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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한반도에서의 근대와 탈근대

 

대한민국 60년의 안과 밖, 그리고 정체성

 

 

홍석률 洪錫律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 저서로 『통일문제와 정치사회적 갈등: 1953~1961』, 주요 논문으로 「1968년 푸에블로 사건과 남한·북한·미국의 삼각관계」 등이 있음. srhong@sungshin.ac.kr

 

 

2008년 대한민국은 환갑을 맞이한다. 건국 60주년을 맞아 지나간 역사를 성찰하고 이를 기념하는 작업은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는 민족적 통합과 근대 국민국가의 건설, 산업화, 민주화 등 근대의 제반 과제들을 분리하여 선후관계로 이야기하는 경향이다. ‘선건국 후통일론’ ‘선산업화 후민주론’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왜 근대의 다양한 측면들을 분리하여 선후관계로 정립하는 것에 그토록 익숙한 것일까? 이는 결국 건국이 민족의 통합과 함께하지 못하고, 산업화가 민주주의와 같이 가지 못했던 우리의 역사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이는 일제 식민지화로 인해 근대적 문물과 제도의 도입이 근대 국민국가와 민주주의의 성립으로 이어지지 못했던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가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대변하고 있다. 물론 근대의 여러 과제들을 동시에 완벽하게 성취한 나라는 현실 역사에서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근대의 한 과제를 다른 과제에서 분리하여 선후관계로 정립하고, 특정시기에는 이것만이 가능했다고 하면서 다른 과제를 배제하는, 그래서 ‘산업화세력’과 ‘민주화세력’이 여전히 대결하는 우리 사회의 양상은 무언가 성찰의 필요성을 던져주고 있다.

국가의 나이와 인간의 나이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어렵지만, 대한민국은 이제 60갑자를 다 돌아 환갑을 맞이했으니 한 단락을 짓는 성숙함과 완성됨을 기대하게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안과 밖을 함께 돌아보며 근대의 온전한 성취를 기약하고, 그 과정에서 근대 이후의 가능성도 함께 이야기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1. 대한민국의 간극, 분단과 전쟁의 형성

 

“오늘은 정부수립 내일은 남북통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행사를 주관했던 ‘국민축하준비위원회’가 주최한 현상모집에서 1등 없는 2등으로 선정된 표어이다.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은 이처럼 건국과 민족통합이 함께 이루어지지 못하고, 통일이 미완의 과제로 남았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은 식민통치와 미군정의 점령통치에서 벗어나 일단 ‘자주독립’의 과제를 성취한 것으로서 궁극적으로 민족통합을 달성하는 데도 유리한 국면을 조성할 것이라고 했다.1 하지만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과 민족통합이 분리되었던 그 간극에는 단지 채워지지 못한 부족함만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대폭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불꽃이 튀고 있었다.

한반도 분단 위기가 가시화된 1947년 가을부터 많은 사람들이 분단은 곧바로 동족상잔의 전쟁을 유발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반도에는 오랫동안 통일된 중앙집권적 왕조가 존재했고, 식민지가 된 이후에도 분할통치 같은 것은 없었다. 분열의 불씨가 될 심각한 인종·언어·종교적 차이와 갈등도 없었다. 더구나 한국은 독일과 달리 패전국도 아니었다. 건국과 민족통합이 분리되는 양상은 불가피하고도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기보다 상상조차 힘들었던 최악의 파탄적 상황이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작업이 진행되던 1948년 7월 남쪽의 지식인 330명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통일과 자주는 둘이 아니라 하나”이며, 이는 “선후(先後)가 있을 리 없다”면서, 양자가 분리되는 상황은 “동포상잔의 참변이 순치(馴致)되는 실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2 또한 “‘전과(戰果)’로 표현되는 제주도의 ‘토벌(討伐)’”에 대해서도 우려를 피력했다. 제주도 4·3항쟁의 진압과정에서 이미 ‘동포상잔’의 참변의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간극은 건국(자주)과 통일 사이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제헌의회가 제정한 헌법은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하고, 친일파 처벌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음을 명시했다. 나아가 헌법의 경제관련 조항들은 사회주의적 색채와 요소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건국 주도세력은 대부분 자본가, 지주, 친일파를 중요 지지기반으로 한 정치집단의 구성원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러한 조항들을 헌법에 삽입한 것은 자신들이 배제한 개혁적·진보적 정치집단의 요구와 밑으로부터의 압력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 점은 또한 국가는 단지 이를 주도하는 집단의 도구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정치사회적 집단들이 갈등하는 장이며, 따라서 이들 사이의 관계를 반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헌법상에 표방된 민주공화국의 이상과 대한민국의 현실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다. 정부수립이 민족통합과 분리되던 파행적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적 합의기반은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좌익과 중간파 정치세력은 물론이고 1947년까지도 대한민국 건국 주도세력과 함께 반탁운동을 했던 김구, 임시정부 세력도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처럼 대단히 협소한 기반 위에서 탄생한 정부는 민주주의의 실제 내용을 채워주기 어려웠고, 헌법에 규정된 사회개혁을 제대로 실행하기도 어려웠다. 그 간극에서 또한 불꽃이 발생했다.

