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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지구는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존 란체스터 John Lanchester

소설가, 『런던 리뷰 오브 북스』(London Review of Books) 객원편집자. 소설 The Debt to Pleasure, Fragrant Harbour 등이 있음.

ⓒ John Lanchester 2007 / 한국어판 ⓒ (주)창비 2007

 

* 이 글은 London Review of Books, Vol. 29 No. 6 (2007.3.22)에 수록된 “Warmer, Warmer”를 번역한 것으로(원문은 웹싸이트 www.lrb.co.uk에서 볼 수 있다), 다음 책들에 관한 서평 형식의 글이다. James Lovelock, The Revenge of Gaia, Allen Lane 2007; “Climate Change 2007: The Physical Science Basis-Summary for Policymakers,” http://www.ipcc.ch/spm2feb07.pdf; George Monbiot, Heat: How to Stop the Planet Burning, Allen Lane 2006; Richard Heinberg, The Partys Over: Oil, War and the Fate of Industrial Societies, Clairview Books 2003; Nicholas Stern, The Economics of Climate Change: The Stern Review, Cambridge 2007-편집자.

 

 

기후변화 활동가들이 일체의 테러리즘적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건 이상하고도 인상적인 일이다. 어쨌든 테러리즘은 현대 세계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정치적 행동인데다가, 기후변화 역시 예컨대 동물의 권리만큼이나 사람들이 깊이 공감하는 쟁점이지 않은가? 주유소를 폭파하거나 SUV(스포츠 유틸리티 차량)를 훼손하는 일이 실상 그리 어렵지 않음을 감안할 때 이런 현상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여러 도시에서 SUV는 그것을 타고 다니는 사람을 제외한 모두에게 달갑잖은 대상이다. 그러므로 런던 같은 규모의 도시에서라면 수십명 정도가 SUV의 옆면을 열쇠로 긁어대기만 해도, 그래서 망가진 SUV의 주인들이 한번에 수천파운드의 수리비를 물게 된다면 이런 차량의 소유자들은 금세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예컨대 50명이 한달 동안 밤마다 차량 4대씩을 훼손한다고 치자. 한달 안에 6천대의 SUV가 망가지고, 덩치 큰 사륜구동 차량은 이내 거리에서 찾아보기 힘들어지리라. 그런데 이런 일이 왜 일어나지 않는 걸까? 기후변화에 관해 깊이 공감하는 사람들이 너무 착하고 교양이 풍부해 이런 짓을 저지르지 못하기 때문일까? (하지만 테러리스트도 대개는 고학력자다.) 아니면 기후변화에 관해 가장 크게 공감하는 사람들조차도 어떤 점에서는 그것을 정말로 믿지는 못하기 때문일까?

기후변화에 관한 모든 주제에 강한 심리적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이 나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기후변화에 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을 따름이다. 이런 태도가 완전히 낯설지는 않다. 내 또래1라면 핵전쟁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성장기 20년을 보냈을 테니까. 핵전쟁 역시 개인의 무력감과 다가올 지구적 재앙이라는 동일한 요소를 갖춘 주제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지구온난화는 외면하기가 훨씬 어렵다. 그 주제가 점점 더 자주 언론에 등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증거가 우리 일상생활에서 명백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 같은 도시인도 세계가 예전보다 조금씩 더 더워지고 있음은 분명하게 알고 있다.

지금의 문제는 기후변화를 어떤 규모로 논의할 것이냐이다. 지구온난화는 다른 무엇보다 훨씬 중요한 주제여서, 어떤 틀로 구성하거나 논의하기가 쉽지 않다. 요즘도 뉴스에서 지구온난화와 관련한 기사가 매주 최소 한번은 보도된다. 예컨대 오늘 뉴스에도 관련기사가 두 꼭지나 된다. 국내 뉴스로는 어떤 판사가 핵발전에 관한 정부의 엉터리 ‘전문가 심의’ 절차를 기각했다는 소식, 국제 뉴스로는 워싱턴의 어떤 회의에서 ‘기후변화에 대처하겠다는’ 새로운 결의를 표명한 ‘비공식 합의’가 이뤄졌으며 그 결과 ‘진정한 분위기의 변화’를 반영한 ‘비구속적’(non-binding) 선언이 나왔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세상이 요구하는 바는 바로 이런 것, 좀더 뜨거운 분위기 정도다. 그러고 나서 뉴스는 다른 소식으로 넘어간다. 헝가리 지역의 칠면조가 조류독감에 감염되고 갱들의 총격이 벌어지고 영국국교회가 내홍을 겪고 있다는 따위의 소식들이 이어진다. 여기에는 모종의 기만이 숨어 있다. 기만까지는 아니라 해도 어떤 강한 부정이 숨어 있다. 만일 지구온난화가 우리가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우려하듯 정말 심각한 위협이라면, 결코 교회의 축일이나 지역 수영대회 소식과 같은 방식으로 보도될 수는 없다. 지구온난화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다른 사안은 떠올릴 수조차 없을 거라고 지레 걱정해, 우리가 그 문제 자체를 꺼리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제임스 러블록(James Lovelock)은 강렬하면서도 지극히 우울한 책 『가이아의 복수』(The Revenge of Gaia)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도 이제 제법 나이가 들어 회고하건대, 전쟁 위협에 대한 60년 전의 태도와 지구온난화의 위협에 대한 지금의 태도에는 눈에 띄는 유사성이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무언가 기분나쁜 일이 조만간 닥치리라 생각하면서도 그게 어떤 모습일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1938년에 그랬던 것처럼 잘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대응방식은 2차대전 직전과 똑같다. 그 방식은 바로 달래기(appease)이다. 쿄오또의정서는 뮌헨조약2과 이상할 정도로 비슷했다. 정치인들은 자기들이 그것들에 대응하고 있음을 내비치지만 실제로는 시간을 벌고자 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심리적 저항이 있다는 내 말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나 혼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어찌됐든 지금 다루는 전체 주제는 너무 심각하고 난해하기에 우선 합의된 사실들에 관한 얘기로 시작하는 게 좋겠다.

 

 

온실효과의 발견과 원인 규명

 

우리 행성의 기후는 안정적이지 않다. 지구의 관점에서 보면, 기록된 인류 역사는 모두 기온변화의 폭이 상대적으로 작았던 시기의 일이다. 빙하학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빙하기에 살고 있다. 남극과 북극을 덮은 얼음을 보라. 이런 일이 지구 역사에서 늘 있었던 건 결코 아니다. 약 5천만년 전 북극에는 얼음이 없었을 뿐 아니라 기온이 섭씨 23도에 달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비교적 따뜻한 ‘간빙기’와 구분해 ‘빙기’라고 부르는 빙하기의 마지막 추위가 끝날 무렵인 1천만년 전에, 북유럽의 상당부분은 수마일 두께의 얼음 아래에 묻혀 있었다. 그때의 해수면은 오늘날보다 수백피트나 더 낮았으며 러시아와 북아메리카 사이에는 1천마일 너비의 땅이 둘을 이어주고 있었다. 일부 고(古)기후학자들에 따르면, 7억년 전 ‘바랑고이’(Varangian)라고 불리는 시기(무슨 이유에선지 지질시대의 명칭은 유명 게임인 ‘던전 & 드래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비슷하다)에는 지구 대부분이 얼음으로 덮여 거의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지구가 영원히 생명 없는 얼음덩어리가 되지 않은 건 지금도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어떤 과정들을 거쳐 이뤄진 일이었다. 적절하게 오싹한 느낌을 담아서, 이때의 일을 일러 ‘눈덩이지구 사건’(snowball earth event)이라 부른다.

