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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

 

 

노대원

노대원 魯大元

서강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1983년생.

naisdw@empal.com

 

 

 

지하미궁, 그 지독한 악몽으로부터의 탈출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의 공간 상상력

 

 

Fade-In혹은 Fade-Out. 지하세계로의 초대장

 

좁다. 어둡다. 불쾌하다. 나가고 싶다.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다!

‘이곳’은 어디인가? 이곳은, 2000년대 후반의 한국소설들에 전면적으로 축조되기 시작한 폐쇄공간이며 지하공간을 뜻한다. 병자호란 당시 외적에게 포위되어 사면초가·진퇴양난으로 고립된 산성(김훈 『남한산성』)과‘고난의 행군’시기 북한 국경 근처의 움집과 국제밀항선의 컨테이너(황석영 『바리데기』)가, 그리고 미래의 긍정적 전망이 부재하는 ‘신빈곤층’ 또는‘88만원 세대’젊은이들의 외롭고 괴로운 자취방이, 고시원과 도서관이, 심지어는 동굴과 땅굴 등(김애란·김미월·박민규·이기호의 단편소설들)이 소설적 지도의 빈 공간에 제 몸을 새겨넣고 있다. 이처럼 지금 한국 소설가들의 상상세계 속에서 폐쇄공간·지하공간의 상상력이 점차 확산되고 있는 명백한 징후는 비평적 과제로 주목할 만하다. 그리하여 이곳, 감옥 같은 현실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이 감금의 소설들이 지닌 공간적 상상력에 대한 분석과 그 사회적 의미 해명이 절실할 터이다.

흔히들 80년대 문학을 광장의 문학으로, 90년대 문학을 밀실의 문학으로 기억한다. 이분대립의 도식적 명명이 낳는 폐해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기본인식은 일리가 있다. 90년대 밀실문학으로의 이행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집단적 꿈이 약화되었음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비로소 획득한 개인주의의 참의미를 본격적으로 성찰하게 했다. 더불어 정치적 고뇌를 잠시 잊고 문화 향유의 여유를 누리게 했다. 요컨대 90년대의‘밀실’이란 긍정적 의미에서, 개인의 내면과 자유의 조용하지만 화려한 개화를 뜻했다.

그러나 지금, 이곳의 문학은 어떤가? 이제 2000년대 후반의 소설에서 밀실은 더이상 은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꽉 막히고 꽉 닫힌 물리적으로 밀폐된 현실의 장소를 가리킨다. 그 새로운 밀실은 광장에서의 이념적·사회적 연대라는 가능성의 고리가 희미하게 풀려나간 곳이며, 경제적·심리적 고난과 악전고투해야 하는 고독한 전장이다. 이 전장에서 문학적 싸움은 치욕의 긍정과 허무적 체념(김훈)이나 국경 넘기와 타인의 고통에 어깨 겯기(황석영)로, 그리고 감금된 현실의 심미화나 유희와 환상(김애란·박민규 등)의 방식으로 치러지고 있다. 젊은 작가들은 소설 속 폐쇄공간에 그들의 절박한 세대론을 생생하게 돋을새김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소재주의라는 의심을 살 만큼 빈번해지고 있음에도, 문학적 대결 방식은 여전히 세계와의 소박한 화해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또한 김훈과 황석영은 각각 삶의 원리와 세계체제에 대하여 치열한 자세로 도전적인 질문을 던짐에도 불구하고, 그 응답으로 치욕적 역사와 제의적 신화에서 길어낸 기존 세계관을 제시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러한 소설의 지형도 가운데 독특한 빛깔을 과시하며 솟구친 이색적인 지하세계의 서사가 바로 신인 소설가 서진의 장편소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한겨레출판 2007)이다. 한국소설의 무대를 저 멀리 뉴욕으로까지 확장한 것은 이 소설의 소소한 미덕에 불과하다. 서진은 욕망의 메트로폴리스, 그 아래로‘언더그라운드’라는 지하미궁/커뮤니티의 소설적 공간을 구축하여 감금으로부터의 탈출과 존재 상실의 회복을 간절히 꿈꾼다. 그리고 그 실현의 반복된 좌절을 지독한 악몽의 서사로 직조하고 있다. 선형적 시간서술을 탈피한 흥미로운 소설문법의 작난(作亂)과 작가-독자간의 대화적이며 참여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점 역시 우리 소설의 미래 전망을 위한 흥미로운 제안이 된다. 이 소설공간으로의 즐거운 자발적 유폐가 갇혀 있는 지금의 문학과 현실, 그 경계 밖으로의 탐색과 전망이 되기를. 그러면 서진 식으로 셋을 센 뒤, 이 지하미궁의 악몽을 다시금 톺아보자.

 

하나,

둘,

호흡을 가다듬고,

셋.

