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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우리가 정말 연결된 걸까
김연수 장편소설『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박진 朴辰
문학평론가, 숭실대 국문과 교수. 저서로『서사학과 텍스트 이론』『장르와 탈장르의 네트워크들』등이 있음. libra3061@ssu.ac.kr
김연수(金衍洙)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문학동네 2007)은 90년대 초반의 대학생‘나’가 자신이 직접 겪은 일들과 주변 인물들에게서 들었던 경험담들을 이야기하는 형식의 소설이다. 공안정국 당시 학생회의 일원으로서 주인공‘나’가 경험하는 이야기들이 서사의 한 축을 이룬다면, 할아버지가 남긴 한장의‘입체 누드사진’을 매개로 하여 근현대사의 여러 장면들을 넘나드는 다양한 인물의 이야기들이 또 하나의 축을 이루고 있다.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정치사회적 사건들과 그로 인한 정세변화는 개인의 삶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가? 정말로 그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개인의 가장 사적이고 내밀한 경험들은 어떻게 역사와 교호하는가? 그런 경험들이 한 시대의 공식적 기억인 역사와 진정 관련을 맺을 수 있는 것인가?
역사가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나 압도적이고 자명해서, 이렇게 질문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던 시절이 있었다. 억압적인 식민통치와 해방기의 혼란과 한국전쟁의 비극 등은 그 시대를 살던 개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영향을 미쳤으며, 그러므로 “한 개인의 삶”은 “한 나라의 역사를 온전하게 담고 있었”다.(124면) 군사독재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개인의 삶이 모두 시대와 연결돼 있다는 믿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광주항쟁은 “1980년 5월 광주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346면) 살아남게 된 젊은이들을 “우연한 존재로 바꿔버렸”지만(347면), 시민을 학살하는 폭압적인 체제에 맞섬으로써 그들은 허무와 우연의 세계에 대항했고 “서로 연대하였으므로 쉽게 죽지 않는 존재로 바뀌어”갈(348면)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1989년 11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베를린 장벽이 TV화면 속에서 붕괴된 후, 급변하는 역사적 국면들은 이제 실재감을 잃어버린 스펙터클로 변해버렸다. 자본주의 미디어에 의해 역사가 “실시간 중계”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역사의 주인공이나 희생자가 아니라 “역사의 시청자”(275면)가 되었다. 전쟁과 테러도, 기자회견과 대국민선언도, 계란세례와 철야농성도 “나와는 전적으로 무관하게 움직이는 유리창 저편의 세계”(122면)로 물러났다. 동참할 수 있는 공동의 세계가 휘발되었으므로 더이상‘우리’가 될 수 없는‘나’들은 저마다 드넓은 “우주에 존재하는 하나의 인간에 불과하다.”(86면) 그러니 네가 누구든, 그토록 외로운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김연수는 말한다.
이 소설은 그 외로운‘나’들을 서로서로 연결하여‘우리’로 만들어주고 싶은 지극한 바람의 산물이다. 수많은‘나’들의 개인적인 경험들이 이리저리 만나고 얽혀서 거대한 네트워크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게 바로 한 시대의 진정한 역사가 아니겠는가? 공적인 기억으로서의 역사는‘나’의 할아버지가 남긴‘민족 대서사시’처럼 “너무나 뻔해서 오히려 거짓말에 가깝”거나(38면) 무미건조할 뿐이다. 하지만 도저히 공유될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사적인 기억들은 할아버지가 불태워버린‘산문형식의 글’처럼 “거품과도 같은 幻覺의 時代”에도 저마다 가슴속에 품고 있었을 “실낱같지만 확실한 무엇”(같은 곳)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김연수는 산문형식의 글과 함께 할아버지가 불태워버리려 했던 입체 누드사진을 매개로 하여 할아버지의 사적인 기억을 파편적으로나마 복원하는 동시에, 그 성긴 이야기에다 수많은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를 우툴두툴하게 엮어들인다. 전혀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서로 다른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절묘하게 만나고 조각조각 잇대어져 커다란 그림을 만들어갈 때, 세상은 보이지 않게 하나로 연결돼 있으며‘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경이롭게 드러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러일전쟁에서 6월항쟁으로, 홀로코스트에서 1991년의 분신정국으로 연결되는, 가장 개인적인 기억들로 짜여진 또 하나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이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물론 사랑이다.‘나’와 정민의 연애가 그랬듯이, 사랑은 서로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열망,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서 내 존재의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열망을 지펴낸다. 누군가에게 연결되기를 기다리는 이야기들이 내 안에 그토록 많이 숨어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도, 그렇게 “이 세상은 온통 읽혀지기를, 들려지기를, 보여지기를 기다리는 것들 천지”(143면)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도 다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사랑의 힘으로 김연수는, 마르꼬니가 대서양 너머로 전송했던 모스부호‘s’처럼 “이 세상을 가득 메운 수많은 이야기(story)”와 “그만큼 많은‘나(self)’가 존재한다는 애절한 신호(signal)”를 듣는다.(82면) 아무리 개인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라도 서로 연결될 수 있는 한 세상에 무의미한 것은 하나도 없으며, 개인의 삶은 저마다 거대한 세계와 얽혀 있어 결코 부질없지 않다는 애정어린 믿음으로, 이 소설은 씌어진다.
