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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김성동

김성동 金聖東

1947년 충남 보령 출생. 1975년 『주간종교』 소설 공모에 당선되었으며, 1978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 시작. 장편소설 『꿈』 『만다라』 『집』 『길』 『국수(國手)』, 소설집 『붉은 단추』, 산문집 『생명기행』 등이 있음.

 

 

 

무섭고 슬픈 이야기

 

 

1

 

풀벌레가 우는 소리인가. 아니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몸뚱이 부벼대고 나뭇잎들은 또 볼 부벼대는 소리. 그것도 아니라면 땅 밑을 흘러가는 땅속물 소리.

힘껏 눈을 감았다 뜨며 긴 숨을 내리쉬었다. 그리고 윗몸을 전후좌우로 몇번 흔들고 목을 서너번 돌린 다음 결가부좌 친 두 무릎을 콩콩 두드렸다. 다시 또 들려오는 야릇한 소리였고, 마구니로구나. 두 다리를 쭉 뻗었다. 공부가 익어가는 수좌일수록 마구니 파순이는 더욱더 기를 쓰고 달려든다더니, 그렇다면 내 공부가 익어가고 있다는 말. 쓰게 웃던 이 중생은 다시 좌복 위에 앉았다.

오른발만 왼쪽 넓적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오른손을 배꼽 밑에 놓고 왼손은 오른손바닥 위에 놓은 다음 두 엄지손가락을 가볍게 맞대었다. 등뼈를 반듯하게 세웠다.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턱을 목 쪽으로 당기었다. 여간하게 뜬 눈으로 코 끝을 바라보았다. 아래위 어금니를 지그시 닿게 하고 혀를 입천장에 가볍게 대었다. 코로 배꼽 밑 세치쯤 되는 곳에 있는 탯자리를 바라보며 콧속 깊숙이 숨을 들이쉬었다. 천천히 팔부쯤만 들이쉬어 배꼽뭉치까지 끌어내렸다. 삼사초쯤 머물렀다가 가늘고 길게 팔부쯤만 내쉬었다.

다시 숨을 들이쉬었다. 고르고 깊으면서도 부드럽게 천천히 팔부쯤만 들이쉬자 아랫불밭이 볼록해졌고, 한 십초쯤 멈추었던 숨을 천천히 가늘고 길게 내쉬자 아랫불밭이 홀쭉해졌다. 달걀만하게 볼록 솟아올랐다가 다시 그만한 크기만큼 홀쭉하게 들어가는 아랫불밭 달걀 위에 얹히는 것은, 그리고 화두였다.

“어머니 뱃속을 빠져나오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던가?”

삼백예순 뼈마디와 팔만사천 털구멍마다 풀리지 않는 의심덩어리인 “이뭣고?”를 도래송곳으로 통나무를 뚫듯 쑤셔박아 들어가는데, 아. 끊어진다. 고양이가 쥐 잡듯이 닭이 알 품듯이 늙은 쥐가 쌀 든 궤짝 쪼듯이 어린아이 젖 찾듯이 목마른 사람 물 찾듯이 배고픈 사람 밥 찾듯이 일심전력을 기울여 화두를 들어봐도 삼백예순 뼈마디마디마다 흩어지고 팔만사천 털구멍구멍마다 토막토막 떨어져나가버리는 화두였으니, 아아. 끊임없이 들려오는 는실난실한 소리인 것이었다.

벌떡 몸을 일으켰다. 궁예미륵님께 합장반배한 다음 방을 나갔다. 털신에 발을 꿰었다. 그리고 물매 심한 자드락길 따라 발몸발몸 내려가다가 왕소나무 가지 휘늘어진 곳에서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둔중한 철판으로 땅바닥을 짓이기는 것 같은 그 야릇한 소리는 좀더 또렷하게 들려왔고, 우편물 받는 옷통 뚜껑을 열어보았다. 아침나절이므로 체부가 왔을 리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버릇처럼 옷통 뚜껑을 열어보던 이 중생은 “사바하” 하고 탄식처럼 내뱉으며 철대문을 나섰다. 그리고 몇발짝 걸어내려가다가, 아흐. 눈을 감았다.

굴착기였다. 땅을 찢어발기는 것 같던 그 는실난실한 소리는 길을 넓혀나가면서 내는 굴착기 소리였던 것이고, 관세으음보살. 이 중생 입에서 터져나오는 것은 엄마보살 명자(名字)였다.

휑뎅그레한 것이었다. 한 사오백미터쯤 내려가면 서 있는 무슨 사제(私製)사찰 이름 새기어진 빗돌 곁 낙엽송 수펑이가 죄 버히어졌고, 이 중생이 번뇌망상하는 곳까지 오르는 외자욱 산길 좌우로 덤부렁듬쑥 그윽하던 잡목 수펑이도 죄 버히어졌으며, 거기서부터 우벚고개까지 올라가는 삼백미터쯤 되는 소롯길 좌우로 어우렁더우렁 메숲졌던 푸나무서리 또한 죄 버히어져버린 것이었다. 이 중생이 사는 곳에서 소재지로 가는 저 아래 큰길까지 한 이십리쯤 되는데 자동차 한대 다닐 만한 포장된 농로이다. 그리고 사제사찰 빗돌서부터 우벚고개 너머 다른 면까지 한 십리쯤 되는 좁좁한 외자욱 산길을 이차선 포장도로로 넓힌다는 것이었으니, 별꼴. 무슨 커다란 공장 같은 산업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전문대학 같은 큰 학교가 있는 것도 아닌 이 그윽한 산길을 왜 이차선으로 넓힌다는 것인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온 나라에 걸쳐 산을 허물어뜨리고 강물과 냇물을 뒤틀고 갯벌을 메우고 언덕을 까내리고 산에 구멍을 뚫어 골프장을 짓고 공장과 아파트를 세우는 토목공화국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닭 울음소리 가히 울음소리 들려오지 않는 곳 찾아 허위단심 바랑 푼 이 중생이 사는 곳까지 이른바 개발광풍이 불어닥치는 것을 보는 심정은 참으로 착잡한 것이었다.