 

 

Pause. ‘언더그라운드’의 공간시학을 위하여

 

“13그램의 눈꺼풀”을 떴을 때, 당신-독자는 필시 이곳‘언더그라운드’에 있을 것이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의 표제 자체가 이미 일러주듯이, 이 소설은 무엇보다 언더그라운드·거대도시·가정주택·지하철·테마파크·트랜스포터(공간이동장치) 등의 공간성과 함께 이민·미행·추락·탐색·감금·탈출에 이르는 이동성이 도드라진 텍스트다. 그 가운데‘언더그라운드’에 대한 문학적 해명은 소설 읽기의 핵심을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는 사전적으로 물론‘지하공간’을 지시한다. 2차적 의미로‘지하철’이나‘비합법적인 지하운동 또는 그 지하운동을 하는 단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언더그라운드는 이같은 의미들을 모두 품고 있지만 그 이상을 함축하고 있다. 총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에서 주요한 무대공간 역시 크게 세번의 전환을 한다. 그러므로 1부에서 3부까지 제시된 공간들의 비교를 통한 의미규명이 언더그라운드를 해명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될 것이다. 이때 언더그라운드는 작가가 직관적으로 감지한 현실세계에 대한 소설적 공간 형상화로서, 곧 그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Rewind. 지하미궁의 감금 혹은 지옥철의 악몽

 

소설의 1부에서, 악몽에서 깨어난‘나’는 뉴욕의 지하철 안에 있다. 그러나 깨어난 현실이야말로 악몽임을 깨닫는다.‘나’는 곧장 자신의 모든 기억이 휘발되었음을 알게 된다. 다만 지갑 속에‘김하진’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신용카드와 가족사진으로 추정되는 사진 한장이 들어 있을 뿐이다. 그는 이 두가지 단서를 가지고 전력을 기울여 자신의 존재 회복과 지하철 외부로의 탈출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는 계속되는 악몽처럼, 미지의 힘에 의해 계속해서 탈출에 실패하고 만다. 여기서 언더그라운드는 물론 (탈출이 불가능한) 기이한 지하철 공간이다.

하지만 지하철이 도시의 밑바닥에 숨어서 달리듯이, 이 공간의 뜻도 숨어서 달리고 있다. “지하철과 고층빌딩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다. 맨해튼의 높은 빌딩에서 일하는 그 수많은 사람들을 브루클린과 퀸즈, 할렘에 이르기까지 실어 나를 수 있었던 것은 지하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하철은 뉴욕의 동맥이다.”(43면) 지하철이 현대 도시문명의 첨예한 상징 중 하나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 지하공간은 애초에 부재하던 곳으로서, 고층빌딩처럼 인공성의 극치를 현시하는 공간이다. 지하철은 지상공간이 초(超)고도비만과 조밀화로 한계점에 도달한 대도시에만 건설된다. 지하철이 대도시의 동맥이라는 낡은 비유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지하철이 위치한 현대적 도시의 심각한 동맥경화증을 쉽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병적인 현대성의 도시적 증상이 바로 지하철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병리적 공간인 지하철은 도시 주거공간과 노동공간 사이의 접속과 교통을 감당하는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기에, 그 아픈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지하철은 또한 근대적 도시의 건설과 동시에 등장한 군중이 어지러이 붐비는 장소이다. 뉴욕의 지하철에는 “어디에서 내릴지 몰라 연신 허둥대는 관광객, 이어폰을 끼고 머리를 흔들거리는 젊은이들, 뚱뚱한 흑인 엄마와 마른 딸아이, 잡지를 읽으며 한눈팔지 않는 쌜러리맨……”(44면) 들이 뒤섞여 있고, 이 뒤섞임은 현대성의 산만함과 익명성의 혼란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시각적 기표들이다.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E.L. Pound)는 언젠가 지하철에서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지하철 정거장에서」)을 날렵하게 포착한 적이 있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 1부에서‘나’는 제 얼굴이야말로 그‘군중 속 유령’의 얼굴이라고 통감한다.‘나’는 역설적으로 완전한 기억상실을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제 존재를 증명해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익명의 군중 속에 뒤섞인 존재에 대한 극단적 표현은, 아마도 투명인간으로의 변신이나 자기정체성 상실이 될 것이다. 서술자-김하진은 독자-당신에게 이렇게 투덜댄다. “당신은 나를 봤어도 모른 척하며 지나간다. 어차피 나 같은 사람들은 사람들이 애써 보려 하지 않거나, 투명인간처럼 여기니까 당신을 탓하지는 않겠다”(45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김하진뿐만 아니라 독자-당신 또한 언더그라운드라고 상징되는 이 고독한 군중의 도시문명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유령의 얼굴로 다가오기는 마찬가지다. 이 언더그라운드의 세계인식에 따르자면 이렇다. 어느날 당신-독자는 지하철에 무언가 두고 내린 것을 깨닫는다. 당신-독자는 자책하면서 분실물보관소로 찾아간다. 그런데 놀랍다,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다름아닌 지워진 그대의 얼굴이다!

