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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국문학, 세계와 소통하는 길

 

세계문학 수용에 관한 몇가지 단상

 

 

이현우 李玄雨

문학평론가,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강사. 주요 논문으로 「푸슈킨과 레르몬토프의 비교시학」 「지젝과 함께 한국문학을 읽다」등이 있음. mramor@hanmail.net

 

 

1. 무엇이 세계문학인가

 

‘한국 독자들의 세계문학 수용 양상’을 점검해보는 것이 내게 주어진 과제이자 이 글의 목표이다. 하지만 그러한 과제를 액면 그대로 다루는 것은 나의 역량을 훌쩍 벗어난다. 그것은 세계문학 수용에 관한 일종의 문학사회학, 좀더 구체적으로는 한국문학의 (시)장에서 세계문학의 출판사회학/독서사회학에 관한 어떤‘보고서’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1 그러한 사회학적 분석을 위한 데이터를 갖고 있지 못하기에 현재의 나로선 주어진 과제에 대하여‘몇가지 단상’이라는 형식으로밖에 의견을 개진하지 못한다. 그것이 이 글의 한계이다. 그 과제와 한계 사이에서 몇걸음 옮겨보는 게 이 글의 궤적이 될 것이다.

첫걸음을 떼면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세계문학이란 무엇인가’란 물음이다.‘세계문학’이 생각보다 복잡한 개념이고 또 이념이기에 그렇다. 사전적 정의에 따를 때‘세계문학’은 적어도 세가지의 서로 구별되는 의미를 갖는다. 첫째, 세계 각국의 문학을 한국문학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즉 이때 세계문학은‘해외문학’‘외국문학’등의 동의어이며 가장 넓은 범주의 문학을 지칭하겠다. 한국문학 바깥의 모든 문학을 가리키는 것이니까. 둘째, 오랜 시간에 걸쳐 인류에게 읽히는 문학. 흔히 이에 대한 예시로 단떼나 셰익스피어를 드는데, 간단히 말하면 세계명작 혹은 고전(클래식)을 뜻하는 것이겠다. 대부분의‘세계문학전집’에서‘세계문학’이란 말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셋째, 개별 국가의 국민문학(민족문학) 속에서 보편적인 인간성을 추구한 문학. 곧 괴테가 정의한‘세계문학’이다.2 말하자면 국민문학이면서 동시에 세계적 보편성을 갖춘 문학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세계문학에 관한 가장 문제적인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들만으로는 불충분해 보이는 새로운 유형의‘세계문학’도 오늘날의 지구시대(지구화시대)에는 등장하고 있다. 가령 무라까미 하루끼나 빠울루 꾸엘류같이 현재‘세계시장’에서 통하는 문학, 세계적인 베스트쎌러 들을 가리키는‘세계문학’이 그것이다. 이것을 달리‘지구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렇게 우리는 최소한 네가지의‘세계문학’을 식별할 수 있다. 비록 개별 작가나 작품 들에는 이 정의들이 중복 적용될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따라서‘세계문학의 수용 양상’을 검토하고자 할 때 먼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어떤 세계문학’의 수용을 가리키는가이다.

수용 대상으로서의 세계문학이 어떻게 정의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맞물리는 것은 그 수용 주체로서의‘한국 독자’란 말이 지닌 지시성이다. 어떤 한국 독자인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시사점이 되어주는 것은 근대적 대중독자의 형성과 분화에 대한 천정환의 검토이다. 그는 식민지시대의 문학 독자층을‘전통적 독자층’‘근대적 대중독자층’‘엘리뜨적 독자층’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이 세가지 독자층은 주된 독서대상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전통적 독자층이 주로 19세기 방각본(坊刻本) 소설과 구활자본(舊活字本) 소설 들의 독자였다면,‘근대적 대중독자’는 대중소설, 번안소설, 신문연재 통속소설, 일본 대중소설, 야담, 몇몇 역사소설의 독자였고‘엘리뜨 독자층’은 신문학 순문예작품, 외국 순수문학 소설, 일본 순문예작품의 향유자였다. 그리고 “‘근대적 대중독자’와‘엘리뜨적 독자층’은 명백히 근대적인 제(諸)제도의 힘에 의해 형성되었다.”3

