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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전상국 全商國
1940년 강원도 홍천 출생.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동행」이 당선되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아베의 가족』 『우상의 눈물』 『온 생애의 한순간』 등이 있음. hongun262@hanmail.net
지뢰밭
죽어도 죽지 않는-2007.9.19
왜 하필 동오골 서낭당이란 말인가. 그 사람이 만나자고 한 장소가 동오골만 아니었어도 이른 아침 집을 나설 때부터 이처럼 마음이 설레발치진 않았을 것이다. 가루고개쪽 두군데 산소를 벌초하는 동안도 허둥지둥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음 어수선하기는 그 사람 전화를 받기 며칠 전 지방방송국 뉴스 화면에 중학교 동창 한기태가 국군 유해 발굴현장의 제보자로 나온 모습을 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오십칠년 전 그 국군 시신에 자기 아버지와 함께 낙엽을 긁어모아 덮어주기도 했다는 당시 열살짜리 한기태의 기억은 의기양양했다. 두개골이 함몰된 상태로 발굴된 유해 옆에는 만년필 한자루가 유일한 유품으로 놓여 있었다. 군번줄이며 인식표가 나오지 않은 걸로 보아 학도병일 수도 있다는 리포터의 얘기를 듣는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육이오 때 실종된 형 생각이 난 것이다.
사실은 텔레비전에서 국군 유해 발굴현장을 본 순간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것이 동오골이었다. 그러고 며칠 뒤 그 사람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오늘 저녁 읍내에서 중학교 동창 몇 사람과 어울리기로 한 것도 어쩌면 그 사람을 만난 동안의 그 긴장을 저녁 술자리의 여흥으로 풀어봐도 괜찮겠다는 내 불편한 속내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 사람 얘기만큼 칠칠한 안주거리도 없을 터.
그나저나 이제 은장봉의 증조부 산소의 벌초를 끝내고 내려오면 그 사람과 만날 시간에 얼추 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마음의 여유일까, 은장봉에 오르기 전 사전 답사라도 하듯 서너시간 뒤 그 사람과 만날 장소인 동오골 고개턱의 서낭당 앞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서낭당의 돌무더기는 허술하다. 사람들의 발길이 그만큼 뜸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허물어져내린 돌무더기 한가운데 우뚝 선 돌배나무 고목은 북어 두어마리와 울긋불긋한 천쪼가리를 매단 채 아직도 그 으스스한 귀기만은 여전하다. 동오골 돌배나무는 오랜 세월 마을 신목으로서의 구실을 해왔다. 그 열매가 실한 해는 벼농사가 흉년이고 나뭇잎만 무성한 해는 비가 많이 오거나 사람이 죽어나간다는 둥 마을의 길흉화복을 점쳤다.
서낭당 돌배나무 고목이야말로 그 생애의 수난이 만만치 않았다. 일제 말기 마을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당집까지 번듯하게 갖췄던 동오골 서낭당이 미신 타파의 첫번째 표적이 되었다. 그 당집을 부숴버릴 때 돌배나무까지 베어버렸던 것이다. 밑동이 잘려나간 돌배나무 밑에서 새 움이 돋아난 것은 해방이 되기 한해 전이었다고 한다. 면소재지 교회 전도사와 함께 신목 자르기에 나섰던 마을 청년 하나가 그해 물에 빠져 죽은 것이 그 일 때문이라는 얘기가 마을에 돌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칠십년대 초에도 동오골 서낭당의 돌배나무 밑동이 도끼날을 받았지만 마을 사람 몇이 상처가 난 자리에 진흙을 바른 뒤 새끼로 칭칭 감아놓자 시치미 뚝 떼고 오늘까지 건재한 것이다.
지방대학 임업시험장에서 동오골 돌배나무 열매를 받아가 발아를 해 배나무 접목으로 쓴다는 말도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동오골 서낭당의 돌배나무는 죽어도 죽지 않는 대 잇기를 하는 셈이다.
전깃줄에 묶인 채
“벌초, 언제 하실 거예요?”
어제저녁 아들이 전화를 걸어왔다. 주말로 날을 잡으면 제 처와 함께 내려와 하루쯤 함께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애써 눙치곤 있지만 그 목소리가 저번과 달리 사뭇 활기차다. 오죽 좋았으면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태기를 동네방네 불고 다녔을까. 아들이 결혼한 지 팔년 만에 며느리의 수태 소식을 전해오던 날 나 역시 이제 됐다 싶던 그 마음 추스르기가 정말 벅찼다.
아들은 그동안 집안의 무슨 일 때마다 큰 죄인이나 된 듯 고개를 꺾고 좌불안석이 되곤 했다. 몇년 전 벌초를 처음으로 함께 해본 뒤로 더했다. 처음 기신기신 따라나설 때만 해도 열두장이나 되는 조상 묘 벌초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벌초를 하는 동안 한 집안의 대 잇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까지 터득한 듯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제 피붙이들 죽음까지 들먹였다.
“큰아버진 몇살에 돌아가셨는데 자식이 없는 거예요?”
그 무덤이 없는 걸 알면서도 아들은 제 큰아버지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했다.
형은 1950년 7월, 나보다 일곱살 많은 열일곱 나이에 행방불명됐다. 춘천 이모집에 가 공부를 하던 형은 전쟁이 한창이던 여름날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간 뒤 그 종적이 묘연했다.
동오골 서낭당 돌무더기의 절반 이상은 우리 할머니의 지성이 담겼을 것이다. 할머니는 끝내 맏손자를 보지 못한 채 여든넷 나이에 세상을 떴다. 그 자식이 돌아오기만을 평생 염원하고 산 아버지 어머니도 이제 모두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이 없다고 해서 형의 실종을 사망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많은 부모가 전사통지서를 받고도 그 자식의 죽음을 믿지 않았다. 그 시신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한 이상 유골함을 받고도 그 자식이 언제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땅에서 실종된 모든 사람들의 생존 가능성이 가장 높은 데가 북한일 터. 이쪽 사람들 마음이 그러하듯 저쪽의 육이오 때의 실종자 가족들 또한 남쪽 땅이야말로 끝까지 미련을 떨쳐버릴 수 없는 유일한 희망일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불현듯 며칠 전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왔을 때도 오십칠년 세월이 한덩어리의 불똥으로 내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느낌이었다. 어제저녁 아들의 벌초 얘기로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은 것도 그 사람을 만날 일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항리 가는 길에 장선생님을 꼭 만나뵙고 싶어서 그러는 겝네다.”
그는 내가 추석을 열흘쯤 앞두고 벌초를 한다는 것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일정에 자기 시간을 맞추겠다는 걸로 미루어 내가 그리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될 만남 같아 그가 원하는 대로 휴대폰 번호까지 알려줬다.
그러나 아내한테는 오늘 그 사람을 만난다는 얘기는 아예 내비치지도 않았다. 며느리의 수태 소식에 아들보다 더 달떠 있는 아내의 새벽기도 제목에 그 어떤 그늘도 드리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버지, 벌초 언제 하실 거냐구요?”
아들이 거듭 다그쳐 물어서야 나는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됐다. 이번엔 나 혼자 다녀올 거니 그리 알거라.”
“아버지, 뭐 마음 상한 일이라도 있으신 거예요?”
내 불퉁스러운 말투가 아들 귀에 걸렸는가 보다. 아들도 나처럼 벌초 때면 저리 마음이 쓰이는 게 분명하다. 그러나 자식이 집안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어린 시절, 다리 하나를 전혀 쓰지 못하는 아버지 대신 집안의 벌초를 도맡아 다닐 때부터 앞으로 이런 일을 대물림해서는 안된다는 마음다짐 탓일 수도 있다.
벌초 얘기만 나와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매년 조상 묘를 혼자 돌봐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도 그렇지만 그냥 벌초 때가 되면 마음이 뒤숭숭했다. 굳이 벌초 문제가 아니더라도 고향마을에 가야 할 일이 생길 경우에 마음 짐짐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마음 밑바닥에 뭔가 도사리고 있다가 고향마을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것들이 한꺼번에 술렁거리며 일어서는 느낌이었다. 어떤 때는 구체적으로 그 막연한 불안감이 내 속에서 숨을 고르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가위눌림으로까지 이어지는 그 현상이야말로 내 속에 깃든 어떤 악령과의 싸움일 수도 있었다.
그나마 교직생활을 하는 동안 이리저리 떠도느라 고향마을을 멀리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고향마을이 지척인 도시에 자리잡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동안 멀리하고 산 고향마을의 일들이 사사건건 마음에 걸렸다. 지금은 몇집 안 남아 있지만 한때 장씨 집성촌이라 연줄연줄 안 걸리는 것이 없었다. 시제 지내는 날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가는 그 당장 문중 어른들한테 안 좋은 소리를 들어야 했다. 고조부 면례 비용을 갹출하는 데 내가 얼마를 냈다는 것까지 속속들이 밝혀졌다.
어느 해엔가 몸이 안 좋아 벌초를 하지 못한 채 추석을 넘겼다. 당장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집안 아재뻘 되는 장영팔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이 사람아, 자식 없는 용재두 무덤은 그렇게 열심히 벌초를 하면서 그래 자네 조상 묘는 그렇게 돌보지 않아두 된다는 겐가.”
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 영팔은 몇년 전부터 용재두 무덤의 벌초를 내가 했다고 넘겨짚어 면박을 줬다.
영팔은 어릴 때부터 심통이 그랬다. 특히 나하고는 살이라도 낀 듯 사사건건 의견이 맞섰다. 타성바지 가난한 집 자식이 장씨네 양자로 들어온 열등감이었는지 문중 일이라면 누구보다 앞장서는 열성을 보였다.
영팔이 말하는 용재두 무덤은 동오골 안쪽에 있다. 그는 내가 은장봉 증조부 무덤을 벌초하기 위해 동오골을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용재두 무덤 벌초 얘기로 내 심사를 긁었을 것이다.
정말 모를 일. 영팔의 얘기를 듣고 올라가본 돌산 기슭의 용재두의 무덤은 깔끔하게 벌초가 돼 있었다. 지금쯤 그 흔적을 어림잡기도 힘들어야 할 판에 오히려 그전보다 봉분이 더 붕긋이 솟은데다 주변의 잡목까지 쳐내 용재두의 무덤은 동오골 돌산 기슭의 어느 무덤보다 번듯했다.
수항리 누구도 용재두 무덤에 벌초를 했다는 사람이 없고 보니 매년 벌초 때가 되면 그 일이 화제가 되곤 했다.
용재두는 원래 수항리 사람이 아니었다. 여름전쟁이 나기 한해 전인가 달랑 빈 몸으로 마을에 나타났다. 용재두의 사고무친한 신세 이야기는 훨씬 나중에야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입을 통해 조금씩 알려졌다. 용재두는 삼대독자로 어렵게 자식 하나를 뒀는데 어느날 집에 불이 나 아홉살인 그 아들이 죽었다고 했다. 불 탄 자리에서 아들 주검을 수습하고 보니 손이 전깃줄에 묶여 있더란 것이다. 용재두한테 원한을 가진 사람이 불을 지르기 전 그 아들을 그렇게 묶어놨다는 얘기였다.
“그 사람, 그 얘기할 때 보니까 눈에 핑핑 살기가 돌더라구.”
“왜 안 그러겠어. 아들 죽자 그 일로 마누라까지 도망을 갔대요.”
그 시절 용재두의 형편을 누구보다 깊이 헤아리고 있는 사람이 우리 아버지였다. 무슨 일론가 용재두의 고환 한짝이 잘려나가 더이상 자식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도, 그가 여름난리가 나기 직전까지 말만 들어도 빨갱이들이 오줌을 설설 쌌다는 서북청년단 단원이었다는 사실까지도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용재두가 죽자 그 무덤을 동오골 안쪽에 있는, 마을의 공동묘지나 다름없는 돌산 기슭에 쓰게 한 것도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해 농사일을 잘하지 못하는 대신 마을 사람들의 어려운 일을 도맡아 처리해주는 역할을 했다. 마을에 가끔 생기는 송사며 객지 나가 사는 자식들한테 문안편지 대필해주기, 심지어는 제사 때 쓸 축문까지 아버지한테 받아가는 집도 있었다.
용재두는 한때 우리 집 식솔로 머물기도 했다. 우리 할머니를 어마이, 어마이 하며 자칭 수양아들 행세를 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몇해 전부터 용재두 무덤을 돌보고 있는 사람이 나라고 장영팔이 넘겨짚을 만도 했다.
“아무튼 용재두 그 사람 죽어서까지 수수께끼라니까. 어려서 죽었다는 그 아들 얘기만 해도 그렇지……”
당시 마을 사람들 입에 용재두의 아들 얘기가 심심풀이로 오르곤 했다.
두 손이 전깃줄에 뒤로 묶인 채 불타 죽었다는 용재두의 그 아들이 어딘가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얘기였다. 용재두가 죽었을 때 그 매장 신고를 하는 과정에서 그때까지 그 아들 이름이 호적에 그대로 남아 있는 걸 확인한 뒤부터였다.
용우성. 호주 용재두 이름 밑에 분명 그 아들 이름이 올라 있었다고 한다. 더 놀라운 일은 내가 학교 선생을 하다가 입대하던 바로 그해 용우성 이름의 입영통지서가 수항리 이장 집으로 날아든 일도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용재두가 살아 있을 때라 그 입영통지서를 받아 자기 나름으로 처리를 했을 것이다. 문제는 그후에도 용재두가 끝까지 아들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가 있겠나.”
삼대독자에 이제 더이상 자식을 생산할 수 없는 그의 처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었다. 무자식 서러움이 저리 지극하니 저승에 간 그 자식이 감복해 벌초를 하는 모양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ㅎㅎㅎ…-2002.9.20
굳이 따지자면 그것이 그 사람과의 두번째 만남이 될 것이다. 내가 교직생활 40년을 마친 오년 전 그해 가을이었다. 그 두번째 만남에서 용재두 무덤의 벌초건 수수께끼가 풀린 것이다.
그해 은장봉 증조부 묘 벌초를 끝내고 내려오는 길인데 동오골 안쪽 돌산 기슭의 용재두 무덤 쪽에 사람 기척이 있었다. 올라가 보니 거기 그 사람이 분무식 살충제 통을 들고 서 있었던 것이다.
“가을 벌이 정말 무섭습네다. 조심하느라고 했는데도 한방 쏘였지 뭐야요.”
용재두의 무덤 앞에 깔린 왕골 돗자리 위에는 그런대로 조촐한 제물까지 차려져 있었다.
“벌써 다 끝내셨구먼요.”
“멀리 살다 보니 성묘두 제대루 못 옵네다.”
벌초 겸 성묘를 왔다는 뜻일 게다. 캐주얼한 나들이 차림이라 한눈에 그 나이 가늠이 쉽지 않았지만 얼굴에 새겨진 풍상으로 미뤄 칠순은 실히 돼 보였다. 그 사람은 무슨 작정이라도 한 듯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뚜렷한 얼굴선에 크고 서늘한 눈 탓일까, 쉽게 넘볼 그런 인상이 아니었다.
“여기 묻힌 분하고는 어떤 관계신지……”
단도직입, 작정하고 물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너무 뜻밖이었다.
“장효식 선생님이 맞습네까?”
무람한 말투이긴 해도 워낙 졸지에 불린 내 이름이라 망연자실한 사이 그 사람이 다시 말했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네다. 그동안 교육계에 몸담고 계시다가 올해 정년을 맞으셨다는 것까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다시 만나리라곤……”
나는 너를 이미 잘 알고 있다…… 이거 아닌가. 허허, 수인사치고는 정말 고약했다.
“구면이라면…… 제가 기억을 못하고 있는 거군요.”
“ㅎㅎㅎ, 그 만남이란 게 워낙 험악한 경황중의 일이라서……”
그 순간 마주하고 서 있는 그 사람의 훤한 얼굴에 섬광처럼 겹치는 또다른 얼굴 하나가 있었다. 순간적이긴 했어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여자 인민군의 그 강렬한 눈빛. 어린 나이에 각인된 그네의 그 눈빛이 평생 나를 따라다녔다면 그걸 누가 믿을 것인가.
나는 앞에 서 있는 사람의 눈길을 용재두의 무덤으로 이끌었다. 이제 묻지 않아도 그가 모든 것을 말하리라.
“그렇습네다. 내가 여기 누워 계신 분의 아들이야요.”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용재두 아들이라고? 용재두 아들이 정말 살아 있었단 말인가.