“지하철에서 헤매고, 지상으로 올라가다 몸이 찔리고, 다시 지하철에서 깨어나는 이야기”(93면)를 반복적으로, 그리고 절망적으로 전개해나가던 서술자-김하진은 난데없이 독자-당신에게 이렇게 되묻는다.

 

나의 이야기가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 같다고? 혹시 당신의 일상과 비슷하지 않은가? 매일 아침 똑같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승용차를 탄다. 학교에 가고, 직장에 나간다. 고등학교가 대학교로 변하고, 팀장에서 과장으로 승진하고, 애인이 바뀌고 결혼을 한다. 매일매일 비슷한 과정으로 약간씩 새로운 일이 생기며 반복된다. 하지만 모든 것의 끝은 있게 마련이다. 학교를 그만둔다. 직장에서 해고된다. 애인에게 버림받고 아내에게 이혼당한다. 자동차에 치여 갑자기 죽어버린다. 나도,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끝을 알리는 신호는 오게 마련이다. (93~94면)

 

그렇다. 현시기 자본주의의 거대한 심장부이자 현대 도시문명의 찬란한 발기를 과시하는 메트로폴리스 뉴욕. 그 회색빛 도시의 인공피부 밑으로 뚫린 인공혈관, 지하철 속으로의 감금은 체제와 일상의 지하구조를 음울하게 조형한다. 감금자의 정체도, 방면(放免)의 그날도 정확히 알 수 없는 답답한 감금에서부터 경계 바깥으로의 탈주 시도가 엄혹하게 차단되는 것까지, 소설 속 김하진의 이야기는 분명 더욱 견고해진 자본제 질서에 매일같이 억압당하는 독자-당신들의 이야기를 닮았다. 독자-당신들은 이미 주어진 협소한 몇가지 삶의 선로에서 (완전한 자유를 가장한) 선택을 하고, 일상생활의 무대 위에서 권태로운 차이와 반복을 연기한다. 삶은 불변하는 시간의 좌표에 따라 선로 위를 움직일 뿐이다. 존재와 체제의 전환은 이뤄지지 않고, 욕망의 환유 연쇄에 만족해야 한다. 언더그라운드에서처럼 환승은 가능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삶의 출구를 향한 도약이 불가능한 꼴이다. 그러나 이 반복의 선로 주행은 안정된 순환 속에서도 불안한 균열을 품고 있다. 불안의 균열은 균열을 낳고 또다른 균열을 낳고…… 끝없이 깊은 균열을 낳아 삶을 악몽의 구렁으로 몰아간다. 진정한 존재의 기억이 삭제된 채로 군중 속에서 존재증명의 명령에 시달린다. 출구로 탈출하려고 하면 누가 설치했는지 모를 체제의 투명한 전기울타리가 독자-당신들을 저지한다. 고통과 상처의 나날이 반복된다. 이러한 현대문명의 악몽이 매일같이 운행하는 지하철처럼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부의 언더그라운드, 뉴욕 지하철은 유령적 존재가 된 김하진에게 그로테스크한 겹겹의 악몽 체험을 선사하는, 그야말로‘지옥철’이다. 그곳은 탈출이 요원하고 방황과 좌절을 수반하는 감금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또한 지하미궁이다. 다만 신화 속의 미궁이 아리아드네의 실타래와 이카루스의 날개로 상징되는 탈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면, 이곳 언더그라운드는 오늘날 세계체제의 바깥을 상상하기 힘든 것처럼 출구가 봉쇄되어 있다. 언더그라운드로 표상되는 현실세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그러나, 탈출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제 몸의 상처를 받아들이면서 출구를 뚫고 나가려는 도전의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 억압적 세계구조의 위력에 매번 좌절하면서도 감금의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저항의 힘을, 소설가 서진은 감금시키지 않고 있는 것이다.

 

 

Rewind. 붕괴된 스위트 홈, 홈리스들과 자폐아의 집

 

이제 소설의 2부에서는‘집’의 붕괴에 대한 공간 상상력이 부각된다. 지상공간에서 김하진의 과거 내력이 펼쳐진다. 그는 선배의 권유대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가지만 직업을 잃는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외도를 한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목수일을 하다가 수리하던 주택이 붕괴되는 사고까지 당한다. 이 이야기를 공간좌표 위의 이동선으로 재구성해보자면, 결국 존재의 수직적 상승을 위해 수평적 공간이동을 꾀하지만 오히려 몰락과 붕괴의 사태를 맞닥뜨린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사 전개는 흥미롭게도 1부에서 제시된 언더그라운드의 위상과 조응한다. 도시의 지하철은 미래에의 가능성을 싣고 매일 선로 위를 질주하고 있지만 언제까지나 지하에 붙박혀 있다. 그렇다면 이런 세계, 언더그라운드에서의 전진 이동은 전진이 아니라 암울한 하강 이동이 아닐까? 1부의 악몽의 서사가 2부의 현실의 서사와 잇대어져 있는 것은 그런 질문을 위해서다.