여기서‘전통 독자층’은 구활자본 고전소설의 출판이 1927년을 기점으로 하락세에 들어서는 것과 맞물려 점차 쇠퇴할 운명에 놓이지만,‘근대적 대중독자층’과‘엘리뜨 독자층’의 분화는‘일반 독자층’과‘엘리뜨 독자층’의 분화로 변형되어 현재까지도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물론 이것은 근대문학의 독자층으로 볼 수 있는 범주에 속하고, 앞으로는 근대문학의 종언, 탈근대문학의 도래와 함께 점차 확대될 것으로 보이는‘탈근대 대중독자’도 새로운 독자층으로 고려해야 할 것이다. 젊은 여성들의 일과 사랑을 솔직하면서도 가볍게 다룬 칙릿chic-lit과 말 그대로‘가벼운 소설’라이트 노블light novel의 독자가 가장 대표적인‘탈근대 대중독자’가 아닐까). 식민지시대‘엘리뜨 독자층’이 “전문학교 이상의 과정을 이수했거나 그에 준하는 학력과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진 층”으로서‘고급’취향의 문사 지망생과 이른바 전문독자들을 포함했다면, 오늘날의‘엘리뜨 독자층’은 적어도 대학(원) 이상의 학력을 가진 고급 취향의 독자층으로서 작가들과 문학전문 기자, 전문 비평가, 연구자 그룹을 포함하는 것이겠다.4‘엘리뜨 독자층’이 주로 특정한 문학관이나 문학적 입장에 따라 내적으로 분화된다면,‘근대적 대중독자’에 상응하는 오늘날의‘일반 독자층’은 주로 나이와 성별, 직업군에 따라 독서 취향이 갈라지지 않을까 한다. 요컨대 일반화해서 말할 수 있는‘한국 독자’는 통계적인 평균 이상의 의미를 갖기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5 때문에 우리가 개념상 복수형의‘세계문학’과 대면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세계문학 수용 주체로서 고려할 수 있는‘한국 독자’또한 공시적·통시적으로 분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무엇이 세계문학이고 누가 한국 독자인가?

 

 

2. 한국에서의 세계문학

 

