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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세계문학의 쌍방향성과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

 

 

한기욱 韓基煜

문학평론가, 인제대 영문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지구화시대의 세계문학」, 역서로 『우리 집에 불났어』 『마틴 에덴』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공역) 등이 있음. englhkwn@inje.ac.kr

 

 

최근 우리 문단에서 세계문학에 대한 주목할 만한 논의가 나오고 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작년 11월 전주에서 개최된‘아시아-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인데, 제3세계의 문인들이 서구중심의 세계문학적 발상에서 벗어나 소통의 가교와 문학적 연대를 구축하려는 취지가 뜻깊다. 서구패권주의와 아울러 아시아의 토착적 전통이나 자민족중심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는‘쌍방향 비판’의 필요성을 지적한 것도 값지다.1 또 하나는 지난호 『창작과비평』(2007년 겨울호)의‘세계문학’특집이다. 세계문학의 쟁점을 조목조목 짚는 대담을 비롯하여 묵직한 주제의 평론들, 다양한 발상의 해외작가 발언으로 구성된 방대한 특집은 많은 시사점과 숙제를 안겨준다.

『창비』의 이번 세계문학 논의가 중요한 것은 우리 문학의 미래에 관련된 실천적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부터 자본주의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국내외에서 세계문학 논의가 등장했고 나도 글 한편을 썼는데,2 그때는 학구적인 관심사에 머물렀던 사안이 지금은 실천적인 과제로 다루어지는 면이 있다. 가령 한·중·일 세 나라 국민문학을 하나로 묶어 세계문학적 지평에서 그 장단점을 비교하는 논의가 그렇다. 10년 안짝의 짧은 기간에 중국의 부상과 동북아 지역경제권 형성,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이라는 역사를 거치면서 이 논의는 우리 문학이 당면한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국민문학(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혹은 세계문학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국가나 민족이라는 범주를 어떻게 다룰지의 문제이다. 이 문제에서 특집 참여자들의 견해는 사뭇 다르며 심지어 대립적이기까지 하다. 이와 연동되어 우리 문학의 현재적 성격과 향후 발전형태(근대/탈근대 문학)에 대한 예측도, 우리 문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냐는 가치판단도 달라지는 듯하다. 이밖에도‘역사소설’이나‘마술적 리얼리즘’, 판타지 같은 장르나 양식의 활용 문제, 번역의 의의, 한·중·일 작가와 작품의 평가 등 논의할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지난호 특집 글을 선별적으로 논한 후 미국문학의 현황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이 우리의 세계문학 논의에 요긴한 참조점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중·일 문학의 단계론

 

지난호 특집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한·중·일 문학을 비교하는 대목에서 나온다. 가령 대담에서 윤지관(尹志寬)은 “‘베트남이나 중국 소설이 우리 6, 70년대식의 리얼리즘이다, 그런데 일본문학은 그런 단계를 진작 지나서 포스트모던한 대중소설로 간다, 그리고 한국은 그 중간 어디쯤이다’이런 식으로 단순화한다면 좀 지나치겠지만, 일면의 진실은 있다”3고 정리하면서 역사의식을 상실한 가볍고 표피적인 일본문학을 비판한다. 그런데 이런 단계론적 도식에 입각한 일본문학 비판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의 문제는 제쳐두더라도, 이 도식이 자승자박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점은 유의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좋든 싫든 우리 문학 역시 일본문학과 비슷한 형태로 진화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결정론에 빠질 우려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결정론적 도식이나 일본문학 비판에 대해 우리 젊은 작가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최근의 한 좌담4을 참조하면, 그들이 현재의 일본문학을 그렇게 부정적으로 보지도 않거니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크게 꺼리는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박민규(朴玟奎)는 일본문학이 우리 문학보다 앞서 있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한다.5 그런데 이런 태도 이면에는 “지난 수십년간 그나마 우리가 일군 것은 리얼리즘 하나밖에 없어요. (…) 그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SF가 있나요, 추리소설이 있나요, 공포소설이 있나요, 판타지가 있나요”6라는 발언에서 드러나듯, 도덕적·예술적 우월성을 내세워온 한국문학이 실제의 문학적 자원은 지극히 빈곤하다는 불만 혹은 자기비판이 깔려 있는 듯하다. 사실 일본문학 비판이 젊은 세대에게 설득력을 지니려면 우리보다 풍부한 일본문학의 대중예술적 자원을 일정하게 평가해줄 필요가 있고, 무라까미 하루끼(村上春樹) 이후의 일본문학에서 주목할 만한 작가들을 찾아내도록 애쓸 필요가 있다. 『창비』의 특집 대담에서 (그간 누차 지적된) 하루끼의 허무주의적 역사의식에 비판의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의 소설적 자원과 호소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자상하게 짚었으면, 그리고 젊은 작가 한둘을 그와 함께 거론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문학에 대한 좀더 자상한 비평작업도 중요하지만, 앞의 결정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근대적 시민의식이나 예술문화의 형성 면에서 일본이나 일본문학은 소위‘선진’자본주의국가 중에서 모범이라기보다 별종에 가깝다는 것을 지적하는 일이다. 천황제에 발목잡혀 시민의식은 발육이 부진한데 도리어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열망하는 일본사회는, 이를테면 마땅히 밟아야 할‘진도’를 건너뛰고 원숙해진 기형(畸形)의 측면이 있는 것이다. 일본문학 역시 모범이라기보다 별종인 것은 현재 지구상에서 진지함을 아예 포기한 듯한 포스트모던한 대중소설이 일본만큼 판을 치는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이 점을 우리 비평가나 독자가 외면하는 한, 앞의 단계론적 결정론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현우(李玄雨)가 정치하고 분별력있는 글솜씨로 백낙청(白樂晴)의 세계문학론까지 깔끔하게 정리한 후에 카라따니 코오진(柄谷行人)의‘세계종교’론을 원용하여 국민문학의 경계가 제거된‘세계문학’을 또 하나의 대안으로 제시한 것도 이런 일본적‘특수’현상에 휘둘린 결과가 아닐까 싶다. 따지고 보면 카라따니의‘근대문학 종언론’자체가 일본문학의 특수성을 보편적인 것으로 착각한 데서 나온 물건이 아니던가.

