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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왜 미국 드라마 열풍인가
김봉석 金奉奭
영화 및 대중문화 평론가. 저서 『컬처 트렌드를 읽는 즐거움』 『공상이상 직업의 세계』 『일본문화의 힘』(공저) 『클릭 일본문화』(공저) 등이 있음. lotusid@naver.com
미국 드라마의 화려한 부활
요즘 미국 드라마(미드)가 열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공중파에서는 수사물 「CSI」 씨리즈, 의학 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 역사물 「로마」, 쏘프오페라의 변종인 「위기의 주부들」 등이 방영되었고, 케이블에서는 「프리즌 브레이크」 「로스트」 「히어로즈」 「크리미널 마인드」 「24」 「쏘프라노스」 「웨스트 윙」 「쎅스앤더씨티」 「배틀스타 갤럭티카」 등 다양한 장르가 수십종씩 선을 보였다. DVD중에서 가장 판매가 잘되는 분야도 미국 드라마다. 그 열기는 인터넷에서 더욱 뜨겁다. 미국에서 방영되고 한시간만 지나면 인터넷에 그 드라마의 동영상과 자막이 뜬다. 인터넷에서 먼저 인기를 얻은 드라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블에서 방영된다.
과거에도 미국 드라마가 인기를 얻은 적이 있다. 70, 80년대에는 「형사 콜롬보」 「6백만불의 사나이」 「쏘머즈」 「두 얼굴의 사나이」 「전격 Z작전」 등이 화제였다. 「수사반장」과 대하드라마를 제외하고는 멜로물 일색이던 한국 드라마가 보여주지 못한 세계를 미국 드라마가 대신 체험하게 도와줬다. 90년대 들어 한국 드라마의 수준이 올라가는 것과 함께 미국 드라마의 인기는 식었고, 공중파에서 푸대접을 받았다. 「X파일」 정도가 마니아층을 거느리며 화제가 된 사례이다. 그러나 최근 2, 3년 사이 미국 드라마는 젊은층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었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주인공 스코필드는‘석호필’이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고, 스코필드를 연기한 웬트워스 밀러(W. Miller)는 한국에서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이것은 단지 한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을 비롯해 세계에서 미국 드라마가 인기를 얻은 것은, 미국 내에서도 한때 침체되었던 드라마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면서부터다. 한국의 대중이 어느날 갑자기 미국 드라마에 열광하게 된 것이 아니라, 미국 드라마의 질이 높아지면서 함께 따라간 것이다.
우선 미국 드라마의 부활 과정을 살펴보자. 미국 드라마는 80년대 후반부터 한동안 침체했다. 그것은 할리우드의 변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80년대 들어 영화산업의 불황을 타개한 것은 스티븐 스필버그(S. Spielberg)와 조지 루카스(G. Lucas)가 주도한 블록버스터 혁명이었다. 스필버그와 루카스는 SF, 호러, 판타지 등 아이들이나 극성팬의 전유물로 여겨진 하위장르를 주류로 끌어올려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블록버스터로 변화시켰다. 이런 장르들은 대체로 B급영화나 TV드라마의 몫이었지만 스필버그사단이 만들어낸 블록버스터를 본 관객들은 더이상 작고 답답한 TV화면의 드라마에 만족하지 않았다. 89년부터 시작된 「베이워치」가 멋진 해안을 배경으로 쎅시한 남녀를 잔뜩 보여주면서 세계적으로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지만, 90년대 미국 드라마의 주도권은 씨트콤으로 넘어갔다. 「싸인펠드」 「프렌즈」 등의 씨트콤은 씨추에이션 코미디라는 말처럼, 소수의 주인공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벌이는 소동이나 다툼, 로맨스를 그린 소극(笑劇)이다. 인기를 얻은 배우가 계속 출연하고 재능있는 작가들이 흥미로운 상황을 연이어 고안해내기만 하면, 씨트콤은 영원히 계속될 수도 있는 아이템이다. 출연료를 제외하면 제작비도 많이 들지 않는다. 또한 「써바이버」 「아메리칸 아이돌」 등 드라마보다도 선정적이고 생생하며 더욱 극적이기까지 한 리얼리티쇼가 선풍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드라마는 잊혀진 듯했다. 94년에 시작된 「X파일」이 초반에 고전하다가 차츰 마니아층을 형성하는 정도에 그쳤다.