세계문학 수용을‘외국문학’내지‘세계명작’의 수용이라는 차원에 한정하여 접근하면 사정은 조금 명료해진다. 개인적인 관심사와도 겹치는 것이지만, 우리 근대문학 형성기에‘외국문학’의 대표격은 러시아문학이었다. “1900~10년대에 태어난 남녀는 공통적으로 한국 고전소설과 도스또옙스끼·뚜르게네프를 비롯한 러시아 문학가들의 소설을 읽으며 자라났다.”6 이것이 말하자면‘기원적인’풍경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똘스또이의 수용인데, 근대문학 초기에 아주 일찍부터 소개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똘스또이는 한국에 최초로 소개된 러시아 작가이다) 여러 통계에 따르건대 지난 100년 동안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많이 읽힌 외국 작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7 예컨대, 지난 1930년대 경성지역 여자 고보생 독서취향조사에서 가장 많이 읽힌 작가는 뚜르게네프(I. S. Turgenev), 똘스또이, 이광수(李光洙)였다.8 그리고 2002년과 2004년 문화관광부의 국민 독서실태조사에서도 똘스또이는 선호하는 외국작가 3위를 차지했다. 조사에서 1, 2위를 번갈아 차지한 씨드니 셸던이나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시류를 반영하는 것과는 달리, 똘스또이에 대한 한국인의 선호는 지속적이었으며 따라서 확고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독자의 똘스또이 수용은 세계명작 수용에서 범례적이라 할 만한데, 문제는 이 범례가 징후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알려진 대로 똘스또이가 한국에 최초로 번역·소개된 것은 최남선(崔南善)이 주재한 잡지 『소년』을 통해서였다.9“현시대의 최대 위인”이자 “그리스도 이후의 최대 인격”으로 똘스또이를 숭앙해 마지않던 최남선은 특이하게도 『전쟁과 평화』나 『안나 까레니나』 대신 『부활』을‘가장 귀중한’저작으로 꼽았고, 그가 처음 소개한 작품들도 「사랑의 승전」 등 민화의 범주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이는 1886년에 나온 최초의 똘스또이 일본어 번역이 『전쟁과 평화』의 몇몇 장이었던 것과도 대비된다.10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연관된 것이기도 하지만 일본에서는 주된 관심의 대상이 『전쟁과 평화』였던 것에 비하면,11 『부활』에 대한 한국인의 편향된 관심은 분명 이채로운 것이면서‘한국적인’것이다. 이러한 편독(偏讀)은 21세기 한국 독자들도 예외가 아닌데, 대부분이 번역·소개돼 있는 똘스또이 작품들 가운데 여전히 가장 많이 읽히는 작품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같은 민화들을 담은‘똘스또이 단편선’류이며,12 장편소설 가운데는 『부활』이 뒤를 잇고 있다(『전쟁과 평화』는 초판본까지 소개되었지만 독자들의 반응은 아주 미약한 편이다). 똘스또이의‘문학’보다는‘사상’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에, 최남선은 세계문학의 걸작이자 근대소설의 최대치로 평가되는 『전쟁과 평화』와 『안나 까레니나』에는 상대적으로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13 대신에 그가 관심을 쏟은 작품이 『부활』이었고, 이는 번역 단행본 『해당화』(1918)의 출간으로 이어진다. 『부활』은 이미 1916년에 연극공연으로도 인기를 얻은 바 있어서,‘가주사애화(賈株謝哀話)’라는 부제를 달고 있던 『해당화』는 곧 대대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다.14 이미 부제에서 짐작해볼 수 있지만, 이때 소개된 『해당화』는‘내류덕’(네흘류도프)과‘가쥬샤’(까쭈샤) 사이의 연애담을 주축으로 한 통속화된 『부활』이었다. 그것은 유행가 가사대로“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가신/첫사랑 도련님과 정든 밤을 못 잊어/얼어붙은 마음속에 모닥불을 피워놓고/오실 날을 기다리는 가엾어라 카츄샤”15 이야기였던 것이다.

백낙청(白樂晴)의 지적대로 “『부활』을 똘스또이의 최고 걸작으로 꼽은 권위있는 비평가는 외국의 경우-왕년의 일본이 어땠는지는 몰라도-하나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며, 장기 베스트쎌러의 1, 2위를 오르내리는 나라 역시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16 그럼에도 물론 『부활』이 도스또옙스끼의 『죄와 벌』과 함께 한국에서 장기간에 걸쳐 가장 많이 읽힌 외국 고전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으며,17“똘스또이의 경우는 『부활』에 심취한다는 것은 곧 그의 영향을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면이 없지 않”다고 하더라도18‘서양 명작소설의 주체적 이해를 위해’서는 그러한 현실 자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타자로서의 외국문학을 수용하는 데 따르는, 우연적이면서도 필연적인 굴절과 변형일 것이다. 똘스또이로 대표되는 러시아문학 수용사도 우리가 처했던 사회·역사적 상황에 따라서 여러 굴곡을 겪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19