2부는 김하진이‘또다른 나’인 아들 민규와 함께 테마파크 코니아일랜드에 다녀오는 지하철에서 악몽에서 깨어난 것으로 시작한다. 행복한 가족의 한때를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불길한 악몽의 전주곡이 예견하는 것처럼 그의 가정은 서서히 균열을 일으킨다. “진정한 아메리칸 라이프스타일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야”라고 말하곤 하던 아내 미라의 부재가 그의 집을‘텅 빈 공간’으로 만든다. 아내의 일탈과 그로 인한‘스위트 홈’의 붕괴 조짐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과거로‘되감기’(rewind)된 서술을 통해, 나스닥 주가폭락으로 그가 프로그래머로 근무하던 LA의 닷컴기업이 몰락하고 목수 조수로 일하게 된 것들을 회상한다. 인공지능 인터넷 검색엔진을 개발하던 김하진이 정작 자신의 현재와 미래는 제대로 검색하지 못한 씁쓸한 아이러니다. 이제 그의 아내도 세탁소에서 근무하면서 변호사 자격시험 공부를 해나간다. 미행으로 알게 된 것이지만, 사실 집 밖에서 그녀는 퇴폐영업을 하는 안마시술소에 나가고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김하진은 사회와 아내 모두에게서 거세된 남성 존재로 전락하고,‘집안 사람’이었던 아내는‘집밖 사람’이 되었다. 경제적 몰락과 아내문제로 인해 그의 가족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주택 내부(집안)를 리모델링하는 목수로 전직하게 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한국어의‘집안’이 가족공동체를 뜻한다는 것은 좋은 시사점이다. 주택 리모델링이야말로 여러모로 탈난 집안의 문제를 수리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몸으로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 집안의 탈을 복구하지 못한 것처럼, 그는 수리중인 주택에서 붕괴사고를 당한다. 말 그대로, “집이, 홈 스위트 홈이 무너지고 있었다”(190면). 이해관계로부터 안주할 수 있는 마지막 피호성(被護性)의 공간/공동체인‘집안’과 물리적 주택공간의 붕괴는 서로 포개어지면서 의미를 증폭시킨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독일어‘heimlich’는 원래‘집’에 소속된 단어로서, 낯설지 않음, 친숙함, 길들여짐, 소중하고 은밀한 것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닫혀 있음, 뚫고 들어갈 수 없음 등을 뜻하기도 한다. 심리적으로 친숙한 것이 억압에 의해 낯설고 기괴해진다는 것이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의 집은 친숙하지만 낯설고 기괴한, 바로‘heimlich’의 의미로 얼룩진 그 집이다. 꿈과 정신의 구조를 연구한 프로이트가 서구 부르주아의 가족관계를 천착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론화했다면, 소설가 서진은 이렇게 행복한 가족 삼각형의 파괴로부터 지하에 거꾸로 세워진 집을 건축해낸다. 김하진 이외에 언더그라운드를 배회하는 주요 인물들 역시 모두 탈난 집안에서 이탈해 있는 존재들이다. 흑인소년 빌리(또는 프레디)는 “아빠는 집을 나가버렸고 엄마는 길거리에서 돌아가셨죠. 집에 있어봤자 어차피 할 것도 없어요”(38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길거리 악사인 앤디는 가출한 아내와 딸을 찾아 지하철을 방황하게 된 사내다. 앤디의 아내로 추정되는 에이프릴도 집을 나섰다가 불행하게 어린 딸을 잃어버리고 지하철에서 방황한다. 마약에 중독된 전직 의사 폴 역시 아내가 가출했다. 인간은 본래‘집안의 존재’이므로, 집안의 행복이 파괴된 이들은 그들의 한 세계가 파괴된 것이다. 그러니 지상의 집안에서 살 수 없어 새로운 집을 찾아 언더그라운드라는 지하세계로 틈입하게 된 것이다.

 

사고로 이곳에 오게 되었든, 이곳을 원해서 오게 되었든, 언더그라운드에서 살고 싶은지 밖으로 나가고 싶은지 결정을 해야 해요. 저희는 지하철 홈리스(homeless)가 아니에요. 지상에 집이 없는 하우스리스(houseless)일 뿐이랍니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새로운 가족, 새로운 친구를 만나 새로운 홈(home)을 만들어 살아가고 있어요. (205~206면)

 