여러 인물들의 삶을 유사성의 층위에서 하나로 묶어주는 고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현실의 폭력에 우연히 노출되는 경험이다. 그리하여 갑자기 자신이 “현실의 바깥으로 튕겨나간 것처럼”(100면) 느껴지는 순간, 그들은 더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나’와 정민,‘나’의 할아버지와 정민의 삼촌, 베를린에서 만난 헬무트 베르크/칼 하프너와 이길용/강시우 등이 모두 그런 인물들이다. 하지만 현실 바깥으로 튕겨나가는 느낌이란 자신이 “현실이라고 부를 만한 것과 얼마나 강하게 연결돼 있는지”(103면)를 역설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 식으로 이 소설의 인물들은 자신의 삶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현실을 비로소 자기 존재의 조건으로 경험하고, 낯설어진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방식으로 “한 시대의 우울을 감당”한다.(127면)
그들의 이야기가 말해주듯 “우리는 살아가면서 몇번이나 다른 삶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신비롭다.”(150면) 그러나 이 소설의 빛나는 통찰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신비, “그럼에도 우리의 삶은 일생, 즉 하나다”(같은 곳)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 “아무리 다른 모습으로 바뀌어간다고 해도 결국 나는 나”라는 사실, “그게 바로 내가 가진 기적”(151면)이라는 것인데, 참으로 우연하고도 나약한 존재인 우리가 그 어떤 불안과 두려움이라도 내 것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관성도 필연성도 없는 내 삶을 일생, 곧‘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해들여야 할 책임은 오직‘나’에게 있으며, 내 삶의 이야기의 화자라는 측면에서라면‘나’는 내 인생의 주인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작가 자신이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경험한 90년대의 의미를 되짚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며, 이는 우리 세대가 자기 몫으로 감당해야 할 책임일 것이다. “우리가 누구였는지, 그때 왜 그랬는지” 우리는 아직 다 알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의 이야기는 조금 더 계속돼야겠지만, “결국 우리는 알게 될”(389면) 거라고 되뇌는 그에게선 어떤 신뢰감이 느껴진다. 그것은 우리 삶이 계속되는 동안은 종결되지 않을 책임을 기꺼이 떠안은 동세대 작가에게 품게 되는, 그런 신뢰감이다.
하지만 무수한‘나’들의 이야기를 서사적 차원에서 하나로 연결하고자 하는 작가의 시도가 우연을 단번에 필연으로 뒤바꾸는 인연설, 운명론, 예정설 등에 의존할 때, 그런 해답이 존재의 고독과 불안에 대한 안쓰러운 방어기제처럼 보일 때, 그 거대한‘우리’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어쩐지 조금 더 작아지고 허전해지는 것 같다. 내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간에, 저기 “떠 있는 달이 내가 존재하기 아주 오래전부터 (…) 지금의 우리 모두를 꿈꾸고 있었”다고 믿어버리는 일, 그렇게 “처음부터 우리가 모두 연결돼 있다는 사실”(338면)에서 위안을 구하는 일은 내 몫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온전히 감당하는 태도가 아닐 것이다. 이런 해답은, 포스트모던한 불가지론의 안전지대를 넘어설 때까지 자신의 회의를 극한으로 밀고 나갔던 김연수다운 결론이 아니기도 하다.
삼등급의 별이라도 서로 연결되기만 하면 아름다운 별자리를 이룰 수 있다는 건 분명 소중한 일일 테지만, 그렇다고 저 별들이 별자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별들의 운행은 경이롭게 서로서로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가 사는 우주에서 그것은 더이상 잡아당기는 힘 같은 것으로 별들끼리 긴밀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뉴턴의 우주)이 아니라 각각의 별이 변형하고 왜곡한 시공간의 구부러짐에서 발생하는 부대효과(아인슈타인의 우주)다. 그럼에도 “단 하나뿐인 동시에 여러겹으로 겹쳐지는 (…) 우리 모두의 일생”(382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더 많이 외로워하고 더 오래 질문을 던져야 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