외국문학 수용은 러시아문학이 초기에 큰 비중을 차지하다가 점차 영문학과 프랑스문학 중심으로 변화하게 된다.20 이것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의 반공정책 때문에 소련(러시아)과 중국 같은 공산권의 현대문학 수용이 엄격한 제약을 받게 되는 것과 대조된다. 그렇더라도 1960~70년대에 접어들면 러시아문학 번역서의 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이것은 세계문학전집류의 출간이 활성화되면서 빚어진 현상으로 러시아문학 수용만의 독특한 현상은 아니었다.21 문학전집류의 출간이 활발해진 것은 남한사회가 사회·경제적으로 차츰 안정되면서 대중의 문화적 욕구가 분출한 탓이었고, 이에 발맞추어 출판사들은 단행본보다는 호화 양장본 전집류들을 쏟아냈다.22 국내에서 세계문학전집은 1955년 고금출판사에서 네권짜리 전집을 처음 출간하기 시작하여 정음사·을유문화사·신구문화사·삼중당·범우사·학원사·일신서적·동화출판공사·삼성출판사 등 여러 출판사들이 앞다투어 기획·출간함으로써 한국 문학시장의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각종 세계사상전집류와 함께 세계문학전집 혹은‘소년소녀 세계명작’씨리즈 등이 필수적인 장식물로 각 가정의 서가를 장악하게 되는 것이 이 시기이다. 정음사 『세계문학전집』(전100권) 등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전집류의 출간이‘세계명작’목록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를 사회적으로 재생산하게 된다는 사실인데, 언어권별로는 주로 영문학·불문학·독문학 작품들을 중심으로 짜인 편향된 목록이었고, 러시아문학 같은 경우에는 이념적인 이유에서 주로 뿌슈낀, 고골, 뚜르게네프, 똘스또이, 도스또옙스끼, 체호프 등 19세기 작가들에 편중되었다(20세기 작가로는 노벨상 수상작가들인 빠스쩨르나끄, 숄로호프, 쏠제니찐 정도가 간간이 이름을 올린 정도였다).

이러한 편향에 대한 반성으로‘제3세계’문학에 대한 관심이 촉구된 것이 1970년대 말부터이다.23 주로 중남미와 아프리카, 아랍, 동남아시아 등지의 문학을 지칭하는 제3세계문학 작품들 가운데 가장 각광받은 것은 1982년 가르시아 마르께스(G. García Márquez)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 관심의 대상이 된 중남미문학이었고(가르시아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안정효에 의해서 1975년에 이미 번역되었다), 차츰 아프리카와 동남아 문학 쪽으로 관심이 확대된다. 제3세계문학과 함께 제1세계문학 중심의‘세계명작’에 대한 교정의 의의를 갖는 제2세계문학, 곧 과거 사회주의권 문학이 제대로 된 규모로 본격 소개되는 것은 상당히 늦은 1980년대 말에 와서이다. 『중국현대문학전집』(전20권, 1989)과 『소련동구문학전집』(전30권, 1990)이 차례로 중앙일보사에서 출간되며, 이로써 한국의‘세계문학전집’은 어느정도 균형을 맞추게 된다. 이후에 한동안 소강상태에 놓여 있던 전집류 시장이 다시 활성화되는 것은 1998년 민음사에서 세계문학전집을 새롭게 기획·출간하면서부터이다. 현재 출간되고 있는 10여종의 세계문학선/세계문학전집류 가운데 상업적으로는 가장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 이 전집에서 편집위원들이 내민 간행사는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세대마다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말이 있다. (…) 이것은 문학사나 예술사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 엊그제의 괴테 번역이나 도스또옙스끼 번역은 오늘의 감수성을 전율시키지도 감동시키지도 못한다. 오늘에는 오늘의 젊은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오늘의 번역이 필요하다. (…) 우리말로 옮겨놓은 모든 번역문학은 사실상 우리 문학이다. 우리는 여기에 우리 문학을 자임하며 오늘의 독자들을 향하여 엄선하여 번역한 문학고전을 선보인다. 어엿한 우리 문학으로 읽히리라 자부하면서 새로운 감동과 전율을 고대하는 젊은 독자들에게 떳떳이 이 책들을 추천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두가지인데, 먼저 이 글이‘새 문학전집을 펴내면서’로 되어 있다는 점, 즉‘세계문학전집’이 아니라‘문학전집’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이 단순히‘세계문학전집’의 약칭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우리말로 옮겨놓은 모든 번역문학은 사실상 우리 문학이다”라는 주장과 호응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에 걸맞은‘새로운 번역’의 필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이 간행사의 필자들은‘번역문학〓우리 문학’이라는 점을 표나게 내세운다. 그것은 한편으로 번역의 질이 그만큼 양호하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문학(한국문학)과 세계문학(외국문학) 사이에 차이/경계를 두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로도 읽힌다(그래서 이 전집에는 현역 한국 작가의 작품들도 포함돼 있다). 그것은 조금 다른 문맥에서 우리 시대 세계문학(외국문학) 수용의 핵심적인 과제들을 건드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제란 첫째로 번역의 문제, 둘째로 보편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에서 펴낸 두권의 저서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창비 2005, 2007)가 전범적으로 자세하게 보여주는 것처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영미문학 작품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표절이며 표절이 아니더라도 30% 이상이 신뢰할 수 없는 번역본이다. 신뢰할 수 있는 추천본은 10% 안팎에 불과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추천본이 아예 없는 작품들도 있다. 영미명작의 번역 현황이 특별히 예외적이라고 볼 수 없겠기에 일반화해서 말하자면, 오역과 표절 번역을 줄임으로써‘번역문학〓우리 문학’으로 간주해도 좋을 만큼 양질의 번역본을 확보하는 것, 그것이‘세계명작으로서의 세계문학’을 수용하는 데 우선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야 비로소 우리는 이념적인 차원에서 세계문학적 보편성, 혹은‘진정한 세계문학’에 관심을 갖고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