사고무친한 용재두의 인생 말로는 정말 비참했다. 어느 땐가 여자 하나를 데려다 같이 산 적이 있었으나 그가 풍을 맞아 쓰러지자 도망을 가버렸다. 풍 맞은 다리를 질질 끌면서 장거리에 나와 먹을거리를 챙겨 집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다 떨어질 때까지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가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도 마을 사람 하나가 우연히 그 집 앞을 지나가다가 송장 썩는 냄새를 맡고서였다.
“제가 알기로 용재두씨는 살아 있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분 아들로 살고 있는 거야요.”
“하긴 이 산소에 누가 벌초를 하나 그게 궁금했습니다.”
용재두씨가 호적에 그냥 남겨두고 산다던 그 아들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그 사람을 본 순간의 그 직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서둘러 확인하고 싶었다.
“저를 언제 보셨습니까?”
뭔가 열없어하는 그런 웃음기가 그 사람의 얼굴에 번졌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그때 얘길 하기가 좀 그렇습네다.”
낌새로 보아 그 사람이 얘기를 쉽게 풀어낼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아래편 골짜기로 눈을 옮겼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 망초 무성하던 오십이년 전의 그 비탈밭이 아까시나무와 시닥나무가 제멋대로 자라 산과의 경계를 잃은 채 그대로 숲이었다.
이곳에 올 때마다 그 비탈밭을 애써 외면하며 지나쳤다. 그렇게 외면했다고 해서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직접 내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상상은 한결 자유분방할 수밖에 없었다. 열살 때의 기억이다. 그 기억은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더 깊이 각인되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기억의 원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 모르는 일이우. 전혀 기억에 없다니까. 그 말 한마디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요? 누가 그렇게 묻는다 해도 하릴없이 그냥 고개나 주억거릴, 그렇게 오랜 세월 저쪽에 있었던 일이다.
“내 기억에 그때 장선생님은 열살도 채 안됐을 게야요.”
그 사람은 그 어떤 회한도 담기지 않은 담담한 목소리로 오십이년 전 건너편 언덕 묵밭에서의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끄엉. 장끼 한마리가 돌산 건너편 그 숲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날아올랐다.
날씨 맑음. 오십이년 전, 내가 열살 때 바라본 그 가을 하늘이다.
“저 아래 서낭당 있는 데서 장선생님을 만났습네다.”
나 말고 또다른 아이 하나도 그때 거기 있지 않았느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서낭당의 그 일로 영팔이와 티격태격 다툰 적이 있었다. 그날 일에 대한 두 사람의 기억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영팔이와 함께 동오골 서낭당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영팔은 그 사실을 철저하게 부인했다. 그날 자신은 수항리에 있지 않고 다른 마을에 있었다고, 된재 너머 벽제동이란 지명까지 들먹이며 우겨댔다. 더구나 그는 자신을 장씨 집에 양자로 보낸 자기 생부가 급성늑막염으로 죽어 그 장사를 치르기 위해 거기 가 있었다는 말로 내 기억을 무질렀다.
그때 내 눈과 마주쳤을 그 눈길 하나가 오십이년의 세월 이쪽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이 골짜기에 몇 사람이나 끌려왔습니까?”
역습의, 뜬금없는 내 질문에 그 사람이 좀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그때 동오골에 묻힌 인민군 패잔병들의 숫자에 대한 기억은 사람들마다 모두 달랐던 것이다.
내 기억 속에 새겨진 숫자는 스물이었다. 그때 거기서 살아난 두 사람을 합치면 스물둘. 그 스물둘보다 더 많은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면사무소 소재지 쪽으로 통하는 말무더미고개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면소재지로 가야 할 행렬이 갑자기 동오골로 방향을 꺾으면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끌려가던 인민군들이 뭔가를 예감한 듯 그대로 길바닥에 주저앉는가 하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통에 행렬이 잠시 질서를 잃었다. 결사대 대원들이 곧 소란을 진정시킨 뒤 인원 점검을 했다.
스물둘, 이상 무! 권총을 찬 용재두 대장을 향해 결사대 대원 하나가 보고를 했다.
그러나 장영팔은 그 일로부터 사십몇년의 세월이 흐른 뒤 자신이 그 현장에 있지 않았다면서도 그 숫자에 대한 주장은 단호했다.
“스물둘? 웃기고 있네. 학교 선생이 그런 머릴 가지고 어떻게 아이들한테 산술을 가르치냐. 스물둘이 아니라 백명이여, 일백명.”
기억의 이러한 굴절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따져 생각해보면 그것은 마을 결사대가 인민군 패잔병들을 마을 학교에 집단으로 수용하기 전에 각 마을에서 자의적으로 잡아 처치한 그 숫자까지를 모두 합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날 그 사람은 동오골에 끌려가 죽은 사람들의 숫자에 대해 묻는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왜 상엿집에서 도망을 쳤는지, 그뒤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인지, 그때 함께 도망쳤던 그 여자 인민군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런 걷잡을 수 없는 궁금증을 나한테 숙제처럼 던져놓은 채 그 사람은 불현듯 저녁에 서울에서 중요한 약속이 있다면서 서둘러 동오골을 떠났던 것이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아내에게 내 열살 적 고향에서 있었던 그 일 얘기를 했다. 그 사람 만난 얘기에 이르자 아내는 다짜고짜,
“그 사람, 간첩이 분명해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시골 분교장에서 부부 교사로 있을 때 아내는 아이들이 산에서 주워온 붉은 전단 한장을 교재 속에 넣고 있다가 그게 신고가 돼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낫으로 찍어 죽인-1950
신작로도 없는 우리 마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기는 처음이었다. 인제 쪽에서 아홉살이고개를 넘어온 사람들은 모두 지게에 올망졸망한 보따리를 짊어지거나 쇠등에 어린아이들을 태우고 허둥허둥 마을을 지나갔다.
전쟁이 났다고 했다. 빨갱이들이 벌써 서울까지 점령했을지 모른다고, 그들에게 잡히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한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은 지난해 상남은 물론 화천면 야시대에 무장공비가 나타나 사람들을 수십명 무참하게 죽였다는 소식을 통해 빨갱이 얘기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우리 마을 사람들도 서둘러 피란길에 올랐다. 그러나 우리 집은 사정이 달랐다. “난 안 간다.” 할머니가 완강하게 피란 가는 일을 마다했기 때문이다. 춘천 이모집에 가 공부를 하고 있는 형이 그때까지 소식이 없는 상황에서 집을 비우고 떠날 할머니가 아니었다.
할머니만 집에 달랑 남겨놓고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다리를 심하게 저는 아버지는 험한 고갯길에서는 영팔이네 소가 끄는 달구지에 올랐고 어머니와 나는 피란 보따리를 이고 지고 피란민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러나 우리 마을 사람들은 집을 떠난 지 사나흘 뒤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겨우 읍내를 벗어난 신작로 위에서 누르께한 빛깔의 낯선 복장을 한 인민군을 만났던 것이다. 인민군들은 길을 가로막고 이제 좋은 세상이 왔으니 걱정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피란민들은 인민군들을 실어 나르는 낡은 트럭이 일으키는 신작로의 흙먼지와 기름 냄새를 맡으며 다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길에서 만난 인민군들은 소문과 달리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더구나 자기 키보다 긴 총을 가슴에 안고 길가에서 쉬고 있는 인민군들 중에는 우리 형 또래의 앳된 얼굴들이 많았다. 어떤 할아버지가 나이 어려 보이는 인민군한테 다가가 몇살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인민군은 몸을 발딱 일으키며, 우린 인민의용군이야요 했다. 애티 나는 목소리와 그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본 뒤부터 나는 인민군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보니 마을 분위기는 그게 아니었다. 북쪽에서 내려온 인민군들이 마을에 하나도 없는데도 마을 남자 어른들이 모두 산속에 숨어 살았다. 인민군이 아닌, 붉은 완장을 찬 리인민위원회 사람들 몇명이 마을 전체를 으스스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도 리인민위원회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아버지가 마을 사람 누군가의 땅 문제로 생긴 송사를 봐주다가 패소한 일에 대한 추궁은 물론 춘천에 가 공부하고 있는 형이 왜 돌아오지 않고 있는가 등을 주로 따져 묻더란 것이다.
면소재지 초등학교 선생으로 있던 윤재복이가 리인민위원회 위원장, 장구장네 소작인인 박시경이 농민위원, 읍내 정미소에서 일하다가 고향에 돌아온 조운골 김동호가 청년위원을 맡고 있었다. 면내무서에서 파견 나온 박봉배와 최은수가 구구식 장총까지 들고 보초를 서고 있어 리인민위원회 분위기가 사뭇 삼엄했다.
리인민위원회 사람들이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날 무렵 위장병을 고치기 위해 기린 약수터에 머물고 있던 수항리 출신 읍내 경찰서 순사 한 사람과 즘말 천주교 공소에 숨어 살던 유병태란 젊은이를 색출해낸 것이다. 인민반동분자로 몰린 두 사람은 면 내무지서로 끌려가는 도중 도망치다가 잡혀 그 자리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고 했다. 게다가 휴가를 나와 집에 숨어 있던 와야리의 국방군 특무상사 함기환을 잡아 그 자리에서 낫으로 찍어 죽인 일로 마을 사람들은 리인민위원회 사람들과 눈 맞추기도 두려워했다.
그해 여름, 인민군이 남쪽 부산인가 어딘가를 빼고는 다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리인민위원회 사람들의 위세가 하늘을 찔렀다. 인민의용군을 징집하기 위해 집집을 돌았다. 춘천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는 우리 형을 의용군에 자원입대시키라고, 청년위원 김동호가 아버지한테 으름장을 놓았다. 김동호는 우리 어머니쪽 일가붙이로 아버지가 읍내 정미소에 일거리를 찾아주었던 사람이다.
“이 사람아, 충식이는 이제 겨우 열일곱이네. 그 나이에 뭔 의용군인가.”
“매형 동무, 동무는 우리 인민군 동무들도 못 봤습니까. 열여섯살인데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총을 들고 뛰쳐나왔다 그겁니다.”
군인민위원회 높은 사람들이 수항리에 다녀간 뒤 리인민위원회 사람들의 말투가 달라졌다. 동무란 말을 많이 쓰는 것부터 그랬다.
“사둔 할머이 동무, 큰손자 돌아오면 숨기지 말고 곧 연락해야 합니다.”
그러자 우리 할머니가 김동호 손을 잡고 애원을 했다.
“사둔 총각, 우리 충식이 대신 쟈를 데리구 가면 안될까유.”
“사둔 할머이 동무, 효식이 쟈가 이제 열살인데, 그건 안되지요.”
“그럼 우리두 안돼유. 우리 충식인 장씨 집안 이십칠대 종손이라서 절대 안돼유.”
큰손자에 대한 할머니의 집착은 정말 대단했다. 내가 태어나던 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마 그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일이며 내가 태어나던 해 삼대독자인 아버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치게 된 일은 물론 형의 잦은 병치레까지 모두 내 탓으로 돌렸다. 내가 태어나면서 집안의 대 잇기가 풍랑 위의 쪽배처럼 위험하다는 절골 극락암자의 보살 말을 그대로 믿고 있는 할머니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너무 당연했다.
형이 어릴 때부터 객지에 나가 공부를 하게 된 것도 형제가 멀리 떨어져 살아야 형의 명줄이 길 거라는 보살의 말을 할머니가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효식아, 네가 여기서 망을 봐라.”
장거리 쪽에서 사람이 올라오는 기색이면 지체 말고 두 손을 모아 뻐꾸기 소리를 내야 했다. 그 여름이 끝날 무렵 우리 집에서 수상한 일이 꾸며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을 장터에서 많이 외떨어져 있는 은장봉 자락 동오골 입구의 우리 집이 그런 일을 꾸미기에 아주 제격이었을 것이다.
대한구국청년결사대. 어마어마한 이름의 결사대가 우리 집에서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은장봉에 숨어 지내던 마을 사람 몇이 우리 집에 내려와 라디오 수신기를 통해 전세를 파악하는 정도였다. 전쟁이 날 때 육군통신학교 인사과에 있던 조연규가 몰래 숨겨 가지고 나온 성능 좋은 라디오 수신기가 전쟁 상황을 시시각각 알렸던 것이다. 그때 우리 집에 야밤을 타 모이던 사람들은 서북청년단 대원이었다는 용재두, 통신학교 인사계 조연규, 육사단 칠연대에 있다가 그해 막 제대했다는 양승호와 육군 낙오병 최수형 등 네명이었다.
형이 집에 돌아오지 않은 일로 어머니와 늘 부딪쳐 화병이 난 할머니가 읍내 고모네 집에 가 있는 동안 그 일이 꾸며졌던 것이다.
마을 결사대가 보유한 무기는 아홉살이고개 너머 상남 어느 집에 일본군이 버리고 간 구구식 장총에다 용재두가 몸에 항상 지니고 다닌다는 총알도 없는 공갈 권총과 낙오병 최수형이 여차하면 자살하려고 몸에 품고 있다는 수류탄 한개가 전부였다.
결사대가 일을 벌인 것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 탈환이 눈앞에 왔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였다. 거사 날짜를 서둘러 잡은 데는 리인민위원회가 색출해 처치할 마을 사람들 명단이 곧 면 내무서에 전달될 것이란 정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리인민위원회 면 내무서 파견병 하나가 면사무소 소재지로 나간 바로 그날 일이 벌어졌다. 복골 오흥춘이 리인민위원회 사람들을 자기네 동네 외진 골짜기로 불러올렸다. 때마침 그 골짜기에 피란 나가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 하나가 있었다. 담근 술이 잘 익었다는 오흥춘의 말에 리인민위원회에서 술안주 만들라고 닭 한마리까지 올라왔다. 미리 잠복해 있던 결사대 대원들이 방문을 박차고 뛰어든 것은 리인민위원회 사람들이 첫 술잔을 돌리기도 전이었다.
그들을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죽였는가에 대해서는 뒷날 들리는 얘기들이 모두 달랐다. 아무튼 그날 윤재복 위원장 등 네 사람이 복골에서 결사대 대원들에 의해 죽은 것만은 분명했다. 읍내에 나간 내무서원 한 사람도 수항리로 돌아오는 도중 길목을 지키고 있던 결사대 대원들에 의해 처치됐다.
결사대 대원들은 리인민위원회 사람들을 처치한 뒤 일단 산으로 몸을 피했다. 면인민위원회 사람들이 그날 오후에 수항리에 올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어서야 결사대 대원들이 복골에 내려와 보니 시체가 세 구밖에 없었다.
총을 맞은 윤재복이 터져나온 창자를 움켜쥐고 장거리 자기 집까지 내려갔던 것이다. 그날 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가슴을 벌벌 떨면서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윤재복이 밤새도록 내지르는 비명 사이사이로 어서 죽으라고 욕을 퍼부어대는 윤재복의 어머니의 악에 받친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윤재복의 처와 두살배기 아들은 그날 밤 마을에서 사라졌다. 자칫하면 손이 끊길 수도 있다는, 재복 어머니의 결단이었을 것이다.
날이 훤하게 밝아서야 윤재복의 비명이 그쳤다. 윤재복의 동생 윤재천이 읍내에서 달려온 것은 그날 저녁때였다. 재천은 우선 죽은 자기 형의 시신을 장거리에 내놓고 소리소리 고함을 질러댔다. 산속으로 몸을 피한 결사대 대원들이 내려오지 않으면 군 내무서 사람들을 불러다가 그 가족을 모두 죽인다고 했다.
그즈음 인민군들이 띄엄띄엄 마을에 나타났다. 재천이가 자기 형의 주검을 장바닥에 내놓고 날뛰는 그 시간에도 인민군 네댓명이 마을에 나타났다. 재천이 그 인민군들을 붙잡고 마을에서 있었던 사건을 알렸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날 인민군들은 마을을 거쳐 북쪽으로 조용히 사라졌을 뿐이다.
