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특집 2 | 김수영 시인 40주기에 부쳐

 

제 모습 되살려야 할 김수영의 문학세계

김수영 미발표 유고 해제

 

김명인 金明仁

문학평론가, 인하대 교수. 계간 『황해문화』 편집주간. 저서로 『희망의 문학』 『불을 찾아서』 『자명한 것들과의 결별』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 공편서로 『살아있는 김수영』 등이 있다. critikim@inha.ac.kr

 

 

1

 

김수영(金洙暎) 시인의 생애와 시세계의 수많은 갈피에 자취를 드리우고 있었지만 40년 전 시인이 타계한 뒤로는 그저 하나의 풍문으로만 남아 있던 부인 김현경(金顯敬) 여사를 우연치 않은 기회에 만나뵐 수 있었다. 그리고 그분의 댁에서 그간 소장하고 있던 시인의 적지 않은 유고를 접하는 천금의 기회를 얻었다.

김수영 시인의 40주기 기일인 6월 16일이 임박해오는 이때, 그 유고들 중에서 아직 한번도 발표되지 않았고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시인의 생생한 흔적들을 시인 생전의 마지막 발표지면인 『창작과비평』을 통해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된 것은 감회가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자리를 빌려 김현경 여사와 창비에 깊은 감사를 표한다.

김현경 여사 댁에서 흥분과 설렘 속에 찾아낸 유고더미는 시인의 첫시집 『달나라의 장난』(春潮社 1959)의 편집원고 일습1과, 역시 원고지에 청서된 여러편의 시와 산문 원고들, 각종 봉투와 광고지, 엽서, 심지어는 시멘트 포대 종이 등에 씌어진 시나 산문의 초고, 그리고 1954년 1월경에서 1961년 5월 14일 사이에 작성된 메모장 및 국반판 정도 크기의 공책 10여권 들이었다.2 특히 이 메모장과 공책들은 일기, 단순한 메모, 시 초고, 수필, 소설을 위한 메모와 습작, 번역원고 및 번역을 위해 필사해둔 영문작품 등이 전부 포함되어 있어서 김수영의 시와 사유가 날것 그대로 소용돌이치는, 가히 김수영 문학의‘진본(珍本)’이라고 해도 좋을 귀중한 문학사적 자료들이다.

이후 좀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민음사에서 1981년에 초판이 간행되고 2003년에 개정판이 나온 기존의 『김수영 전집』 1·2(시, 산문) 중 시전집의 경우는 아마도 『달나라의 장난』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등 출간본 시집들과 1953년 이후의 신문, 잡지 발표작들을 근간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유고더미에는 그 초고본들과 고의 혹은 실수로 누락된 작품들 그리고 미완성작(혹은 미완성작으로 간주된 작품들)이 남아 있다. 산문전집은 대체로 신문, 잡지 발표작들을 집성한 것으로 보이는데,‘일기초(日記抄)’를 제외하면 이 유고더미 속 산문과 메모 들의 상당부분은 누락되어 있다. 따라서 이 유고더미는 김수영 문학의 온전한 복원을 위해 늦기 전에 필히 온전한 전집 속에 제대로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이다. 또한 분명히 1961~68년 사이의 시기에도 김수영의 일기나 메모, 미발표 시작품 등이 있었을 터인데, 전집에는 각종 매체에 발표된 텍스트들만 수록되어 있어서 이들 역시 당연히 전집에 편입되어야 할 것이다.3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미발표 유고들만으로도 김수영 연구는 다시 가속도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여건만 허락된다면 이번에 발견된 유고더미 중에서 전집에 수록되지 않은 원고를 모두 소개했으면 좋겠지만 일정과 지면 사정상 면밀히 검토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어서 후속작업을 기약하며 일단 그 일부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2

 

일부를 소개하더라도 먼저 이번에 발견, 확인한 미발표 유고의 전모를 가능한 한 밝히는 게 순서일 것이다. (여기서 ‘수록’ ‘미수록’은 『김수영 전집』 수록 여부를 나타내며, 굵은 활자로 강조된 것은 이번호 『창작과비평』에 수록된 것이다.)

 

1) 1954년 1~5월: 7.5×12.5cm크기의 수첩(전체 미수록)

- 전집에 수록된 미완성 소설 「의용군」 관련 창작 메모

- 1954년 1월 6~7일 사이 단양지방 답사여행과 관련된 메모

- 단편소설 「구선생의 사랑」 집필을 위한 메모

시 「네거리에서」(가제) 초고

- 1954년 5월 25일자 메모:‘진정한 희극소설’에 관한 단상

 

2) 1954년 6월: 국반판 크기의 노트 <人物 事件 性格/綴字法/甲午年 六月>

시 「哀와 樂」(미수록) 초고

-‘ 되우’‘귀중중하다’‘심이 빨랐다’‘데퉁스리’‘고붓고붓’등 한국어 어휘 공부의 흔적이 있는 짧은 줄글들

-‘만화문화’에 대한 단상들

 

3) 1954년 11월 22~28일: 국반판 크기의 노트 <Fiction (I)>

-‘ 아편중독자(여자)와 평범한 회사원의 기구한 사랑’이라는 주제의 소설 창작을 위한 메모

- 11월 22일 일기(미수록): 유주현을 만나고

- 11월 24일 일기(수록)

- 11월 25일 일기(일부 미수록): 전집에는‘프린스’다방에서의 사색 메모 누락됨

- 11월 27일 일기(일부 미수록): 전집에는 모친과의 갈등을 그린 상당부분 누락됨

- 시 「꽃」(가제) 초고

- 11월 28일 일기(미수록): 중국인 소학교 운동장의 황혼 풍경 묘사

-‘ 단편소설(70매 내외 12월 20일)’ ‘20년 전 강원도의 풍토미’ ‘15매 11/20일’ 등 메모

 

4) 1954년 11월 30일~12월 27일: 국반판 크기의 노트 <소설 II (Fiction)>

- 11월 28일 일기 계속(미수록): 시골학교 교원노릇 동경

- 11월 30일 일기(미수록): 적극적 정신의 필요성, 자부심, 희망, 생활, 소설 등에 대한 생각. 목에 걸린 가시 때문에 병원에 간 에피소드