지구의 기후주기에 나타나는 변이현상들 대부분은 지구궤도 내에 있는 자잘한 불규칙성들 때문에 생겨난다. 그 불규칙성은 기후라는 매우 복잡한 체계들에 의해 확대된다. 이런 기후체계들 중 중요한 하나가 온실효과다. 그게 없다면 우리 지구에는 생명체가 살 수 없을 것이다. 태양의 적외선 복사열이 지구 밖으로 다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게 바로 온실효과이기 때문이다. 이것의 존재는 1859년 아일랜드의 과학자 존 틴들(John Tyndall)에 의해 처음 제기됐다. 그는 온실효과가 없다면 “대지의 온기는 우주로 빠져나가기만 할 것이며 그리하여 태양은 서리로 꽁꽁 얼어붙은 섬3 위로 떠오를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틴들의 업적에 보태어, 20세기 초에 스웨덴 화학자 스반테 아레니우스(Svante Arrhenius)는 인간 활동이 대기중 이산화탄소(CO2) 농도를 증가시키고 있음을 지적했다. 수증기와 메탄 같은 다른 기체와 더불어 CO2는 적외선 복사열이 빠져나가는 걸 차단하기 때문에 온실가스라고 불린다. 그러므로 CO2 농도가 증가하면 지구는 더 더워진다. 아레니우스는 당시에 CO2 농도의 증가율이 낮을 거라 생각했기에 이에 대해 특별히 염려하지는 않았다. 이런 기초과학은 논란의 대상도 아니었고 과학자들 사이에서 주목받는 분야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두명의 이단아가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제임스 한쎈(James Hansen)이라는 미국의 젊은 물리학자였다. 1967년 그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금성의 표면이 납을 녹일 정도의 온도인 섭씨 400도로 뜨거워진 건 온실효과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후 같은 해에 이뤄진 다른 조사에서 금성의 대기 가운데 사실상 96퍼센트가 이산화탄소임이 밝혀지자, 한쎈은 지구의 온실효과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지구화학자이자 해양학자인 찰스 킬링(Charles D. Keeling)의 노력에 힘입어, 하와이의 마우나로아(Mauna Loa) 관측소는 1959년 이후의 대기중 CO2 농도에 관한 데이터를 수집했다. ‘킬링 곡선’(Keeling curve)이라 불리는 그 연구결과물은 대기중 CO2 농도가 급격히 상승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1979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은 미국과학아카데미(NAS)에 이 문제를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 ‘이산화탄소와 기후에 관한 특별연구그룹’이 그 과제를 수행했는데, 이들은 “기후변화가 초래될 것임을 의심할 근거나 이런 변화가 무시할 만한 수준이라고 믿을 근거는 없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대략 이 보고서를 기점으로 방대한 양의 연구들이 관련 분야에서, 특히 미래예측의 토대가 되는 상세하고 정교하며 논쟁적인 컴퓨터모델 분야에서 이뤄져왔다. (전세계에서 이 분야의 선도적인 연구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브리스틀 부근에 있는 영국기상청 산하 하들리쎈터Hadley Centre다.)

1988년 이후 CO2와 기후의 쟁점이 다시 일반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한쎈은 의회청문회에서 “지구온난화가 지금 우리 행성에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99퍼센트” 확신한다고 증언했다. 청문회들로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유엔과 세계기상기구(WMO)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IPCC)을 설립해 온실가스와 그것이 기후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보고하게 했다. 1990년 IPCC의 최초 보고서는 지난 한세기 동안 지구 평균기온이 섭씨 0.5도가량 상승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고 밝혔다. 또 지금까지 일어난 온난화의 원인은 인간과 자연 양쪽에 있을 수 있으나 미래에 온실가스가 증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인류의 행동이 요구된다고 보고했다. 이때부터 지구온난화의 원인에 관한 IPCC의 확신은 지속적으로 굳어져갔다. 다음 보고서는 1995년에 나왔다. 이 보고서는 “인간이 지구 기후에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우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2001년에 이르러 IPCC는 20세기 온난화의 대부분이 인간 활동 탓에 초래됐을 ‘가능성이 있다’(likely)고 판정했다. 여기에서 ‘가능성이 있다’라는 표현은 66~90퍼센트의 확률을 말한다. IPCC는 지난달에 네번째 보고서를 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책입안자를 위한 요약본’Summary for Policymakers을 발표했으며, 상세한 내용과 부록을 모두 갖춘 최종 보고서는 몇달 뒤에 나올 예정이다.) 새 보고서는 지난 50년 동안 관측된 지구온난화가 인간 활동의 결과일‘가능성이 높다’(very likely)고 보고했다. 이 말은 곧 연구집단이 90~95퍼센트 신뢰도로 확신한다는 뜻이다.4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수치는 ‘인간이 지구온난화를 초래했다’는 점에는 더이상 논란의 여지가 없음을 뜻한다. 유일하게 남는 의문은 이에 대해 우리가 정확히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이다.

상황이 이렇다면 모든 게 아주 분명해지는 듯하다. 즉 추론과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 확실성의 정도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기후변화의 문제는 언제나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다음의 세 영역에 구조적 결함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첫째 과학이 처한 정치적 맥락, 둘째 미디어의 과학보도 방식, 셋째 과학과 대중의 좀더 일반적인 관계에서 그렇다. 우리가 어떻게 지금의 상황에 이르게 됐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더욱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너무도 긴급한 현안과 비교하면 별것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런 태도가 옳은지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문제해결 이론의 금언 가운데에는 이런 게 있다. “망가뜨릴 수 없다면 고칠 수도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무언가가 망가지게 된 과정을 알지 못한다면 그걸 다시 작동시켰다 해도 제대로 고쳤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얘기다. 기후변화에 체계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는 과학적 예측과 공공정책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하는 문제와도 관련되기에, 우리가 어떻게 지금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과학의 정치화와 미국정부의 위선

 

다루기에 가장 단순한 쟁점은 과학의 정치화일 것이다. 과학의 정치화에 관한 이야기는 미국에서 가장 명징하게 볼 수 있다. 미국은 지구를 오염시키는 데서, 또 기후를 연구하는 데서 세계를 주도하면서, 이 쟁점에 관한 지구 차원의 논쟁에 어떤 유형을 만들어놓았다. 불행하게도 미국에서 기후논쟁이 등장했던 때는 공화당이 반(反)과학적 비합리주의를 의도적으로 포용하던 시기였다. 핵전쟁마저 불사할 듯한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 대통령후보에 대해 저명한 과학자집단이 우려를 표명하며 ‘존슨 후보를 지지하는 과학자 모임’(Scientists for Johnson Campaign)을 조직한 일에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킴 로빈슨(Kim S. Robinson)의 소설 『비에 담긴 마흔가지 신호』(Forty Signs of Rain)는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이 운동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5 4년 뒤에 백악관에 입성한 리처드 닉슨은 과학자들이 공화당을 반대하는 위험스런 정치적 압력집단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닉슨은 과학기술청(OST)의 활동을 중단시켰고 대통령 과학자문을 내각에서 배제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것은 과학을 정책결정 영역에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제거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아들 부시가 집권하기 전까지만 해도 공화당이 과학에 관해 암울한 쪽을 선택한 것만은 아니었다. 아버지 부시는 상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한 유엔 기후변화협약(UN Framework Conventionon Climate Change)에 기꺼이 서명했다. 하지만 아들 부시는 이 문제를 논의하는 데 주저했으며 행동을 취하는 데는 더욱 그러했다. 이처럼 주저하기는 부시행정부가 석유산업의 자회사인 양 처신한 중요한 행동방식들 중 하나다. 제임스 한쎈과 다른 과학자들은 미국정부가 자신들의 입을 막으려 했다고 보고했다. 미국정부는 이 주제에 관한 산하 행정기관들의 발언을 약화하고 순화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왔다. 그런데 이런 태도를 더욱 이해하기 힘들게 만드는 건 에너지와 석유에 관한 부시 개인의 관점이다. 그가 크로포드 목장에서 보여준 갖가지 생태친화적 결정들(이 목장에서는 지열펌프를 쓰고 있으며 2만 5천갤런의 빗물을 담을 수 있는 지하수조가 있다), 그리고 그의 연설문 작성자인 데이비드 프럼(David Frum)이 쓴 『올바른 사람』(The Right Man)의 한 구절에서 부시 개인의 관점을 엿볼 수 있다.