 

 

미국문학의 현황

 

앞서의 단계론적 도식을 연장하면,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가장 발전된 나라이자 최고의 패권국인 미국의 문학은 일본문학보다 포스트모던한 대중소설 쪽으로 더 나아갔을 법하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미국 소설문학의 판세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대체로 미국사회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부여잡고 문학적 진지함을 견지하려는 포스트모던한 문학이 미국문학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면, 그 주변에는‘소수자문학’7을 비롯한 다양한 본격문학들이 포진하고 있으며, 이 양자의 외곽과 사이사이에 상업주의 대중소설이나 SF, 추리, 공포, 판타지, 로맨스 같은 소위‘장르문학’이 문학시장의 저변을 이루는 형국이다. 물론 이 셋의 경계는 명확하지 않고 상당히 유동적이다.

최근의 주목할 만한 현상은 주변의 소수자문학이 점점 활기를 띠면서 중심부 포스트모던 문학의 위상을 위협할 정도에 이른 점이다. 요 몇년 사이 벨로우(Saul Bellow), 밀러(Arthur Miller), 보너것(Kurt Vonnegut, Jr.), 메일러(Norman Mailer) 같은 전후 미국문학의 대가들이 잇달아 작고하는 등 중심부문학의 위세가 줄어든 반면, 소수자문학 작가들의 기량과 다양성은 부쩍 신장되었기 때문이다. 소수자문학의 활력은 전지구적 세계화로 말미암은 이산과 이주가 늘어날수록 그 내부에 다문화적 소통과 쌍방향 교호작용의 계기가 다양하게 주어지는 것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중심부문학에 1960, 70년대부터 활약해온 쟁쟁한 작가들이 다수 남아 있고 이들이 여전히 문화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어, 이런 중심-주변의 판세 자체가 쉽게 무너질 것 같지는 않다.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 선정 ‘주목할 만한 책 100선’ 픽션부문에 최근 5년간 핀천(Thomas Pynchon), 캐럴 오츠(Joyce Carol Oates), 로스(Philip Roth), 닥터로우(E.L. Doctorow), 드릴로(Don DeLillo), 뱅크스(Russell Banks), 매카시(Cormac McCarthy) 등 중심부 간판급 작가들이 한두번씩 선정된 것도 이들의 건재함을 입증한다. 이들은 최근 작품들에서 역사, SF, 공포, 로맨스 같은 대중적 장르문학의 양식을 차용하여 독자대중에게 좀더 가깝게 다가가고자 애쓰는 듯하다. 몇 작품만 살펴보기로 한다.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필립 로스의 『반미 음모』(The Plot Against America, 2004)는 1940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프랭클린 로우즈벨트가 최초의 대서양 횡단비행으로 국민적 영웅이 된 린드버그(C. Lindbergh)에게 패한다는 가상에서 출발한다.8 린드버그는 대통령이 되자 히틀러와 협약을 맺고 유대계 미국인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한다. 소설의 화자는 작가와 동명의 유대인 아이로서, 전체주의적으로 변모하는 미국의 풍경과 공포 분위기를 실감나게 들려준다. 무척 흥미진진한 소설이지만 읽다 보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만약 작가가 미국이 아니라 유럽에서 성장기를 보냈다면 바로 이런 고초를 겪었으리라는 점에서 설정 자체가 터무니없지는 않다. 2차대전 당시 일본인을 강제로 수용했던 미국이 유대계 미국인은 탄압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될 당시 미국 내에서 고초를 겪은 쪽은 유대계가 아니라 아랍계와 이슬람교도였음을 떠올리면 적반하장이라는 느낌이다. 9·11 이후 전체주의화하는 미국을 비꼬는 데서 재미를 한껏 끌어내기는 했지만, 미국이 줄곧 이스라엘 편이었다는 역사를 왜곡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짜 역사인데 뭘 그러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역사소설’장르 자체가 고도로 정치적임을 감안해야 한다. 가령‘북한군의 큐우슈우 침공’이라는 가까운 미래의 가상사건을 다룬 무라까미 류우(村上龍)의 『반도에서 나가라』(2005)는 잡다한 하위문화적 관심사를 담아내고 있지만, 북한군의 침공에 지리멸렬하는 일본 시민사회를 한껏 조롱함으로써 일본의 재무장을 부추기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런 소설들에 비하면 김영하(金英夏)의 『빛의 제국』은 한결 낫다고 생각된다. 오랜 남북분단으로 말미암은 역사적 아이러니를 활용하여 천박한 자본주의적 삶에 젖어 있는 한반도 남녘의 비루한 삶을 탐사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진지한 데가 있다. 그러나 대담에서 지적되었듯이 적잖은 문제가 있는데, 분단상황을 활용하여 소설의 재미를 최대한 뽑아내면서도 분단문제에 대한 소설적 탐구를 밀고 나가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문제이다.

