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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미경

정미경 鄭美景

198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희곡 당선, 2001년 『세계의 문학』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나의 피투성이 연인』, 장편소설 『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등이 있음. mkjung301@hanmail.net

 

 

들소

 

 

가봐야 할까?

오늘?

며칠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질문은 시시각각 다른 대답을 만들어냈다. 새삼스럽게 가서 뭘, 싶다가 물 같은 마음으로 한번은 만나야 하지 않을까,에서 다시 오늘? 아니면 며칠 후에?로 바뀌었다.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라던 그녀의 말이 여전히 서운한 건 아니다. 납득할 수 없는 건 그녀의 말이 아니라 그 말을 할 때의 눈빛이었다. 또렷하면서도 모호한, 불안해 보이면서도 강퍅한 눈빛은 처음 보는 사람의 그것처럼 낯설었다. 그 눈빛이 오래 서운했다. 쉽게 결론내리지 못하는 질문일수록, 질문하는 사람의 마음속엔 이미 대답이 예정되어 있다. 손목시계를 한번 들여다본 명조는 이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주저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비의 회전문을 나서자 체감온도가 단숨에 10도쯤 올라간다. 한풀 꺾인 햇살을 받은 매연이 금속성의 비처럼 부옇게 떠 있다. 갤러리는 걸어서 십분도 걸리지 않는 곳에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 인사동 초입으로 들어서는 잠시 동안에 온몸의 신경줄이 푹 삶아놓은 것처럼 늘어진다. 바닥에 드러누운 직사각형의 돌이 걸음을 흐트러뜨린다. 도대체 무지막지하게 커다란 돌덩이를 길 가운데 던져놓는 이따위 아이디어를 낸 건 누구란 말인가. 불길한 운명을 봉인해놓은 관처럼 생긴 그 검은 돌들을 사람들은 이리저리 피해 걸어다닌다.

수요일 저녁의 인사동은 한시적인 독립국가다. 끓여도 녹지 않는 재료를 한 솥에 붓고 끓이는 듯한 기이한 냄새와 드센 열기가 거리를 가득 메운다. 사람들의 얼굴엔 배타적인 비밀집회에 참석한 듯한 흥분과 설렘이 떠오른다. 오후 여섯시. 갤러리마다 새로 설치한 조각이나 그림, 사진 같은 걸 전시해놓고는 일시에 스커트를 들어올려 속옷을 보여주듯 노출하는 시간. 잘 봐, 이게 나야. 과시의 욕망 앞에 어떤 금기도 힘을 잃는 시간이다. 오늘치 팸플릿을 든 행인들이 뜨거운 맨살을 스치며 지나간다.

명조는 수요일의 인사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료를 구하거나 사람을 만나러 나올 때도 목요일이나 금요일쯤, 욕망이 썰물처럼 밀려나간 시간이 편안하다. 누군가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 따위도 명조와는 거리가 멀었다. 수혜는 팸플릿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주부터 크고 작은 리뷰기사들이 신문마다 올라 있어 신작들을 훑어볼 수 있었다. 작품 옆에 서서 찍은 수혜의 사진들은 표정이 다양했다. 활짝 웃거나 무표정한 사진 속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달라진 건 그녀의 작품들이었다. 그것도 완전히. 만나지 못했던 일년이 까마득하기도 하고 불과 두어주일 전 같기도 하다. 생각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대로 걸어서 종로 쪽으로 나가버릴까. 들러서 얼굴을 볼까.

삐익. 삐익.

짧고 높은 호루라기 소리가 두번 울린다.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던 명조는 하마터면 앞에 놓인 검은 돌에 무릎을 부딪칠 뻔했다. 돌의 모서리를 피해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는데 그곳에 서 있던 여자아이가 에너지가 바닥난 로봇처럼 스르륵 주저앉는다. 여자는 앉는가 했더니 바닥에 그대로 누워버린다. 하마터면 명조는 옆에 주저앉아 가슴을 흔들어댈 뻔했다. 주위가 헐렁하다. 서 있는 사람은 명조 혼자였다. 바닥에 누운 사람들은 눈까지 감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 옷차림은 모두 달랐지만 나이들은 비슷해 보였다. 팽팽한 피부들이 햇살을 튕겨낸다. 붉게 달아오른 안색이, 이건 죽음이 아니라 욕망의 퍼포먼스라고 증언하고 있다. 땀이 흘러내리던 등줄기에 소름이 쪼르르 일어선다. 저쪽에서 무심코 걸어오던 사람들이, 무너진 교각 앞에 급히 멈추듯 서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삐익.

이번엔 조금 긴 호루라기 소리가 한번 울린다. 호루라기를 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바닥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구물구물 일어난다. 가로수에서 노란 이파리 하나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떨어져내린다. 누웠다 일어난 사람들과, 구경하던 사람들이 섞인다. 빨간 구두를 신고 발뒤꿈치를 세번 부딪치면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믿는 아이들이겠지. 운명이 쓰러뜨리지 않으면 제 스스로 무릎을 꺾고 바닥에 쓰러져보는 게 인간이다. 명조는 어쩐지 자신이 더이상 젊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갈까 말까, 저 아이들이라면 그런 고민은 하지 않았겠지. 갤러리는 바로 코앞이었다.

 

 

실내는 꽤 넓었다. 불규칙한 간격으로 띄엄띄엄 서 있는 것들은 들소들이다. 그저 네 발로 땅을 딛고 제 앞의 허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들소들. 풍화된 것처럼 이목구비는 살짝 모서리가 지워져 흐릿하다.

수혜는 입구에서 비디오카메라를 든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클로즈업하지 말고, 공간이 허락하는 한 멀리서 찍어주세요. 실내에 가득한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수혜의 목소리만이 귓속에서 도드라진다. 전시장의 풍경은, 들소 한마리가 달랑 실려 있던, 신문의 자료사진이 주는 느낌과는 아주 다르다. 나선형으로 꼬인 거대한 뿔을 단 들소들은 쓸쓸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무뚝뚝한 짐승들 사이의 시공(時空)은 수요일 오후 여섯시의 인사동이 아니다. 아주 먼 곳, 먼 시간의 기운이 맨살에 닿는다. 여기는 어디일까. 천천히 그 사이를 천천히 걸어다니고 있는데 뒤에서 수혜 목소리가 들린다.

“왔어?”

며칠 전 같이 저녁을 먹고 헤어진 사람에게 하듯, 담담한 인사다. 신문이나 잡지에서 간간이 기사를 보긴 했지만 얼굴을 보는 건 일년 만이다. 작년 여름, 열대의 바다를 달려온 그해의 첫 태풍이 도시 위를 휩쓸 때였다. 하윤의 장례식장에 명조는 끝내 들어서지 못하고 돌아나왔다. 풀썩 주저앉을 듯 수척하던 수혜의 모습과 사진 속에서 흰 이를 드러내고 웃던 하윤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작품이 완전히 달라졌네? 우연히 들렀으면 네 전시인 줄도 몰랐겠다.”

