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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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명박정부, 이대로 5년을 갈 것인가

 

현대 한국의 저항운동과 촛불

 

 

한홍구 韓洪九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상임이사. 주요 저서로 『대한민국史』(전4권) 『불가사리』(공저) 등이 있다. hongkoo@skhu.ac.kr

 

 

1. 한국현대사의 예측 불가능성

 

5월 2일 서울 청계광장에서는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들이 작은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촛불은 두달이 넘게 서울 거리를 밝혔고 지금도 사그라들 줄 모르고 있다. 첫 촛불이 켜지기 일주일 전에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리라고 예측했던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한국현대사의 특징 중 하나는 예측 불가능성이다. 역사가 원래 예측 불가능한 것인지 한국의 대중이 유별나게 역동적이거나 변덕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지식인들이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한국현대사는 참으로 예측하지 못한 반전이 거듭된 역사였다. 왜 우리는 대중의 역동성을 읽어내지 못했던 것일까. 그 답은 아마도 우리가 대중을 신뢰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땅의 민주화나 진보적인 변화를 바랐던 사람들에게 2006년과 2007년은 참으로 잔인한 시간이었다. 상황은 암담했다. 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일정한 상징성과 대표성을 지녔던 김근태(金槿泰) 의원은 이명박(李明博) 후보의 대통령 당선이 유력해지는 상황에서 심지어 “이땅의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뤄낸 국민들이 노망 든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있다”는‘노망 발언’으로 논란에 휩싸였다.1 그 암담했던 70, 80년대에 우리가 대중의 힘을 믿지 못했다면 과연 민주화운동이나 민중운동에 자신을 내던질 수 있었을까. 사회운동이란 가장 암담한 상황에서도 대중 속의 작은 불씨를 찾아 키워가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2006년과 2007년 그저 대중을 탓하면서 손놓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정치권에 진출한 민주화운동 출신들에게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점을 경고하곤 했다. 그럴 때 돌아오는 답은 “괜찮다, 어차피 양당 구도에서 대통령선거란 5% 이내의 싸움이다. 지금 벌어진 격차쯤이야 걱정할 필요 없다”라는 식이었다. 그러나 선거결과를 보면 5%는커녕 5백만표라는 큰 차이로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참담하게 패했다.

진보진영의 사정도 오십보 백보였다. 2007년 초에는 대중의 정서나 감각과는 동떨어진‘진보논쟁’으로 날을 지새웠고,2 대선 패배 후에는 민주노동당의 내분으로 진보신당이 떨어져나갔다. 그 결과 2008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의 의석은 반토막 났고 진보신당은 단 한명의 의원도 배출하지 못했다. 노무현정권 내내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과의 차별성을 확실히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민주개혁진영과 진보진영은 대중에게 같은 무리로 보였고, 양당은 공도동망(共倒同亡)의 길을 걸었다. 불행히도 진보진영은 중도개혁을 표방한 열린우리당의 대안이 되지 못했다. 대중이 열린우리당에 등을 돌린 것은 당연한 것이었지만,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운동권 용어로 서로 싸우는 진보진영 역시 대중에게서 철저히 외면받았다.

진보진영도 대중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했다. 필자는 2007년 1월 박종철(朴鍾哲) 열사 20주기 추모식에 초청강연자로 초대받았다. 추모식에 가보니 세련된 옷차림의 이십대 여성들이 10여명 와 있었다. KTX여승무원들이었다. 박종철인권상을 수상한 인연으로 추모식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심사위원이 누구였는지는 모르지만 수상자 선정을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실상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벼랑끝에 몰린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처지를 대표하는 이들이 아니던가. 더구나 그들을 벼랑끝으로 몬 철도공사 사장은 70년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인‘돌아온 사형수’이철(李哲)이었다. KTX지부장이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너무너무 힘들 때, 상을 준다는 전화를 받고 “야, 우리 상 준대”라고 외쳤더니 사무실에 있던 10여명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고, 전화를 끊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물어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박종철이 누구니?” KTX여승무원들은 현재 한국사회의 비정규직 문제에서 아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투쟁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민주화운동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인 박종철을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진보진영을 포함하여 박종철로 상징되는 민주화운동 출신들은 오늘날‘민중’에게 그만큼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무슨 소용이며, 어떻게 한나라당을 찍을 수 있느냐는 탄식은 또 무슨 소용이겠는가?