- 11월 30일 일기(수록): 염상섭, 춘원 등의 소설 이야기, 여의사와의 혼담 등

- 12월 3일(미수록):‘Essay’s plot’이란 제목

- 12월 23일 일기(미수록): 평론가 이철범에 대한 인상

- 시 「卓球」(미수록) 초고

- 시 「大音樂」(미수록) 초고

- 시 「나의 피」(가제, 미수록) 초고

- 12월 27일: 시 「레이판彈」(수록) 초고

 

5) 1954년 12월 28일~1955년 1월 11일: 국반판 크기의 노트 <나비의 무덤>

- 12월 28일 메모(미수록): 신조-‘소설에의 길’일과: 글쓰기, 책읽기, 밥벌이 4시간씩

- 12월 28일 엣징그(미수록): 다방‘카나리아’의 풍경

- 12월 29일 일기(미수록): 짧은 단상

- 12월 30일 일기(수록): 생계를 위한 번역일의 애환

- 1월 2일 「乘夜圖」(미수록) 초고: 청춘과 죽음과 영원, 시로 간주하기 어려울 듯

- 1월 3일 시 「나비의 무덤」(수록) 초고

- 1월 5일 일기(미수록): 소설에 대한 집착-“좋은 단편이여 나오너라”

- 1월 7일 일기(미수록): <冒險(아반출)>-매매춘에 대한 변명,  “내가 쓰는 글은 모두가 거짓말이다”

- 1월 10일 일기(미수록): <동백꽃>-노선생과의 연애에 대한 생각, 여자에 대한 생각

- 1월 11일 일기(수록): 영화 <인생유전> 감상 후기

 

Untitled-1

김수영 시인의 미발표 유고.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노트, 육필 시, 육필 일기, 김현경 여사가 청서한 시「연꽃」「‘金日成萬世’」

 

6) 1955년 2월 2일~2월 8일: 국반판 크기의 노트, 제목 있었으나 지워버림

- 2월 2일 일기(수록): 독서는 받아들이는 것, 생활은 뚫고 나가는 것

- 2월 3일 일기(수록): 서울에 대한 인상, 소설쓰기-서울을 이해하려는 노력

- 2월 4일 일기(미수록): 이영순(李永純) 등과의 술자리

- 2월 8일 일기(미수록):‘자살한 황정란과 작가 최태응’원고청탁 거절, 유리병 같은 자신, 소설 『北호텔』에 대한 인상, 기적 같은 생의 도약에 대한 기대

 

7) 1955년 12월 21일~12월 31일: 국반판 크기의 노트(표지 없음)

- 12월 21일 수필 「劣等感」(미수록): 가족, 외투 등 소유에 대한 자격지심 표백

- 12월 23일 일기(미수록): 유럽행 벗에 대한 적대감

- 12월 23일 시 「銀盃를 닦듯이」(미수록) 초고

- 12월 24일(?) 수필 「眩氣症」(수록): 전집에는 1956년 6월로 표기됨

- 12월 31일 일기(미수록): 제야의 종소리 듣고자 한 계획 무산

 

8) 1956년 2월 4일~3월 10일(?): 국반판 크기의 노트 <丙申年(II) 壹月-三月>

- 2월 4일 소설 창작을 위한 메모(미수록): 최태응과 황정란 이야기 구상 전체

- 2월 9일 시 「더러운 香爐」 초고 및 시작 메모(미수록)

- 2월 10~14일 사이 시 「소라」(가제, 미수록) 초고

- 2월 15일 일기(미수록): 여자에 대한 관찰 “결론이 없는 여자들과 지평선”

- 2월 16일 일기(일부 미수록) <矺薐草>: 애인‘혜숙’에 대한 이야기, 뒷부분 일부만 수록

- 2월 17일 일기(수록): 세태 비판 (전집에선 1955년 2월 17일로 표기)

- 3월 10일 시 「거리」(수록) 초고

- 3월 1?일 시 「바뀌어진 지평선」(수록) 초고

 

9) 1956년 8월 3일~1958년 6월 3일: 국반판 크기의 노트 <To buy note book>

- 시 「파리」(가제, 미수록) 초고

- 8월 3일 시 「시골의 여름」(‘여름 아침’으로 수록)

- 시 「바람」(미수록) 초고

- 시 「詩」(가제, 미수록) 초고

- 시 「서시」(수록) 초고

- 메모(미수록): “여유를 없애라. 허용도, 자신을 지켜라, 약한 자들이여. novelty.”

- 시 「소년아」(가제, 미수록) 초고

- 시 「광야」(수록) 초고

- 시 「결별」(가제, 미수록) 초고

- 1958년 6월 3일 시 「반주곡」(수록) 초고

 

10) 1960년 6월 16일~1961년 5월 14일: 국반판 크기의 노트 <1960>

(이 노트의 일기들은 대부분 전집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미수록분만 제시한다.)

- 1960년 7월 27일 일기(미수록): 일역판 똘스또이 『인생론』 23장 인용(일본어)

- 7월 29일 일기(일부 미수록): 아이들에게 동화를(시작품 투고 관련 생각 누락)

- 8월 6일 일기(미수록): 일역판 똘스또이 『인생론』 3페이지가량 인용(일본어)

- 8월 8일 일기(미수록): 일역판 똘스또이 『인생론』 2페이지 반 정도 인용(일본어)

- 8월 9일 일기(미수록): 똘스또이 반페이지 인용(일본어)

- 8월 9일 일기(미수록): 똘스또이 두페이지 인용(일본어)

- 9월 1일 메모(미수록): “Mayakovsky”라고 딱 한줄 씌어 있음

- 9월 8일 일기(미수록): 고드웰 『몰락의 문화』 서문 일부 인용(일본어)

- 9월 9일 일기(미수록): 고드웰 『몰락의 문화』 중 「아라비아의 로렌스」 9페이지가량 인용(일본어)

- 9월 11일 메모(미수록): 일본어 경구

- 9월 20일 일기(일부 미수록): 언론·사상의 자유 문제에 대한 비판 부분

- 9월 23일 일기(미수록): “폭력의 말살을-”

- 10월 6일 일기(일부 미수록): 시 「잠꼬대」 발표란에 대하여(芝薰에게, 美는 善보다 强하다 부분 미수록)