“그러게. 팔아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지니까, 나도 모르게 달라지더라.”

남의 얘기 하듯 무심하다. 그랬다. 어디 국립이나 사설 미술관에서 구입해 가면 모를까 개인이 소장할 만한 작품들은 아니었다. 아파트나 주택에 두기엔 너무 컸고, 이미지도 너무 강렬했다. 수혜가 조각가로 명성을 얻고 소장가들의 리스트에 지속적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건 줄기차게 지속해온 인물씨리즈 덕분이었다. 얼굴선과 이목구비가 슬쩍 뭉개진 그녀의 인물들은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예쁘다,고 말하면 수혜는 예뻐야지, 하고 간단히 대답해버렸다. 대답은 간단했지만 표정은 늘 복잡했다. 작품들은 전시회가 개막하는 날 거의 판매가 끝나곤 했다. 그런 날이면 그녀는 명조의 손에 등을 맡기고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이 노릇을 해야 하나, 어깨가 부서질 듯이 아파. 목덜미를 손으로 아프도록 꽉 쥐었다 놓으면, 후우 하고 뭔가를 쏟아내듯 긴 숨을 내쉬었지.

하윤의 죽음과 함께 작품을 많이 팔아야 한다는 강박도 사라졌다. 그 강박이 사라지면서 그녀와 명조 사이의 매듭도 끊어져 나갔다. 납득할 수 없는 그 인과관계에 대해 수혜는 결코 설명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의 일방적인 결정이었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완강했다. 작품을 많이 팔아야 하는 이유는 사라졌다 해도 어쨌든 약간은 팔려주어야 한다. 수혜와 그녀의 딸이 먹고살고, 다음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만큼은. 어쨌거나 소들은, 너무 쓸쓸해 보였다. 소 주제에.

“어째 추워 보이네?”

명조의 말에 수혜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실내를 휘 둘러본다.

“그래? ……얘들은 빙하기의 들소들이야. 삼만년쯤 전에 살았던. 오래전에 멸종된 것들이지. 여기 바닥을 두터운 얼음으로 채우고 싶었어. 오늘 하루만이라도 시도해볼까 생각도 했는데, 사람들이 빙하기가 아니라 아이스링크를 떠올릴 것 같아 포기했어. ……어때?”

수혜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얼음 이야긴지 이번 전시에 대한 소감을 묻는 건지 애매하게.

“얘네들, 묘하게 사람 마음을 끄네. 자료를 좀 모아줘. 이런 이미지로 캐릭터를 만들어보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아. 사용하게 되면, 로열티는 지불할게.”

“하아.”

수혜는 뜻밖에 단음으로 뚝, 끊어지는 독특한 웃음을 터뜨린다. 크고 투명한 비눗방울을 탁 터뜨리는 듯한 웃음. 저 웃음소리는 눈을 감고도 알아맞힐 수 있다.

언젠가 소파에 앉아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 화면 속에서 하윤을 본 적이 있다. 북녘의 어느 도시였다. 겨울이어서가 아니라 뒤로 보이는 풍광 때문에 지독히 삭막하고 을씨년스러운 그곳에서 하윤은 북측의 의료책임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명조는 하윤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착하고 바보처럼 욕심없는, 수혜가 넌더리내는 그 성격이 고스란히 새겨진 얼굴이었다. 착하고 사람좋아 보이지? 결국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하는 사람이야. 수혜는 고개를 젓곤 했다. 무슨 얘기 끝엔가 두 사람이 크게 웃었는데, 화면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자의 웃음소리가 동시에 터져나왔다. 수혜의 웃음소리였다. 수혜는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화면에 나오지 않았다. 수혜에게 그 다큐를 보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하윤이 하는 일에 대해 끊임없이 불만을 터뜨리며, 같이 가서 웃긴 왜 웃는단 말인가, 그런 마음도 약간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황량한 화면과는 어울리지 않던 그 갑작스럽고도 명랑한 웃음소리를 명조는 이상하게도 오래 기억하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들었던 웃음보다 더.

“왜 웃어? 난 진심인데.”

“한뼘 길이 스커트 아래 흰색 팬티가 보이는 여주인공에 지겨워진 애들이 이젠 어슬렁거리는 들소 캐릭터가 보고 싶대?”

명조 역시 웃고 말았지만, 농담은 아니었다. 들소들을 둘러보며, 빙하기를 배경으로 한 게임을 하나 만들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수혜의 웃음에 머쓱해져 그냥 얼버무렸다.

“음, 독특하고 매력적이란 얘기지.”

사람들이 끊임없이 수혜에게 눈인사를 하고 지나다니는 곳에서 더이상 나눌 얘기가 없었다. 오프닝 시간이 됐는지 큐레이터가 수혜를 불렀다. 음식을 포장한 랩이 벗겨지고 와인이 돌았다. 뿔테안경을 쓴 남자가 짤막한 축사를 했고 수혜의 인사가 이어졌다. 명조는 뒤에 멀찍이 서서 미지근한 콜라 한잔을 마시며 그 광경을 무성영화 보듯 바라보았다. 말소리는 들리다 말다 했다.

일년이라면, 한 사람의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일까. 생가죽 냄새라도 풍길 듯 반짝이는 수혜의 구두. 못 보던 구두다. 소매 없는 흰 원피스도 처음 보는 옷이다. 전화기 속에서 끅끅 우는 수혜의 울음을 들으며 머리 위로 모래가 무더기무더기 무너져내리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그건 명조가 닦아줄 수 없는 눈물이었다. 끊임없이 하윤에게 상처를 주고, 제멋대로 굴며, 그래 봤자 언제나 고통은 제 몫이라던 수혜가 모래산이 무너지듯 울고 있었다. 모래에 파묻혀 다시는 지상으로 기어나오지 않겠다는 듯 울고 있었다. 일년이 지났고, 수혜는 새 작품으로 전시회를 열었고, 오프닝을 위해 새 구두와 원피스를 샀고, 사람들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그녀가 여전하기를 바라고 있었을까. 여전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에게는 변하는 부분과 변하지 않는 부분이 섞여 있을 뿐인데. 그녀의 웃음소리가 변하지 않았듯 새 구두에 감싸인 그녀의 발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수혜는 발이 예뻤다. 살집이 적당히 있으면서도 날렵했다. 어린아이 발처럼 굳은살이 없었고 발가락 하나하나가 제각각 배다른 새끼처럼 다른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버선코처럼 끝이 살짝 올라간 엄지발가락이 특히 예뻤다. 수혜와 있을 때면 그녀의 발가락을 어루만지는 걸 좋아했다. 살짝 간질이면 하아, 웃으며 눈을 흘겼다. 왜 하필 발이야? 그나마 발뿐이지. 네 손은 너무 못생겼잖아. 수혜의 손은 제 발보다 거칠고 두터웠다. 늘 손등엔 묵은 상처 위에 전에 없던 새 상처가 겹쳐 있었고 손톱 밑엔 대팻밥이나 흙먼지가 끼어 있었다. 어둠 속에서 팔을 뻗어 제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수혜는 그랬다. 노동하는 손이야. 머리를 거꾸로 두고 누워 수혜의 발을 뺨에 대고 눈을 감으면 어두운 방이 작고 검은 배처럼 둥실 떠올라 가뭇없이 흘러갔다. 참 따뜻하고 달콤한 시간이었다.

