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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문학, 세계와 소통하는 길

 

세계와 만나는 중국소설

 

 

이욱연 李旭淵

서강대 교수, 중국 현대문학. 역서로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나비』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 등이 있음. gomexico@sogang.ac.kr

 

 

1. 문학 지구화시대의 한국문학

 

한국문학이 외국문학, 특히 동아시아문학과 무한경쟁하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최근 한국의 소설시장을 보면 그렇다. 출판사는 국적과 상관없이 외국소설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독자들은 그것을 주저없이 선택한다. 소설의 국적은 오랫동안 출판사와 독자가 소설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근대 이후 소설과 국민국가 사이에 맺어진 강력한 동맹관계가 완전히 해체된 것은 아니라 해도 유례없이 느슨해지고 있고, 그런 가운데 외국소설이 밀려들고 있다. 국민국가의 강고한 성채 속에서 개별 국민문학(혹은 민족문학national literature)으로서의 한국문학은 어찌 보면 수월하게 특권적 호황을 누려왔는데, 그런‘화양연화(花樣年華)’의 시절이 도전받고 있는 것이다. 독서시장에서 한국소설은 더이상 지존의 위치에 있지 않으며, 우선적인 독서대상도 아니다. 문학적 권위와 독자들을 놓고 외국소설과 끊임없이 경쟁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소설가 박민규(朴玟奎)가 7, 80년대 한국소설이 호황을 누렸던 것은 내수와 극소수의 밀수만 존재하던 시절 덕분이었다면서, 이제 수입과 내수의 구분이 없는 세계화의 경쟁시대를 맞아 한국문학이 해외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도 이런 상황인식의 소산으로 보인다.1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처럼 내수와 수입이 모호해지는 와중에 수입품 가운데서 일본문학과 중국문학이 강세를 보이면서 한국에서 동아시아문학 시장이 형성되는 사상 초유의 국면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고, 과거 독점적 지위를 차지하던 서구문학 위주의 세계문학 수입시장이 동아시아문학으로 대체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전에는 서구문학 위주로 외국문학을 편식하던 한국 독자들이 중국과 일본 문학을 가장 왕성하게 읽으면서, 한국에서 동아시아문학의 시대가 개화하고 있다. 한국은 지금 동아시아문학의 허브다! 동아시아가 세계 어느 지역보다도 냉전적·문화적 갈등이 심한 지역이라는 점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문화적 교류와 소통이 활발할수록 좋다는 점에서 보자면, 한국이 동아시아문학의 허브 역할을 하는 것은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고, 한국인들이 동아시아를 새롭게 상상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 문학시장에서 동아시아문학이 뒤섞이는 과정에서 일본문학과 중국문학이 유행하는 것과 더불어 한국문학이 동반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입고 과다출혈로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고, 일본문학과 중국문학은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데 비해 한국문학은 국경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문학은 지금 집토끼는 잃고 산토끼는 잡지 못하는 처지이다. 그동안 한국 드라마와 영화, 대중가요 등 한류가 국경을 넘어 일본과 중국으로 흘러들면서 일본인들과 중국인들이 동아시아를 새롭게 상상하는 촉매 역할을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문학 한류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한류가 대만에 유행하면서 한류가 현지의 대중문화를 고사시킨다는 대만 대중문화 위기론이 팽배하던 상황과 흡사하게, 한국문학계에 일류(日流), 화류(華流)가 유행하면서 한국문학 위기론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문학의 위기상황은 일시적인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한국문학이 지금 같은 위기국면에서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외국작품, 특히 동아시아작품이 끊임없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그런 가운데 한국문학이 동아시아문학, 세계문학 속에서 자신의 문학적 개성과 정체성을 확보해야 하는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책을 내는 출판사나 소설을 고르는 독자들은 불가피하게 황석영과 모옌(莫言), 정이현과 요시모또 바나나(吉本ばなな), 김훈과 쑤퉁(蘇童), 성석제와 위화(余華)를 비교할 것이다.