그 다음날은 꽤 여러명의 인민군들이 줄레줄레 마을에 나타났다. 낙동강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린 뒤 후방의 다른 부대와 교대하는 중이라 했지만 행색은 전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장거리 여러 집에 분산돼 점심을 먹었다. 밥값 대신 군표를 내놓았다. 전쟁이 끝나면 그 수십배로 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은 윤재복의 동생 재천이 펄펄 기가 산 것도 그날이었다. 마을에 온 인민군 군관동무 중 한 사람이 여름전쟁이 나기 전 춘천에서 부대원을 이끌고 월북한 표소령의 부하로, 그는 강원도 지리에 밝은데다가 자기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수항리 금광에서 일을 했다는 그 연고만으로도 재천이 말한, 마을 결사대의 일을 그대로 지나칠 리 없었던 것이다.
마을이 온통 아수라장이 됐다. 재천이가 인민군들과 함께 결사대원들을 잡는다며 집집을 뒤졌던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우리 아버지마저 은장봉으로 숨은 뒤라 마을에는 나이든 어른들이 하나도 없었다. 중풍으로 쓰러져 누운 마을 노인들은 물론 열살 또래의 남자아이들도 모두 장거리에 끌려나왔다. 우릴 모두 죽일 거래. 장영팔이 내 귀에다 대고 소곤거렸다.
끌려나온 아이들 중 나이가 가장 많은 것은 통신학교 인사과 조연규의 외아들 정호였다. 조연규는 삼대독자로 열다섯에 장가를 가 사대독자인 정호 하나를 낳았던 것이다. 열네살에 결혼을 한 정호는 자기보다 아홉살이나 더 많은 색시까지 있었다.
장거리는 온통 울음바다였다. 재천이가 핏발 선 눈을 번뜩이며 결사대가 숨은 곳을 대지 않으면 모두 총살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재천의 뒤에 선 인민군들이 장총을 들어 노리쇠를 철걱거리자, 잘못했다고, 제발 살려만 달라고 마을 사람들이 울부짖었다.
인민군들은 재천이 시키는 대로 끌고 온 마을 사람들을 탑둔지 언덕까지 끌고 가 죽 늘어 앉혔다. 그 지점이면 은장봉 등 마을 주위 산에서 다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인민군들은 은장봉을 향해 따발총을 쏘아댔다. 산속에 숨어 있는 결사대 대원들이 들으라는 시위였을 것이다. 인민군들은 총소리에 놀라 아우성치며 울부짖는 마을 여자들까지 모두 땅에 꿇어 앉혔다.
그날 탑둔지 언덕에서 조연규네 집안의 사대독자 정호와 특무상사 함기환의 아버지 함동구 노인이 죽었다. 윤재천이 두 사람을 결사대 대원이라고 지목했기 때문이다. 정호는 인민군이 쏜 총에, 며칠 전 큰아들까지 잃은 함동구 노인은 죽은 자기 형 복수를 한다며 재천이 인민군한테 빌려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정호 할머니가 탑둔지 언덕까지 달려와 죽은 손자를 끌어안고 울부짖다가 까무러쳤다. 그날 인민군이 마을을 떠난 뒤 우리 어머니도 나를 끌어안고 오래오래 울었다. 형을 찾아 나선 할머니한테서 그때까지 아무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육순도 못 넘긴 채, 할머니보다 먼저 저세상에 간 우리 어머니는 죽는 그날까지 눈을 떠도 감아도 열일곱살 당신 아들이 정호처럼 총을 맞아 앞으로 꼬꾸라지는 그 끔찍한 환상에 몸을 떨었을 것이다.
그날 인민군들이 마을을 떠날 때 리인민위원회 위원장 윤재복의 동생 재천이도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큰아들을 애막골 산비탈에 파묻은 재천 어머니는 한사코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그 일을 두고 마을 사람들이 입을 비죽거렸다. 저 여편네 언젠가 세상이 다시 뒤집혀 재천이놈이 모시러 올 때만 기다리고 있는 게야.
그 믿음 때문이었을까, 쏟아져나온 창자를 끌어안고 큰아들이 죽던 밤 그렇게 매몰차게 욕을 퍼대던 재천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보다 이십년 넘게 더 살았다. 죽으면 거기 묻어달라고, 수십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애막골 큰아들 무덤에 올라가 그 무덤 옆에 맨손으로 구덩이를 팠다. 자신이 판 구덩이에 묻히는 그날까지도 재천 어머니는 작은아들은 물론 큰아들 죽던 그 밤에 마을을 떠난 며느리와 손자 소식을 끝내 듣지 못했다는 얘기가 오랫동안 마을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1997.8
내가 고향 수항리 마을 초등학교 교감으로 있을 때다. 여름방학 때 지방대학 국문학과 학생들이 이틀 동안 학교에서 묵어갔다. 현대문학 답사반이라고 했다. 주로 그 고장 출신 문인을 찾아 그 생애와 작품세계를 알아보는 일 외에 문학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곳이나 작품의 소재가 될 만한 마을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채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작은 마을이 어떻게 동학혁명에다 기미년 만세운동에까지 깊이 연루됐는지 그게 궁금했습니다.”
시를 쓴다고 자기소개를 한 답사 지도교수는 비록 이 마을 출신 문인이 없는데도 이곳으로 답사를 나오게 된 경위부터 얘기했다. 특히 내가 문학에 대해 문외한이라는 것을 확인한 듯 주로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을 그 체험 세대인 마을의 나이 많은 어른들을 통해서 듣고 싶다는 것을 강조했다. 마을에 오랜 세월 전해지는 전설이나 설화 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많이 바뀌어 그 원형을 찾기 어렵다며 그동안 답사를 다니면서 겪었던 일 하나를 얘기했다.
어느 마을에선가 학생들이 말을 잘한다는 마을 노인 한 사람을 모셔놓고 채록을 했다. 두시간 이상 마을에 전해지는 이런저런 전설을 실감나게 얘기해놓고는 “이거 전부 얘기책에서 읽은 거야”라든가 “이거 텔레비 드라마에서 본 거야”라고 해 그만 김이 샜다면서, 전설의 원형 찾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강조했다.
“또 하나, 제가 학생들과 함께 답사를 다니면서 절실하게 느낀 건 시골 사람들의 외지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이었지요. 일종의 피해의식일 수도 있는 그런 폐쇄성은 특히 분단 전후에 있었던 마을의 비극적인 일에 대해 얘기할 때 더 심했지요.”
특히 분단 전후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채록하는 과정에서 아직도 남과 북의 냉전은 진행형이라는 것, 그리하여 그 당사자들이나 후손들이 아직 마을에 살아 있는 한 있었던 일에 대한 진실 밝히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어느 순간 뒤바뀌는 것이 전쟁이니까요.”
이러한 내 완곡한 표현을 시인 교수가 대뜸 읽어냈다.
“교감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세상이 또 어떻게 바뀔지 그걸 겁내고 있었다니까요. 그러니 얘기가 은폐되거나 왜곡될 수밖에요. 말을 잘못했다가 자신이 당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아직도 마을에 살고 있는 그 당사자들 입장을 많이 생각하고 있더란 그런 얘깁니다.”
시인 교수는 그럴수록 마을에 있었던 일의 정확한 증언과 그 채록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느덜 어제저녁 복골이라는 데서 만났던 그 할아버지 생각나지. 다른 사람들은 다 그 문제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하는데 그 노인만은 아주 세세하게 그때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잖아.”
학생들이 교수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학생 하나가 수첩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수항리 1구 복골마을 팔십구세 오흥춘 노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우리가 갔을 때 지팡이로 문지방을 땅땅 치고 있던 그 노인 얘기가 얼마나 실감났느냐 그거야. 그런 걸 채록해두어야 나중에라도 느덜이 전쟁 얘기를 소설이나 씨나리오로 쓰더라도 실감있게 쓸 수 있다 그 얘기야. 느덜이 게임으로 하는 그런 전쟁놀이와 완전히 다르다는 걸 그 노인 얘기를 들으면서 모두 확인했잖냐.”
“교수님, 그런데 그 할아버지가 망령이 심하다고 마을 사람들이 그랬잖아요. 정말 어떤 부분에선 많이 헷갈렸어요. 그 따님을 보고 어머이라고 부르는 것만 해도 치매 환자가 분명했어요.”
“인마, 치매의 특징이 최근의 일은 잘 기억하지 못해도 아주 오래된 일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거라는 거 몰랐냐? 느덜이 듣고 싶었던 게 바로 그 치매 노인 기억 속에 각인된 옛날 그 얘기였잖아. 그러니까 그 노인의 말은 마을 사람 누구의 것보다 채록 가치가 크다 그런 얘기야.”
모교로 교감 발령을 받은 그해 인사차 복골 오흥춘 노인을 찾아갔다. 오흥춘 노인은 하나 있던 아들을 저세상에 먼저 앞세워 보낸 뒤 객지에 시집가 살다가 혼자가 된 딸 복순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복순은 나하고 초등학교 동창이다.
“우리 아부지 제정신이 아니니까 너무 많은 얘길 시키지 말어. 어떤 땐 생사람 잡을 소릴 막 한다니까. 마을 사람 누가 누굴 어떻게 죽였다는 걸 당신이 모두 본 것처럼 얘길 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그 얘길 들으면 우리 아부질 가만두겠어?”
내가 찾아갔을 때 오흥춘 노인은 사랑방 문턱에 앉아 지팡이로 문지방을 두드리고 있었다. 밥을 빨리 가져오란 독촉이라고 했다. 밥 먹을 시간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낙일 터. 벽에 걸린 시계만 쳐다보고 산다고 했다. 시곗바늘이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12자에만 가면 지팡이로 문지방을 두드린다는 것이다. 일부러 벽시계 건전지를 빼낸 뒤 시곗바늘을 12시에서 멀리 놓았다. 그러나 며칠간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그것도 잠시, 요즘에는 아예 시도 때도 없이 문지방을 두드려댄다며 고개를 내젓는 복순의 얼굴 그늘이 말이 아니었다.
“암호, 이눔아, 암호부터 대라 그거여.”
오흥춘 노인은 마주 앉기가 급하게 암호가 뭐냐고 다그쳤다. 복순이 말에 의하면 자기 아버지가 몇년 전 훈련 나온 군인들이 마을 근처 산에 며칠 진을 치고 머물다 간 뒤부터 육이오 때의 그 기억들을 새록새록 떠올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총이 한자루밖에 없었어야. 총알두 세발뿐이구. 그래두 방문을 밀치고 들어서면서 대뜸 윤가놈 가슴팍에다 총을 들이대고 쏜 거지, 근데 그게 나중에 보니까 가슴이 아니라 배때기루 총알이 뚫구 나간 거였어야. 좌우지간 윤가놈이 눈을 허옇게 뒤집어쓰고 넘어지면서 즈 어머이를 부르는 게야. 어머이, 어머이, 나 죽어유. 그렇게 즈 어머일 부르다가 꼬꾸라졌는데 글쎄 그눔이……”
이것을 누가 고령의, 망령 든 노인의 기억으로 생각할 것인가. 게다가 한창때의 그 걸쭉한 입심도 여전했다.
“다른 눔들은 모두 괭이루 낫으루 쳐죽였어야. 우리가 봐두 그게 너무 끔찍하고 무서웠어야. 여북하면 그 일을 하다 말구 모두 산으루 도망을 쳤겠어. 총을 쏜 용대장두 우리가 모두 내빼니까 저두 어쩔 수 없이 따라오데야. 아, 그래놓으니까 윤재복이가 터져나온 밸 창잘 끌어안고 장거리 즈집까지 기어갔잖은가 그 말이여.”
그러나 오흥춘 노인은 자신이 그 사람들을 복골에 유인해 올린 일이며 그 흉가가 된 빈집을 불태워 없앨 때 산불까지 냈던 일 등은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그날 나는 오흥춘 노인을 통해 동오골 사건을 좀더 분명히 알고 싶었다.
“아저씨, 그때 동오골 일 때두 거기 계셨지요?”
“이게 누구여?”
오흥춘 노인은 생판 딴 사람을 만난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눔, 너, 탑둔지 장병선이가 맞지?”
오흥춘 노인은 나를 우리 아버지로 혼동하고 있었다.
“아저씨, 저는 장병선씨 둘째아들 효식이에요. 복순이하고 학교 동창입니다.”
“장병선이 이눔, 니눔이 겁쟁인 건 세상이 다 알아야. 비겁한 눔이라 그거여. 너, 변구장네 닭장에서 함께 닭서릴 해먹구서는 그게 겁나 으른들한테 일러바친 눔이 바로 너 아니여. 어디 그뿐이여. 니눔은 죽는 게 겁나 다릴 일부러 많이 절면서 우리 결사대에 끝까지 들어오지 않은 눔이여. 우리가 니눔 조심해야 한다구 일부러 니눔 집에서 모였어야. 여차하면 니눔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런 얘기여.”
내 아버지 얘기를 그런 식으로 듣는 건 많이 불편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저씨, 그때 결사대 대원들이 동오골로 끌고 간 인민군이 몇명인지 기억하고 계세요?”
“병선이 이눔, 공부 일등 하던 눔이 그건 왜 모르구 있냐. 이 망할눔아. 그게 그렇게 알구 싶으면 내가 알으켜주마. 그래, 이백세명이다, 이백하구두 셋이라 그거여.”
세월의 갈피가 전혀 잡히지 않아 치매 노인들이 자기 나이를 모르듯 오흥춘 노인도 숫자 기억에 있어서는 신뢰할 것이 못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오흥춘 노인은 눈을 끔벅이며 뭔가를 생각하는 기색이었다.
“그때 죽이기두 오라지게 많이 죽였지만 죽을 걸 살려준 인민군놈두 있어야.”
죽이지 않고 살려준 인민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수시로 내 꿈속을 들락거리던 그 여자 인민군에 대한 혼몽한 기억이 또렷이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살려주다니요, 누구를 왜 살려줬습니까?”
“이놈, 장병선아, 인민군 나간 니 큰아들눔두 누가 그렇게 살려줬음 좋겠쟈?”
형의 행불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예단은 늘 그렇게 잔인했다. 학도병으로 참전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그냥 우리 가족의 한가닥 희망사항이었을 뿐이다.
“아저씨, 그때 살려준 사람들 얘기 좀 해주세요.”
“구뎅이 앞에 죽 앉히구 막 총을 쏠려는 참인데 용대장이 우리 몇 사람을 불렀어야. 두 놈을 살려주자는 게야. 용대장 그 육실헐눔이 젠장 쟈들은 죽이기에 너무 아깝다, 그러는 거 아니겠어.”
“죽이기에 아깝다니, 뭐가 그렇게 아깝다는 거였습니까?”
“이놈아, 아까운 건 그냥 아까운 거여. 그중에 한 놈은 마빡이 훤하구 눈이 부리부리, 콧날두 번듯했어야.”
“설마 인물 좋다고 살려줬겠습니까. 나이가 너무 어려 그게 아깝다는 거였겠지요.”
“이놈아, 갸들보다 더 어린애들두 있었어야. 갸들이 산 건, 왜 척 보면 대번에 범상치 않은 그런 얼굴이 있어야. 그걸 해치면 하늘이 벼락이라두 내릴 것 같은, 그렇게 무시 못헐 얼굴 덕을 본 게라 그 얘기여.”
“아저씨, 그때 살려준 사람 중에 하나는 여자였지요?”
“야, 이눔 봐라. 니가 그걸 어떻게 안다냐?”
그 순간 눈에 씌었던 뿌연 비닐껍질 하나가 벗겨져나갔다. 그 여자는 실재 인물이었던 것이다.
“아저씨, 그때 살려준 그 인민군들이 그뒤 어떻게 됐는지 알고 계세요?”
“살려줬다는데 뭔 딴소릴 허구 자빠졌어. 용재두 그놈이 왜 허구한 날 장거리 길목에 목을 빼고 앉았는지 알아? 치사한 놈 같으니라구. 살려준 그놈들이 언제구 지 앞에 나타나길 기다렸다 그 얘기여.”
그 순간 이즈막에 그 사람이 오흥춘 노인을 찾아왔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 사람들이 마을에 다시 나타난 적이 있습니까?”
“그거 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 북쪽에 올라가 높은 대장 된 놈들이 예는 뭣허러 찾아온다는 게야. 모르지. 내년에 또 난리가 터진다니까 그때 다시 올는지.”
“아저씨, 그때 살려준 인민군 한 사람이……”
그러나 오흥춘 노인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나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지팡이로 문지방을 다시 두드려대기 시작했다.
“이봐유 성님, 나 배고파. 우리 어머이가 날 굶겨 죽일려구 해. 밥을 이틀이나 한번두 안 줬어유.”