옛날, 일본에 발이 아주 예쁜 기녀가 있었어. 그를 사랑한 노인이 임종을 앞두고 그녀에게 말했지. 내가 마지막 숨을 내쉴 때, 네 발로 내 얼굴을 밟아다오……

발이 아니라 투박하고 거친 손을 좋아했다면 그녀와의 관계는 지금과 다르게 펼쳐졌을까. 언젠가 어둠 속에서 그 얘기를 들려주었던 날, 수혜는 뜬금없이 하윤 얘기를 했다.

그 사람은, 내 손을 좋아해.

다 지난 이야기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발을 꼭 쥐어보는 일은 이제 없을 것이다. 사랑은 파도와는 다른 것이어서 썰물이 다하면 다시 밀물이 시작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실내를 가득 메운 사람들 뒤를 돌아 가만히 밖으로 나왔다. 입구에 늘어뜨린 현수막에, 뜨겁고 축축한 도시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는 듯 뚱한 표정의 들소 한마리가 서 있다. 바람이 불어 현수막이 흔들리자 소는 어디론가 걸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골목 안에서 돼지고기와 고등어 굽는 냄새가 밀려나온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는 문을 밀고 나간다. 부족함보다는 군더더기를 더 불편해하는 저 성격. 매번 전시 때면 소박한 화분을 먼저 보내고, 작품을 혼자 둘러보고 나서는 오프닝 행사가 열리는 동안 조용히 빠져나갔다. 뒤풀이가 끝나면 아무리 늦은 시간에도 꼭 얼굴을 보고 돌아가곤 했는데. 그가 오리라는 생각과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반반이었다.

하윤이 살아 있을 때, 만나지 않는 날이면 거의 한시간씩 통화를 하곤 했다. 하윤이 떠난 후 저 사람을 그토록 매몰차게 잘라낸 건 왜였을까. 더이상 만나지 않겠다 말하면서도 수혜는 제 속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 모호한 죄책감에 합당한 희생양이 필요했을지도 몰라. 명조와는 대학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사이다. 하윤과 만나기 전이었다. 친구와 연인 사이의 경계를 살짝 넘나든 적도 있지만 어쩐지 그와는 눈먼 연애감정이 생기질 않았다. 그건 둘이 너무 닮아서라는 걸, 하윤과 살게 되면서 뒤늦게 깨달았다. 주위의 친구들은, 무인도에 둘이 떨어져도 별일 없을 사이라며 놀리곤 했다.

사람과의 관계든 공식적인 일이든 매사에 깔끔한 선을 미리 긋고 지키는 저 사람과 얽혀버린 건 오히려 하윤과의 결혼생활에 서서히 지쳐갈 때였다. 고민을 털어놓는 데는 여자친구보다 남자친구가 편했다. 명조는 귀가 깊은 친구였고 돌아서서 나팔을 불어대지 않는 이상적인 상담가였다. 어느 순간 이 사람이 쎅스를 원한다면 거절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명조와 자고 나서, 수혜는 쎅스를 원했던 건 자기가 더하지 않았을까, 싶었다. 쎅스는 치명적인 친밀감을 단번에 만들어냈다. 명조는 오래된 친구가 아니라 이제 막 알게 된 연인이 되었다. 수혜는 가끔 우리 둘은 어떤 사이일까, 생각해보곤 했다. 그건, 불륜이라기엔 너무 안정적인 관계였다. 하윤은 수혜의 손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명조는 그녀의 발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수혜의 내면에서 충돌하지 않았다. 수혜의 사사로운 고민이나 가정문제에 대해 명조는 하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명조와 안고 누워 있다 돌아온 날에도 하윤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자신을 보며, 수혜는 사람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 많은 부분을 오해하는 존재라는 생각도 했다. 만나지 않겠다 했을 때 명조는 수혜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무것도 읽지 못했을 것이다. 수혜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

얘는 기어이 안 오려나. 수혜는 문 너머를 살펴본다. 팸플릿이 나온 날, 딸의 책상 위에 한 부를 올려놓았다. 다음날 보니 그건 내려놓은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펼쳐보지도 버리지도 않고, 마치 애초부터 없는 물건인 듯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어젯밤엔 소리소리 지르며 싸우기까지 했으니. 제 엄마 염장을 지르려고 아주 작심한 게 아니라면 하필 어제 그 일을 저질렀을 리가 없다. 어제 갤러리에서 디스플레이 하느라 저녁도 못 먹고 소들을 이리 세웠다 저리 옮겼다 하고 있는데 현이 담임선생님이 전화를 했다. 같은 반 친구의 엠피쓰리를 가져갔단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면서 감전이라도 된 듯 뒤통수가 찌릿했다. 그건 훔쳤다는 얘기가 아닌가. 설마. 말문이 막혀 가만히 있었다.

그럴 애가 아닌데, 저도 참 이해가 안 가네요. 그 친구를 따로 불러 얘기를 했어요. 엠피쓰리를 돌려주면서 현이가 심리적으로 좀 힘들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더니, 잘 알겠다고 그러더군요. 현이하고 친한 아이는 아닌데, 다행히 속이 깊은 아이라. 뭐 대충 정리는 됐는데, 어머니께서 알고는 계셔야 할 것 같아서. 현이가 학기초부터 좀 힘들어 보였거든요.

일학년 담임에게 귀띔을 받았는지 선생님은 지난해 현이가 아버지를 잃은 걸 알고 있었다. 고맙다고, 죄송하다고 몇번이나 인사를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엠피쓰리라니. 제 것이 있는데 왜 남의 걸 집어온단 말인가.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지만 혼자만 빠져나올 수 없어 갤러리 사람들과 저녁까지 먹고 집으로 들어왔다. 현이는 책상 위에 다리를 올린 채 태연한 얼굴로 킬킬거리며 다운받은 개그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방에 들어오는 줄 알면서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너, 엄마 좀 보자.

