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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새물결 2008

20세기 전체주의를 해부하는 새로운 언어

 

 

진태원 陳泰元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jspinoza@empal.com

 

 

호모사케르이딸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 Il potere sovrano e la nuda vita, 박진우 옮김)는 다양한 역사적 문헌들에 대한 풍부한 고증,‘예외관계’의 논리에 대한 정밀한 분석, 발터 벤야민과 미셸 푸꼬, 카를 슈미트 사상의 독창적인 응용 등이 어우러진 빼어난 저작으로, 서구 학계에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출세작이기도 하다. 특히 아감벤이 제시한‘예외상태’(stato di eccezione)에 대한 분석이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 일상화된 공안정국을 예견한 것으로 평가되면서 이 책은 더욱더 주목받고 있다.

이 책에서 아감벤이 사고하려는 사태는 20세기의 전체주의다. 전체주의는 진부하다 싶을 만큼 널리 다루어진 정치철학의 주요 주제 중 하나지만, 아감벤은 새로운 개념적 장치들로 낡은 주제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 전체주의를 사고하기 위한 그의 이론적 출발점은‘조에’(zò˘e)와‘비오스’(bíos)의 차이, 곧 자연적 생명과 법적인 지위를 부여받는 인간적 생명 사이의 차이다. 왜 이러한 차이가 중요할까?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양의 정치사상에서는 항상 비오스로서의 인간의 삶만을 문제삼았지만, 사실 정치의 은밀한 토대는, 역설적이게도 정치적 질서에서 배제됨으로써 그 질서에 포함되는‘벌거벗은 생명’(nuda vita), 즉 조에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이처럼 벌거벗은 생명을 배제함으로써 포함하는 작용을‘예외’라고 부르며, 이러한 예외적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야말로 주권의 본래적인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바로 이로부터 “서양 정치의 근본적인 대당(對當) 범주는 동지-적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정치적 존재, 조에-비오스, 배제-포함이라는 범주쌍”(45면)이라는 그의 근본명제가 나온다.

그는 이러한 논리에 대한 역사적 전거를 고대 로마법 문헌에 등장하는‘호모 사케르’(homo sacer)라는 존재에서 찾고 있다. 호모 사케르, 즉 벌거벗은 생명은 “살해당할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인간의 생명”(177면)으로서, 희생물로 바칠 수 없다는 것은 정상적인 법질서에서 배제되어 있음을 뜻하며, 반대로 살해당할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배제 속에서도 그가 항상 이미 주권의 권력에 포섭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근대정치의 토대를 이루는 「인권선언」(1789)은 인권의 불가침성에 대한 선언이라기보다는 벌거벗은 생명을 권리의 주체로 정립하고 이로써 생명정치를 모든 정치의 기초로 선포하는 문서가 된다. 또한 나찌 수용소에서 대규모로 자행된 유대인 살해는 이처럼 근대정치의 문턱에서 설립된 생명정치의 잠재력이 현시되는 장소와 다르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수용소는 (…) 근대성의 정치적 공간의 숨겨진 패러다임”(241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감벤은 오늘날에는 공항의 난민 대기구역이나 불법 이민자 수용시설, 관따나모 수용소 등 도처에서 수용소의 모습이 확산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우리들 각자가 호모 사케르들이 되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따라서 서구의 자유민주주의는 더이상 전체주의의 대안이 아닐뿐더러 양자는 거의 식별 불가능해지고 있다. 이러한 생명정치적인 분열을 고려할 수 있는 정치만이 전지구적 내전을 종식시킬 수 있으리라는 아감벤의 진단(339면)은 음울하기는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시사적 함축을 지니고 있다.

이 책에서 눈여겨볼 점은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개념쌍을 실마리로 슈미트와 벤야민, 푸꼬와 아렌트를 한데 묶어내는 저자의 이론적 능력이다. 이론적·정치적 지향이 제각각인 이 사상가들을 역사적인 문헌 고증을 곁들여 한데 결합시키는 솜씨는 가히 대가답다고 할 만하다. 그렇다고 해서 아감벤의 분석에 시비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주권권력을 권력의 미시물리학의 말단에, 파생적인 결과의 자리에 놓는 푸꼬에 맞서 오히려 생명권력을 주권의 징표로 간주하는 아감벤의 주장은 대담함을 넘어 무모하게 느껴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또다른 당혹감 중 하나는, 어떻게 이렇게 박식하고 고전에도 두루 밝은 철학자가 그처럼 맹목적인 환원론에 사로잡혀 있을까 하는 점이다. 어떤 독자들에게는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인 삔다로스(Pindaros)의 시와 고대 로마법의 문헌을 비롯, 20세기의 주요 사상가들을 종횡으로 누비면서 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들이라는 점을 논증하는 아감벤의 논의가 지극히 매혹적일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독자들에게는 묵시록적인 어조로 이런저런 상이한 문헌들에서 오직 주권과 벌거벗은 생명의 흔적만을 뒤쫓고 있는 저자의 강박적인 주장이 다소 지겹게 느껴질 수도 있다. 사실 이 책에서 눈에 제일 거슬리는 것 중 하나는 여러번 되풀이되는 “오직 ~만이”라는 표현이다.

따라서 이 책이 문제작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과연 두고두고 고전으로 읽힐지는 분명치 않다(푸꼬가 살아서 이 책을 읽었다면 특유의 냉소를 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의 박학과 신선한 통찰력은 이 책을 돋보이게 만드는 매력이지만, 그것을 무색하게 할 만한 단조로운 논리는 저자 자신이 넘어서야 할 한계다. 그의 후속 저작들을 평가하기 위한 한가지 기준은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번역에 관해서는, 사소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한가지만 지적해두겠다. 이 책에는 서양의 고전을 비롯해서 20세기 사상가들의 주요 저작에 대한 다수의 인용문이 나온다. 그중 상당수는 국내에 이미 정평있는 번역본들이 나와 있는데도 역자는 그 번역본들을 전혀 참조하지 않은 듯하다. 역자가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으니 한번 묻고 싶다. 과연 프랑스어 번역본 가운데에도 역자처럼 기존의 번역본들은 전혀 참조하지 않은 채 역자 자신의 번역으로만 채운 것들이 있는가? 평자가 알기로 학문 선진국들에서는 번역이나 저술에서 기존의 번역본들을 인용하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는데, 반대로 우리나라에서는 기존의 번역본들을 무시하는 태도가 일반화되어 있는 것 같다. 서양 학문의 독자적인 수용을 위해서는 이런 사소한 문제부터 바로잡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까다로운 책을 번역하느라 애쓴 노고를 폄하하고 싶지는 않지만, 역자나 출판사 모두 번역의 의미를 한번 더 새겨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