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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깊은 산, 낮은 사람들

황재형의 회화에 대하여

 

김정락 金庭洛

미술사학자, 서울대 미대 강사. 저서로 『예술의 이해와 감상』 『세계의 도시와 건축』 등이 있음. grimon@naver.com

 

 

보기에도 숨이 차는 고갯길을 넘고 깊은 골 고랑을 따라서 사람들은 강원도로 갔다. 석탄을 캐러 온 사람들로 조용하던 산골은 순식간에 검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기계소리로 요란해졌다. 급조된 집들과 마을들, 그 속에서 사람들은 고된 인생을 살았다. 겨울이 찾아오면, 중앙선 철도의 석탄을 실어 나르는 화차는 철로 주변까지 검게 만들었고, 내린 눈은 쌓인 탄가루에 개어져 그나마 피곤한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칼바람이 몰아쳐 공허한 읍내 길을 휩쓸면, 가게 문과 간판은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막장까지 찾아온 사람들은 똑같은 작업복에 모자를 쓰고 깊은 갱도로 들어갔다. 가끔씩 귀청을 찢는 싸이렌 소리가 울리면, 작은 관사촌은 불안과 슬픔으로 어수선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사북, 고한, 태백 등 이른바 탄광도시이며, 이곳의 오래되지 않은 과거이다. 불과 10여년 전 산업의 구조가 바뀌자, 석탄은 애물덩어리가 되었다. 덩달아 이곳의 삶도 그렇게 취급되었다. 말만 좋은‘석탄 합리화사업’은 그나마 생계를 이어나가던 사람들의 자리를 앗아가고, 온 산을 시끄럽게 하던 거대한 시설들은 보기 흉한 괴물로 남게 되었다. 대충 꾸려진 살림집들이 다닥다닥 모여 온기를 유지하던 마을도 이제는 공허한 폐촌이 되어간다. 악착같던 표정은 사라지고 고단한 흔적과 낙망이 사람들의 얼굴에 아로새겨졌다. 그곳에 화가 황재형(黃在亨)도 함께 있었다.

 

 

1. 사실적인 미술에 시비 걸기

 

최근 개인전‘쥘 흙과 뉠 땅’(가나아트쎈터, 2007.12.4~2008.1.6)을 열었던 황재형은 사실주의 화가다. 그러나 대상을 그저 사실적으로 그리는 화가는 아니다. 그의 사실주의를 정의하기 위해서 잠시 미술사를 떠들어보는 것이 좋겠다. 사실주의로도 번역되는 리얼리즘(realism)은 근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예술개념 중 하나다. 어차피 허구일 수밖에 없는 예술이 사실과 관계한다는 것부터가 모순이지만, 나름대로 이론가들은 그러한 이념의 가치를 논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아이러니한 점은, 19세기 초반 사진이 발명되면서 미술이 사실묘사의 능력을 사진에 넘겨준 후에야 비로소 사실주의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 귀스따브 꾸르베(Gustav Courbet)는 “보지 못한 천사는 그리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그려질 대상의 실재(實在)를 강조했다. 따라서 꾸르베에게 사실이란 화가가 지금 여기에서 보고 아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사실주의는 무엇보다 모든 허구적 형상에 대한 비판력을 담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주의에 대한 이런 사변적인 해석이 그것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사실주의는 시쳇말로‘좌빨’(좌파 빨갱이)의 예술태도이다. 꾸르베는 사실주의자이기 이전에 사회주의자였다. 사실이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물리적인 마주서기를 전제로 하고, 대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참여를 요구한다. 그래서 원래 사실주의는 정치성이 강했다. 민중의 정치적 계몽을 추구하던 공산주의의 초창기 선구자들은‘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교묘한 개념 결합을 통해 사실주의를 실용화하고 아울러 예술의 도그마로 만들었다. 간추려 말하면, 근대의 사실주의는 예술주체의 물리적인 경험을 우선시함으로써 유물론적이다. 용어에 대한 선입견으로 당장 공산주의를 떠올리는 독자도 있겠지만, 근대란 과거의 관념적 가치를 비판함으로써 생겨난 것이기에 사실주의의 유물론적 성격은 근대정신의 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예술의 생산 및 소비주체 간의 긴밀한 경험적 (더욱 정확하게는 사실적) 관계를 기본으로 하여,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재현을 소통의 언어로 삼고 있다는 점이 근대적 사실주의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을 천착한 사실주의는 그 속에서 진실을 본다. 근대의 미술을 연 몇몇 유명한 사조와 화가 들의 정황을 살펴보면, 그 뒤에 사실주의가 웅크리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인상주의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들 또한 하나같이 작가 자신의 현실과 경험주의적 상황에서 그 주제와 모티프를 구했다. 약간 과장하자면, 인상주의 또한 사실주의의 계보를 이으면서 형식적인 면에서 좀더 근대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고흐의 초기 작품에서, 특히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탄광촌 사람들의 가난한 저녁식사를 바라본다. 이것은 고흐가 경험했던 자신의 지금이자 거기였다. 이것을 나는 현장성이라 말하고 싶다. 인상파를 다른 이름으로 외광파(外光派)라고 부르는 것은 화가들이 아뜰리에라는 작업실을 벗어나 직접 현장을 찾아다녔고, 바로 거기서 작업을 수행하면서 대상과 주체 사이의 직접적인 인상의 교감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현장성을 보여주는 첫 시도였으며, 이러한‘현장으로 가까이 가기’는 근대에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 매우 중요한 동기였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현장성은 대상에 대한 일시적인 접근이 아니다. 현장성이란 삶 속에서 몸으로 얻어낸 경험과 의미의 축적을 통해서 발현되는 것이다. 미술에서 사실주의란 그래서 단지 표현적인 혹은 묘사적인 사실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혹은 다른 장르라도)의 주체인 화가가 자신이 그린 대상에 대해 얼마나 깊은 현장성을 지니고 있는가, 다시 말해 얼마나 경험과 체험의 축적이 이루어져 대상을 얼마만큼 잘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로 확대될 수 있다. 그러므로 현장성은 표현적 결과와 그것이 내포하는 대상에 대한 근접성이 결합하여 응축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실주의 그림은 실물과 똑같이 그렸다는 시각적인 측면에 만족하지 않고 촉각, 청각 그리고 후각까지 자극하는,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물성(物性)까지도 공감하게 해준다.