9·11 당시 세계무역쎈터에서 살아남은 한 미국인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추적하는 돈 드릴로의 『추락하는 사람』(Falling Man, 2007)은‘역사소설’의 장르적 문법에 의지하지 않은‘본격’소설인데, 그 결과가 성공적인지는 의문이다. 물론 테러와 전체주의, 정치적 음모를 다루는 드릴로의 빼어난 언어와 이미지 구사력이 빛을 발하는 대목이 더러 있다. 하지만 주인공 키스(Keith)가 별거중인 아내와 재결합하는 듯하다가 가출하여 전문 포커꾼으로 변신하는 과정이 석연치 않다. 키스야 정신적 외상을 입었으니 삶의 좌표를 잃고 표류할 법하지만, 작가도 함께 헤매는 듯 서사적 긴장이 풀려 흐느적대는 느낌마저 준다. 그럼에도 평단에서 호평을 받은 것은 9·11사태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곤혹스러워하는 주인공/작가의 목소리에 미국 자유주의 지식인 다수가 공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늙은이들 살 곳이 못 된다』(No Country for Old Men, 2005)에서 스릴러 장르를 멋지게 요리한 코먹 매카시가 『길』(The Road, 2006)에서는 SF양식을 차용하여 지구 대재앙 이후의 디스토피아를 처연하게 그려낸다. 아버지와 십대 초반의 아들이 언제 약탈자에게 공격당하거나 잡아먹힐지 모르는 상태에서 고속도로를 따라 미대륙을 남하하는 여행을 한다. 아이의 어머니는 조만간 닥칠 죽음이 두려워 미리 자살해버리고 아버지는 총탄 2발을 항시 휴대하여 만일의 경우에 아들과 함께 동반 자살할 준비를 갖춘다. 이런 극한상황의 설정은 지구상의 거의 모든 동식물이 고사당한 죽음의 대지와 조응하여 깊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늘 검은 재가 비처럼 내리는 것으로 봐서 핵전쟁 이후의 상황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작가는 이 대재앙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모호함 때문에 오히려 핵전쟁이나 지구온난화로 인한 환경 대재앙의 우려 같은 것이 효과적으로 환기되는 면이 있다. 매카시가 그려낸 죽음의 대지에 감명받은 영국의 환경운동가 몬비오(George Monbiot)는 이 소설을 “이제껏 씌어진 것 중에 환경론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책일 수 있다. 이는 생물권(生物圈)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사유의 실험”이라고 극찬한다.9

