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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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황정은

황정은 黃貞殷

1976년 서울 출생. 200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주요 작품으로 「무지개풀」 「문」 「오뚝이와 지빠귀」 등이 있음. aamudo@empal.com

 

 

야행(夜行)

 

 

한씨와 고씨는 그 부근에서 헤매고 있었다.

곰과 밈은 그들을 모퉁이에서 발견했다. 한씨는 귀마개 천이 달린 모자를 썼고 고씨는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깊은 밤이었다.

아빠.

곰이 한씨에게 말했다.

왜 여기에 있어.

여기 어디라며.

여기가 아니라 저기라고 했잖아.

저기가 어디냐.

저기 위쪽, 문방구가 있는 모퉁이에서 왼쪽으로 돌아야 한다고, 말했잖아.

한번 봐라, 한씨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기 어디에 문방구가 있는지, 한번 보라고.

대문과 담을 부수고 새롭게 벽을 올리고 있는 건물이 많은 골목이었다. 시멘트 반죽이 될 모래가 여기저기에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이상하네.

밈이 말했다.

분명히 여긴데, 전에 왔을 때보다 길이 좁아 보여.

어두워서 그럴 거야. 공사중인 집이 많아서.

곰이 이렇게 말하며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들은 곰을 따라서 좀더 위쪽의 모퉁이로 이동했다. 여길 봐, 곰이 말했다.

이 건물. 새로 짓고 있잖아. 여기가 문방구 아니었나?

그런가.

잘 봐.

그러네.

없어졌군. 이러니 몰랐지.

그들은 또다른 골목으로 접어들어서 계속 걸어갔다. 어디선가 개가 짖고 있었다. 골목에 그들의 발소리가 자박자박 울렸다. 빌어먹을, 고씨가 말했다.

내가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다.

엄마.

곰이 말했다.

알겠는데, 우린 싸우러 가는 게 아니고, 이야기하러 가는 거야. 그렇지?

그렇더라도.

밈이 말했다.

이거 지금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안될까, 엄마.

빌어먹을.

그들은 다섯번째와 여섯번째 건물 사이에 섰다. 어, 곰이 고개를 갸웃했다. 두개의 건물은 똑같아 보였다. 군데군데 벽돌을 박은 상아색 건물이었고, 출입구는 남쪽을 향해 있었다. 꼭대기층의 비스듬한 천창이나 가스파이프, 현관에 달린 둥근 등, 사선으로 정리된 주차선, 유리덧문의 손잡이까지도 같았다. 그들은 건물 주변을 돌며 구별할 수 있을 만한 단서를 찾아보았다. 다섯번째 집의 주차장엔 자전거 두 대가 묶여 있었고, 여섯번째 집엔 영업용 승합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여기 있네.

한씨가 차를 알아보고 조수석 문에 붙은 스티커를 읽었다.

천일특수방수.

그들은 유리덧문 앞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계단엔 불이 꺼져 있었다. 밈이 문고리를 잡고 앞뒤로 조금 흔들어보았다.

잠겼어.

벨을 눌러.

위층에도 불이 꺼져 있는 것 같은데.

지금 몇시지?

0시 36분.

잠들었으면 어떡해.

우리가 온다고 말해두지 않았어?

비켜라.

고씨가 나서서 벨을 눌렀다. 그들은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였다. 위층에서 희미하게 벨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씨는 머플러에 코를 묻고 다시 한번 깊숙이 벨을 눌렀다. 쇠붙이 스피커폰에 불이 들어왔다.

누구세요.

나야.

누구.

우리 여기 아래에 와 있어.

고씨가 말했다.

와 있다고.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고씨는 스피커폰을 바라보았고, 곰은 고씨를 바라보았고, 한씨는 불이 꺼진 계단 위쪽을 바라보았고, 밈은 모두에게서 눈을 돌리고, 건너편 집의 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다려요.

스피커폰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지금 검정을 내려 보낼게요.

그들은 뒤로 물러나서 검정을 기다렸다. 계단에 불이 켜졌다. 머리는 까치집이고, 어깨는 구부정하고,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소녀가 인쇄된 셔츠를 입은 검정이 계단 위쪽에 나타났다. 그는 슬리퍼를 철떡거리며 계단을 내려와서 그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깨웠나, 이거 네게는 미안하게 됐다.