나 이거 봐야 돼.

컴퓨터를 확 꺼버리자 그제야 의자에서 발딱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왜 관심이 있는 척하고 난리야? 엄마는 자기 일 외엔 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내가 엄마가 필요할 때 엄마는 항상 없었어. 엄마는 작업실에서 살고 아빠하고 나는 집에서 살았어. 내가 어떻게 살든 왜?

너, 왜 그랬니?

모르겠어, 나도.

남의 말 하듯 거의 명랑하기까지 한 말투였다. 말려들지 않으려고 수혜는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네가 모르면, 누가 아니?

그러게 말야.

엄마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 말을 해봐.

이번엔 입을 꾹 다물고 귀머거리 행세였다.

말을 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엄마가 그랬잖아. 착한 사람이 싫다고.

수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서 있었다. 빤히 노려보는 딸의 눈빛을 보자, 언젠가 하윤도 내게서 저런 독한 눈빛을 읽었을까 싶었다. 어깨에 손을 얹자 현이는 온몸을 격하게 흔들어 손을 털어냈다. 제 앞에서 다투는 꼴을 보인 적은 없는데, 어찌나 예민한지 현관문만 열고 들어오면 집안 온도를 읽어내고 나름대로 분위기를 풀어보려 애쓰곤 했다. 아빠 잃은 슬픔을 날 미워하는 걸로 견딜 수 있다면 그래라, 하며 온갖 성질을 받아줬지만 이건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이래도, 이래도 하며 삶은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툭툭 던져놓는다. 뾰족한 방법 같은 건 없다. 그저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 꽃핀 길이라고 멈출 수도, 얼음판이라고 건너뛸 수도 없다.

발이 부었는지 한걸음씩 디딜 때마다 구두가 조이듯 아파온다.

 

 

명조는 사무실로 돌아와 팸플릿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손부터 깨끗이 씻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우아하게 버텼지만 우리 사이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있다. 냉장고에서 캔커피를 꺼내와 한모금 마시고는 팸플릿을 집어들었다. 뭔가, 암호처럼 나에게만 주는 하나의 문장이 있지 않겠는가,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푸르스름한 공간을 배경으로 들소가 한마리 서 있는 표지를 넘기자 작가의 글이 실려 있다.

 

… 일년이 흘러갔다. 그가 가고 나서야, 우리는 모두 우주만한 추위를 이고 사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빙하기를 살아갔던 들소들처럼. 어디서, 왜 왔는지는 모르지만, 거기 그렇게 내던져져 온몸으로 추위를 견디며, 얼음 위를 걸어야 하는 것들. 그가 떠나고 나를 사로잡은 건 슬픔이 아니라 추위였다. 유난히 오염에 민감한 지표식물이 있듯, 그는 타인의 추위를 제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었다. 들소는 왜 제가 두터운 얼음과 끝없는 눈의 벌판 위에 던져지게 되었는지 끝내 알지 못한다. 아득한 시간을 건너 이 들소들 사이를 거닐어보고 싶다.

그는 나에게 진흙을 주었고 나는 그것으로 들소를 빚었다.

 

마지막 구절을 읽는 순간, 맹렬한 질투심이 폭발하듯 타올랐다. 명조는 눈을 감았다. 하윤이 살아 있는 동안 그에게 한번도 질투심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명백한 교만이었다. 하윤을 질투하지 않은 것은, 두 사람 사이에 형식적인 고리 외에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 줄 알고 결혼했어. 아는 것과 겪어내는 건 또 아주 다른 문제라는 걸 날마다 순간마다 깨달으며 살긴 하지만.

하윤 때문에 힘들다 하소연해놓고는 수혜는 꼭 그렇게 마무리를 했다. 그 말은,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말이 아니라 제 입술과 귓바퀴와 머리와 신경줄을 타고 순환하는, 제 스스로에게 이르는 폐쇄적인 말이었다. 그러니, 네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라고, 못을 박는 소리였다. 하윤은 그 폐쇄된 원 안에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그 폐곡선은 수혜와 분리할 수 없는 부분이었고, 수혜를 안으려면 그것도 같이 껴안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랬던 수혜가, 마음을 정했다고, 하윤과 정리를 하겠다고 한 게 지난해 초였다.

헤어지자고 했어.

수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갑작스러웠다. 뭐랄까, 명조는 수혜의 가족을 그녀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묘한 얘기지만, 그녀의 가정이 평온하기를, 그들이 건강하기를, 현이의 성적이 지금보다 오르기를, 수혜의 전시가 잘되어 아파트 평수라도 좀 넓혀가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둘의 밀회는 격렬하기보단 평온했다. 쎅스가 끝나면 수혜는 명조의 옆구리에 아랫배를 붙이고 누워 자잘한 문제들을 고민하고 의논하기도 했다. 명조가 발을 어루만지는 동안 아주 짧은 잠에 빠지기도 했다. 명조도, 수혜도 더이상은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현이도, 아파트도, 원하면 가지라고 말했어. 그런데, 내 귀에도 내 목소리가 너무 교활하게 들리더라. 헤어지게 된다면, 그 사람은 그냥 빈손으로 나갈 사람이야. ……아니었다면, 내가 그렇게 말했을까?

수혜의 말을 듣고 있는데, 하윤의 눈빛이 떠올랐다. 자료사진이나 텔레비전 화면에서는 몇번 본 적이 있지만 실제로 만난 건 꼭 한번이었다. 수혜의 전시 때였다. 이쪽은 우리 남편. 얜, 대학동창이야. 왜 내가 한번 얘기했지. 이명조. 수혜는 그렇게 짧게 소개했다. 눈빛이 날카로운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찌르거나 베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사물, 관계의 내면을 깊이 응시하는 날카로움이었다. 명조는 그에 대해 이미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그가 하는 일은 물론이고, 그의 사소한 습관, 식성과 성격까지. 명조는 습관적으로 명함을 건넸고 그에게서도 명함을 받았다. 그 명함에는, 명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비해 너무 적은 정보만 적혀 있었다. 명조는 명함을 잠시 들여다본 후 말했다. 정말, 의미있는 일을 하고 계시군요. 그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으며 옆에 서 있는 수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이 사람이 애를 많이 쓰죠. 그때도 질투심 같은 건 조금도 생겨나지 않았다.

뭐래?

글쎄. 충격이 큰가 봐. 요즘 밥을 잘, 못 먹어. 신경이 쓰일 만큼. 차라리 폭발하듯 화라도 내줬으면 좋겠는데. 마음이 약한 사람이지. 애 같아. 아이 같으니 평생 그런 일이나 하고 다니겠지만.