초가을 햇살 속에-1950
낙동강 전투에서 패했다는 인민군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마을을 지나갔다. 북쪽으로 돌아가기 위한 퇴각 루트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 마을이었던 것이다.
마을길을 터벌터벌 걸어가는 인민군들의 모습이 하나같이 초췌했다. 누렇게 낡은 군복도 그렇지만 발가락이 드러날 정도로 너덜거리는 군화 위에 천쪼가리를 잡아맨 꼴이 정말 말이 아니었다.
피란길에서도 본 아주 앳돼 보이는 인민군들은 우리 마을 아이들을 부러운 눈으로 보면서 지나갔다. 집에 숨어 있던 마을 아이들이 인민군들을 보기 위해 슬슬 집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을 어른들은 인민군들이 마을을 향해 오고 있다는 말만 들어도 산속으로 도망치곤 했다. 윤재복의 동생 재천이 또다시 인민군들을 데리고 마을에 나타날 수 있다는 두려움 탓이었다. 더구나 후퇴하는 인민군들이 각 마을 인민위원회에서 지명한 반동분자들을 모두 처치하고 간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실제로 읍내에서 주민 사십여명이 후퇴하는 인민군들에 의해 폐광굴에서 떼죽음을 당했다는 얘기를 직접 그 피해자 가족의 입을 통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엔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라디오 수신기를 통해 전해지면서 각 마을이 서로 경쟁하듯 인민군 패잔병 잡는 일에 나섰다. 어느 마을이고 용재두가 그 일에 앞장을 섰다. 여러 마을에서 포획한 무기만 해도 대단해 마을 남자들이 모두 총 한자루씩은 지니고 있을 정도였다.
인민군 패잔병들이 한두명, 외떨어져 마을을 지나가는 날이면 마을 전체가 그대로 공포에 휩싸였다. 마을 어른들이 그 인민군들을 처치하기 위해 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잡은 포로들은 심문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죽여 골짜기 아무데나 파묻었다. 아군이 들어오면 잡은 패잔병들을 인계할 것이니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그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인민군보다 지방 빨갱이를 더 무서워했듯 인민군 패잔병들이 국방군 만나는 것보다 마을 사람들을 더 두려워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군 선발대가 패잔병들을 앞질러 이미 인제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에야 비로소 각 마을에서 사로잡은 인민군 포로들이 결사대가 본부로 하고 있는 수항초등학교로 이송되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결사대 대원들이 동오골 입구의 우리 집 앞을 오르내렸다. 학교에 가둬뒀던 인민군 포로들을 면소재지로 이송한다는 날이었다. 면소재지에 아군 주력부대가 들어왔다고 했다. 인민군 포로들을 모두 국방군에 인계하라는 연락이 왔다며 육사단 칠연대를 입에 달고 사는 양승호와 국군 낙오병 최수형이 군복까지 차려 입고 나왔다. 결사대 대장 용재두는 못 보던 색안경에, 허리에는 권총까지 차고 있었다.
그날의 아침 상황에 대한 내 기억이다. 나는 그날 아침 일찍부터 불려나가 망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효식이 넌 영팔이하고 저 서낭당 앞에서 망을 보는 거다.”
서낭당 고개에서 강 건너 장수원이나 마을 장터 쪽에 인민군 패잔병이 나타나면 곧장 연락을 하라고 했다. 그날따라 용대장이 많이 긴장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손이 뒤로 묶인 인민군 포로들이 학교 뒷문을 통해 끌려나와 면소재지 쪽으로 향하는 게 동오골 서낭당에서 내려다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면소재지로 향해 움직이던 행렬이 갑자기 신작로를 버리고 동오골로 방향을 바꿨다.
“뒤로 전달, 동오골 고개로 질러간다.”
결사대 대원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그렇게 외치자 인민군들을 둘러싸고 있던 다른 대원들이 모두 복창을 했다. 뒤로 전달, 동오골 고개로……
드디어 인민군 포로들이 서낭당에 이르렀다. 인민군 하나가 서낭당에 허리를 굽혀 절했다. 어떤 사람은 다 떨어진 신발 뒤축이 벗겨지자 그것을 제대로 신으려고 애를 썼다. 어떻든 인민군 포로들 모두가 동오골로 올라가는 샛길로 들어서면서 뭔가 심상찮은 낌새를 눈치챈 듯 술렁거렸다.
저 사람들 다 죽일 거야. 느낌이 그랬다. 내가 그 느낌을 장영팔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을 것이다. 그때 분명 영팔이가 거기 있었다.
결사대 대원들이 인민군 포로들을 동오골로 끌고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너방의 총소리가 났다. 산속에서 울리는 총소리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쩌르렁 쩌르렁 골짜기를 울리는 긴 산울림은 숨 끊어지는 짐승의 비명처럼 애절하다.
동오골에 처음 울린 그 총소리가 밧줄을 풀고 도망치는 인민군 군관 하나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 인민군 군관은 밧줄을 풀고 도망치면서도 김일성 장군 만세를 불렀다고 했다. 총에 맞고서도 산 중턱까지 치뛰다가 쓰러졌다는 그 인민군 얘기는 뒷날 마을 사람들의 입에 오랫동안 오르내렸다.
산속의 적막을 흔든 그 첫번째 총소리 이후 동오골 골짜기는 짤랑거리는 초가을 햇살 속에 조는 듯 고요했다.
그 숨막히는 정적이 깨진 것은 동오골 안쪽에서 서너명의 사람들이 서낭당 쪽으로 내려오면서였다. 결사대 대원 한 사람과 손이 뒤로 묶인 인민군 포로 둘. 결사대 대원은 감두리 사는 원씨 아저씨였다. 데리고 내려온 인민군 두 사람을 서낭당 돌배나무 아래 꿇어 앉히는 원씨 아저씨의 눈에 살기가 핑핑 돌았다.
인민군 포로 두 사람은 몸을 와들와들 떨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뒤에 서 있는 원씨 아저씨를 돌아보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살려주시라요. 우리 형 또래로 보였다. 다른 또 한 사람의 인민군이 뒤로 고개를 돌려 힐끗 내 눈과 마주쳤다. 짐승이 올가미에 걸려 날뛰다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뚝 그치며 사람을 쳐다볼 때의 그 적의 가득한 눈빛. 베수건을 모자처럼 머리에 두른 그 여자 인민군은 매섭게 다문 도톰한 입술을 달싹여 뭔가를 말했다. 물. 그것이 어쩌면 다른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때 그네가 나한테 뭔가를 절실히 원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저 아래, 별일 없쟈?”
담배를 피워 무는 감두리 원씨 아저씨의 손이 심하게 떨렸다. 그 목소리 또한 많이 달떠 있었다.
“인마, 느덜 운이 정말 좋은 거야.”
“살려주시라요. 아저씨, 제발……”
우리 형 또래의 인민군 포로는 계속 울고 있었다. 여자 인민군과 달리 그는 군복 대신 다 떨어진 베잠방이에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많은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아마 어느 집에서 옷을 바꿔 입었을 것이다.
“인마, 왜 내 말을 안 믿어. 느덜은 이제 살았다니까 자꾸 그러네.”
원씨 아저씨가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내 귓가에 입을 가까이하고 말했다.
“저놈들을 저기 상엿집에 가둬놓을 거니까, 니가 망을 잘 봐야 한다.”
원씨 아저씨가 턱으로 가리켜 보이는 상엿집은 서낭당 오른쪽 산 밑에 있었다.
“야, 너 성이 뭐랬어?”
원씨 아저씨가 칭칭 울고 있는 허여멀건 얼굴의 인민군 머리를 쿡 찔렀다.
“홍천 용씹네다.”
“그래, 바로 그거야 인마. 네가 홍천 용씨기 때문에 산 거야. 우리 대장이 홍천 용씨 용재두거든.”
그 눈의 살기와는 달리 원씨 아저씨는 동오골 안쪽 골짜기를 자주 올려다보며 허둥거렸다. 인민군 두 사람을 상엿집에 가둔 뒤 다시 골짜기 안쪽으로 올라가기 전에 원씨 아저씨가 나한테 속삭이듯 말했다.
“너, 저 위에서 총소리가 많이 나두 절대 놀라지 마.”
그렇게 달뜬 목소리를 남긴 뒤 원씨 아저씨가 허둥허둥 동오골 안쪽 골짜기로 사라졌다. 그 순간 나는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몸이 떨렸다. 원씨 아저씨가 말한 동오골 안쪽에서 울려올 총소리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민군 두 사람이 상엿집에 갇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서부터 몰아친 무섬증이었다.
내가 집으로 내려 뛴 일만은 분명하다. 이 부분에서 헛갈린다. 그때 서낭당에 남은 것은 나 혼자였다는, 어쩌면 영팔은 벌써 전에 서낭당을 떠났을지 모른다는 생각.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물, 무울. 그 갈증은 부엌 물동이에서 물을 퍼든 순간 나를 향해 뭔가 입을 달싹거리던 여자 인민군의 그 강렬한 눈빛을 생각나게 했다.
내가 바가지에 물을 떠가지고 다시 동오골 서낭당 고개로 치뛴 일은 결코 말짱한 정신에서 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가지에 떠온 물을 그네들이 갇혀 있는 상엿집까지 들고 가지 못했다. 걷잡을 수 없는 그 무섬증은 어떤 예감 같은 것이었다.
동오골 안쪽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여러방의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가을볕이 따갑게 내려앉은 골짜기에 쩌르렁 쩌르렁 산울림을 일으켰다.
상엿집에 뭔가 이상한 기색이 보인 것도 그때였다. 상엿집 전체가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거기 갇혔던 인민군 두 사람이 엉금엉금 기어나오고 있었다. 그네들이 내가 서 있는 서낭당으로 달려 내려오는 순간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멧돼지가 내닫는 그런 뜀질이었다. 그네들이 내 곁을 스쳤다. 전기 도체에 닿는 순간의 충격 같은 것이 내 온몸을 휩쓸었다. 그네들 중 한 사람의 손길이 내 머리에 닿은 느낌이었다. 그네들 모습이 사라진 곳은 동오골과 다른 방향의 산등성이 송림이었다.
동오골에서 울리던 총소리가 멎었다. 쏴아 하니 밀려오는 정적. 상엿집도 여전히 그 모습으로 거기 서 있었다. 거기 있으면서도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들꽃이 비로소 내 눈에 띄었다. 서낭당과 상엿집 사이의 묵밭에 핀 벌개미취 군락 그 한 옆으로 샛노랗게 핀 마타리꽃. 내 바짓자락이 질펀하게 젖어 있는 것을 안 것도 그 들꽃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던 물바가지가 땅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시퍼렇게 젊어 죽은
그날 동오골 상엿집에서 인민군 두 사람이 도망친 일에 대해서도 마을 사람들의 말은 조금씩 달랐다. 그 두 사람이 쉽게 도망칠 수 있게 포승줄을 느슨하게 묶어 상엿집에 가두었을 것이란 얘기가 있는가 하면, 살려주되 그네들을 국방군에 포로로 넘길 계획이었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떠하든 죽이기엔 너무 아까워 살려주려 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날 도망친 그네들이 당시 상황으로 봐 살아남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란 얘기가 많았다. 다행히 살 수만 있다면 어느 곳에서고 크게 될, 그런 귀인상이었다는 말들을 빼놓지 않았다. 다만 그때 도망친 두 사람의 인민군 중 한 사람이 여자였다는 사실에 대한 별다른 뒷얘기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십여년이 흐른 뒤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그 여자 인민군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들었다.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날이 추워도 더워도, 특히 귀한 음식을 먹을 때마다 소리없이 눈물을 찍어내곤 했다. 그날도 아마 어머니는 당신 맏아들 생각으로 마음이 그렇고 그런 상태였을 것이다. 정말 탐나는 아이였다고, 열일곱 그 나이에 그처럼 똑 부러지게 반듯한 인물도 흔치 않을 거라면서 사람 인연이란 모르는 일, 이승이든 저승이든 충식이가 그 처녀애와 좋은 인연으로 맺어졌을 수도 있지 않겠느냔, 아버지의 그 황당한 위로 말에 어머니가 어떤 반응을 보였던가는 기억에 없다.
아무튼 그날 내가 서낭당 앞에 주저앉아 그 두 사람의 필사적인 뜀질을 바라보며 질질 오줌을 싼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나는 지금 이 나이에도 뭔가 불안한 상황이 생기거나 어디로 떠날 즈음이면 여지없이 심한 요의로 절절매곤 한다.
기억의 재생은 때로 원래의 그것과 전혀 다른 괴물로 진화한다. 특히 아이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의 색깔 덧칠이 그랬다. 수복이 되어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아이들은 앞다투어 자기 마을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시중이네 안방에서 인민군이 총을 이렇게 끌어안구 자는 걸 어른들이 문짝을 벼락같이 밀치구 들어가 덮친 거라구. 첨엔 긴 괭이루 머릴 내리쳤는데 글쎄 그게 빗나갔다지 뭐야. 한번은 그렇게 잡은 인민군을 우리 집 뒷산으루 끌구 와서 그 인민군한테 삽을 주구 땅을 파라니까 처음 몇 삽을 파더니 그냥 냅다 도망을 치더라구. 분명 산으루 치뛰는 걸 봤는데 어디서 잡혔는지 알아? 바루 우리 부엌이었다구. 그걸 내가 찾아냈다니까. 어른들을 따라 산으루 치뛰다 보니 목이 마른 거야. 집에 들어와 바가지로 물을 떠 마시는데 부엌 구석에 쌓아놓은 검불더미가 이상하더라니까. 그래서 검불더미를 다시 보니까 글쎄 뭔가 번쩍하더라구. 검불더미 속에 숨은 인민군 눈하구 내 눈이 딱 마주쳤다 그거야. 그 눈이 날보구 뭐랬는지 알아. 그래애, 눈이 정말 말을 했다니까. 그게 무슨 말이었는지 지금은 다 잊어뿌렸지만 제발 살려달라는 그런 얘기였던 것만은 분명해. 어쨌든 그 인민군은 지가 파던 그 구덩이에 파묻혔다구. 죽이지두 않구 그냥 산 채루 묻었다는 거야. 그때 우리 할머이가 그러더라구. 불쌍하다구, 그 사람 부모가 얼매나 기다리구 있겠느냐구. 죽은 사람 이름이나 알아뒀는지 모르겠다구. 난리가 끝나면 언제구 구뎅이서 파내서 제대루 묻어줘야 한다구 말이지.”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이야기들은 슬슬 자취를 감췄다. 시국이 시끌벅적, 이러다가 전쟁이 또 터질지 모른다는 얘기들이 돌 때면 아예 지난날 있었던 얘기들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그때의 일이 가물가물 다 잊혀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인지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용재두가 죽었을 때는 달랐다. 죽기 전, 풍을 맞아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때부터 그랬다.
“지가 지은 죄를 이승에서 전부 때우고 죽는 사람이 있다더니, 용재두가 바로 그 꼴이여.”
“그거 맞는 말이네. 사람을 좀 죽였어야지.”
“그 사람 우리 마을에 오기 전 다른 데서는 더했다구, 지 입으루두 그러데.”
“여북하면 아들이 그렇게 죽었을까. 술주정 끝에 내 아들 내가 죽였다구 펑펑 운 게 어디 한두번이던가.”
“그때 인민군 둘을 살려준 것두 다 지 아들 생각을 허구 그랬을 거구먼.”
“아무튼 그날 인민군 갸들 두 놈은 운이 좋았던 게야.”
“운이 좋긴. 도망치다 다 죽었을 거구먼서두.”
“아니지. 살 운을 타고 난 놈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아야. 조롱골 박재명이 월남전에서 몸속에 총알 다섯개가 박혀가지구두 살아난 거 봐. 아무리 난시라두 살 놈은 어떡하든 살더라니까.”
1951년 1·4후퇴 때의 중공군 얘기만 나오면 나는 늘 기가 죽었다. 그 겨울전쟁 때도 우리 가족은 할머니만 집에 남겨둔 채 남쪽으로 피란을 갔다가 다음해 봄에 마을로 돌아왔던 것이다.
유엔군 화력에 밀려 퇴각하는 중공군들은 일년 전 여름전쟁 때 인민군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갔다.
“중공군들은 마을을 지날 때 아예 두 손을 번쩍 들고 다녔어야.”
“그렇게 겁을 먹고 다니니까 잡기도 쉬웠어야. 우리 애들이 작대기를 들이대고 거기 엎드려, 그러면 고분고분 땅에 엎드렸지 뭐야.”