이처럼 개별 작가, 개별 작품 차원에서 개성과 차별성을 확보하는 것도 한국문학이 직면한 중요한 도전이지만 한국문학이 일본문학과 중국문학 등 여타 동아시아문학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집단적 개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이다. 현재 일본문학과 중국문학은 개별 작가나 작품의 개성도 개성이려니와, 더불어 흡사 일본문학과 중국문학 국가대표팀처럼 국민문학의 집단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국경을 넘고 있다. 물론 지금 일본문학과 중국문학에 현재 한국과 세계에서 유행하는 문학 경향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그러한 문학 경향이 일본문학과 중국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집단적으로 호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학이 국경을 넘어 세계와 만나는 과정에서 문학의 국적성이 흐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국적성이 더 강화되고, 개별 문학이 국민문학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의 매개를 통해 세계문학과 만나는 것도 가능하다. 두 나라 문학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 매개작용은 일종의 국민국가 차원의 집단적인 호명방식이어서 개별 문학에 하나의 억압과 왜곡으로 작동할 수 있고, 세계문학이 한 국가의 국민문학을 통째로 거부하거나 배제하는 차원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대다수 문학이 국민국가의 현실과 언어를 기반으로 산출되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의 집단적 개념으로서의 국민문학이 세계문학과의 교류에서 중요한 주체가 되고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고, 개별 문학이 좀더 용이하게 세계문학과 만나는 데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과 같은 문학 지구화의 흐름이 일종의 문명론적 추세라 할 때, 관건은 이 추세 속에서 개별 국민문학은 국민문학대로 세계문학은 세계문학대로 갱신의 기회를 포착하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문학의 지구화시대에 개별 국민문학과 세계문학의 만남이 서로에게 새로운 활기를 가져다주는 선순환구조가 될 수 있을까? 과거에는 주로 개별 국민문학이 세계문학에 일방적으로 수렴되는 양상, 특히 비서구문학이 서구문학에 일방적으로 타자화·식민화되는 양상이었고 지금도 이런 흐름이 여전하다고 할 때, 새롭게 열리는 문학 지구화시대에 국민문학은 어떻게 국경을 넘어 진정한 세계문학 건설에 참여할 것인가? 이는 한국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 전세계 문학인들에게 던져진 문명론적 화두가 아닐 수 없다.

 

 

2. 중국문학은 어떻게 세계문학의 총아가 되고 있는가

 

요즘 한국문학이 직면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중국문학은 문학 지구화시대의 최대 수혜자가 되고 있다. 물론 중국문학계에서도 최근 들어 끊임없이 위기론이 나오고,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한국 근대문학 종언론’과 유사한 맥락에서 중국 현대문학(근대문학) 종말론도 제기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한 독일인 중문학자는 루쉰(魯迅) 문학 같은 중국의 개성이 담긴 문학이 사라진 “최근 중국문학은 쓰레기다”라고 발언하여 파문을 일으켰고, 그의 이런 평가가 중국문학의 실상에 부합하는지를 두고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문학은 지금 호황기다. 국내는 국내대로, 해외는 해외대로 그렇다. 시장경제씨스템의 확대로 중국 출판업이 활기를 띠면서 문학 출판이 전에 없이 활발해지고 있으며, 이에 부응하기라도 하듯이 다양하고도 수준 높은 작품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다. 여기에 세계를 향한 중국문학의 발걸음은 사상 유례없이 바빠지고 있다. 중국문학은 지금 세계 출판계와 문학계의 새로운 총아로 떠오른 것이다.

현재 중국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은 물론이고 그밖의 작가들의 경우도 최신작뿐만 아니라 출간된 지 수년이 지난 작품까지 전세계 출판시장에서 경쟁적으로 번역 출판되는 실정이다. 내수는 내수대로 챙기면서 수출 역시 최대 호황을 누리는, 중국 근현대사에 일찍이 없던 국면을 맞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특징적인 것은 작가 한두명이 산발적으로 세계에 진출하는 것이 아니라 흡사 중국문학 국가대표팀처럼‘중국’의 이름을 달고 집단적으로 진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이라는 국가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훈풍을 타고 한국과 세계에 급속도로 알려졌고, 내용과 서사 면에서도 중국문학의 집단적인 개성이 주목받으면서 세계문학에서 하나의 고유한‘장르’로 부상할 가능성마저 보이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세계 문학시장에서 중국문학은 왜 이렇게 총아로 떠오르게 되었는가? 이에 대해 중국의 대표작가 중 한사람인 위화는, 최근 중국문학을 해외에 번역 출판하기가 갈수록 쉬워지고 있으며 한국은 물론 유럽 등에서도 경쟁적으로 출판하려 하고 있다면서 그 원인으로 두가지를 들었다. 중국의 세계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점, 그리고 중국문학이 세계문학에 진입할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는 점이다. 위화는 이러한 시대를 만난 것이 영광이라고 했다.2 위화는 지난 5월말 한국 방문 중에 연세대와 서강대에서 한 강연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자신의 문학을 비롯한 중국문학이 세계시장에서 일종의‘올림픽 특수’‘중국 특수’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겸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서구에서도 중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뻬이징올림픽이 코앞에 다가온 최근 1, 2년 전부터였다. 더구나 근자에 활발하게 번역 소개되는 작품들 가운데 1990년대 중후반에 나온 것들이 많다는 점에서 지금의 중국문학 열풍은 중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그동안 관심을 받지 못했던 중국문학 작품들이 재발견되는 차원에서 일어나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위화의 지적대로 중국문학의 수준이 높아지고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그동안 세계 문학인들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서 그렇지, 중국문학은 1990년대 이후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최근 한국과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중국 작가는 한샤오꿍(韓少功), 모옌, 위화, 쑤퉁, 꺼페이(格非)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문화대혁명이 종결(1976)된 후인 1980년대부터 작품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한샤오꿍은 문혁 종결 이전에도 작품을 발표한 바 있지만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였다. 이 가운데 한샤오꿍이 1953년생이고, 모옌이 1955년생이며 위화, 쑤퉁, 꺼페이 등은 1960년대 초반에 출생한 작가들이다. 지금 현대 중국문단을 주도하고 있는 작가들은 주로 이러한 연령대이고, 이들이 중국문학 열풍을 만들고 있다.