다음달에는 수혜를 만날 수 없었다. 전화로, 그 사람 몸이 많이 안 좋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입원한 지 열흘쯤 됐어. 낮고 쉰 목소리였다. 암이래. 시작은 위장인데, 주위의 장기까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이렇게 빨리? 수혜는 두서없이 쏟아냈지만 명조의 머릿속에서는 상황이 명료하게 정리되었다. 이 사람이 애를 많이 쓰죠, 할 때의 얼굴이 떠올랐다. 머릿속으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갔다. ……건강했잖아? 겨우 그렇게 한마디만 했다. 젊어서, 건강해서, 더 빠르대. 차라리, 병원에 오지 말걸 그랬나 봐. 입원하고는 하루가 달라. 수혜를 한번 만났다. 병원 근처의 까페였다. 너무 지쳐 보여 토마토주스를 주문해주었다. 수혜는 어쩐지 물도 삼키기 힘들다며 약을 먹듯 주스를 한모금씩 겨우 삼켰다. 너무 여위어서 안쓰러웠다. 더운 날씨였는데 수혜는 긴소매 티셔츠를 입고는 자꾸만 어깨를 움츠렸다.

며칠만 참았으면 되는데.

거리를 내다보며 잠긴 목소리로 수혜는 중얼거렸다. 짙은 초록의 나무그늘 아래로 어린 여자아이들이 등을 드러내놓고 다니는 계절이었다. 구르는 돌멩이도 살아 있는 듯 세상은 온통 생기로 충만했다. 하윤이 입원한 건 헤어지겠다는 말을 꺼내고 꼭 보름 만이라 했다.

그 정도 상태면, 십년도 전에 이미 싹튼 병이야. 그런 병은, 그저 확률이고, 운명인 거지.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수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얘기가 아니야.

안다. 무슨 뜻인지. 하필 그 무렵 헤어지잔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하윤은 그나마 편안하게 생을 정리하고 눈감을 수 있었겠지. 절대적 운명 앞에서 감정이란 얼마나 손쉬운 것인가. 하윤이 죽은 후 우리 관계도 끝났다. 그가 투병하는 동안,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으리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 무렵, 적어도 둘의 시간은 알 수 없는 미래로 뻗어 있는 게 아니라, 두 사람 사이를 순환하는 영원함 위에 놓여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만큼 우리 관계는 안정적이었다. 장례가 끝나고 수혜는 그렇게 말했다. 너는 나하고 너무 닮았어. 알아? 나는 내가 싫다.

수혜의 얼굴은 푸석하게 부어 있었다. 모든 사랑은 운명적이다. 불타오르는 동안만.

 

 

“선생님 피곤해 보이세요. 제가 같이 정리하고 나갈게요.”

“누가 들르기로 했거든요. 한 이십분 있다 곧 갈게요.”

같이 있겠다는 큐레이터를, 식당에 있는 손님들 좀 챙겨달라며 먼저 보내고 나니 실내는 그제야 텅 빈다. 오기로 약속한 사람은 없다. 잠시 동안만이라도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서 작품을 보고 싶었다. 수혜는 길게 숨을 내쉬며 스위치를 내린다. 카운터 쪽 전구들이 꺼진다. 스위치를 하나 더 내린다. 조명의 절반이 꺼진다. 갤러리 앞을 지나던 여자가 고개를 돌려 안을 바라본다. 구두를 벗어 카운터 옆에 가지런히 놓고, 어둑한 조명을 받으며 서 있는 소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치뜨지 않은 순한 시선, 흐릿한 이목구비, 나선을 그리며 천장으로 오만하게 뻗어나간 뿔의 부조화가 묘한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작업실에 세워져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하나하나 얼굴을 들여다보면 이것들이 꼭 무어라 말을 하는 것 같다. 채 일년도 안되는 동안의 작업량으로는 엄청나다.

처음엔 거푸집을 이용하는 방식으로 할까 생각했다. 싸이즈를 생각하면 그것도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고민 끝에, 작품마다 일일이 기본 형태를 잡아 심봉을 세워 뼈대를 만들고 거기에 엄지손톱만한 작은 나무토막을 하나씩 붙여나가는 방식을 선택했을 땐 가슴이 떨렸다. 이것이 누구를 향한 오기인가 싶기도 했다. 형상이 나오기나 할까. 매번 다른 비례와 균형감이 나올 텐데 통일성을 잡아낼 수 있을까. 막막했고 자해와도 같다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본드를 만져야 했다. 창문을 열어놓아도 본드 냄새는 끈질기게 코와 눈과 피부를 파고들었다. 본드와 함께 손가락 지문이 벗겨져나갔다. 쌘드페이퍼에 쓸린 손바닥은 거친 솔처럼 변했다. 끝을 알 수 없어서 붙들고 있을 수 있었다. 빙하기의 지층 속에 갇히듯 작업실에 자신을 가두었다. 끝이 있을까 싶었는데, 오만한 뿔을 하나씩 달고 이것들이 여기 서 있다.

하윤은 떠나면서 수혜에게 친친 감겨 있던 그물들도 걷어가버렸다. 목을 감고 있는 매듭들이 숨을 틀어막고 질식시켜버릴 것만 같다고, 더이상은 견디지 못한다고 말할 때는, 그것들이 그런 방식으로 한순간에 풀려나가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언제까지라도 풀리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하윤을 그렇게 몰아세울 수 있었다.

지난해 겨울, 수혜는 전시를 핑계로 작업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한 공간에서 같이 지내는 게 너무 힘들었다. 그가 비난받을 만큼 나쁜 사람은 아닌데 다만 이쪽에서 도무지 견디지 못할 때, 그건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사람과 다투는 일보다 훨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그를 비난하는 제 목소리가 교활하고 이기적으로 들릴 때면 또 그게 억울해서 기가 막혔다. 틈만 나면 작업실로 뛰쳐나왔다.

작업실에 나와서도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릴없이 잡지를 뒤적거리기도 하고, 구석에 있는 접이식 소파에서 꿈이 절반인 낮잠을 실컷 자곤 했다. 강냉이 튀밥봉지를 끌어안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봉지가 바닥날 때까지 꾸역꾸역 밀어넣기도 했다. 멍하니 앉아 텔레비전 리모컨을 들고 채널을 하나씩 돌렸다. 일분씩만 봐도 한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채널을 돌리다가 개그프로가 나오면 한 코너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가끔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하하, 귀에 들려오는 자신의 웃음소리가 다른 사람의 것처럼 낯설게 들렸다.