한씨가 검정에게 말했다.

뭘요.

검정이 낄낄 웃으며 말했다.

나의 경우, 어차피 자지도 않고 있었는데요.

 

 

그들은 불이 켜진 현관으로 들어섰다. 싱싱하게 자란 치자 화분이 신발장 곁에 놓여 있었다. 백씨와 박씨가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을 맞이하러 나왔다. 어서 오세요, 형님. 백씨가 웃으며 말했다.

늦었는데, 어려운 걸음들 하셨네요.

그는 아래쪽 단추 몇개를 채우지 않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머리털은 헝클어져 있었고, 맨발에 양복바지 차림이었다. 박씨는 그의 곁에서 눈을 굴리며 서 있었다. 잠들기 전에 바르는 크림을 듬뿍 발랐는지 얼굴이 균일하게 반짝거렸다. 한씨와 고씨는 말없이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갔다. 곰과 밈은 현관에 서서 거실을 바라보았다.

거실은 안쪽으로 깊었고, 등을 한개만 켜두어서 조금 어두웠다. 바닥재며 식탁이며 모두 새것이었다. 곰과 밈이 예전에 그 집에서 보았던 낡은 것들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다. 우린 이제 가면 안되나, 밈이 작게 중얼거렸다.

뭘 하니, 백씨가 말했다.

너희도 올라와라.

그들은 거실 중앙을 비우고, 멀찍이서 둥글게 둘러앉았다. 가스레인지에서 주전자가 김을 뿜었다.

일단 차 좀 드세요.

백씨가 말했다.

집사람이 귤껍질을 말려서요, 그걸 좀 끓이고 있었어요.

됐어요, 삼촌.

고씨가 딱 잘라 말했다.

나는 목마르지 않아요.

백씨가 손짓을 하자 박씨가 입을 다물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찻잔을 준비하는 소리가 났다.

됐다니까.

형수님, 그러지 말고 좀 드세요.

고씨는 머플러를 풀어서 다부지게 뭉친 다음 바닥에 내려놓았다. 곰은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서 고씨의 새빨간 코를 바라보았다.

앉아라.

백씨가 말했다.

너도 앉아.

박씨가 쟁반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모두의 앞에 찻잔이 한개씩 놓였다. 검정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머리를 긁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이봐, 동생.

한씨가 백씨에게 말했다.

우린 여길 어렵게 찾아왔어. 근처에서 한참 헤맸다고.

그러셨어요? 전화를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전화고 뭐고, 고씨가 말했다.

삼촌, 오늘은 제가 대단히 섭섭한 얘기 좀 하려고요.

그러세요, 형수님.

제가 오늘 저 동생한테 전화를 한 거예요.

고씨가 손가락을 들어 박씨를 가리켜 보였다.

뭘 해달라는 것도 아니었고요, 이런저런 일로 내가 하도 우울해서요, 위로라도 좀 들을 수 있을까, 싶었을 뿐이었는데요, 저 동생 하는 말이요,‘그런 얘기는 이제 지겨우니 하지 마세요, 형님,’이러는데요, 자기한테 계속 그런 얘기를 하려면 다시는 전화를 하지 말라는 거였고요, 내가 일단 전화는 끊었는데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보통 약이 올랐어야죠, 그렇지 않았겠어요, 삼촌?

그건 그렇지요, 형수님.

고씨는 점퍼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래서 내가 다시 전화를 걸었어요, 내가 뭘 어떻게 했다고 나를 이렇게 대하느냐, 우리 사이의 문제가 뭐냐고 물었더니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끊어요, 이런 빌어먹을 경우가 있나.

욕은 하지 마세요, 형님.

박씨가 말했다.

욕은 하지 마시라고요.

자네는 그저 입을 다물고 있어.

고씨가 말했다.

윗사람 약 올리는 방법도 가지가지지, 내가 지금 자네보다 없이 산다고, 사람을 아래로 보고 말이지.

아이고, 그런 말씀 마세요, 형수님.