이들의 문학적 힘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문학의 사회적 책임을 자임하는 데서 비롯되는 중국의 역사와 현실에 대한 깊은 관심, 그리고 새로운 서사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에서 나온다. 이들은 마오쩌뚱(毛澤東)시대에 청년기 혹은 소년기를 보낸 세대이다. 마오시대에 대한 기억을 지닌 마지막 세대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문혁이 종결된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문학을 시작한 개혁개방세대이기도 하다. 그들이 청년기를 보낸 1980년대는 중국에서 모든 가치가 회의되고 전복되는 변혁의 시대였다. 문혁이 끝난 뒤 그들 앞에 놓인 현실은 폐허 그 자체였다. 이들은 이러한 폐허적·절망적 인식을 새로운 문학 추구로 표출했다. 문체혁명, 서사혁명을 통해 마오시대를 해체하려 했고, 봉건상태에서 벗어나 모던과 포스트모던을 추구하려 했다. 1985년을 전후하여 중국문단에 일어났던‘셴펑문학(先鋒文學)’운동은 일종의 중국판 아방가르드 문학운동으로서, 그러한 흐름을 대표한다. 한샤오꿍, 모옌, 쑤퉁, 위화, 꺼페이 등은 당시 거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핵심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그들은 주로 단편소설을 창작하면서 현실에 저항하고 현실을 과거와 다르게 포착하고 표현하는 자신의 문학서사, 문학언어를 단련한다. 위화와 모옌은 카프카, 가르시아 마르께스, 보르헤스, 포크너를 즐겨 읽었고, 특히 위화의 경우 카와바따 야스나리(川端康成)도 탐독했다. 과감한 문체실험을 시도하되, 위화가 “모든 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책임이 있고, 그 사회의 온갖 폐해에 대해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입쎈(H. Ibsen)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신은 시종 병든 사회의 병자가 된 심정으로 글을 쓴다고 했듯이,3 문학의 사회적 책임을 자임하는 문학정신을 가진 세대였던 것이다.

그들의 문학은 80년대라는 학습기와 실험기를 거쳐 90년대 들어 개화하기 시작한다. 그와 더불어 중국문학은 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1930년대에 이어 최고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들은 90년대 이후 공통적인 특징을 선보인다. 바로 중국 근현대사, 특히 마오시대에 대한 마지막 체험과 기억을 지닌 세대로서 자신들의 유년기와 소년기였던 그 시대를 다룬 장편을 새로운 서사를 통해 써냈다는 점이다.

중국 소설가들에게는 전통적으로 역사를 기록한다는 사관(史官)의식이 존재한다. 중국소설은 원래 역사기술에서 유래했다. 중국 작가들이 역사소설 창작에서 자기 문학의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욕구가 특히 강한 것은 이런 문화적 배경 때문이다. 작가는 흡사 사관의 심정으로 문학을 통해 역사를 재현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다.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루쉰이 장편소설이 없다는 이유로 간혹 진정한 작가인지를 의심받는 일이 일어나는가 하면, 중국 작가들이 단편에서 문체를 단련한 후 장편으로 옮겨가 장편을 주로 창작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때 역사소설은 작가의 세계관과 작가의식, 작가 고유의 문체가 고도로 결합된 자기 문학의 결정체가 된다.

그런데 이런 문화적 전통을 체감하고 더구나 문학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지닌 작가 입장에서 보자면, 중국의 근현대사만큼 역사소설 소재로 좋은 것은 없다. 중국 근현대사라는 격동의 역사 경험과 그 속에서의 인간 삶이야말로 다른 나라 문학이 갖지 못한 중국문학 고유의 문학적 자원이다. 제국주의의 침략, 식민지로 전락할 위기, 사회주의 혁명운동과 건국 이후의 극단적인 사회주의 실험, 그리고 최근의 시장경제 도입까지 중국은 20세기 인류 역사의 축소판이다. 하지만 과거 마오시대부터 8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중국문학에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소설이 없었다. 작가가 자신의 사관(史觀)을 가지고 자신이 해석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규정하고 해석한 역사를 충실히 재현할 뿐이었다. 과거 마오시대의 역사소설은 국가 이데올로기의 전달자이자 재생산을 위한 도구, 국가 기억의 전달자였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변화가 일어난 계기가 모옌의 『홍까오량 가족(紅高粱家族)』의 출간이었고, 이어서 1990년대 이후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活着)』과 『허삼관매혈기(許三觀賣血記)』, 한샤오꿍의 『마교사전(馬橋詞典)』과 『암시(暗示)』 등이 나온다. 이 소설들은 계급이나 민족의 집단적 역사, 국가와 지식인이 해석한 역사가 아닌 밑바닥 민중의 역사, 민중의 즉자적 세계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이런 역사소설들이 무수히 출현하면서 90년대 이후 중국문학에‘신역사소설’열풍이 분다. 그리고‘신역사소설’의 새로운 서사와 새로운 중국사 해석이 현재 국경을 넘어 세계로 퍼져가면서 세계문학에서 중국문학의 독특한 개성과 위치가 집단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역사소설에서 주목되는 것은 개성있는 서사와 중국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의 결합이다. 예컨대 한샤오꿍의 경우 마오시기에 대한 문학적 재현은 언어에 대한 사고를 통해 이루어진다. 『마교사전』(作家出版社 1997)에서는 일종의 사투리에 대한 정의, 기원 등을 다룬 사전식 구성을 통해 공용어의 억압적 질서를 민중의 언어인 사투리로 전복시키는 가운데, 중국혁명사의 근대성 신화를 근본적으로 사유하게 만든다. 그런가 하면 『암시』(人民文學出版社 2002)에서는 전통 필기소설을 연상시키는 새로운 장편소설 문체를 선보인다. 문혁시기의 이야기지만, 그에 대한 체계적인 서사를 보여주지도 않고 중심이 되는 이야기도 없으며 간혹 등장하는 이야기도 뚜렷한 구조를 지니지 않은 채 기억과 감정, 느낌 속에서 분절되어 있다. 문혁은 그렇게 파편화된 채 기억된다. 그가 “문사철(文史哲)의 분리가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니다”라고 말하듯이 그의 소설에는 문학과 역사, 철학이 한데 뒤섞이고 그것들의 각종 문체가 뒤섞여 있다.4