미국문학 독자에게는 멜빌(H. Melville)을 연상시키는 묵시록적 비전과 헤밍웨이(E. Hemingway) 못지않게 압축적인 문체가 눈에 띌 것이다. 또한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에서 『모비딕』의 이쉬미얼(Ishmael)과 퀴퀙(Queequeg),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헉 핀(Huck Finn)과 짐(Jim) 등 미국문학에서 새 삶을 찾아나서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단짝을 떠올리기 쉽다. 물론 미국문학의 전통적인 단짝은 이민족간이지 부자간이 아니다. 또한 이제까지의 단짝여행이 자유와 평등 같은 미국의 꿈을 품은 것이라면, 이번은 미국의 꿈이 박살난 후에 떠나는 생존을 위한 여행이다. 그런데 이런 차이로 말미암아 더욱더 이 여행은 미국문명의 마지막 행로를 암시하는 듯하다. 이런 문명론적인 발상이 작동하는 것은 대재앙 이후의 미대륙과 바다의 풍경이 처연하게 묘사되어 있고, 간결한 구어체로 이루어진 부자간의 대화가 비감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결핵으로 죽고 난 후 아들은 누구에게 자기 운명을 맡길지 선택해야 한다. 다행히 선량하게 보이는 한 가족이 그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결말은 희망의 창을 열어놓는 듯하지만 그 창이 언제 사라질지는 알 수 없다. 이 소설은 이런 극한상황으로 나아가면서 어느새 우리를 미국의 패권주의나 인종주의의 경계 너머로 데려간다.

세계체제의 중심부에 위치한 미국문학이 미국중심주의나 서구패권주의를 체제 안에서부터 반성하는 작업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어떤 국민문학이나 지역문학도 대신할 수 없는 중요한 과업을 수행하는 것이 된다. 문제는 백인남성 중심의 미국 주류문학이 미국의 본모습을 얼마나 깊이 응시할 수 있는가이다. 최근 소설들에서 필립 로스와 돈 드릴로는 미국중심의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자각이 무뎌지면서 미국문제의 핵심을 외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에 반해 매카시는 마치 미국문명을 마지막까지 직시하는 듯한데, 그것은 그가 일찍이 미국-멕시코간 국경지역을 무대로 주요 작품들을 쓰면서 양국의 가치관이나 문화전통을 쌍방향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배우는 연마의 과정을 거친 덕분이 아닐까 싶다.

 

 

미국 소수자문학의 활력

 

지난호 특집에서 정여울은 “어쩌면 우리가 진정 넘어서야 할 경계는‘한국문학’이라는 견고한 레떼르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이창래는 자신의 작품이 한국문학도 교포문학도 미국문학도 아닌 그저‘이창래의 문학’으로 읽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문학의 표지를 떼고도 작가의 개별성만으로 소통할 수 있는 분위기를 지향할 때,‘한국문학의 세계화’가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라고 주장한다.10 오늘날의 작가를 국민문학의 테두리에 가둬놓아서는 곤란하다는 논지는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국민문학과 세계문학을 대립적인 범주로 보지 않는 입장에서는 이창래의 작품은 일차적으로는 미국문학(세분하면 아시아계 미국문학, 한국계 미국문학)이다. 그의 작품에서‘미국’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문에 세계문학이 못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가령 멜빌의 『모비 딕』(Moby Dick)에서도 미국은 핵심인데, 이때의 미국은 통념의 미국이 아니라 발본적인 반성을 포함하는 미국이기 때문에 하나의 국민문학 범주에 갇히지 않고 참다운 세계문학이 될 수 있다. 모리슨(Toni Morrison)의 『빌러비드』(Beloved)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이창래의 문학에 레떼르를 붙이고 안 붙이고가 문제가 아니라, 그의 작품이 미국에 대한 발본적인 반성의 경지에 이른 것인지 아닌지가 문제인 것이다.

정여울이나 이현우는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범주가 세계문학으로 나아가는 데 큰 장애가 되고 그렇기에 그런 범주는 초월하든지 해체해야 한다는 듯한 논리를 편다. 그런데 미국 소수자문학의 걸작들을 살펴보면 국민이나 민족 범주의 해체가 그렇게 바람직한지는 의문이다. 기존의 삶이 통째로 찢겨나갔으되 새 삶을 찾지 못하는 소수민족 이민자의 고통스런 삶에서, 출생국의 언어와 문화는 미국적 가치와 생활양식에 적응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뿌리뽑힌 삶을 견디는 버팀목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미국으로의 이주와 적응의 과정은 소수민족과 문화제국 사이에서 쌍방향의 교호작용이 일어나는 과정이며, 이런 과정을 통해 민족이나 국민의 범주가 절대화되거나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화되는 것이다. 요컨대, 최근 소수자문학의 활력은 민족이나 국민의 범주가 상대화되면서 쌍방향의 교호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60년대 사회운동의 자극을 받아 활성화된 미국 소수자문학도 방대해졌으니 선별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라틴계, 아시아계, 아메리카원주민 문학 모두 활발한데, 라틴계 소설문학을 중심으로 최근에 주목할 만한 몇몇 젊은 작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라틴계 미국문학이 점차 힘을 얻는 것은 라틴계 인구가 늘어나는 미국 현실에서 익히 예상된 현상이다. 아나야(Rudolfo Anaya), 까스띠요(Ana Castillo), 씨스네로스(Sandra Cisneros), 로드리게스(Luis J.  Rodriguez) 등 쟁쟁한 중진작가들이 주도하는 멕시코계 문학은 그 자체로 방대하다. 최근 라틴계 문학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멕시코계뿐 아니라 카리브 연안지역 출신의 젊은 작가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점이다. 이 가운데서 『뉴욕타임즈』의 ‘주목할 만한 책 100선’의 최근 명단에 올라온 꾸바 출신의 끄리스띠나 가르시아(Cristina García)와 도미니까공화국 출신의 유노 디아즈(Junot Díaz)의 소설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이들 젊은 라틴계 작가들은 미국(서구)의 풍부한 지적·문학적 자산을 자양분으로 삼되 출생국의 문학적·문화적 전통을 일방적으로 포기하지 않는다. 사실 이 작가들의 빼어남은 양자의 최상의 요소를 결합해내는 데서 나온다.