미국 드라마의 혁명은 변방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케이블채널 HBO는 98년과 99년에 각각 「쎅스앤더씨티」와 「쏘프라노스」를 방영한다. 「쎅스앤더씨티」는 뉴욕을 배경으로 칼럼니스트인 캐리와 친구들이 겪는‘쎅스’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공중파에서 보여주기 힘든 소재를 정면에서 다루는 것에 더해,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벌어지는 온갖 에피쏘드, 첨단 유행의 도시인 맨해튼의 패션과 트렌드를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일종의 씨트콤이라고 할 수 있지만, 훨씬 폭이 넓고 화려하다는 점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드라마이다. 「쏘프라노스」는 음악영화가 아니라‘쏘프라노스’라는 이름을 가진 이탈리안 갱 두목의 이야기다. 「쏘프라노스」는 비정하고 야비한 갱단의 세계를 그리는 갱스터영화의 전통을 잇고 있으면서도,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갱의 일상, 이를테면 자식 때문에 고민하고 부부관계 때문에 고통받는 주인공이 결국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는 모습 등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는 갱스터 장르의 전형을 뛰어넘는 탁월한 성취를 거두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쎅스앤더씨티」와 「쏘프라노스」가 그동안 공중파 드라마에서 볼 수 없었던 비밀스러운 세계를 꼼꼼하게 폭로한 획기적인 시도였다면, 2001년의 「밴드 오브 브러더스」는 드라마가 영화와 겨룰 수 있음을 보여준 대작 드라마였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한 이 드라마는 2차대전을 다룬 전쟁물이다. 전투에 참가한 미군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스펙터클한 장면과 함께 인간의 진솔한 면모를 그리고 있으며,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확장판인 동시에 영화를 뛰어넘는 완성도를 갖춘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HBO는 이밖에도 공중파에서 시도하지 않은 새로운 드라마를 속속 선보였고, 연이은 호평을 받으면서 미국 드라마 부활의 전조를 알렸다.
할리우드급 블록버스터 드라마
주류문화는 언제나 경직되고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새로운 흐름이 시작되어도 길어야 5년이다. 아무리 혁명적인 시도라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끌리셰가 된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금방 대중에게 외면받는 것이다. 할리우드는 지지부진해질 때마다 항상 외부에서 새로운 인력을 수혈받으면서 혁신을 거듭해왔다. 20, 30년대에는 프리츠 랑(Fritz Lang) 등 독일의 표현주의 감독들을 불러들여 필름누아르 같은 새로운 장르에 힘을 불어넣었고, 70년대에는 동구권에서 망명한 감독들, 90년대에는 인디펜던트 영화계에서 성장한 감독들, 21세기에는 홍콩 영화의 감독과 배우 들을 불러들였다.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누구보다 빠르게 변화하지 않고서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엔터테인먼트의 세계다. 역설적이게도 할리우드가 활기를 얻으면서 침체되었던 드라마는, 이제 할리우드의 손길이 뻗치면서 화려하게 되살아났다.
여기에 불을 붙인 사람이 바로 할리우드의 큰손 제리 브룩하이머(J. Bruckheimer)다. 브룩하이머는 「플래시댄스」 「탑건」 「더록」 「진주만」 등 대중이 열광하는 블록버스터를 양산한 할리우드의 특급 제작자다. 그는 2000년 CBS에서 방영된 「CSI」를 제작하며 드라마 제작에 뛰어들었다. 작가만도 수십여명에 이르는 「CSI」는 과학수사대의 감식반을 무대로 범죄사건을 다루는 수사물이다. 기존의 수사물이 주로 목격증언과 심문으로 서사를 끌어갔다면, 이 드라마는 철저하게 증거로 이야기한다. 자폐적 경향마저 엿보이는 주인공 그리썸 반장은 목격증언을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의 감각에는 오류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주변을 탐문하고 직접 범인을 쫓는 것보다는 증거를 모아 가설을 세우고 다시 분석하여 새로운 결론을 끌어내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혈흔과 DNA검사는 기본이고, 머리에 구멍이 났다면 무슨 도구가 사용되었는지, 어떤 위치에서 내리친 것인지, 범인의 키가 얼마인지 등을 모두 실험실에서 밝혀낸다. 익사했다면 폐 속에 가득찬 물의 미생물을 분석하여 그것이 어느 호수 또는 강에서 왔는지도 알아낸다. 「CSI」는 다양한 증거를 분석하는 과정은 물론, 증거를 통해 드러난 사건의 실제 범행장면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생생하게 재연한다. 총알이 어떻게 살을 뚫고 들어와 뼈와 내장을 손상시켰는지 등을 극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두세개의 사건을 동시에 진행시키는 형식으로 시청자가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한 것도 주효했다.
