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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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가슴 아픈, 그러나 아름다운 독서

정수일 옥중편지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창비 2004

 

 

박영희 朴永熙

시인 tkqnr80@hanmail.net

 

 

 

세인에게 무함마드 깐수로 더 잘 알려진 정수일(鄭守一) 선생과의 만남은 비슬산도량(대구교도소)에서였다. 그동안 서울구치소를 시작으로 대전·안동·전주교도소를 다섯해에 걸쳐 두루 유랑해온 터라 나는 감옥살이가 영 신명나지 않았다. 초창기에는 별별 잡범들을 통해 귀도 바싹 세워보고, 북에서 내려온 장기수 선생들을 만나면서는 오랜 영어(囹圄)살이에 궁금한 것들도 많았으나 대개가 반쪽지향주의여서 이내 시큰둥해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선생과의 만남은 옥창살에 비치는 하루해가 지루하다 못해 무료하게 느껴지던 바로 그 무렵에 이루어졌다. 사동(舍棟)을 이웃하며 반년 남짓 지냈을까. 다리를 절룩거리는 외롭고 쓸쓸한 노학자의 모습에서 나는 몹쓸 국가보안법과 분단의 비극을 곱씹어야 했다.

“어째서 다리를 저십니까? 예전부터 그러셨습니까?”

“글쎄올시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한때 꽤 한다 하는 축구선수로 이름을 날렸다는 ‘곱슬머리 5번’ 정수일 선생은 그렇듯 말을 흐렸다. 대신 운동시간에 걷기운동을 할 때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간첩이 아니라 언로가 막혀 있는 북녘땅의 한 특파원이었다는. 그리고 나는 남과 북을 단 한번도 다른 모습으로 본 적이 없으며, 한 민족으로 보아왔을 뿐이라는.

선생이 대구교도소로 이감을 와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귀가 어는 동상을 예방하기 위해 수인들이 귀마개를 요청하자 교도소측은 처우개선 불가라며 일언지하로 잘라버렸다. 그러나 선생의 입장은 달랐다. 자신의 몸을 보호하는 일이란 처우문제가 아니라 인권문제였던 것이다. 선생의 그 한마디에 교도소측은 얼마나 오랫동안 입을 꾹 다물었던가. 선생의 입을 빌려 다시금 설명하자면 처우와 인권의 문제는 밀고 당기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The Quarterly Changbi이처럼 선생은 설사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거시적 안목을 갖고 계신 분이다. 이번에 출간한 옥중편지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에서도 선생의 그와 같은 자취와 면모는 여실히 드러나 있다. 모국어를 비롯해 12개 국어를 구사함은 차치하고라도 청계산도량(서울구치소)을 시작으로 비슬산도량, 계룡산도량(대전교도소)에 이르기까지 “분단의 아픈 시대를 살아가는 한 지성인이 남긴 글로 읽어”(5면)달라는 선생의 당부에서 잘 나타나 있듯 동과 서, 남과 북이 일체로 다 녹아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25년간, 북한에서 15년간, 해외에서 10년간, 남한에서 12년간이라는 드라마틱한 인생여정을 걸어오면서 한순간도 손에서 책을 놓아본 일이 없었소.”(13면) 짤막한 글귀지만 참으로 드라마틱한 여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선생은 왜, 밑그림을 바탕으로 하여 여러가지 채색을 조화해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는 그 험난한 인생여정에서 북녘에 두고 온 부모형제도 아닌 책을 필두로 내놓은 것일까? 암만 생각해봐도 학자다운 자세 외에는 달리 답을 구할 길이 없다. 선생은 바깥세상으로 내보낸 편지마다 문명교류학과 아랍·이슬람학, 겨레에 대한 소중함과 긍지, 지식과 학문이 달라야 하는 점을 강조·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뿐이랴. 옥중편지에는 선친의 기일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온 선생이 45년 만에야 감방에서 설날차례를 올리는 것을 시작으로 20년 만에 맞이하는 자신의 생일 이야기, 앉은뱅이책상 하나를 얻게 된 자잘한 감동의 순간들이 뭉클하게 뒤를 잇는다.

또한 선생은 이번 옥중편지를 통해 그동안 내비치지 못했던 한 개인의 분단여정을 자고(自顧)의 심정으로 들려주고 있다. “외국인으로 위장행세하면서도 언제 어디서나 이곳도 바로 내 사랑하는 모국의 품이라는 일념을 저버린 적이 없었소.”(32면)

선생의 이 말을 나도 기억하고 있다. 물론 처음엔 귀담아들을 리 만무했다. 민족이니 분단이니 통일이니 하는 단어들이 갇혀 지내는 정치범에게 얼마나 진절머리나는 것들인가. 그러나 ‘위장’이라는 단어에서 안겨오는 선생의 진솔함은 돌이켜보건대 어떤 정적과도 같았다. 그리고 가슴 뭉클한 그 정적은 마침내 1998년 8월 15일 아침에 눈물로 아로새겨졌다.

광복절 특사로 일곱해 만에 감옥문을 나서는 날이었다. 그날은 선생과 손을 잡은 채 걷기운동을 했는데 선생만 남겨두고 나오려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때 선생께서는 걷다 말고 내 손목을 꼭 쥐셨다. 순간, 내 손등에 뜨거운 빗물이 두어 방울 뚝 떨어졌다.

“박시인, 부탁이 하나 있소. 출소하거든 내 아내한테……”

선생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내 손바닥에 사모님의 전화번호를 적어주는 것으로 회자정리(會者定離)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 밖으로 나가 사모님한테 전해달라는 부탁이 혹 옥중일기 속에 들어 있는 이 말씀은 아니었을까?

“올림픽출전권을 따내기 위한 한·일 간의 축구경기를 텔레비전으로 관전하다가, 우리 한국팀이 격전끝에 이기자 나도 몰래 곤히 잠든 당신을 두드려 깨워 기쁨을 함께 나눈 일이 기억나오. 우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해석이 되지 않는 이런 유의 일들이 자주 있었을 것이오.”(33면)

선생은 이렇듯 옥중편지에서 여러차례 위장이라는 아픈 단어를 꺼내고 있으니 어찌 두 분의 그 기막힌 사연을 헤아리지 못하랴. 꼬박 이틀간을 선생의 옥중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이제서야 들려줄 수밖에 없는 선생의 위장세월과 사모님의 한결같은 지아비 사랑에 몇번이고 책을 덮은 채 묵상에 잠겨야 했다.

또하나, 출소하는 나에게 젖은 목소리로 들려주셨던 만해 선생의 한시 「증별(贈別)」을 속울음 삼키듯 읊조린 것도 아마 그 때문이었으리라.

“하늘 아래서 만나기 쉽지 않은데/감옥 속 이별은 기연이기도 하네/옛 맹세는 아직 안 식었으니/국화 필 적 만남을 잊지나 말게.”

그런데 어쩌나, 그 만남을 아직 갖지 못했으니. 오래전 출소를 축하한다는 전화를 드렸을 때 대포 한잔 나누자고 해놓고 지금까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 361면을 읽다 말고 면목없음에 울컥,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겨울밤이다.

박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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