꾸바계 문학의 저력을 보여준 가르시아의 장편 데뷔작 『꾸바 말로 꿈꾸기』(Dreaming in Cuban, 1992)는 꾸바와 미국을 무대로 전개되는 삐노(Pino) 가문의 3대에 걸친 분열과 이산(이주)의 이야기이다. 꾸바혁명을 놓고 아버지 호르헤와 두 딸은 반대하고 어머니 쎌리아와 아들은 지지하면서 집안이 양분된다. 호르헤는 미국 회사의 외판원으로 일한 친미파고 쎌리아는 꾸바혁명과 까스뜨로의 열렬한 지지자이다. 큰딸 루르데스는 혁명군에게 강간당한 뒤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고, 둘째딸 펠리시아는 어릴 때부터 싼떼리아(가톨릭적 요소가 섞인 아프리카 기원의 꾸바 종교)에 빠진다. 혁명을 지지하는 아들 하비에르는 아버지와 불화하고 체코슬로바키아로 이주한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한 사연과 인물들의 유별난 행동이 섬세한 부조를 새긴 듯 선연하게 느껴지는 것은 작가가 오랫동안 자신의 고통스런 이산가족 경험에서 이야기를 우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범상치 않은 점은 심각한 이념적 분열과 갈등을 생생하게 드러내면서도 꾸바혁명을 희화하거나 미국과 꾸바의 관계를 왜곡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령 펠리시아는 자기 어머니가 까스뜨로 사진을 침대 곁에 두는 것을 비웃으며 텁수룩한 수염의 까스뜨로를 쳐다보며 자위를 하는데, 이런‘불온한’장면이 역사와 이념에 대한 조롱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까스뜨로를 신뢰하고 사회주의적 과업에 헌신하는 쎌리아가 누구보다 기품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잠깐 할머니와 지낸 루르데스의 딸 삘라는 뉴욕에서 펑크 예술가로 자라나면서 자기 어머니의 광적인 반공주의를 비웃고 오히려 사회주의자인 할머니 쎌리아를 그리워한다. 그렇다고 삘라가 미국보다 꾸바가 낫다거나 꾸바를 돌아가야 할 고국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와 함께 꾸바를 방문한 삘라는 자신이 꾸바의 자연과 할머니를 사랑한다는 것을 절감하지만, “조만간 나는 뉴욕으로 돌아가야겠지. 이제 나는 그곳이 내가 속한 곳이라는 것을 알아. 여기 대신에 거기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 여기보다 거기에 더 속해 있는 거야”11라고 말한다. 삘라에게는 어디까지나 뉴욕이 삶의 본거지이다. 다만 꾸바는 삘라의 마음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지만 소중한 자리로 남는다.

양식적 측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의 간결하면서 서정적이며 때로는 관능적인 사실주의가 등장인물은 물론 뉴욕과 꾸바의 이질적인 물상의 형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환상적 요소도 활용하는데, 가령 호르헤의 혼령이 큰딸에게 여러번 나타나고 마지막에는 쎌리아를 찾아가라는 조언까지 한다. 둘째딸이 귀의하는 싼떼리아는 아프리카와 꾸바의 설화적 요소로 가득하다. 그러나 작가는 싼떼리아가 둘째딸의 비극적인 인생을 개선하기보다 더욱 질곡에 빠뜨리는 측면을 부각함으로써 그것에 일정한 비판을 가한다. 이를테면 꾸바의 설화적 요소나 라틴아메리카 문학의‘마술’을 활용하는 한편 그것을 독특하되 합리적인 리얼리즘으로 제어하는 셈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되, 윤지관의 표현을 빌리면 “‘마술’보다‘리얼리즘’에 집중하는”12 것이다. 그런데 미국과 꾸바의 역사에 대한 안목과 균형잡힌 시각도 그렇지만 이런 리얼리즘을 구사할 수 있는 것도 가르시아가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후 오랫동안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면서 미국과 서구의 합리적인 지적 전통 속에서 단련된 덕택일 것이다. 그렇기에‘마술’도 마술이지만‘리얼리즘’이 어떤 성격이냐는 것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미국 소수자문학에서 구사되는 리얼리즘(사실주의)도 각양각색이다. 가령 아프간의 참화 속에서 한 남자의 두 아내간의 우애를 그려낸 호쎄이니(Khaled Hosseini)의 『천개의 찬란한 태양』(A Thousand Splendid Suns, 2007)은 감성적인 사실주의로 씌어 있다. 아프간 여성들의 아픈 상처를 섬세하게 어루만지는 이런 감성적 사실주의가 독자의 심금을 울렸고, 그것이 이 소설을 미국에서 2007년 최고의 베스트쎌러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감성주의는 아프간의 비극과 미국 패권주의의 관계 같은 불편한 문제를 파고들지 않는 것과 맞물려 있다. 요컨대 이런 감성적 사실주의는 서구의 합리적인 잣대로 아프간의 지독한 여성억압과 가부장제를 비판하지만 서구중심주의나 미국 패권주의는 건드리지 않는데, 그것이 호쎄이니 리얼리즘의 한계이다.