 

한번은 에너지정책의 목표를 설명할 때 ‘값싼 에너지’라는 문구를 쓰는 게 좋겠다는 제안을 부시 대통령한테 한 적이 있는데, 그건 내 실수였다. 대통령은 나를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가 아는 사람들 중 내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다섯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사람인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런 뒤에 대통령은 이렇게 답했다. 값싼 에너지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 지경이 된 거요. 197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해마다 미국의 자동차가 1마일을 달릴 때 소비되는 기름의 양이 점점 줄어들었지. 그러나 1995년쯤 그 진행이 멈췄소. 왜 그랬을까? 대통령은 이렇게 자문하고는 기름을 엄청나게 먹어치우는 SUV때문이라고 자답했다. 그런데 어떻게 SUV가 생겨난 것 같소? 이번엔 내가 대답했다. “음, 값싼 에너지 때문인가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제안은 이렇게 끝났다.

 

이 축소 보고된 인용문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결론은 W6가 현실을 잘 인식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석유산업의 들러리처럼 행동해왔다는 점이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조지 몬비오(George Monbiot)의 책 『열』(Heat)에서 기후변화 문제가 제기될 때 그 주변에 의혹의 연막을 피우는 일에 석유산업의 로비가 얼마나 체계적으로 개입해왔는지 보면 놀랄 것이다. 그런 전술은 담배산업이 흡연과 건강을 둘러싼 싸움의 과정에서 행했던 로비에서 배운 것이다. 어떤 담배회사에서 유출된 내부 문건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의혹은 우리의 상품이다. 의혹이야말로 일반인 대중의 마음속에 이미 자리잡은 ‘사실들’과 가장 잘 경쟁할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문구도 있다. “의혹은 또한 논란을 만들어내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아닌게 아니라, 공화당의 여론조사원 프랭크 런츠(Frank Luntz)가 W의 첫번째 중간선거 기간에 정당활동가들한테 보낸 문건에도 다음과 같은 표현이 들어 있다. “과학적 쟁점들이 다 해결된 상태라고 대중이 믿게 되면 그에 따라 지구온난화에 관한 그들의 견해도 바뀔 것입니다. 따라서 논쟁의 자리에서 과학적 확실성이 아직 부족하다는 점을 최우선의 쟁점으로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석유회사와 담배회사의 돈은 기업경쟁연구소(Competitive Enterprise Institute), 카토(Cato)연구소, 헤리티지(Heritage)재단, 허드슨(Hudson)연구소, 자유개척자연구소(Frontiers of Freedom Institute), 리즌(Reason)재단, 독립연구소(Independent Institute) 같은 기관과 단체에 제공되어왔다. 특히 엑손(Exxon)은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웹싸이트와 로비단체를 후원하는 큰손이다.

 

 

석유산업의 전략에 우롱당하는 과학보도

 

이런 전략은 눈에 띄게 효과를 거두었다. 동료심사(peer-review)를 거친 지구온난화 연구의 성과는 압도적이지만(『싸이언스』에 실린 2004년의 한 조사를 보면 동료심사를 거친 관련 논문 928편 가운데 “합의된 것과 다른 견해를 밝힌 논문은 하나도 없었다”), 언론은 과학적 증거를 한편으로 삼고 회의론을 다른 한편으로 삼아 둘을 거의 50대 50으로 나누는 균형을 유지해왔다. 몬비오의 설명에 따르면, BBC는 최근 “그들에게 농락당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BBC는 지금까지도 기후변화에 관한 보도에서 우유부단했다. 균형보도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BBC는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단지 여럿 중 한가지 입장에 불과한 것을 절반에 해당하는 ‘반대편’인 양 다뤄왔다. 최근에는 ‘뉴스나이트’ 프로그램에 나이절 로슨(Nigel Lawson)이 출연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아니 우긴 일도 있었다. 그의 말이 이랬다. “전반적으로 과학은 극히 불확실합니다. 이 분야를 연구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지요.”

‘균형’의 문제는 부분적으로 과학보도의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균형’은 양당체제에서 이뤄지는 정치논쟁과 비슷하게 작동한다. (한편에서 뭐라 하면 상대편이 딴지부터 걸고 보는 식의 뻔뻔스런 양극 대립이야말로 정당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이유임이 틀림없지만.) 기후논쟁이 미국에서 좌와 우의 노선으로 양극화하기 때문에, 언론으로서는 그것을 두가지 학파가 있는 양극적 쟁점으로 다루는 게 적절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방식은 적절하지 않다. 과학에서 학파는 하나뿐이며 그밖에 소수의 허튼소리들이 있을 뿐이다. (덧붙여 말하면, 보수정당이 보존 쪽을 선호하고 환경주의 일반이 우익의 대의명분이 되는 그런 세상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데이비드 캐머런David Cameron7은 지금 영국에서 둘 사이에 이런 연계성을 다시 만들어내고자 분명하게 애쓰고 있다. 그는 이것이야말로 자신과 신노동당의 다른 점을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드러낼 주요 쟁점이라고 믿고 있다. 미국의 공화당이 이런 길을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독교주의 우파를 옹호하며 과학을 포기했고 석유메이저 기업을 옹호하며 환경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증거가 이미 한쪽으로 기울고 있는데도 ‘인간이 초래한 문제로 인해 지구가 더워지고 있음이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하는 공화당 의원이 불과 13퍼센트뿐이라는 한 여론조사 결과도 아마 이런 배경에서 설명될 수 있겠다.) 이 쟁점의 보도방식은 사람들 중 지구온난화를 믿고 싶어하는 사람, 증거들이 쌓여 더이상 그것이 신념의 문제가 아니게 되기 전부터 그렇게 믿고 싶어했던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초래한 지구온난화를 믿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증거의 저울이 다른 쪽으로 기울었는데도 계속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그것이 맞기를 바라는 쪽에 의해서건 아니면 틀리기를 바라는 쪽에 의해서건, 사실에 근거한 입장에서 관심을 돌릴 여유가 우리한테는 없으며, 공공영역에서는 기후변화라는 이 문제가 이제는 분명한 사실로 인식돼야 할 긴급한 필요가 있다.