“뙤놈들이 양키놈들보다야 백번 나았어야. 뙤놈들은 후퇴를 하면서도 되도록 민가에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하더라니까. 워낙 먹을 것이 없으니까. 빈집 부엌바닥까지 파헤쳐 감춰둔 감자며 좁쌀을 꺼내 먹기도 하고 무시래기에 밀기울 껍질을 얻어가면서도 미안하다고 허리를 굽신거렸어야.”
“뙤놈들은 그게 요강인 줄두 모르구 거기다가 시래기죽을 쒀 먹었어야.”
마을 아이들은 나달나달 낡아빠진 누비군복에다 광목천으로 발싸개를 한 채 눈 덮인 언 땅에서 무를 파내 우적우적 먹던 중공군들의 비참한 모습을 매우 연민어린 투로 묘사하곤 했다. 더구나 중공군이 추운 겨울인데도 옷을 벗어 그 솔기에 달라붙은 보리쌀만한 이를 손가락으로 훑어 화톳불에 넣을 때마다 탁탁 터지는 소리가 따발총소리 같았다고 했다. 그때 우리 마을에서 죽은 중공군이 여름난리 때 후퇴하다가 잡혀 죽은 인민군 숫자보다 몇배 많았다는 얘기도 빼놓지 않았다.
“진짜루 많이 죽었다구. 중공군들은 모두 여자들 흰 치마를 뒤집어쓰구 다녔잖아. 눈하구 같은 색깔인데다가 흰 치마를 입구 다녀야 쌕쌕이가 마을 사람들인 줄 알구 공격을 안할 거라 그거였는데 그게 아니었어야. 쌕쌕이가 따다다다 기관총으루 몇번 훑구 지나가면 산골짜기가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어야. 그때 바루 죽지 않은 중공군 하나가 우리 울타리 밑에까지 기어와 죽었다구. 우리 할아버지가 그 시첼 눈으루 덮어뒀다는데 글쎄 봄이 돼 눈이 녹으니까 총 맞아 떨어져나간 팔꿈치가 불쑥 튀어나와 있더라니까.”
수복 이후 우리 아이들은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전쟁놀이를 했다. 산자락 이곳저곳 참호 속에 널려 있는 무기들을 집에 몰래 감춰놨다가 밤에 들고 나왔다. 그런 무기들을 어른들한테 압수당한 뒤에는 직접 총을 만들었다. 소총 실탄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나무를 대충 깎아 총신을 만들고 총알이 나갈 만한 구멍 뚫린 쇠파이프를 잘라 고정시킨 뒤 총알 뇌관을 때릴 노리쇠를 대못으로 만들어 고무줄에 걸면 되었다. 중공군이 허리에 차고 다니던 방망이수류탄이며 개구리참외처럼 암팡지게 생긴 미군들의 수류탄도 우리의 전쟁놀이에 빠질 수 없는 무기였다. 게다가 터지지 않은 포탄을 분해해 그 속에 있는 쥐똥처럼 생긴 화약을 이용해 로켓포를 쏘아 올리는 일로 전쟁놀이는 절정을 이뤘다.
전쟁놀이 중 우리가 즐긴 또 하나의 놀이는 담력시험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중공군이 유엔군의 네이팜탄 공격으로 불타 죽은 솔치골까지 가 그곳에 흩어져 있는 중공군이 몸에 지녔던 물건들을 전리품으로 수거해오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캄캄한 밤중에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그 골짜기까지 직접 갔다가 오는 아이는 별로 없었다. 대부분 솔치골로 올라가는 길가에 숨었다가 시간이 꽤 됐다 싶으면 헐레벌떡 돌아와 너무 무서워서 전리품을 못 가져왔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솔치골에서 불타 죽은 중공군 송장 썩는 냄새가 그 다음해까지 났다고 했다. 시퍼렇게 젊어 죽은 귀신들이 밤이면 곡을 한다며 솔치골 아래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 무슨 재앙만 생겨도 중공군 원혼 얘기를 들먹였다. 결혼식을 사흘 앞두고 갑자기 죽은 딸이 이승의 원한을 풀고 극락왕생하기를 비는 푸닥거리를 할 때도 무당 목구멍에서 슬피 울부짖는 수백의 총각귀신의 울음소리가 나왔다.
마을의 재앙을 막기 위해서는 씻김굿을 한판 크게 벌여야 그 원혼을 달랠 수 있다며 비용을 갹출하다가 흐지부지된 일도 있었다. 적군의 원혼을 달래는 그 굿판이 반공법에 걸릴 수도 있다는 학교 선생의 유권해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봉분 없는 주검-2007
은장봉 증조할아버지 묘 벌초를 다 끝내고 땀을 들이는 참인데 휴대폰이 울렸다.
“지금 어디 계십네까?”
그 사람이다. 아까 동오골로 들어서면서 돌산의 용재두 무덤 쪽을 올려다봤지만 거기 그 사람 기척은 없었다.
벌초가 일찍 끝나 감두리 강에 나가 견지낚시를 하다가 지금 동오골로 들어오는 중이란다.
“어디 계신지 제가 차가 있으니까 그리로 가면 안될까요?”
몇년 전에도 그랬고 오늘도 동오골 근처 어디에도 그가 타고 왔을 만한 자동차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읍내에서 버스를 타고 왔다면 그렇게 이른 시간에 벌초를 끝낼 수가 없었을 터.
“아니야요. 서낭당에 거의 왔습네다. 천천히 내려오시라요.”
낌새가 심상찮다. 아무도 모르게 수년간 용재두 무덤을 벌초해온 일만 해도 그렇지만 다시 생각하기도 끔찍할 동오골을 만남의 장소로 잡은 일부터가 그랬다.
아무튼 질긴 인연이다. 이제 오십칠년 전의 그 장소에서 그를 세번째로 만난다는 소설 같은 이 사실을 누가 믿을 것인가.
은장봉에서 동오골로 내려가려면 그때의 현장이 저만큼 건너다보인다. 몇년 전 돌산 용재두 무덤에서 그 사람과 함께 내려다볼 때보다 숲이 더 무성하다. 삼태기처럼 우묵한 골짜기가 어느 것이 밭이고 산인지 구별이 안되게 붙어버렸다. 오십칠년 전 그날 이후 사람의 손길이 전혀 가지 않은 아까시나무들은 이미 거목이 돼 있었다.
아까시나무숲 앞쪽 언덕의 묵밭에 그들이 묻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묵밭은 내 기억 속에만 있을 뿐 지금 그 어디에도 밭이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더구나 그 언덕밭 아래쪽은 원래 물구렁텅이라 오랜 세월 씨가 날아와 저절로 자란 시닥나무와 북나무, 버드나무 등이 한데 어우러져 그대로 숲이다. 그 아래 한마지기는 실히 될 계단식 천수답도 이미 논으로서의 모양은 찾기 어려웠다.
갑자기 그 잡목 숲에 왜자하니 소요가 일었다. 수리나 뱀한테 공격을 당했을 때 내지르는 새들의 비명이다.
그러나 숲은 금방 조용해졌다. 때로 적요가 가까이 들리는 포성보다 더 무서울 때가 있다. 오십칠년 전의 그 공포보다 더 섬뜩한 전율이 머리끝으로 뻗쳤다. 원래 봉분이 없는 주검이 더 무서운 법이다. 그들이 정말 저 땅속에 묻혀 있단 말인가.
오십칠년 전부터 저 골짜기 땅이 저처럼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것은 아직도 사람들이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설사 저 땅속에 묻혀 있던 사람들이 누군가에 의해 발굴돼 어디론가 옮겨졌다고 해도 아직도 그때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기억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때로 나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매우 회의적인 때가 있었다. 도회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이따금 고향마을에 돌아왔을 때 어린 시절의 나를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내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당혹스러울 수가 없었다.
동오골 일만 해도 그랬다. 고향마을 친척어른 장사 때 학교 동창들을 만나 술을 먹다가 동오골의 그 일이 화제에 올랐다. 그날따라 동창들이 하는 그 얘기가 먼 데 있는 다른 나라 얘기만 같았다. 나이 들면서 가끔 생기는 현상이다. 모든 것이 나와는 무관하다는 그 안도감. 정말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게 사실이라면 그들은 아직도 거기 그대로 묻혀 있다는 것인지.
지난 일에 묶여 있을 만큼 세월이 한가하지 않았다. 모든 가치와 질서가 너무나 빠르게 바뀌고 있어 내 과거의 기억들이 그것에 접목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또는 상전벽해의 그 세월이라면 사람의 생각도, 그 생각으로 빚어 만든 제도나 법도 바뀌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생기는 혼란이었을 것이다.
“육이오 때 우리 마을에서 죽은 인민군 패잔병들은 그뒤로 어떻게 됐지?”
술기운이었을 것이다. 그런 바보 같은 물음 또한 기억의 혼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되다니?”
“그 유해를 발굴해 갔느냐 그런 말이지.”
“뭐, 적과 싸우다 죽은 우리 국군 유해도 아직 거두지 못하고 있는 판에 인민군 유해를 발굴해?”
그때 장영팔이 불쑥 끼어들며 어깃장을 놓았다.
“장효식이 너. 고향 오래 떠나 있어 정말 모르고 있었구나.”
“………”
“그때 죽은 인민군 시체들 다 파갔어야.”
“파가다니, 누가?”
“아, 그 부모형제들이 파가지, 누가 파갔겠냐, 이 정신 나간 놈아.”
정신 나간 놈은 나뿐이 아니었다. 장영팔의 그 어깃장 말에 둘러앉았던 몇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놀란 얼굴을 했다. 그들 역시 기억의 혼미 상태에 빠져 있음이 분명했다.
친구지만 나는 영팔이와 티격태격 맞설 경우 가끔 촌수를 내세워 기세를 잡곤 했다.
“아재, 있었던 일을 그렇게 함부로 얘기하면 안되지. 언제고 사실은 사실 그대로 밝혀져야 한다는 그 얘기야.”
그러나 쉽게 물러설 영팔이 아니었다.
“사실 좋아하네. 가방끈 길어 고향 떠난 너 같은 놈들이야 밝은 대낮에 삐쭉 들러 그때 일이 어쩌구저쩌구 짖어대다 가면 그만이지만 여기 평생 처박혀 사는 우린 그게 아니란 말이여. 밤마다 여기두 귀신 저기두 오싹인데 우리가 그래 그런 걸 하나하나 기억하고 싶겠냐, 이 좆같은 조카놈아, 너야말로 그때 얘기를 함부로 하지 말라 그거야.”
다른 동창 하나가 장영팔을 거들고 나섰다.
“장교장은 아직도 그때 도망쳤던 사람 하나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 걸 모르는 모양이구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할 말이 없었다.
부질없는 희망
동오골 산 후미를 돌아서자 서낭당 앞에 그 사람 모습이 보였다.
나는 일부러 걸음을 천천히 한다. 그 사람을 만나는 일에 내가 왜 이리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용재두의 무덤에서 우연히 이뤄진 그 두번째의 만남과는 전혀 다른 이 짐짐한 느낌의 조짐은 도대체 무엇일까.
서낭당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쑥부쟁이며 벌개미취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그날 두 사람이 도망친 상엿집 근처 산기슭에서 무심코 눈에 띄었던 그 들꽃이 저 사람의 눈에도 보였을는지. 자신이 묻힐 구덩이 앞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그네들이 서낭당으로 내려오며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오십칠년 전 그 사람의 눈으로 서낭당 돌배나무를 바라본다.
동향의 동오골 서낭당이 어느새 산그늘에 들었다. 이쯤에서 바라보는 고목 돌배나무의 위용이 그럴싸하다. 동오골의 돌배나무는 한해 열매가 실하면 해거리로 다음해엔 몸살을 앓느라 꽃마저 별로였다. 오전에 쳐다본 돌배나무에 열매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십칠년 전 그해 가을의 돌배나무는 어떠했을까. 저 사람도 나도 분명 저 나무 아래서 만났지만 그때 내 눈에 저 돌배나무는 없었다. 다만 저 돌배나무가 우리를 보고 있었을 뿐이다. 저 돌배나무는 우리보다 이 세상에 먼저 나와 이제 별 변고만 없다면 몇배 더 오랜 세월 동안 세상에 머물다 갈 것이다. 나무의 위대함이다. 불현듯, 저 돌배나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돌배나무 밑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서낭당 돌무더기 근처에 흩어져 있는 돌을 주워 올리기. 아마 매년 이곳에 올 적마다 저렇게 돌을 주워 돌무더기 위에 얹었을 것이다. 그는 무엇을 빌고 있는 것일까.
“일찍 오셨던 모양입니다.”
그 사람은 내가 가까이 온 것을 모르고 있었던 양 적이 놀란 표정이었다.
“차가 밀릴 것 같아 새벽에 출발했는데 일찍 오니까 덥지도 않고 참 좋았습네다.”
“낚시, 손맛 좀 보셨습니까?”
“아니야요. 물이 너무 차서 그런지 누치 그림자도 못 봤습네다.”
그 사람은 손에 들고 있던 돌 하나를 서낭당 돌무덤 위에 정성스레 얹었다.
“매년 여기 오시는 느낌이 남다르실 거 같습니다.”
불안할수록 단도직입이 된다. 나를 만나자고 한 건 그 사람인데 얘기는 내가 풀어가는 꼴이었다.
“왜 아니야요. 여기 생각만 해도 늘 가슴이 떨렸지요. 여북하면 이십년 동안 아예 여기에 올 생각을 못했겠습네까.”
“그때 목숨을 구해준 사람 생각을 많이 하셨겠구먼요.”
“맞습네다. 더구나 그분이 자식도 없이 혼자 살다가 돌아가셨다는 걸 알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습네다.”
“그때부터 용재두씨 무덤을 찾아오시기 시작한 거구먼요.”
“그분 죽은 아들 이름으로 바꿔 살기로 한 것도 그때부터야요. 허지만 그분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찾아뵙지 못한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립네다.”
그 순간 불현듯 궁금한 게 있었다.
“자제분을 몇이나 두셨는지요?”
그 사람 역시 내 물음의 뜻이 금방 짚인 듯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딸 둘에 아들 하납네다.”
“그때 여기 함께 있던 그 여자분은 지금 어디 있는가요?”
그 사람이 살아 있으니 당연히 그 여자도 살아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말에 대한 그 사람의 반응이 뜻밖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 사람의 눈이 잠깐 동안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그리고 곧바로 나한테서 눈을 돌려 상엿집이 있던 산비탈을 무연히 바라보는 그의 얼굴 표정이 썩 밝지 않았다.
“그 사람은 그때 곧바로 죽었습네다.”
얼굴 표정과 달리 목소리는 담담했다.
“여기서 달아난 그 다음날이었습네다. 구룡령 넘어가는 고개 초입에 삼봉약수가 있지 않습네까. 그 근처 산속에서 말벌 집을 잘못 건드려 그렇게 된 것이야요. 내가 나무에 매달린 벌집을 머리로 받고 땅바닥에 넘어졌는데 그 벌떼 공격을 받은 건 뒤따라오던 그 사람이었습네다. 정말 속수무책이었어요. 목이 탱탱 부어 호흡곤란으로 죽어가는 걸 그냥 지켜볼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습네다. 저기 있던 상엿집에서 도망치자고 한 것도 나였고 그 벌집을 건드린 것도 나니까 결국 내가 김명자를 죽인 것이야요.”
전쟁이 한창인 그 판에 여자가 벌에 쏘여 죽었다는 말 같지 않은 말을 한 뒤 그 사람은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나 역시 그 여자 인민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끔 형언하기 어려운 내 성충동과 무관하지 않은 그 여자가 그 사람에게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죄의식의 올가미였다니, 그 인연의 끄나풀이 참 묘하다 싶었다.
“내가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된 뒤 가장 먼저 찾아간 데가 바로 삼봉약수였습네다. 그 약수터 꼭대기 깊은 골짜기 바위 밑에 대충 덮어놓고 온 김명자 시신을 찾아 제대로 거둬줘야 할 것 같아서였습네다. 그러나 그 골짜길 다 뒤져도 뼛조각 하나 찾지 못했습네다. 그뒤로도 여러번 가보았는데 다 허사였습네다.”
“어느 산골짜기고 다 비슷합니다. 그 장소를 잘못 찾으신 거지요.”