내려온 길에 우벚고개까지 올라간 이 중생은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찔레꽃 내음 눈물 나고 칡꽃 향기 숨 막히며 그리고 동자꽃 원추리꽃 산나리꽃 천남성꽃 가슴 아픈 좁좁한 오솔길이 자동차 두대가 쌍노라니 달릴 수 있게끔 파헤쳐진 것도 그렇지만, 또 그만한 너비로 좌우 산자락 숲정이까지 죄 발매된 길 따라 올라간 영마루는, 한터가 되어 있었다. 어지간한 정구장만이나 하게 너른마당으로 파헤쳐졌는데, 아름드리 낙락장송들이 죄 뽑히어 있었다. 밑둥을 오라지운 비닐 싸개로 봐서 어느 장사꾼 농원이나 화원 또는 도회지 부잣집 왜식정원 장식용으로 팔려갈 운명으로 보였고, 잘개 쪼개어진 바윗돌들이 무더기무더기로 쌓인 것은 자갈로 팔려갈 것으로 보였다. 아무리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바뀌는 세상이라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여물값도 못되는 외화벌이를 하느라고 한 이레 산행을 하지 못한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굴착기들은 잇달아서 산을 깎아내고 있었고 깎아낸 흙더미 실은 대형 트럭들이 사제사찰 쪽으로 연락부절 오르내리고 있었다.

기왕 나온 김에 산행을 하기로 하였다. 산행이라고 하지만 무슨 연모를 갖추고 제대로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다. 등산화를 신어도 좋고 운동화끈 질끈 조이거나 털신 바람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다. 포행(布行) 나선 수좌처럼 그냥 노량으로 걸어가는 것인데, 남산에 구름이 일고 북산에 비가 내린다.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온 세상이 죄 썩고 병들었어도 나는 홀로 깨어 있어야겠다는 화두를 들어도 좋고, 첩첩한 앞산도 바라보고 중중한 뒷산도 돌아보며 멧새소리 벗삼아 그냥 무심히 걸어가도 좋다.

포행하는 곳은 국유림이다. 이 중생이 망상번뇌하는 토굴은 세 면이 국유림으로 둘러싸였는데 워낙 외진 곳이라 하늘 밑에 벌레들 발길이 뜸한 편이다. 봄이면 산나물 캐고 여름이면 야생차 달일 꽃과 풀을 뜯고 가을이면 버섯 따고 도토리 상수리에 알밤 줍고 겨울이면 뽀드득- 뽀드득- 꽈리 터지는 소리 나는 숫눈길 걸으며 고라니 까투리 장끼 족제비 청설모 다람쥐 멧토끼와 벗하면 된다.

둔중한 쇠붙이와 바윗돌이 부딪치며 내는 기분 나쁜 쇳소리며 대형 트럭 굴러가는 소리 피하여 서둘러 한 이백미터쯤 내려가다 왼쪽으로 모꺾어 들어가면 덤부렁듬쑥한 잡목 수펑이가 나온다. 서둘러 수펑이로 들어섰지만 끈질기게 귀를 물어뜯는 굴착기 소리 트럭 굴러가는 소리 바윗돌 깨는 소리였고, 이 중생은 화두를 들었다.

“어머니 뱃속을 빠져나오기 전에 나는 무엇이었던가?”

 

 

2

 

커다란 비닐봉다리 담긴 바랑을 등에 졌다. 접이톱을 챙겼다. 굴착기 소리와 대형 트럭 굴러가는 소리는 그쳐 있었다.

우벚고개로 올라갔다. 아름드리 낙락장송들 뽑아간 자리에 박혀 있거나 나뒹굴고 있는 솔뿌리를 보는 순간 떠올랐던 생각이었다. 동근송주를 담가볼 작정이었다. 동쪽으로 뻗친 소나무 뿌리를 캐다가 삼십도 넘는 소주에 담가두면 되는 약술로 갖가지 성인병에 그만이라던 청년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머리를 깎으려고 읍내에 나갔다가 들른 모둠역 맞은바라기 미용실이었다. 서울 변두리 어디쯤에서 미용실 사장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친구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미용실 올려세우고 헐수할수없어 지방 미용실 미용사로 내려왔다는 그 젊은이는 여간 달근달근한 사람이 아니었다.

“글 쓰는 작가 선생님이시니 말씀인디…… 건강관리는 어떻코롬 하신다요?”

“근강관리랄 게 뭐 있겠소. 그냥그냥 사는 거지.”