 

 

현대과학의 ‘신화’를 둘러싼 과학자-대중의 괴리

 

우리가 어떻게 현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 정리하기에 앞서, 과학의 정치화와 보도방식에 덧붙여두어야 할 또다른 요인이 있다. 그것은 더욱 뿌리깊고도 모호한 문제로서 우리 사회가 과학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과학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한다는 점과 관련된다. 우리의 물질문화는 어떤 점에서 너무도 깊숙이 과학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과학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일종의 신념에 가깝다. 아서 클라크(Arthur C. Clarke)가 말했듯이 “충분히 발전한 테크놀로지는 마법과 구분하기 힘들다.” SF팬이면 좋아할 만한 말이다. 또한 인간과 외계인의 접촉(또는 시간여행 등)이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논의하는 자리에서 끊임없이 인용되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의 진정한 묘미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을 잘 묘사해준다는 점이다. 전깃불과 전기동력, 텔레비전, 컴퓨터, 냉장고, 자동차, 비행기, 레이저, CD플레이어, 투석(透析)장치, 무선네트워크와 합성물질 등은 우리가 믿고 받아들이는 것들이다. 우리는 그 작동방식을 알지 못하지만 기꺼이 그것들을 사용하고 혜택을 누린다. 어쩌면 ‘과학적 방법’이 무엇인지 대충 이해하며, 그와 관련된 과학에 대해 빌 브라이슨(Bil lBryson)8식으로 어렴풋이 감을 잡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뿐이다. 우리는 신념이나 신뢰와 더불어 몰이해를 상당부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현대과학이 가져다준 경이에 고마워한다.

우리가 과학에 대해 느끼는 신념 수준의 만족은 과거에도 도전받아왔으며, 무엇보다도 핵무기의 발명에 의해 그러했다. 그런데 이제 다시 과학은 지구온난화의 문제와 관련해 우리한테 재앙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전하며, 더욱이 미래예측 결과를 바탕으로 지금 당장 신속하고도 근본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한다. 과학에서는 어떤 획기적 발전이 나타나고 몇년이 지나야 비로소 기술의 형태로 그 혁신성이 드러나며, 기술의 효용성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늘어난다는,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지구온난화의 문제는 우리한테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사회의 기본 토대 가운데 하나인 과학에 대한 신념을 바탕으로 행동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그 신념이 지금처럼 분명하게 드러난 적은 일찍이 없었다. 과학적 모델에 입각해서 비싼 비용을 감수하고라도 근본적이고 신속한 행동을 취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이제 그런 과학에 대한 신념은 철저하리만치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아마도 이런 분위기 때문에 지구온난화의 공공토론에서 신경질적 흥분이나 남을 설득하려는 의지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어떤 쟁점이 대중에게 시급한 문제일수록 과학자는 한발짝 물러서서 내려다보는 태도를 취하려고 한다. 사람들의 건강과 관련해 우려할 만한 소동이 터질 때마다, 그것이 입증된 것이건(예컨대 광우병) 아니건(예컨대 MMR백신9) 상관없이, 정부 소속 과학자들은 모든 문장에 ‘증거’라는 단어를 집어넣기 시작한다. 이 말은 언론과 대중이 과학적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진짜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과학자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나는 이런 사실을 10년 전 광우병에 관한 보고서를 쓰면서 만난 어떤 나이든 생물학자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인간 광우병’의 발견이 지니는 의미와 공공정책에 끼칠 영향에 관해 묻자 끝까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가 했던 답변은 이런 식이었다. “이런 증거가 이런 가능성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이런 증거가 저런 가능성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또 “아직 말씀드릴 만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생물학자가 개인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자녀를 둔 사람들에게 쇠고기를 먹지 말라고 간곡히 권하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연구현장의 과학자들은 과학이 보도되는 현행 방식에 낮은 점수를 매기는데, 이런 태도는 자연스럽게 대중이 너무 우매하여 과학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믿음으로 점차 나아간다. 지구온난화의 경우에도 이런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관련 과학자들은 우리에게나 자신들에게나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방식으로 말할 뿐 아니라, 사실상 우리한테 무엇인가를 팔려고 든다. 그런데 우리 대중은 그들보다 교육을 덜 받았을지 모르지만 어떤 것을 팔려는 사람을 무턱대고 신뢰하지 않을 줄은 안다. 일부 과학자들이 의식적으로 우리한테 더 겁을 주려고 한다는 인상은 회의주의에 힘을 보태줄 뿐이다.

 

 

확실성의 허울에 빠진 무기력한 정책보고서

 

정말이지 우리는 이같은 이야기를 믿고 싶지 않다. IPCC 4차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우리의 그런 태도가 옳았음이 확실해진다 .‘정책입안자를 위한 요약본’(SPM)은 기묘한 문건이다. 그것은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가 예전에 “형식이란 전쟁의 기록이다”(Form is the record of a war)라고 했던 말에 딱 들어맞는다. 이 경우에 전쟁은 지구온난화를 두고 과학과 정치 간에 벌어지는 전쟁을 말한다. 전쟁은 SPM문건의 모든 행간마다 강하게 배어 있는데, 대개 그 흔적이 완전히 제거된 형식으로 들어 있다. SPM의 작업방식은 이렇다. 과학자들이 보고서를 작성한다. 그런 뒤에 세계 각국 정부의 대표자들과 한자리에 모인다. 그리고 그 대표들 모두의 지지를 받는 보고서에 대한 동의절차가 진행된다. 즉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다 빼버린 채, SPM이 관련 과학자들과 정부들 모두한테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문건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관련 정부들이란 조지 W. 부시, 압둘라 국왕, 존 하워드, 그리고 후 진타오의 행정부10를 다 포함하기에, 이 일은 일사천리의 과정이 아니다. 그런만큼 사실 SPM이 견지해낸 확고한 태도는 더러 영웅적인 면도 있다. 그 댓가로 SPM은 어떤 종류의 정책권고도 문서에 담지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해선 일부 부정적 평가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기본사실들에 대한 합의 자체가 너무도 멋진 일이기에 우리는 어차피 강제할 수도 없는 정책권고쯤은 빠져도 참아줄 수 있다.

과학적 합의를 이룬 사항들 중 첫번째로 중요한 내용은 ‘기후민감도’(climate sensitivity)라고 불리는 수치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대기중 CO2 양이 두배로 늘어날 때 기후가 더워지는 정도를 말한다. 기온이 변하면 다른 여러 값도 변하기 때문에 간단하게 계산해낼 수 있는 수치는 아니다. 예를 들어 수증기는 중요한 온실가스의 하나인데, 바다가 더워지면 대기중 수증기의 양이 늘어나면서 동시에 그 온실효과의 속성도 함께 증가한다. 아레니우스는 산업혁명 이전인 1750년에 대략 280ppm이던 CO2 농도가 인간 활동으로 인해 두배로 상승하는 데는 3천년이 걸릴 것이라는 예견을 내놓은 바 있다. 현재 그 농도는 이미 379ppm이며 가파르게 상승중이다. 중국과 인도의 경제가 성장궤도에 오르고 지구 전체의 CO2 농도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빠르게 상승하고 있어, 금세기 중에 배출가스 농도가 두배에 도달하리라는 예측은 현재 매우 확실해 보인다. 그때가 되면 ‘기후민감도’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수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IPCC에 의해 기후민감도의 ‘가능한 추정치의 범위’를 ‘최초로’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학문적 관심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 범위는 섭씨 2도와 섭씨 4.5도 사이가 될 ‘가능성이 있’다(즉 66~90퍼센트의 확률이다). 최선의 추정치는 섭씨 3도이다. 그렇지만 “사실상 섭씨 4.5도보다 더 높은 수치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로 인해 나타날 결과는 보고서에 아주 무미건조하게 나열되어 있다. 쌀쌀한 낮과 밤은 좀더 따뜻해지고 그 일수가 줄어들 것이며 뜨거운 낮과 밤은 더 뜨거워지고 더 잦아질 것인데, 이런 예측은 ‘사실상 확실하다’, 즉 확률이 99퍼센트 이상이다. 혹서와 집중호우의 빈도 증가는 ‘가능성이 높다’(90~95퍼센트). 이런 예측은 강수량에서 폭우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 것이란 점을 의미한다. 가뭄이 더 잦아지고 심해지며, 열대폭풍우가 더 잦아지고 커지며, 홍수가 더 잦아지고 커질 것이다(모두 66~90퍼센트로 그럴 ‘가능성이 있다’). 해수면은 18~59센티미터 상승할 것이다. 따뜻해지면 바다의 영역이 확장되기 때문이다. 그린란드와 남극에서 일어나는 해빙 증가는 이 예상치에 포함되지 않았는데, 해빙 증가의 효과를 이번 모델링에 포함할지를 두고 합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심할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린란드의 빙하층은 지구의 해수면을 7미터가량 상승시킬 정도의 물을 함유하고 있다. 이 정도의 수치면 예컨대 런던이나 마이애미, 네덜란드 그리고 방글라데시의 종말을 가져올 수 있다.