문혁을 중심으로 전후의 역사를 다루는 위화의 작품은 글로 쓴 소설이 아니라 말로 들려주는 이야기, 특히 사람 이야기이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스스로 말한다. 작가는 그것을 중계하고, 독자는 그 중계방송을 듣는다. 그의 소설을 읽는 우리는 독자인 동시에 청자이다. 작가는 흡사 저 옛날 저잣거리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기이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늘어놓던 설서인(說書人) 같다. 그의 소설은 범박하게 말하면 이른바‘전(傳)’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푸꾸이전(富貴傳)이고 『허삼관매혈기』는 허삼관전이며 신작 『형제(兄弟)』는 리꽝터우전(李光頭傳)이다. 루쉰이 세계문학 중에서 자신의 문학에만 있는 아큐를 창조했듯이 이들 세 사람은 세계문학 가운데 위화의 소설에만 있다. 위화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세 사람을 그의 소설에서 창조했다. 위화 문학이 세계문학에서 갖는 하나의 개성이 여기에 있다. 그러면서 위화는 민중의 즉자적 세계, 어찌 보면 노예 같고 우매하기까지 한 중국민중의 세계를 가감없이 묘사하면서, 문혁의 주인공도 문혁의 희생양도 아닌 평범한 중국민중에게 문혁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 진상을 보여준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문혁 서사의 패턴인‘광기의 문혁/희생당한 민중’의 구도라든가‘정치적 억압/가정의 파괴’라는 구도가 여기에는 없다. 『살아간다는 것』과 『허삼관매혈기』에서 재현된 문혁은 그만큼 새롭다. 새로운 서사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기술하는 작가의 문학적 역량과 역사의식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다.

모옌은 중국소설의 구술전통과 중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결합해 국가 차원이 아닌 샨뚱(山東) 까오미(高密)현이라는 특정 지방, 특정 민중의 입장에서 혁명과 신중국 수립의 의미를 되묻는다.5 모옌의 소설에서 중국은 민족국가를 완성하고 근대를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성과도 거두었지만, 까오미현이라는 지방의 차원, 그리고 국민이 아니라 하나의‘종(種)’의 차원에서 보자면 인간은 오히려 퇴화했다. 순종(純種)인간에서 잡종인간으로 퇴화한 것이다(『홍까오량 가족』). 모옌은 민족국가 건설에 매진했던 중국 근대성의 핵심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또한 『탄샹싱(檀香刑)』에서는 샨뚱지방의 전통극 형식을 차용하여 의화단운동(1899)이 일어나던 시절 독일 및 청나라 정부에 의한 민간의 수난을 다루고, 농민과 땅, 양식을 키워드로 삼아‘신중국’건국 이후부터 2000년까지의 농촌의 역사를 재구성한 『생사피로(生死疲勞)』에서는, 비유하여 말하면 나관중(羅貫中)과 가르시아 마르께스를 절묘하게 결합해놓은 서사를 펼친다. 소설은 『삼국지』처럼 장회체(章回體) 형식으로 되어 있고, 주인공은 죽은 뒤 말로 환생하여 소설의 관찰자가 되는가 하면, 작가 모옌 역시 소설을 서술하는 작가이자 서술되는 소설 속 인물이기도 하다.

지금 중국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은 이처럼 근대와 박투(搏鬪)를 벌이고 있다. 중국 근현대사에 대해 재질문하면서 중국 근대성의 신화를 재구성하고, 서사적으로는 중국 전통서사에서 서구 근대서사, 포스트모던 서사까지 재검토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 근현대사를 새롭게 쓰기 위해 문학을 통한 사관(史官)을 자처하고 있고, 그것을 현실주의적인 시각과 다채로운 양식 및 서사와 결합시켜 표현하기 위해 문학적 고투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들 문학의 개성이다. 그리고 이 개성이 중국문학의 힘이 되고, 지금 세계문학에서 중국문학의 독자적 위치의 토대가 되며, 중국문학이 세계문학에서 하나의 장르가 될 가능성을 열고 있다.

