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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강풀 만화 『26년』(전3권), 문학세계사 2007
‘광주 이후’ 세대들의 ‘광주’ 읽기
정소영 鄭素永
창비 문학출판부 편집자 cestmoi82@empal.com
나는 1982년생이다. 5·18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이다. 지난해 한 포털싸이트에 연재되던 『26년』을 챙겨보며 들었던 생각은, 이 만화 정말 재미있네, 하는 것이었다. 내 또래는 5·18이라는 사건을 전혀 몰랐다가 이 만화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어린 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라면서 5·18을 알 수 있는 계기를 자주 접한 것도 아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드라마 「모래시계」가 나왔다. 당시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게 없던 내게 이 드라마는‘어른들끼리, 그 시절을 겪은 사람들끼리 하는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얼마 후 나온 영화 「꽃잎」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해 『26년』은 정말 친절하고, 나를 위한 것이구나 하는 마음이 드는 작품이었다. 우선 인터넷에 연재되는 만화라는 점에서 친근했고, 강풀이라는 작가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고생과 서른살짜리 직장인 아저씨의 사랑을 다룬 작품으로 인터넷 장편만화의 붐을 일으킨 『순정만화』, 처음으로 귀신이 나오는 본격 공포물을 인터넷에 성공적으로 등장시켰을 뿐 아니라‘깜짝 놀라는’무서움이 아닌 의심과 불안에서 빚어지는 진짜 공포가 무엇인지 보여준 『아파트』 등 작가의 전작들은 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26년』은 5·18 당시 계엄군이던 청년이 무고한 시민을 쏘았다는 죄책감을 지닌 채 살아가다, 80년으로부터 26년이 지난 시점에 당시 희생자의 아들딸을 모아들여 전두환 암살계획을 꾸미고 실행하는 이야기이다. 암살계획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계엄군 때문에 정신이 이상해진 어머니를 둔 조직폭력배 대원, 도청 앞에서 아내를 잃은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아버지와 단둘이 살며 복수심을 키워온 사격선수, 부모를 잃은 슬픔을 묻어둔 채 결혼을 약속하고 새 삶을 꾸리려 하는 흉상조각가 등으로, 다들 과거의 사건 때문에 평생 어그러진 삶을 견뎌온 이들이다. 인물 하나하나의 고통을 생생하게 살려낸 구성, 가상으로나마‘29만원밖에 없는 그분’을 죽여버릴 궁리를 하는 데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 매회 긴장감이 고조된 채 끝나는 연재물의 묘미 덕분에 이 만화는 대중적으로 흥행하기 어려운 소재라는 부담을 딛고 큰 인기를 누렸다. 연재 당시 하루 조회수가 2백만건을 넘고 매회 2천여개의 댓글이 달릴 정도로 폭발적인 호응이 있었다. 댓글의 양상은 주로 “사무실에서 보다가 울었다”라든가 “이런 일을 잊어버린 채 살다니 부끄러웠다”는 식의 회한과 열광적인 지지, “업데이트가 왜 이렇게 늦냐”는 작품의 인기를 실감케 하는 항의 그리고 “전두환을 죽여야 한다, 전범을 처벌하자”는 감정적인 반응으로 묶어볼 수 있다. 여기서 마지막 반응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 만화는 극의 재미를 위해서 설정한 것이긴 해도 전두환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며 진행된다. 마지막 장면을 살펴보면 극의 구성이 어떤 결말로 등장인물들을 몰아가는지 느낄 수 있다(스포일러 있음). 5·18 당시 계엄군이었다가 자기합리화를 위해 전두환의 하수인이 되어 살아가던 경호실장은 마지막 순간에 참회하며 전두환이 저격당할 수 있도록 창가에서 한발짝 비켜 서준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후회가 개인적인 보복을 돕는 방향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은 이 작품의 내적 논리와 한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두환 개인을 상대로 한 폭력적 복수라는 플롯을 채택한 이상, 이 작품은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전두환 개인의 과오로 돌리는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다는 점은 강풀 만화의 큰 특징이자 매력이다. 그런데 유독 전두환이라는 캐릭터는 그렇지 않다.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전두환에 대해서는 전사(前史)가 나오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림체도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더욱 이질감이 든다. 마치 전두환은 작가가 생각하는 인간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듯하다. 작가의 이러한 인식이 결국 복수극이라는 플롯을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