대중의 상태를 정확히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대중이 만들어내는 변화는 늘 느닷없는 것일 수밖에 없다. 한국현대사의 예측 불가능성이란 대개 지식인들이 대중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데 대한 변명이었다. 김수영(金洙暎)이 마지막 작품 「풀」에서 노래했던 것처럼, 대중은 바람보다도 빨리 눕지만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바람보다 늦게 울고,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우리는 늘 풀이 눕는다는 사실에 좌절하면서 다시 일어나는 풀을 잊곤 했던 것이 아닐까?

 

 

2. 대중의 놀라운 복원력

 

파란만장했던 한국현대사를 보면 대중은 늘 다시 일어났다. 아마 길어야 10년이었던 것 같다. 한국전쟁에서 조금이라도 좌파 내지 진보적 색채를 띤 사람들은 철저히 학살당하거나 북으로 가거나 아니면 지리산에 들어가 죽어버렸다. 분단과 전쟁과 학살이 휩쓸고 간 한반도 남쪽에는 멸균실 수준의 반공이 이루어졌다. 그런 상태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만 7년이 안된 1960년에 4월혁명이 일어났다. 그때도 대구 2·28사건이나 마산 3·15부정선거 규탄시위를 보면 중고생들이 앞장섰다.

4월혁명은 이듬해 박정희(朴正熙)의 5·16군사반란으로 미완의 혁명이 되었다. 박정희는 1969년 3선개헌을 거쳐 1971년 4월 27일 대통령선거에서 간신히 당선되었으나, 취임 전부터 부정선거 규탄운동과 교련반대 시위, 국립의료원 및 국립대학 부속병원 수련의 파업 등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세번째 임기를 시작한 박정희정권의 첫 6개월은 7월 1일 취임 후 7월 28일 사법파동, 8월 10일 광주(廣州)대단지 사건, 8월 18일 서울대 문리대 교수들을 시발로 한 대학교수들의 대학자치선언, 9월 15일 한진상사 파월기술자들의 KAL빌딩 방화사건, 10월 5일 수도경비사령부 무장군인의 고려대 난입사건, 10월 15일 서울 일원에 대한 위수령 발동과 그에 뒤이은 학생들의 대규모 제적과 강제입영, 11월 12일 중앙정보부의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 발표 등을 거쳐 12월 6일에는 국가비상사태 선포 등 정신없이 지나갔다.3 정권의 난맥상이나 국민들의 저항 강도가 이명박정권 초기에 견주어 못하지 않았다. 영구집권 야욕에 빠진 박정희는 이런 위기상황을 역이용해 1972년 10월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를 자행하여 헌법을 짓밟고 국회를 해산했다. 전권을 장악한 독재자 박정희는 친위쿠데타 이후 꼭 7년 만인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에 의해 사살되었다.

박정희가 죽고 난 뒤, 그의 정치적 양자 전두환(全斗煥)이 나서서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를 이끌어갔다. 전두환은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 참담했던 학살의 아침이 밝은 뒤, 또 7년 만에 6월항쟁은 타올랐다. 1990년 2월 보수대연합에 의한 3당합당의 결과 민자당이 출범했다. 216석의 거대 집권당 출현은 일본의 자민당 정권이 그러했듯이 수십년의 장기집권을 예약한 듯 보였다. 그러나 대중은 그 3당합당으로부터 꼭 7년 만인 1997년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우리 역사를 보면 중요한 선거마다 대중은 새로운 전기를 만들어내곤 했다. 1967년 6·8부정선거로 구성된 7대 국회에서 제1야당 신민당은 불과 44석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4년 뒤인 1971년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의석수를 두배 이상 늘리며 89석으로 약진했고, 대통령선거에서는 투표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박정희를 위협했다. 이런 위기상황 때문에 박정희는 친위쿠데타를 단행했지만, 대중은 끈질기게 다시 일어났다. 긴급조치의 폭압 속에서 치러진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공화당을 득표율에서 1.1% 앞질렀다. 전두환은 집권 후 모든 정당을 해산하고 새로운 판을 만들었다. 집권당인 민정당은 보안사가 조직했고, 제1야당인 민한당은 안기부가 만들었다. 민정당의 2중대라는 비아냥을 듣던 민한당은 1985년 2·12총선에서 정통 야당의 복원을 표방한 신민당의 돌풍에 흔적도 없이 흡수통합되어버렸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도 대중은 보수대연합이라는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거부하고 다시 양당제를 복원시켜주었다.