삼촌, 그런 말씀이 아니고요, 여덟번을요, 전화를 끊고, 전화를, 전화를 끊고, 끊어버리고,‘형님이 이러는 것을 보니 인생을 알겠다,’고 하면서요, 아니요, 내 인생을 뭘 안다고,‘안다’고 해가면서, 사람이 망가졌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느냔 말이지.

내가 언제요.

박씨가 말했다.

마음이 짠하다고 했지,‘망가졌다’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게 그거지.

그게 어떻게 그거예요.

그게 어째서 그게 아닌가.

내 말은, 형님이 옛날엔 날씬했고 인형처럼 예뻤다, 그런데 이젠 나이가 들고 보니 예전하고 모든 게 너무 달라서 마음이 짠하다, 그런 의미였지요.

그러면 그게 그거지.

그게 어째서 그거냐고요.

아니, 글쎄, 그걸로 치자면 말입니다, 하고 한씨가 말했다.

제수씨 쪽이 훨씬 예전부터 망가져 있지 않았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형님.

백씨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곰은 텔레비전이 걸린 벽 쪽을 바라보았다.

……46인치인가.

 

 

빌어먹을.

고씨가 벌떡 일어나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식기 선반에서 컵을 하나 꺼낸 다음 물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저녁에 국수를 해먹었는지 건면 부스러기가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고, 도마엔 파를 썬 흔적이 남아 있었다.

차를 드시지 않고요, 형수님.

거실에서 백씨가 말했다.

됐어요.

고씨는 수도꼭지를 눌러서 물을 받았다. 가득 따라서 마시고, 다시 한 컵을 가득 따라서 마시고, 마지막엔 반 컵을 따라서 마신 뒤 컵을 개수대에 던졌다. 컵이 개수대에서 솟구쳤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씨가 수도꼭지를 내버려둔 채 자리로 돌아왔다.

여덟번을요.

밈이 한숨을 쉬며 일어나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물을 잠그고, 컵을 줍고, 하는 김에 도마에 얹혀 있던 칼도 씻어서 씽크대 안쪽에 잘 꽂아두었다.

여덟번이나.

검정이 문을 열고 거실을 내다보았다. 한씨는 뭔가를 찾는 듯 점퍼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고, 고씨는 근처에 있던 걸레를 끌어당겨 코를 닦고 있었다. 곰은 자기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고, 밈은 부루퉁한 얼굴을 하고 씽크대 앞에 서 있었다.

백씨가 검정을 보고 손짓을 했다.

난방 온도 좀 확인해봐라, 너무 뜨겁다.

검정은 거실 벽에 붙은 보일러 컨트롤러를 들여다보았다.

22도.

검정이 허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이 경우, 낮출까요?

아껴야 오래 땐다.

검정은 다이얼을 왼쪽으로 조금 돌려놓고 방으로 돌아갔다. 집 안 어딘가에서 구궁, 구궁, 하며 돌아가던 보일러가 조용히 숨을 죽였다.

책.

곰은 생각했다.

책.

책.

어떡하지.

책.

책.

손가락이.

너무.

책.

멀다.

책.

책.

책.

거기다 이 시계. 아무래도 고장난 거 아니냐. 왜냐하면. 그보다. 보통 시계소리는 이렇지 않잖아.‘똑’하고‘딱’은 아니더라도. 그거야, 손목시계니까.‘틱’이라든지.‘째깍’이라든지. 그런데.

책.

책.