SPM이 보여주는 그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간단히 답해, 그 의미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비록 지금 우리가 기후의 여러 측면에 관해 예전보다 더 많이 안다 해도, 우리는 유사 이래 경험하지 못했던 기후변화의 시기를 현실에서 맞고 있다. 그것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분명하게 알지 못한 채 말이다. 만일 앞에서 말한 사태들이 전부라면 너무 나쁜 소식은 아닐지도 모른다. 더 더워진 낮과 밤, 폭풍우와 가뭄이야 견뎌낼 수도 있는 일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구의 기후가 너무도 복잡한 체계여서 그 효과가 어떻게 나타날지 충분하고 상세하게 모델링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과거에도 CO2 농도가 오늘날만큼이나 높았던 적이 있으며, 마지막 간빙기였던 12만 5천년 전에는 해수면이 지금보다 4~6미터나 더 높았던 적도 있다. 이런 수치는 대부분의 측면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 만일 유럽 또는 미국이나 아프리카 전역에서 흉작이 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일 다음 해에도, 또 그다음 해에도 흉년이 이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일 중국 농업의 중심부인 양쯔강 계곡에서 비와 해빙수의 패턴에 변화가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일 인도의 대부분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히말라야의 융빙수(融氷水)에 변화가 일어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일 엘니뇨의 움직임이 종잡을 수 없게 변해 남반구의 농업이 현재 인구 수준에서 지속 가능하지 않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일 빙하들이 녹아내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일 멕시코만 난류(과학 용어로 말하면, 북대서양의 ‘자오선 역전 순환’meridional overturning circulation)의 흐름이 영화 「투모로우」(The Day After Tomorrow)의 재난씨나리오대로 갑자기 멈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서유럽의 기온은 섭씨 8도나 더 낮아져 대략 캐나다와 비슷하게 되리라고 예측되고 있다. 그래도 캐나다에서는 3천만명을 먹여살릴 만한 식량이 생산되고 6천만명을 먹여살릴 만한 곡물이 생산되고 있다. 서유럽에는 대략 4억 5천만명의 인구가 있다. 그러면 이들은 무엇을 먹고살게 될까?11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한번의 기상재해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도시 하나를 얼마나 짧은 시간에 파괴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우리는 이런 재해들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보, 오늘 신문에 뭐 났어? 별거 없어요. 아, 네덜란드가 다 물에 잠겼대요.

SPM은 이런 공포의 씨나리오에 침묵한다. SPM의 임무가 확실성을 견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SPM은 불확실성을 만들어내는 가장 큰 원천이자 두려움을 두배로 부풀리는 원천에 대해서도 침묵한다. 그건 바로 피드백 효과이다. 이는 변화가 점점 더 큰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말한다. 앞에서 말했던 수증기가 그런 예이다. 더 따뜻해진 세계는 더 많은 수증기를 품게 되며 수증기가 더 따뜻해질수록 더욱 효과적으로 적외선 복사에너지의 탈출을 막는다. 그리하여 땅과 바다는 더 더워지고 더 많은 수증기가 생긴다. 빙하가 녹을 때도 피드백 효과가 일어난다. 빙하는 알베도(albedo)12 수치가 매우 높은데, 이는 빙하가 태양열의 많은 부분을 반사해 우주공간으로 되돌려보냄을 뜻한다. 그럼으로써 다시 냉각효과를 일으켜 더 많은 빙하가 만들어지는 등등의 일이 일어난다. 빙하가 녹으면 알베도 값이 훨씬 낮은 물이 되며, 그 물은 더 많은 열을 흡수하고, 따라서 더 많은 빙하를 녹게 만듦으로써 지구의 순알베도 값을 낮추고 이로 인해 지구는 더 더워지는 등등의 일이 일어난다. 지질시대 규모의 시간 단위에서 볼 때 지구 기후에 나타나는 폭넓은 변이현상들의 상당부분은 피드백 효과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피드백 효과들 가운데 일부는 잘 알려져 있고, 그런 경우에는 SPM에 포함되었다. 그렇지 못한 다른 효과들은 추론과 연구의 원천이기는 하지만 SPM에 포함될 정도의 합의에 아직 이르지는 못했다. 불확실한 것 중 주요한 하나는 구름에 관한 것이다. 변화하는 기후가 어떻게 지구의 운량(雲量)을 변화시킬지, 그리고 그것이 순수 냉각효과를 일으킬지(대체로 말해서, 낮은 구름들은 복사열이 지상에 도달하는 것을 차단한다), 또는 온난효과를 일으킬지(역시 대체로 말해서, 높은 구름은 복사열이 지상에서 벗어나는 것을 차단한다)에 관해서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SPM은 무서운 이야기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문건이 된다. 즉 아주 나쁜 소식이 될 만한 많은 것들이 빠져 있다. 하지만 SPM에서 제시한 중하위 수준의 예측치 정도만 보더라도 온도 상승은 곡물생산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아마존숲을 파괴할 수 있다(몬비오가 인용한 논문에 따르면 “아마존 숲은 회복능력의 측면에서 임계점의 문턱에 접근”했으며 “본질적으로 말해 식물이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다). 또 기온 상승은 지구의 기본 생태균형에 변동을 일으켜 2040년 무렵이면 “지상 생명체들은 그들이 흡입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방출하기 시작할 것”이다. 북반구의 영구 동토층이 녹아내리면 탄소보다 훨씬 더 강력한 온실가스인 메탄이 방출된다. 또한 바다 속에도 클래스레이트(clathrate)화합물이라 불리는 엄청난 양의 메탄이 있다. 이런 메탄이 대규모로 배출되면 인간이 만들어낸 온실가스의 효과는 대폭 강화될 것이고, 또다른 온실효과를 초래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런 피드백 효과가 언제 시작될지 알지 못하지만 많은 기후학자들은 섭씨 2도를 그 문턱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해왔다. 그렇지만 우리가 2도의 한계치를 넘어서는 것을 피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온실가스가 대기에 배출되는 시점과 그 후속 결과로 기온상승이 일어나는 시점 사이에는 시간 지체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체현상 때문에 우리는 이제껏 존재했던 문명을 파괴할 정도의 기후변화를 자행해왔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인류는 소수의 ‘번식쌍’(breeding pairs)만 남기고 사라지게 되리라. 제임스 러블록은 그 미래의 모습을 일별하면서 자신의 책을 마무리한다.