그랬다. 두번째는 같이 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윤과 처음 북에 갔을 땐, 비공식 방문에 가까웠다. 신혼 무렵이었다. 낯선 것은 사람을 매료시키고 관대하게 만든다. 하윤에 대해서도 그의 일에 대해서도 그랬다. 평양에서의 일정은 없었고 연구소가 있는 N시로 바로 갔다. 그들은 결핍과 곤궁에 대해 솔직했고 당당하게 요청을 했다. 아무 사심 없이 일하는 하윤이라는 남자가 아름다워 보였다. 아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다. 두번째 갔을 때도 그들은 역시 당당하게 요청했다. 그건 수혜의 마음의 문제였다. 초봄의 N시와 그 인근 촌락의 모습은 한눈에도 지독히 헐벗어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끊임없이 불던 들판 위에서, 사람도 짐승도 풍경도 건물도 더할 수 없이 황폐했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무언가가 그곳에 있었다. N시와의 연결은 공식적인 일이었고, 그들이 드러내기 싫어하는 곳에는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물자를 건네주었다. 에탐부톨이나 리팜피신 같은 약품에서 시작된 요청은 점점 종류가 다양해졌다. 이런 식이었다. 엑스레이 촬영기가 필요하다 해서 보내고 나면 필름이 없어 기계를 놀리고 있다고 했고, 필름을 보내면 전력이 부족해서 기계가 서 있으니 발전기가 필요하다는 식이었다. 고장이 나면 수리까지 요청했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결핵은 소모성 질환이다. 약물만으로는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한다. 식량이 필요했다. 꼬리를 물고 요구가 이어졌다.

공식적인 차원에서 부족하면 거기서 중단해야 하는데 하윤은 그걸 못했다.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었다. 쏟아부어도 흔적은커녕 구멍은 점점 커졌다. 화가 나는 한편으론 온몸에 기름기라곤 없어 보였던 그 연구소 의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보지 않았다면, 난 더이상 못해, 소리를 진즉에 하고 손들었을 것이다. 처참한 현실 속 약한 존재의 슬픈 눈빛은, 짜증 끝에 애잔하게 떠올라 매번 체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두번째 북에 다녀온 이후로 수혜는 자신이 더이상 튀어오를 수 없는, 쭈그러진 공처럼 느껴졌다. 하윤과 얼굴을 마주치기가 싫었다. 그건 말로 설명하기엔 좀 복잡했다. 뭐랄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넌 참 착한 사람 맞아,라는 생각이 먼저 들고 그렇다면 난 도대체 뭘 잘못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하는 억하심정이 솟는 것이었다. 발버둥칠수록 빠져드는 늪 속으로 두 발을 마저 들이민 느낌이었다. 집 안에 있을 때면 수혜는 우울의 폭탄처럼 위태롭게 떠다녔다.

 

난 민물생선이 싫어.

서울로 돌아오기 전날 밤, 숙소의 방문을 닫자마자 수혜는 그렇게 쏘아붙였다. 하윤은 말이 없었다. 탁자 위에 핸드백을 탁 내려놓으며 수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열렬한 환영’도 싫어.

공항까지 마중나온 송선생이란 사람은 수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열렬히 환영합네다. 송선생은 하윤과는 구면이었다. 인상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송선생 아닌 다른 사람이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수혜는 송선생이 안내하는 대로 평양 시내를 따라다니며 여행에 동행한 것을 내내 후회했다. N시에 갔을 때와 지금,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점심 메뉴는 민물매운탕이었다. 대동강에서 잡은 귀한 생선이라며 송선생은 자꾸만 많이 드시라 권했지만 국물만 몇술 뜨는 시늉을 하고는 김치와 나물로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수혜는 민물생선을 먹지 않았다. 마지못해 한술 뜬 국물은 뜻밖에 비리지 않고 시원했지만, 살점은 하나도 떠먹질 않았다. 수혜의 식성을 알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 하윤에게 보란 듯이.

청결하고 반듯한 거리를 지나 유치원에 갔을 때도 아이들은‘열렬한 환영’을 해주었다. 처음 가본 곳 같지가 않았다. 그곳에서 펼쳐진 풍경들은 공영방송에서 물리도록 되풀이해서 본 것들이라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붉고 큰 꽃송이를 머리에 꽂은 아이들이, 어린 트로트가수같이 가성의 고음으로 동요를 불렀다. 틀에 찍어낸 듯한 똑같은 미소를 띤 아이들의 손동작은 너무 장식적이라 하나도 귀엽지 않았다. 게다가 천박한 어깻짓이라니.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율동이 수혜는 보기 싫었다. 얼마나 가혹하게 연습을 시켰으면.

지난번에 보내주신 구충제는 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평양의 유치원과 탁아소 아이들에게는 거의 분배되었지만, 공화국 전체의 수요를 계산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지요. 성장기 아이들에게만 한알씩 나누어주려 해도 모두 이백만정이 필요합네다. 하윤은 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백만정이라니. 한알에 얼만데. 단순히 암산을 해보아도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어쩌라고. 나보고 어쩌라고. 왜 하필이면 당신이고 나야. 수혜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붉은 꽃을 단 아이들이 끊임없이 노래를 부르며 비슷한 춤을 추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원치 않는 손가락을 끌어당겨,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를 약속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 화가 솟구쳤다.

눈앞의 그 아이들은 꽤나 건강해 보였다. 수혜는 고개를 저었다. N시도 평양도 아닌, 알지 못하는 국경 근처를 떠돌던 아이들. 누군가 찍어온 구식 비디오테이프의 흔들리는 화면 속에서, 그 화면보다 더 흔들리는 불안감을 흰자위에 새긴 채로, 핏기라곤 한점 없던 얼굴들이 떠올랐다. 굶주림과 추위가 그 아이들을 새로운 종의 야생짐승으로 만들어놓았다. 이백만알의 구충제와 수십만알의 결핵약을 보낸다 한들 그 아이들과는 무관한 일일 것이다. 기계를 통째 옮겨다 빵공장을 지어주어도 그 아이들 입에는 빵 한쪽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흙 묻은 푸성귀와 버려진 음식을 주워먹던, 병든 짐승처럼 삐쩍 말라 국경 근처를 떠돌던 아이들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또다른 나라의 아이들이었다. 이백만알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송선생의 강기어린 눈빛이 싫었다. 맡겨놓기라도 했단 말인가. 자족적인 지상낙원에 사는 것처럼 온갖 잘난 척은 다 하면서 말이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엔 비가 내렸다. 평양 시내의 아파트는 짙은 잿빛으로 물들어가고 귀가를 서두르는 사람들의 걸음이 빨라졌다. 채소가게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자잘한 건 다르지만 크게 보면 다 똑같은, 사람 사는 풍경일 뿐이다.