- 10월 8일 일기(미수록): 싸르트르 『순교와 저항』 2페이지가량 인용(일본어)

- 10월 11일 일기(미수록): 싸르트르 『순교와 저항』 1페이지가량 인용(일본어)

- 11월 15일 일기(미수록): 일본어와 영어로 씌어짐

- 12월 4일 일기(일부 수록): 영어로 된 부분 “Nature’s Questioning” 누락

- 1961년 3월 24일 일기(미수록): 레이몽 아롱과 사회주의, 미수록 시 「數字」 언급

- 3월 25일 일기(미수록): 레이몽 아롱 『지식인의 아편』 일부 인용

- 3월 26일 일기(미수록): E. 버크 인용

- 4월 14일 일기(일부 수록): 앞부분 일본어 메모 누락

- 5월 13일 일기(미수록): 러쎌의 「원자시대에 살며」 1페이지가량 인용(일본어)

 

11) 김현경 여사가 청서한 미수록 미발표 시 2편

- 「‘金日成萬歲’」(1960년 10월 6일): 「잠꼬대」로 개제하여 발표 시도했으나 실패

- 「연꽃」(1961년 3월): 발표 여부 불분명

 

12) 번역을 위한 영시 필사본

- 아마도 번역을 위해 타자를 치거나 청서해둔 것으로 보이는 셸리, 예이츠, 레이먼드 윌슨, 톰 건, 오든, 윌리엄 엠슨, 맥네어, 존 프레스, 노먼 베스위크, 프랜씨스 킹, 찰스 코슬리, 킹슬리 에이미스, 조지 바커 등 영국 시인들의 영문 시편 필사본과 T. S. 엘리엇의 희곡 『칵테일 파티』 필사본, 번역을 위해 만들어놓은 단어장, 그리고 자신의 창작인지 역시 번역을 위한 필사본인지 아직 확인하지 못한 일본어 시편 등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 자료는 여기서는 다룰 수 없지만 향후 김수영과 영국 현대시의 관련 및 영향관계를 연구하는 데 결정적인 디딤돌이 되리라 믿는다.

 

이상의 개관을 바탕으로 종합해보면 이번에 발견된 유고들 중에서 전집 미수록 시는 15편이며, 미수록 산문은 일본어로 되어 있는 똘스또이, 싸르트르 등의 저작 인용부분을 제외한다 해도 아주 짧은 메모들까지 전부 포함한다면 30편가량이나 된다. 이 정도라면 김수영 연구사에서 실로 획기적인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작품들을 깊이 검토하는 것은 다른 자리를 기약하고, 여기서는 향후 본격적인 연구를 위한 기초적인 안내자료를 만드는 것에 만족하고자 한다.

 

 

3

 

이번에 발굴된 15편의 전집 미수록 시들은 청서가 되어 있는 「결별」(가제) 「‘金日成萬歲’」 「연꽃」 등 3편을 제외하면 전부 초고로서, 김수영 시인으로서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반가공품이거나 완성되었다 하더라도 불만족스러워서 발표하지 않은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김수영의 시에 통상적 의미의‘완성도’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늘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개별 시의 완성도를 문제삼기 전에 그의 시 전체를 하나의‘이행’과정으로 읽을 때만이 김수영은 자신의 본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준다. 새로 발견된 이 15편의 시들은 기존 시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시적 편력과 정신적 궤적을 이해하는 데서 한편 한편 긴절하지 않은 작품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필자의 입장에서는 가열찬 정신의 힘과 비극적 속도감으로 시대의 중압과 개인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그의 치열한 시세계가 빛을 발하는 50년대의 시편들이 이처럼 대량으로 발굴된 데 대해, 또 4·19에서 5·16에 이르는‘혁명적 앙양’의 시기에 씌어진 최고 수준의‘정치시’2편이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게 되는 데 대해 전율에 가까운 흥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 시작품들을 창작 순서대로 정리하여 한편씩 살펴보자.

 

「네거리에서」(가제)4 (1954년 2월~5월)

「哀와 樂」 (1954년 6월)

「꽃」(가제) (1954년 11월 27일)

「卓球」 (1954년 12월)

「大音樂」 (1954년 12월)

「나의 피」(가제) (1954년 12월)

「銀盃를 닦듯이」 (1955년 12월)

「소라」(가제) (1956년 2월)

「파리」(가제) (1956년 8월)

「바람」 (1956~57년?)

「詩」(가제) (1957년)

「소년아」(가제) (1957~58년)

「결별」(가제) (1957~58년)

「‘金日成萬歲’」 (1960년 10월)

「연꽃」 (1961년 3월)

 

김수영 시세계의 변천과정은 크게 보아 1945~49년간의 제1기, 1953~59년간의 제2기, 1960~61년간의 제3기, 1961~68년간의 제4기 등 네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5 제1기가 등단 및 수업시대라면, 제2기는 현대성(근대성)의 관념적 추구기로 볼 수 있고, 제3기는 혁명적 앙양기로 볼 수 있으며, 제4기는 혁명의 좌절로 인한 현실로부터의 퇴각과 일상성의 획득을 바탕으로 풍자와 해탈의 모색 등 다양한 시적 실험이 지속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번에 새로 발견된 15편의 시는 「‘金日成萬歲’」 「연꽃」 등 2편을 제외하고는 전부 제2기에 속하는 것들이다.