이렇게 대중은 늘 다시 일어났다. 그 어떤 폭압도, 그 어떤 인위적인 공작도 대중을 잠시 눕힐 수는 있을지언정 잠재울 수는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대중이 일어나는 시점이란 대개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 가장 암담했던 순간이라는 점이다. 1979년 유신체제가 붕괴하기 6개월 전쯤의 상황을 돌아보자. 긴급조치가 공포되어 학생운동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 있었다. 요즘 같은 가두시위는커녕 교내시위조차 용납되지 않았다. 학생 5명이 한 팀이 되어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뿌리며 동조자들을 모으다가, 교내에 버스를 주차해놓고 상주하던 사복경찰과 전경들에게 진압당하는 것이 학내시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학내시위조차 자주 있던 것이 아니고 한 학기에 겨우 두어번 정도였다. 그런데 1979년 1학기에 서울대에서는 단 한차례의 시위도 없었다. 시위를 주도할 팀 5명을 모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암울했던 상황에서 채 6개월이 지나지 않아 절대권력자 박정희가 총에 맞아 죽어버린 것이다. YH사건 이후 급박하게 전개된 민주항쟁과 마침내 폭발한 부마항쟁이 아니었더라면, 박정희가 자신의 심복 김재규의 총에 맞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1987년 6월항쟁 발발 6개월 전도 마찬가지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른 군사정권은 올림픽을 앞두고 재야운동권을 싹쓸이한 뒤 잔치를 벌이고자 했다. 1986년 하반기에는 ○○당, ○○동맹 등 각종 공안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10월 28일 시작된 건국대사태 때는 무려 1200명의 대학생이 한꺼번에 구속되기도 했다. 이 무렵 필자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의 기관지 『민중신문』의 기자였는데, 격주간으로 발행되는 이 신문의 1면에는 지난 2주일 동안의 투쟁기사가 실렸다. 그런데 박종철이 죽기 2, 3일 전에 열린 편집회의 때는 아무리 연말연시가 겹쳤다고 하지만 도대체 1면을 채울 기삿거리가 없었다. 그때 편집장을 맡았던 선배가, 실내에서 1백명만 모였어도 크게 실어줄 텐데 하고 탄식했던 것이 지금도 귀에 생생하다. 서울시청 광장을 1백만 인파가 메우기 꼭 6개월 전의 일이었다. 2008년 촛불이 켜지기 직전의 상황도 이와 유사한 것은 아니었을까?

 

 

3. 민주화의 결과로서의 촛불

 

많은 사람들이 촛불집회의 경이로움에 찬사를 보냈다. 십대들, 특히 여중고생들이 주체가 되어 시작된 촛불집회의 놀라운 자발성과 기막힌 상상력은 정말 새로운 현상이었다. 과연 이 십대들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필자는 그동안의 민주화 성과가 없었더라면, 촛불소녀들은 절대로 나올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출현은 민주화운동 40년과 민주정권 10년 동안 꾸준히 부어왔지만 만기를 잊어버리고 있던‘민주적금’을 탄 것이라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과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지금의 청소년들이 민주주의에는 아무 관심도 생각도 없는 한심한 아이들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1987년 6월항쟁과 비교해보면, 당시 길바닥에서 정말 비장하게 민주주의를 외쳤던 이들은 실제로 민주주의 아래서 단 1분도 살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단군 이래 가장 열심히 책을 읽은 세대라는 386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이들은 머리로는 절박하게 민주주의를 원했지만, 몸은 군국주의 교육에 익숙해져 있었다. 지금의 촛불세대는 지난날의 386들처럼 민주주의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들의 머릿속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이들의 몸에 배어 있었다. 70, 80년대의 저항이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염원으로서의 민주주의에 대한 갈구였다면, 지금의 촛불은 체질화된 민주주의를 빼앗아가려는 시대착오적 정권에 대하여 몸으로부터 나온 저항이다.