 

 

3. 세계문학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저명한 문학이론가 프랑꼬 모레띠(Franco Moretti)의 「세계문학에 관한 몇가지 추측」24은 “왜 비교문학이 아니라 세계문학인가” “세계문학이 무엇이고 그것에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같은 물음들에 유익한 시사점을 제공해준다. 그에 따르면, 19세기에 괴테와 맑스가 각각 지역적·민족적 문학과는 대비되는‘세계문학’(Weltliteratur)의 이념을 제안했지만 아직까지도 이에 대한 접근과 조망은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고작해야 서구유럽에 국한되어 라인강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시야의 연구를‘비교문학’이라고 지칭해오고 있는데, 이것은 괴테나 맑스가 염두에 두었던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자주 인용되는 것이지만 애초에 괴테는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그는 1827년 1월 에커만(J. P. Eckermann)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에는 국민문학이란 것이 큰 의미가 없어. 이제 세계문학의 시대가 시작되고 있지. 그러므로 우리 각자는 이런 시대의 도래 촉진을 위해 노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되네.”25 여기서 초점은 괴테에게서 세계문학이란 이제 시작되는 것, 앞으로 도래할 것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즉 그것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진행형 내지는 미래완료형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바로 이러한 세계문학을 모레띠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문제, 새로운 비평방법을 요구하는 문제”로 읽는데,26 백낙청의 정당한 지적에 따르면 이‘문제’는‘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괴테가‘세계문학’이란 용어로 뜻한 바가 세계의 위대한 문학고전들을 한데 모아놓는 것이 아니고, 여러 나라(당시로서는 당연히 주로 유럽에 국한되었지만)의 지성인들이 개인적인 접촉뿐 아니라 서로의 작품을 읽고 중요한 정기간행물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는 가운데 유대의 그물망을 만드는 일이었다는 점이다. 즉 이 용어는 우리 시대의 어법으로는 차라리 세계문학을 위한 초국적인 운동이라고 부름직한 것에 더 가까웠던 것이다.27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세계명작’들을‘세계문학전집’이라고 한데 모아놓는 것은 괴테가 말한 세계문학과 무관하다. 오히려 이 괴테적 세계문학에 대한 반향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모레띠와 백낙청이 모두 지적한 대로 맑스·엥겔스의 『공산당선언』(1848)에서이다. “일국적 편향성과 편협성은 점점 더 불가능해지며, 수많은 국민문학·지역문학들로부터 하나의 세계문학이 형성된다.”28 즉 이‘괴테·맑스적 기획’(백낙청)으로서의 세계문학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형성되어야 할 어떤 것이고, 우리가 애써서 그 도래를 촉진하고 앞당겨야 할 무엇이다.29 이러한 유형의 세계문학운동의 사례로 백낙청은‘사회주의 리얼리즘’을 든다. 비록‘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역사적으로 실패한 운동이지만, 오늘날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양산해내는‘시장 리얼리즘’(market realism)이 그보다 나은 선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백낙청은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민족문학운동과 세계체제 극복을 위한 세계문학운동을 병행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세계체제의 작동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갖고 그 전지구적 착취와 파괴에 맞서 싸우는 초민족적인 연대를 형성해내는 일은 바로‘민족적’인 과제의 일부”30라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초민족적’인 연대의 형성이 곧‘민족적’인 과제라는 관점이다. 분단체체 극복이 세계체제 자체의 재편을 뜻할 수 있다는 주장은 그런 관점에 근거한다.31 이 경우 진정한 민족문학이야말로 진정한 세계문학에 값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세계문학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도 가능하다. 우리는 그것을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 세계종교론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32 그는‘세계종교’라는 말을 단순히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와는 구별되는)‘세계’라는 관념을 제시한 종교라는 의미로 쓴다.33‘공동체의 종교’란 “인간이 집단이나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해 강제되는 다양한 구조/씨스템”을 말한다. 이 공동체종교의 대전제는 안(내부)과 바깥(외부)의 구분이다. 반면에 이러한 공동체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출현한 세계종교는 더이상의 외부가 없는 세계, 즉‘외부가 없는 세계’로서의‘무한한 세계’를 제시하는 종교이다. 가령 유대교에서 야훼의 신이 유대공동체의 신이라면 공동체를 철저하게 부정하는 모세의 신은 세계종교의 신이다.34 이 모세의 신은 사람들에게‘공동체에서 나가라’고, 이른바‘사막에 머물라’고 고한다. 이때의‘사막’은 꼭 물리적인 사막을 뜻하지는 않으며‘공동체와 공동체 사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공동체와 공동체‘사이’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상업적 공간이고 교통공간이다.