3부에서 언더그라운드를 안내하는 에이프릴의 진술은, 언더그라운드의 구성원들이 일종의 대안적인 가족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김하진은 프레디의 도움을 얻어 언더그라운드 탈출에 성공하지만, 그것이 프레디와 유사 부자관계를 수락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언더그라운드가 대안적 가족을 지향한다는 것에 냉소적 반응을 보일 뿐이다. 그는 언더그라운드에 감금되어서도 아들과의 이메일 송수신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결국 아들의 생일에 만날 수 있게 된다. 그가 이토록 아들에 집착하는 모습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김하진의 아들 민규는 자폐아다. 붕괴당하고 감금당하는 인물의 다음세대가‘스스로 갇혀 있는 존재’인 자폐아라는 사실이 눈에 띈다. 감금의 현실이 감금의 성격을 낳기까지 이른 것이다. 민규는 타인에게 말 걸기를 거부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텔레비전 보기와 이메일 쓰기에 미쳐 있다. 밀폐된 세계에서 태어나 자란 아이들의 극단적인 소통 결핍이 변형된 소통구를 연 것이다. 아들이 “오십다섯개의 나라, 이백서른네명의 친구”(126면)에게 이메일을 쓰는 것으로 자폐를 넘어 접속과 소통의 자맥질을 꿈꾼다면, 언더그라운드에 갇힌 아버지 김하진 또한 아들에게 이메일을 보내기 위해 무선네트워크 신호를 신의 구원처럼 여긴다. 아들에 대한 사랑은 아버지로서의 사랑이면서, 행복한 추억에 대한 사랑이다. 아들은 가장 행복했던 시공간을 환기하는 마법의 기호인 것이다.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테마파크 코니아일랜드에 대한 김하진의 장소애(場所愛)의 이유는, 소설의 대단원에서 드러나지만, 그곳이 가장 불안하면서도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임신한 아내와 함께 희망을 되새기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행복했던 공간으로 이동시켜주는 마술적 장치,‘해피니스 트랜스포트’(happiness transport)는 결국‘기억의 마술’이 아닐까.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는, 특히 소설의 2부는, 집안 붕괴가 어떻게 한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고 지하인간들을 양산하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현란한 현대 도시문명 이면에 도사린 음산한 미궁의 지하공간을 축조하여 현대인이 상실한 정체성의 질긴 탐색과 체제에 대한 저항을 보여주겠다는 흥미롭고 야심찬 주제는 다소 해체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스위트 홈’이라는 근대적 가족이데올로기로 협소화되는 형국은 이 소설의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분명 가족이데올로기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소하는 목소리도 존재하지만, 그 목소리는 동시에 행복한 가족의 파국을 슬프게 이야기하는 목소리이니까 말이다. 부계 혈연에 대한 집착과‘집밖의 여성’에 의한‘집안’의 파국은 남성적 욕망과 그 불안이 깃든 공간의식이 아닌지, 당신-독자들은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Stop. 언더그라운드, 시간과 희망이 정지된 중독의 공간

 

여기서의 생활이 지상에서의 생활보다 나은 건 아닙니다. 어디에 가든 여기보다 더 나쁜 생활은 할 수 없다는 게 사실이죠. 그래서 더 안심이 돼요. 이보다 더 큰 고통이 없을 거라고 여겨지면 어떤 고통도 쉽게 극복할 수 있으니까요. (206면)

 

이것은 3부에서 에이프릴이 김하진에게 언더그라운드를 설명해주는 말이다. 이곳 언더그라운드는 우선 기존 사회에서 배제당한 마이너리티들의 지하 도피공간이며 지하공동체이다. 그들은 서로 연대하면서 전직 의사 폴의 명령에 따라 기존 지상사회를 전복하려는 광기에 가까운 음모를 숨기고 있다. 그들은 일정부분 기존 사회의 문법을 거부하는 진취적인 히피집단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마약에 중독된 광인의 명령에 굴복당하는 나약한 존재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긍정의 세계관이 아니라 습관적인 비관주의에서 위안을 얻고 있다. 에이프릴이 말한 것처럼 언더그라운드 그곳은 세상의 밑바닥이므로 더이상의 추락도 좌절도 없을 곳이다. 그 마음의 정지는, 절망의 사태와 파국을 경험한 자들이 더이상 삶에의 희망을 품지 않는 비관주의에 스스로 침윤됨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어떠한 사소한 불행과 비극에도 고통받지 않으려는 심리적 자기보호와도 같다. 그러니 언더그라운드를 우리 안에 자리한‘마음의 지하감옥’이라고 이해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그곳에는 도피심이, 복수심이, 그리고 파괴욕과 습관적 비관주의가 어두운 굴 속의 괴물처럼 움츠려 있다.