거제도 포로수용소를 거쳐 부산의 야전병원에서 통역원으로 있던 김수영이 포로의 신분에서 벗어난 것은 1952년 12월경이었다. 그후 1년 동안 서울과 부산을 방황하다가 1953년말경에야 헤어졌던 아내와 만나 다시 일상의 세계로 돌아오게 된다. 1953년부터 생활세계에 자리를 잡게 되는 1955년 중반까지의 그는 혹독하고 고통스러웠던 전쟁기의 체험을 통해 한층 깊은 자기성찰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성찰의 결과는 감상적이고 우울한 상실감과 설움을 기조로 하면서도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각성과 부조리한 현실을 의지적으로 초월하고자 하는 가속화된 의지로, 그리고 마침내 이 모든 고통을 의지적으로 극복해낸 것에 대한 무한한 긍지로 나타났다. 「너를 잃고」나 「PLASTER」의 상실과 자기모멸, 「달나라의 장난」과 「구슬픈 육체」의 설움, 「더러운 香爐」의 속도와 「九羅重花」의 죽음을 담보한 전진, 그리고 「나비의 무덤」과 「긍지의 날」 등이 보여주는 시인적 긍지와 자존의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네거리에서」(가제) 「哀와 樂」 「꽃」(가제) 「卓球」 「大音樂」 「나의 피」(가제) 등 1954년 2월경~12월 사이에 씌어진 시들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기조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네거리에서」는 아주 거친 초고 형태지만 여전히 포로수용소의‘산 지옥’의 기억에서 놓여나지 못하면서도 다시 시끄러운 네거리에 남아 신념을 지키겠노라는 결의를 보이는 작품으로서, 1953년에 쓴 난삽한 반공시 「조국에 돌아오신 傷病捕虜 동지들에게」의 표층 아래에 있던 김수영의 솔직한 의식을 드러낸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哀와 樂」은 풀어 쓰면‘슬픔과 기쁨’이 되는 셈인데, “너와 내가 죽어야만 흘러갈 것 같은” 가혹한 역사가 물처럼 흐르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던6 그가 그 흐름 속에 설움도 실어보내고 사랑과 내일을 기약하는‘비극적 낙관’이 잘 드러난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꽃」은 1954년 11월 27일, 그의 만 33세 생일날 쓴 우울한 일기의 끝부분에 실려 있는 작품이다. 밥벌이를 위한 신문사 취직과 어머니의 턱없는 기대 때문에 한껏 우울해진 시인은 그 우울함을 잊기 위해 집을 나와 이모댁을 찾지만 (이 부분부터는 『전집』에서는 생략한다는 표시도 없이 누락되어 있다) 거기서도 역시 결혼을 하라, 출세를 하라는 등의 이모의 잔소리를 듣고 더 큰 우울 속으로 빠져든다. 이 시는 그 아침의 우울한 기억을 반추한 끝에 쓴 시로서 “나의 그림자”와 대결하면서 “맑게만 살려는” 자신을‘꽃’에 견주는 자존심과 그 자존심을 부단히 훼손하는 “허탈하고 황막한 생활” 사이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卓球」는 빠른 속도로 테이블 위를 왕복 운동하는 가벼운 탁구공에서 전력을 다한 투신의 비극적 속도와 그를 통한 구원의 의미를 성찰하는 작품으로, 여기서 탁구공은 이 시기의 다른 작품들에 나타나는‘팽이’(「달나라의 장난」),‘풍뎅이’(「풍뎅이」),‘글라디올러스’(「九羅重花」) 등과 이후에 나오는‘레이판彈’(「레이판彈」),‘폭포’(「瀑布」),‘포탄’(「조고마한 세상의 지혜」) 등과 공히‘전력을 다한 정신적 투신’을 매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환유적 관계에 놓인다.

「大音樂」은 김수영 특유의 발랄하고 전격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세계의 도시와 방방곡곡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전부 합하여” “사람의/넋이라는 넋 흥이라는 흥을 다 소지같이 태워버린 후에도”“어엿이 빛을 발하고 있는/눈에 익은 돌부리”는 말하자면 우주의 심상이 모두 집중된 존재, 그러면서도 의연하게 빛을 발하는 존재인 시인을 말하는 것이며, 그만큼 시인은 긍지로 가득 찬 존재가 되는 것이다. 1954년 12월경에 쓴 이 시의‘돌부리’는 1955년 2월에 쓴 시 「矜持의 날」에서처럼 “파도처럼 요동하여/소리가 없고/비처럼 퍼부어/젖지 않는”(이하 미발표작 이외의 인용은 『전집』에 따른다) 그런 경지를 획득한 시인의 득의의 자기확인으로 보인다.

「나의 피」 역시 “억만 볼트의‘롯켓트’”를 타고 치열한 의지의 속도로 지상에서 날아올라‘나의 피’를, 즉 주체성과 자존심을 다시 발견한 자로서의 긍지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라고 할 수 있다.

1955년 6월, 김수영은 마포구 구수동 41번지의 오백여평이나 되는 넓은 마당을 가진 무허가 주택으로 이사한다. 잠시 다니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양계업을 시작한 것도 그 무렵으로, 그의 시에는 안정감과 자신감 그리고 생활에 대한 긍정적 감각도 회복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자기의 주관세계에서 벗어나 동시대의 현실과 그 후진적 현실을 포괄하고 있는‘현대성(근대성)’의 본질에 대한 성찰에도 한걸음 더 다가간다. 「헬리콥터」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에서 획득된 정직성, 「나의 가족」 「구름의 파수병」에 보이는 약간은 위태할 정도의 일상성의 확대, 「여름 아침」 「초봄의 뜰안에」에 보이는 생활과 일상에 대한 건강한 긍정 그리고 마침내 「瀑布」 「봄밤」 「조고마한 세상의 智慧」 등의 속도감각의 회복을 통해 도달한 「玲瓏한 目標」와 「曠野」 「叡智」 「비」 「死靈」 등에 보이는 근대성이라는 시대감각 및 당대현실과의 조우 등이 바로 1955~59년간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김수영 시세계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7

이번에 발견된 「銀盃를 닦듯이」 「소라」(가제) 「파리」(가제) 「바람」 「詩」(가제) 「소년아」(가제) 「결별」(가제) 등 7편의 시가 바로 이와같은 시기에 쓴 것들이다.

「銀盃를 닦듯이」는 혹독한 자기성찰의 세계에서 타자들과 함께 살아가야 할 생활세계로 돌아온 시인이 자신을 대자화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은배를 닦”는 것과 같은 결벽증적 자기단련에의 몰입을 그만두고 “너도 그러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인 “마지막 힘을 다하여 억지로 살아가는 사람들” 속으로 “실망한 시인들”“처참한 인간들” 속으로 들어가자는 결의가 보이는 시이다.

「소라」는 도시의 한복판으로 들어선 시인을 소라껍질의 나선을 따라 그 밑바닥까지 기어들어간 개미에 비유하고 있는 시이다. 이 시에 의하면 시인은 이 소라껍질 속 같은 “自由를 잊어버린 도회”의 한복판에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송곳 같은” 자리를 아는 자인 것이다.

