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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제임스 E. 매클렐란 3세 외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 모티브북 2006
동아시아에는 왜 과학이 없(었)을까
김재영 金載榮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교수 zyghim@snu.ac.kr
과학이 시작된 것은 언제일까? 언제부터 과학이 사람들의 생활에서 그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을까? 과학과 기술은 어쩌다가 이렇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을까? 흔히들 근대과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시작된 것은 15세기 유럽에서였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떠올리는 인물은 갈릴레오나 뉴턴 아니면 그보다 앞서 살았던 코페르니쿠스이다. 하지만 만일 코페르니쿠스가 과학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혁명’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다는 것일까? 표준적인 관점에서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의 자연철학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전형적인 과학사 저서는 그리스에서 시작해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과학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미국 스티븐스공과대학 역사학부 교수 제임스 매클렐란 3세(James E. McClellan III)와 해럴드 돈(Harold Dorn)은 상당히 참신한 과학사 책 『과학과 기술로 본 세계사 강의』(전대호 옮김)를 썼다. 매클렐란 3세는 과학의 사회사, 제국주의 역사 등을 연구하고 있으며, 『식민지주의와 과학: 앙시앵 레짐하의 쎄인트도밍고』 『재구성된 과학: 18세기의 과학적 사회』 등을 썼다. 돈은 『기술과 문화』 『과학의 지형』 『과학, 마르크스, 과학사』 등의 저서가 있다. 두 역사학자가 쓴 이 책의 원제는‘세계사 속의 과학과 기술’(Science and Technology in World History: an Introduction)이다. 이 책은 1999년 출판되어 이듬해 세계역사학회(WHA)에서 최고도서상을 받았다.
세계역사학회 최고도서상 선정위원장 데이비드 체이플(David A. Chappel)은 이 책이 과학과 기술의 역사를 매우 포괄적이면서도 명쾌하게 서술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서양에 치우친 과학사가 아니라 고대와 중세의 북동아프리카, 아시아 지역뿐 아니라 콜롬버스 이전 아메리카의 기술과 과학까지 다루고 있음을 강조한다. 바빌로니아와 이집트(3장)라든가 중국(6장)은 물론이거니와 인도나 앙코르와트(7장)라든지 마야, 똘떼끄(Toltec), 아스떼끄, 잉까 등(8장)까지 상세하게 기술한 것을 보면, 그의 찬사가 지나친 것은 아닐 터이다.
그러나 정작 책을 펼쳐들면 뭔가 좀 다르다. 제2부에서 그렇게 여러 문명의 과학과 기술을 거론하긴 하지만, 제3부와 제4부에 가면 온통 서구 얘기다. 과학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저자들로서도 결국 진짜 제대로 된 과학은 15세기 유럽에서 시작했다는 시각을 버리기 힘든 것이다. 더구나 한 장(章)을 송두리째 갈릴레오나 뉴턴에 할애하여 그의 저서에 담긴 내용들까지 아주 상세하게 소개한다거나(11~12장), 등자(鐙子)와 쟁기가 중세 유럽의 사회와 문화를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는 린 화이트(Lynn White Jr.)의 논란 많은 주장을 별 고민 없이 풀어놓는(9장) 모습은 그리 달갑지 않다. 과학사 서술에서 갈릴레오나 등자 이야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과연 중국의 과학과 기술의 비중만큼 커야 할까?
이 대목에서 이른바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의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저명한 중국학자이자 과학사학자인 니덤은 근대과학, 다시 말해서 자연에 대한 지식을 수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루는 움직임이 왜 15세기에 유럽에서만 나타났는지, 그리고 기원전 1세기부터 15세기까지 중국문명이 자연에 대한 실용적인 지식을 서구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개발하고 사용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들이 “왜 중국에서는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216면)를 묻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서 과학혁명이란 “태양 중심 행성체계로의 이행, 천상과 지상의 운동을 한꺼번에 설명하는 보편 원리의 등장, 과학적 지식을 얻는 새로운 방법의 발전, 명백한 과학기관들을 통한 과학의 제도화”(같은 곳)를 가리킨다. 비록 저자들이 이러한 질문이 왜 부당한 것이며 더 적절한 논제는 무엇인지 덧붙이고는 있지만, 유럽중심주의적 접근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그다지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저자들은 “이슬람이 근대과학으로 도약하지 못하고‘실패’한 것을 설명”하려는 노력(185면)이 역사를 오독하는 것이고, “활기 넘쳤던 중세 이슬람문명에 시대적·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잣대를 들이대는”(같은 곳)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중세 이슬람의 과학을 다룬 5장에서는 이슬람을 고대 그리스(헬레나)의 과학적 사유를 유럽의 과학혁명으로 전달해준 역할로 폄하하는 낡은 관점이 자주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기원후 1000년경“지구상에서 자연세계에 관한 지식을 가지지 않았던 문화적 집단은 하나도 없었”지만, “지적인 놀이로서의 이론적 연구를 하”는 과학자집단은 “오직 고대 헬레나 그리스에만 있”었다(268면)는 과감한 서술도 나타난다. 물론 “이슬람 세계를 제외하면”이라는 모호한 구절을 살짝 집어넣긴 했지만.
중세 이슬람의 과학은 무엇이었을까?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하려 한다면 가령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과학사의 관점에서 볼 때 15세기 조선의 과학과 기술은 찬란했다. 이는 측우기로 흔히 대변되는 농업기상학이나 간의(簡儀)·혼천(渾天)시계·앙부일구(仰釜日晷) 등 천문기구의 제작과 천문서의 출판이 보여주는 천문학과 역법에 그치지 않는다. 지도학 및 지리서 출판, 의약학, 인쇄술, 화약술, 농경기술, 나아가 자격루 등 자동기계 제작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앞선 과학과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 전기의 과학과 기술은 송·원 시대의 그것을 잇고 있으며, 송과 원은 중세 이슬람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면 15세기 조선의 과학과 기술도 중세 이슬람의 과학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한국과 관련되는 서술은 단 두 부분(금속활자와 20세기 후반의 급속한 성장)에 불과하다. 중세 이슬람의 과학이 지니는 의미를 정말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저자들로서는 15세기 조선의 과학과 기술에 눈을 돌리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제대로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한 과학사 서술이라면 유럽만큼의 분량과 비중으로 이슬람과 동아시아의 과학과 기술을 다루었어야 한다.
이 책은 어쩔 수 없는 몇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기술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잘 보여주는 훌륭한 과학기술사 책이다. 19세기 이전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거의 없던 이질적인 두 지식체계인 과학과 기술이 만나‘과학기술’(technoscience)이라는 복합적 체계로 통합되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또한 이 책의 접근처럼 과학과 기술을 세계사 속에서 꼼꼼히 살펴보면, 현대사회에서 과학이 차지하는 비중과 거기에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 사이의 거리가 어떤 연원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훌륭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왜 동아시아에 과학이 없었을까”가 아니라 “왜 동아시아에 과학이 없을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