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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남철 朴南喆
1953년 경북 포항 출생. 1979년『문학과지성』에「연날리기」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지상의 인간』『반시대적 고찰』『자본에 살어리랏다』『바다 속의 흰머리뫼』등이 있음. hamir53@naver.com
정리 I
-어머님 영결제를 돌보아주신
선배시인 이시영 선생님께,
그리고 고세현 채호기 대표님들께
1. 내일이 더는 없을 듯한 이 한계령(限界嶺)에서 나는 이제 이 정리를 비롯하노니;
2. 이는, 내가 이미 저것을 읽기도 전에, 그것도 거의 10년 전부터 비롯된, 저것의 핵심을 스스로 깨우쳤다고도 할 수 있을 만한 깨달음의 증거물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3. 1996년, 「〔물아일체론비판〕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란 작품의 각성 끝에, 1999년에 나온, 다음의 작품이 바로 「고래의 항진」이라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4. 나는 1996년 8월 8일에 썼다고 작품의 하단에다 표시해두고 있는 「〔물아일체론비판〕 킬리만자로의 표범」1이라는 작품을 충분히 잘 묵혀두었다가 『창작과비평』 ’98년 여름호(통권 100호 기념호)에다 발표하고 있다.
5. 그러니까, 나는 호들갑스럽게 서두르지 않고, 1997년 9월에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온 내 개인 시집 『자본에 살어리랏다』에도 이 작품은 수록하지 않았던 셈인 것이다.
6. 그리하여, 나는 『창작과비평』 통권 100호에다 「〔물아일체론비판〕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발표한 이후에, 다시 ‘나는 너다!’라는 명제가, 뜻밖에도, 서산대사의 ‘유언게’와도 자못 유사한 바가 있으며, 선불교에서는 이미 흔해빠진, ‘커다란 흠을 가진 명제’들 중의 하나였다는 사실까지도 잘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어머님, ‘鄭’자, ‘先’자, ‘禮’자님…… ㅜㅜ……
정리 II
1. 그리하여, 결론은 바로 또한 이러한 것이다.
너나, 너 이전의 선불교의 세계에서는 브라마니즘적인 ‘범아일여’ 내지는 ‘물아일체’적인 각성의 한 표현일 뿐인 ‘나는 너다!’라는 명제 자체가 주체인 ‘나’만이 강렬하게 노정되고 마는 비논리적인 명제라는 사실을 나는 바로 ‘언어논리’ 그 자체로써 반증해내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네가 그후 바로 ‘문학의 귀족주의’를 노골적으로 강하게 주장하게 되고, 나는 보다 더 ‘천민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피씨통신과 인터넷의 거치른 일상선의 세계’ 속으로까지 거침없이 뛰어들게 된 일과도 매우 관계가 깊은 일이라고 아니 말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2. 붓다는 저것에서 이렇게 말해놓았다고 전해진다. “나는 나를 붓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너희들은 내가 붓다라는 나의 이 말에 (‘붓다’라는 말 그 자체의 의미에!) 결코 속아넘어가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내가 붓다라는 것은 다만 그 이름만이 붓다인 것이기 때문이다!”라고.1 그러니까, 그렇다면, 2500여년 전의 붓다는 아주 훌륭한, 제대로 된, 뛰어나게 정직한 붓다였던 셈인 것이다!
3. 그런데, 그 이후에는 또 어찌된 일이었던지, 중국의 선종과 한국의 통불교와 그대 이전에 있어서까지는-바로 ‘나는 너다!’라는 이 무지막지한 말까지도 거침없이, 거침없이, 마구 내뱉어대고 말았던, 거디엇던 것이다! *^)))! (오, 1994년도발, ‘제8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해버렸다’는 그대의 그 안쓰러운 「뼈아픈 후회」여!)
4. 그러니까, 나의 요지는 바로 말 그 자체의 말보다도 훨씬 더 명백한 그것인 것이다. 바로 말 그 자체의 말보다도 더 명확하게 붓다의 사상을 더 잘 정리해낼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너다,가 아니다. 나는 너다,라는 것은 틀렸다. 오로지 나는 나다,일 뿐인 것이다”라고!
그러니까, 나의 이 주장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나는 너다,라고 말해버리면 이미 나는 너다,가 아니라는 것인 것이다!”
즉, 이는 바로 (화자가) 발화하는 그 즉시로, ‘형식논리’로 미끄러져, 빠져버리게 되는 것이며, 진정한 ‘나는 너다!’는 분리되어 ‘나’와 ‘너’가 떨어져나가버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체적인 ‘진정한 논리’란 것은 (바로, 화자가) “나는 나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며, 또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결국은 ‘무의미한 동어반복’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은 것’으로까지도, ‘침묵’으로까지도 통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며, ‘진정한 언어로부터의 해방’까지도 획득해낼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로써 비로소 우리는 반문할 수가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바로 붓다가 말하는 진정한 무아〔“諸法無我”〕의 경지가 아니면 과연 그 무엇이 될 수가 있을 것인가,라고!2007/08/07
5. 소심했던 자, 나:
2500여년에 걸친 한 ‘위대한 인류적 각성’을 다시 조금 더 풀어서 논증해본 이 덧글을 다는 한 ‘소심한 자’의 가슴은 그 어렸을 때처럼, 다시 ‘죽음의 공포’를 느끼려다가 이젠 그만둔다. 붓다도 말했듯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고! 죽음 따위는 기껏해야 두려움의 대상 따위도 못되는 것이라고! 공자도 말했듯이, 아침에 도를 얻으면 이제 저녁에 죽어도 좋은 것이 아니겠느냐고!
그것이 바로 ‘언어의 논리’까지도 벗어나버린 자, 즉, ‘진정으로 포월(匍越)2해버린 자’가 아닐 것이냐고! 이상이다! 〔시인, 박남철〕 2007/08/08
6. 추신:
그리하여, 나는 이제, 완벽하게 자각하노라! 내가 이제 내일이 더는 없을 듯한, 이 지독하고도 지독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체제의 한계령에 선, 완벽한 알거지 중의 상알거지, 즉 ‘시인’이라는 자가 되어버리고 말아버렸다는 사실까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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