“근디…… 안색이 쪼깨 안 좋아 보이시요이.”

“글쎄…… 요즘은 당도 좀 있는 것 같고.”

하는데

“화따메, 당이다요이?”

하며 이렇게 말하던 것이었다.

“동근송주라고 들어보셨소이?”

“그게 무언데요?”

“동근송주라고 우리 고향서 어른들이 예전부터 해 잡숫던 건디…… 당뇨 고혈압 관절염 같은 성인병에 끝내준당께요. 동근송주 한 방구리면 껨 끝이다 말이요이.”

굴착기 두대만 서 있었다. 대형 트럭도 보이지 않고 굴착기 운전수가 타고 온 승용차도 보이지 않았다. 퇴근을 한 것 같았다. 산돌림이라도 한 줄금 하려는지 저 너머 용문산에 매지구름 떴고 황덕불빛 같은 놀이 낮게 깔리고 있었다.

서둘러 공설운동장 같은 영마루를 내려갔다. 솔뿌리 댓가닥을 톱으로 끊어 비닐봉다리에 넣었다. 바랑에 담았다. 등에 졌다. 후두둑- 후두두둑- 옷단 튿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퍼들껑- 퍼들껑- 날아오르는 멧새들이었다. 빗낱이 듣고 있었다.

잰걸음쳐 영마루로 올라서던 이 중생은 무춤하였다. 무엇인가 희뜩하고 눈 옆을 스치면서 관자놀이께가 뜨끔하였던 것이다. 무슨 날카로운 송곳 같은 것으로 찔리운 것 같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만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휑뎅그레하게 파헤쳐진 영마루 너른마당에는 뿌리 잘라낸 밑동을 비닐로 싼 왕소나무만 몇그루 쓰러져 있었고 굴착기 운전수가 먹고 버린 것으로 보이는 라면 봉다리며 빈 우유갑 그리고 콜라병 같은 허섭스레기들만 바람 따라 굴러다니고 있을 뿐, 땅불쑥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입안엣소리로 엄마보살 명호를 부르며 걸음을 옮기는데 다시 관자놀이께가 뜨거웠고, 이 중생은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살그니 고개를 돌리다 말고, 흡. 숨을 삼키었다.

파헤쳐진 너른마당 왼켠 위쪽으로 저만치 애두름에 아그려쥐고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던 것이다. 사람은 그리고 여자사람이었는데, 어?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슨 소리인가를 지르며 두 손으로 허공을 긁어내리던 그 여자사람은 달음박질쳐 내려오다 말고 무춤하였는데, 무언가 이상한 것이었다. 무슨 조선왕조 시대에나 입었을 법한 하얀 무명저고리에 검정색 무명치마 차림이었고, 댕기머리였던 것이다. 이 중생 쪽을 내려다보는 그 여자사람을 올려다보던 이 중생은 얼른 고개를 돌리었다. 그리고 서둘러 영마루를 내려왔다.

엄마보살 명호를 되풀이해서 불렀지만 무슨 까닭으로 영 후꾸룸한 기분이었고, 헛것인가. 먹는 것이 부실한데다 당까지 높은 몸으로 외화벌이에 지쳤으며 더하여 화두와 씨름하느라 몸이 허하여진 데서 오는 곡두. 눈에 헛거미가 잡히어서 보이는 삼마바리일 것이라고 마음을 눅자쳐보았지만 꼭 요강 뚜껑으로 물 떠먹은 것처럼 영 개운하지 않은 훗입맛인 것이었다. 그 이상한 여자사람이 자꾸만 꼭뒤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다시 영마루에 오른 것은 이튿날 다저녁때였다. 굴착기 소리와 대형 트럭 굴러가는 소리가 끝나기를 기다린 것이었고, 대여섯가닥 솔뿌리를 끊었다. 동쪽으로 뻗친 솔뿌리가 좋다고 하였지만 그냥 눈대중으로 골랐다. 비닐봉다리 담긴 바랑을 지고 영마루에 되짚어 올랐을 때였다.

경허스님 참선곡을 읊조리며 앞만 보고 걷던 이 중생은, 흡. 숨을 삼키었다. 어제 그랬던 것처럼 불에 덴 듯 관자놀이께가 뜨거웠던 것이다. 어제 그 자리에 아그려쥐고 앉아 있는 여자사람이었고, 이 중생은 관세음보살을 불렀다. 그리고 영산마지를 입에 물었다. 길게 연기를 내뿜던 이 중생은 얼른 엄마보살 명호를 불렀다. 여자사람이 애두름을 내려오는 것이었다. 성큼성큼 화장걸음쳐 이 중생 앞까지 내려온 그 여자사람은 무엇인가를 쥐고 있던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더니 깊숙하게 허리를 숙이었다.

“스님, 안녕하셔요?”

깜짝 놀라 맞받아 합장반배를 하며

“이 사람은 스님이 아닌데요.”

하고 말하는데, 무엇인가를 쥐고 있던 두 손을 뒤로 감추며 애살포시 웃는 여자사람이었다.

“스님은 어느 절에 계셔요?”

다시 이 중생은 스님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고

“조 밑에 있습니다. 비사란야(非寺蘭若)라고…… 절 아닌 절이지요.”

하고 말하였다.