책. 책. 무슨 시계소리가. 책. 책. 책. 그보다. 사람들은 내가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바쁘다. 하다못해 지금 오른쪽 두번째 어금니와 첫번째 어금니 사이에 낀 옥수수껍질 같은 거. 아까부터 그런 것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책. 책. 책. 책. 책. 거기다 이렇게 앉아서도 여러가지를 알 수 있어. 예를 들자면. 책. 책. 예를 들면, 이 소리가. 책. 책. 책. 책. 나는 여태까지 이 소리의 간격을 유심히 재보았다. 책. 책. 책. 책. 책. 6과 12 사이엔 삼십번의‘책’이 있고 다시 12와 6 사이엔 삼십번의‘책’이 있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 미묘하게 늘어지거나 빨라져서 열여덟번이 되기도 하고, 스물일곱번이 되기도 하고, 심할 때는 아홉번이라든지, 마흔다섯번이 될 때도 있다. 내가 이것을 알아챈 것이 넉달 전이었으니까, 지금은 얼마나 꼬였는지 알 수 없다. 이 시계 속의 세계에서는, 아무도 대답할 수 없는 거야. 지금이 몇시인지 영원히 알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는 얘기다. 책. 책. 책. 책. 책. 책. 이거 봐. 책. 책. 책. 책. 그렇지? 책. 책. 조금 전의‘책’과‘책’사이엔‘책’이 세번은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간격이 있었다. 모두 이것을 알까. 이것은 시계니까 당연히 시계로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책. 책. 책. 지금이 몇시냐고 나한테 물어봤자. 책. 책. 왜 아무도 말하지 않지. 책. 저 사람들은 피를 흘리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고 싸운다. 그런 다툼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책. 책. 책. 책. 책. 어라. 책. 책. 방금 그것과 비슷한 말을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읽은 것 같은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인가.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어느 쪽이든, 앨리스니까. 그림도 대사도 없는 책을 뭐 하려고 읽는담. 이렇게 말하자면, 피도 눈물도 없는 싸움을 뭐 하려고 읽는담.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아니. 엄마는 우나.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그런데 너무 조용하다.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담배를 하나 피우자. 책. 책. 그냥 그렇다는 얘기지.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십대 때부터 담배를 피우면. 책. 책. 이십대에는 뇌가 그냥 칠십대의 것처럼 된다던데. 책. 책. 책. 책. 아니다. 본드였던가. 책. 책. 책. 본드 같다. 책. 책. 책. 책. 그래. 본드다. 나는 본드 같은 건 하지 않으니까. 책. 책. 책. 책. 책. 책. 책. 하지만 시험해볼까. 옥수수밭의 수수는 수수밭 주인의 옥수수이고 수수밭의 옥수수는 옥수수밭 수수의 주인이다, 수수밭의 옥수수는 옥수수밭 수수의 옥수수이고…… 이상하다. 어딘가 엉켰다. 다시 해보자.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머저리. 책. 책. 책. 책. 그게 누구냐면.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지금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았냐. 책. 책. 책. 앗. 빠졌다. 책. 책. 뭐냐면. 옥수수껍질. 책. 책. 책. 책. 책. 책. 뭘 좀 먹어야지. 책. 책. 차나 마시자. 책. 책. 책. 차, 나, 마, 시, 자. 차나, 마, 시, 자. 차나마, 시, 자. 차나마시, 자. 차나마시자. 차나, 마시자. 책. 책. 책. 책. 책. 책. 이거 배가 살살 아픈데. 책. 책. 책. 책. 화장실에서 설사 좀 하면, 싫어하려나. 책. 책. 책. 책. 책. 알 게 뭐냐.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하지만. 책. 책. 아무래도 소리가, 날 텐데. 책. 책. 책. 책. 책. 책. 책. 빌어먹을.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앗.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책. 뭐라고?

책.

책.

책.

책.

뭐라고?

여덟번을요.

고씨가 말했다.

 

 

고씨는 걸레를 쥐고 자기 앞의 바닥을 무심코 한번 닦았다.

도대체,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고, 응원해주지 않고, 존경해주지도 않아, 시원하게 말해서 내 역사에 실수라고는요, 삼촌,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인생 말년에 댄스홀에서 시간을 약간 보냈다는 것뿐이었는데요.

그 얘기는 지금 이 얘기하고는 전혀 다른 얘기예요, 형수님.

그런 게 아니고요, 삼촌, 여덟번이나 전화를 그렇게 끊는다는 것은요, 보통 정도로 경멸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저게 예전에 놀던 계집이다, 그런 생각이 없고는요, 안 그래요?

아니요.

박씨가 말했다.

형님이 저한테 욕을 하셨잖아요. 수화기를 들자마자 욕을 하시는데, 내가 그걸 가만히 듣고 있어야 하나요?

아니지.

고씨가 말했다.

