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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정지된 세계의 잠언

정지아 소설집『봄빛』

 

 

박창범 朴昌範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생의 우울을 지탱하는‘지옥의 눈’」이 있음. arasaro@naver.

 

 

인생은 곧잘 뒤를 돌아보며 앞으로 내딛는 행보에 비유된다. 이 익숙한 비유는 삶의 불가역성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응하려는 욕망의 역설적 결합 속에 온전한 삶이 주어질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가령, 문학이 그토록 혐오하는 속물적 삶이란 대개 뒤돌아보지 않고 내처 앞으로만 내달리는 자들의 세계가 아니었던가. 정지아(鄭智我)의 두번째 소설집 『봄빛』(창비 2008)은 이 뒤돌아보는 자 혹은 그 회향적 시선을 지켜보는 자들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이에 어울릴 법하게도 소설집에 실린 인물들은 거개가 노인네들이다. 노년이란 결국 생물학적 연령을 뜻하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되돌아보는 자들의 세계이기에 그렇다. 정지아는 이들의 삶을 “갇힌 시간 속에서 살아온 날의 기억을 되씹는 한마리 소”(234면)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기억은 과거 현장의 복원과 재생에 있지 않을 것이다. 여러 평자의 지적도 있었거니와 작가 본인도 밝히고 있듯이, 근래 정지아의 세계는 저 유명한 『빨치산의 딸』(실천문학사 1990)로 대변되는 화급한 책무의 시절에서 어느정도 비켜서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기억주체가 무엇을 떠올리며, 이 소환된 기억이 어떤 서사적 목소리를 분출하고 불러들이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관건일 터이다.

인물들이 즐겨 서성이는 기억의 처소란 주로 생의 변곡점 근방이다. 가령, 피란의 와중에 동생 둘을 이끌고 재차 무모하게 길을 나서다 동생들을 잃게 된‘김’(「길 1」)이 그러하며, 자식들을 군(여수 14연대)으로 떠나보냈던 시절에 주박된 노망난 어미(「풍경」)가 그러하다. 이로써 작가의 촉수가 여전히 역사의 격랑에 휩쓸렸던 기구한 개인에 머물고 있음을 간파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앞서도 언급했거니와 이러한 시선은 그러나 과거의 오롯한 재현에 복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불행의 거처를 경유하여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순정」의‘배강우’를 살피면서 답해보자.

그는 누구인가. 빨치산 시절 동료를 뒤로한 채 하산해 살아남은 위인이다. 불행히도 이 결단은 종의 자식이었던 그가 자신의 인생에서 취한 유일한 자발적 선택이었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그가 허구한 날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물론 이 절망과 자폐의 포즈는 자책과 모멸에서 기인하는 것이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여기에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든 동료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든 저 빨치산 시절이, 그 “목숨을 건 청춘 자체가 천국”(111면)이었다는 뼈저린 자각이 함께하고 있는 탓이다. 작가는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109면) 그 세계를 향하여 속절없이 솟구치는 “맑디맑은 눈물”(110면)을, 영원히 상실된 그 시절에 대한 도저한 그리움을 일컬어‘순정’이라 칭했다. “순백의 폭설”을 맞으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배강우’가 기억을 잃어가거나 깡그리 분실했을 때, 우리는 치매에 걸린 노인들과 조우하게 된다. 예컨대, 망각 삼부작이라 호명하고픈 세 작품(「봄빛」 「풍경」 「세월」)의 주인공이 그들이다. 물론 그들은 기억을 망실했기에 서사는 그들을 지켜보는 자들을 끌어들인다. 「봄빛」과 「풍경」에서는 아들이, 「세월」에서는 평생을 함께한 아내가 그 역을 담당하고 있다.

