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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원한’의 시학은 ‘고행’을 수행할 수 있을까

최금진 시집 『새들의 역사』

 

 

함돈균 咸燉均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우리의 포스트모던적 모던」「이 시대의 혁명, 이 시대의 니힐리즘」등이 있음. husaing@naver.com

 

 

시280-먹‘원한’(ressentiment)의 감정을‘노예의 도덕’이라고 비난한 사람은 니체였다. 그에 따르면 객관적 삶의 조건을 긍정적 실존 상황으로 쇄신할 능력이 없는 이들은, 자신의 능력을 탓하기보다는 자신들 앞에 놓인 삶의 조건이나 신의 주사위놀이를 원망하며, 자신의 생을 부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채운다. 동시에‘원한’의 상태는 도무지 삶의 유희적 가능성을 모른다는 점에서 미학적 삶의 제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확실히 니체의 도덕은 현실적 차원에서는‘강자의 도덕’으로 해석될 만하다. 현실적으로 그의 담대한 니힐리즘의 윤리학을 승인하면서‘주인의 도덕’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인간정신의 나약함 탓이라고만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확실히 우리는 맑스 이후의 시대를 살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니체의 견해에 따르자면 역사의 최종 승리는‘노예’들의 것이 되었으나, 맑스로 인해 우리는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근본 기분인 이‘원한’의 감정이, 전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의‘노예정신’의 산물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리고 우리 삶의 체험적 직관의 결과, 우리는 삶의 쇄신 가능성이 생각보다 훨씬 더 완강하게 경제적 삶의 조건에 구속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미학의 가능성은 이제 니체적인 놀이정신이 아니라 (또는 그만큼이나) 오히려‘노예의 도덕’을 유발하는 정치경제학의 문제를 피해가지 못한다.

최금진(崔金眞) 시집 『새들의 역사』(창비 2007)는 이런 점에서 근래 한국 시에서 보지 못했던 화두를 던진다. 하지만 이 화두는 맑스 이후 미학의 전형적 가능성을 이상한 방식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다소 역설적이다. 약간의 과장을 동원한다면, 이 시집은 미래에 대한 정치적 전망이나 실존적 자기쇄신의 가능성을 완벽히 잠가둔 채, 오직‘원한’의 감정만으로 씌어진 거의 최초의 시집이다. 이를‘거의 최초’라고 하는 까닭은, 이 시집이 현저히‘빵’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시집 전체의 에피소드를 구성하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등이 보여주던 노동시적‘분노’와는 전혀 다른 정념을 발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집의‘원한’은 분명히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학을 표적으로 삼되, 핍박받는 자들을 일정한 계급적 관계 내지는 연대로 묶고자 하는 의지 같은 것을 애초부터 포기하고 있다. 당연히‘역사’나‘혁명’따위의 전망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렇다 할 계급적 자각이라고 할 수도 없이 오직 철저하게 파편적인 결핍감과 증오심으로 가득 찬, 그래서 오직‘원한’의 감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 시집의 지배적 정서는, 예컨대 “밤길 조심해라,/나는 거기 회원이고 우리 회원은 스무 명이 넘는다/내 말 알아듣겠냐?/인권단체나 시민연합처럼 우리도 곧 지부를 건설하고/세계동맹을 세울 것이다/돈 좀 있다고 뻐기는 놈들아 (…) 그럼,//꿇어,//이 새끼야!”(「미륵님이 오신다」)나, “울고 싶고, 누구도 용서하기 싫고,/높은 데 올라서면 뛰어내리고 싶고,/차를 보면 달려들고 싶다고”(「천 개의 손」) 같은 직설적 언술에서 잘 확인된다. 물론 이 시집에 귀신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개인적‘원한’의 정서와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그럼에도 이 파편적인 원한의 감정이 정치경제학적 현실을 향하고 있다고 한 까닭은, 이 감정이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충실한 반영이며 따라서 국가는 자본의 하수인이고 모든 이데올로기는 지배이데올로기라는 맑스의 고전적 명제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가운데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평의 땅도 없는/굶는 것과 자는 것 말고는 어떤 권리도 없는/나는 어느 나라의 국민입니까”(「애국가를 추억하며」)라는 물음과, “기쁘다 구주 오셨네,/천사들은 공화국의 오랜 외교사절단이다”(「매트릭스 혹은 우리들의 산타공화국」)라는 언술이 이러한 맥락 안에 있다. 그러나 최금진의 시집에서 상황은 고전적 맑스주의의 상황보다 훨씬 더 비관적이다. “한때 빨간색을 극단적으로 추앙했던 불순분자들조차/링거줄이 연결된 성실한 꿈 기계가 되어/눈 오는 날을 기다리”(같은 시)게 되었기 때문이다. 의심을 찬양하던 자들, 자본-국가의 외부를 꿈꾸던 자들조차 자본-국가기계의 충실한 일부분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최금진의 시집에서 계급적 자각이나 연대가 아니라 오직 파편적으로만 나타나는 개인적 원한의 감정 역시 정치경제학적 상황의 심각한 퇴행을 의미하는 징후로 다시 읽힐 필요가 있겠다.