“절 아닌 절이라면…… 무슨 치성 드리는 곳인가요? 무당들이 산기도 하는 곳.”

여자사람의 목소리에 얕보는 빛은 없었는데, 이 중생은 헛기침을 하였다.

“그냥 혼자서 망상번뇌하는 토굴이올시다.”

“아, 그러시군요. 독공부하시는 수좌스님이시군요. 전 또 상원절이나 용문절에 계시는 스님인가 하였지요.”

여자사람의 눈자위에 깔리는 이내 같은 기운을 보며 이 중생은 급하게 마지를 빨았다. 혜원의 풍속화첩에나 나올 법한 무명 치마저고리며 길게 땋아 늘여 무슨 천조각으로 질끈 묶은 댕기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맨발이라는 점이었다. 오이씨같이 자그마한 발이었는데 맨발로 산길을 다니는 듯 오동빛으로 새까맸다. 말을 할 때마다 그리고 애살포시 웃을 때마다 살짝살짝 드러나는 날옥수수를 받은 듯 똑 고르게 하이얀 잇바디에 복스러운 얼굴이었다. 한 스무남은살이나 되었을까. 저 육칠십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농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툭박지게 숫진 시골처녀 모습이었다. 그런데 무명 치마저고리에 댕기머리며 맨발이라니, 실성한 사람인가. 그러나 실성한 처녀라고 할지라도 어떻게 이런 모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당최 생각이 뭉뚱그려지지 않아 급하게 마지만 빨고 있는데, 처녀가 말하였다.

“스님은 그런데 어디를 다녀오는 길이셔요?”

윗도리는 남방셔츠를 걸쳤지만 먹물 들인 승복바지를 입고 또한 승복빛 천으로 만든 바랑을 지고 있는 것을 보고 스님이라고 믿는 처녀인 것 같았고, 이 중생은 말하였다.

“소나무뿌리 잘라다가 술을 담그려구요. 당뇨에 좋다길래.”

“당뇨가 뭐여요?”

“당뇨를 모르시오? 그 흔한 병 이름을.”

“처음 듣는 병인 것 같아서요.”

이른바 국민병이라는 당뇨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에, 틀림없구나. 머리칼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이 중생은 헛기침을 하였다. 그리고

“몸에 좋다길래 그냥……”

하고 뒷말을 흐리는데

“참선 잘하시는 스님들은 병이 없으시던데……”

하고 말하며 애살포시 웃는 처녀사람이었고, 이 중생은 얼굴이 붉어졌다.

“비승비속의 반인이니까요. 중도 못 되고 속인도 못 되는 반거충이.”

새 마지에 얼른 불을 붙이었다.

“그런데 보살님은 왜 여기에 계시는 거요? 댁은 어디시구?”

후꾸룸한 생각이 든 이 중생은 급하게 물었는데 대꾸가 없었다. 그 이상한 처녀사람의 눈은 이 중생을 보고 있지 않았다. 깐 무릇처럼 해맑게 톡 찬 이마에 밤볼 진 두 볼이 복스러워 보이는 그 처녀사람의 왕흑머루를 박은 것처럼 놀란 듯 커다란 두 눈이 던져져 있는 곳은 허공중이었다. 허공중 너머로 구불텅구불텅 내려가는 저 아래 금왕쪽 산모롱이였다.

“꼭 온다구 했거든요. 반드시 꼭 살아서 돌아오겠다구 나하구 언약을 했단 말이어요. 꼭 온다구.”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처녀사람을 바라보던 이 중생은 얼른 몸을 돌리었다. 그리고 서둘러 영마루를 내려왔다.

 

 

3

 

철대문을 나섰다. 영마루쪽을 잠깐 올려다보다가 아랫길로 내려갔다. 소나무뿌리 잘라온 것이 여남은개밖에 안되므로 땅 파고 항아리에 넣어 소주 붓고 묻어두려면 아직 한참 더 잘라와야 되었지만, 관세음보살, 영 거시기한 것이었다. 아무리 비승비속하는 반거충이라고 하지만 뉘우침처럼이나마 명색이 화두 드는 전(前) 중으로서 공포를 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 무슨 철천지 한 맺힌 중음신이라고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젓가락 하나 집어들 수 있는 힘이 없는 귓것한테 압기된 것은 아니었다. 매킨지라는 서양 기자가 백년 전에 쓴 「의병 종군기」를 읽고 있던 탓인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한 맺힌 조선반도의 구만리장천 허공중을 떠돌고 계신 중음신들 천도할 수 있는 죽비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그이들 눈물 닦아줄 다라니 같은 소설 한편 써내지 못하는 나 같은 중생을 무엇으로 일러 왈 글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저 오륙십년대 시골아이들 박박 깎은 머리통 파먹은 기계충 자국처럼 휑뎅그레 썰렁해진 숲길 한 이백미터쯤 내려간 삼사미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었다. 굴착기 소리 대형 트럭 바퀴 굴러가는 소리 피하여 달음박질쳐 접어드는 숲길에 소나무뿌리는 없었다. 이따금 휘늘어진 낙락장송이 보이기는 하였지만 그 아름드리 소나무 밑동 밑을 깊게 파고 뿌리를 잘라낸다는 것이 여간 일이 아니었다. 뿌리 잘라낸 소나무는 무엇보다도 그리고 어떻게 될 것인가. 몇번 삽질을 해보다가 그만두고 엄마보살 명호만 불렀다.

