‘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참가자도 이러한 점에서는 같은 입장에 있다.↩
- 백남운의 연구는 봉건제 문제만이 아니라 실학사상의 문제, 자본주의 맹아의 문제 등 여러 면에서 해방후 북한과 한국의 연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졸고 「日本史·朝鮮史硏究における‘封建制’論」, 宮嶋·金容德編 『近代交流史と相互認識 II』, 慶應義塾大學出版會 2005 참조.↩
- 유럽의 봉건제가 고대제국의 붕괴과정에서 나타난 열악한 체제였다는 점, 중국과 같이 관료제에 의해 그 붕괴과정에 대응하는 것이 훨씬 어려웠다는 점에 관해서는,J. R. 힉스 지음, 김재훈 옮김 『경제사 이론』(새날 1998), 33~38면 참조↩
-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엮음 『韓日歷史共同硏究報告書』 제2분과 편(한일문화교류기금 2005), 특히 요네따니 히또시(米谷均)의 「조선침략 전야의 일본 정세」를 둘러싼 토론부분 참조.↩
- 졸고 「日本における‘國史’の成立と韓國史認識」, 宮嶋·金容德編 『近代交流史と相互認識 I』, 慶應義塾大學出版會 2001; 졸고 「日本史·朝鮮史硏究における‘封建制’論」.↩
- 이 책은 원래 『列島と半島の社會史』(作品社 1988)로 출판되었지만, 여기에서는 『歷史としての天皇制』(作品社 2005)에 재록된 것에 의거했다. 아미노의 연구는, 박훈 옮김 『일본이란 무엇인가』(창비 2003)를 통해 한국에도 소개된 바 있다.↩
- 같은 책 104~105면.↩
- 같은 책 136~38면.↩
- 같은 책 195면.↩
- 같은 책 197면.↩
- 같은 책 119면.↩
- 졸고 「日本史·朝鮮史硏究における‘封建制’論」, 292~93면.↩
- 小學館編, 日本の歷史 第10券 『蒙古襲來』(1974), 443면.↩
- 현재 일본과 한국의 역사교과서에 서술된‘봉건제’론이 지닌 문제점에 관해서는, 졸고 「高校の歷史敎育における世界史認識と‘封建制’論」, 宮嶋·金容德編 『近代交流史と相互認識 III』, 慶應義塾大學出版會 2006 참조.↩
- 保立道久 『歷史學をみつめ直す-封建制槪念の放棄』, 校倉書房 2004, 183면.↩
- 다만 일본의 중국사 연구자나 한국사 연구자 사이에서는 명·청시대나 조선시대를‘근세’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일본사 연구자 사이에서는 중국·한국의‘근세화’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향, 고대 이래의 체제가 지속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아미노에게도 그러한 점이 보인다.↩
- 동아시아의 전통사회를 소농사회라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입장 및 소농사회의 내용에 관해서는 이미 「동아시아 소농사회론과 사상사 연구」(한국실학연구회 편 『한국실학연구』 5호, 2003)에서 간략하게 논의한 적이 있다. 이 글에서는 지면 관계상 전면적으로 다룰 여유가 없는데, 그 자세한 내용은 『동아시아 소농사회론』이란 제목으로 이른 시일 내에 출판될 예정이다.↩
- 송학 및 주자학의 대두와 그 담당자인 사대부층의 독특한 모습에 관해서는, 島田虔次 『朱子學と陽明學』, 岩波書店 1967 참조.↩
- 丸山眞男 「原型·古層·執拗低音」, 加藤周一·木下順二·丸山眞男·武田淸子 『日本文化のかくれた形』, 岩波書店 1984, 134면.↩
- John B. Duncan, The Origins of The Choson Dynasty,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2000.↩
- Martina Deuchler, The Confucian Transformation of Korea: A Study of Society and Ideology, Harvard University Press 1992, 27면.↩
- 고려의 군현제가 균일한 지방 통치체제가 아니라 신분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旗田巍 『朝鮮中世社會史の硏究』(法政大學出版局 1972)에 수록된 여러 논문들 참조.↩
-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에 걸친 거주형태를 3변적(trilateral)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한 연구로, Mark A. Peterson, Korean Adoption and Inheritance, Cornell University Press 1996(한국어판 김혜정 옮김 『유교사회의 창출-조선 중기 입양제와 상속제의 변화』, 일조각 2000) 참조.↩
- 壇上寬 「中國專制國家と儒敎イデオロギー-‘士’身分の變遷を通して」, 『史窓』 51호, 1994.↩
- 井上徹 『中國の宗族と國家の禮制-宗法主義の視点からの分析』, 硏文出版 2000 참조.↩
- 水林彪 『封建制の再編と日本的社會の確立』, 山川出版社 1987, 154면.↩
- 에도시대 막부의 법령 「武家諸法度」 제3조에 있는 문구, 앞의 책 163면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