물론 불꽃 튀는 상황을 만든 것은 한국인들만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외적 규정력이 크게 작용했다. 해방은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으로 이어졌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파시스트국가와 맞서 싸우는 동맹국이었지만 점차 패권대립을 벌이는 상태로 돌입했다. 한반도는 그 어떤 지역보다도 냉전이 일찍 시작한 곳이었다. 한국에서의 좌우 이념갈등과 친일잔재 청산 등 민족문제를 둘러싼 갈등은 미·소의 분할점령 및 그들이 한반도에서 추진한 점령정책의 결과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3

분단과 전쟁의 원인을 이야기할 때 내인(內因)과 외인(外因)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는 논쟁이 있어왔다. 그러나 양자의 구분은 그다지 의미없어 보인다. 미·소의 분할점령과 점령정책은 한국인들 사이의 갈등을 조장했고, 또한 반탁운동에서 나타나듯 한국인 내부의 갈등은 미·소 대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내인·외인을 구분하고 그 서열을 정하는 것은 해방 직후의 복잡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유용하지 않다. 국가의 역사는 고립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관계 속에, 나아가 이를 규정하는 세계체제 속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민족분단은 대폭발의 가능성을 잠재한 불꽃 튀는 간극을 발생시켰다. 그러나 분단 이후라도 남북 분단국가와 미·소 강대국이 이러한 불꽃을 제어해서 대폭발을 방지하는 방향으로 갔다면 전쟁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남북의 정권 모두 ‘북벌론(北伐論)’과 ‘남정론(南征論)’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며 각자의 동맹국에 지원을 호소했다.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관리할 때는 주요 도로를 차단하고 초소를 두는 정도였다. 38선 관리권이 남북 두 정부에 넘어가자 양측은 방벽과 참호를 건설하고 고지로 올라가 진지를 구축했다.4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전투가 계속되었다. 미·소 냉전은 더욱 격화되었다. 마침내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선제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우려했지만 결코 원하지 않았던 대폭발이 발생한 것이다.

 

 

2. 냉전반공 안보국가와 4·19 민주항쟁

 

국가와 국민의 형성이 전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예외적이라기보다 보편적이다. 적과의 목숨을 건 대치국면에서 국민적 정체성은 개인의 몸과 의식에 스며든다. 국가의 형성은 또한 외부의 적뿐 아니라 내부의 적에 대한 배제 속에서 이루어진다.5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보도연맹원 학살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의 군과 경찰이 자국의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학살을 불러일으킨 냉전·반공이데올로기는 ‘빨갱이’라는 용어가 보여주듯 그 자체에 인종주의적 요소를 내장하고 있었다. 빨갱이〓비(非)단군혈통〓비민족(비국민)의 논리로 연결되는 ‘좌익사냥’은 냉전·반공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 중 하나였다.6

그런데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형성된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은 “자유진영의 최전선”이라는 냉전진영의 정체성에 의해 압도되고 제약되는 한계가 있었다. 당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하는 미국의 대외원조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생존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론도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통일이라기보다는 자유진영이 공산진영을 격멸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통일이 되는 상황을 전제한 것이었다.