이에 비해 인도(벵갈)계 작가 라히리(Jhumpa Lahiri)의 차분한 리얼리즘은 범상한 듯하지만 정곡을 찌른다. 사물에 대한 오랜 응시와 긴 호흡으로 벼린 언어가 투명하고 서정적이다. 이런 비범한 언어는 장편 『딴 사람의 이름을 가진 사람』(The Name sake, 2003)보다 데뷔 단편집 『질병의 통역자』(Interpreter of Maladies, 1999)에서 더 돋보이는데, 특히 주체와 타자의 관점을 정교하게 상호 교차시키는 데서 빛을 발한다. 표제작에서 이런 상호 교차의 시선은 여러 겹이다. 화자인 택시운전사 카파시(Kapasi)는 인도를 방문한 인도계 미국인 다스(Das) 가족을 관광지로 데려간다. 처음에는 인도계 미국인과 인도인의 시각 차이, 다스 부부의 소통부재가 부각된다. 그러다가 카파시가 자신의 또다른 직업, 즉 구자라티(Gujarati)족 환자들의 질병을 의사에게 통역하는 일을 소개하자 다스 부인은 그 일이 의사의 일 못잖게 중요하다고 칭찬한다. 이런 평가에 고무된 카파시와 다스 부인 사이에 교감이 생겨나고, 다스 부인 쪽에서 둘째아이는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는 내밀한 고백을 하면서 교감은 한층 더 고조되지만, 둘째아이가 원숭이에 공격당하는 사고가 일어나 교감은 끝나버린다. 질병(아픔)의 통역 일을 높이 평가하면서 시작된 교감이 그 교감에 취해 있는 사이에 아이가 다치면서 끝나버린다는 전말은 의미심장한데, 여러 겹의 경계를 다루는 솜씨나 상징적인 여운을 끌어내는 수법이 치밀하다. 라히리의 리얼리즘은 단아하고 정교한데, 그것이 주로 중산층 지식인사회에 한정되어 있어 아쉽다.

도미니까공화국의 싼또도밍고에서 미국 뉴저지로 이주한 유노 디아즈의‘거리의 리얼리즘’이 의미심장해지는 것은 이 지점에서이다. 디아즈의 단편집 『물에 빠지다』(Drown, 1996)와 장편 『오스카 와오의 짧고 경이로운 생애』(The Brief Wondrous Life of Oscar Wao, 2007)의 예술적 활력의 절반은 온갖 피부색의 이민자, 뜨내기 노동자, 마약상, 범죄자, 동성애자로 가득한 거리의 삶을 생생하게‘들려주는’데서 나온다. 그는 대도시 빈민가의 온갖 비루하고 너절한 삶을 저널리스트처럼 냉정하게 포착하고 분노의 래퍼처럼 노래한다. 랩처럼 박동치는 리얼리즘에 현재성을 부여하는 또 하나의 요인은 비어, 속어, 스팽글리쉬(스페인식 영어) 같은 거리의 언어와 공상과학, 판타지, 포르노 같은 하위문화의 상상력과 어법 들이다. 장편소설 첫머리에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순간 도미니까공화국은‘푸꾸’(fukú)라는 저주의 귀신에 씌었다고 주장하면서, 1930년부터 1961년까지 도미니까공화국을 쥐락펴락하다가 CIA가 지원한 암살단에 저격당한 독재자 뜨루히요(Rafael Trujillo)를 묘사하는 한 대목을 보라.

