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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진명 李珍明
1955년 서울 출생. 1990년『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으로『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단 한 사람』등이 있음. muwoosujm@hanmail.net
너무 수북한
너무 수북한 떨어진 잎 너무 수북한 떨어진 산새들
바위와 흙길과 침엽을 지나 골짜기
너무 수북한 손뼉들 키스들
밟으면 푹푹 쏟아지는 수북한 무덤들 젖은 나팔들
나팔들 울음에 묻혀 돌아가는 산허리 빈 손뼉 소리
너무 수북한 떨어진 입 너무 수북한 떨어진 구름들
바위와 흙길과 침엽을 지나 골짜기
너무 수북한 빨간 물 물들었던 가을 가을 일기장들
윤희 언니
당신이 생존해 있는지
어릴 때 일찍 하늘아기 되었는지 나는 모릅니다
나보다 아홉살 위라지요
생존해 있다면 甲年을 맞았을 것
나는 왠지 당신이 아주 어릴 때
아기천사 되어 하늘나라 갔다고 생각합니다
은날개 치며 회령산맥 넘어 두만강 푸른 물 위 날아
백두산과 천지를 두 바퀴는 돌아
생명의 原籍 하늘나라로 갔다고 생각하지요
가서는 聖畵 속 여전히 토실하고 발그레한 돌아기로
남과 북 한반도를 매일 하늘 대문 밀고 나와
작은 은날개 재게재게 치며
아버지 어머니 살피러 날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하지요
돌쟁이 당신과
사과알같이 젖이 탐스러웠을 새댁인 당신의 어머니를 두고
잠시 이남으로 피신 갔다 온다고 엄동설한 집을 나서서는
60년 세월 소식 없는
스물둘 젊디젊은 아버지를 이때껏 찾는 중이라고 생각하지요
생존해 계실지도 모를 팔십 노모 당신의 어머니를 역시 근심하느라
함경도 땅 明川 하늘 위에서 더 많이 날갯짓한다고 생각하지요
이북 미수복 지구 함경북도 명천
당신이 돌쟁이일 때 세상은 생난리였지요
6·25 1·4후퇴 38선 휴전선
중공군 인민군 연합군 인천상륙작전 원산항 흥남부두
당신은 돌쟁이일 때 동족상잔의 전쟁판을 다 맞더니
벌써 극단의 정치판에 섰지요
월남가족 반동간나새끼의 쥐새끼 에미나이
당신 윤희 언니
당신과 나는 배다른 형제
당신은 이북에서 아버지를 애기 때 잃었고
나는 이남에서 어머니를 여학교 졸업하며 잃었습니다
당신의 그 어머니는 아직 생존해 계실까요
반동가족의 탄광 같았을 굴헝을 늙도록 견딜 수 있으셨을까요
나는 인내심 많았던 어머니를 잃자
아버지와도 저절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내 어머니 세상 뜨자 아버지는 곧 세번째 연분을 맞았고
나와 아래 동생들은 그 일로서 부자지간의 인연이 다했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놓고 온 북쪽이 뚫리기만을 고대하다
9년 만에 이남에서 다시 가정을 이뤘건만
그렇게 이룬 우리 가정과 가족은 끝끝내 무효인 것이어서인지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세번째 연분을 마치
북쪽에 두고 온 오매불망 당신과 당신의 어머니와
이산상봉이라도 한 듯 혼동하고 싶어한 아버지여서인지
일은 기다렸다는 듯 그렇게 되었습니다
실향과 이산을 겪는 모든 아버지들이 그런 어른들이
다친 뿌리의 상처를 쩌매고 피눈물을 그치며
오늘 이곳의 발아래 모두 어른스러이 일어서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이들도 역시 양친의 무릎 아래서 응석받고 싶은 아기들 아니겠어요
당신이 겪은 교과서에 나오는 6·25와 1·4후퇴를 나는 모르고
내가 겪은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다시 일어난 6·25 찢어진 내 가족사를 당신은 모릅니다
윤희 언니, 나 당신을 보고 싶은 걸까요
이제야 대놓고 부르고 싶은 걸까요
얼굴도 모르면서, 무엇보다 생사도 모르면서
아버지 피 하나 같다는 걸로
(아니요. 피, 핏줄이라는 걸 그리 대단케 생각진 않습니다.