「파리」 역시 시인의 운명을 “더러운 곳만 골라서 앉”고 “넓은 천지(天地)를 가는 곳마다 쫓겨다니는” 파리의 운명과 동일시함으로써 시가 놓여야 할 자리, 시인이 있어야 할 자리가 이 세계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바람」에서는 “겨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마당”에 불어와 “마음의 창”과 “완고한 마음”을 흔들어놓고 가는 바람을 보며 “흔들려라/나의 시대여/술쯤 마셔가지고야/‘메카니즘’과는 도저히/맞서지 못한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1956년과 57년 사이에 쓴 이 시에서 이처럼 완고하게 정체되어 있는 마음을 흔드는 바람은 그 이듬해에 쓴 「비」에서 보이는 “바람에 나부껴서 밤을 모르고/언제나 새벽만을 향하고 있는/透明한 움직임”의 역동을 예비하는 것이고, 이는 곧 1950년대의 김수영의 내면을 오랫동안 갉아먹고 있던 자폐의 파토스를 넘어서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詩」는 “바람이 부는 데서 잠을 자거라/豪華로운 꿈이라도 꾸기 위해서는”이라든가 “시는 병이 나기 전에는/쓰지 말아라”라는 구절들에서 자신의 시를 삶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놓고자 하는 의지가 완연해졌음을 알려주며, “시는 나쁜 시만이 가슴에/남는다”는 역설적 경구는‘온몸으로 온몸을 밀고 가기 때문에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시여, 침을 뱉어라」가 제시한 시론과 그리 멀지 않은 것으로 보여 흥미롭다.

「소년아」는 완성작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 속에 담긴 시적 인식은 만만치 않게 깊다. 설움에 휘감겨 있는 메뚜기에게 “宇宙에 차 있”는 설움인 이슬을 마시게 한다는 것, 그리고 뱃속에 태아를 가진‘안해’를 이슬을 마시고도 배불러하지 않는 메뚜기에 비유하는 것 등에서 50년대의 김수영으로서는 낯설다 싶을 정도로 (하이데거적 맥락에서 말하자면) 현존재와 존재의 조화와 교감을 도모하는 시세계의 비약적 확장의 징후를 읽을 수 있다.

「결별」은 늦어도 1958년초를 넘지 않는 시기에 쓴 작품이지만 그 엄숙한 선언적 울림이 마치 “자유에 대한 언급이 아닌 자유의 이행의 부재를 문제삼”음으로써 “4·19를 맞을 내면의 준비를 끝마치고 있는 셈”8인 1959년작 「死靈」과 같은 맥락과 무게를 갖는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항상 外國에 온 사람 모양으로 내 나라에 살고/外國語를 하듯이 내 나라 말을 하고/女子들을 모두 外國사람이라고 생각하고/두려움 사이에서도 自由를 잊지 말고/슬픔 속에서도 觀世를 잊지 말고”“靜諡의 勇氣”를 가지고 “앵무새의 發言 같은 虛僞를 태워버”리는 일은 곧 세상과 자기를 방법적으로 분리하고 결별을 고함으로써 세상과 대결하는 입지를 마련하는 일이며 또한 “죽음을 가슴에 삭이고라도/아름다움을 보아야” 하는 일이다. 이 시는 1950년대말의 김수영의 시의식 속에 이미 어느정도 4·19가 준비되고 있었음을 다시 한번 잘 보여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1960년 4·19에서 1961년 5·16 전까지의 김수영의 시들이 과연 그 앙양된 의식에 걸맞은 시적 성취를 이루었는가 하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 않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라든가 「祈禱」 「六法全書와 革命」, 동시 「나는 아리조나 카보이야」 같은 직접적인 산문적 발언이 노출되는 시들뿐만 아니라, 「中庸에 대하여」 「허튼소리」 「永田絃次郞」처럼 냉전적 반공이데올로기의 임계선을 건드리는 시들의 경우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 산문적 현실인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뛰어난 시적 성취로 평가하는 데는 유보적이지 않을 수 없다. 대신 「푸른 하늘을」 「그 방을 생각하며」 「사랑」 등은 혁명적 앙양과 그 좌절이 시인에게 각인시켜준 것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함으로써 산문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시적 경지를 획득한 시편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새롭게 발견된 2편의 시는 이 시기의 시들이면서도 현실인식과 그 시적 변용 양면에서 기존에 알려진 시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金日成萬歲’」는 제목 자체부터 산문과 시의 경계를 넘나드는 시라고 할 수 있다.9 아마도‘김일성만세’라는 다섯 음절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 최장, 최대의 금기어일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타계한 지 벌써 13년이 되어서 이제는 그 빛(?)이 많이 바랬고 오늘날은 그 누구고 이 말을‘못’하는 게 아니라‘안’하게끔 되었지만, 그전까지 이 말은‘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말보다 더 끔찍한 금기어였다. 이 말은 하나의 관용어지만 동시에 그 강한 금기성으로 말미암아 상당한 시적 울림을 갖는 말이다.

이 시 자체는 김수영이 말한 바처럼 “단순히‘언론자유’에 대한 고발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수사학도 「허튼소리」나 「永田絃次郞」이 그랬던 것처럼 지극히 억제되어 있다. 하지만 김수영에게 언론자유란 무엇이었던가? 극단적으로 말해서 김수영에게 언론자유가 없는 곳에서는 문학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그에게 시를 쓰는 일은 곧 언론자유를 실천하는 일, 곧 “언제나 밖에다 대고‘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하는 일이며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를 경험하는 일이었다.10 이렇게 김수영에게 언론자유가 단순한 것이 아닌 것처럼, 제목을 포함해서‘김일성만세’라는 말이 세번 반복되는 이 시 역시 단순한 고발장일 수 없다.

1961년 3월에 쓴 「연꽃」 역시 「‘金日成萬歲’」에 필적하는 문제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1961년 3월이면 이미 4·19혁명 이후 들어선 민주당정권이 여러 부문에서 혁명의 의의를 훼손·배반하고 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던 시기인즉, 이 시에서 김수영은‘사회주의 동지들’에게 (반동적 정세 앞에서) 긴장하지 말고 연꽃, 두통, 흙, 사랑, 형제, 아주머니, 아들, 사랑, 작란, 냄새, 해골 등 인간과 세계를 지속시키는 수많은 질료와 관계들이 (여전히 의연하게) 존재하는 한 (혁명은 계속될 것이므로) 안심하라는 메씨지를 전하고 있다. 아니 굳이‘동지들’에게 전하는 메씨지라기보다는 시인 스스로 반동의 시대를 견디기 위한 자기위안이자 혁명을 이어가자는 약속이라고 할 것이다.

