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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정진 崔正進
1980년 전남 순천 출생. 2007년『실천문학』으로 등단. bloodinink@naver.com
기울어진 아이 3
물류창고
아버지가 ‘물류’창고에 들어가 문을 잠근 날이면 나는 집 앞에 앉아 조그만 눈사람을 만들었다 시린 손에 입김을 불고 있으면 집 앞을 지나던 사람들이 눈길에 고꾸라지곤 했는데 넘어지는 게 아니라, 바닥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바닥도 가파른 벼랑이라서 사람들은 손을 뻗어 힘껏 매달리곤 했다
창고의 ‘물류’들은 부서져 있었다 창고 안을 기차 소리가 통과해 갔다 아버지는 멀리 떠나는 것일까 나는 잠긴 문 밖에 매달려 울곤 했지만, 집에서 떠난 것은 ‘물류’들이었다 아버지는 창고의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자신을 던지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내던지면 빗맞게 마련이었다 아버지는 밤새 길을 잃고 헤매다 눈이 쌓인 산이 한 상자 가득 담긴 창고의 창문 아래서 쏟아져들어온 빛더미에 깔려 있었다 방으로 실려와 고열에 시달리던 아버지, 이불은 밤의 호주머니 같아서 아버지의 몸을 주워 담고 동상을 앓는 손가락의 푸른빛을 가렸다
창고에 들어가면 한참 나오지 않는 아버지가 미워서 나는 동네 입구의 공중전화에서 집에 장난전화를 걸곤 했다 어느날은 불러도 대답이 없었는데 아버지는 정말 떠나버린 것일까 순간 아버지는 등 뒤에서 전화박스의 문을 당기고 있었고 문을 밀며 나는 버텼다 공중전화 박스의 바닥에 눈이 녹아 흐르고 있었다 창고에서 ‘물류’들이 부서지는 소리는 자신을 버린 것들에게 아버지가 조난 직전에 타전한 모스 부호였지만, 내 귀는 집 밖의 소리에 더 곤두섰다
‘물류창고’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날은 옷들을 염색하는 날이었는데 아버지는 창고에 가득 찬 약냄새에 취해 쓰러져 있곤 했다 잠이 드는 게 아니라 물드는 어둠에 정신을 잃을까 봐 나는 밤이 샐 때까지 방의 불을 켜두었다 앓는 소리로 올라야 하는 것은 산이 아니라 꿈이었고 아버지는 몸을 엎드린 채 암벽을 오르는 자세로 필사적으로 잠에 붙어 있었지만, 아버지의 몸이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을 데리고 달아나는 동상을 뒤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손가락의 푸른빛은 ‘물류’들에게서 물든 것이었다 나는 조그만 눈사람을 만들면 창고에 두었다 문을 열어보지 않아도 창고 안에서 녹는 것이 눈사람이 아니라 나임을 알 수 있었다
아이의 따가운 저공비행
아이가 아이였을 때1 공원의 잔디밭에서 비행기에 올랐네
제 아버지의 팔다리에 오른, 아이의 웃음은 입 꼬리를 날개로 펴고
눈부신 굉음 사이로 날아갔네
아이의 어머니는 자신의 가슴을 안고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아버지가 꽃병을 던지는 게 아니라, 꽃병이 달아나는 것처럼 보였다 꽃병은 벽에 안겨 부서지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한동안 벽을 향해 손을 내밀고 멀리 떠나는 누군가에게 인사라도 하는 것처럼 공항에 배웅 나온 자세로 서 있었다 그 자세는 노란 개나리 줄기를 들고 휘두르던 손짓이기도 해서 피가 맺힌 종아리를 동동 굴렀는데, 아이는 상처에 침을 바르는 사람들을 보면 상처를 먹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자꾸 종아리를 가렸다 자신에게도 아끼는 신발이 있다고, 꽃병은 유리조각들을 바닥에 벗어놓고 벽을 통과해갔다 비행기가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가듯이
방의 벽지처럼 차가운 벽이 드러날까 싶어서 공원의 해바라기를 북북 찢었는데 하늘에 못이 박혔던 자국 하나 쨍쨍하게 걸려 있었다 저 못자국만 아니었다면 아버지는 밤새 저수지의 수면에다 못을 박듯이 낚싯대를 휘두르지 않고 지난봄의 노란 개나리도 더는 거실의 화병에 꽂혀 있지 않아서 화병에 고인 물이 파문을 회초리로 맞고 색이 변하지 않아도 좋았을 거라고. 아이의 몸은 종아리의 못에 벗어둔 옷처럼 걸려 있었다
