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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최호철 『을지로순환선』, 거북이북스 2008
서울은 순환한다, 계급의 혈관으로
이명석 李明錫
만화비평가 manamana@korea.com
오늘의 서울을 읽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다. 9시 뉴스를 가득 채운 사건사고의 영상들로 써스펜스를 즐겨도 좋고, 57분 교통정보를 알려주는 목소리를 통해 1천만 시민의 출퇴근 운동회를 상상해도 괜찮고, 조중동에 실린 부동산 광고로 집값의 게임을 읽어도 된다. 최호철(崔晧喆)은 그 모든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만화가에게는 방구석의 공상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편견도 가소롭다. 그는 오늘도 이 도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궁금증으로 길을 나선다. 그 어깨엔 언제나 스케치북 하나가 걸려 있다.
『을지로순환선』은 알려준다.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연재만화가로서 짧지 않은 이력을 이어온 최호철을 부르는 데 가장 좋은 호칭은 그냥‘그림쟁이’라는 사실을. 그 말이 가장 정확하고 명예롭기까지 하다. 책 속에는 한장 한장 폐부를 찌르는 그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여러 전시장에서 웅장한 화폭으로 등장했던 회화들도 있고, 혼자 소유하는 미술이 싫다며 종이에 찍어 나누어주던 그림도 있고, 『인권』 『파랑새』 『작은책』 등의 잡지에 실린 삽화들도 있다. 그의 스케치북을 몰래 훔쳐본 소수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었던 낙서들도 함께한다.
작은 단상들을 곁들여 한권의 책으로 묶은 『을지로순환선』은 최호철이라는 수령 40년의 나이테다. 어느 한줄, 어느 한장 헐거웠구나 싶은 적이 없는 꾸준한 리얼리즘의 증거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한쪽에서 태어나,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정신이 아직 거기에 살아 있다. 장경섭, 앙꼬, 김수박 등이 그의 뒤에서 또다른 리얼리즘을 이어가고 있지만, 최호철만한 박력과 배포는 없다.
최호철의‘을지로순환선’은 서울을 관통하는 전철이지만, 또한 같은 도시를 전혀 다른 영역으로 나눠갖고 있는 사람들의 순환선이다. 공간으로 순환하고, 시간으로 순환하고, 계급으로 끝없이 돈다. 강남의 아파트에 살던 부자는 더 근사한 아파트로 옮겨가고, 그 아파트를 짓던 노동자는 더 큰 아파트를 짓는다. 이주노동자는 자신이 잠시 비비던 땅이 재개발되면서 다시 이주의 한숨을 쉰다. 철거민은 끝없이 철거당하고, 노점상은 여기저기 노점을 끌고 유랑한다. 전태일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 『태일이』(돌베개 2007)에서 최호철이 보여준 1970년대의 억압은 차라리 낭만적으로 보일 정도다. 태일이는 불에 몸을 던지지만, 그다음에는 광주항쟁도 있고, 87년 민주화운동도 있다. 그런데 오늘 을지로순환선의 차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풍경은 무엇을 잉태하고 있을까?
세상은 바뀌었고, 민중은 많은 것을 얻기도 했다. 대형 할인매장에는 갖가지 생필품들이 가득하고, 거리 곳곳에 새로 생긴 가게 앞에선 늘씬한 도우미들이 춤을 춘다. 집집마다 자가용을 장만하고 주말과 휴가철에는 온가족이 어딘가로 떠나간다. 최호철의 그림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어느 따뜻한 생활잡지라면 평온한 도시의 풍경으로 등장해도 어색할 게 없는 소재들이다. 그러나 최호철의 펜은 스쳐 지나가는 장면 속의 작은 소리까지 낚아내고 만다. 어느 복부인이 로또 당첨의 기분으로 바라볼 판교 택지개발지구는 “피우지 못할 꽃 대신 돈이 자라나는 땅”이다(20~21면). 피서철을 앞두고 마냥 흥겹기만 해야 할 대형 할인매장에서는 “바다가 나를 부르기 전에 바다로 등 떠미는 풍경이 먼저 다가온다”(36~37면).
누군가는 어느 까칠한 화가의 냉소와 트집이라고 책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최호철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는, 그러나 막상 눈앞에 들이대면 절대 부정할 수 없는 밑바닥의 세상을 그려낸다. 그러면서 풍요와 즐거움을 누리는 자들의 시선도 버리지 않는다. 세상에는 항상 여러 시선들이 존재한다는 또다른 진실을 보여줄 뿐이다.
내용상의 중층적인 시선들은 다시점(多視點)의 앵글을 통해 형식적 입체성과 결합한다. 오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을지로순환선』은 만화가 아니다(다소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 책의 작품들은‘연속된 그림과 그 부속의 장치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예술’이라고 정의되는 만화와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는다.‘회화와 그에 병치된 글’에 가깝다고 여겨진다). 그럼에도 현대 만화예술의 가장 매력적인 장치인 다중의 격자(frame)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만화는 한 페이지라는 커다란 격자 안에 들어가 있는 수많은 작은 격자들이 제각각의 시선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최호철은 하나의 그림 속에 지하철의 창밖, 버스 안의 뒷거울, 2층 까페의 유리창 같은 수많은 격자들을 넣어 조금씩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표제작 「을지로순환선」이나 「버스기사 아저씨」 등 작가가 즐겨 소재로 삼는 온갖 운송수단들이 이러한 표현에 가장 적합한 공간인 것 같다. 메트로폴리스의 교통수단에서는 서로 다른 직업과 신분의 사람들이 마구 뒤엉킬 수밖에 없다. 그림쟁이로서는 그만큼 다양한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날 장소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 장면들을 단순히 모사하며 데쌩을 연습하는 수단으로 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번 정류장」(62~63면)에서는 강물처럼 요동치는 일그러진 렌즈를 통해 삶의 불안한 역동을 표현한다. 「후끈 거리」(80~81면)에서는 아열대의 더위 속에서 노동에 시달리는 블루칼라와 에어컨 바람을 씽씽 받으며 히죽거리고 있는 화이트칼라의 인생이 교차한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을 수밖에 없는 도시다. 최호철은 우직한 소처럼 그 도시의 사람들을 자기 그림 속에 꾸역꾸역 태우지만, 노동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밝은 리얼리티도 포기하지 않는다. “땅밑 세상이 안 받쳐주면 땅위 세상도 다 헛거여. 그게 세상 이치지…”(「배관공사」, 98~99면). 이보다 강렬한 진실이 어디에 있을까?
『을지로순환선』은 창문을 열어둔 채 묘한 경계를 달리고 있다. 막스 에른스트(Max Ernst)의 판화처럼 빅토리아식 공포의 상상력으로 침몰하지도 않고, 끼노(Quino)의 『마팔다』(Mafalda)처럼 어린이의 시선을 담은 유머로 적당히 위로해주지도 않는다. 불편하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을 여기저기 던져놓고 있다. 「와우산」 「을지로순환선」 등 이 책에 등장하는 몇몇 대작은 기회가 닿으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반드시 진품으로 감상하기 바란다. 정말로 작은 인생들이 그림 곳곳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