세계종교는‘사막의 종교’란 의미에서 세계문학 또한‘사막의 문학’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모든 공동체를 거부하는 공동체‘바깥의 문학’이며, 공동체와 공동체‘사이의 문학’이다. 그 사이의‘교통공간’을 달리‘번역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번역을 통해서 국민문학의 경계, 내부와 외부 사이의 장벽이 제거된다면 그것이 곧‘세계종교’에 상응하는‘세계문학’아닐까? 거꾸로 공동체의 존속과 안녕을 위한 문학은 어떠한 경우에도 세계문학이란 이름에 값할 수 없다. 그런 관점에 따르면, 국민문학은 세계문학이 아니며 세계문학은 국민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윤리가 보편윤리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민족/국민문학과 세계문학의 관계에 관한 이러한 입장 차이는‘민족’으로도‘국민’으로도 번역되는‘네이션’(nation)의 이해를 둘러싼 견해차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네이션의 이러한 이중성은 사실 민족이란 말 자체에도 적용되는 게 아닐까. 카라따니의 세계종교론을 민족이란 우상에 적용해보자면, 한쪽에는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섬기는 야훼의 민족문학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는 특정한 공동체를 부정하고 세계공동체를 지향하는 모세의 민족문학이 있을 법하다. 물론 여기서 우리가 촉진하고 앞당겨야 할 세계문학이 야훼의 신이 아닌 모세의 신을 섬기는 민족문학이어야 함은 자명하다. 그런 의미에서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통공간으로서의 더 많은 사막, 더 많은 번역공간이다. 그러한 공간을 넓혀나가는 것이 바로‘세계문학을 위한 초국적인 운동’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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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러한 요구에 부합할 만한 글로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것은‘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을 다룬 천정환(千政煥)의 『근대의 책읽기』(푸른역사 2003) 같은 책이다. 식민지 근대를 주로 다룬 이 책의‘후속편’이 해방 이후 현재까지의‘현대의 책읽기’를 마저 다루게 된다면 거기서 이 주제는 그에 걸맞은 규모로 검토될 수 있을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요구하는‘사업’이 될 것이다.
  2. 괴테의 세계문학론에 대해서는 이미 국내에서도 자세하게 논의된 바 있다. 임홍배 「괴테의 세계문학론과 서구적 근대의 모험」,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등 참조.
  3. 천정환, 앞의 책 272~79면.
  4. 천정환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서는 이러한‘엘리뜨 독자층’또한 점차 쇠퇴하고 있다. 천정환 「2000년대의 한국소설 독자 II」, 『세계의 문학』 2007년 봄호 참조. 비록‘한국소설’독자로서의‘엘리뜨 독자’를 대상으로 한 진단이지만,‘문학’일반에 대한 독서경향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 최근 2006년의 국민 독서실태조사를 근거로 한 표준적인 독자 분석은 백원근 「통계로 본 소설 독자」, 『세계의 문학』 2007년 봄호 참조. 2000년대 베스트쎌러 일반에 대한 분석은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엮음 『21세기 한국인은 무슨 책을 읽었나』,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7 참조. 문학 베스트쎌러의 경우‘한국문학’과‘외국문학’으로 분류되어 있다.
