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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신체의 코기토, 스펙터클 사회로부터의 생환기
박범신 장편소설『촐라체』
양윤의 梁允禕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저서로 「미완의 귀향과 벌거벗은 구원을 위하여」 「이 시대의 비극, 역설의 변증법」 등이 있다. quixote78@hanmail.net
박범신(朴範信) 장편소설 『촐라체』(푸른숲 2008)는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의 남서쪽에 위치한 촐라체(cholatse) 북벽에 오른 박상민, 하영교 형제의 등반기라는 의장(擬裝)을 하고 있다. 실제 산악인 박정헌, 최강식의 2005년 촐라체 등반체험을 주요 모티프로 삼는다. 여기 모인 상민, 영교, 소설가‘나’는 사회에서 내몰리거나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한 처지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니 전인미답의 촐라체 북벽이 그들에게 실존적 의미의 절대고독을 맛보게 할지라도 실상 그들을 그곳까지 내몬 것은 가파른 나락으로 추락한 현실이다.
아버지가 다른 형제간인 상민과 영교는 서로 오랜 애증관계에 놓여 있다. 서른세살의 상민은 유년시절 어머니의 가출과 아버지의 허망한 죽음을 경험하면서 내면 깊숙이 “삶의 그늘”을 갖게 된다. 그는 자신을 가족처럼 돌봐준 선배 김형주의 도움으로 산악인이 되지만 선배의 추락 장면을 목격하면서 산과의 인연마저 끊는다. 한편 스물한살의 영교는 부모를 잃고 급작스러운 경제적 몰락 과정을 밟는다. 지금은 전과자가 되어 이곳까지 도망온‘막장 인생’이다. 마지막으로 캠프지기‘나’는, 아들을 위해 소설가라는 꿈도 포기한 채 생계에 투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에 귀의하는 아들을 붙잡지 못한다.
전체 서사의 몸통을 차지하는 상민과 영교의 등반기는‘등반-하산’이라는 목적론적 서사의 뼈대를 갖추고 있다. 등정 과정이 순차적으로 서술될 뿐 아니라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독해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 서사의 내부에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또 하나의 시간구조가 끼어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앞만 보고 전진하려는 인물에게 기습적으로 달려드는‘분설(粉雪)’과 같은‘기억’의 조각들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과거‘지향성’을 띠는 일종의 역행운동이다. 등반장비의 도움을 최소화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몸의 감각이 최고조에 이르”는 “등로주의(登路主義) 산행”을 고집하는 두 인물은, 육체적으로는 빙벽과 맞서고 정신적으로는 역진(逆進)하는 돌발적 기억과 맞선다.
서사 진행에 단속적으로 들러붙는 조각난 기억들은 인물이 끊임없이 피하려고 하는 어떤 심연과 맞닥뜨리는 순간까지 집요하게 반복된다. 이렇듯 고된 빙벽을 기어오르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들을 괴롭히는 또다른 두려움은 부모의 임종 순간이나 선배 김형주의 추락 장면이 상징하는 죽음의 맨얼굴이다. 여기서 인물들의 파편화된 기억이‘낭만적 회상’이나 논리적 연속의 한 부분인‘이전(以前)’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주의를 요한다. 때문에 인물들은 기억을‘반복’하고 있으나 그것을‘향수’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상민과 영교가 치열하게 대결하고 있는 대상은 숙명적 인연이나 미지의 거대한 빙벽만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을 심연의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기억의 반복, 즉 반복적으로 회귀하도록 추동하는 시간성 자체와 대결하고 있다. 그것은 예고없이 귀환하는 트라우마적 기억을 반복하는 끔찍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에게‘현재’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는 서로 겹쳐 있거나 서로에게 말려들어가 있는 형국이다. 이들은 단지 “시간의 테이프를 거꾸로 돌려”(74면) 잠시‘생성되는’현재를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상민의 말처럼 “문제는 시간과의 싸움”(85면)인 터.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저기 빙탑 지대에 매달린 상민의 속절없는 견딤은 과거가 아닌 현재를, 죽음이 아닌 생을 향해 나아가기 위한 안간힘과 다를 게 없다.