 

한편 뜨겁고 건조한 지대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모여 북극에 있는 새로운 문명의 중심지를 향해 긴 여정을 떠난다. 나는 사막에 있는 그들을 본다. 동이 트면서 태양이 지평선을 가로질러 캠프에 강렬한 빛을 쏘아대기 시작한다. 차갑고 신선한 밤의 공기가 한동안 떠돌더니 열기가 달아오르자 이내 연기처럼 흩어진다. 낙타가 잠에서 깨어 눈을 끔벅이며 엉덩이를 땅에 대고 느릿느릿 일어선다. 살아남은 몇 안되는 부족 사람들은 낙타 등에 오른다. 낙타는 트림을 하고는 다음 오아시스를 향해 참기 힘들 정도로 무더운 긴 여정에 오른다.

 

 

화석연료 기반 문명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재난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은 세가지다. 첫째, 과학적 합의가 잘못된 것일 수 있다. 우리는 저 90~95퍼센트 확률을 운좋게 벗어날 수 있다. 둘째, 온실가스가 일으키는 온난화를 상쇄할 어떤 피드백 효과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 존재할지도 모른다. 최근 몇년 동안 우리는 대기 상층의 고농도 황산에어로졸이 일으키는 냉각효과의 덕을 보았다(오염을 줄이고자 하는 법안으로 인해 이런 효과는 이제 곧 사라지겠지만). 우리는 또한 1991년 필리핀의 피나투보산의 화산폭발로 생긴 냉각효과 덕을 보았다. 이와 비슷한 일련의 국지적 냉각 메커니즘 덕분에 어쩌면 시간을 좀 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모든 나쁜 일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피드백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세번째는 행동을 통해 재난을 피하는 길이다. 지성의 비관론과 의지의 낙관론을 지구 차원에서 결합할 필요가 지금만큼 절실했던 적이 없다. 비관론은 상대적으로 쉽게 찾아오지만 낙관론은 그렇지 못하다. 그 주된 이유는 우리 문명이 화석연료의 사용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것은 물질적 번영을 증대하는 데 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파티는 끝났다』(The Partys Over)에서 리처드 하인버그(Richard Heinberg)가 강력히 주장했던 바이다. 화석연료는 현대의 경제활동, 과학과 기술 모두를 떠받치고 있으며 현재로서는 미래를 위한 진전된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그 연료를 사용함으로써 얻어진 ‘제1세계’의 라이프스타일을 개발도상국의 수억명 인구가 이제 똑같이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화석연료가 우리 문화에 핵심적이기 때문에 지난 1992년 유엔에서 기후변화협약을 체결했는데도 이후에 기후변화에 대한 아무런 조치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15년이 아무런 행동 없이 흘렀다. (심지어 W조차 2005년에 행한 한 연설에서 “이제 행동할 때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제 어떤 전략을 실행할 때입니다. 우리는 10년이나 15년 전에 이미 이렇게 했어야 합니다”라고.) 성과물이라고 손꼽을 만한 것으로 1997년 쿄오또의정서를 들 수 있다지만 그건 사실상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쿄오또의정서의 내용이 충실히 시행된다 해도, 2094년에 도달할 온실가스 농도를 2100년으로 미루는 정도의 효과밖에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을 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변화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석연료를 제한없이 사용함으로써 얻은 번영, 그리고 이에 따라 지난 10년 남짓 이뤄진 경제성장은 너무도 큰 안락이었다. 앨 고어는 어느 정치인보다 기후변화에 관해 더 잘 알고 있으며, 기후변화에 맞서 싸울 행동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공개적으로 분명히 밝힌 인물이다. 그렇지만 그의 부통령 재임시절에 미국의 가스배출량은 약속한 목표치를 15퍼센트나 초과했다. 정치인들은 기후변화를 이야기하는 데는 적극적이지만 지금까지 실질적 의미가 담긴 행동에 나서는 데는 그렇지 않았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 기후변화는 토니 블레어가 후임자한테 물려줄 ‘유산’을 찾으려는 기괴한 시도에서 즐겨 언급하는 최신 주제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행정부는 영국 역사상 최대 규모로 공항을 확장해 2005년에 2억 1600만명이던 통과여객을 2030년에는 4억 7000만명으로 늘리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행정부는 이런 목표의 실현에 대한 확신을 안겨주고자 활주로들을 건설중이다. 이 모두가 지난 30년에 걸친 영국 항공여행산업의 500퍼센트 성장에 뒤이은 것이다. 정부는 항공이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가장 강력한 경로이며, 온실가스 효과를 270퍼센트나 증폭한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정부는 항공산업의 성장을 멈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을까? 이런 광란적인 팽창사업이 가스배출의 규제 목표치를 맞출 모든 전망을 무산시키지는 않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항공 배출가스는 국가별 수치에 합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부의 관점에서 그런 배출가스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요란스런 활주로 건설사업을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정부정책과 모순된다고 이해한다면 잘못이다. 실제로 보면 거기에는 정책이란 게 없다. 몬비오는 『열』에서 무섭도록 문제의 정곡을 찔렀다(그리고 점잖게도 그 공을 그의 연구원인 매슈 프레스콧Matthew Prescott한테 돌렸다). “정부정책은 정부 의뢰로 작성된 보고서와 검토의견서에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서와 검토의견서 자체가 바로 정부정책이다. 문제와 그것에 대처하는 수단을 끝없이 연구하게 의뢰함으로써, 정부는 무언가 행동을 취하고 있다는 인상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음번 검토의견서(바로 앞선 검토의견서의 지적에 대한 의견서)가 나오기 전까지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이다.” 정부는 M1〔런던-요크셔 간〕 고속도로를 넓히는 데 36억파운드를 쏟아붓고 있다.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지출 정책들”에 쓰는 돈보다 7배나 많은 액수다. 이런 관료적 언사를 듣고도 여러분의 거짓말탐지기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배터리를 점검해봐야 할 때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첫번째 할 일은 딕 체니(Dick Cheney)가 옳았음을 인정하는 일이다. 그는 2001년에 이렇게 말했다. “보존(conservation)이 개인적인 미덕일 수는 있다. 그렇지만 견실하고 포괄적인 에너지정책의 충분한 기초는 되지 못한다.” 이 문구를 고쳐 말하면 이런 뜻도 된다. ‘보존은 실제로 개인적인 미덕이다’라고 말해보자. ‘개인적’이란 말이나 ‘미덕’이란 말이나 내게는 다 맞다. 그러나 이것을 개인적인 미덕으로 보는 인식에는 문제도 있다. 지구온난화의 인식과 이에 맞서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인식이 결국에 일종의 개인적 선행으로, 도덕가에 속할 자격조건으로 환원될 위험이 있는 것이다. 환경오염을 줄이고 자전거를 타고 기차를 이용하고 온도조절장치의 설정온도를 낮추고 저에너지 백열전구를 끼워 쓰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런 행동들이 그 자체로 목표가 되고 기후변화에 맞서 싸우는 일에 의미있는 기여를 하는 것처럼 여겨질 심각한 위험이 있다. 그렇지만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는 지구 차원의 변화이며 구조의 변화이다. 이에 대한 주의력을 흩뜨리는 어떤 것도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적극적 생활실천의 보존운동과 SUV운행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다. 먼저, SUV운전자는 스스로 환경을 악화하고 지구에 해를 끼치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선택하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기후변화가 일어난다 해도 운전자가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신호를 (스스로에게) 보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저 거대한 차량은 이렇게 말한다. “보라,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내 자신과 가족을 보호할 수 있다.” 이 말은 기만이며, 이 기만은 우리 개개인의 선택이 중요한 결과를 만든다는 관념과 관련돼 있다. 얼마 전에 나는 전기공급회사를 환경친화기업으로 바꿨다. 작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스스로 갖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일종의 범주착오(category mistake)13일 뿐이다. SUV운전자는 사실 아무도 보호하고 있지 않으며, 나 또한 마찬가지다.