「CSI」는 기존의 수사물과는 달랐다. 검시관이 나오는 드라마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 드라마는 단순히 증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증거를 다루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할리우드가 컴퓨터그래픽을 통하여 상상의 세계를 구현한 「반지의 제왕」 같은 혁신적인 영화를 만들어낸 것처럼, 「CSI」는 눈으로 볼 수 없는 미시의 세계를 영상으로 시각화하며 수사드라마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말이 아니라 눈으로 직접 범죄현장을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매력이었다. 라스베이거스가 무대인 오리지널 「CSI」는 「CSI 마이애미」와 「CSI 뉴욕」 두개의 스핀오프(본편에서 갈라져 나온 번외편) 씨리즈를 낳았고, 모두 성공했다. “애초 우리는 이 씨리즈가 「X파일」이나 「웨스트 윙」의 열광적인 시청자들의 틈새를 파고드는 정도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모든 장르의 엄청난 시청자가 이 씨리즈를 좋아했다”는 제작진의 말처럼 「CSI」는 수사물의 열혈팬뿐 아니라 일반 시청자를 광범위하게 사로잡은 최고의 드라마가 되었다. 이어서 「앨리어스」 「24」 「로스트」 「프리즌 브레이크」 「히어로즈」 등 히트작이 줄을 이으면서 미국의 드라마시장은 일취월장했다. 지금 미국 TV업계를 주도하는 것은 분명히 드라마다. 2006~7년 시청자수 중간집계에 따르면 「위기의 주부들」이 2100여만명으로 2위, 「CSI」가 2000만명으로 4위를 차지했고, 「그레이 아나토미」 「로스트」 「크리미널 마인드」 등이 상위권에 오르며 드라마가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미국의 연간 TV드라마 시장은 약 600억달러로 추산된다. 이 시장을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방송사와 제작사는 할리우드와 마찬가지로 제작비를 더 부담하더라도 더욱 많은 시청자를 확보할 수 있는 대박을 노리게 된다. 소위 블록버스터 전략이다. 보통 1시간짜리 미국 드라마의 에피쏘드당 제작비는 약 250~300만달러이다. 제작사는 방송국에서 제작비의 약 60%를 회수하고 나머지는 DVD와 해외시장에서 충당한다. 하지만 인기가 좋은 드라마가 DVD와 프로그램 재판매 등으로 끊임없이 수익을 올리는 것에 비해, 방송 초기에 시청률이 저조한 드라마는 당연히 부대수익도 올리기 힘들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드라마를 알리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자연히 인기 없는 드라마는 한 씨즌도 제대로 채우지 못하고 중단되기도 한다. 다만 한 씨즌으로 종영된 「납치」가 영국의 채널4에 에피쏘드당 80만달러에 팔린 예에서 보듯 화젯거리가 있는 작품은 해외수출 등 다른 길을 개척할 수도 있다. 2006년 미국 드라마가 해외에서 벌어들인 수입은 30억달러에 달한다. 미국 드라마는 지금 할리우드 영화 이상으로 막강한 문화상품이다.
미드에 열광하는 한국의 젊은 세대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국 드라마에 열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 미국 드라마는 한국 드라마에 비해 확실한 비교우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의 한국 영화가 검열에 치이면서 「매춘」 씨리즈 등 뻔한 상업영화에 매몰된 것에 비해, 당시 할리우드는 새로운 영상으로 무장한 블록버스터로 한국 관객을 사로잡았다. 지금 한국 드라마는 로맨틱코미디와 불륜극에서는 탁월하지만, 그외의 장르에서는 유치원생 수준이다. 그런데 미국 드라마는 웬만한 할리우드 대작 뺨치는 스펙터클에, 다음회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흡인력있는 이야기로 시청자를 빨아들이고 있다. 물론 한가지 고려할 사항이 있다. 지금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드라마는 모두 미국에서도 성공을 거둔 작품이라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현지 정보를 실시간으로 구할 수 있는 요즘, 한국의 미국 드라마 마니아(미드족)들은 미국에서도 가장 각광받는 드라마를 선택하여 즐기고 그것을 유통시킨다. 성공하는 모든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듯이, 미국에서 성공하고 한국에서도 호응을 받는 드라마는 완성도가 아주 뛰어난, 이미 검증이 끝난 작품들이다. 「CSI」 같은 수사물이건, 「위기의 주부들」 같은 씨니컬한 홈드라마건, 「그레이 아나토미」 같은 의학물이건 상관없이 모두 상위 3%에 해당하는 최상급 씨리즈들이다.