이승만정권의 반공논리는 이처럼 “자유진영의 최전선”이라는 냉전진영의 논리에 압도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과 분리되는 대한민국이라는 독자적인 단위의 정체성과 그 발전방향을 형성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또한 극단적 냉전논리에 기반한 반공이데올로기는 극우반공세력 이외의 다른 정치집단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았고 다른 가능성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민주적인 정치적 경쟁을 제약했다. 이와같은 상황에서 마침내 1960년 4·19 민주항쟁이 발생하고, 이승만정권은 붕괴되었다.

4·19 민주항쟁은 이승만정권의 몰락과 북진통일론 같은 극단적인 냉전논리의 청산을 가져왔다. 4·19 직후 한국 외교정책에 대한 좌담회에서 한 국제정치학자는 “우리는 무조건하고 자유진영의 광단(光端)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가정해놓고 외교정책을 수립하는 것 같은데 (…) 한국의 순수한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라고 발언했다.7 이렇듯 4·19는 냉전진영의 논리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한국사회의 발전방향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4·19 직후 각 정치·사회집단은 나름의 발전 가능성을 제시하며 갈등했다. 이때 쟁점은 주로 통일과 경제건설 문제였다.

4·19 직후 장면정권을 비롯한 보수정치세력은 외국 자본의 도입을 통한 경제건설을 우선적으로 진행하여, 남한사회의 번영을 달성한 다음 통일을 모색해보자는 ‘선건설 후통일론’을 주장했다. 4·19 이후 보수정치세력들은 북진통일론을 공식적으로 폐기하여 남북의 공존을 사실상 인정했다. 그러나 극단적 냉전·반공이념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남북교류와 협상이 모두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는 결국 북한과의 ‘적대적 공존’ 속에서 ‘체제경쟁’에서 승리하여 북을 남한체제로 흡수하는 통일을 상정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북이 남보다 경제건설의 성과에서 앞서고 있던만큼 경제건설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과거 ‘선건국 후통일’의 단계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다만 이제 건국은 되었고 냉전대립에서 생존했으니 우선적 과제가 경제건설·산업화로 이동한 것이 특징이었다.

반면 민간 통일운동세력들은 중립화통일론, 남북협상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도 경제건설의 전망과 연결되어 있었다. 중립화통일론은 그 내부에 이른바 서구식 복지국가를 모델로 하는 민주사회주의적인 발전지향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북한은 공산진영 내에서 독자성을 추구하는 띠또(Tito)식 사회주의 방향으로 가고 남한은 민주사회주의적 발전을 이룩하면서 점차 체제를 수렴해가며, 대외적으로는 스위스 또는 오스트리아 모델의 영세중립화를 통해 한반도 주변 강대국의 타협을 끌어내 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통일과 경제건설의 동시 추진, 타협적·점진적 관점의 통일론이라 할 수 있었다. 반면 남북협상론자들은 반외세·반봉건·반매판의 민족혁명을 주장했으며, 통일이 곧 이러한 민족혁명을 달성하는 것이라 했다. 이들은 경제건설도 통일〓민족혁명이 달성되어야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북 쌀, 이남 전기”“실업자의 일터는 통일에 있다” 같은 당시 통일운동의 구호는 이러한 차원의 논리를 반영하고 있었다.

4·19 직후 정치사회적 갈등은 주로 통일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되었지만, 여기에 단지 1민족 1국가를 추구하는 논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는 민족통합, 산업화, 민주주의의 성취를 위한 다양한 경로와 가능성을 둘러싼 논의에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8 즉 근대의 성취를 둘러싼 다양한 가능성의 경합이었던 것이다.