  6. 천정환, 앞의 책 344면. 그에 따르면 “러시아문학이 한국문학에 끼친 영향과 그 사회·문화적 맥락에 대한 논의는 상당히 중요하다. 러시아문학은 한국의 문학가들뿐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가장 널리 수용된 외국문학이며, 영향의 지속기간도 외국문학이 이입되기 시작한 시기부터 식민지시대 전체와 20세기 후반에까지 걸친다.” 같은 책 377면.
  7. 심지어 국내 한 기업에서 후원하는 러시아의 문학상에조차‘똘스또이문학상’이란 이름이 붙어 있다.
  8. 같은 책 348면.
  9. 제2권 6호(1909.7)에 처음으로 번역·소개되었다(한국 출판물에‘똘스또이〔도루스토이〕’란 이름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06년이다). 『소년』과 최남선의 똘스또이 수용에 관해서는, 권보드래 「『소년』과 톨스토이 번역」, 『한국근대문학연구』 제6권 제2호, 2005 참조.
  10. 김려춘 「레프 톨스토이와 현대 일본소설의 문제」, 『톨스토이와 동양』, 이강은 외 옮김, 인디북 2004, 206면.
  11. 전후 일본에서 처음 간행된 작품이 『전쟁과 평화』였다고 하며, 아예 1946년 12월에 23권으로 된 똘스또이 전집이 새로 출간되기 시작한다. “유럽 고전작가들 가운데 일본 출판업자들과 독자들의 관심을 그처럼 많이 받은 것은 똘스또이가 유일했다.” 김려춘, 앞의 글 208면. 한편 국내에서 똘스또이 전집이 처음 간행된 때는 1970년대 초이다.
  12. 『톨스토이 단편선』(인디북 2003)은 한 TV프로그램의 홍보에 힘입어 밀리언쎌러가 되었다.
  13. 올해 초 발표된 설문결과에서 영어권 현역작가 125명이 꼽은‘최고의 문학작품’1위에 똘스또이의 『안나 까레니나』가 선정된 바 있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에 이어서 3위 역시 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였다. 따라서 똘스또이에 대한 선호 자체가‘한국적인’것은 아니다.
  14. 권보드래, 앞의 글 89~90면. 이런 점에 주목해볼 때 “똘스또이의 대중적 수용은 동시대의 『무정』 『장한몽』 또는 『옥루몽』의 서사가 대중의 광범위한 인기를 모은 것과 비교되어야 한다”는 천정환의 지적(앞의 책 379면)은 음미해볼 만하다.‘한국적 똘스또이’란 무엇보다도‘신파적 똘스또이’였던 것이다.
  15. 이 노래는 『부활』을 번안한 김지미(까쭈샤), 최무룡(네흘류도프) 주연의 영화 『카츄샤』(1960)의 주제가였다. 이 영화는 1971년에 문희, 신성일 주연으로 리메이크되는데, 이 정도면 똘스또이의 『부활』은 한국(화한) 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16. 백낙청 「서양 명작소설의 주체적 이해를 위해: 똘스또이의 『부활』을 중심으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II』, 창작과비평사 1985, 179~80면.
  17. 『죄와 벌』과 『부활』의 공통적인 의미소로‘창녀’인 여주인공, 시베리아(고난), 갱생(부활)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8. 백낙청, 앞의 글 179면.
  19. 러시아문학 수용에 관한 개관은 엄순천 「한국에서의 러시아문학 번역현황 조사 및 분석」, 『노어노문학』 제17권 제3호, 2005 참조.
  20. 일본문학 또한 일찍부터 소개되고 한국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그것이‘세계문학’혹은‘외국문학’으로서 수용됐는지는 생각해볼 문제이다. 1950~60년대만 하더라도 일본어로 읽고 쓰기가 자유로웠던 작가, 지식인 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21. 외국문학의 번역·이입사에 대해서는, 김병철 『한국근대 번역문학사 연구』, 을유문화사 1975; 『한국현대 번역문학사 연구』 상·하, 을유문화사 1998 참조.