이런 사실주의는 화가에게 개인의 주관적 표현형식보다는 보는 사람들과 교류할 조형언어를 선택할 기회를 제공한다. 사실주의에서 양식(style)이란 현대미술이 말하는 작가의 독창적인 조형성뿐만 아니라, 작가의 손과 환경이 만나서 빚어지는 일종의 종합적인 조형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지문을 느끼게 해주는 여러가지 특징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리기 위해 다양한 표현방식을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작가의 개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사실주의가 단지 묘사적 특징만을 지닌, 눈을 위한 예술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황재형은 보여준다. 그의 작품들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매우 다양하다. 그는 석탄가루와 흙을 물감과 함께 사용하여 그림 표면을 거칠게 한다. 그리고 붓 대신 나이프 같은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화면의 질감을 매우 투박하게 만들어놓는다. 그런 화면 위로 그는 사람과 풍경을 묻었고, 그것들은 이제 보는 이들 앞에 질박한 언어로 되살아난다. 이 형상들은 삶과 예술을 나누지 않았던 그의 뚝심을 보여준다. 물론 형상들의 강도가 표현주의 회화들과 비교되지만, 그의 힘은 결코 표현성에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2. 사람들

 

만약 황재형의 풍경이 강원도 탄광촌의 진경을 그리고 있는 것이라면, 그의 인물들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그곳 사람들의 진경초상이라 할 수 있다. 꾸미지도 않고, 짐짓 다른 표정으로 삶을 속이지도 않는, 그래서 결코 아름다울 수 없는 얼굴들. 또한 누가 누구인지 명기되지 않는 인생의 편린으로서의 얼굴들이 삶의 굴곡을 풍경처럼 느끼게 해준다. 특히 「식사」는‘사람들의 사이’, 즉 우리가 스스로를 인간(人間)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이유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좁은 갱도에 둘러앉아 양철도시락을 열고 식사하는 광부들, 그러나 이 작품의 의미는 시장기나 장소의 불편함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를 비추는 안전등의 빛줄기 사이로 느껴지는, 탄가루가 눈에 들어온 것처럼 아픈, 그런 사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조건의 삶 속에서 우러나온 그래서 자연스러운 배려, 그리고 현장의 상황까지 전해주는 이 그림은 간절하기 그지없다. 이런 현장성은 화가 자신이 갱 속에서 탄이 씹히는 도시락을 먹어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리라.