지금 일본문학의 개성이 포스트모던한 감각과 초국적의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는 데 있다면, 중국문학의 개성은 근대의 역사를 쥐고서 근대와 고투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근대-근대-포스트모던의 선조적(線條的) 관념으로 보자면 아직도 근대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중국문학은 이미 그 단계를 통과했다고 자부하는 일본문학에 비해, 그리고 한국문학에 비해 낙후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낙후 자체가 중국문학의 개성이자 힘이고, 세계로 가는 동력이다. 세계문학에서 중국문학의 고유한 자리와 개성이 여기에 있다.

 

 

3. 위화 문학이 세계와 만나는 길

 

세계로 좀처럼 나아가지 못하고 일종의 자폐상태에 빠졌다는 자조까지 나오고 있는 한국문학으로서는 동아시아권 중국문학이 한국문학과 달리 어떻게 세계문학의 총아로 떠오를 수 있었는지, 그 배경을 살피는 것이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더불어 주목할 것은 최근 들어 중국문학이 국경을 넘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이 달라졌다는 점, 하나의 국민문학으로서의 중국문학이 세계문학과 교류하고 소통해온 방식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위화는 중국문학이 세계로 나아가게 된 계기로 중국의 지위와 문학적 수준의 향상을 들었는데, 이는 뒤집어 해석하면 중국문학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 된다. 이 두가지 차원에서 보자면 중국문학은 사회주의정권 수립과 문혁의 후유증을 통과해 80년대의 과도기를 거친 후 90년대 들어 적어도 문학적 수준에서는 세계와 만날 준비를 한 셈이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는 일은 여의치 않았다. 개별 국민문학이 세계문학과 만나는 경로를 크게 둘로 나누면 국민국가 쪽에서 내보내는 경우와 세계 쪽에서 능동적으로 가져가는 경우가 있다고 할 때, 사회주의정권이 수립된 후 중국정부는 직접 나서서 자국문학을 내보내는 데 크게 관심을 기울였다.‘신중국’수립 직후인 1949년 11월에‘외문(外文)출판사’를 두고서 이 작업을 체계적으로 진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 주도의 사업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세계문학과의 소통이 아니었다. 국가 차원에서 진행된 유명 작품의 번역작업은 국가 홍보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선전의 수단인 경우가 많았고, 관방 이데올로기를 반영한 문학, 국가가 인정한 문학, 좀더 고약하게 말하자면 자국 내에서 문화권력을 지닌 작가들을 해외에 소개하기 위한 영문번역 써비스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세계문학과의 대화와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중국의 독백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최근에는 사회주의씨스템이 약화되면서 이런 사업마저도 거의 중단되었다.

그렇다고 세계 쪽에서 중국문학을 가져간 것도 아니었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관건은 문학의 수준이 아니라 문학의 국적성에 있었다. 중국에 대한 세계의 관심, 중국을 보는 세계의 시각과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 대한 관심도 높지 않았고, 더구나 중국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극도로 부정적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문학이나 문화가 국경을 넘어 이동할 때 국적성이 약화되거나 무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강화되는 현상이 흔히 일어나는데, 중국문학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그동안 중국 밖, 특히 서구에서는 중국문학을 문학작품으로서만이 아니라 중국을 들여다보기 위한 효과적인 창으로서,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읽는 경향이 강했다. 이때 중국이라는 국적성이 상위텍스트에 놓이고 중국 문학작품은 하위텍스트의 위치를 차지하는 가운데, 중국이라는 국가를 호명하는 시각에 중국문학이 종속되게 된다.6 그런데 지금도 그렇지만, 90년대에도 중국의 국가적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았다. 그것이 냉전의 잔재라고 하더라도 세계인, 특히 서구인의 관념 속에서 중국의 이미지는 대부분 그러했다. 개혁개방정책을 채택하면서 다소 개선의 조짐이 보였지만 톈안먼(天安門)사태(1989)로 인해 기존의 부정적 이미지 위주로 구성된 서구인들의 중국에 대한 기억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런 부정적인 국가이미지가 밖에서 중국문학을 호명하는 데도 영향을 미쳐서 일종의 편향이 일어났다. 중국에 대한 기억이 중국문학을 선별하는 중요한 기준 역할을 하면서, 문학적 수준을 갖추고 있되 자신들의 중국에 대한 기억을 위협하지 않는 방식으로 중국을 보여주는 문학으로 편향이 일어난 것이다.