삶의 고통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언더그라운드의 사람들은 복잡하게 시간이라든가 희망 따위를 사유하거나 제 삶을 반성의 영역으로 불러들이지 않으면 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삶은 언제까지나 지하의 어두운 삶이며 감금의 삶이 될 것임이 자명하다. 그것은 반성 없는 중독과 환각의 삶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독자-당신에게 마약과 환각만이 중독의 징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일상이 중독의 징표다, 당신이야말로 중독자라며 읽는이를 도발한다. 그러므로 1부의 악몽에서 보여준 지하철 공간이 순환만이 가능한 체제의 억압구조이며 도시의 병폐라면, 3부의 언더그라운드는 독자-당신의 일상과 심리를 허구의 페이지 위로 옮겨와 반성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몇가지 해석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인공이 감금의 지하공간에서의 끊임없는 탈출과 탈주를 꿈꾼다는 것이다. 그 주인공의 꿈꾸기는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에서 탈주를 꿈꾸도록 이끈다. 이 세계가 밑바닥의 뇌옥(牢獄), 언더그라운드라는 비관적인 인식에서 문학적 사유를 끝낼 수는 없다. 영원한 감금과 탈출, 그리고 저항과 응징의 연속이 된다 하더라도 닫힌 세계를 찢어내는 파괴행위 자체야말로 자유와 존재 전환의 실천이므로.

 

 

Play! 웰컴 투 더 ‘플레이’그라운드!

 

소설은 가장 젊고 개방적인 문학장르이다. 소설은 새로운 문화의 영토를 제 것으로 복속하고자 하는 탐욕스런 제국주의적 성격을 지녔다. 특히 근래 들어 소설은 영화와 게임 또는 싸이버스페이스에 제 영토를 유린당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것들의 영토를 침범해나가고 있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도 영화와 게임의 전략·전술을 전유하여 그들에 대항하고 있다. 물론 이 소설이 단지 영화나 게임에 근접한 형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 기준에서 보자면, 영화 같은 소설이나 게임 같은 소설보다는 차라리 영화나 게임을 옹호하는 게 낫다. 그러니 타 장르로의 근접도가 아니라 장르간 혼종교배로 탄생하는 소설의 버전업(version-up)에 대한 의미를 묻는 편이 타당하다. 영화적 형식이, 게임의 형식이 소설의 영토로 확장되었을 때 새롭게 획득되는 문학성이 무엇인가라고 말이다.

먼저 이 소설은 영상문법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비록 악몽과 파국을 그리는 감금의 소설 텍스트이지만, 주인공의 감금된 현실로부터의 탈출 시도, 그리고 끝없는 저항이 소설에 밝은 조명과 경쾌한 운동성을 부여한다. 이때 공간형식의 탐구는 무엇보다 시각매체인 영화의 전략에서 큰 힘을 얻고, 인물들의 이동을 서술하는 데에도 영화적 전술이 유효하다. 비디오테이프를 되감고(rewind), 정지시키고(stop), 건너뛰고(skip), 재생하는(play) 등의 시간서술 방식은‘리모컨 조작’이라 부를 만하다. 이 리모컨 조작에 의해 시간은 서술의 유연성을 획득한다. 그 시간 조작은 독자-당신의 소설 읽기에 경쾌한 가속도를 발생시키지만, 가속도만을 미덕으로 삼는 자본주의의 일방통행을 교란하는 성찰적인 조작에 가깝다. “인생은 오르막길. 어차피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기 때문에, 왜 살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생각할 시간 따위는 없을지 모른다”(150면) 등의 표현이 잦은 것이 이를 증거한다. 언더그라운드의 지하철에 새겨진 “Prove Yourself”(당신을 증명하시오)라는 낙서의 반복적 제시 역시 존재 성찰의 게임에 어서 참여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게임의 구조나 하이퍼텍스트의 자유로운 얽힘처럼 선형성(線形性)을 해체하고, 양방향적(interactive) 대화를 지향하는 점도 흥미롭다. 각 부 사이의 서사적 관련도 여러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전통적 독법대로 각 부의 서사내용이 순차적으로 상호 관련을 맺는다고 읽으면 1부를 악몽으로, 2부와 3부를 악몽에서 깨어난 뒤의 현실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악몽과 현실은 24시간 순환하는 지하철처럼 꼬리에 꼬리를 문 뱀이 되어 달리게 된다. 이와 다르게, 2부와 3부는 연결되지만 1부는 독립된 악몽의 서사로 읽을 수도 있다. 역동적인 시간 조작과 서사전개 방식만큼이나 이 소설에 개성있는 목소리를 부여하는 것은 서술자의 빛나는 활약이다. 서술자가 독자인‘당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하는 대화적 태도는, 주인공의‘소설 같은’이야기가 독자-당신의‘일상 속의’이야기이다, 독자-당신의 읽기가 곧 작가-나의 쓰기이다,라는 소설가의 인식을 기본전제로 삼아 출발한다. 심지어는 독자를 소설 속에 출연시키고자 하며, 독자들의 다양한 사회적 신분을 추측하여 그들의 일상적 삶과 소설의 속살을 잇대놓는다. 확연히 독자-당신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자기반영과 메타픽션적 측면(115면) 또한 소설 쓰기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자기성찰을 반영하고 있다.

