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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기택 金基澤
1957년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등이 있음. needleeye@kornet.net
교통사고
밤길을 달려온 차 앞유리에
반투명의 반점들이 다닥다닥 찍혀 있다.
풀벌레들에게 자동차는 총알이었던 것.
주광성의 풀벌레들이 전조등 불빛을 보고
4차선의 사격장 안으로 달려들었던 것.
제 몸보다 수만 배는 더 큰 총알에 맞는 순간
체액은 터져 유리창에 남고
거죽은 탄피처럼 튕겨져나갔던 것.
빛만 보면 들끓던 피,
빛에 빨려들듯 돌진하던 피는
삶에 대한 애착을 아교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새 육체인 유리창에 힘차게 들러붙어 있다.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다.
어느날, 혀는
어느날 혀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개새끼!’라고 소리쳤다. 승객이 가득한 전동차 안이었다. 놀란 눈알들은 일제히 그 말을 발음한 내 입과 입에 달린 얼굴을 쳐다보았다. 발사된 말화살이 날아간 곳을 열심히 두리번거렸으나 거기에는 벽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험악해진 눈알들은 내 몸 구석구석을 뒤지며 더 빛을 뿜었고 몇몇 눈알은 혐오스럽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놀란 눈알들을 보고서야 나는 내 혀가 한 짓을 알아챘다. 그동안 그는 충직하게 성대의 울림을 제 몸에 실어서 마음이 원하는 단어와 문장을 만들어 내보내곤 했다. 마음이 원하지 않을 땐 입술과 이로 외부의 통로를 차단하여 스스로를 가두고 마음의 명을 기다리며 조용히 대기하곤 했다.
오늘 혀는 임금님의 당나귀 귀처럼 제 몸의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말을, 마음이 명하기도 전에, 툭, 내보내고 말았다. 굳센 의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개’자에 악센트를 주었고, ‘끼’자가 끝나자마자 얼른 입술을 닫아 쾅 닫힌 철문처럼 ‘ㄲ’의 여운이 강하고 길게 퍼지도록 하였다.
늙은 혀는 이제 주인이 시키지 않아도 독립적으로 제 할일을 할 때가 되었음을 알린 것인지 모른다. 스스로 주인의 뜻을 헤아려 말을 만들고 포장하고 알맞은 때를 기다려 내보내온 까닭에 말들은 저도 모르게 커진 세력을 감당하지 못하다가 드디어 입술과 이를 강제로 열고 뛰쳐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전에도 가끔 이런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때, 말들은 모두 마음의 끈에 매여 엄격하게 조정되었고 어쩌다 끈을 끊고 탈출해도 발음은 약해서 쉽게 뭉개졌으며 멀리 가지 못하고 단어가 다 끝나기도 전에 다리나 꼬리가 잘리곤 했다. 그러면 혀는 말하는 일을 중단하고 어둠속에서 오랫동안 근신해야 했다.
혀가 전동차 안에서 저질러놓은 난처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얼굴은 재빨리 벽처럼 희고 딱딱하게 안색을 바꾸었다. 목은 마치 말들이 다른 입에서 나온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얼굴을 좌우로 돌리며 시선을 분산시켰다. 그래도 눈알들의 독기가 수그러들지 않자 눈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고 두 다리는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게 옆 차량으로 몸을 이동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