애초에 자네가 날더러 짠하다는 것도 말이지, 이게 이제, 저가 나를 짠하게 생각할 만한 입장이다, 이런 입장이니까 짠하다느니, 망가졌다느니.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글쎄, 그게 그거라니까.

답답해서, 내 가슴이야.

형편이 좀 피고, 이제 사는 것 같으니까, 저보다 못난 윗사람이 안 보이는 거겠지.

그 말씀 잘하셨네요, 못난 윗사람.

뭣이.

아이고, 백씨가 웃으면서 박씨를 향해 말했다.

이거 자네가 좀 져주면 안되나.

내 잘못이 무엇일꼬.

무엇이라니, 하고 고씨가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가 그렇게 옛 생각을 못하고 오만해진 거지. 우리 애들 같았으면 내가 매를 때려서라도 자네 버릇을 고쳤어.

때리세요.

박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형님 분이 풀릴 때까지, 그냥, 때리시라고요.

 

 

밈은 거실을 가로질러서 검정의 방으로 들어갔다. 하늘색 벽지를 바른 길쭉한 방이었다. 골목을 향한 창엔 블라인드가 걸려 있었다. 잡지며 교과서며 게임 씨디며 아무렇게나 벗어둔 옷들이 책상에 쌓여 있었고, 바닥엔 빈 푸딩컵이 널려 있었다. 검정은 창가에 놓인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가 컨트롤러에 달린 스틱을 왼쪽으로 움직이자, 모니터 속의 기묘하게 생긴 덩어리도 왼쪽으로 움직였다. 밈은 출입구 근처에 앉아서 멍하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검정이 흘끔 돌아보고 말했다.

푸딩 먹을래?

됐어.

싫어해?

그거 먹을 기분이 아니야.

그래.

검정이 낄낄 웃었다.

뭐 해, 밈이 말했다.

그래서 넌 지금 뭘 하는 거야.

이 경우, 왕자의 덩어리를 굴리고 있지.

그게 뭔데.

게임.1

더 말해봐.

덩어리를 굴려서, 이것저것 붙여서, 크게 만든 다음, 아바마마에게 바치면, 아바마마가 덩어리를 감정해서 우주로 보낸다. 그게 별이 된다. 별자리도 만들 수 있어. 백조자리나 큰곰자리를 클리어하는 경우, 멜빵치마를 입은 여자아이가 나와서‘코스모가 느껴져’라고 말을 해.

코스모라니.

우주랄까.

우주.

세계랄까.

음.

굴려볼래?

밈은 컨트롤러를 받아서 검정이 가르쳐준 대로 스틱을 움직였다. 덩어리가 천천히 구르기 시작했다. 클립을 붙이고, 지우개를 붙이고, 모기향을 붙이고, 두루마리 휴지를 붙이고, 이것저것 붙이다가 고양이를 붙이고, 줄곧 붙이다가 우편배달부도 붙였다. 스쿠터도 붙이려고 해봤지만 약간 흔들어놓았을 뿐, 붙일 수는 없었다.

덩어리보다 작은 것만 붙일 수 있어.

검정이 말했다.

작은 것들을 줄곧 붙여서 커지면, 좀 전에 붙이지 못한 것들도 붙일 수 있지.

으윽.

밈이 말했다.

이상한 게 붙어버렸다.

전봇대잖아.

덩어리는 이제 막대가 꽂힌 솜사탕 모양이었고, 덕분에 예측이 어려운 방향으로 성큼성큼 구르고 있었다. 덩어리지만, 반드시 둥근 것은 아니야. 검정이 말했다. 나도 알아. 밈이 말했다.

지금의 경우, 뾰족한 것은 되도록 붙이지 말고 놔둬.

뾰족한 게 뭐야.

송전탑이라든지.

알겠어, 굉장히 마른 사람 같은 거 말이지.

유조선이라든지.

……

……

여기선 어느 쪽으로 굴려야 되지.

바다로 내려가.

방금 고래를 붙였다.

굴려.

밈의 덩어리는 이제 바다를 철벅철벅 돌아다니며 작은 섬들을 붙이고 있었다.