복수극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쉽게 동요시킨다. 피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하기 쉽도록 잘 짜여진 경우 더욱 그렇다. 감정을 응축시켰다가 격앙된 폭발을 일으키는 데는 이러한 플롯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만화는 독자로 하여금 역사적 사건에 대해 냉철하게 판단하게 해주는 작품은 아니다. 성찰보다는 감정을 건드린다. 그러나 역사인식에서 감수성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역사인식의 층위나 수준을 논하기 전에 「작가의 말」에서처럼 “광주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26년(이제 27년) 뒤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할지 모른다.‘적어도 잊지는 않는 것’이 중요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비극을 남의 일 같지 않게 느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작가가 무게를 둔 점 또한 80년 당시의 상처를 얼마나 잘 재현하느냐가 아니라 그 고통을 물려받은 26년, 27년 후의‘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결과는 성공적이다. 이 만화는 여느 다큐멘터리보다도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연재 전에 완결까지 모두 구상해놓는 치밀함, 풍부한 아이디어, 성실하고도 꼼꼼한 취재,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등이 이렇게 강렬한 작품을 만들어냈다.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전달해주는 데 이제껏 이만한 대중적 침투력을 갖춘 작품은 드물었다. 강풀 만화 초기의‘배설물 유머’부터 시작해서 사랑과 인연, 따뜻한 공동체 등 전작들의 주제를 따라가던 독자들은 큰 저항감 없이 이 작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한 포털싸이트에는 “『26년』 독후감 숙제를 해야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하고 누군가가 올려놓은 질문 뒤에 “우리 선생님도 이런 숙제 내주면 좋겠네요”“그 만화 정말 재미있으니 읽고 직접 쓰세요” 등의 답이 올라와 있기도 했다. 사회성 짙은 내용으로 이토록 어린 세대의 지지를 받는 작품은 흔치 않다.
한편 이 작품의 재미에 대해 말하려면 인터넷 연재만화를 종이책이라는 매체로 옮겼을 때 생겨나는 문제에 대해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단행본으로 묶이면서 인터넷 연재만화의 매력이 반감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종이책은 인터넷 만화를‘보관’하는 좋은 수단이지만, 스크롤바를 내려가며 보던 방식과는 감상 방법에서 차이가 크다. 종이책 『26년』의 경우는 본문을 2단으로 편집한 탓에 화면의 시원한 맛이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강렬한 대비감을 주며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던 화면구성도 상당부분 훼손되었다. 한회 연재분을 숨가쁘게 따라가던 것과 달리 책에서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흐름이 끊기고, 뒤에 이어질 장면이 펼침면을 통해 노출되어버린다. 인터넷 만화의 특징은 작가가 컷과 컷 사이의 여백을 조절함으로써 독자가 특정 장면과 만나는 순간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 독자는 스크롤바를 내리며 숨을 멈추고 다음 컷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나 종이책에서는 독자가 자의적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를 통해서 다음 컷과 만나게 되므로 이같은 긴장감은 사라진다. 이 문제는 특히 장편의 묘미를 살렸던 작품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오죽하면 장편 연재만화 『천일야화』(김영사 2006)를 단행본으로 묶어내면서 작가 양영순은‘두루마리 형태로 만들고 싶다’고까지 했으랴. 이 문제의 대안을 모색하는 일은 만화책의 새로운 편집·제작 방식을, 나아가 책의 미래를 꿈꾸는 일과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가 얼마전 선을 보였고 『26년』 또한 영화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기억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인 사건들이 어떤 형태로든 우리 앞에 자꾸자꾸 나타나주기 바란다. 우리와 더 어린 세대들이 잊지 않도록. 잊지 않는 것을 넘어서서, 강렬한 간접체험 속에서 역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가능하도록. 감동과 재미로 새로운 세대를 열광케 하면서도 동시에 차가운 성찰이 가능한 작품들을 많이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