박범신은 촐라체 북벽을 가리켜‘영혼의 성소’라고 말한다. 이토록 왜소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종국에 가서는 스스로를 긍정하게 하는‘본원적인 낙관주의’를 건져 올리는 성전이다. 그 순례의 길은 얼어붙은 과거의 시간 속으로 침잠해 죽은 과거를 애도하고 무사히 속세로 돌아오는 제의의 과정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그러나 어떤 과거의 사건이 끝내‘의미’의 지대에 닻을 내리지 못할 때 그것에 대한 기억은 심리적 상흔의 방식으로 무의식 속을 함부로 떠돌아다니게 된다. 이렇게 무의식에 각인된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치료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회복이 가능하다면 폭력적인 과거의 경험에 대해서 이해 가능한 상태가 될 때, 그리하여 과거의 충격을 인과관계로 짜여진 서사적 기억(narrative memory)으로 재구성할 수 있게 될 때‘잠정적으로’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다.
여기서 등반과정이 가지런한 하나의 서사로 완성되는 데 기여한 소설가‘나’의 재조합작업이 언급될 필요가 있다. 기록자‘나’를 통해 비로소 두 남자의 경험은 “생사의 굽잇길을 돌아 나온 치열한 과정”으로 요약된다. 눈여겨볼 점은 두 인물의 상처가 봉합되는 데‘나’의 과거가 매개된다는 사실이다.‘나’는 상민, 영교 형제에게서 아들 현우의 뒷모습을 읽어낸다. 그리고 아들을 잃은 상실감을 그들의 귀환을 통해 극복하게 된다. 소설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상민과 영교의 생환 장면은‘나’와 상민, 영교 형제가 “한 덩어리”가 되는 황홀경의 순간이다. 또한 그것은 육체파 남성의 열정적인 에너지를 보여주는 미장쎈이다. 여기서 온전한 의미가 부여된‘과거’는 더이상 인물의 현재를 위협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랑을 멈추지 못하는 내 삶의 연원”(141면)을 찾아 나선 귀향서사를 완성하는 질 좋은 아교 역할을 한다.
정상을 보고 온 자들이 확인한 것은‘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허망한 사실뿐이다. 그들이 본 것은 단지 비천한 “나, 의, 목, 숨, 하, 나”(288면)뿐일 터이다. 여기에는 섣부른 연민이나 낭만적인 감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것이 바로 삶의 진상이며 현실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민과 영교를 중심에 둔‘남성적’서사는, 약한 아버지의 실패한 인생을 부정함으로써 강한 아들의‘전의(戰意)’를 정당화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또한 이들이 획득한‘생의 의지’란, 자기 목숨을 담보로 내걸고 선불로 얻어 쓴 덧없는 희망일지도 모른다.
박범신은 “자본주의적 안락에 기대어 너무 쉽게‘꿈’을 포기하는 젊은 내 아이들에게 들려주고자”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고 밝힌 바 있다.(「작가의 말」) 그렇다면 “약한 것은 명백히 유죄”(114면)가 되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성공적인 등반을 위해 요구되는‘최소한의 장비’는 다름아닌 젊음과 강인함, 열정과 야성이라는‘남성적’육체의 생물학적 정체성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인생의 어느 고도(高度)에서 무력하게 좌초된 익명의 죽음은 무의미한 채로 사라지고, 대신 “내 속에서 우주적인 빅뱅으로 터져나오”(132면)는 강한 육체가 과시하는 욕망의 황홀경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
세속 도시로 돌아간 인물들이 겪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생존’의 댓가일 것이다. 그 생의 한가운데 트라우마적 기억이 남아 있다. 스스로 종결되지 않은 채 봉합된 기억의 파편은 소멸하거나 지워지지 않고 인물들의 삶의 세부에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그러니 “이제 진짜로‘촐라체’를 떠날 때”(310면), 즉 작가가 서사적 세계를 완성한 그 지점에서, 인물들은 제 몫의 유랑을 시작해야 한다. 요컨대 『촐라체』는 지금-여기 스펙터클 사회로의 고된 등반을 마친 박범신의 생환기라고 말해야 온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