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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한음 『호모 엑스페르투스』, 효형출판 2008

최근 교양과학서의 정체성을 묻는다

 

 

김기윤 金基潤

서울대 강사, 과학사 kiyoonkim@hanmail.net

 

 

호모엑스페르투스근대 이전의 학자들에게 경험이란 누구나 알고 있을 일상의 상식적 경험을 뜻했다. 어느 한 사람이 겪은 특수한 사건, 즉 실험으로 얻어지는 지식은 우연의 산물이며 또 인위적 가공물이어서 값진 자연지식일 수 없다고 간주되었다. 실험으로 자연에 관한 의미있는 지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생각은 17세기 후반 서양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서서히 자리잡아가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목격한 사건, 즉 실험이 중요한 지식일 수 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당시의 실험철학자들은 갖가지 종교적·정치적·수사학적 도구를 동원해야 했다.

그렇게 형성된 실험철학, 그리고 이를 통해 형성된 근대과학이 곧장 서양사회에서 문화적 권위를 획득한 것도 아니었다. 중등학교 교육과정이나 대학 교양교육 과정에 과학이 본격적으로 포함되기 시작한 것은 실험과학이 등장하고 200여년이 지난 19세기 후반이었다. 과학을 교육과정에 편입시키기 위해서 당시 과학자들은 과학지식의 중요성을 전투적으로 전도해야 했다. 따라서 과학의 문화적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강연과 저술로써 당시의 종교, 사회, 정치적 사안에 과학이 무게있는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음을 보이려 애썼다. 교양과학 또는 대중과학이란 전문과학의 잉여물이 아니라 필수적인 전제였던 셈이다.

후대 과학소설의 전형이 된 웰즈(H. G. Wells)의 『타임머신』(The Time Machine)이나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에서는 당시의 쟁점이던 진화론은 물론이고 스승 헉슬리(Thomas H. Huxley)의 유명한 현미경 실험교육으로부터 받은 영향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런데 웰즈는 자신을 과학교사의 길로 이끈 사람이 헉슬리나 다윈이 아니라 대중과학서 저자인 우드(John G. Wood) 목사였다고 밝혔다. 일곱살 나이에 읽었던 우드의 『자연사』(Natural History)야말로 자연의 경이로 자신을 이끈 등불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기 15년 전에 영국 사람들은 이미 로버트 체임버즈(Robert Chambers)의 『창조의 자연사』(Vestiges of the Natural History of Creation)를 읽고, 우리가 두어해 전 줄기세포 이야기를 하듯 우주, 생명, 인간의 진화를 논했다. 헉슬리의 현미경 교육이 시작되기 20년 전에 조지 엘리엇, 조지 루이스, 필립 고스 등 많은 문인들이 현미경 관찰교본이나 해변의 생물들을 소개하는 책을 썼고, 자신들의 소설에서 생물학적 시각을 펼쳤다. 많은 대중과학서들을 쓰면서 우드 목사는 신이 창조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 애썼다. 체임버즈는 우주와 인간, 나아가 인간사회가 점차 복잡·정교해지고 분화·진보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독학으로 방대한 지식을 갖추며 영향력있는 출판인이 될 수 있었던 새로운 중산층으로서의 시각을 드러내려 애썼다. 엘리엇이나 루이스 역시 대표적인 지식인, 즉 문인으로서, 부상하는 과학분야가 새로이 만들어내는 세계상을 자신들의 글에 녹여가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영향력을 높임과 동시에 문예계의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었다.