“아니야요. 바위도 그거였고 그 근처 나무에 표식으로 끼워놓은 돌도 나무 속에 푹 파묻히긴 했어도 옛날 그대로 있었습네다.”
“혹시 그 여자분이 그때 죽지 않은 걸 그냥 두고 간 거 아닙니까?”
“바로 그거야요. 죽은 게 분명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 기억 자체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습네다. 그 시신 흔적을 못 찾게 되면서부터 김명자가 어딘가 살아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게 된 것도 사실이야요.”
따지고 보면 우리 형도 그 주검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그 긴 기다림, 그 캄캄한 땅속에.
할머니는 잠이 없었다. 밤이면 대문 밖에 나가 서성거렸다. 어쩌다 늦게 들어온 아버지가 대문을 걸고 잔 날은 야단이 났다. 충식이 갸는 내 죽은 뒤라도 꼭 돌아온다. 큰손자에 대한 할머니의 집착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형이 학도병으로 싸움터에 나갔을 것이란 소식을 안고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그날부터 우리 집 장독대와 동오골 서낭당 두 곳에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손자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할머니는 형이 죽었을지 모른다는 얘기만 나와도 눈을 허옇게 뒤집고 혼절했다.
훗날 할머니의 품에 당신의 증손자를 안겨드렸을 때의 일이다.
“이놈이 이렇게 살아왔구나. 천지신명이 이놈을 보내주신 게야.”
할머니에겐 그 증손자가 당신이 그처럼 오매불망 기다리던 맏손자의 귀환, 그 환생이었음이 분명하다.
“자제분들을 여기 데리고 오신 적이 있으신가요?”
신수가 훤해 보이는, 당시 마을 사람들 말대로 죽이기엔 정말 아까웠을 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문득 종족 보존의 한가닥 신비가 터득되는 느낌이었다.
“아닙네다. 내가 그동안 반공포로라는 신분을 애써 감추고 살아왔듯 이 땅에 살기 위해선 아직도 금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습네다.”
“벌에 쏘여 죽었다는 그분 얘기도 용사장님 가족들은 모르고 있겠군요.”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그 얘길 못하고 살았습네다.”
그 사람은 그때까지도 동오골 골짜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이 나무를 본 기억은 없습네다만 서낭당 이 돌무더기만은 가끔 생각이 났어요.”
“여기 꿇어앉아 절을 하면서 엉엉 우시던 생각도 나십니까?”
“…… 함께 있던 김명자 생각만 났습네다.”
그 사람의 눈길이 상엿집이 있던 산기슭에 옮아가 있었다. 그는 아직도 그 악령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저기 있던 상엿집 속에서 김명자가 내 몸에 묶인 밧줄을 이로 풀면서 물었습네다. 몇살이냐고, 그게 우리가 나눈 최초의 말이었지요. 생일까지 물읍데다. 우리는 산속을 숨어다니면서 명자가 벌에 쏘여 그렇게 되기 전까지 참 많은 얘기를 나눴지요. 그때 나눴던 얘기들이 왜 그렇게 하나두 안 잊혀지는지요……”
그 사람은 서낭당 돌무더기 위에 얹힌 돌 하나를 집었다가 다시 그 자리에 놓았다.
“우린 약속을 했습네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죽지 않고 살게 되면 여기, 이 서낭당에서 꼭 다시 만나자고 말입네다.”
“여길 매년 찾아오시는 이유가 또 있었군요.”
“김명자는 그때 분명 죽었습네다.”
“죽었지만 그 혼백이 살아 있는 사람한테 덮씌워져 있으니 그게 문제겠지요.”
“맞습네다. 매년 여기 올 때마다 이 돌무더기를 유심히 살펴보곤 합네다. 김명자가 살아 있다면 아마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존재를 알렸을 것이야요.”
죽은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도 그 시신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끝내 실종이다. 부질없는 희망, 그리하여 실종은 생존 가능성의 동의어다.
“분명히 죽은 걸 이 눈으로 확인해놓고도 그게 믿어지지 않는단 말씀이야요. 여북하면 적군의 묘지까지 다 가봤습네까.”
“적군의 묘지라니요?”
“국방부가 벌이고 있는 한국군 유해 발굴사업은 알고 계십네까?”
“반세기가 넘은 지금에서야 그 일을 하고 있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국군 유해 발굴 뉴스만 봐도 가슴이 내려앉았다. 특히 학도병 유해가 발굴됐다는 소식에 직접 현장에 달려간 일도 있었다.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형이 학도병이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유족 신고는 물론 디엔에이 검사까지 포기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발굴된 국군 유해는 우선 현지에서 간단한 위령제를 지낸 뒤 유전자 분석을 거쳐 국립현충원에 안장된다고 합네다.”
“그때 함께 발굴된 북한군 유해가 가는 데가 바로……”
“그렇습네다. 아주 드문 거지만 북한군 유해 몇구가 함께 발굴됐다는 뉴스가 올해 처음 있었지요. 세상, 많이 변했습네다.”
나도 그 뉴스를 보면서 좀 뜻밖이다 싶었다. 어쩌다 함께 발굴된 것이긴 하지만 적군의 유해도 있었다는 것이 저처럼 세상에 알려지다니.
“발굴된 유해가 육이오 참전 유엔군으로 판명되면 유엔군사령부에 인도된다고 합네다. 허나 북한군이나 중공군 유해가 갈 곳이 어디겠습네까. 그래서 적군의 묘지가 생긴 걸 게야요. 알고 보니 십년 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북한군과 중공군 유해를 모아 파주 야산에 그 묘지를 만든 겁네다. 남파 공작원들까지 포함해 삼백여구 유해가 묻혀 있었는데 그 비목엔 대부분 무명인이라고 적혀 있었습네다. 무덤도 초라하고. 그래도 이렇게나마 적군의 묘지가 있는 나라가 우리밖에 없다고 들었습네다. 파주 적군의 묘지를 바라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네다.”
평생 자신을 기다렸을 북쪽의 어머니 생각도 했으리라. 그런저런 감회 때문일까 서낭당 돌무더기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의 얼굴 표정이 많이 어두웠다.
“장선생님, 내가 왜 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김명자 죽음을 믿지 못하고 그 행방을 찾아 헤매고 다녔는지 아십네까?”
서낭신이나 알까 그 여자 인민군에 대한 그 사람의 속내를 어찌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우리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미 산그늘에 완전히 잠겨 썰렁한 서낭당 고개를 내려오고 있었다. 없어진 것은 동오골의 상엿집뿐이 아니었다. 고개 아래 옛날 우리 집도 뒤꼍의 대추나무 한 그루가 그 흔적으로 겨우 남아 있었을 뿐이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학생이 사백명 가깝던 초등학교가 현재 재학생이 스물세명, 곧 분교가 될 것이라고 하니 농촌의 이농현상이 정말 심각하다.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난데다 남아 있는 농촌 총각한테 시집오는 여자가 없으니 애들이 생산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장영팔이도 며느리를 필리핀 처녀로 얻어 눈이 땡글땡글한 손녀를 둘이나 두었다.
꽤 오래 뜸을 들인 뒤 그 사람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사실은 이 남녘 땅에 발붙이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다 보니 그때 일을 생각할 그런 겨를도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김명자가 꿈에 나타난 거야요. 죽지도 않은 자길 버리고 갔다고 울면서 날 원망하지 뭡네까. 잠을 깼는데도 생시같이 그 목소리가 쟁쟁한 거야요.”
내 차를 세워둔 밤나무 밑까지 왔다. 그러나 그 사람이 타고 온 차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한두번이라면 내 말두 안합네다. 어떤 때는 자기가 캄캄한 굴에 갇혀 있으니 거기서 꺼내달라고 애원을 하는 거야요. 한번은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난수표를 내밀면서 이게 지령이라고, 거기 적힌 대로 하지 않으면 내 가족을 다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는 꿈을 꿨어요. 그런데 꿈에 김명자를 만나는 장소가 늘 동오골 서낭당 앞이었다 그 말입네다.”
그 사람을 내 차 조수석에 태웠다. 그 사람은 이때까지 동오골 근처까지 차를 몰고 온 적이 없다고 했다. 근래 자기 정체를 아는 마을 사람들이 몇 있긴 해도 여전히 자기 모습 드러내기가 뭣해서 멀리 감두리 강 쪽에 차를 세우고 동오골까지 걸어갔다가 외진 산길을 타고 내려온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하도 꿈에 자주 보여 혹시나 해서 동오골에 몇번 왔었습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길 왔다 간 날은 마음이 좀 편해지면서 김명자도 꿈에 잘 나타나질 않는 거야요.”
내 차에 타고서도 계속 그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그 꿈으로 해서 겪은 마음고생이 꽤 컸던 것만은 분명했다.
나도 이참에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것이 있었다. 두번째 만남에서 그가 피했던 물음이다.
“그때 동오골에 끌려와 땅에 묻힌 사람이 모두 몇명이었습니까?”
별것 아닌 숫자에 대한 끊임없는 이 집착의 정체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점점 믿음을 잃어가고 있는 내 기억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안간힘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그걸 잘 모릅네다. 죽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본 건 구덩이를 파던 중에 도망치다 잡혀 죽은 그 사람 하나뿐이었으니까요.”
“그럼 그때 거기 끌려왔던 인민군들이 다 죽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때 그 골짜기에서 난 총소릴 장선생님두 들었을 거 아닙네까. 그게 얼마나 무서웠으면 살려준다는 말두 못 믿고 우리가 그렇게 도망을 쳤겠습네까.”
조수석에 앉은 그 사람이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 일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이 바로 장효식 선생님 아니십네까. 내가 오늘 장선생님을 만나자고 한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야요.”
감두리 강변의 물빛이 좋았다. 그가 세워둔 지프차 뒤에다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리는데 내 점퍼 주머니에 든 휴대폰이 울렸다.
“너, 혹시 오늘 저녁 약속 잊은 거 아니야?”
읍내 사는 중학교 동창 배진태다. 그는 재향군인회 일을 보다가 지금은 그냥 놀고 있다. 옛날 권투선수 이안사노와 고종사촌간이라 그 빽을 믿고 권투부에 들어갔다가 제 코뼈는 물론 생이빨을 다섯개나 부러뜨린 최병식도 오늘 함께 만나기로 했다. 최병식은 귀신 잡는 해병으로 제대를 한 뒤 현재 지역 해병전우회 회장을 맡고 있다. 우리 세명은 중학교 때 늘 붙어다녀, 자칭 삼총사였다. 배진태는 읍내 농고를 나온 뒤 입대해 월남전에 갔다가 제대를 했는데 몇년 전 허리와 다리를 잘 쓰지 못해 진단을 받으니 고엽제 후유증으로 판단이 났다. 그러나 가업으로 이어받은 정미소 운영이 엉망인데다가 국가보훈처로부터 고엽제 후유증 등급이 제대로 매겨지지 않은 일로 항상 불만이 이글거렸다.
그들은 만날 때마다 베트콩 머리를 허리에 매달고 다니던 월남전 얘기에서부터 군대 시절 주둔지역 처녀 따먹던 얘기로 노닥노닥 시간을 죽였다. 그러나 정치 얘기라도 나오면 의기투합하여 애국지사가 된다. 젊은 사람들이 말하는 보수골통으로 참여정부나 대통령에 대해서는 게거품을 물었다.
며칠 전 전화에서도 그들은 머리띠를 매고 북핵폐기 서울 궐기대회에 참여했던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놨다. 자칭 애국자인 그들은 세상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퍼주기 대북정책을 비판한 끝에 다 새빨개졌다고, 나라가 망해봐야 그때 가서야 정신을 차릴 거라고 개탄했다.
“벌초가 이제야 끝났다구. 고향 온 김에 친구를 만났거든. 저녁은 자네들끼리 하고 이차 자리엔 내 꼭 참석하겠네.”
배진태가 벌금 어쩌고 하면서 불만을 터뜨렸지만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 사람이 아직 자기 할 얘기를 고스란히 남겨놓고 있는 이 마당에 서둘러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사람이 자기 차 트렁크에서 과일상자 한개를 꺼냈다.
“경기도 가평 운악산 비가림 포도야요. 농약을 전혀 쓰지 않았다고 해 오는 길에 몇상자 샀습네다.”
내가 포도상자를 차 트렁크에 넣고 차 바퀴를 점검하는 사이 그는 이미 저녁 햇살이 떠난 감두리 강물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얘기하기 위해 저리 뜸을 들이는 것인가. 아무래도 그가 나를 쉽게 놔주지 않을 것 같은 예감으로 하릴없이 그의 동태나 훔쳐보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를 의식한 듯 그 사람이 주머니를 뒤져 담배 한개비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내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하자 꺼낸 것을 다시 집어넣었다.
“천식이 있어 나도 요즘 담배를 끊는 중이야요. 이런 공기 좋은 데서 담배를 꺼낸 내가 정말 우습습네다.”
그리고 뭔가 작심이나 한 듯 입을 열었다.
“장선생님, 내가 여기 수항리 땅을 좀 사고 싶어 알아본 적이 있었습네다.”
“어디 마음에 드는 데가 있으신가 보죠?”
“알아보니까 은장봉은 물론 동오골 골짜기 대부분이 장씨네 종중 산이었습네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나를 만나 긴히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고작 이것이었단 말인가.
“은장봉 일대가 우리 종중 산이 맞습니다. 장씨 대종계에서 관리를 하고 있어 전 그것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습니다.”
“부담 드리려고 한 얘기가 아닙네다. 그게 개인 땅이라면 좀 사고 싶었는데 종중 땅이라 그게 어렵다고 해 지금은 그 생각을 접었습네다.”
그 사람은 조금 전 주머니에 넣었던 담배를 다시 꺼내 입에 물었지만 불은 붙이지 않았다. 그의 입에 문 담배가 좀 떨리는 느낌이다 싶은 순간 번쩍 짚이는 게 있었다. 이런 세상에. 그 꿍꿍이속을 그 사람 스스로가 풀어놓았다.
“거길 사서 당장 뭐 어쩌려고 한 게 아닙네다.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던 내 맘을 장선생님만은 이해하실 것 같아 말씀드린 것뿐이야요.”
이해고 나발이고, 내가 지금 물귀신한테 끌려 들어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 순간 나는 읍내 배진태한테서 온 휴대폰 통화 내용을 핑계로 그 사람과의 작별 인사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 벨이 울리지만 않았어도 그 사람과의 동행은 더이상 없었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걸려온 전화가 문제였다.
“당신도 보면 정말 신기할 거예요.”
요즘 아내의 목소리 톤이 흐린 데 없이 밝다. 며느리가 오늘 병원에 세번째 가 진단을 하니 뱃속의 태아가 자리를 잘 잡았다고, 그 핏덩이 초음파 사진까지 찍어왔다는 보고다.
그 사람은 아직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노을 지는 하늘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있다.
“가시지요. 오늘 제가 저녁을 사겠습니다. 서울은 저녁 잡숫고 가셔도 되지 않습니까.”
이 무슨…… 앞뒤 따질 사이도 없이 튀어나와버린 말이다. 요사스런 내 소시민적 근성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그 사람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러잖아도 오늘 읍내에 자고 갈 숙소까지 잡아놓고 왔습네다. 다만 장선생께서 시간을 내주실까 그게 걱정이었습네다. 그러니 오늘 저녁은 당연히 내가 사야지요.”
자기 차에 오르는 그 사람의 몸 움직임이 젊은이들만큼이나 쟀다.
지뢰밭에서 지뢰를-2007
홍천 용씨, 용우성과의 접선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읍내 읍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거기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각자 자기 차를 몰고 수항리를 떠났다. 내 차가 앞장서고 그 사람 차가 뒤를 따랐다. 그 사람은 내 차를 뒤따라오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인가. 문득 저 사람의 오늘 출현이야말로 오십칠년 전의 나를 만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십칠년 전의 실존 증명. 그리고 우리는 곧바로 다시 접선한 뒤 거창하게 뭔가를 음모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야요.”
지르매재를 넘어설 무렵 그 사람의 휴대폰을 받았다. 암호? 동오골! 오십칠년 전 열살 아이와 열여덟살 인민군의 만남이다.
읍내 자기가 정해놓은 숙소에 잠자리 하나를 더 마련해놓겠단다. 오늘 읍내서 자고 내일 아침 춘천으로 함께 넘어가자는 것이다. 다분히 일방적이긴 해도 그 호의가 그다지 싫지 않았다.