 

 

3. 개발독재, 상승하는 국가 대한민국

 

1961년 5월 16일 쿠데타가 발생하고,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등장했다. 박정희정권은 4·19 직후 태동한 근대를 성취하려는 다양한 가능성 중에서 ‘선건설 후통일론’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모두 군대의 폭력을 동원하여 배제했다. 그런만큼 자신들의 논리, 즉 통일 없이도 경제성장이 가능함을 보여주어야 했다. 밑으로부터의 압력은 4·19를 통해 이미 조성되어 있었다. 또한 북한과의 경쟁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한은 추격자였다. 나아가 미국은 제3세계근대화론을 내세우며 이미 1950년대 후반부터 경제개발을 강조해오고 있었다. 대한민국 내부, 분단체제·세계체제 모두로부터 압력이 조성되었다.

박정희정권은 경제개발을 위해 ‘근대화 민족주의’를 내세웠다. 이는 혈통과 문화를 강조하는 유기체적 민족관에다 근대화론, 발전주의를 결합한 것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불균등한 세계체제 내에서 지위 상승을 추구하는 유기체적 운명공동체로 묶여갔다. 이같은 민족주의의 맥락은 서구의 근대화론자들이 제3세계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경제개발 추진의 동력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박정희정권은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한국경제는 몇번 위기를 맞이하기는 했지만 전두환·노태우정권으로 이어지는 30여년의 군사정권 기간에 빠른 성장을 지속했다. 1950년부터 2000년 사이에 세계 각국의 1인당 GDP증가는 평균적으로 2배 전후였지만 한국은 같은 기간 18배 증가했다. 1인당 GDP성장률은 단연 돋보이는 세계 1위였다.9 때문에 세계체제론자들도 대한민국을 예외적으로 주변부에서 반(半)주변부로 상승 이동한 나라로 지목하고 있다.10

군사정권기 한국의 경제성장은 기본적으로 양면성을 띠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를 박정희 대통령의 공(功)과 과(過)로, 빛과 어둠으로, 얻은 것과 잃은 것으로, 양날의 칼로 나누어 가늠하자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양면성은 따로 분리되어 저울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서로 합쳐져 있다. 경제성장의 성공 요인은 또한 그것이 발생시킨 문제의 원인이기도 했다.

한국의 경제성장은 국가주도로 이루어졌다. 국가가 기업을 지도하고 시장을 통제하면서 자원과 자본, 노동을 통제하고 계획적으로 배치했다. 강력한 국가는 성공적으로 기능했지만 비대해졌고 모든 것을 독점했다. 그 정점에 있는 지도자도 엄청난 정치·경제적 권력을 누릴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정치발전은 지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유신체제에서 나타나듯 오히려 후퇴되는 방향으로 갔다. 그 과정에서 광범위한 정치적 억압과 인권침해가 발생했다.

국가는 내적으로는 시장을 통제했지만, 세계시장 차원에서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적응하고 편승했다. 국가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시장논리에 따라 국제경쟁력이 있는 부분부터 집중적으로 투자하는 요소공격식 불균등발전을 추구했다. 물론 이러한 정책이 모두 박정희정권의 정책적 판단과 결단 아래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963년 미국이 개입하여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노동집약적 경공업 분야에 주로 투자하는 것으로 수정한 데서 나타나듯, 여기에는 세계체제의 규정력이 직접적으로 작용했다.

요소공격식 불균등발전은 저임금 경쟁력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노동자, 농민의 희생과 배제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노동자들은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과 저임금, 가혹한 노동통제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이는 지역간의 엄청난 격차를 불러일으켰고, 서울과 지방의 격차도 크게 벌어졌다.