내 보통 약이 올라서 뭘 어떻게 했느냐, 이게 이렇게 문제가 되어서 전화가 딸꾹, 여덟번을 탁, 그러니까 여덟.

거실에서 고씨가 말했다.

뭐라고요?

박씨가 말했다.

여보, 천천히 얘기해.

한씨가 말했다.

덩어리가 너무 커졌어.

밈이 망망한 바다 위로 멍하게 덩어리를 굴리며 말했다.

왕자는 이제 보이지도 않네.

 

 

거실은 이제 조용했다. 모두 식어버린 찻잔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고씨가 이따금 딸꾹질을 했다. 한씨는 모자를 벗어서 손에 쥐고 우묵한 쪽을 들여다보았다.

딸꾹.

내 생각으로는 말입니다, 하고 한씨가 입을 열었다.

제수씨하고 저 동생이 우리에게 얼마나 잘해주었냐, 이 말입니다. 1999년에 말입니다, 보증문제로 내 집이 넘어가지 않았습니까, 나는 서류에 이름 하나 써주었을 뿐이었고, 그게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그들도 알고 나도 알았는데도, 이거 가차가 없더란 말입니다, 월급이 차압되고, 집이 경매에 넘어가고, 써먹을 수 있는 정신이라곤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 거냐고 전화를 해온 사람이 저 동생, 하나뿐이지 않았느냐, 내 말은 이런 말입니다.

딸꾹.

친형제도 외면하고 있던 상황에, 제수씨하고 저 동생이 친척으로서는 정말, 최선을 다해주지 않았습니까, 우리 가족이 집을 나와서 장곡, 정곡, 그러니까 거기가.

장곡입니다, 형님, 백씨가 말했다.

장곡입니다, 제수씨, 두시간에 한대씩 마을버스가 다니고, 미역하고 김하고 라면하고 담배, 이렇게 딱 네가지만 파는 구멍가게가 하나 있고, 가로등도 없고, 사람이 사는 집보다 무덤이 많은 그 산골마을 말입니다, 여태 살던 집에서 몸만 가지고 쫓겨나 거기 들어갈 때, 우리 가족을 승합차에 실어서 데려다준 사람이 저 동생이었고, 다 쓰러지고 갈라져서 난방도 되지 않는 흙집 바닥에 우리 가족 누워 자라고 스티로폼을 깔아준 것도 저 친구였습니다, 기운 좀 내라고, 움직이라고, 다시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모두 웃을 수 있도록 농담도 하면서 말입니다, 내 생각엔 정말로, 이 동생이 사람이다, 그랬는데 말입니다, 제수씨, 정곡, 장곡, 정곡, 그 집이 말입니다, 북쪽엔 강이요, 사방 오백미터 반경에 집이라고는 나란히 딱 두채, 우리하고 옆집, 이랬는데 말입니다, 바로 그 옆집에서 대문 밖에 커다란 개장을 놓고 개를 십여마리 기르고 있었습니다, 개장이 쩍쩍 얼어붙는 계절에, 인기척에 익숙하지 않고, 식용으로 아무렇게나 사육되던 개들은 작은 기척만 들어도 악을 쓰듯 짖습니다, 저는 언제나 자정 넘어서, 버스가 끊긴 뒤에나 마을 어귀에 도착했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그 집까지 한시간을 걸어서 들어갑니다, 늦은 밤에 말입니다, 개들이 짖습니다, 그러면 애들이 랜턴을 들고 마당으로 나와서 산모퉁이를 비춰봅니다, 저희들 아빠라는 걸 확인한 다음엔 랜턴 불빛으로 발끝을 겨냥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저는 그 불빛으로 발밑의 돌이나 파인 곳을 약간이나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희미하고 창백한 불빛, 먹구덩이 같은 어둠 속에서 그 불빛만 보고 걸어가는데, 그때 먹은 눈물의 맛을 제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외로울 수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데요, 하고 박씨가 말했다.

그게 제 탓은 아니잖아요.

그러면 그게 내 탓이란 말씀입니까, 제수씨.

그냥, 제 탓이 아니라고요.

물론이지요, 하고 한씨가 말했다.