이 시집의 주인공들인‘장기판매자’‘신용불량자’‘소년가장’‘파리약 먹고 죽은 노파’‘칼을 들고 복수하려는 전과자’는, 역설적인 의미에서 이제 자본주의의‘외부’를 구성한다. 이들은 노동을 매개로 자본과 적대관계를 형성하던‘전통적’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 배제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은 또다시 역설적으로‘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은 노동의 가능성 자체를 획득하기 위해서도 투쟁해야 한다’는 맑스의 고전적 명제를 21세기에 증명하고 있는 존재들이기도 하다. 노동의 가능성 자체를 획득하지 못함으로써 생산관계에서 배제된 이 자본주의의‘외부’적 존재들이야말로 아감벤(G. Agamben)적 의미의‘신성한 인간’(Homo sacer)일 것이며, 계급이 될 수 있는 조건 자체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이‘신성한 인간’들에게 선명한 계급적 자각이나 연대의식이 발현될 수 없는 것은 따라서 당연하다 할 것이다. 우리가 조세희(趙世熙)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사장에게 칼을 들이댄 난장이 아들의 행위보다, “우린 곧 미사일도 사고, 핵실험도 할 것이다/미륵님의 날을 우리가 앞당겨야 하는 것이다”(「미륵님이 오신다」)라고 말하는 이 시집의 한 주인공의 시도를 훨씬 더 심각한 징후로 받아들여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빠져죽은 사람 얼굴과 닮”은 “잉어들”과(「잉어떼」), “시멘트가루 잔뜩 눌어붙은 익사자 살가죽을 벗겨먹”는 “우렁이”들이 “토실토실 여무”는 “저수지”(「석회암지대」)나 “밤이면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유체이탈한 영혼들처럼 기다란 복도에 나와/열대야 속에 멍하니 앉아 있”는‘아파트’(「아파트가 운다」)의 알레고리는, 편혜영(片惠英)의 그로테스크 소설이 보여주는 것 같은‘유물론적 알레고리’의 추상성보다 좀더 구체적인 맥락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하겠다.

화두는 이 출구 없는 지독하고도 파편적인 원한의 감정이, 그 자체로 스스로를‘시적인 것’으로 승인할 것을 요구하는 오늘의 시적 현실이다. 앞서 맑스 이후 미학이 정치적인 것을 피해갈 수 없다고 했거니와, 시에서 이는 산문화 경향과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지닌다. 니체는‘노예의 도덕’이 미적 쇄신의 가능성을 파괴한다고 했으나, 맑스의 충실한 제자인 루카치는 시에서 음악을 원천적으로 소거하는 것은 근대의 산문적 삶의 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열성인자를 물려받고 태어난 웃음은 어딘가 일그러져/영락없이 잡종인 게 들통”나는(「웃는 사람들」) 것처럼, 지극히 개인적 사건인‘웃음’조차 사회적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오늘의 경제적 세계에서, “역전광장에 앉아 있는 거지 여자의 하루”(「무엇이 그녀를 역전에 박아놓았나」)처럼, 시인의 개인적 서정이 “패총처럼 굳어”(「여행자」) “뼈다귀만 남은”(「피아노가 울었다」) 앙상한 공동체의 서사로 변질되는 것은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주로 시인 개인의 가정사를 담고 있는 4부의 세계에서, “흐물흐물한 몸에서 손톱과 발톱과 머리털을 뻗어/관을 후벼파고 기어나온”(「악의 꽃」) “악의 꽃”이나, “난생설화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에/배꼽이 없”는 “우리 집안 남자들”(「새들의 역사」)이, 개인적 은유가 아니라 빈곤과 폐허의 시대적 보편성을 확보하는 알레고리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시체’와‘귀신’이 출몰하는 이 무덤 같은‘원한’의 시집에서, 출구 없는 원한이라는 정념이 그 자체로‘시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문제된다는 사실만은 지적해야겠다. 물론 벤야민(W. Benjamin)은 노동계급에게 원한은 보존되어야 할 감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의 일이고, 우리가 문제삼는 것은 시의 일이다. 어떤 시가‘정념’(passion)만으로 씌어질 수 있다고 극단적으로 가정할 때, 이 정념이‘시적인 것’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에‘고행’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적 고행의 심연에서 길어 올려지는 주체의 시적 체험의 내밀함을, 우리는‘시적 서정’의 문제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지만‘원한’은 시적 주체가 내밀하고 견고하게 수행해야 할‘고행’체험을 일방적으로 대타적 현실로만 향하게 함으로써, 정작 서정적 체험형식으로서의 고행의 충분한 수행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이 시집의‘원한’은 우리 시대의 시적 상황이 제기하는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