냉전과 분단 변수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경제성장이 궤도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한일회담과 베트남 파병은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동북아지역 통합전략하에 이루어진 한일 관계개선은 군사적·경제적 차원에서 모두 동아시아 반공동맹의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베트남전쟁은 일본, 한국, 대만 등 동아시아 자본주의국가 모두에 경제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한국은 기본적으로 개방형 경제성장 모델을 선택했다. 폐쇄적인 경제체제도 성장을 불러올 수 없지만 산업화 초기부터 무분별한 개방을 했다면 또한 성장이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시장에 접근하여 수출주도형 성장을 하면서도 내적으로는 보호무역정책을 취하면서 수입대체 산업화를 동시에 추진했다.11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이를 허용한 것은 자유진영의 진열장이자 북한과 체제경쟁을 하는 남한에 대한 배려를 빼놓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한일회담은 과거사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정리 없이 한·미·일 보수반공세력이 연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더욱 격화시켰다. 북한은 한일회담 타결을 자신을 포위공격하기 위한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의 구축으로 이해했으며, 베트남 파병으로 더욱 자극받았다. 내부에서 군사모험주의가 대두하고, 1960년대 후반 청와대 습격미수사건(1·21사건),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등이 연달아 발생하면서 한반도에는 군사적 긴장이 심각하게 고조되었다.

남북의 집권층은 이러한 군사적 긴장을 이용하여 각기 유신체제·유일체제를 구축하며 권력을 강화했고, 1971년 남북대화 이후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냉전·반공이데올로기는 군사독재정권 등장 이후에 부차화되거나 발전주의로 대체되기보다는 오히려 발전주의와 결합하여 재구성되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한반도 주민에게 비민주적·비자주적 삶을 강요하는 분단체제는 이 무렵에 더욱 고착되었다.

 

 

4. 민주화, 대한민국 정체성의 새로운 가능성

 

박정희 군사정권은 경제성장에 성공함으로써 단순히 강압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대중적 동의에 기반을 둔 헤게모니적 지배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헤게모니는 결코 완벽하거나 도전받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민주화운동세력은 정치적 억압과 경제성장이 불러일으킨 제반 문제점을 제기하면서 끊임없이 희생을 감당하며 군사정권에 도전했고, 이로 인한 갈등과 정치적 위기가 반복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18년 동안 계엄령을 3번, 위수령을 3번, 정치적 억압을 내포한 긴급조치를 5번 발동했다. 전체 집권기간 중 비상조치하에 있던 날이 그렇지 않은 날보다 더 많았다.

민주화운동은 정치적 민주화를 주된 쟁점과 목표로 했지만 1970년 후반부터 산업화과정에서 소외된 기층세력을 대변하는 민중운동, 민족분단을 타파하려는 통일운동, 한국의 경제·군사적 종속성과 이를 강요하는 근대 세계체제의 규정력을 극복하려는 운동 들과 결합되어갔다. 민주화운동이 제기한 과제는 근대적인 것임과 동시에 또한 그것을 넘어서려는 지향을 내포하고 있었다. 개발독재정권과 민주화운동세력의 쟁투는 1980년 5·18 광주민주화항쟁의 무력진압을 계기로 더욱 첨예화되었다. 마침내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이 발생하고, 이를 전환점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양상을 보였다.

19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는 민주화운동세력이 개발독재세력을 제압하고 기존 체제를 청산하는 방향이 아니라 양자의 타협적 재편, 점진적 이행으로 나아갔다. 때문에 내부적으로는 양 세력의 팽팽한 헤게모니 대립이 진행되면서 정치적 민주화, 남북관계의 개선 등이 점진적으로 때로는 질척거리며 진행되었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대한민국 국민의 정체성도 단지 국가권력이 주조하는 대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밑으로부터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양상은 2002년 월드컵에서 거리를 뒤덮은 응원단이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모습에서 확인되었다. 이때 나타난 정체성은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경험에서 나타난 독특한 형태로,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부심과 정체성에 바탕을 두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반북이데올로기나 통일에 반대하는 정서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월드컵 응원열기에 뒤이은 반미시위에서 나타나듯, 외적 규정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의 독자성·자주성을 추구하는 정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12