 

당신은 이렇게 두 눈으로 글을 읽고 있다. 그것은 진짜로 일어나는 행위다. 하지만 글을 읽으면서 당신의 머릿속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상상력은 과연 진짜일까? 당신이 잠을 자고 있는 것은 진짜다. 꿈속에서도 비명을 지르고 동시에 침대에서도 비명을 지른다면 그것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진짜와 가짜의 경계는 어디쯤 될까? 픽션과 논픽션은 어떻게 정확하게 나뉠 수 있을까? 지금 당신이 꾸는 악몽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12면)

 

이 소설에서 소설 속의‘가짜’이야기는 소설 밖의‘진짜’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환기하는 진짜배기 이야기다. 소설 속의‘악몽’은 소설 밖의 현실이 혹시 진정한 악몽은 아닌지 되묻게 한다. 작가와 독자가 서로의 존재 의미를 열렬하게 주고받으면서, 그렇게 쓰기(write)와 읽기(read)는 두터운 경계를 허물고 생산적 유희와 참여로 가득 찬 신명나는 놀이(play)로 거듭난다. 견고한 체제와 사회구조를 변혁하거나 개인의 삶을 혁신하는 일은 지하미궁에서 탈출하는 일만큼이나 어렵다. 그러나 그것을 상상력 속으로 끌어들여 새롭게 구성하고 성찰해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얼마든지 열려 있는 길이다. 움직이지 않는 타락한 세계, 그 너머의 바깥을 꿈꿀 권리는,‘리모컨’처럼‘당신’에게 그러므로 우리 손 안에 이미 주어져 있다. 전복적 사유의 힘은 상상에서 출발한다. 소설의 상상력은 놀이이며 성찰이다. 이곳이 바로 소설의‘플레이그라운드’이다.

 

 

Fade-Out 혹은 Fade-In.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지금 이곳이 바로 감금의 뇌옥(牢獄)이라는 문학적 비명이 쇳소리처럼 날카롭다. 물론 세계와 화해할 길을 잃어버린 근대인의 정신적 직물인 소설에서, 그 비명소리는 일반적인 기조이며 주조음이다. 현대성이라는 이름으로 우뚝 솟아 있는 인공 첨탑들이 도시의 스카이라인에 점점 더 드높고 현란한 무늬를 새겨넣는 동안, 그 밑바닥에는 짙은 그림자가 미로처럼 펼쳐진다. 그 미로에서 출구를 찾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자본의 체제는 진화를 거듭하며 더욱 강성해지고 견고해지는데, 개인은 그만큼 힘을 빼앗긴다. 그리하여 소설에 담긴 현대의 일상 또한 시간이 갈수록 불가해한 미궁에 빠진다. 이런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도, 특히 최근 한국소설에서 감금의 상상력은 말 그대로 홍수를 이룬다. 소설가들은 오래되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밀폐공간과 지하공간을 조형하고 혹은 깨부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때 감금된 현실세계에 대응하는 존재의 방식은 두가지로 대별된다. 첫째는, 감금된 세계의 감옥 문을 철저하게 파괴하여 탈출하는 혁명과 전복의 방식이다. 둘째는, 감금된 현실에 대한 심미화나 시적 몽상을 통해서 세계가 아니라 수인(囚人)의 정신에 창을 내는 방식이다. 많은 소설가들이 현실의 가공할 위력에 놀라서 쉽게 순응하고 체념하거나 소박하게 삶을 심미화하여 위안을 얻는 것으로 그 미적 출로를 찾고 있다. 그 가운데 서진은 신인 소설가다운 패기와 전위감각으로 무장하고, 스스로를‘언더그라운드’의 수인(囚人)으로 유폐시킨다. 그는 이 지독한 악몽으로부터의 끝없는 탈주를 시도한다. 또 그는 봉쇄된 세계를 개성있는 눈으로 인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지하미궁의 악몽이 실은 독자들이 살아가는 일상의 삶에서 길어올린 것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독자-당신들이야말로 갇혀 있다고. 그러니 이제 이 소설을 읽는 것은 당신이 갇혀 있는 이 세계를 읽고 그 세계의 바깥을 상상하는 탈출을 감행하는 일이라고. 당신이 이 소설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fade out) 당신의 현실세계로 복귀했을 때, 세계는 점점 밝아질(fade in) 것이라고.

 

 

 

심사평

 

평론부문의 응모작은 총 7편이다. 응모작들을 통독하면서 나는 3편에 주목했다.

「레테르의 부정: 감옥에 간 모던 보이, 알파와 오메가를 꿈꾸다」는 근대소설의 고전, 염상섭의 『만세전』을 새로이 독해한 것이다. 아내의 위독 소식에 식민지 조선으로 일시 귀국하는 동경 유학생 이인화의 여정에 노정되는 자아의 분열, 즉 “자신이 조선인이 아니라고 상정하고 싶은 욕구와, 그러나 일본인은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의 상충” 사이에서 고뇌하는 이인화의 내면에 공감적으로 접근해가는 논지가 현재적 호흡으로 살아 있는 점이 돋보이는 글이다. 그런데 이 소설이 지금 우리의 문학 상황에서 왜 다시 논의되어야 하는지, 문제 구성의 절차가 생략된 것이 유감이다. 시간적 낙차가 거의 의식되지 않는 통에 비평이 아니라 그저 해설에 그친 점도 결점이다.