 

뜨루히요가 푸꾸의 하인인지 주인인지 대리자인지 본인인지 아무도 몰랐지만, 그와 푸꾸는 통했고 둘 사이가 졸라 가까운 건 분명했어. 교육받은 집단에서도 누구든 뜨루히요에 반하는 음모를 꾸미는 사람은 칠대 이상 내려가는 엄청 강력한 푸꾸의 저주를 받을 거라고 믿었어. 만약 네가 뜨루히요에게 조금이라도 나쁜 생각을 품으면, 씨팔, 허리케인이 네 가족을 휩쓸어 바다에 처넣고, 씨팔, 마른하늘에서 바위가 떨어져 널 묵사발내고, 씨팔, 넌 오늘 먹은 새우 때문에 내일 발작하고 뒈지는 거야.13

 

이런 랩풍의 리듬에다 “그는 우리의 싸우론(Sauron)”이었고 “공상과학 작가조차 생각해낼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괴짜이고 너무 삐뚤어지고 너무 끔찍한 인물이었어”14라는 구절에서처럼 공상과학과 판타지의 문법을 무시로 끌어다 쓴다. 디아즈의 이런 박동치는 문체와 공상과학·판타지의 인유(引喩)는 박민규나 이기호를 떠올리게 하는데, 다만 디아즈는 이들보다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가 훨씬 뚜렷하다.

작가는 서두에서 도미니까공화국 출신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푸꾸 이야기’를 하겠다고 주장한다. 거리의 리얼리즘과 래퍼 같은 화법으로 들려주는 디아즈의 푸꾸 이야기는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뉴저지를 무대로 펼쳐지는 오스카 와오의 가족 이야기이다. 여자애들한테 퇴짜를 맞고 비만아로 자라나면서 공상과학과 판타지와 컴퓨터게임에 빠져 톨킨(J. R. R. Tolkien)처럼 판타지의 명작을 쓰려는 오스카 와오, 남편한테 버림받아 혼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산전수전 다 겪은 어머니 벨리, 그 거친 엄마한테 맞장뜨고 펑크 아이로 변신하는 兒시하면서 당찬 누이동생 롤라가 그들이다. 이 셋이 부대끼며 꾸려가는 삶은 비참하고 황당하고 우스꽝스럽고 아름답다. 그야말로‘콩가루 집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짙은 가족애로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다.

이것이 작은 이야기라면 또 하나는 뜨루히요 치하의 도미니까공화국에서 벨리가 겪은 살벌한 과거가 드러나면서 서서히 윤곽을 잡아가는 큰 이야기이다. 벨리의 아버지가 뜨루히요에 반대하다가 집안이 풍비박산나고-아버지가 잡혀가서 고문당하는 동안 어머니는 트럭에 치여 죽고 언니들은 수상쩍은 사고로 죽는다-벨리 자신도 뜨루히요의 심복에게 강간과 폭행을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 도망치다시피 미국으로 이주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벨리가 피신한 곳이 바로 뜨루히요 독재정권을 지원한 미국이라는 사실이다. 작가는 이런 미국과 도미니까공화국 사이의 지배와 예속의 관계를 예리하게 파고든다. 그런데 우리 6, 70년대식 리얼리스트라면 두 이야기 가운데 큰 이야기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했을 공산이 크고, 호쎄이니 같은 감성적 리얼리스트라면 작은 이야기에 집중했을 테지만, 디아즈는 양자를 팽팽하게 결합한다. 전자에게서는 더없이 심각하고 엄숙한 이야기, 후자에게서는 지극히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어 나왔을 것들이 디아즈의 손에서는 심각하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우스꽝스럽고 재미있기도 한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국민국가의 역사와 개인사 두 차원의 이야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야기 솜씨는 타고난 것이기도 하지만 쌍방향의 비판과 배움을 통해 단련된 것이기도 하다.

정도는 덜하지만 디아즈의 이런 예술적 특징은 최근 아메리카인디언 문학의 신예작가 앨럭시(Sherman Alexie)에게서도 발견된다. 모마데이(Momaday)나 씰코(Silko) 같은 선배작가들이 아메리카인디언의 구비문학적 전통과 설화에서 예술적 자양분을 발견했다면, 이 젊은 작가는 그런 전통을 일부 활용하면서도 인디언 거주지 안팎에서 살아가는 아메리카인디언의 실생활의 애환을 들려주는 데 주력한다. 가령 한 인디언 소년의 좌충우돌 성장기 『시간제 인디언의 진짜로 진실된 일기』(The Absolutely True Diary of a Part-Time Indian, 2007)는 선배작가들의 숭고한 신화적 분위기나 심오한 영적 체험보다 슬프고도 우스운 재기발랄한 현실 이야기에 초점이 놓인다.