대부분의 미국 드라마들이 호응을 받는 이유는 다양하다. 일상에서 만날 수 없는 판타지를 보여주기도 하고,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미스터리 속으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대체로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쎅스앤더씨티」의 경우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단지 쎅스를 노골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인기를 얻은 것이 아니다. 이 드라마가 미국과는 또다른‘나라’라고 할 정도로 유행의 첨단을 달리는 뉴욕 맨해튼의 고급스러운 라이프스타일을 현란하게 선전했기 때문이다. 은행에 잔고가 없어도 우울할 때면 으레 명품 구두를 사며 마음을 달래는 여인들은 세련된 레스또랑이나 까페에서 만나 브런치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밤이면 연예계 스타들이 찾아오는 클럽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쎅스앤더씨티」는 청담동의 가게주인들이 따라 배울 만한‘스타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단지 재미있는 드라마 이상으로 일종의 맨해튼식 라이프스타일 카탈로그 기능까지도 하는 것이다. 반면 「CSI」나 「크리미널 마인드」 등의 수사드라마는 한국에서 거의 볼 수 없는, 사회의 어둡고 엽기적인 부분을 속살까지 드러내는 것으로 흥미를 끈다. 「24」나 「프리즌 브레이크」는 소재의 선정성보다는 독특한 형식으로 마니아를 만들어냈다. 하루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모든 것이 마무리되어야 하는 「24」의 실시간 구성이나, 무고하게 사형을 언도받은 형을 탈옥시키기 위해 동생이 형무소 지도를 온몸에 문신으로 새겨 죄수로 들어간다는 「프리즌 브레이크」는 기발한 설정이 돋보인다.
「글래디에이터」의 감독 리들리 스콧(R. Scott)은 수학의 원리를 모티프로 한 수사물 「넘버스」로 드라마에 도전하면서 “장편영화의 경우 2시간 정도의 시간에 한정되지만, TV씨리즈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캐릭터나 스토리의 충분한 발전과 변화를 기획할 수 있다”고 말했다. 피터 잭슨(P. Jackson)은 「반지의 제왕」을 영화로 만들려면 거의 12시간 분량의 3부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실천에 옮겨 성공을 거두었다. 무리하게 3시간 반 정도 분량의 한편으로 줄였다면 아마도 실패했을 것이다. 캐릭터의 변화와 발전, 긴 시간의 경과를 담는 이야기를 한편의 영화로 보여주기에는 역부족이다. 설사 가능하다 해도 복잡한 상징과 은유를 동원해야만 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그 모든 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과거에는 미국 드라마들도 한시간의 에피쏘드에 전체를 담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6백만불의 사나이」 등에서처럼 한회에 하나의 사건만을 다루는 것이다. 지금도 수사물은 대부분 그런 형식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작은 사건이 아니라 거대한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드라마는 그런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로스트」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무인도에 표류한 사람들이 수수께끼의 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히어로즈」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초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 뒤 거대한 음모와 싸우는 활약을 담았다. 이 드라마들은 한 에피쏘드로 사건이 완결되지 않고 계속 의문점을 남기면서 한 씨즌 동안 사건을 끌고 나간다. 이런 구조 덕분에 더욱 복잡하고 창의적인 이야기를 극적인 구성으로 치밀하게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담을 수 있기 때문에 심도있는 문제제기도 가능하게 된다. 버라이어티쇼를 만드는 방송가의 이야기인 「스튜디오 60」는 미디어산업의 치열한 경쟁과 모순은 물론 미국사회의 양극화나 이데올로기 문제까지 비판하고 있다. SF드라마 「배틀스타 갤럭티카」는 우주 공간에서 벌어지는 군사적 점령이나 테러 등 요즘의 국제정세를 환기시키는 내용으로 찬사를 받았다.
가상현실, 또는 무국적의 리얼리티
한국에서 미국 드라마들을 즐겨 보는 마니아들은 주로 이삼십대의 젊은층이다. 이들은 굳이 미국 드라마만 택하는 것은 아니다. 완성도가 높고 내용이 참신하다면 한국 드라마건 일본 드라마건 개의치 않는다. 한국 드라마 중에서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발리에서 생긴 일」은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으면서 시청률도 함께 올라갔다. 한국의 현실을 아주 리얼하게 옮기거나 파격적인 소재를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해서 젊은 세대만이 아니라 드라마의 주요 시청자인 사오십대 주부까지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반면, 시청률은 10%도 나오지 않았지만 인터넷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은 사례도 있다. 「네 멋대로 해라」나 「부활」은 젊은 세대의 리얼리티에 너무 충실하다거나, 윤회라는 소재와 시간을 넘나드는 구성이 지나치게 복잡해서 중년층에게 외면받았기 때문에 시청률에서 참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부활」의 마니아들은 지금 같은 제작진에 의해 만들어지는 「마왕」에 열광하고 있고, 「마왕」은 분명히 「부활」에 비해 진일보한 내용을 보여주면서 대중성도 높아졌다.