그렇게 한 이레쯤 지났을 때였다. 궁예미륵님 앞에 반가부좌 틀고 앉아 화두를 챙겨보는데, 무슨 소리가 났다. 바람소린가 하고 다시 끊어졌던 화두를 챙겨보는데, 다시 무슨 소리가 났다. 손기척 소리였다. 창밖은 먹물을 뿌린 것처럼 캄캄한 어둠이었는데, 손기척 소리는 잇달아서 들려오고 있었고, 흡. 이 중생은 숨을 삼키었다. 이 깊은 산속을 이 깊은 밤중에 올라와 손기척을 낼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었고, 옴 살바못자 모지 사다야 사바하. 참회진언을 세번 읊은 다음 몸을 일으켰다. 궁예미륵님께 합장반배한 다음 문간 쪽으로 갔다. 깊게 들이마셨던 숨을 천천히 내쉰 다음 헛기침을 한번 하였다.

“누구세요?”

바짝 손에 땀을 쥐고 있는 탓에 목소리가 너무 작았는가. 똑똑. 다시 풀벌레 울음소리와도 같은 손기척 소리가 들려왔고, 이 중생은 아랫불밭에 힘을 주었다.

“예에. 누구세요?”

베란다 쪽 유리창을 때리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만 들려왔고, 바람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것은 손기척 소리였다. 세번째였다.

“누구세요?”

아랫불밭에 너무 힘을 주고 있었으므로 이번에는 또 터무니없이 크게 터져나오는 목소리였는데, 콤콤. 잔기침 소리가 나더니

“저여요, 스니임.”

하고 들려오는 것은 여자사람의 목소리였다.

“저라니까요, 스니임. 요 위 영마루 사는 분이.”

이레 전 우벚고개 영마루에서 만났던 그 이상한 처녀사람 목소리였고, 이 중생은 문간과 마당에 있는 외등 여닫개를 올렸다. 그리고 잠금쇠를 돌리고 문을 밀었다. 댕기꼬리가 보였다.

“이 밤중에 웬일이세요?”

털신에 발을 꿰는데 그 처녀사람의 댕기꼬리가 앞으로 나아갔다. 옷차림이 바뀌어 있었다. 노랑 저고리에 분홍 치마를 입은 그 처녀사람은 덧문을 열더니 철도 침목으로 놓은 층층대를 내려가고 있었다.

“아니, 들어오지 않고 어디로 가시는 거요? 여기까지 와서.”

층층대를 내려간 처녀사람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어요. 전 그냥 여기가 좋아요.”

팡파짐한 엉덩이께까지 내려오는 댕기머리를 바라보던 이 중생은

“잠깐만요.”

하면서 얼른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담뱃갑과 라이터를 들고 나와 층층대 맨 위칸에 궁둥이를 걸치고 앉았다.

“보살님. 이쪽으로 몸을 좀 돌려보세요.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해야지 왜 등을 보이는 거요?”

“아니어요. 전 이대로가 좋아요.”

“그러지 말고 돌아서세요.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기 싫으면 거기 층층대에라도 좀 앉으세요.”

“고맙습니다. 스님.”

깊숙하게 허리를 숙이고 난 처녀사람이 몸을 반쯤 틀더니 맨 아래칸 층층대에 아그려쥐고 앉았는데, 헉. 이 중생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수수한 무명 치마저고리 대신 노랑 저고리에 분홍 치마를 입고 있는데다 맨발인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이 중생의 숨을 멎게 하는 것은, 얼굴이었다. 얼굴이 달라진 것이었다. 보오얗게 분 먹은 얼굴인데 쥐 잡아먹은 것처럼 새빨갛게 칠한 입술이며 그리고 또 밤볼 지는 두 볼에 연지 찍고 깐 무릇처럼 톡 찬 이마에는 곤지를 찍었으니, 원삼 걸치고 족두리만 썼다면 똑 초례청에 든 홍색짜리였던 것이다. 주사를 칠한 듯 새빨간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스님.”

“예.”

“왜 안 오시는 거여요?”

“예에?”

“벌써 이레가 됐잖아요. 왜 갑자기 발길을 끊으시는 거여요?”

잔뜩 원망을 담은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려나오는 것이었고, 이 중생은 급하게 마지를 빨아들였다.

“아, 예에. 그냥…… 아랫길로 다녔습니다. 그쪽은 시끄러워서……”

당신이 무서워서 그랬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뒷말을 흐리는데, 콤. 쌍글하게 밭은기침을 한번 하고 난 처녀사람은 홱 고개를 틀더니 똑바로 이 중생을 바라보았다.

“전…… 기다리고 있어요.”

왕흑머루를 박은 것처럼 커다란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어리는 것 같더니 풀벌레 울음소리처럼 가냘프게 떨려나오는 목소리였다.

“전…… 기다리고 있어요.”

“누구를 말입니까? 이 중생을 기다린다는 것인가요?”

다시 홱 돌아가는 고개였고 책을 읽듯이 나직한 목소리가 또박또박 들려왔다.

“전 기다리고 있어요.”

이 중생은 새 마지에 불을 붙였다.

