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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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황광우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창비 2007

지워질 수 없는 80년대의 기록들

 

 

김원 金元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교수 labor2003@naver.com

 

 

젊음이여-표지올해로 87년 민주화 이후 20년이 지났다. 또한 이른바 과거사와 민주화운동에 대한 학문적·제도적 재평가 작업이 전개된 지도 상당한 기간이 지났다. 이와 연관된 각종 회고록과 수기의 집필, 그리고 구술작업들이 현재 진행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출판된 황광우(黃光祐)의 『젊음이여,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는 80년대 운동 당사자, 특히 급진적 노동운동을 주도했던 활동가의 자기기록이라는 점에서 이전 자료와 다소 결을 달리한다. 당시의 사회운동에서‘주변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80년대 초·중반 학생출신 노동자들이 전개한 운동과 그 과정에서의 고민, 갈등이 진솔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평자가 황광우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시절인 1991년과 92년 즈음이었는데, 당시 열독하던 월간지 『길을 찾는 사람들』(이후 『사회평론 길』로 통합)에 실린‘다른 이름’으로 씌어진 글들을 통해서였다. 당시는 사회주의운동의 노선 전환을 둘러싼 사상투쟁이 무척 심했던 시절이었다. 내심 그 시절과 언저리에 대해 이 책이 어떻게 평가했을까 궁금하기도 했고, 88년부터 노동운동에 커다란 영향력을 지녔던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에 대한 평가도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 전사(前史)까지만 다루고 있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은 시간순서에 따라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부‘인연’에서는 70년대 후반 대학시절 운동에 참여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회상을, 2부‘흐르는 물처럼’은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에서 85년까지 공장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경험을, 3부‘어둠은 간다’는 86년 전후 인천에서의 노조운동과 정치적 노동운동에 대한 경험과 평가를, 마지막 4부‘역사의 새벽’은 87년 민주화투쟁 시점까지의 사건 들을 서술하고 있다. 평자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글은 한 개인의 경험을 담은 자전적인 형식을 띠고 있으며, 저자는 젊은 세대에게 그 어떤 교훈을 주기보다는 청년의 열정이 존재하던 과거를 생생하게 그려서 있는 그대로 만지게 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9면). 평자는 이 가운데 몇가지 흥미롭고 더욱 논의되면 좋을 부분을 중심으로 간략히 글을 전개하고자 한다.

우선 이 책은 파시즘시기 운동에 참여했던 개인과 그 주변 사람이 겪었던‘내상(內傷)’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다. 수배시절 반지하방에 형사가 들이닥칠까 겁내던 아내의‘경계심’(16~17면), 저자의 활동 탓에 고초를 겪던 형 황지우(黃芝雨)를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경찰에 협조한 형수의 이야기(29면) 등은 군부 권위주의정권이 운동가뿐 아니라 그 주변인들의 일상과 사고에까지 깊은 상처를 입혔음을 잘 드러내준다.

70년대 대학사회와 운동진영 내부에 대한 흥미로운 진술들도 주목할 만하다. 80년대와 유사하게 나타나는 “사육된 세대”로서의 자기인식과 자기부정(19면), 대학생활에 대한 절망적 회의나 교조적인 선배들과의 갈등, 그리고 영웅주의와 출세주의라는 뼈아픈 화살(42~43면), 기독교와 맑스주의 사이에서 번뇌하다가 사회에 대한 책임과 실천을 강조하는 운동을 선택하는 과정(58~59면) 등은 70년대 후반 대학사회를 둘러싼‘내면세계’의 일단을 드러내는 부분들이다. 다른 한편 그가 경험한‘민중’혹은‘공장’에 대한 성찰도 눈여겨볼 만하다. 대학시절 농활에서 선배들은 민중을 대상화하지 말자고 말했지만 실제로 민중의 삶에 다가가기는 어려웠으며‘민중’이란 용어 자체가 그들을 대상화한다는 언급(44~45면)이나, 노동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듣기 싫었던‘학삐리’란 말과 출신성분 자체의 벽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던 학출의 모습(165면) 등은 70~80년대 지식인과 민중 간의‘관계’가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둘러싼 논의에 쟁점을 제공해준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저자의 학출 노동자 경험이다. 학출 노동자의 공장경험은 아직 한국의 학문세계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한 주제다. 과거 권인숙(權仁淑)의 『하나의 벽을 넘어서』(거름 1989)나 최근 유경순의 『같은 시대, 다른 이야기』(메이데이 2007) 등이 출간되어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저자의 상세한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노동자 되기’의 과정에서 가장 큰 고통이 식사문제였다고 고백하면서 저녁에는 자장면을 사먹는 자신에 대한 자책(70면), 기계소리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다며‘노동자로 살 수 없어요’라고 흐느끼던 여자친구의 고백(73면) 등은 학출 노동자의 80년대적 경험이 얼마나 다양한 결과 폭을 지니고 있는지 보여준다. 또한‘선(先)기술습득 후(後)현장취업’이라는 노선을 포기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좌절감(112면), 친목모임이나 축구대회조차 조직하기 어려웠던 당시 경동산업 내부의 이모저모(116~17면) 그리고 중산층 출신 여성 학출 활동가들의 어려움과 자취방 풍경(125, 129면) 등은 이 시기 실천적 지식인의 한 유형이던 학출 노동자에 대한 연구에서 매우 소중한 기록들이다.

이 책은 또한 80년대 운동이 지닌 어두운 면을 가감없이 그려내고 있다. 여러가지가 언급되지만, 단적으로 90년대 초반 고 김남주(金南柱)가 (얼마 전 고인이 된) 윤한봉(尹漢琫)에게 후배들이 자신을 재교육 대상으로‘낙인찍는다’고 하소연하는 일화가 나온다.(78면) 후배들이 운동선배들에 대해 조심성 없이 함부로 말하고 선배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이 장면은 80년대 운동의 또다른 폭력성을 드러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평자는 김남주의 유고집 속 90년대 사진들에 어린‘어두운 표정’의 이유를 아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몇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자면, 저자는 87년을 “온국민이 하나 되어 독재타도”“3·1만세운동과 맞먹는 거국적 국민항쟁”(213~14면)이라고 규정한다. 물론 말미에 결국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타협한 명예혁명’(220면)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지만, 이런 평가는 87년에 대한‘신비화’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저자의 말대로 87년은 어느 운동진영의 청사진에서도 예측되지 못한 사건(216면)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왜 혁명의 열정으로 가득찬 이들이 그것을 예측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자기평가도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이는 정치적 노동운동, 인민노련과 통합민중당 등 전후사(前後史)에 대한 자기진술 속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또한 다소 의아스러운 점은 왜 87년에 대한 마지막 장을 저자 자신이 변혁주체라고 사고하던 노동자들의 7~9월대투쟁이 아닌, 6월항쟁으로 종결짓고 있는가이다. 저자를 포함한 청년들의 열정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목도하면서 절정에 달한 것이 아니었을까? 현재 젊은 세대에게 세상을 바꿀 열정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빛나는 과거도 중요하지만, 지금 청년들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천착하는 것, 즉 90년대 후반 이후 무엇이 변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다시 일어서서 저항해야 하는지‘공감’하는 것 역시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본다.

이런 남겨진 과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라도, 무척이나 공부를 하고 싶었다던 자신의 열망을 펼치기 위해서라도 저자가 빨리 건강을 회복해 다음 책을 선보이기를 고대한다.

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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