이와 관련된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비교 검토해볼 수 있다. 현재 해외에서 중국문학을 대표하는 모옌, 위화, 쑤퉁의 이름이 세계에 알려진 것은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라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영화를 통해서였다. 그의 대표작 「붉은 수수밭」은 모옌의 『홍까오량 가족』을, 「홍등」은 쑤퉁의 「처첩성군(妻妾成群)」을, 「인생」은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活着)』을 각색한 것이다. 세계 영화감독 중 문학작품을 영화화하는 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지닌 장이머우 감독답게 이들 영화가 세계영화제를 잇달아 석권하면서 세 작가와 그들의 소설도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이머우의 영화가 세계적 반열에 오를 때, 정작 그 영화의 원작소설을 쓴 모옌과 위화, 쑤퉁은 여전히 국경의 벽에 갇혀 있었다. 예컨대 위화만 해도 그렇다. 그의 소설 『살아간다는 것』과 『허삼관매혈기』는 처음에 한 미국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절당했다. 번역원고를 본 편집자가 위화에게 편지를 써서 “왜 당신 소설의 인물들은 가정에 대한 책임만 있고, 사회적 책임은 지지 않느냐”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7 그의 두 소설은 각각 2003년과 2004년에야 미국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영화 「인생」이 1994년 작품이니까 영화의 유명세에 비하면 원작이 꽤 늦게 번역 소개된 것이다.

장이머우의 영화는 쉽사리 국경을 넘고 국제적 인정을 받아 세계적 영화가 되었는데, 원작인 위화의 소설은 왜 그 걸음이 지체되고 장벽을 만난 것일까? 물론 기본적으로 영화와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대중 선호도의 차이 탓도 있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원작소설과 영화를 비교해볼 때 그렇다. 작품별로 다소 차이가 있지만 모옌과 위화, 쑤퉁의 소설을 토대로 만든 장이머우의 영화는 적어도 두가지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하나는 원작소설에서보다 영화에서 정치적 사건을 훨씬 돌출시킨 점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의 민속, 전통습관 등 중국적 색채가 한결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영화 「인생」에서는 소설과 달리 주인공의 아들과 딸이 각각 현대 중국의 최대 정치재난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때문에 죽는다. 그런가 하면 소설에 없는 중국의 전통 그림자연극을 집어넣었다.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면서 원작에 없는 중국의 전통적 장치를 추가하는 것은 장이머우가 즐겨 사용하는 기법이다. 「붉은 수수밭」에서는 매매혼과 결혼풍속을 부각시켰고, 「홍등」에서는 소설과 달리 중국을 상징하는‘붉은 등’을 등장시키고 발 안마를 만들어냈다.

이로 인해 영화는 원작소설과 다른 효과를 내게 된다. 우선 인물들의 비극과 정치운동을 직접적으로 대응시킴으로써 정치적 동란과 박해로 인해 가정과 개인의 삶이 파괴되는 비극성이 한층 강화되었다. 영화 속 인물들의 죽음과 비극은 이제 사회주의 혁명운동과 정치운동으로 초래된 정치적 박해이자 살인이 되어버렸다. 사회주의 중국의 어둠과 비인간성이 더욱 두드러진 것이다. 다음으로 그림자연극 같은 중국 전통과 민속 등 중국 고유의 볼거리가 풍성해지면서 영화는 훨씬‘중국적’이 되고, 매매혼과 축첩 등 봉건전통이 강조되면서 정체된 중국, 전근대적 억압이 잔존하는 중국의 이미지가 강화되었다.

장이머우는 소설을 영화로 각색하면서 세계인들, 특히 서구인들의 중국에 대한 기억에 맞게 원작의 내용을 바꾼 것이다. 그 영화를 통해 서구 관객들은 정치적 동란으로 죽음을 맞고 가정이 파괴되고 사람을 사고팔고 전통연극을 말살하는 공산주의 치하의 중국을 보았다. 영화 속의 중국은 자신들 기억 속의 중국이었고, 영화를 통해 기존의 이미지를 재확인했다. 장이머우의 영화가 국경을 넘어 세계로 나아가면서 서구인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조정되고 도전받은 것이 아니라 재생산되면서 확고해진 것이다. 중국에 대한 이같은 재현방식이 장이머우 영화 특유의 화려한 색채와 탄탄한 서사 등 탁월한 영화적 역량과 결합하면서 그는 세계적인 감독이 되었고, 그의 영화는 세계 명작이 되었다.

장이머우의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중국을 재현하면서 세계와 만나는 방식이 중국문학에도 한동안 유행했다. 톈안먼사태 이후 서구로 망명한 중국인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문학이 서구에서 중국문학으로 호명되어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랐던 것도 크게 보면 이러한 방식이었다. 대표적으로 2000년에 까오싱젠(高行健)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는 프랑스 국적을 가진 채 주로 유럽에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그와 그의 문학은 중국인과 중국문학으로 호명되어 노벨상을 받았다. 까오싱젠이 대표작 『나 혼자만의 성경(一個人的聖經)』과 『영혼의 산(靈山)』에서 보여주는 중국은 전체주의 공산사회다. 마오쩌뚱이 지배하던 시대는 물론이고 중국공산당이 여전히 통치하고 있는 지금도 그렇다. 중국은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마저 말살된 공간이고, 당과 국가가 개인의 몸과 사상, 생활을 완벽하게 감시하고 통제하는 세계이다. 중국공산당과 국가는 처녀막을, 사람들의 사고와 생활을 철저하게 감시·통제하며, 모든 가치판단을 대신한다.8