 

 

맺음말

 

소수자문학의 활력에 주목하여 미국문학의 현황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포스트모던한 주류 미국문학은 역사소설이나 SF같은 장르문학의 양식을 활용하는 가운데 『길』 같은 걸작도 배출했으나, 대체로 미국의 진실을 응시하는 힘이 모자란다. 이에 반해 소수자문학에서는 출신국과 미국 사이의 쌍방향의 비판과 교호작용이 활발하게 작동하는데, 이것이 새로운 경향의 리얼리즘과 결합되면서 예술적 활력의 원천이 되고 있다. 분명 미국문학의 활력은 주류 포스트모던 문학에서 소수자문학 쪽으로 예전보다 더욱 옮겨갔고 변화의 조짐을 보이는데, 이는 미국의 힘이 기울어가는 현 세계사의 흐름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미국의 주류 지배층에게는 부시의 집권 이후 가속화되는 미국의 몰락이 달가울 턱이 없지만, 전보다 정치적·군사적으로는 약하더라도 문화적으로는 좀더 나아진 미국을 만들 가능성은 오히려 커졌다고 본다. 그럴 때 미국의 활달한 소수자문학들이 새로운 미국 형성에 핵심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고 믿는다.

끄리스띠나 가르시아나 유노 디아즈의 소설이 일러주는 것은 예술적으로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대중적 포스트모던 문학도 전통적인 리얼리즘 문학도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의 젊은 작가 중에서도 우리 6, 70년대식 리얼리즘의 엄숙주의와 이념주의에서 벗어났으되 새로운 리얼리즘을 고민하고, 포스트모던의 장르적 양식을 실험하되 아주 대중소설로 빠지진 않는 작가들이 적지않다고 본다. 이런 작가들의 앞으로의 향방에 우리 문학의 많은 것이 달려 있다는 생각이다. 이현우(카라따니)의 분류법을 빌려서 말하면 근대문학인지 탈근대문학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문학, 그걸 밝히려면 세계와 민족과 문학에 대해 정말 깊이 생각해봐야 하는 그런 작품, 읽으면 킬킬 웃음이 나오고 마음이 시린 그런 감명깊고 흥미진진한 작품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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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재용, 마카란드 파란자페, 파크리 쌀레의 대담 「유럽중심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아시아』 2007년 겨울호 23~24면 중 파란자페의 발언 참조.
  2. 졸고 「지구화시대의 세계문학: 20세기 후반 아메리카대륙의 소설문학을 중심으로」, 『창작과비평』 1999년 가을호. 이 글의 주된 주장은‘쌍방향의 세계문학’이다. 세계문학이 구미 중심부의‘선진’문학에서 주변부 제3세계의‘낙후된’문학으로 나아가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거꾸로 주변부 민중의 밝은 눈으로 중심부 담론·서사의 서구중심주의나 식민주의를 비판하기도 하는 “쌍방향의 교호작용”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52면). 세계문학의 쌍방향성은 비판이자 배움을 뜻한다. 주변부가 중심부의 성취에서 배우지 못한다면 제3세계의 토착적 전통이나 민족주의에 매몰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3. 윤지관 임홍배 대담 「세계문학의 이념은 살아 있다」, 『창작과비평』 2007년 겨울호 35면.
  4. 이기호 정이현 박민규 김애란 신형철 좌담 「한국문학은 더 진화해야 한다」, 『문학동네』 2007년 여름호.
  5. 그는 한국 독자들이 일본소설을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해방된 후 지금까지 지구의 어떤 나라가 아닌, 일본을 쌤플로 발전하고 쫓아온 나라예요. (…) 일본사회는 한국사회와 가장 닮아 있는 사회죠. 그러면서 진도가 우리보다 앞서 있는 거예요. (…) 게다가 글을 쓴 역사가, 또 문화가 우리보다 훨씬 풍부해요.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이기호 외 좌담 109면.
  6. 같은 글 104면.
  7. ‘minority literature’는 주로 ‘소수민족문학’을 지칭하지만 동성애문학을 포함하는 개념으로도 쓰이기 때문에 ‘소수자문학’으로 옮긴다.
  8. 이렇게 실제 역사와 명백히 다른 행로를 가정하는 소설을‘대안역사’(alternate history) 소설이라고 부르고 포스트모던 ‘역사소설’과 ‘공상과학소설’의 하위장르로 취급한다.
  9. http://www.guardian.co.uk/environment/2008/jan/05/activists.ethicalliving 참조.
  10. 정여울 「해석을 넘어 창조와 횡단을 꿈꾸다」, 『창작과비평』 2007년 겨울호 109면.
  11. Cristina Garcia, Dreaming in Cuban (New York: Ballantine Books 1992), 236면, 강조는 원문.
  12. 윤지관 임홍배 대담 23면.
  13. Junot Díaz, The Brief Wondrous Life of Oscar Wao (New York: Riverhead Books 2007), 3면, 강조는 원문.
  14. 같은 책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