김훈의 『남한산성』과 편혜영의 『아오이가든』을 함께 다룬 「낯선, 공간에서 오늘을 이야기하다」는 단순한 작품론 또는 작가론이 아니라‘리얼리즘의 증발’이라는 핵심어로 2000년대 문학의 한 경향을 분석한 본격 평론이다. 그런데 문제설정 방식이 너무 낯익다. 리얼리즘의 증발을 뒤집는 결론도 왠지 손쉽다. 리얼리즘이나 리얼리티 같은 핵심어들을 엄격하게 제한하지 않은 채 소박하게 사용한 탓이다.

「지하미궁, 그 지독한 악몽으로부터의 탈출」은 작품론이다. 작품론은 작품론이되 시야를 갖춘 작품론이다. 그는 내면의 개화를 특징으로 하는 90년대 문학의 밀실과, 고독하고 처절한 전장으로 변한 2000년대 문학의 밀실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여 신인 소설가 서진의 처녀 장편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를 분석한다. 작위적이지만 도전적인 가설을 바탕으로 한 그의 소설읽기는 더러 불안하고 또 더러는 자가당착적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작품의 안과 밖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위치를 측정하여 고투하는 모습, 특히 체제에 대한 저항이 가족이데올로기로 협애화하는 약점을 지목한 대목은 감상적 해설이 비평의 이름으로 횡행하는 세태에 대비할 때 미쁘다.

비평의 생명은 평가다. 노대원의 글을 수상작으로 삼는다. 축하한다.

최원식

 

 

 

당선소감

 

홀로 숲 속에 들어가 책을 읽곤 했다. 태양의 부드러운 은비늘이 떨어지고 바람이 여리게 숨쉬는 모음과 자음의 숲이었다. 거기서 내가 읽은 것은 낯선 신의 목소리를 담은 글이거나 세상이 아프다고 울어대는 시인의 노래였다. 견디기 힘든 침묵의 시간이 오면, 낯선 신들은 나를 위해 기도했고 나는 시인들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글자들의 숲 속에서 내가 무엇보다 눈여겨 읽은 것은 어지러운 내 삶의 무늬였고 나무들의 거친 살갗이었다.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하늘의 아무 페이지나 넘겨보곤 했다. 그렇게 책들의 포근한 그늘에서 놀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세상으로 기어나오면, 세상은 온통 뙤약볕의 사막이었다. 나는 사막을 횡단하는 나무늘보였다. 길은 보이지 않고 혀는 말라갔다. 그리고 자주, 눈이 머는 공포에 시달렸다. 그때마다 비록 헛것의 꿈일지라도 오아씨스에 혀를 갔다 대야만 했다. 그러면 사막은 여전히 사막대로 남아 있었고 나도 여전히 나무늘보였지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행복한 상상력의 철학자 바슐라르는 “어떤 두려움을 끝에서 끝까지 질주한다면, 그것이 바로 환희인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앞으로도 항해해야 할 마른 모래바다는 끝이 안 보인다. 하지만 “갈증이며 샘물인, 샘물이며 갈증인” 문학의 힘으로, 젊은 비평정신으로 힘차게 나아가겠다. 나는 더 큰 환희에 가닿고 싶다.

 

처음에는 어린아이가 상을 받을 때 느끼는 그 천진한 기쁨을 느꼈습니다(참 잘했어요!). 그러다 감사해야 할 분들이, 그리고 함께 기뻐하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큰 상보다도 그동안 소중한 사람들이 내게 온기를 더해주고 있었다는 사실이 더 큰 축복이었습니다. 잠시라도 내 곁에서 나와 호흡했던 그 사람들이 있어서 겨우 쓸 수 있었습니다.

먼저 미흡한 글을 뽑아주시고 격려해주신 최원식 선생님과 대산문화재단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미소로 가르치고 즐겁게 문학혼을 심어주시는 우찬제 선생님, 그리고 부족한 제자를 자상하게 품어주시는 서강의 여러 선생님들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성실한 인문학도로 당신들의 지성과 열정을 부지런히 흡혈하겠습니다. 문학비평학회‘노동과 예술의 시대’친구들,‘시오름’의 정겨운 다섯 글벗들과도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 한해 동안 귀중한 지적 확장의 기회를 준 서강대 동아연구소에도 감사드립니다. 고교 시절 황인성 선생님의 따스했던 손길도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삶의 뿌리인 내 식구들…… 특히 어머니에게 내가 느끼는 기쁨을 몇배 더 큰 기쁨으로 만들어서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노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