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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문숙 李文淑
1958년 경기도 금촌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천둥을 쪼개고 씨앗을 심다』가 있음. silmoon@dreamwiz.com
구멍
어(敔)라는 악기가 있어요
호랑이가 웅크린 모습이에요
등은 톱니처럼 울퉁불퉁하구요
아주 먼 곳에서 불길 같은 것이 오고 있어요
호랑이는 발을 번쩍 들고 그렇다고 날뛰지도 않고
앞발을 잡아당겨 그게 마지막일지도 모를 그 순간
가만히 뛰는 심장에 대고 있어요
눈에는 불 같은 건 들어 있지 않지요
다른 것의 살을 찢던 이빨도 이제는 번쩍거리지 않아요
그게 마지막이에요
누가 머리통을 탁 치고 등줄기를 긁어내리면
그냥 그게 끝이지요
아주 길고 오래 질질 끌던 음악도 끝이 나지요
혓바닥에는 최초의 말을 올려놓고
몸은 동그랗게 말고
그리고 눈을 닫지요
그렇게 모든 것이 다 멈춰도 귀는 열어두지요
그게 어디였을까요
처음으로 내지르던 비명이나
처음으로 찢어대던 살의 파들거림 따위
아무도 틀어막지 못한 그런 거
그런 게 들리지요
그럼 그게 마지막이에요
다른 악기처럼 몸에 구멍을 만들지 않아도
모든 음악은 끝이 나지요
맹인의 입술 위에서 악기는 울고
저녁나절 아주머니는
시계 자판을 더듬으며
영감 밥해주러 가야겠네
일어선다
물론 시계를 볼 줄 모른다
큰바늘과 작은바늘이
수직으로 서 있을 때의
지레짐작이다
비가 족족 내리는 토요일 오후
‘재즈 빅 5’에 게스트로 나온
맹인 악사
음악을 연주하고 난 뒤
소개한 곡목은 ‘비’
그러면서 비 때문에
해를 볼 수 없어 우울하다고 한다
그의 손등에서 금속의 시계가
번쩍인다
쌕소폰이 울고
더블베이스가 웅웅거려도
볼 수 없는 시계는
그것의 광휘만으로도 휘황해라
맹인의 입술 위에서 악기는 울고
꽝꽝거리고
소용돌이하고
지레짐작의 시간은 덧없어라
맹목으로 들여다보는 눈은
슬허라
검은 날그림자 째깍대며
흘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