 

「식사」, 91×117cm, 1985년 가을, 캔버스에 유채 (가나아트쎈터 제공)

「식사」, 91×117cm, 1985년 가을, 캔버스에 유채 (가나아트쎈터 제공)

 

이 그림을 보면서 화가가 이전에 그린 광부의 모습을 떠올렸다. 검다 못해 은빛이 돌 정도로 두껍게 탄으로 덮인 얼굴과, 땀과 탄가루가 범벅이 된 머리를 그대로 드러낸 채였다. 얼굴에 퍼져 있는 삶의 흔적이 강원도의 산들처럼 깊은 고랑으로 패었지만, 그의 눈은 노동하는 인간의 굳은 심줄처럼 강하고 건강했다. 난 아직도 그 눈길을 피할 수 없다. 어떤 단편적인 감정이라고 말할 수 없는 다단한 표정 그리고 너무나 깊숙이 보는 이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그 시선은 나이와 학식, 사회적 지위에 구애됨 없이 인간으로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그 표정을, 깊고 어두운 갱도에서 나와 눈부신 빛을 만났을 때 서리는 안도감과 고된 노동을 뒤로한 짧은 환희라고 읽었다.

 

 

3. 길이 있는 풍경

 

태백의 산과 골은 깊다. 단지 지리적 혹은 지형학적으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심적으로 그렇고, 정서에 깔려 있는 밑그림이 더욱 그렇다. 첩첩이 쌓인 백두대간의 굵은 뼈대는 사람의 발길을 가로막는다. 요즘이야 잘 포장된 영동고속도로와 수많은 국도가 산허리를 끊으면서 길을 터주지만, 이것도 큰 길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강원도의 길은 산과 산 사이에 있다. 그러니까 깊은 골은 곧 길이 된다. 사람들은 낮게 웅크려 깊은 골에 자신들의 터를 잡았고, 터와 터 사이를 작은 비탈길이 이었다. 옛날 화전민들과 짐승이나 다니던 길은 이제 자연이 덮어버렸지만, 탄광을 열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았던 곳에는 길이 남아 있다. 그리고 길 주변에 삶의 흔적이 남아 있다.

황재형의 풍경화에는 길이 있다. 물론 산이나 집, 나무 혹은 물도 그려지지만, 길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었다. 그가 그린 길은 단지 보는 길이 아니다. 그 길은 화가가 두 발로 다닌 길이며, 또한 함께 살았던 사람들의 애환으로 닳은 길이다. 그것은 나아가 강원도 탄광촌의 역사이자, 삶이 각인된 풍경의 초상이다. 산허리를 둘러가는 「붉은 고갯길」과 마을의 「흙길」, 석탄을 나르는 「탄길」 들이 부락을 가로지르고, 자동차 바퀴에 팬 길은 「출근」이라는 제목으로 그려졌다. 길은 인생과 운명의 메타포로 자주 형상화되어서 특별할 것도 없지만, 황재형의 길은 단순한 메타포로 삼기엔 감정의 울림이 크다. 그가 그린 길은 간혹 우리를 분노하게 하기도 하고 따뜻하게 향수를 달래주기도 한다. 겨울 칼바람에 노출된 마을길을 보여주는 93년작 「저당잡힌 풍경」에서는 탄광촌의 현실에 분노하는 화가를, 그리고 산기슭에 붙어사는 집들이 있는 풍경인 2005년작 「어머니」에서는 먼 데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 모정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황재형이 그린 길에는 사람이 없다. 단지 그들의 발이 닦아놓은 길이 남아서 그려졌을 뿐이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는 그곳에 살았던 그리고 그 길을 다녔던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게 된다.

 

「탄길」, 89×225cm, 1998년 가을, 캔버스에 흙과 혼합재료 (가나아트쎈터 제공)

「탄길」, 89×225cm, 1998년 가을, 캔버스에 흙과 혼합재료 (가나아트쎈터 제공)

 

 

4. 역사를 추억하며, 인간의 온기를 찾아간다

 

1980년 황재형은 중앙대학교 졸업반이었다. 그 시절 서슬 퍼런 군사독재하에서도 미술은 아랑곳없이 고급스럽고 모던했다. 심상을 논하고 철학적 깊이를 추구하면서, 현학적 정신성만 남아 있는 듯 보였다. 교수이자 ‘잘나가던’ 화가들은 예술의 순수처럼 고결하고 품위있어 보였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잘사는 동네로, 예를 들면 평창동이나 강남으로 이사를 가‘그림 같은 집’을 짓고 기득권층이 되고자 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잘 꾸며진 자수성가의 기만을 들으며, 나 또한 그렇게 되리라 속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몇몇의 미술인들이 반역을 꿈꾸었다. 그리고 정말로 무엇이 현실인지 더 나아가 무엇이 진실인지에 대해 불온한 질문을 던졌다. 이른바 민중미술이 시작되었다. 1982년 황재형은 이명복, 이종구, 송창 그리고 전준엽 등과 함께‘임술년’이라는 매우 위험한 단체전을 모의했다. 그들의 그림은 낯설게도 무겁고 어두웠고 큰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그려진 대상은 지금까지의 모던한 그림들과 달리 과격하게 사실적이었다.‘임술년’은 전시의 이름이기도 했지만, 모임의 정체성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했다.