이 시에서도‘김일성만세’까지는 아니지만‘사회주의 동지들’이라는 시어가 먼저 눈에 띈다. 이 역시 한동안 만만찮은 금기어가 아니었던가. 객관적으로 사회주의와의 관련성을 본다면 김수영은 기껏해야 씸퍼사이저(동조자)라고밖에 볼 수 없으며 굳이 말하자면 차라리 급진적 자유주의자라고 해야겠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객관적으로 사회주의자라고 볼 수 없어도 주관적으로 사회주의자를 자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점 역시 앞으로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11

 

 

4

 

기존 전집에는 「의용군」이라는 미완성·미발표의 소설이 수록되어 있어서 김수영이 소설도 썼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 소설은 대체로 혹독한 전쟁체험을 정리해보고자 하는 개인적 기억의지의 산물 정도로 이해되어왔다. 왜냐하면 「의용군」 이외에 그가 소설을 썼다거나 쓰고자 했다는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일기에 산견되는 다음과 같은 부분들이 하나의 숙제이기는 했다.

 

나의 안에서 자라고 있는 소설에의 사상(?)이 눈에 보이는 것같이 성장한 것 같은, 그리고 그것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나 할까-이상한 내 자신의 성장감을 의식하는 데서 오는 희열.-최고의 희열이다!12

 

내가 소설을 써보려는 것도 이 알 수 없는 서울을 알려고 하는 괴로운 몸부림일 것이다. 알 듯 알 듯하면서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서울은 무엇인가? 이 결론이 없는 인생 같은 서울, 괴상하고 불쌍한 서울, 이 길고긴‘서울’에까지의 숨가쁜 노정에서 잠시 땀이라도 씻고 가기 위한 짧고 안타까운 휴식 같은 것이 나의 소설일 것이다.13

 

경험이란 한번만 하여서는 아니된다. 적어도 열번 스무번씩 되풀이하여야만 비로소 그 경험이 내것이 되고 소설의 소재 위에 오를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느낀다. 인내가 용서하는 한 침묵을 지키고 3년이고 4년이고 5년이고 오래 준비의 기간을 가져야 하겠는데……14

 

「의용군」을 “서울을 알려고 하는 괴로운 몸부림”의 소산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므로, 그가 「의용군」 이외에도 소설을 쓰고자 했고 또 최소한 습작품 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유고더미는 김수영의 소설쓰기에 대한 풍부한 자료를 제공해줌으로써 이 숙제는 거지반 해결된 것이다.

우선 이번에 발견된 유고노트들 중 1954년에 작성된 노트들은 제목부터가 <人物 事件 性格> <Fiction (I)> <소설 (II) Fiction> 등 소설을 쓰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그 내용에서도 여러번에 걸쳐 좋은 소설을 써보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음이 발견된다. 1954년 11월 30일의 일기에는 “너의 모-든 말이 없어질 때, 너의 소설(小說)이 시작한다”는 구절이 보이며, 12월 28일의 일기(미수록된 부분)에는 그의‘신조(信條)’가 나오는데 그것은“平均된 마음을 가지라. 이러한 가운데서 하나도 빼지 않고 잘 보아라. 이것이 小說에의 길이다”라고 되어 있다. 1955년 1월 5일의 일기에는 “앉으나 서나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친다. 좋은 단편이여, 나오너라”라는 구절이 보이고, 심지어 1956년 2월 9일 시 「더러운 香爐」에 대한 창작메모 형식으로 씌어진 일기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를 쓰러 나온 것이 아닌데 또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시를 썼다.

어제 덕수궁에서 본‘향로’를 생각하니 어느 고독한 사나이가 하루에 한번씩‘향로’를 만지러 가서 거기에서 위안을 받는…… 환상이 떠오르고 이것을 실마리로 한 小說을 구상하여보려 한 것이다.

 

시 「더러운 香爐」는 이를테면 김수영의 시충동이 서사충동을 가까스로 이겨낸 곳에서 나온 셈이다. 당시의 김수영에게는 그만큼 강한 서사충동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그가 그토록 쓰고자 열망한 소설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가.

이번에 발견한 자료 중에 1954년 1~5월경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손바닥만한 푸른색 표지의 수첩에는 「의용군」과 관련된 창작메모가 14면 정도 기록되어 있다.15 이어서 1954년 1월 6~8일 사이로 추정되는 단양 여행 관련 메모에는 단악(丹岳)광산이라는 광업현장의 이모저모와 어떤 살인사건에 대해 17면에 걸쳐 기록되어 있어서, 이 역시 소설 구상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구선생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소설과 관련된 구상도 보이며, 소설가 곽하신으로부터‘유-모아’소설을 쓰라는 권유를 받고 “眞正한 喜劇小說”을 써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1954년 5월 25일자의 메모도 보인다.

1954년 11월 22~28일 사이의 노트 <Fiction (I)>의 첫머리에는 “主題, 阿片中毒者(女子)와 平凡한 會社員의 崎嶇한 사랑; 眞實을 찾아서 살아보자고 몸부림치는 두 젊은이의 슬픈 이야기”라는 다소 신파조로 시작되는 다섯장가량의 메모가 나온다. 그리고 이 메모는 결국 1956년 2월 4일에 쓴 9면의‘씨놉시스’로 구체화되기에 이른다. 이는 작가 최태응(崔泰應)과 그 연인인 이화여대 출신의 재원 황정란(黃貞蘭)을 주인공으로 한 실명소설로서, 이들이 주위의 반대와 냉대를 무릅쓰고 절망적인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다가 마침내 가족에게 붙들려간 황정란이 음독자살을 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이다.16