거칠게 말하자면, 「부활」과 「마왕」을 즐기는 이들이 바로 미국 드라마의 주요한 시청자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아직 국내에서 미국 드라마를 보는 층이 두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젊은 세대에서는 상당한 비중이지만, 전체 연령대에서 본다면 소수다. 이들은 한국 드라마의 전형성을 벗어난 새로운 스타일의 혁신적인 드라마를 원한다. 젊은 세대는 한국과 미국의 현상적 차이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하여 실시간으로 해외의 정보를 접하고 유행을 받아들이는 세대다. 이들에게 미국의 리얼리티는 가보지 못한 한국의 다른 도시나 마찬가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능히 공감할 수 있다. 「그레이 아나토미」를 보는 것과 「외과의사 봉달희」를 보는 것에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그들이 보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인턴과 레지던트 들이 겪어야 하는 생과 사의 현장, 그리고 서로간의 치열하면서도 우정어린 관계들에 주목한다. 70, 80년대 우리에게 미국 드라마들이 일종의 신세계로서 작용했다면, 지금의 미국 드라마는 또 하나의 리얼리티로서 받아들여진다. 인터넷이나 게임의 가상현실과 마찬가지로, 미국 드라마 속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전혀 거부감이 없으며 오히려 친숙한 느낌마저 갖는 것이다. 이미 할리우드 영화에서 익숙해진 내용과 형식이 드라마를 통해 재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드라마의 마니아들에게 중요한 것은 국적이 아니라 캐릭터와 이야기다.
내용과 형식에서 새로운 미국 드라마를 즐기는 일이 반드시 TV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미국 드라마의 인기는 인터넷에서 시작되었다. 공중파의 「X파일」 마니아가 있었고, 케이블에서 방영되는 「프렌즈」에 빠진 시청자들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소수였다. 진짜 열풍은 인터넷에서 불기 시작했다. TV를 보다가 우연히 발견한 드라마를 좋아하는 식이 아니라, 외국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드라마를 먼저 보고 자발적으로 알리는‘미드족’의 공헌이 있었다. 이들은 P2P(peer to peer, 인터넷에서 개인과 개인이 직접 연결되어 파일을 주고받는 방식)와 웹하드를 통해 실시간으로 배포되는 미국 드라마에 한글 자막을 입혀 국내에 보급했다. 즉 매스미디어의 공세에 휘말리는 시청자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드라마를 찾아가는 마니아인 것이다. 미국 드라마 열풍은 인터넷이라는 최신 미디어가 없었다면 한참 늦게 도래했을 것이다.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미국에서도 드라마의 인기는 인터넷과 관계가 깊다. 한 에피쏘드에서 끝나는 형식이 아니라 치밀하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드라마는 한회라도 빠뜨리면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DVD가 출시될 때까지 기다릴 수도 없다. 이런 불편을 해소해준 것은 인터넷을 포함한 첨단기술의 발달이다. 시간이 없어 지난 에피쏘드를 보지 못했다면 인터넷의 유튜브(YouTube)에서 공짜로 볼 수도 있고, 일정액을 내고 합법적으로 다운받아 볼 수도 있다. 아니면 케이블의 주문형 비디오(VOD) 써비스도 있다. 2007년 미국의 방송프로그램 다운로드에 따른 수익은 6억 4천만달러에 달한다고 예측된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드라마를 접한다. 미국과 거의 동시간대에 드라마를 보는 열혈 마니아들도 있고, 다운받아 본 다음 블로그와 UCC를 통해 확산시키는 이들도 많다. 미국 드라마의 인기는 단지 미디어기업의 공식적인 배급망만이 아니라 자율적인 방식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TV프로그램을 TV로만 본다는 인식이 서서히 바뀌고 있다. 여전히 드라마가 최초로 공개되는 곳은 TV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지만, 대중이 프로그램을 접하는 매체가 급속하게 TV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화, 드라마, 뮤직비디오, CF의 경계도 무너지고 있다. 각각이 독립된 매체라기보다는 모두가 영상을 통한 콘텐츠라는 통합적 인식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위클리』는 드라마 「히어로즈」가 “수많은 팝콘 히어로 영화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오락적”이라고 단언한다. 할리우드 영화가 규모가 커진 것에 반비례해 소재와 주제 면에서 진부해지는 것 같은 요즘, 오히려 드라마는 모든 제한을 벗어버리고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진정한‘영상물’의 슈퍼히어로는 영화보다 TV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지금, 승자는 분명 드라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