“누구를 말입니까?”

“판돌이요.”

“판돌이가 누군데요?”

“어머, 판돌이도 모르셔요. 단옷날 읍내 씨름판서 황소 탄 장산데. 소리는 또 얼마나 잘하고 인정은 또 얼마나 다순 사람인데.”

“아, 예에.”

쫄딱 실성한 사람이로구나. 아니, 사람이 아니라 귓것이지. 생각한 이 중생은 급하게 마지만 빨았는데, 처녀사람이 생긋 웃었다. 그 이상한 처녀사람은 꿈꾸듯 아련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판돌이가 돌아오면 우린 혼인을 할 거거든요. 그렇게 언약했거든요. 둘이 꼭 혼인해서 유자생녀 만수다복 오래오래 다정하게 살자구 미륵님 전에 손가락 걸구 연비 뜨며 맹세쳤단 말이어요.”

이 중생은 한숨을 삼키며

“절에 오는 사람이 옷차림이 그게 뭐요? 그리고 얼굴에 한 단장은 또 뭐구?”

하고 짐짓 꾸짖는 투로 말하였는데, 홍색짜리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미륵님, 안녕히 계시어요.”

서 있는 몸맨두리 그대로 허공을 향하여 깊숙하게 합장배례를 한 다음 마당 쪽으로 몸을 돌리었다. 흐릿한 외등빛 아래를 지나 물매 심한 자드락길을 겅중겅중 걸어내려가는 처녀사람 댕기머리를 망망연히 바라보던 이 중생은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이었다.

 

 

4

 

“혹시 상동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 못 보셨어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 그리구 상동은 또 어디구?”

“어머, 상동도 모르셔요? 여기가 상동인데.”

“아, 예예. 그런데 누굴 기다리는가요?”

“의병요.”

“의병이라니요?”

“조선사람이 의병도 모르셔요? 핫바지 저고리에 짚신 신고 화승대 멘 의병도 모르셔요? 참선공부한다는 스님이.”

우벚고개 영마루였다. 이 중생이 망상번뇌하는 토굴인 비사란야로 그 처녀사람이 찾아왔던 밤이 지난 다음날 저녁때였다. 솔뿌리 대여섯개 잘라 진 이 중생이 영마루 한터에 올라섰을 때였다. 애두름 내려온 처녀사람이 앞길을 막아서며 말하는 것이었고, 이 중생은 긴 숨을 내리쉬었다. 연분홍빛 치마에 옅은 탱자빛으로 연노란 회장저고리 받쳐 입고 있었고 발에는 미투리를 신고 있었다. 숫눈빛으로 하이얀 수눅버선 감싸고 있는 코쭝배기에 잇꽃물 들인 그 미투리는 청올치로 짠 것이었다. 어젯밤처럼 연지 찍고 곤지 발라 어여쁜 새각시였다.

“의병이라고 하셨소이까? 국란 때마다 떨쳐 일어섰던 농투산이 의병?”

“그럼요오. 왜병들 물리쳐야 한다며 죽창 꺾어쥐고 일떠선 의병이지요. 농군 싸울아비.”

“의병이라. 좀 찬찬히 말해봅시다. 우선 좀 앉아서.”

이 중생은 흙바닥에 주저앉으며 반가부좌를 틀었는데,

“잠깐만요.”

하면서 애두름 달음박질쳐 올라간 그 새각시가 두 손에 나눠쥐고 내려온 것은 놀랍게도 술병과 안주접시였다.

“한잔 잡수셔요. 악독한 왜병들과 싸우시느라 얼마나 애쓰셨어요.”

보오얀 젖빛 술두루미 두 손 받쳐 기울여 이 빠진 막사발 가득 따라주는 것은 막걸리였다. 단숨에 막사발을 뒤집은 이 중생 입에 넣어주는 것은 그리고 도토리묵이었다. 텁텁한 막걸리는 근래 나오는 화공약품 친 공장막걸리보다 훨씬 독하였고 고춧가루 뿌린 초간장에 찍힌 도토리묵은 또 여간 바따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보살님도 한잔 하셔야지요.”

막사발 밑에 깔린 막걸리 찌꺼기를 흩뿌리고 나서 두루미를 잡았는데 손이 흔들리면서, 아. 살고 싶구나. 이런 여자사람과 한살되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구나. 지아비는 씨 뿌리고 지어미는 밭 매는 틈틈새새로 자성 자리 들여다보며 부처 이름 부르고 보살 이름 부르며, 아아. 강냉이와 감자 섞인 보리 곱살미면 어떻고 진잎국과 죽순나물 한 접시에 보리고추장 한 종지면 또 어떻단 말인가. 끔찍하게 깨져버린 두차례 혼인생활 떠올리던 이 중생은 헛기침을 하며 두루미를 기울이는데,

“조금만 주셔요.”

하고 처녀사람이 말하였고, 삼분지 일쯤 따루어진 막걸리를 마시고 난 처녀사람이 부르르 진저리를 치며 이 중생을 바라보았다.

“스님께선 다 아시지요.”

“뭘 말인가요?”

“조선팔도를 무른 메주 밟듯 하고 다니시는 스님네니 제천 쪽 의병들 소식도 잘 아실 거 아녀요. 제천만이 아니라 충주 쪽 의병들 소식도.”