N시는 가슴속으로 밀려들었고 평양은 머리에서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그때와 지금, 무엇이 달라졌나. 수혜는 빗줄기 속에 흐려지는 거리를 내다보며 제 마음이 더 시커멓게 뒤엉키는 걸 느꼈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그리고 그중 확실한 것 하나는 자신과 하윤의 관계가 변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을 매료시켰던 바로 그 부분이, 더이상 그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혹은 그 순서가 바뀐 것인지도. 어쩌면 하윤은 죽을 때까지 이 일에 매달릴 것이고, 자신 역시 한 그물에 갇힌 듯 언제까지 헤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만 수혜는 폭발한 것이다. 민물생선이, 열렬한 환영이 싫은 게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는 이 일이 이젠 지겹다는 말이었다. 하윤이 모를 리 없다. 이 문제로 크고 작게 다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니, 다투었다기보다는 쏘아붙이는 수혜의 말을 하윤은 그저 고스란히 다 들어내곤 했다. 그게 더 견딜 수 없었다. 떠들어대는 수혜를 가만히 바라보는 하윤의 눈은 거울처럼 수혜를 담고 있었다. 하윤이 수혜가 팽개쳐놓은 옷을 집어 옷걸이에 걸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그렇게 속마음을 얼굴에 적어서 시위를 해야 해? 알게 모르게 여태 그렇게 애를 써놓고는 왜 또 갑자기.

누구라도 명분이 아름다운 일을 하고 싶어해.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래. 나도 그러고 싶어. 이건 아니야. 이 일의 끝은 어디야? 왜 흔적도 없는 자리에 내가 뼈빠지게 일해서 번 돈을 쏟아부어야 해? 나도 내가 번 돈을 날 위해서, 현이를 위해서 쓰고 싶어. 노후를 대비해서 저축도 해놓고 싶어. 난, 테레사 수녀가 아니야. 뭐, 구충제? 항생제? 또 뭐가 필요하대? 이 다음엔 또 무슨 질병을 당신이 지고 가야 해? 세상의 가난은 하나님도 어쩔 수가 없어. 하루 종일 너무나 암울해서 미칠 것만 같았어. 이런 일 하면서 제 속주머니 털어서 빈 구멍 메우는 바보가 어딨어? 우리한테 남은 게 뭐야. 퍼준다는 욕이나 배가 터지도록 먹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난, 천사와 살고 싶지 않아. 이기적이고 졸렬하고 제 식구나 챙기는 남자와 살고 싶어.

당신은 냉소적인 사람이 못돼.

오지 말걸 그랬어. 아까 걔들은 건강하고 행복하게 보이더라. 나보다 더. 우리가 보면서 눈물 흘렸던 그 아이들은 지금 어디 있는데? 날 납득시켜봐.

하윤은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하지 않아. 나도 알아.

무언가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며 하윤은 수혜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안구 뒤쪽으로 눈물이 흘러내리는 듯,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기업과 개인에게 후원금을 요청하고 강연을 다니고, 또 기증된 품목 따위를 필요한 곳에 연결시키는 일로 늘 바빴지만, 그의 일이란 건 처음부터 깨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일보다 나을 게 없어 보였다. 수혜의 눈에 그는 불가능한 일을 벌여놓고 기적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자료로 정리되어 기록이 남는 지원사업 이외의 경비는 늘 개인적으로 충당했다. 수혜의 전시가 있을 때면 하윤은 늘 목돈의 사용처를 먼저 생각해놓곤 했다. 그날 밤 호텔에서 그의 눈빛을 보았을 때, 수혜는 절망했다. 더이상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윤도, 그가 하고 있는 일도. 수혜는 마지막으로 못박았다.

이건, 잘못된 과녁이야.

 

그렇게 돌아온 후부터 수혜는 거의 작업실에서 지냈다. 그날도 수혜는 작업실에서 별의별 쓸데없는 일은 다하고 있었다. 정작 작업엔 손도 대지 못한 채. 점심시간엔 명조와 한시간 가까이 통화를 했다. 같이 점심을 먹자 했지만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네가 아니었으면 이 시간을 어떻게 견디겠어. 들어주는 너마저 없었으면 내가 미쳐버렸을 거야. 전화를 끊기 전 그렇게 말했다. 오후엔 쿠릴열도의 생태계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끝까지 보았다. 사람들이 동물 다큐를 좋아하는 건, 화면에 인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며. 겨울 끝의 추위는 어째 첫추위보다 견디기가 어렵다.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면 실내는 더 썰렁하게 느껴진다. 왜 이렇게 질기게 추워, 짜증을 내며 펼쳐놓고 손도 안 댄 작업대를 대충 치우고 바깥으로 나왔다. 집에 들어가 뜨거운 물에 몸이라도 담그고 싶었다.

텅 비어 있던 냉장고가 생각나 슈퍼에서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대로 사들고 나왔다. 뒷길로 들어서니 내린 지 한 사흘 된 눈이 지저분하게 뭉쳐 얼어붙어서 걷는 게 여간 힘들지 않았다. 감자와 양파 따위가 든 봉지는 점점 무겁게 늘어져 세번이나 눈 위에 내려놓고는 손가락을 문질러주어야 했다.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거실은 어둑했고, 시큼한 김치냄새가 났다. 바닥이 지저분한 비닐봉지를 현관에 내려놓을 수 없어 신발만 벗고 그대로 부엌으로 갔다. 식탁에 앉아 라면을 먹고 있던 하윤이 엉거주춤 일어나 봉지를 받아들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 옆을 그냥 지나쳐 씽크대 위에 봉지를 내려놓았다. 오그라졌던 손가락이 간질거렸다. 오후 네시에 그가 어둑한 식탁에서 라면을 먹고 있지 않았다면, 아니 불이라도 켜고 라면을 먹고 있었다면, 수혜는 제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던 그 말을 내뱉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헤어지자.

냄비 속엔 라면이 절반쯤 남아 있었다. 이런 말이라면 라면을 다 먹고 난 후에 해야 되는 게 아닌가. 수혜는 이건 옳지 않다는 생각과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하윤은 냄비를 들고 와 개수구에 남은 라면을 쏟아붓고 수돗물을 틀었다.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왜 이리 사는 게 누추하니? 당신이, 너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어서, 나는 힘들고 외롭다. 난 껍데기만 남았어. 날 놔줘.

수도꼭지를 잠그자 초침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하윤이 언제나 자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오후 네시엔 아니었다.

 

들소들 사이에 서 있으니 투명한 지층 속에 파묻혀 있는 것 같다. 하윤은 지금 어디 있을까. 기억 속의 그는 늘 한장의 사진으로 정지해 있다. 남은 라면을 개수대에 붓던 모습. 잠든, 웃는, 우는, 먹는, 말하는 모습들을 묶어 움직이는 그를 떠올려보려 하면 자잘한 기억들은 흐릿하게 지워져버리고, 남은 라면을 개수대에 붓던 옆모습만 남는 것이다.