이들은 386들보다 민주주의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민주주의에 대해 꼭 알아야 할 한가지는 알고 있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이명박처럼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촛불소녀들이 보인 반응은 향유된 민주주의, 체질화된 민주주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는 과거에‘수단’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절박하게 요구했던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80년대의 민주주의는 몸에 밴 것도 아니었으며, 민주주의 자체가 목표도 아니었다. 민주주의란 통일을 위해, 민족자존을 위해, 민중해방을 위해 꼭 필요한 디딤돌일 뿐이었다.

촛불소녀들의 출현은 민주화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민주화에 냉소적이다. 나 자신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런저런 강연에서 권영길(權永吉) 의원식으로 “민주화돼서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냉소적인 질문을 던지곤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우리 사회에서 민주화의 덕을 누가 보았던가? 일반 시민들도 민주화가 가져온 과실의 맛을 보지 못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을 배타적으로 차지한 자들은 재벌과 거대언론과 관료와 사립학교와 대형교회 등이었다. 정권교체가 가능해지면서 정치권력의 유한성이 증명되었고, 이는 역설적으로 교체되지 않는 세습권력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오늘날 삼성공화국을 넘어 삼성왕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민주화된 사회에서 재벌의 영향력은 크게 확대됐다. 삼성비자금사건을 보면 재벌이 국가권력보다 우위에 서서 국가권력을 조종해왔음을 알 수 있다. 전두환정권 시절인 1985년 당시 국내 재벌순위 8, 9위권이던 국제그룹은 전두환의 한마디에 공중분해되어버리고 말았다. 1992년 현대재벌의 정주영(鄭周永)이 대통령에 출마했는데 그는 정권에 엄청난 정치자금을 갖다 바치느니 차라리 그 돈으로 내가 대통령 해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렇듯 민주화 이전에는 정치권력이 재벌의 생명줄을 쥐고 정치자금을 뜯어가는 일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당시는 정치권력이 경제권력을 압도하던 시기였다. 민주화 이후에는 조·중·동 등 보수언론이 대통령을‘씹는’것이 일상화되었지만, 유신과 5공 치하에서는‘보도지침’에 묶여 정권이 정한 가이드라인을 감히 넘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또 방송은 이른바‘땡전뉴스’의 굴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재벌, 언론, 관료 외에 민주화의 덕을 본 사람들을 꼽는다면,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 중 극히 일부의 정치인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꼭 국회의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른바 물좋은 자리를 거쳐간 사람들 몇백명쯤이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민주화를 그들만의 민주화, 그들만의 잔치로 씁쓸하게 바라보았을 뿐이다.

70, 80년대의 민주화운동이 민중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었다면, 90년대 이후 우리 민주화의 가장 뼈아픈 한계는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분리되었다는 점이다. 많은 이들이 민주화에 냉소적이었던 이유는 단지 자신이 이런 좋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다. 1987년 이후 우리가 이룬‘민주화’는 된 것도 아니고 안된 것도 아닌, 「개그콘서트」의 인기코너인‘같기도’형 민주화였다. 과거청산 역시 된 것도 아니고 안된 것도 아니었다. 전직 대통령을 둘이나 감옥에 보낸 나라도 지구상에 찾아볼 수 없지만, 구시대의 비민주적 인물들이 그대로 살아남아 이렇게 활개치고 다니는 나라 또한 찾아보기 힘들다.

 

 

4. 민주화의 재평가

 