그러나 김대중·노무현정권 10년 동안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던 일부 인사들이 권력을 잡았지만 민주화는 기대한 것만큼 진척되지 못했다. 정치적 민주화는 일정한 성과를 얻었지만,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높은 파고 속에서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좀처럼 확장되지 못했다. 세계체제의 규정력은 ‘IMF위기’ 속에서 여전히 강력하게 대한민국을 압도했다. 한국의 민주화는 남북관계 개선으로 연결되었고 남북정상회담이 두번이나 개최되는 등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북한 핵문제에 발목잡혀 있고 휴전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냉전·반공이데올로기를 규율하는 핵심적인 수단이던 국가보안법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국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호명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도 동요하고 있다. 최근 대선과정에서 나타나듯 과거 개발독재시기의 근대화·발전주의 담론을 계승한 ‘선진화’담론이 강력하게 대두했다. 여기에 맞선 세력은 ‘민주·평화’담론을 제시했지만 과거 논리에서 획기적으로 진전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선거결과는 선진화 담론을 주장했던 세력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5. 단계론적 대한민국 성공스토리의 위험성

 

선진화 담론의 주창자들은 최근 결정론적이고 진화론적인 단계론에 입각해서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은 공산화의 위기와 북한의 침략을 이겨내고 건국을 달성했고, 이를 토대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며, 그 결과 민주주의의 물적 토대가 마련되고 중산층이 성장하여 민주화도 성취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선진국 진입이라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것이다. 통일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단계론적 논리를 내세워 ‘선선진화 후통일’을 주장하기도 한다.13

이같은 단계론의 문제점은 그것이 일단 강력한 배제의 논리를 내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는 기본적으로 불가피하게 결정되고 미리 정해진 단계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을 두고 각 정치사회집단이 갈등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다양한 가능성의 갈등과 그 역관계 속에서 어느 한 가능성이 현실화되었다는 것은 다른 가능성들이 희생되었음을 의미한다. 희생된 가능성들과 그로 인한 갈등을 애초부터 실현 가능성이 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고 결정된 가능성만으로 기계적인 단계론을 적용해서 역사를 인식하는 것은, 과거를 현재에 종속시키는 것으로서 역사인식의 협소화를 가져온다.14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과 갈등 들은 역사에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희생된 가능성들은 계속해서 정치·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하고, 저항운동을 통해 표출되기도 한다. 권력을 잡은 집단은 자신들이 주장했던 가능성을 현실로 실현했지만, 이러한 압력을 완벽하게 배제하기는 어렵고 일정부분 수용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역사에서 현실화되지 못한 가능성도 역사발전에 영향을 미친다. 대한민국 60년은 이같은 다양한 가능성의 갈등 속에서 주조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 어느 나라 역사보다도 역동성을 보였고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결정론적·진화론적 단계론에 입각한 역사인식의 또다른 문제점은 근대의 과제로 상호 연결되는 국민국가, 산업화, 민주화를 분리하여 여기에 선후관계를 부여하며,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는 것이다.15 상호 연결성을 갖는 것을 분리해서 서열화하고 선후관계를 확정하는 것은 정치투쟁을 위한 레토릭으로는 효과적일지 몰라도 역사를 인식하는 데는 바람직하지 않다.

이같은 문제점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나타난 ‘선통일 후민주론’ ‘선민주 후통일론’에도 동일하게 지적될 수 있다. 또한 1980년대 급진적 민주화운동의 양대 조류였던 NL(민족해방)론과 PD(민중민주)론의 대립도 마찬가지이다. 민족해방과 민중해방은 상호 연결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NL-PD논쟁에서도 두 과제가 상호 연계성을 잃고 분리되는 양상이 있었다.16 또한 이러한 논쟁들은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과정에서 현실에 대처하는 구체적 실천대안으로 발전되기보다는 급속히 해체되었고, 최근에는 다만 정파적 대립의 근거가 되고 있는 양상이다.

최근 논쟁이 되고 있는 근대와 탈근대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탈근대의 문제는 근대를 완성한 이후에나 생각하자는 논리도 문제이지만, 근대를 온전하게 성취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를 근대에 매몰되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문제이다. 온전한 근대를 성취하는 작업과 탈근대의 과제는 기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다.