“알고 싶은 게 무엇인데요?”

“우선 생사나 좀 알고 싶어요. 제천 쪽으로 간 의병들 생사나 좀.”

아득한 눈빛이 되어 저 아래 금왕 쪽 산모롱이를 바라보는 홍색짜리였고, 관세으음보살. 이 중생은 마지에 불을 붙이었다.

“그런데 왜 이 중생이 왜병과 싸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오?”

“스님은 승병이잖아요.”

“승병이라구요?”

“그럼요오. 의병들 속에 승병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저쪽 양근 쪽 사낫절도 그렇고 우리 지평 쪽 용문절 상원절에 승병들이 많았거든요.”

“아, 그랬군요. 그 승병들이 왜병들과 싸웠던 게 언젠가요?”

산포수 출신 김백선 장군이 유인석 선생이 이끄는 의병부대 선봉장으로 맹활약하던 때인가? 아니면 서울 탈환작전을 위하여 십삼도창의군이 모였던 저 양동 삼산리 싸움 때였던가? 생각하며 물었는데, 부르르 진저리를 치는 홍색짜리였다. 그리고

“무서워요, 스니임.”

하며 부르르부르르 진저리를 치는 것이었다.

“무서워요. 무서워 죽겠어요, 스니임.”

목소리가 와랑와랑 떨려 나오면서 비죽비죽 울음을 터뜨리는가 싶더니

“저것 봐. 저것 좀 봐. 저 피 좀 봐.”

하면서 이 중생 가슴에 얼굴을 묻는 것이었다.

“저 악귀 같은 왜놈들 좀 보셔요. 철포 때리고 불 지르고 총창질 하면서 우리 조선사람들 다 죽이고 있잖아요.”

“아이구, 보살님. 분이 보살님.”

이 중생은 얼른 바람 부는 날 문풍지처럼 벌렁거리는 홍색짜리 어깨를 끌어안았다.

“울지 마세요, 보살님.”

어깨를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보살님. 왜놈들은 죄 쫓겨갔으니까.”

“정말요오?”

“그럼요. 정말이잖구요. 그러니 그만 울고 진정하세요.”

“맞아요. 판돌이도 그랬어요.”

하더니 벌떡 몸을 일으키는 홍색짜리였다.

“승병 나선 스님들도 그랬어요. 왜놈들을 반드시 쫓아낼 것이라고. 그리고 왜놈보다 더 나쁜 토왜놈 왜지주 왜현감 왜군수 왜관찰이며 왜놈 앞잡이 노릇하는 가왜놈들 다 물리쳐서 새 세상 만들 거라구 그랬단 말여요.”

“여기서 만나기로 했군요. 판돌이란 의병과.”

“그러믄요. 여기서 꼭 만나기루 했단 말여요, 여기서. 여기서 만나서 혼인해서 유자생녀 만수다복 오래오래 다정하게 살기로 언약했거든요.”

연분홍 복사빛 갑사치마에 연노란 민들레꽃빛 회장저고리 떨쳐 입고 연지 찍고 곤지 찍어 숨 막히게 아름다운 그 새각시짜리는 고개를 비틀더니 팽 소리가 나게 맑은 코를 풀었다. 그리고 아까처럼 꿈꾸듯 아련한 눈빛으로 금왕 쪽을 바라보았고, 이 중생은 술두루미를 기울였다.

“보살님.”

무슨 말인가를 해줘야겠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아아아. 의병은 죽었다. 제천과 충주 쪽으로 갔던 의병들은 죄 몰사죽음하였다. 당신이 아무리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고 해도 그이들은 돌아오지 못한다. 당신과 철석같이 언약하고 또 맹세쳤다는 약조 또한 그러므로 지켜질 수 없다. 지켜질 수 없다. 지켜질 수 없다.

“화승대 메고 주렁주렁 탄띠 차고……”

홍색짜리 목소리는 다시 와랑와랑 들떠 나왔다.

“삼산리 싸움 때는 왜놈 병대 수수백명을 쳐죽였구 저어기 여주 배개나루 싸움 적에두 왜병 수십명을 쳐죽였구 용문산에서두 그냥 쫓겨당긴 것만두 아니었구……”

마치 왜병 토벌대와 싸우는 의병처럼 두 팔 번쩍 치켜들고 허공중을 찌르고 잡아당기고 흩뿌리던 홍색짜리가 털푸덕 소리가 나게 주저앉았다. 그리고 두 무릎을 세워 가슴에 대더니 붙여 세운 두 무릎을 두 팔로 꼭 끌어안는 것이었다.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하염없이 저 아래 산모롱이를 바라보는 홍색짜리 얇은 등을 바라보던 이 중생은 얼른 술두루미를 기울였는데, 흘러나오는 것이 없었다.

“어머니나, 술이 떨어졌네요.”

언제 그랬냐 싶게 밝은 얼굴이 된 홍색짜리가

“잠깐만 기다리셔요. 얼른 술 한 두루미 더 받아올 테니.”

하며 몸을 일으키었다.

“그리고 잘 보구 계셔야 되어요.”

뜻 모를 소리를 하며 몇발짝 걸어가던 홍색짜리가 고개를 돌리었다.

“네 사람이거든요. 우리 판돌이하구 애기 의병 한 사람하구 승병 두 사람.”