체니의 지적 중 뒷부분도 맞는 말이다. 견실하고 포괄적인 에너지정책이야말로 지금 세계가 필요로 하는 바이다. 다만 중요한 단서가 하나 있다. 탄소를 방출하지 않는 청정 에너지원에 입각한 정책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문제에서 부시행정부는 완전히 실패했다. 부시 집단은 석유업자, 기업 들과 한통속이므로 지구온난화 문제가 오직 기술적 해법을 통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할 최악의 동기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쿄오또의정서에 가해진 타격은 미국의 거부 자체라기보다는 (그것은 이미 미국 상원에서 95 대 0으로 부결되었다) 미국이 이후에도 이 문제를 다루기를 거부하고 동시에 과학으로 입증된 현실을 은폐하려고 노골적으로 시도한 데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존재하지 않는 기술이 장차 지구온난화에 대처하는 데 결정적이라고 보는 미 행정부의 견해가 반드시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새로운 기술이 요구되는 분야는 특히 두군데이다. 하나는 탄소 포집과 저장 분야이다. 석탄이나 휘발유 같은 화석연료를 지금처럼 에너지 생산에 계속 이용하면서도 이때 생기는 CO2가 밖으로 배출되지 않게 하는 기술이다. 노르웨이 석유기업인 스타토일(Statoil, 국가가 소유권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은 이미 북해산 원유에서 추출한 휘발유의 배출가스를 따로 분리하고 있다. 또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가스화’(gasification)라는 기술을 이용해 배출된 CO2를 액체로 바꾸어 저장한다. 저장방식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지만(분명히 누출은 심각한 약점이다) 잠재성은 증명된 기술들이다. 이런 기술은 화력발전소 수천기를 건설해 미래의 경제성장을 이끌겠다는 계획을 추진중인 중국을 생각하면 특히 중요하다. 석탄은 가장 더러운 에너지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서구인인 ‘우리’)가 이런 중국의 발전소에서 배출되는 탄소를 포집하고 저장하는 효과적이고 값싼 방법을 개발한다면, 이 한번의 성공으로도 미래의 배출가스 총량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중요한 한걸음을 내딛는 셈이다. 기술을 통해 배출가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탄소 포집·저장 기술(CCS)에 대규모로 투자하는 프로그램을 지지하리라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문제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기술을 들먹이는 말들은 많은 반면,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지만 시급한 실천은 뒤따르지 않았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대규모의 탄소 포집·저장은 아마 10년 뒤에나 가능할 것이며 2030년이 되어야 선진국에서 배출가스를 경감하는 수단으로 진정한 잠재력을 발휘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도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을 것이다.

 

 

청정에너지의 전망과 지속가능한 대안들

 

부시 그룹에서 적극 거론하는 것 중 하나가 수소다. 수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바와 같이, 수소는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소”이다. 이 말은 사실이긴 하지만 무의미하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수소는 바로 여기 지구에 있지만, 지금 수소에서 에너지를 얻어내려면 거기서 나오는 것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소는 여전히 장점이 많다. 쓰기에 실용적이고 간편할 뿐 아니라 지극히 청정해서 배출물이라고는 물의 형태를 띤 것뿐이다. 이 기술은 활용 가능성이 있으며, 그 가장 유력한 형태로는, 수소보일러, 수소연료전지(대체로 배터리와 비슷하다) 그리고 새로운 가스수송관 기간시설 등이 될 것이다. 몬비오의 말을 빌리면, 이는 “대규모에다 아주 야심찬 정부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부시행정부가 염두에 두는 바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말하는 수소(종종 ‘수소경제’)의 이면에는 거대 자동차기업들의 백일몽이 있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너무도 멋진 신종 자동차를 약속함으로써, 디트로이트는 현재 당면한 문제를 회피해왔다. 그리하여 디트로이트는 자기 외의 지구 나머지 지역에는 나 몰라라 하는 식의 무관심을 상징하는, 동시에 그런 무관심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저 기이할 정도로 거만스런 SUV를 향한 열정을 계속 품고 있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은, 사람들이 화석연료의 소비가 초래하는 비용과 그 영향을 점차 더 많이 알아차리는 동안에도 미국 자동차의 1갤런당 주행거리는 사실상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1988년에 22.1mpg14이던 게 지금은 20.8mpg이다. 이런 감소세와는 반대로 휘발유값은 치솟아올랐다. 1세기 전에 포드자동차 ‘모델 T’는 25mpg를 달렸다. 이를 두고 “로마제국 최후의 날이 시작된 것 같다”는 몬비오의 말은 지극히 옳다. 이런 제도적 압박들과 거부의 정도를 감안하면 수소가 가용 에너지원이 될 때까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일은 현명하지 못한 것 같다. 그렇게 되기까지 20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는데, 우리에게 그럴 여유는 없다. 부시는 또한 옥수수로 만드는 에탄올을 대체에너지원으로 들먹이고 있다. 이런 정책은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농민과 옥수수를 재배하는 주에서는 인기가 높다. 그렇지만 더 많은 숲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절대로 피해야 하는만큼, 그것이 지구 나머지 지역의 모델로 채택된다면 재앙을 가져올 공산이 크다.

바람, 조수, 태양 같은 재생가능한 자원에서 충분한 전력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매력적이다. 그렇지만 필요한 양을 생산하는 것 자체가 어렵기도 하거니와 전력수요 관리의 복잡한 문제도 있기 때문에 나는 영국이든 어느 나라든 필요한 만큼의 전력을 재생가능한 에너지원에서 만들어낼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관한 녹색주의자들의 주장에는 많은 부분 모순 내지 희망 섞인 바람의 기미가 엿보인다. 그들은 배출가스가 적은 에너지로 즉시 옮겨가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실험적인 청정기술을 도입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두 주장은 잘 어울릴 수 없다. 기존 방식들에 대한 녹색주의의 비판은 많은 부분 유익하다. 작은 사례 하나를 들자면, 영국 전역에서 생산되는 전력의 66퍼센트가 송전의 비효율성 탓에 소실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 만하다. 그러나 소규모 발전이나 재생가능 에너지 등의 녹색 해법들은 유토피아적인 발상이 아니라 해도 지금 당장 해결책이 필요한 우리에게 적합한 건 아니다. 탄소를 발생시키지 않는 전력생산이 우리에게 시급히 필요하다면, 아니 실제로 그러한데, 그렇다면 당장 가능한 선택은 핵발전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당장이란 다음 20년까지를 말한다. 몬비오는 고전압 직류송전의 잠재력을 상당히 세세하게 거론하는데, 그것은 손실을 줄이면서도 더 멀리 에너지를 전송할 수 있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이전보다 더 먼 거리에서 에너지를 끌어올 수도 있기에 우리는 해안의 풍력터빈과 태양에너지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몇해 동안 외톨이 환경주의자들은 사하라에서 생산되는 태양전기만으로 전유럽에, 또 고비사막에서 중국에, 치와와사막 소노라사막 아타카마사막 그레이트빅토리아사막15에서 각기 자기 대륙 전역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다고 말해왔다. 이런 얘기는 허튼소리로 무시돼왔지만 값싼 직류케이블의 발전을 보면 이들의 말이 언젠가는 옳다고 판명될 수도 있겠다.