상투적 습관으로 이어지는 무엇일 뿐이라는 생각 크지요)
그보다는 각각 부와 모를 잃은 슬픔 아픔이 같다는 걸로
(하긴 나는 피보다는 인간 보편의 죽음과 불가해한 이별에 대해
알고픔이 많은 사람이긴 합니다)
윤희 언니, 내가 먼저 가겠습니다
함경북도 명천 땅 호남마을 이름난 명사십리로
그곳 모래 곱고 부드럽기 한량없다지요
모래밭 하얗고도 파래 아름답기 그지없다지요
당신은 하늘나라에서 은날개 치며 내려오고
나는 남한 땅에서 상상의 날개 타고 올라갈게요
만납시다
당신은 한살배기 포동한 하늘아기
나는 오십줄에 들어선 서울의 아파트 아줌마
우리 만나면 바로 알아볼 것 같아요
60년 세월의 고난과 고절, 황폐를 넘어
내 아기야, 엄마야, 내 손주야, 할머니야
이런 原音 저절로 발음할 것 같아요
행방불명과 사망신고, 실향과 망향의 온갖 망실로
천길 꺼져버린 물속의 혀가 자신도 모르게
이런 울리는 소리를 토할 것 같습니다
60년 세월은 또 할머니와 손녀의 시간
늙은 손과 고사리 손이 모래밭에 눈 코 입을 그리죠
가운데서는 발 벗은 엄마가 십리 모래사장을 뛰며
끝도 없이 빨래를 펄럭이게 합니다
명사십리 고적한 모래밭 모래알들이 벌써
우리를 映寫시키느라 와글거리는 것 보이네요
아, 참, 윤희 언니, 이런 일 있었어요
맏이인 나의 세살 때까지의 이름은
당신 이름을 그대로 따 붙인 맏윤의 윤희
북쪽에 두고 온 첫아기 당신을 못내 부르고 싶은
젊은 당신 아버지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겠지요
윤희야, 윤희야, 기어다니는 당신을 불렀겠지요
내 이름은 세살 이후 다시 지어졌어요
일찍 죽을 이름이라 갈아주었다 합니다
윤희 언니, 내 이름은 진명이라고 합니다
이름자 알아야 생전 남북이 합쳐지는 기적의 세상에서든
죽어 저세상에서든 찾아볼 수 있지 않겠어요
내가 겪은 아버지의 일로서는
당신 이름을 갓난 나에게 그대로 옮겨 붙인
세살 때까지의 이 윤희 이름에 관한 일이
왠지 가장 서늘했던 일로 기억된답니다
윤희 언니, 우리 각자의 아버지를 넘어 피를 넘어
각자의 모르는 어머니를 넘어
60년 분단 세월을 넘어
아홉살 터울 천지간 자매로만 만납시다
하늘과 땅이 낳은 자매로만 만납시다
명천애기와 서울아줌마로만 만납시다
남북사의 절단과 가족사의 비명
개인사의 피와 고름을 그대로 가지고도
어쩌면 마법의 장소 명사십리 시원의 모래밭에서
늦도록 두꺼비집을 2백개도 더 지으며
두 동그란 머리통 황금노을에 실컷 담가봅시다
당신 것일까
아파트 안을 돌며 조금씩 늙어가는 내 귓전으로
작은 은날개 재게재게 치는 것 같은 소리
명사십리 수많은 모래알들이 밀리는 것 같은 소리
그런 소리 올 땐
베란다로 나가 북창을 열고 멀리 삼각산 이마를 건너다보지요
당신 윤희 언니, 여전히 토실하고 발그레한 돌아기
포동한 한 손을 내 아파트 쪽을 향해 뻗치며
천장의 聖畵처럼 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