지방도를 벗어나 국도에 들어서기 직전, 내 쪽도 뭔가를 보여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방금 통화한 그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막국수 좋아하십니까?”
“우리 나이면 메밀 맛을 다 알지 않습네까.”
“읍내 못 미쳐 야시대라고, 괜찮은 집이 있는데 제 차를 따라오십시오.”
그렇게 중간에 다시 만나 시작한 술자리였다. 막국수만 간단히 먹고 읍에 가 술을 마시자고 한 것인데 그가 막무가내로 조껍데기 동동주를 시켰다.
처음부터 술을 먹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읍내에도 최근에 대리운전이 있다는 것, 부르면 이 시골마을까지도 곧장 달려온다는 것을 식당 주인을 통해 확인하는 일도 그 사람 몫이었다.
“막국수도 지금 바로……”
감자부침과 메밀전병을 안주로 시키자 식당 주인이 막국수도 곧바로 먹을 것이냔 걸 물어보았다. 내가 손을 내저었다.
“저는 누가 왜 하필 막국수냐고, 음식 이름을 타박할 때 이렇게 얘길 합니다. 이제 막 반죽을 해서 곧바로 뽑아 먹어야 메밀 맛이 제대로 난다는 뜻의 막, 막국수라고요. 평창의 메밀국수가 육수에 말아먹는 거라면 춘천의 막국수는 비빔국수라 무엇보다 면에 양념이 제대로 묻어야 제 맛이 납니다.”
요즘은 순메밀로 만든 막국수를 먹기 어렵다는 것, 순메밀 가루를 반죽해 곧바로 뽑아 찬물에 여러번 씻으면 찰기가 도는 법인데, 대부분의 막국수집이 옛날 메밀 맛을 낸다고 제분소에서 전분은 기본이고 메밀껍질과 보릿가루 태운 것을 섞어 빻은 것을 재료로 쓰고 있다는 둥 내가 막국수 얘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자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늘 비로소 장선생님 때문에 막국수 맛을 제대로 볼 것 같습네다.”
우선 감자부침을 안주로 동동주 잔을 서로 부딪쳤다.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으실 게야요. 혹시 간첩이 아닌지 겁도 나실 거고, 해서 내가 우선 이 남쪽 땅에서 뭘 하고 사는 사람인지 그것부터 말씀드리겠습네다.”
서울에 와 공부를 하고 있던 형이 육이오 때 비행기 폭격으로 죽었다고 했다. 자신이 의용군에 자원했던 것도, 반공포로의 길을 선택했던 것도 그 형을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그러나 형이 죽었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한 순간 부모님이 살아 계시는 북쪽으로 올라갈 방도만 찾으면서 살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고. 그런 중에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취직했던 공장에서 사장 눈에 들어 그 집 외동딸과 결혼까지 해 나중에는 장인의 가업을 이어받아 지금은 그런대로 밥술이나 먹고 살게 됐다는, 인생유전의 통속 드라마 같은 얘기 끝에 덧붙인 말 하나가 귀에 번쩍했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실 때 이런 얘길 합데다. 비록 외손자지만 나를 만나 당신 핏줄을 잇게 돼 고맙다고.”
“돌아가셨다는 형님께서도 자손을 두셨습니까?”
“아닙네다. 장가두 못간 채 죽었는걸요.”
“그렇다면 용사장님께선 처가 쪽까지 두 가문의, 아니지요, 용씨네까지 세 가문 대를 잇고 계신 셈입니다.”
몇년 전 용재두 무덤 앞에서 자신이 용재두의 아들이라고 하던 그 말이 생각난 것이다. 죽이기엔 너무 아까운, 그런 귀골을 살려준 용재두의 뜻이 하늘에라도 닿은 것인가. 아무튼 악명 높던 용재두가 그 경황에 두 사람이나 살려줬다는 그 믿어지지 않던 사실, 그렇게 살아난 사람이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다.
그 사람은 술을 마시되 그저 입술이나 적실 정도로 입에 댔다가 뗄 뿐 그 속도가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내 빈 잔에 술을 채우는 일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반쯤 담긴 술잔을 한번에 비우고 나한테 잔을 건넸다.
“내 나이 올해로 일흔다섯입네다. 세월이 칠십킬로 속도가 아니라 백칠십킬로로 가는 거야요. 세월이 그렇게 무상하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요. 언제부터인가 이제 이 나이쯤이면, 특히 덤으로 오십몇년을 살았으면 나도 뭔가 사람값을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심사가 많이 불편했다는 말씀을 하는 거야요.”
일흔다섯, 비록 그 목소리에 회한이 짙게 배어 있긴 해도 그 부리부리한 눈은 뭔가 큰일이라도 낼 것 같은 총기로 빛났다.
“저도 정년으로 학교를 떠날 때만 해도 잘 몰랐는데 요즘 와서 제가 지금 어디를 어떤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는지, 저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바로 그겁네다. 그러나 내 경우는 그게 좀 심하다 싶은 거야요. 여북하면 정신과병원을 찾아가지 않았겠습네까. 그게 바로 우울증이라는 거야요. 병이 더 깊어지기 전에 한번 스스로 노력해보는 것도 좋다고 하데요.”
그 사람의 얘기가 본론을 건너뛰어 어떤 핵심에 이르고 있다는 느낌. 모르는 척 먼 산을 바라보는 것도 도리가 아닐 터.
“그동안 마음속 지뢰밭 때문에 마음고생이 크셨다는 거 잘 알겠습니다.”
그 사람은 입에 대려던 술잔을 그대로 내려놓으며 내 눈에 자기 눈을 맞췄다.
“지뢰밭이라고 하셨습네까?”
굳이 에두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저 역시 그때 일로 해서 항상 마음이 꺼림했다 그 말씀입니다.”
육이오때 형의 실종으로 해서 우리 가족들이 겪은 마음고생이 만만치 않았다. 큰손자에 대한 할머니의 맹목적인 사랑과 달리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의 실종을 쉬쉬 감추는 쪽을 택했다. 우리 가족에겐 형의 부재가 그대로 삶의 덫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형이 실종된 지 꽤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날 정보기관 사람들이 우리 집을 몇번 찾아오면서부터였다. 야가, 북쪽에 살아 있을는지도 몰라. 나는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귓속말을 하는 것을 엿들었다. 간첩 얘기가 나오기만 해도 아버지는 기겁을 해 라디오를 껐다. 내가 사범학교에 입학을 할 때도, 졸업을 하고 학교 선생으로 임용될 때도 신원조회 문제가 늘 매끄럽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저는 고향마을에 갈 생각만 해도 늘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전염된 것일까. 지금까지 남들한테 하지 못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꺼내고 싶은 충동이었다. 마음에 죄진 것이 있다면 이참에 다 털어버리고 싶은 그런 심정이었다.
“오십칠년 전 마을에서 있었던 그 일들이 나이가 들수록 왜 새록새록 떠오르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나이라 그때 뭔가를 잘못하지도 않았을 건데 말이지요.”
“장선생님, 왜 잘못하신 게 없다고 하십네까. ㅎㅎ,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 그걸 모르시는 거야요?”
“그때 그 현장에서 본 걸 얘기하지 않고 산 죄를 말씀하시는군요.”
“말씀 안한 게 아니라 못한 거야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 얘기라 그겁네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지뢰 표지를 무시하고 선을 넘었다가 목숨을 잃었던가. 목숨까지는 건졌다 해도 평생을 마음의 불구로 구차스레 산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문제는 지뢰가 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겨우 그 표시만 내걸 뿐 그것을 제거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지뢰는 이 땅에서 어떤 금기를 위한 세뇌용 상징으로 존재한다. 지뢰 표지 하나 걸어놓고 수십년간 이 땅을 으스스한 금기구역으로 갈라놓은 것이다.
문제는 내 안에 더 많았을 것이다. 벌써 오래전에 내 마음속에서 제거했어야 할 지뢰였다. 안에 지니고 있으면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털어버릴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되도록 지뢰밭을 멀리하며 산 일이 죄라면 죄일 수도 있다.
지뢰는 숨쉬고 있다. 그것이 살아 있기 때문에 더 무서웠다.
그 사람의 잔도 내 것도 비어 있었다. 그 사람이 먼저 술병을 잡았다.
“오늘 귀한 동지 하나를 만났습네다.”
하루 내내 따가운 가을볕 속에 있다가 마시는 술 때문인가. 나 역시 어느새 말이 헤퍼지고 있었다.
“제가 열살, 제 형이 열일곱살에 전쟁이 났습니다. 지금 그때 헤어진 제 형을 뵙는 그런 느낌입니다. 자, 이건 우리 형한테 올리는 술잔입니다.”
그 사람이 형의 실종에 대해 물었더라면 나는 꽤 장황하게 그때 얘기를 펼쳐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가 내민 술잔을 받아든 채 한동안 침묵했다.
“참 대단하십니다. 그 연세에 뭔가를 계획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내가 넌지시 변죽을 울려본다. 그 사람은 들고 있던 술잔을 상 위에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장선생님, 내가 요즘 귀신들 만나는 일로 내 정신이 아닙네다. ㅎㅎ.”
그 사람은 차에서 뭔가 가져올 게 있다며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시골 식당 빈방이 휑뎅하니 넓어 보였다.
그 사람이 밖에서 들고 들어온 것은 꽤 두툼한 스크랩북이었다.
“요즘 내가 만나고 있는 귀신들입네다.”
나는 그 사람이 건네준 스크랩북 첫장을 되도록 천천히 열었다. 제목만 봐서는 거의 같은 내용의 기사들이었다.
DMZ국군 유해 첫 발굴(2006.5.6)
… 유해 … 유해 … 유가족 … 유해 …
홍천서 발굴, 한국전 전사자 유해, 반세기 만에 가족 품으로(2006.11.20)
… 유해 … 유해 … 유해 … 유해 … 유족 …
민간인 학살, 정부서 유해 발굴 나선다(2007.4.4)
… 유해 … 유족… 유해 … 유해 …
국방부, 학도병 遺骸 발굴 착수(2007.4.5)
… 유해 … 유해 … 유해 … 유해 … 유가족 …
종전 반세기 만에 모습 드러낸 6·25 전사자의 유해(2007.6.15)
… 유해 … 유해 … 유족 … 유해 … 유해 …
생사를 함께한 형제, 같은 날 입대해 한날 전사(2007.6.24)
… 유해 … 유해 … 유가족 … 유해 …
DMZ내 국군전사자 유해 발견-스푼에 새겨진 이름으로 확인(2007.7.6)
… 유해 … 유가족 … 유해 … 유해 …
경북 경산 폐코발트광산서 한국전 희생자 유해 발굴 착수(2007.7.8)
… 유해 … 유해 … 유해 … 유가족 …
비무장지대 안 6·25 유해 1만 3천구 추산(2007.7.8)
… 유해 … 유해 … 유족 … 유해 …
화천·철원 6·25 전사자 합동영결식(2007.8.7)
… 유해 … 유해 … 유해 … 유가족 …
발굴한 유해 사진은 물론 유해 발굴현장의 생생한 기록들로 스크랩북 한권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었다.
— 20여만명 전사자들이 아직 통일화(군화)도 벗지 못한 채 땅속에 묻혀 있다.
— 발굴된 수통에 새겨진 01672… 22살의 청춘 민대식.
— 죽어서도 다시 한번 하늘 보고 싶다.
— 수통에 새긴, 어머니, 어머니.
— DNA유전자 감식. 그 확률 0.00001%. 遺骸, 유해…
종이신문은 물론 인터넷 기사들까지 모두 들어 있는 그 스크랩북을 대충 훑어보고 나자 술상 위의 플라스틱 흰 식기들은 물론 젓가락까지 사람의 유해 조각으로 보였다.
많은 스크랩 기사 중 붉은 색연필로 선이 굵게 그어진 것이 하나 눈길을 끌었다.
DMZ유해 발굴 남·북·미·중이 함께
오늘은 6·25전쟁 57주년이 되는 날이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300여만명의 사상자를 내고서야 중단됐다. 한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전쟁의 상흔도 잊게 했다. 월간중앙이 최근 서울 시내 7개 초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상당수의 학생이 6·25전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37.8%의 학생이‘조선시대에 일어난 전쟁’이라고 알고 있었다. 5명 중 1명은‘일본과 우리나라가 싸운 전쟁’이라고 응답할 정도였다. 너무도 빨리 6·25전쟁의 기억을 지워버린 것이다.
그러나 전사자의 유족들에겐 결코 잊혀진 전쟁이 아니다. 유해를 찾지 못해 한을 품고 사는 유족들에겐 더욱 그렇다.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한 6·25전쟁 전사자는 13만여명이나 된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시신은 구천을 떠돌고 있는 것이다. 유해를 찾지 못한 유족들이 여전히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6·25를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국방부 유해발굴사업단은 요즘 의미있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6·25 전사자의 유해 매장 추정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유해매장지도’를 제작하고 있다. 7월에 발간될 이 지도에는 비무장지대(DMZ)에 최소한 1만구 이상의 국군 유해가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DMZ는 정전협정의 산물이다. 양측의 충돌을 막기 위해 155마일 군사분계선(MDL)을 따라 남북 2km에 걸쳐 DMZ를 만들었다. 협상을 시작해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2년여의 시간이 소요됐다. 협상 기간에 한치라도 더 많은 땅을 확보하기 위해 DMZ곳곳에서 치열한‘고지쟁탈전’이 벌어졌다.
시신이 산을 이뤘다. 경기도 연천군의‘백마고지’와 DMZ에 들어가 있는‘피의 능선’에선 6만명 정도가 전사했다. DMZ내의 일부 야산은 양측의 수많은 포격 끝에 산 정상이 1m쯤 깎였다고 한다. 낮과 밤의 주인이 바뀐 고지도 허다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자 양측 모두 DMZ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엄청난 미수습 유해가 그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현재 DMZ에는 한국군 유해 외에도 북한군과 미군, 중국군의 유해 수만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해 발굴사업 관계자는 “DMZ에 미군의 경우 2천여구, 중국과 북한군의 유해도 최소한 수만구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DMZ에 묻혀 있는 유해만이라도 전쟁당사국인 남·북·미·중이 공동으로 발굴할 때가 되었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 사람이 나를 만나자고 한 저의가 그 스크랩북 기사 내용 속에 음험하게 도사려 있었던 것이다.
“용사장님, 그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의 저의가 드러난만큼 여러 말이 필요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사람 역시 단도직입, 얘기의 핵심을 내보였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이렇게 장선생님을 찾아온 게 아닙네까.”
“오십칠년 전, 저는 열살이었습니다. 설사 그 나이에 본 걸 내가 지금 얘기한다고 해도 그걸 누가 믿어줄 것 같습니까.”
누가 믿어주고 안 믿어주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내 열살의 기억은 오늘 동오골의 가을 햇살 속에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져 동동주 몇잔의 그 취기만으로도 폭발할 지경이었다. 그것이 전쟁중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는 것, 그것이 분단 이데올로기의 애국 메커니즘의 산물이었다는 것, 그리하여 묻혀 있는 것은 묻힌 그대로 두라는 그동안의 제어장치가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 오다가 보니까 위령비 같은 게 있던데 그게 뭡네까?”
그 사람의 술잔은 벌써부터 비워져 있었지만 나는 술 따르는 일을 그만두었다.
“위령비가 맞습니다. 자유수호전적비라고 씌어 있긴 한데…… 육이오가 일어나기 몇달 전 북쪽 유격대가 이 마을까지 침투했을 때 마을 청년 열세명이 죽고 부상자가 스물두명이나 생긴 사건이었지요.”
그때 안주로 묵사발을 내오던 막국수집 주인이 껴들었다.
“아이구 말두 말아유. 그때 얼매나 무서웠는지. 지금은 圉집 안 남았지만 그 죽은 사람들 지사 땐 같은 날 여러 집에서 곡소리가 났으니께유.”
“북쪽 유격대가 무엇 때문에 마을 사람들을 그렇게 죽였답네까?”
안주를 놓고 부엌으로 가던 막국수집 주인이 뭔 소리냐는 듯 몸을 돌렸다.
“지금 뭔 소릴 허시는 거유. 왜 죽였느냐구유? 그래, 여기 청년들이 뭔 잘못을 해 빨갱이들이 그렇게 죽였느냐 그 말 아니유? 허허, 이 양반 이거……”
내가 손사래까지 하며 식당 주인을 달래고 있으려니 그 사람이 또다시 덥석 껴들었다.