이것은 고무적인 전망이다. 아주 멀지는 않은 미래에 청정에너지의 잠재성이 있다. 그렇지만 그 사이가 문제인데, 불행하게도 여기 영국에서는 핵발전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 제임스 러블록은 이런 식의 사고를 강하게 설파한다. 내가 보기에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간단히 말해, 그것은 핵발전이 성숙한 기술이라는 주장이다. 즉 그 기술의 위험은 파악되었으며 필요한 에너지를 다 생산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체적으로 보아 탄소 없는 연료원이 시급히 필요한 우리에게 핵발전은 ‘차악’의 해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 유쾌한 전망은 아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뒤따를 국지적 반대를 정부가 어떻게 에둘러가거나 정면으로 돌파할지 하는 문제는 학구적인 관심사 이상이 될 것이다. 프랑스가 어떻게 핵발전으로 전력의 78퍼센트를 생산하고 있는지가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될 날도 곧 오리라.

결국 이 모두가 정치적 의지의 문제로 귀착된다. 주목해야 할 것은 구체적 사항들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기후변화를 저지하기 위해 해야 할 일들 대부분의 윤곽이 이미 분명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주택의 단열처리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야 한다.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오염유발자들에게 거래가능한 ‘탄소배출권’16을 그냥 쥐어주기보다는-EU가 실제로 취한 이런 정책은 3백억유로어치의 보조금과 맞먹는다-탄소 배출에 효과적으로 과세하는 방식을 찾아야 한다. 재생가능 에너지와 직류 전기를 생산하고 연구하는 데 돈을 써야 한다. 또다른 재원은 핵발전에 써야 한다. 대중교통에 두세배 더 많은 예산을 지출해야 한다. 항공여행의 성장을 억제하는 데 최대한 힘써야 한다. 그리고 해수면이 상승할 때나 식량 수입이 중단됐을 때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연구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중국과 인도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경제를 파괴하지 않고서도 탄소 배출을 극적으로 낮추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며, 배출가스 감축의 실제 효과를 능가하는 함의를 지닐 것이다.

우리는 이 모두를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 중 무엇이 실제 이루어질지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저택에 풍력터빈을 설치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는 쉽다. 그러나 기후변화에 실제로 영향을 끼치는 조치를 취하려면 대중적 인기와는 거리가 먼 일을 해야 한다. 니컬러스 스턴(Nicholas Stern)은 자신의 이름이 붙은 선구적인 보고서(“Stern Review Report”)에서 현재 전세계 GDP의 1퍼센트가량을 비용으로 들이면 미래에 전세계 GDP의 5퍼센트에 해당하는 손실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계산치는 그 비용이 우리가 능히 감당할 정도로 작다는 점을 보여주도록 미세하게 조정된 것이다. 이만한 비용이나마 서구의 유권자들이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세계 GDP의 1퍼센트는 6천억달러에 달하는데, 그 대부분은 선진국에서 부담해야 한다. 발상은 이렇다. 우리가 지금 이만한 비용을 지출한다면 세계경제는 현재의 궤도를 유지하여 2050년에 선진국의 부는 200퍼센트, 개발도상국의 부는 400퍼센트 증가하면서도 선진국의 가스배출량은 60~90퍼센트 줄고 개발도상국의 배출량은 25~50퍼센트만 늘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가 하나 있는데, 그건 개발도상국에 할당된 배출가스 증가분의 17퍼센트가 이미 사용됐다는 점이다.) 그런데 약속된 경제성장은 미래에나 맛볼 수 있다. 그 비용은 오늘 치러야 하며, 그러자면 세금이 늘고 일자리는 줄어들 것이다. 유권자한테 이런 것은 정말 현실적인 문제이지만 기후변화는 그렇지 못하다. 컴퓨터의 미래예측 모델에서 25년 후에 벌어진다고 예측된 일을 막겠다고 사람들이 바로 오늘 많은 것을 포기하고자 할까? 만일 사람들이,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는 〔러블록이 그의 책에서 경고한 대로〕 살아남은 소수의 자손번식쌍과 북극의 낙타라는 미래를 향해 계속 나아가는 셈이다.

│오철우(한겨레 기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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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란체스터는 1963년생이다-옮긴이.
  2. 1938년 9월 프랑스 영국 독일 이딸리아 등 강대국들이 뮌헨에 모여 체코슬로바키아 일부 지역을 둘러싼 영토분쟁과 관련해 맺은 조약-옮긴이.
  3. 섬나라인 영국을 말한다-옮긴이.
  4. ‘정책입안자를 위한 요약본’은 특별한 척도를 사용해 가능성의 정도를 일상어로 바꾸어 표현한다. ‘사실상 확실하다’(virtually certain)는 일어날 확률이 99퍼센트 이상임을 뜻한다. ‘가능성이 극히 높다’(extremely likely)는 95퍼센트 이상, ‘가능성이 높다’(very likely)는 90퍼센트 이상, ‘가능성이 있다’(likely)는 66퍼센트 이상을, ‘절반 이상의 가능성이 있다’(more likely than not)는 50퍼센트 이상을, ‘가능성이 낮다’(unlikely)는 33퍼센트 이하를, ‘가능성이 매우 낮다’(very unlikely)는 10퍼센트 이하를, ‘가능성이 극히 낮다’(extremely unlikely)는 5퍼센트 이하를 뜻한다. 일부 해설자들은 이런 구분을 쉽게 무시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정말 쓸모가 있다.
  5. 1963년 미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존슨은 공화당 후보 골드워터를 누르고 당선됐다-옮긴이.
  6. 아들 부시(George W. Bush)를 약칭한 것이다-옮긴이.
  7. 영국 보수당의 당수-옮긴이.
  8. 베스트쎌러 과학교양서인 『거의 모든 것의 역사』(A Short History of Nearly Everything)의 저자-옮긴이.
  9. MMR백신은 홍역, 유행성 이하선염, 풍진을 예방하는 어린이용 복합 백신으로, 1990년대 말부터 안전성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옮긴이.
  10. 각각 미국, 사우디아라비아, 호주, 중국 정부를 가리킨다-옮긴이.
  11. SPM에서 눈에 띄는 유일한 희소식은 이런 재해가 금세기에 일어날 확률이 “매우 낮은 가능성”(10퍼센트 미만)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12. 태양광선의 반사율-옮긴이.
  13. 어떤 속성을 지닐 수 없는 대상에 그 속성이 존재한다고 보는 인식론적 또는 존재론적 오류를 말한다-옮긴이.
  14. 1갤런의 휘발유를 사용해 22.1마일을 주행함을 뜻한다-옮긴이.
  15. 이들은 각각 미국 남부, 멕시코 북부, 칠레 북부, 오스트레일리아에 위치하고 있다-옮긴이.
  16. 국가나 개별 기업 등에 할당한 탄소 배출 허가량으로서, 초과하거나 이에 미달할 경우 서로 사고팔 수 있다는 점에서 탄소배출권으로 불린다-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