……칼바람에 실린 눈보라가 딱딱한 가죽을 두드려댄다. 푸르게 얼어붙은 바이칼호를 묵묵히 건넌 소들은 평원과 언덕을 지나 끊임없이 걸어간다. 겨울과 봄과 여름 속을 걸어간다. 한반도를 지나고 얼어붙은 베링해협을 건너 알래스카를 밟는다. 삶의 조건은 달라지지 않는다. 찾아간 곳은 떠나온 곳과 똑같다. 얼어죽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걸어야 하고 여전히 이끼를 핥아서 고픈 배를 채워야 한다. 먹고 사랑하고 걷는 모든 일들이 가혹하다. 가혹한 삶의 끝에 숨이 끊어지는 순간 들소는 돌처럼 얼어붙는다. 빙하기의 대기를 제 체온으로 버텨낸 것들, 싸울 줄 몰랐던 초식동물, 욕망 이전의 존재들…… 지층 아래의 존재들.

하윤을 위한 기념비로 땅속에 묻힌 것들을 선택한 것은, 제 교활함이라는 것을 수혜는 알고 있다. 헤어지게 되면 모든 걸 다 주겠다고 말했듯, 외면하고 싶다고 말하는 대신 민물생선이 싫다고 말했듯.

아픔인지 죄책감인지 모를 마음속의 소용돌이도 얼어붙은 지층 아래 파묻힐 것이다. 전시가 끝나면.

등이 아프다. 싸울 땐 싸우더라도 그날 민물매운탕은 참 맛있었다고, 그렇게 말해주었더라면.

 

 

“담배, 끊었어?”

혼잣말처럼 묻고 수혜는 담배에 불을 붙인다.

“살면 얼마나 산다고. 흥.”

앞뒤 안 맞게 그렇게 중얼거리며 수혜는 웃는 시늉을 한다.

어디에 있든지 지금 당장 나와, 수혜가 전화했을 때 명조는 사무실에 있었다. 해야 할 일은 늘 끝없이 쌓여 있다. 아니다. 사무실에서 명조는 수혜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뒤풀이가 끝나고 난 후 잠시라도 얼굴을 보고 돌아가던 습관마저 접어버렸다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며. 수혜는 불 꺼진 갤러리 앞에 서 있었다. 빨리 왔네? 하는데 소주와 찌개 냄새가 희미하게 밀려왔다. 공기는 끈적이고 거리는 더러웠다. 가게들이 내놓은 쓰레기봉투들이 돌덩이 옆에 쌓여 있고 오후의 거리에 가득하던 흥분과 열기 대신 알코올 냄새가 떠돌았다.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혼자서 마시긴 싫다고, 수혜는 할 수 없이 전화했다는 듯 말했다. 문 닫을 시간이 가까운 까페엔 손님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둘만 앉아 있으니 더이상 무슨 얘기를 할까 싶다. 새삼스럽게 지난 시간의 안부를 묻는 건 어리석은 짓 같아 말없이 커피만 마셨다.

“명조야. 그 사람과 헤어지길 원했지만, 그런 방식은 아니었어. ……있잖아.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어. 느릅나무 껍질을 삶기도 했고 굼벵이도 사들였어. 말도 안된다 생각하면서도 민간요법에 매달려 그 사람을 더 괴롭히기도 했고. 고통이란 게 참 가혹한 것이더라. 얼마나 아픈 줄은 알겠는데, 보고 있는 난, 그 사람이 겪는 고통을 손톱만큼도 느낄 수가 없었어. 아프구나, 많이 아프구나. 참 기가 막히도록 고통스러워 보이는데, 난, 그 고통이 어떤 것인지 끝내 모르겠더라. 병원에서 진통제 외엔 다른 약을 더이상 쓰지 않겠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을 차에 태우고 기도원엘 갔어. 일곱살 때 주일학교 다닌 게 전부면서 말이야. 나는 신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하소연했어. 매달려봐, 제발, 살려달라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암덩어리가 녹아나온대. 그 사람은 고개를 저었어. 그러고 싶다고, 그런데,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다고.”

수혜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제 안에서 무수히 되삭이고 되삭여 뼈만 남은 이야기였다.

“그 사람이 발병한 후로 마지막 눈을 감기까지 내가 한 모든 것들은 진심이었어.”

“그랬을 거야.”

수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 사람이 아플 무렵, 헤어지는 절차를 얘기하며, 나는 내 밑바닥을 다 보여주었어. 그러다가 열녀나 된 듯 이리저리 광분하는 날 보는 그 사람 마음은 얼마나 복잡했을까. 다 끝나고 보니 내 진심이란 게 결국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더라. 당신 살아야 돼. 건강해지고, 그러고 나서 싸우던 거 마저 싸우고, 그다음엔 마음대로 해.”

수혜는 커피가 마시고 싶은 게 아니라 구멍 깊은 귀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떠나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은 사랑, 그런 건 아니야. 근데 말이야, 짜증내고 미워하고 화내던 거, 털어내면 날아갈 거 같던 그것들이, 그 쪼잔한 조각들이 나였나 봐. 구멍이 휑하니 뚫린 거 같았어. 손톱만큼 자잘한 나무토막들을 이어붙여 뿔을 높이 세우고 둔하도록 커다란 몸뚱이를 메워나가면서 물어보았어. 얼음을 딛고 선 날들을 어떻게 견디었냐고, 어떤 뜨거움을 품어야 숨을 멈추는 순간 얼음덩이로 변하는 절대적 공허를 견딜 수 있냐고.”

“들소들이, 뭐래?”

피식 웃으며 수혜는 새삼스럽게 제 손바닥을 들여다본다. 아물지 않은 생채기가 붉다.

“걸어가라더군. 얼음과 초원과 꽃과 사막과 돌무더기를 지나 그냥 걸어가래.”

까페 주인이 손가락으로 시계를 가리킨다. 바깥으로 나와 안국동 쪽으로 걸어갔다. 텅 빈 거리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취객 하나가 쓰레기 사이를 비척거리며 걸어간다. 갤러리 앞을 지나가며 여기였지, 생각하는데 수혜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까, 우연히 바깥을 내다보다 여기 서 있는 널 봤어. 플래시몹을 하는 아이들 가운데 서서 같이 넘어지지도, 씩씩하게 가버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더라. 우스웠는데, 나도 그랬을 거야. 우린 참 닮았잖아.”

닮았다는 말이 그토록 쓸쓸하게 들리는 순간이 있을 줄은 몰랐다. 달려오던 빈 택시가 앞에서 주춤거렸다. 수혜가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일회용 용기들이 버려져 있는, 검은 관 같은 돌을 사이에 두고 수혜는 명조를 쳐다보았다.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택시가 길 끝으로 사라지자, 명조는 텅 빈 거리를 둘러보았다. 오후 여섯시와는 너무 다른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