김수영이 그토록 좋은 소설을 쓰고 싶다는 서사충동을 여러번 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결과는 미완성작 「의용군」과, 제목도 없고 정식 집필에는 착수하지도 못한 이 실명소설 두편에 불과하다는 점은 오히려 의외라고 할 수 있다.17 왜 그런 것일까. 게다가 최태응·황정란의 연애사건을 소재로 한 이 실명소설은 비극적 낭만주의가 드러나기는 하지만, 계속 집필하여 완성했다 하더라도 1950년대의 시편들에서 보이는 김수영의 웅숭깊은 비극적 사유와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강렬한 주체성의 세계와 비교하면 훨씬 격이 떨어지는 통속소설로 끝났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아마도 1950년대 전반기의 김수영은 자신의 전쟁체험, 아내 김현경과의 간단치 않은 헤어짐과 만남 등 개인사의‘파란만장’을 서사화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껴 소설습작에 매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그동안에도 계속 시를 쓰고 발표했으며 그 강한 서사충동은 시를 통한 승화의 과정을 거쳐 상당부분 해소되고 종내 자연스럽게 소멸되었을 것이다. 소설이 세계와 대결하는 문제적 개인의 매개화된 행동의 형식이고 시가 그 매개 없는 발언의 형식이라고 할 때, 당시 김수영의 실존은 서사화를 기다릴 정도의 여유를 갖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56년 8월 이후의 노트에는 소설에 관한 언급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게 된다.

 

 

5

 

지금까지 살펴본 미발표·미수록 시들과 소설 관련 메모와 습작 들 외에도 이번에 발견된 유고 중에는 김수영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시사를 주는 메모와 일기들이 다수 들어 있다. 그 전모를 여기서 밝힐 수는 없는 일이므로 몇가지 경우만 언급하고자 한다.

 

<1954년>

11월 22일: 『전집』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이 일기에는 소설가 유주현(柳周鉉)에 대한 김수영의 좋은 인상이 기록되어 있다.

11월 25일: 이 일기의 앞부분은 이미 『전집』에 실려 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후반의 상당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김수영의 문학과 자기단련에 대한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1월 27일: 이 일기 역시 『전집』에는 후반부가 누락되어 있다. 이 부분에 시로 간주해야 할 「꽃」(가제)이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부인 김현경과 재회하기 전 모친과 함께 살고 있던 무렵 김수영의 집안에서의 곤경과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11월 28일: 삼인칭‘그’를 내세워 황혼 무렵 중국인 소학교의 풍경을 마치 소설을 위한 연습처럼 묘사하고 있다.

11월 30일: 적극적 정신, 자부심, 희망 등 1954~55년의 김수영 시에 나타나는 밀도 높은 정신의 힘의 출처를 가늠할 수 있는 그의 결의와 감상이 잘 나타나 있는 중요한 일기이다.

12월 23일: 평론가 이철범(李哲範)을 처음 만나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한 뒤의 감상과 결의가 표현되어 있다.

12월 28일:‘엣징그’라고 이름 붙인 「다방‘카나리아’」라는 글이다.‘엣징그’는 아마도‘edging’(윤곽 그리기)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다방‘카나리아’를 드나드는 여러 인간상에 대한 소묘가 주를 이룬다. 이 글은 일기장에도 있지만 김현경 여사가 별도로 원고지에 청서한 것도 있다. 이 청서본의 서두에는‘엣징그’대신‘수필’이라고 썼다가 다시‘꽁뜨’라고 고친 부분이 있다. 김수영의 소설습작의 하나로 보인다.

 

<1955년>

1월 2일: 「乘夜圖」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시라고 보기도 산문이라고 보기도 쉽지 않은 이날의 일기는‘청춘’과‘죽음’이 결합하여‘영원’을 배척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해석이 쉽지 않다.

1월 5일: 이 일기도 중요하다. “좋은 단편이여, 나오너라”라는 소설에 대한 결의도 있지만, 『하-파스』(『하퍼스 매거진Harper’s Magazine』)과 「애트랜·틕」(『애틀랜틱 먼슬리Atlantic Monthly』)을 샀다는 부분이 나와 김수영이 『파르티잔 리뷰』 외에도 이러한 미국의 진보적 시사문예지들을 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월 7일: “내가 쓰는 글은 모두가 거짓말이다”라는 문제적 발언이 나온다.

2월 8일: 이 무렵의 시 「너는 언제부터 세상과 배를 대고 서기 시작했느냐」와 「國立圖書館」에 대한 시사를 얻을 수 있다.

12월 21일:‘수필’이라고 명기한 「劣等感」이라는 제목의 글이다. 가족이 있고, 중고지만 미제 낙타외투를 입고 다니게 된 것과 관련하여 다른 가난한 작가들에게 느끼는 미안함과 자격지심을 말하고 있다.

 

<1956년>

2월 9일: 시 「더러운 香爐」에 대한 시작 노트로서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2월 15일: 여러 여성에 대한 관찰기로서 김수영의 여성관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2월 16일: 노선생 외에‘혜숙’이라는 또 하나의‘연인’이 등장하는 글인데, 『전집』에서는 이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1960~61년>

이 시기의 일기는 거의 대부분 『전집』에 수록되어 있다. 똘스또이, 코드웰, 싸르트르 등의 글이 일본어로 인용된 일기가 제외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글들도 언젠가는 『전집』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제외하면 미수록된 글은 단 두편 정도이다. 빈곤과 폭력, 특히 폭력이 말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들어 있는 1960년 9월 23일의 일기와, 레이몽 아롱의 저서 『지식인의 아편』이 사회주의에 반대하지만 그것이 사회주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아마도 그런 맥락에서 쓴 시인 듯한 「數字」를 언급한 1961년 3월 24일의 일기가 그것이다.

 

 

6

 

이상으로 이번에 발견된 김수영의 미발표 유고들에 대한 소개와 간략한 검토를 마무리한다. 김수영의 40주기를 앞두고 이처럼 새로운 텍스트들이 대거 쏟아져나온만큼 이제 김수영 연구는 기존의 공간(公刊)된 자료들에 의존하는 안이함에서 벗어나 본격적이고 총체적인 연구의 단계로 도약할 시점을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전집』에서 의도적이건 비의도적이건 누락된 자료들을 전부 살려내고 시, 산문, 일기, 잡문, 메모, 서신, 번역, 좌담 등까지 포괄하는 명실상부한‘김수영 전집’과 정밀한 확인작업을 거친 원본 시전집의 간행이 절실히 요구된다. 김수영 연구자들과 김수영에게 정신적 채무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의 분발이 기대된다.