  22. 김병철 『한국현대 번역문학사 연구』, 192면; 엄순천, 앞의 글 245면.
  23. 제3세계문학에 대한 선구적인 논의로는 백낙청의 「제3세계와 민중문학」(『인간해방의 논리를 찾아서』, 시인사 1979)을 들 수 있다. 이어서 단행본으로 백낙청·구중서 등의 『제3세계문학론』(한벗 1982)이 출간되었고, 조동일의 『제3세계문학연구 입문』(지식산업사 1991)이 씌어지는 건 그 10년 후이다.
  24. Franco Moretti, “Conjectures on World Literature,” New Left Review 1 (2000); 프랑꼬 모레띠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세계의 문학』 1999년 가을호.
  25.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 곽복록 옮김, 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2007, 233면.
  26. 프랑꼬 모레띠, 앞의 글 258면. 그러한 새로운 비평방법으로 그가 제시하는 것이‘꼼꼼한 읽기’(close reading)에 대비되는‘멀리서 읽기’(distant reading)이다. 이러한 방법론이 함축하는 추상성에 대한 비판으로는 조너선 애럭 「지구시대의 비교문학과 영어의 지배」, 『창작과비평』 2003년 봄호; 유희석 「세계문학에 관한 단상」, 『근대 극복의 이정표들』, 창비 2007 참조.
  27. 백낙청 「지구화시대의 민족과 문학」, 『통일시대 한국문학의 보람』, 창비 2006, 77~78면, 강조는 원문. 1992년의 한 좌담에서도 백낙청은 이렇게 지적한다. “‘세계문학’하면 흔히 세계의 위대한 고전들을 모아서 세계문학전집 같은 것을 만들어놓고 열심히 읽는 것을 생각하는데, 오히려 괴테 자신은 그보다도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지식인과 문인들 간의 국제적인 유대를 형성해나가는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고 그러한 세계문학 개념의 중요성이 오늘날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백낙청 회화록 3』, 창비 2007, 182면.
  28. 백낙청 「지구화시대의 민족과 문학」, 77면에서 재인용.
  29. 이런 관점에 충실하자면‘세계문학’의 초점은‘세계 각국의 문학’이 아니며 따라서‘세계문학사’가 아니다. 세계문학에 대한 모레띠의 문학사가적 접근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0. 같은 글 84면.
  31. “진정한 분단체제 극복-즉 민중역량이 의미있게 투입된 통일이어서 민족국가의 고정관념이 아니라 지구화시대 다수민중의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는 국가구조의 창안을 이끌어내는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세계체제 자체의 결정적인 재편을 뜻하고 어쩌면 더 나은 체제로 이행하는 결정적 발걸음이 될지도 모른다.” 같은 글 84~85면.
  32. 카라따니 코오진 「세계종교에 대하여」, 『언어와 비극』,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4.
  33. 카라따니에게서 공동체의 종교와 세계종교 간의 차이는 공동체적 규범으로서의 도덕과 윤리 간의 차이에 상응한다. 그의 도덕/윤리에 대해서는 카라따니 코오진 『윤리21』, 송태욱 옮김, 사회평론 2001 참조.
  34. 카라따니 코오진, 앞의 책 251~55면. 카라따니는 프로이트의 「모세와 일신교」에서‘세계종교의 기원’을 읽어내고자 하는데, 그에 따르면 유대교에는 야훼의 신(야훼라는 신)과 모세의 신이 혼합되어 있으며 이 둘은 각각‘공동체의 종교’와‘세계종교’의 계기로서 분리/식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