몇발짝 걸어가던 홍색짜리가 다시 고개를 돌리었다.

“왜놈들이 죄 죽였단 말여요. 죄 불 지르구 죄 죽였단 말여요.”

비죽비죽 울음소리 섞어 말하던 홍색짜리는 팽 소리가 나게 맑은 코를 풀었다.

“사낫절두 태우구 용문절두 태우구 상원절두 태우구…… 겨우 살아남은 승병 의병 들은 거진 다 두물머리 쪽으로 갔어요. 두물머리 건너 임진강 쪽으로 간다구 했어요. 임진강 건너 황해도 쪽으로 간다구 했어요. 평안도 가구 압록강 건너서 만주땅으로 간다구 했어요. 그쪽으로 가서 다시 힘 길러 왜놈들과 싸울 거라구 했어요.”

목을 돌렸던 홍색짜리가 다시 고개를 바로하였다. 그 처녀의 목소리가 높이 떠서 흩어지고 있었다.

“동생뻘 되는 애기 승병들인데 얼마나 염불을 잘한다구요.”

겅중겅중 화장걸음쳐 가던 홍색짜리가 반비알 진 산자락으로 접어드는가 싶었는데, 관세으음보살. 업더지며 곱더져 애두름 올라선 그 홍색짜리가 아이오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한참을 더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이 중생은 몸을 일으켰다. 비틀하고 쓰러지려는 몸뚱이를 바로잡은 이 중생은 염불처럼 서러운 발걸음으로 영마루를 내려왔다.

 

 

배암발

 

찬물에 낯을 씻은 다음 궁예미륵님 모신 방으로 들어갔다. 쌍촛대에 불을 밝혔다. 불 붙인 향 한개비를 향로에 꽂았다. 좌복 위에 온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화두가 자꾸 끊어졌다. 목탁을 잡았다. 심경 한편 치고 나서 미륵존불을 불렀다. 목타는 그리움으로 불렀다. 사무치게 불렀다. 이 중생이 미륵존불을 부르는 것인지 미륵존불이 이 중생을 부르는 것인지 모르게 불렀다. 젖먹던 힘을 다 기울여 한마음으로 불렀다.

견딜 수 없게 배가 고팠다. 유리창을 뚫고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부엌 쪽으로 갔다. 빈 밥통을 닫은 다음 냄비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고 라면 봉다리를 뜯었다. 토굴을 나왔다. 소재지까지 걸어가서 서울 가는 버스를 탔다.

다시 토굴로 간 것은 꼭 한철 만이었고, 관세으음보살. 무슨 사제사찰까지 가는 일차선 농로는 그대로였는데, 보상금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포장된 이차선 아스팔트길 따라 우벚고개로 올라갔다. 아스팔트 뒤덮인 영마루 너른마당에 아그려쥐고 앉았다. 또한 이차선으로 포장된 저 아래 금왕 쪽 산모롱이를 바라보며 영산마지에 불을 불였다. 다시 한번 애두름 쪽을 올려다보았지만 그 홍색짜리는 보이지 않았다. 아스팔트 뒤덮인 우벚고개 못 찾을 판돌이 마중하러 양동 쪽으로 내려간 것 같았다. 어쩌면 물어물어 찾아 제천과 충주 쪽으로 내려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판돌이가 삼아준 꽃미투리 닳을까 봐 두 손에 나눠들고 오동빛으로 새까만 맨발로 걸어다니고 있을 것이었다.

하릴없이 부벼 끈 꽁초를 주머니에 넣으며 몸을 일으키는데 토굴 쪽에서 승용차 한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영마루 너른마당에 멈춰선 승용차 문이 열리며 두 사람이 나왔는데, 중년 남녀였다. 남자는 말끔한 양복차림이었고 세련된 양장 차림인 여자는 커다란‘라이방’을 끼고 있었다. 남자가 금왕 쪽을 가리켰다.

“양평 쪽두 이젠 종 치고 막 내렸어요. 저어기 양동면 쪽 한군데만 남았다니까요.”

“저기 양동인가에 아무 대학 분교가 선다는 게 정말 확실한 정보예요?”

“대학만이 아니라 반도체공장도 들어선다니까요. 이천 쪽에 반도체공장 허가 떨어진 거 아시잖아요. 아이티산업과 대학만이 아니라 딜럭스 빌라타운도 들어선다니까 그러시네.”

“박사장 말 의심하는 게 아니라……”

“모모하는 싸모님들이 다 수십필지 수백필지씩 잡아놨다니까 그러시네. 싸모님은 요즘 유행하는 말도 모르세요?”

“뭔데요?”

“순간의 선택이 영원한 행복.”

“오머, 박사장은 농담두 잘하셔.”

끙- 소리와 함께 발걸음을 떼면서 다시 한번 애두름 쪽을 올려다보았지만 홍색짜리는 보이지 않았다. 영험 없는 장엄염불이나 읊조리며 영마루를 내려오던 이 중생은 무춤하였다. 저만치 앞쪽 발매된 산자락에서 후다닥 소리가 나면서 무엇인가 달려나왔는데, 고라니였다. 이차선 포장도로 앞에 선 그 순한 짐승은 잔뜩 겁먹은 눈으로 이 중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