「봄빛」의 아비는 “죽음보다 더한 치매”를 선고받고도 피로를 못 이겨 태연히 잠에 빠져든다. 꼿꼿하고‘독선’적인 아비의 정신과 성품을 좀먹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시간이다. 동행했던 아들은 차 안에서 그 광경을 보고 끝내 눈물을 떨구고야 만다. 그리고 그 와중에 아비의 성에 차지 않아 평생 못난 자식일 수밖에 없었던, 그리하여 자식이 품었음직한 정념들은 눈 녹듯 사라진다. 물론 그 눈물은 연민에만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잠시 우회하자. 정지아의 또다른 단편(「소멸」)에 따르면, 삶은 “소멸과 소멸 사이에” 낀 “생선토막”(84면) 같은 위상을 차지한다. 해서 인생은 “고리대금업자 같은 비정한 세월”(47면)이 생을 회수하고야 마는 그 숙명을 조건으로 하고 있고, 이를 작가는 “생명의 법칙”이라 부른다. 이 법칙으로부터 한사코 도망치다 볼썽사납게 웅크리고 최후를 맞은 자가 바로 「소멸」의‘아버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삶은 이 우주적 차원의 질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답하기 전에 먼저, 상처받은 혼을 위무하는 최적의 언어가 남녘 방언일지도 모른다는 기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세월」을 검토해보자. 이 단편에는 냉엄한 생의 법칙이 관철되는 세상에서 삶을 규정하는 작가의 보다 분명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치매에 걸려‘은어맹키 세월을 거슬러올라 어느 한 시절을 살고 있는’무심한 남편(동지)을 향한 아내의‘넋두리’(김경수의 해설)로 진행된다. 그 독백 끝에 딸려나온 전언이란 바로 삶은 “짠허고 애달프”다는 통찰이다. 그래서 그 “애달븐 운멩”의 소유자들에게 망각(치매)은 차라리 축복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일면적이다. 망각에 접속된 삶은 기억을 망실하기 전의 삶의 행태에서 놓여나지 못하는 탓이다. 가령, 「봄빛」의 노망난‘고모’나 「풍경」의‘어미’가 그러하다.‘고모’는 여전히 “노망에 걸려서도 허구한 날 일을 끼고 살”며,‘노모’는 자식을 기다리던 “평생의 서러운 습관”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이‘애달픈 운명’과‘비정한 세월’속에서 삶은 어찌해야 하는가. 병든 부모를 끌어안겠다는 태도를 표명한 「봄빛」의 말미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작가는 도리의 세계를 삶의 문법으로 제시한다. 따라서‘그’에게 생명을 주고 양육을 책임졌던 부모가 이 우주의 법칙에 진입할 때까지 지켜주는 것이 마땅한 자식의 도리가 된다. 작가에 따르면,‘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줘야 하는 생명의 법칙’에 부합하는 길은 결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풍경」에서 “백살을 바라보는 노망든” 어미를 곁에서 지키는 환갑 지난 아들의 태도와 실천도 바로 여기서 비롯하는 것이다. “낡아 부스러질 듯한 두개의 기둥처럼 어머니와 그는 세월을 버티고 있었다”(69면)는 진술에서, 이 두개의 기둥이란 바로 우주적 질서와 도리를 환기시키는 메타포일 터이다. 그리고 작가가 새삼 불러들이는 이 도리란 필시 인간 삶의 존엄과 품격에 복무할 것이고, 이 목소리가 더더욱 각별한 것은‘속물의 전성시대’(우석훈)인 오늘의 이 자리에서 울려퍼지는 탓이다.

한편 비정한‘생명의 법칙’과‘인생은 애달픈 것’이라는 명제 속에서 삶은 체념과 허무로 흐르기 십상이다. 그러나 작가의 존엄과 도리에 대한 요청 혹은 견지의 자세는 허무로의 경사를 막아줄 것이다. 아울러 중년 여성을 앞세운 일련의 작품들(「운명」 「양갱」 「스물셋, 마흔셋」)을 통해서도 이러한 우려는 불식되고 있다. 이 여주인공들에게서 엿보이는 공통적 태도란 바로 세계와 자신에 대한 엄정한 직시인 탓이다. 이러한 삶의 자세는 속악한 현실을 훌쩍 건너뛰어 저 도통의 세계로 비약하지 않게 할 것이며, 체념과 허무의 나락으로 떨어뜨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하기에 정지아의 다음 행보가 자못 기다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