끝으로 다시 한번 이처럼 귀중한 원자료를 선뜻 제공해주신 김현경 여사에게 감사드리고, 이번에 발견된 시 텍스트의 확정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준 박수연(朴秀淵) 형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__

  1. 이 원고들은 전부 김현경 여사가 원고지에 청서(淸書)한 것으로 조판부호 등도 그대로 남아 있다.
  2. 여기서‘10여권’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두차례 김여사 댁을 방문했지만 이 유고더미를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꼼꼼하게 분류하고 검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3. 현재 김수영의 원본 유고는 그의 매씨이자 민음사판 전집의 편집자이기도 한 김수명 여사 및 민음사와 부인 김현경 여사가 나누어 가지고 있다고 한다. 김현경 여사에 의하면, 김수영 시인이 타계한 이듬해 무렵 신구문화사에서 김수영 시전집을 출간하겠다고 하여 김현경 여사가 유고들을 정리하여 신구문화사에 보냈으나, 1년 정도 후에 당시 출판사 사정이 여의치 못했던 신구문화사가 출간을 못하겠다 하여 그 원고들을 돌려받아 소장하고 있던 중, 마침 현대문학사 편집장직을 사임하고 일을 쉬고 있던 김수명 여사에게 유고시집의 편집과 출판 일을 맡기면서 유고들을 전해주었고, 그 결과가 바로 사후 첫 시선집인 『거대한 뿌리』(민음사 1974)였다. 이후 같은 유고들을 토대로 하여 산문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1975), 『퓨리턴의 초상』(1976), 시선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1976) 등이 연속해서 나오고, 이윽고 1981년 두권의‘전집’이 간행되면서 김수영 씬드롬이 본격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후 김수명 여사는 김현경 여사에게 일부의 유고들을 반환했고, 그것이 이번에 필자가 김현경 여사 댁에서 발견한 유고더미인 것이다. 불행히도 필자는 김수명 여사가 어떤 기준으로 이 일부 유고들을 반환했는지, 또 김수명 여사 혹은 민음사가 소장하고 있는 원본 유고의 양이나 질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1961~68년간의 일기 등 미발표 유고가 분명히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로서는 이를 확인하는 일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4. 시 제목에 (가제)라고 표기한 것은 원본에는 제목이 없는 시에 필자가 임의로 제목을 붙인 것이다.
  5. 졸저 『김수영, 근대를 향한 모험』, 소명출판 2002 참조.
  6. 이처럼 살아 있음이 신기하다는 감각은 「달나라의 장난」에 있는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라는 구절에서도 나타난다.
  7. 졸저 113~45면 참조.
  8. 졸저 141면.
  9. 이번에 발견된 김현경 여사의 청서 원고에도 이 시의 제목 다섯 글자는 볼펜으로 완전히 지워져 있었다. 하지만 김현경 여사는 이 시의 지워진 다섯 글자가‘金日成萬歲’라는 사실을 곧바로 확인해주었다. 바로 이 시가 김수영이 1960년 10월 6일 탈고해서 여사에게 보였다가 여사가 “발표해도 되겠느냐?”고 반문했던 그 시이다. 이 시의 최초의 제목은 「‘金日成萬歲’」였지만 「잠꼬대」로 바꾸었으며 김수영은 시집으로 내놓을 때는 다시 원제로 하고 싶다고 했다. 10월 18일 일기를 보면 『자유문학』에서 이 시를 달라고 했으며 본문의‘金日成萬歲’를 한글‘김일성만세’로 고치자고 제안한 것으로 되어 있다. 김수영은 더이상 고치고 타협하기 싫지만 다시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하는데, 다시 다음날 10월 19일 생각을 바꾸어‘언문 교체 없이’내밀자고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10월 29일 일기를 보면 이 시는 발표할 길이 없고, 시집에 넣을 가망도 없다는 말을 듣고 크게 실망하는 내용이 나온다. 『김수영 전집』 2-산문(개정판), 민음사 2003, 503~505면 참조.
  10. 「시여, 침을 뱉어라」, 같은 책 400면.
  11. 기존의 전집에는 미수록되었지만 1960년 3월 24일자 일기에는 이 시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詩 「數字」를 쓰다. 前作 「연꽃」에서 이루지 못한 ○○○‘飛翔’을 드디어 遂行하였다. 마음이 가뿐하다”는 부분이 그것이다. 이 일기만으로는 이 「연꽃」이라는 시의 매체 발표 여부는 불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서 「數字」라는 또 한편의 알려지지 않은 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김현경 여사는 소장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이 작품 역시 적잖이 문제적일 것으로 추측된다.
  12. 1954년 11월 24일의 일기, 『김수영 전집』 2-산문(개정판), 481면.
  13. 1955년 2월 3일의 일기, 같은 책 492면.
  14. 1956년 2월 16일의 일기, 같은 책 493면.
  15. 이 메모의 공개와 그에 대한 해제는 다른 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다만 이 메모가 “communism에 대한 共鳴, 同情에서 始作”이라는 구절로 시작되고 있다는 것,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과 가정 고민이라는 일상 사이의 갈등이 이 소설의 축이 된다는 것, 이를테면‘전쟁과 사랑’을 주제로 한 비교적 대규모의 소설로 기획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는 정도만은 말할 수 있겠다.
  16. 김현경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황정란은 이대 출신의 재원으로 미모는 아니지만 몸맵시가 아주 좋고 자수 실력이 뛰어났으며 독특한 매력을 가진, 하지만 아편을 상용한 개성 강한 여성이었다. 후에 박정희정권 아래서 이인자의 자리를 누린 정일권을 비롯한 많은 남성이 그 주변에 있었지만 결국 가난하고 불행한 작가 최태응과의 도피행각 끝에 비극적인 자살을 했다고 한다.
  17. 이외에 1954년 12월 28일 일기에 쓰고 후에 김현경 여사가 청서하여‘꽁뜨’라 이름 붙인 「다방‘카나리아’」라는 글이 있지만, 그야말로 한 다방의 풍정을 그린 짧은 글일뿐 소설이나 꽁뜨라 부르기는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