내 말은, 그런 와중에도, 아, 내게는 저 동생하고 제수씨가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는데 말입니다, 이런 일이 생겨버리니까, 아내하고 내가 얼마나 배신감이 들고 외로웠겠냐는 말입니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요, 하고 박씨가 말했다.

저도 그렇다고요. 제가 이틀에 한번씩은 꼭 저 형님 전화를 받는데요, 가만히 들어주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예요. 매일매일 어두운 이야기뿐이니까, 지겹고 과민할 때가 충분히 있는 거라고요. 그래서 전화 좀 몇번 끊었다고 이 한밤에 사람을 죽일 듯이,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 거냐고요. 저 형님이요, 저한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요, 매일매일매일매일, 전화로 여러가지 어두운 일을 들어야 하는 입장에서는요, 매일매일매일매일, 절어버린다고나 할까, 기운을 좀 내보세요,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요,‘자네는 내 입장이 되어보지 않아서 모르네,’이런 식이니까, 그러면 애초에 전화는 왜 하셨을까, 제 입장에서는요, 내가 저 형님한테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나한테 들이대는 게 많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잖아요.

뭐, 들이대다니.

고씨가 찻잔을 넘어뜨리며 일어났다. 고씨 몫의 차가 거실 중앙을 향해 번져갔다. 그것 참, 하고 한씨가 혀를 차고 말했다.

제수씨, 사람이 보통이 아니네요.

보통이지요.

보통입니까.

이 정도면 보통이지요.

아이고, 백씨가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만 하시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서 주무세요.

삼촌.

형수님도 이제 그만 하시고, 돌아가세요.

삼촌이 지금 우리를 쫓아내는 거예요?

더 얘기 나눠봤자 입장이 이렇게 다른데, 좋을 게 있겠습니까.

이대로라면 나는 다시는 자넬 안 볼 셈이네, 한씨가 말했다. 백씨는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되어도, 할 수 없지요.

뭣이.

집사람은 혈압에 문제도 있고, 이제 슬슬 걱정이 되는 참이라서 말입니다. 저 사람 얼굴 붉은 것 좀 보세요. 더구나 우린 아침에 방수를 하러 가야 합니다. 형님, 저는 형님과 형수님에 대해서 좋은 기억을 간직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기억만 간직하고 싶습니다. 언제까지나 말입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주세요.

돌아가라면 내가 못 돌아갈 줄 아나.

네, 돌아가세요.

자네가 이럴 수 있나.

이러지 못할 것도 없는 거예요. 어차피 각자 살아가는 일 아닙니까.

그걸 말이라고.

그러게 말입니다, 백씨가 바닥에 놓인 찻잔을 하나씩 포개며 말했다.

한씨는 모자를 어떻게 할까 생각해보는 듯 만지작거렸다. 고씨는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딸꾹, 소리를 냈다. 밈이 작은방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한씨는 모자를 머리에 눌러썼다.

 

 

검정이 그들을 아래층까지 바래다주었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왔을 때처럼 말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검정은 현관 안쪽에서 잠금장치를 풀고, 바깥을 향해 문을 열었다. 아직 깊은 밤이었다. 한씨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고씨는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곰과 밈이 그들의 부모를 따라서 바깥으로 나섰다.

밈이 가장 먼저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한씨가 사라지고, 고씨가 딸꾹질을 하며 모퉁이를 돌았다. 곰이 모퉁이에 서서 검정에게 손을 흔들었다. 검정도 손을 흔들었다. 조금씩 안개가 내려오고 있었다. 검정은 텅 빈 골목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문을 잠갔다. 손잡이를 한번 당겨서 잠금을 확인하고, 하품을 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이만 잘까요?

박씨가 말했다.

자야지.

백씨가 말했다.

검정이 작은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이제 집 안팎은 조용했다. 골목은 어두웠고 오가는 사람은 없었다. 먼 도로에서 오토바이가 달려갔다. 바람에 밀린 마른 가지가 창을 쓸었다.

이봐.

백씨가 문득 잠에서 깬 것처럼 말했다.

불을 끄라고, 누가 또 문을 두드리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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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괴혼 ~굴려라! 왕자님!~」. 반다이 남코에서 2004년에 출시한 PS2, PSP용 접착액션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