장이머우의 영화가 그렇듯이 까오싱젠의 문학 역시 여느 세계문학과 견주더라도 뛰어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들 영화와 문학 속의 중국은 서구인들이 가진 중국에 대한 기억의 주형에 순조롭게 조응하는 방식으로 전시된다. 이들의 영화와 문학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방식과 과정은, 이같은 차원에서 보자면 영화적이고 문학적인 동시에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그렇게 개별 국민문학이 세계와 만나 세계로부터 권위를 인정받는 방식은 기실 세계문학 차원에서도 그리고 국민문학 차원에서도 치명적인 자해행위이고, 궁극적으로는 양자 모두의 존립을 위협하는 위기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세계문학은 국민문학과의 만남을 통해 지평이 넓어지고 갱신되지 못한 채 자기동일성만 반복하게 되고, 국민문학은 자신을 타자화·식민화하는 방식으로 세계문학에 편입됨으로써 그 존립 자체가 위협당하게 될 것이다. 국민문학의 개성은 갈수록 사라지고 세계문학은 갈수록 획일화되어가는 가운데 양자 모두 위기에 직면할 것이다. 이는 양자가 소통과 교류를 통해 상호 갱신되는 것과 거리가 멀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위화의 문학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은 중국문학이 오랫동안 세계와 만나온 두가지 방식, 즉 중국에서 일방적으로 내보내기와 세계에서 일방적으로 가져가기라는 국가와 세계 사이의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측면이 있다. 위화 소설은 우선 중국을 보여주는 역사소설이라는 점에서 서구 독자들의 관심을 끈다. 미국 독자들의 반응을 보면, 위화 소설을 공산통치의 비극을 고발한 소설로 읽는 경우가 많다. 미국 독자들은 위화의 『살아간다는 것』에서 우선 사회주의의 통치하에서 아들과 딸, 부인과 사위까지 잃고 가정이 파괴되는 것에 주목한다. 공산당 통치의 실정을 고발한 소설로 읽는 것이다.9 또한 『허삼관매혈기』는 마침 소설이 미국에 번역 소개될 당시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되었던, 매혈로 인해 중국 한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에이즈에 집단 감염되었던 사실과 관련하여 관심을 모았다.10 이 소설을 중국의 가장 가난한 농촌마을에서 매혈로 인해 에이즈에 감염된 비극의 뿌리를 탐색한 소설로 읽은 것이다.11

하지만 소설을 읽다 보면 그런 기대지평이 무너지는 것을 불가피하게 경험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처음 위화 소설 출간을 거절했던 출판사처럼 소설 속 인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불평과 거부감이 나오기도 했다. 한 독자는 두 소설의 주인공처럼 거듭된 비극을 겪었다면 서구문학이나 셰익스피어의 작품, 그리고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자살을 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전히 낙관과 웃음을 잃지 않는 주인공의 태도가 당혹스럽고 불가사의하다고 평하기도 했다.12 위화가 자신의 소설이 미국에서 처음 출판을 거절당한 것은 그들이 서구소설의 경험으로 자기 작품을 읽었기 때문이라고 한 것과 관련이 있는 반응이다.

사실 위화의 두 소설은 독특한 역사소설이다. 문혁 같은 정치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지만 그 정치적 사건과 인물의 삶이 직접적으로 대응되지 않는다. 장이머우의 영화나 까오싱젠의 소설에서처럼 인물들의 삶이 정치적·역사적 사건에 포획당해 무너지지 않는다. 비극의 역사가 비극의 삶을 낳는, 역사와 개인의 삶 사이의 결정과 반영 관계도 없다. 주인공의 운명은 역사의 상징이 아니다. 소설에서 역사적 비극은 그저 살아가는 동안 직면하는 운명적 불행의 형식 중 하나로 그려진다. 허삼관의 매혈은 정치적 재난 탓도 물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결혼과 아들 양육을 위해서 그리고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등 생계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다.

『살아간다는 것』의 주인공 푸꾸이와 『허삼관매혈기』의 주인공 허삼관에게 정치적·역사적 고난은 생의 기본조건 중 하나인 고난으로 치환된다. 위화 소설은 역사의 비극에 의해 인간의 삶이 파괴되는 데서 오는 비극과 슬픔을 전해주지도 않고 역사와 대결하여 승리하는 데서 오는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역경에 처한 인간이 그것을 삶의 한 형식으로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수세(隨勢)하면서 삶을 지속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연민을 동반한 인간에 대한 동정과 훈기가 피어난다. 그들은 바보 같고 어린아이 같은 자세로 역사를 감내하고 살아남는다. 피를 열두번이나 뽑으면서도 끝내 살아남는다.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삶은 살아가는 것이고 삶은 지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허삼관은 그런 영웅이다.