박동 소리가 굉음을 일으키면 심장은 몸속에서 마구 뛰기 시작한다 몸속 저 멀리까지 날아갔다 온다 어머니의 가슴은 온몸의 혈관들에게 홧병(火病)을 수유하는 몸의 세번째 유방. 아이는 자신의 가슴을 안고 쓰러지는 어머니의 품에서 ‘꽃병’을 보았다 깨진 유리조각은 굉음을 일으키며 지상에 착륙하는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어머니의 눈물은 방구석에서 반짝반짝이는, 닦아내다 보면 언젠가부터는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게 되는 유릿가루였다 유릿가루는 꼭 누가 한 짝을 숨겨버리고 남은 실내화의 다른 한 쪽 발 같아서, 아이에게 그것은 입으로 붕붕 엔진소리를 내면서 아이의 방식으로 날리고 노는 최신형 비행기였다 아이는 목적지 ‘비행’에 머무른 적이 있는데 주변이 죄다 구름이라서 아이는 아이인지 모르고 자신을 구름이라 여겼다
아이는 해뜰 때 잠들고 해질 때 일어나는데, 일어난 게 오늘인지 어제인지 내일인지 모르네 오늘이 며칠인지 모르고 해뜰 때 잠들고 해질 때 일어나서 아이는 자신이 몇살인지를 모르고 조카의 침이 묻은 사탕을 뺏어 자신의 입에 쏙 넣고 조카 혼자 죽어라고 우는 방에서 몰래 빠져나오네 막대가 상하지 않게 단물을 만들어 먹으면서 뒤통수를 탁, 치면 돌아보는 선생에게 크면 클수록 웃음소리는 멀리 달아나고 있는 발소리라는 듯 죽어라고 내달리면서, 죽어라고 웃네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는 아이는 때로 자신을 선생보다 늙었다고 느끼고 우네 때로 아이는 자신을 자신의 조카보다 어리게 느끼고 우네
-1998년, 생일 밤 일기
오늘이 생일이라서 아이는 혼자 이국에 왔네 아이는 비행기를 타고 낯선 이국에서 낯선 이국으로 돌아왔네 왜 자신의 몸이 마르는 소리는 들을 수 없는 걸까 아이는 10년 전 일기를 오늘 일기로 옮겨 적고 한 글자씩 뜯어 먹네 트렁크 안에서 꺼낸 10년 후의 일기장에도 옮겨 적고 일기장을 한 글자씩 뜯어서 먹네 혼자 이국에 와서 아이는 생을 보내는 내내 아이인 채로 살아온 자신 안의 아이를 만나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가 앞에 마중 나온 외삼촌을 만나고 서야 겨우 ‘아빠는……?’ 묻던, 그날 처음 인사한 어머니 안의 아이와 아이는 요즘 부쩍 가까워지고 있어 걱정이네 얼굴을 모른다는 자신의 엄마를 쭈그리고 앉아 부르던 아버지 안의 아이와 새벽의 옥상에서 마주친 날, 이놈들아 내 오줌발 맛 좀 봐라, 아이는 옥상 밖으로 고추를 꺼내 밤하늘의 별에다 지린내를 흘려보내주었네 아이는 쓰네 당신이 당신 안의 아이를 꺼내 나에게 보여줄 거라면 나는 사랑하는 친구야! 외치고 뒤통수를 탁! 치고 달아나버릴 거라고 그러면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빛이 나도록 빨고 서 있는 당신의 아이와 당신의 텅 빈 등 뒤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겠네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손을 번쩍 치켜들었을 때 아이는 바닥에 몸을 내던지고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때굴때굴 나뒹굴었다 아이의 눈에 비친 아버지 등 너머 하늘 저편 한줄기 굉음을 따라서 비행기 한대가 휘둘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원 시계탑의 초침을 보고 있으면 몸이 따갑고 눈알에 빨간 줄이 그어진다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웃음은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는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나 보다 오늘도 공원의 벤치에 누운 아이는, 제 아버지의 팔다리 높이만큼 떠서 비행중에 잠이 든다 봄이 오면 아이는 화단에 노란 개나리꽃으로 피어날 것이다 당신이, 꺾어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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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인용된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의 시 「어린 시절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