“그럼 그때 여기 왔던 그 북쪽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네까?”
“어떻게 되긴. 그래, 죄웂는 사람들을 죽인 그놈들이 한 놈도 죽지 않고 살아갔다 해야 속이 시원하겠수?”
“아저씨, 여기 술 반되만 더 줘요. 막국수도 이제 슬슬 준비해주시구.”
내가 서둘러 잔을 비운 뒤 그 사람에게 건넸다. 마을 사람들과 괜한 일로 시비가 붙어봤자 좋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상대의 마음을 탐색하듯 말을 아꼈다. 그 침묵을 더 참지 못하고 깬 것은 나였다.
“용사장님, 저를 무엇 때문에 만나자고 하신 겁니까?”
그 대답이 엉뚱했다.
“장선생님, 우리가 오늘 마신 술이 음복주라는 거 아셨습네까. 첫 잔은 나를 살려준 그 양반 제사상 음복이요, 자, 이건 선생도 만난 적이 있는 김명자한테 주는 잔이외다.”
술이 조금 오른 듯 그 사람의 말이 헤퍼졌다. 말이 많아지기로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가 보기에 용사장님은 지금 동오골 그 사람들 제사 음복을 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그 사람은 뭔 소리냐는 듯 정색을 했다.
“장선생님, 아니야요. 자고로 음복술은 제살 지내고 나서 나눠 먹는 거 아닙네까. 헌데 지금 우리가 그 음복술을 마실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네까?”
도토리묵사발에 양념으로 넣은 청양고추가 씹히면서 입 안이 얼얼했다. 그 톤이 많이 높았다는 걸 알았는지 그 사람의 목소리가 갑자기 자근자근 낮아졌다.
“그때 우린 동오골로 끌려가기 하루 전 학교 교실에 한 사람씩 불려나가 심문을 받았습네다. 결사대 대장이 권총을 우리 마빡에 대고 이것저것 물어보면 그 옆에서 누군가 그걸 기록했지요. 기록하는 사람이 얼마나 꼼꼼한지, 용 뭐라고, 제가 아니고 재라고? 그렇게 하나하나 인적사항을 확인해 적곤 했지 뭐야요.”
살려달라고, 삼대독자라서 자기는 살아야 한다고, 의용군에 강제로 끌려온 거라고,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부르면서 울음이라도 터뜨린 것은 아닐는지. 까까머리 인민군의 그 앳된 얼굴 하나가 머리에 쉽게 그려졌다.
“세월이 많이 흐른 어느날 불현듯이 그 생각이 떠오른 거야요. 그때 우리를 심문해 적은 그 기록이 어딘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다, 바로 그겁네다.”
이 양반이 지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가, 나는 얼얼한 입 안을 냉수로 헹구면서 적이 의심쩍은 눈으로 그 사람을 쳐다봤다.
“그런 거라도 찾아보자, 그렇게 마음먹은 게 얼마 되지 않아요. 그동안 나름대로 노력을 했습네다. 수항리 복골 오흥춘인가 하는 그 영감님까지 만났시요.”
불길하게도 그 사람 조심하라던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그 기록을 찾아내셨습니까?”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겠습네까. 허나 그때 마분지 공책에다가 그걸 적은 사람이 누군가 하는 건 알아냈습네다.”
그 순간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사군자를 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필체가 좋은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글들을 도맡아 썼던 것이다. 설마…… 그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장선생님 부친께서 그걸 기록하셨다는 얘길 들은 거야요. 그거 하나만은 분명합네다.”
나는 망연히 그 사람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제 술을 더 먹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때였다.
“제 선친께선 결사대 대원도 아니었습니다. 다친 다리 때문에 거동이 많이 불편하셨으니까요.”
그러나 그 사람은 내 말 같은 건 개의치 않는 듯 자기 할 말만 했다.
“기록을 한 사람이 그걸 보관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네다. 하지만 그럴 경우도 있지 않을까 싶어 말씀을 드리는 거야요.”
“그런 경우라니요. 그건 말도 안됩니다. 지금 와서 그래……”
괘씸하고 괘씸했다. 침묵으로 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그 사람 역시 한동안 어둠이 내려앉은 막국수집 마당만 내다보고 있었다.
“국수를 지금 뽑을까유?”
막국수집 사람이 주방 쪽문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여줬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하기 어려우실 겝니다만 그래도 다시 한번……”
이런 망할…… 스크랩북을 통해 확인한 그 사람의 집착이 새삼 가슴에 서늘하게 와 닿았다.
“그때 우리 아버지가 그런 걸 지니고 있을 이유가 결코 없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직접 쓴 기록을 가벼이했을 그런 양반이 아니라는 걸, 저도 들어서 알고 있습네다.”
점입가경, 그 사람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유해 발굴보다 더 중요한 게 그 기록이라는 걸 장선생님두 잘 알고 계실 거야요. 나 같은 처지에서 기댈 데가 그런 거밖에 더 있겠습네까.”
일을 벌여도 크게, 제대로 하자는 것 아닌가. 그러나 내가 마음을 다잡기도 전에 그 사람이 잔을 건네왔다.
“이제 우리가 믿을 건 장선생님이나 내 기억입네다. 우리가 마음만 잘 맞추면 그 일을 하는 데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네다.”
참으로 기가 찼다. 우리, 그리고 그 일이라니? 음모의 연기는 이미 속수무책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일을 크게 벌일 생각은 없습네다. 그동안 여러가질 생각해봤지만 좀 전 장선생님이 딱 들어맞는 말씀을 하신 것처럼 우선 우리 맘속에 살아 있는 지뢰부터 제거하고 볼 일이다 바로 그거야요.”
내 휴대폰 벨이 울렸다. 정미소 배진태다.
“야, 효식이 너 인마 어딘데 아직 안 오고 자빠졌는 거야?”
저녁식사를 한 한미옥에서 아예 이차를 시작했으니 빨리 오라는 배진태의 목소리 톤이 높은 것으로 보아 벌써 꽤 취한 게 분명하다. 한미옥 주인 조화자의 깔깔 웃음까지 들리더니 느닷없이 배진태 아닌 다른 사람 목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너 인마, 교장 해먹었다고 아직까지 거드럭거리기냐. 야, 장효식 빨리 오란 말이야. 이 새끼들이 날 빨갱이라고 몰아치지 뭐냐. 야, 북한이 핵을 가지고 있는 거 그거 대단한 거 아니냐. 미국놈들한테 큰소리칠 수 있는 힘이 바로 핵이라 그거야. 그런데 그걸 왜 없애라고 지랄들이냐 그거야. 이 새끼들 이거 완전히 수구골통이라 내가 정신교육 좀 시키고 있는 중이다, 야 인마……”
천승민이다. 그는 중학교 생물선생을 하다가 평교사로 명퇴한 뒤 퇴직금으로 무슨 건강식품 대리점을 냈다가 그것마저 털어먹었다고 했다. 원래 반골 기질이라 교직에 있으면서도 높은 사람들과 자주 부딪쳐 인사 때마다 기피 인물로 이름이 나 있었다.
배진태가 다시 휴대폰을 잡아, 천승민은 물론 농협조합장을 지낸 한기태까지 합석을 하게 됐다며 그 경위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뒤 한시간 안으로 안 오면 내 앞으로 이차 술값을 달아놓겠다는 엄포다. 한기태는 지난여름 국군병사 유골이 묻힌 데를 제보해 텔레비전 화면에까지 나왔다.
보지 않아도 그 술자리의 소란이 어림잡혔다. 칠순이 가까운 나이들이고 보니 모여 앉으면 모두 자기 얘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도대체 남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 나이 들면서 나타나는 두드러진 현상이다. 게다가 귀까지 어둡다 보니 목소리만 높은데다가, 남의 얘기는 모두 개소리이고 자기 생각만 구구절절 명심보감이다. 정치 등 시국 얘기만 나오면 이건 숫제 싸움판이다. 흑 아니면 백, 그 나눔의 편가르기에 가차가 없다.
내가 읍내 친구들과의 휴대폰 통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그 사람이 내 앞으로 잔을 내밀면서 말했다.
“장선생님, 참 부럽구만요. 나는 이 나이까지 얘 쟤 할 친구가 하나도 없습네다.”
그 사람의 커다란 눈이 내 눈길에서 오래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 공허한 눈길에 마주친 순간 심사가 뒤틀렸다.
“친구보다 더 절실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나는 술상 옆에 놓여 있는 그 사람의 스크랩북을 턱으로 가리켜 보였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 비아냥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은 채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벌써 십년도 넘는, 오래전 일이야요. 테레비 뉴스에서 미국이 육이오전쟁 때 북쪽에서 죽은 자기네 국적 병사 유해를 발굴해 가는 장면을 보았습네다. 지금도 미국은 그 사업을 위해 북쪽에 자기네 관리까지 상주시키고 있다는 겁네다. 그런데 우린 북쪽이고 남쪽이고 그런 일에 관심도 없지 않습네까.”
조금 높아진다 싶던 그 사람 목소리가 다시 낮아졌다.
“중국에서 온 오퍼상들을 데리고 화천 파로호(破虜湖)에 갔을 때야요. 육이오전쟁 때 거기서 중공군 수만명을 수장시켰다고, 가이드가 당시 대통령이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얘길 하는 순간 중국 사람들 얼굴이 굳어지는 걸 봤습네다. 그런데 그날 동행했던 사람 하나가 나한테 이제 이쯤에서 그 중공군 희생자들 영혼을 달래는 무슨 표시라도 하나 해줘도 괜찮지 않겠느냔 얘기를 했습네다. 물론 나만 듣게 낮은 소리로 말이야요.”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가. 나는 짐짓 그의 말을 무지르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요. 작년에 처음 시작했다는 국군 유해 발굴만 해도 상황이 그만큼 바뀌었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까 장선생님 말씀처럼 늦어도 너무 늦은 거야요. 나라가 할 일을 제대로 안했기 때문이야요. 국군 희생자에 대해 그 정도였으니 정말 억울하게 죽은 양민들이나 북쪽 병사들에 대해서는 발굴 얘기를 아예 꺼낼 엄두도 못 냈던 것입네다.”
“이제 남북이 제대로 만나 종전선언이라도 하면 상황이 훨씬 달라지겠지요.”
그러나 그 사람은 마뜩찮은 얼굴로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이제 와서 종전이라고요? 반인륜적 살인자도 십오년이 지나면 공소시효가 없는 이 좋은 나라에서 벌써 반세기 저쪽에서 있었던 일을 아직도 함부로 얘기 못하는 판에 종전선언을 한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네까. 말로는 통일, 통일 하면서도 실상은 누구도 이 전쟁이 끝나는 걸 원치 않고 있다 그 말이야요.”
막국수가 나왔다. 내가 식초와 겨자 등을 넣은 뒤 이렇게 두 젓갈로 비벼야 한다고 시범을 보였지만 그는 젓가락을 들 생각도 안했다. 그 까탈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 생사 확인만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얘깁네다.”
그 사람의 어조가 단호해졌다.
“장선생님, 정말 그때 춘부장께서 기록한 그 공책, 아니 그 내용이라도 대충 뒤져보신 기억이 없으십네까?”
허허. 너무 억에 넘는 말이라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처음부터 크게 벌이자는 게 아닙네다. 장선생님과 내가 직접 겪으면서 본 그 일부터 시작하자는 것이야요. 그렇게 민간 차원에서 그 일을 벌이다 보면 국가가 나서겠지요. 물론 북쪽과 함께하면 더 좋겠지요. 그러나 그게 쉽지 않을 땐 우선 이쪽에서 먼저 시작하자는 겁네다. 못할 게 뭡네까. 대통령까지 방북하는 이 마당에 땅속에 묻혀 있는 그 사람들 문제를 놓고 얘기 못할 게 뭐 있느냐 그거야요.”
예사롭지 않은 그 눈빛에 당찬 결기가 번뜩였다.
“장선생님도 나와 같은 생각이실 거야요. 그게 그 시대를 함께 산 우리 모두의 책임이기도 합네다.”
지뢰밭에서 지뢰를 제거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책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을 그 사람의 비장한 목소리가 입증하고 있었다.
사각의 링 위에
읍내에서 술자리를 하고 있을 배진태 등 그 시대를 함께 산 친구들의 얼굴을 머리에 떠올렸다. 정말 이쯤에서 그들과의 만남을 핑계로 그 사람과의 자리를 끝내야 할 것 같아서였다. 어쩌면 그 사람이 막국수를 먹기 위해 젓가락만 들었어도 나는 그를 뒤로하고 일어섰을지도 모른다. 관용이 지나치면 오히려 화를 부를 수도 있을 터.
그러나 그 사람은 내 눈길을 잡는 일마저 포기한 채 자신이 만든 스크랩북만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음 흔들림을 애써 감추고 있는 내색이 분명했다. 덮씌워진 김명자 귀신이, 아니면 동오골 그 원귀들이 또 찾아왔는지도 모르는 일.
애써 무연해 뵈려는 그 눈길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뭔가 그 사람이 원하고 있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내 입을 통해 말하고 싶은 조바심이었다.
기억은 그냥 기억일 뿐 어느 것도 그 실재와 정확히 일치할 수는 없다. 아버지는 자신의 필적이 담긴 종이들을 차곡차곡 모아 시렁 위에 올려놓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시렁 위의 그 종이뭉치가 보이지 않았다는 그런 기억이라도 살아날 수 있을지 모른다.
어느날 그 종이뭉치 속에서 공책을 본 것 같다는, 있지도 않은 거짓 기억을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은 이 충동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러나 내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용사장님, 오늘 이 자리는 제가 계산할 거니 읍내 나가 한잔 사십시오.”
내 친구들 앞에 홍천 용씨, 용우성의 존재를 까발리고 싶은 충동이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칠십 평생의 우여곡절과 그가 지금 꿈꾸고 있는 일을 그들 앞에 얘기할 어투의 그 사특함까지도 어금니에 질금질금 물렸다.
시골 막국수집 화장실에 서서 나는 그들 앞에 쏟아놓을 말을 고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내 말에 취해 은연중 그 사람의 생각까지 내 목소리를 빌려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사람 앞에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던 그 사람 일의 당위와 그 가치를 역설하게 될지도.
내가 그때 거기 있었다. 그리고 보았다.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리라.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오랜 세월 내 안에 살아 숨쉬고 있는 그 지뢰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각오해도 좋을 것이다.
죽었지만 죽지 않고 내 속에 살아 있는 볼이 팡팡하던 김명자에 대해서도 음담조로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용우성의 꿈에도 내 꿈에도 나타나 울부짖는 동오골의 그 원혼들 얘기를 할 때는 진저리 같은 전율로 몸을 떨 수도 있을 터.
비척비척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길인데, 아직 만나지도 않은 친구들이 던진 돌이 내 말과 공중에서 부딪쳐 지뢰 터지듯 폭발하고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그 사람 앞에 앉았다.
“용우성 사장님, 내 친구들을 만나시겠습니까?”
그 사람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친구들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평통자문위원이었던 친구도 있고, 해병전우회 회장도 있습니다. 반골 퇴직 선생도, 유해 발굴 제보자도 있다 그겁니다. 그 사람들 앞에서도 지금 나한테 한 것처럼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그냥 술취한 상태의 농담이었을 뿐이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그 일이 우리 시대의 정서에 아직은 이르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취중인데도 그 사람은 내 어리석은 말을 꽤 그럴싸하게 받았다.
“아, 좋습네다. 장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그 사람들 만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지 뭐야요. 우리가 장선생님 그 친구분들 하나 설득하지 못하면서 뭔 일을 벌이겠습네까.”
우리라니, 이런 제기랄. 그 사람이 던진 투망 속에 속수무책으로 갇히고 있다는 느낌이 혼몽한 취기 속에서도 또렷했다.
그때 식당 마당의 어둠을 헤치며 차 한 대가 들어서고 있었다. 식당 주인이 호출한 대리운전이 온 것이다.
일이 대책없이 꼬여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치명적인 펀치를 맞고 뻗을 수도 있는 사각의 링 위에 그 사람을 올리고 싶은 유혹의 선을 이미 넘어서고 말았다.
짜맞춘 프로레슬링 태그매치처럼 내가 결정적 위기 상황에 뛰쳐나가 멋진 드롭킥 한방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오기가 손에 쥐어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