위화의 소설을 두고 중국 독자들은 푸꾸이와 허삼관이야말로 진짜 중국인이라고 높이 평가했지만,13 서구인들은 사회의식이라고는 전혀 없고 응당 역사적·정치적 차원에서 추궁해야 할 현실의 고난조차도 운명의 한 형식으로 받아들이는 노예적이기까지 한 이러한 인물을 이해하지 못했다. 위화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듯한 전통적 서사방식을 통해 푸꾸이와 허삼관이라는 위화 소설에만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인물을 창조했지만, 서구 독자들의 오랜 독서습관 그리고 장이머우 영화나 까오싱젠 소설 식의 중국 서사에 익숙한 기대지평에 부딪쳐 거부당했다. 하지만 점차 이러한 인물들이 진정한 중국인, 위화 소설만의 진정한 문학적 개성이라고 인정받으면서14 위화 문학은 세계문학으로 나아가게 된다. 위화 문학은 세계로 가기 위해 타자의 시선에 따라 자기를 타자화하는 방법이 아니라 중국문학으로서의 개성, 자신만의 개성을 한층 심화하는 방식으로 세계와 만나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 푸꾸이와 허삼관을 창조해내면서 위화와 중국문학이 한단계 도약했다면, 세계문학은 위화의 소설을 만나 그 지평이 넓어지고 그동안 중국을 들여다보고 중국문학을 읽어온 오랜 관습이 조정될 것이다. 세계문학의 한 자리가 위화에게 마련된 것이다.15

이렇게 중국문학과 세계문학, 중국인과 세계인 사이에 소통을 위한 새로운 가교가 세워지고 있다. 문학 지구화시대에 문학이 국경을 넘어 세계와 만나기 위해서는 내용에서도 그렇고 서사에서도 그렇고 세계문학 속의 독자적 개성과 자신만의 자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위화의 경우가, 최근 들어 성공적으로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중국문학의 경험이 말해주고 있다. 그렇게 국민문학과 세계문학이 만날 때만이 개별 국민문학은 국민문학대로, 세계문학은 세계문학대로 갱신되면서 상생하게 될 것이고, 문학 지구화가 세계문학을 획일화하면서 문학의 위기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을 살리는 기회로 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국민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도 갱신하고 세계문학도 갱신하는 한국문학의 고유한 개성, 작품세계와 서사를 망라한 한국문학의 고유한 자리에 대한 고민도 이런 방향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박민규가 앞서 좌담에서 지적한 대로 한국소설은 세계문학에서 하나의 고유한 장르가 되어야 한다. 개별 작가 차원에서도 그렇지만 집단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그렇다. 지금 한국문학은 고은이나 황석영 같은 개별 작가들이 개인의 독자적 문학세계를 통해 세계와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국민문학으로서 한국문학이 집단적 정체성과 개성을 세계에 보여주면서 세계와 만나는 길을 더불어 고민해야 한다. 식민시대와 분단체제,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 등 한국 특유의 역사와 현실에 보다 천착하면서 한국문학의 정체성과 개성을 창출하는 데 한국 문학인들의 집단적 지혜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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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기호·정이현·박민규·김애란·신형철 좌담 「한국문학은 더 진화해야 한다」, 『문학동네』 2007년 여름호, 102~103면.
  2. 『<世界文學>出中國專刊莫言余華格非非議‘出口’』, 『新京報』 2007年 6月 21日.
  3. 위화 「한국어판 서문」, 『형제』 1권, 휴머니스트 2007.
  4. 洪子誠 『讀有關<暗示>的批評』, 海南師範學院學報(社會科學版) 2004年 第1期 第17卷(總69期) 2면.
  5. 졸고 「중국문학으로 가는 길」, 『창작과비평』 2005년 겨울호, 338~43면.
  6. 졸고, 같은 글 335면.
  7. 필자의 위화에 대한 개인 인터뷰 기록(2007).
  8. 『一個人的聖經』, 香港:天地圖書 2000, 401면.
  9. Nick Robinson, “To Live under Communism,” 『살아간다는 것』(To Live)에 대한 인터넷서점 Amazon의 독자서평.
  10. Bryan Walsh, “Collective Tragedy,” Time, 2003.11.9.
  11. J. Bauer, “A Moving Story of a Family’s Struggles during Mao’s Era,” 『허삼관매혈기』(Chronicle of a Blood Merchant)에 대한 인터넷서점 Amazon의 리뷰.
  12. Kate Finefrock, “The Blissful Ignorance in aT ragic Life,” 같은 곳.
  13. 「爲什麽捧余華?」, 「中華文化社區網」(www.sinoct.com), 2003年 3月 18日.
  14. 리처드 킹(Richard King)의 『살아간다는 것』과 『허삼관매혈기』에 대한 리뷰, http://mclc.osu.edu/ rc/pubs/reviews/king.htm.
  15. 개인적인 판단으로 위화의 신작 『형제』는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퇴화이다. 중국에서는 일부 평론가들이 위화가 그전에는 서구를 의식하지 않으면서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구축했지만, 『형제』의 경우 해외 독자들을 의식하면서 서구에 보여주기 위한 차원에서 이전과 다른 식의 문혁 묘사를 했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위화의 세계로 가는 발걸음은 약이 아니라 독이 될지도 모를 기로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