서가 한귀퉁이에서 먼지 앉은 책 하나를 펴본다. 1988년에 출판된 『한국 현대미술의 반성』이라는 책이다. 그 속에‘임술년’에 대한 짧은 구절이 들어 있다. “80년대 새로운 미술운동의 또 하나 상징적인 미술단체로‘임술년’그룹이 있다.” 이어지는 말은 이 그룹이 1982년 덕수미술관에서 처음 전시를 열었다는 이야기와‘임술년’이 갖는 의미였다. 전시 서문을 인용하면 이렇다.

 

‘임술년 구만팔천구백구십이에서’는‘임술년’(1982년)이라는 시간성과‘구만팔천구백구십이’(남한 총면적의 km² 수치)라는 장소성, 그리고‘~에서’라는 출발의 의미를 동시에 포함한다. 즉‘지금, 여기에’라는 소박한 발언인 것이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시각은 이 시대에 노출된 현실이거나 감춰진 진실이다. 그것은 인간, 사물 또는 우리들 스스로가 간직해야 할 아픔이며, 종적으로는 역사의식의 성찰, 횡적으로는 공존하는 토양의 형성이다. 우리는 다원적인 이 시대의 모든 산물들을 수용하지만 문화의 오류를 구체적이고 명료한 언어로써 얻고자 하며 현실에 드러난 불확실한 과도적 상황을 솔직하게 형상화할 것이다. (‘임술년’그룹 창립전 포스터)

 

여기서 나는 그 그림들이 보여준 진실에 대한 발언에 주목했다. 진실성은 사실성 위에 있는 한층 의미있는 개념이었기에, 그 시대에 감히 진실을 말하려는 그들에게서 나는 오히려 연민을 먼저 느꼈다. 그들에게 진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황재형은‘임술년’그룹을 결성한 그해에 중앙미술대전에서 광부를 그린 「황지 330」이라는 작품으로 장려상을 받았다. 재벌 삼성과 사돈관계인 중앙일보가 주최한 주류 미술공모에서 그의 사실적인 그림이 인정받은 것이다. 그렇게 민중미술을 실천해나간 청년은 어느날 가족들과 함께 1983년 강원도로 떠나 태백 황지에 자리잡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재형은 때론 시한부 광부로, 때론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그리고 지역 아이들과 주민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살아갔다. 아직도 그는 그곳에서 살고 있다.‘임술년’이 추구했던 사실주의적 회화정신을 그는 서울의 아뜰리에가 아닌 광산의 현장에서 찾으려 했고, 그곳으로 실천의 장소를 옮겼다. 처음에는 마치 운동권 학생들이 위장취업을 통해 노동현장으로 뛰어든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무려 25년간의 삶은 단지 그런 식으로 취급받기에는 무섭도록 진지한 것이었다.

간혹 황재형은 광산촌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을 서울에 소개했다. 84년, 87년 그리고 88년에 매번‘쥘 흙과 뉠 땅’이라는 제목으로. 흙과 땅에 붙어사는 인간들과 자신의 가장 원초적인 의미가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인간은 흙을 부쳐먹고 또한 그 땅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근원적인 뿌리에 대한 진실을-이것은 오늘 우리가 상실한 매우 중요한 삶의 문제다-캐내려는 사실주의적 태도와 휴머니즘으로 가득 차 있다. 이번 가나아트쎈터의 전시명은 그러니까 황재형이 오래전부터 수행해온 진리 탐구가 계속되고 있음을 공시한다.

전남 보성 출신의 화가에게서 간혹 남도의 흙내가 느껴지는 것이 나만의 감성은 아닐 것이다. 강원도는 그에게도 추운 땅이었다. 왜 고향 쪽으로 가지 않았는지, 기회가 오면 물어보고 싶다. 하여튼 그는 강원도 태백의 사람이 되었고, 그곳에 뼈를 묻을 사람이다. 지난날 권력의 정파가 바뀌어 과거 민중미술의 주체들이 나름의 권리를 구가할 때도, 그는 몰락해가는 탄광촌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과 운명을 같이했다. 이제 강원도 탄광촌은 그의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역사가 되어간다. 강원랜드 같은 화려한 유흥시설로 뒤덮이는 사북, 고한, 태백 등의 도시들은 이제 과거를 간단히 지우려고 한다. 현장을 버리지 않은 사실주의자로서의 의리와 신념이 그의 가슴속에 살아 있는 한, 그의 작업이 지닌 의미 또한 가벼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