국내서점의 교양과학서 서가에 놓인 책들의 저자나 번역자 또는 출판기획자는 어떤 생각을 하면서 작업을 추진했을까. 대체로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겠다거나 지식을 전달하겠다는 정도의 이야기들이 머리말에 담겨 있다. 『호모 엑스페르투스』의 저자 이한음은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그 가치에 대해 고민할 만한 과학실험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유전학, 생태학, 줄기세포 등의 실험이 인간사회에 어떤 새로운 성찰을 던져줄 수 있으며 어떤 불확실한 요소들이 남아 있는가를 찾아서 보여주려는 저자의 노력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저자는 인공생명체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 때문에 그것이 결국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로 우리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는 내용으로 3부를 정리하며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하지만 실험 자체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그리 많지는 않으며, 내용의 중심에는 유전과 진화에 대한 공상 같은 에피소드들이 자리잡고 있다. 예컨대 저자는 진화를 다루는 1부에서 침팬지와 보노보의 행동과 습성이 매우 다르다는 진화심리학의 실험연구 결과가 인간의‘마음’을 과학적으로 이해하여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합으로 향하는 발판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똑같이 인간의 근연종(近緣種)인데도 보노보는 매우 평화적인 반면 침팬지는 상당히 공격적인 본성을 보이며, 따라서 초기 인류의 역할모델을 침팬지가 아니라 보노보로 설정했더라면 인간의 본성에 대한 개념도 달라지고 인간 역시 평화로운 동물이 될 수 있다는 기대도 표명한다. 하지만 동물의‘본성’에 대한 연구로부터 인간사의 판단과 결정을 위한 근거를 찾으려는 시도에는 많은 허점이 있다. 인간이 스스로의 행위를 선택하고 판단하는 데 진정 동물세계의 도움이 필요할까? 이 책에서는 동물을 연구하는 현대과학에 대한 맹신도 엿보이는데, 사실 과학적 연구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인간의‘본성’에 대해 분석과 통찰을 하겠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진화와 유전을 다루는 대부분의 내용은 생물학자 자신들이 부정하는 환원론적으로 단순화시킨 “대중화된 유전자론”에 기대고 있다. 인간이 인육을 먹으면 프리온 단백질로 인한 질병으로 사망할 수 있다. 여러차례 인육을 먹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유전자는 독특한 이형 접합유전자를 지닌다. 그렇다면 그런 이형 유전자가 많지 않은 한국인의 조상은 영국인의 조상보다 인육을 덜 즐겼을까 하고 묻는 식이다.

유전을 다루는 3부 역시 갖가지 생명체 형질의 원인을 유전자로 상정하면서 유전공학의 미래에 대한 꿈을 전하는, 단순히 중립적이지만은 않은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말하는 생쥐’와의 밀착 인터뷰”(186면)나 “잘린 손가락도 재생하는 배아 줄기세포의 기적”(200면)과 같은 제목은 제목만으로도 저자가 기획했던 분석이나 성찰의 성과를 상쇄시켜버린다. 바이오스피어(biosphere)나 섬 생태학 실험을 잘 정리해 보여주며 환경 이해를 위한 실험을 설명하는 2부에서도 진화와 유전자를 중심으로 하는 거친 유비(類比)가 끼어든다. 생명체들 사이의 생태학적 갈등과 협동을 보여주는 글에서, 노예제가 인간사회의 필연적인 제도가 아님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개미사회의 위계제가 인간의 노예제와 비슷하지만은 않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19세기 유럽의 대중과학서는 그 시대 과학의 전문화를 선도했던 문화의 일부였다. 당시 저자들은 책의 판매에 대한 기대와 함께 종교인, 지식인, 부상하는 전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신의 책에 녹여내고 있었다. 현재 서점의 서가를 메우고 있는 교양과학서들의 저자나 번역자들은 어떤 정체성을 자각하고 있는가? 과학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 외에 어떤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가? 과학은 인용지수가 높은 전문저널을 통로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후대의 과학자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독자들은 주로 대중과학서를 통해 과학을 이해할 뿐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읽는 틀을 각인해나간다. 최근 여러 저자나 번역자들이 점차 더 세련되고 실팍한 내용의 교양과학책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한음은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저자들 중 한사람이다. 하지만‘전문인’을 뜻하는 것인지‘실험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인지 아리송한 이 책의 제목과 내용 사이의 괴리, 그리고 과학의 가치에 관한 성찰이 담겨 있다고 보기에는 여전히 가볍고 일화적으로 느껴지는 내용에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