이는 분단극복 문제를 생각해보면 잘 드러난다. 남북 어느 한쪽이 무력이나 경제력으로 한 지역의 영토를 다른 지역에까지 확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평화적이고 타협적인 방식으로 통일한다면, 국가연합이든 체제를 달리하는 지역간의 연방제이든 최소한 기존 국민국가체제의 변형이 요구된다.17 이 문제는 근대적 문제이지만 또한 국민국가를 넘어 새로운 정치공동체를 지향하려는 탈근대적 사고가 없으면 풀리지 않는다. 민주화운동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일찍부터 민중운동과 결합해왔고, 단지 정치적 민주화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적 민주화로 확산되는 것을 지향했으며, 나아가 세계체제의 규정력에 도전했다. 이는 근대적 과제이자 또한 이것을 뛰어넘는 과제일 수밖에 없다.

근대의 온전한 내용을 성취하며 여기에 적응하는 것과 근대를 극복하는 작업은 양면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선후관계로 분리할 수 없는 단일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18 국민국가, 산업화, 민주화 등 근대의 과제들이 서로 분리된 채 선후관계를 형성하여 상호 배제하고 근대의 온전한 성취와 탈근대론이 서로를 배제하는 사고가 아직 우리 사회에서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간극이 아직도 우리의 현실과 의식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60주년이 건국, 부국(富國), 민주국가, 선진국으로 이어지는 단계론적 관점의 성공스토리만으로 기념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환갑을 맞이하여 그동안 걸어온 길의 안과 밖을 함께 돌아보고, 실현된 것과 희생된 것들, 그리고 미래의 역사를 향한 다양한 가능성들이 함께 이야기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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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료 대한민국사』 7권, 국사편찬위원회 1974, 811~39면.
  2. 「330인 연명 성명서: 조국의 위기를 천명함」(1948.7), 도진순 『한국 민족주의와 남북관계』, 서울대출판부 1997, 394~96면에서 재인용.
  3.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동노·이교선 옮김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비 2001, 261~306면.
  4. 정병준 『한국전쟁』, 돌베개 2006, 267면.
  5. 장문석 『민족주의 길들이기』, 지식의 풍경 2007, 200면.
  6. 김동춘 『근대의 그늘』, 당대 2000, 185~88면.
  7. 『사상계』 1960년 11월호의 좌담 「한국외교의 조건과 과제」 중 조순승의 발언.
  8. Seuk-ryule Hong, “Reunification Issues and Civil Society in South Korea: The Debates and Social Movement for Reunification during April Revolution Period 1960-1961,”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61 no.4 (November 2002) 1247~53면.
  9. 허수열 「식민지 유산과 대한민국」, 참여사회연구소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한울 2007, 56면.
  10. 지오반니 아리기 외 지음, 권현정 외 옮김 『발전주의 비판에서 신자유주의 비판으로』, 공감 1998, 109~12면.
  11. 이병천 「반공 개발독재와 돌진적 산업화」,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125면.
  12. 박명규 「21세기 한반도와 평화민족주의」, 『다시 대한민국을 묻는다』, 476~77면.
  13. 안병직 「대한민국의 성취를 토대로 해야만 통일도 실현 가능해진다」, 『한국논단』 216권, 2007.
  14. 정창렬 「역사인식의 주제와 역사인식」, 『내일을 여는 역사』 2001년 봄호 43~44면.
  15. 정태헌 『한국의 식민지적 근대성찰』, 선인 2007, 259면.
  16. 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후마니타스 2006, 271면.
  17. 박명규 「복합적 정치공동체와 변혁의 논리」, 『창작과비평』 2000년 봄호 참조.
  18. 백낙청 「한반도에서의 식민성 문제와 근대 한국의 이중과제」,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호 참조. 백낙청은 다른 글에서 자신이 제기한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는 “두개의 동시적 과제들이 아닌 양면적 성격을 지닌 단일과제”이며 “적응과 극복 간의 선·후도 없다”고 명백히 밝혔다. 때문에 ‘이중과제’를 자신의 영문 원고에서는 ‘a double project’라 하여 단수형으로 표기했음을 지적했다. 백낙청 「다시 지혜의 시대를 위하여」,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창비 2006, 115면 각주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