우리의 민주화 또는 이른바 87년체제의 한계는 너무나 분명했다. 그러나 민주화가 부정될 위기에 홀연히 등장한 촛불소녀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들을 탄생시킨 민주화를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한번 물어보자. “민주화돼서 살림살이가 나아지셨습니까?”라고. 87년 민주화항쟁 직후로 돌아가 월급봉투를 다시 꺼내보아야 한다. 6월항쟁에 뒤이은 7·8·9월 노동자대투쟁 동안 발생한 노동쟁의 숫자는 3천여건에 달한다. 이는 한국전쟁 정전 이후 1987년까지 일어났던 쟁의와 맞먹는 숫자다.4 이 대대적인 투쟁의 결과, 웬만한 사업장에는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 이렇게 세워진 노조를 통해 노동자들은 강력하게 분배를 요구했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이러다가 회사가 망하는 게 아닌가 하고 노동자 스스로 걱정할 정도로 급등했다. 파이를 키워야 한다는 명분하에 산업화 20년 동안 억눌렸던 분배가 민주화의 성과로 일순간 실현된 것이다. 동구 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전세계에서 민중운동이 퇴조했지만, 90년대 한국의 민중운동이 극히 예외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물적 토대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같은 노동자들의 소득증대는 당연히 서민가정의 구매력 상승으로 이어졌다. 과거 박정희는 민주화냐 경제발전이냐를 선택하도록 강요했지만, 87년 이후의 한국현대사는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90년대 이후 한국이 이룩한 경제성장의 상당부분은 민주화의 경제적 성과로 노동자 가정의 구매력이 급상승한 덕에 이루어졌다.

민주화의 성과 속에서 노동자들의 강력한 분배 요구가 관철되던 시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군사독재정권은 자신의 생존에 급급하여, 자본에 강력한 보호막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3당합당 이후, 보수대연합으로 국가권력이 나름대로 안정을 되찾으면서 이제 다시 자본에 방어막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또한 재벌들도 3, 4년의 시행착오 끝에 노동조합을 상대하는 방법을 익혀나갔다. 대기업은 노동조합을 현실로 인정하면서 노조 대의원들을 매수하는 것이 강성노조가 요구하는 대로 전체 노동자의 임금을 대폭 인상해주는 것보다 훨씬 싸게 먹힌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1998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분배의 정의가 작동할 수 있는 여지는 극히 축소되었다. 80년대말, 90년대초에 실현된 민주화의 경제적 성과를 누린 사람들은 대개 대기업 남성 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오늘날 민주노총의 주된 기반이 된다. 이들은 상당히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좀처럼 이직하지 않는다. 회사 역시 결원이 생겨도 그 자리를 정규직으로 메우기보다는 비용이 싸게 먹히는 비정규직들을 선호했다. 현재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6월항쟁에서 보수대연합까지의 짧은 기간에 얻어낸 분배의 성과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미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그 의미가 심각하게 퇴색됐지만, 당시는 상당한 수준의 분배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약효가 다한 지 이미 오래다.

민주화가 가져온 성과 중 기존의 민주주의 담론이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은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주화투쟁이나 노동운동 등 운동과정에서 목숨을 잃은‘열사’나 의문사를 당한 사람 또는 경찰의 폭력진압에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특별히 환기하고 싶은 것은 군대에서 사람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50, 60년대 한국군 사망자 수는 매년 1500~2000명에 달했고, 1970년대에는 1300명을 훌쩍 넘는 선이었다. 이는 베트남전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제외한 수치이다. 한국군의 연간 사망자 수는 1980년대에는 8백명 선이었다가, 1990년대 들어와서야 3, 4백명 선으로 줄었고, 21세기에는 1백명대가 되었다.5 이라크전쟁 5년간 사망한 미군의 숫자는 약 4천명으로, 연간 8백명 수준이다. 과연 1980년대 이전의 한국군이 남모르게 전쟁이라도 치렀던 것인가? 매년 1천명 안팎의 젊은 군인들이 전쟁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죽어갔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현대사의 비극이다. 한국군의 구조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1990년대 이후 사망자 수가 급감한 것은 민주화 이외의 다른 요인을 찾을 수 없다. 군사독재가 종식된 후 군은 더이상 성역이 아니었으며, 아주 제한된 범위이지만 민간사회가 군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로 부족한 점만 봐서 그렇지, 민주화가 이룬 변화의 의미는 엄청난 것이다. 이명박정권의 등장으로 지금 그 민주화가 위협받고 있다. 촛불은 민주화의 성과물로서 등장했을 뿐 아니라, 민주화의 성과물을 지키는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5. 반복되는 거리의 정치

 

우리는 한국현대사에서 왜 자꾸 운동정치 또는 거리의 정치가 주요 국면마다 나타나게 되는지 주목해야 한다. 지난 20여년만 돌이켜보더라도 1987년에 6월항쟁이 있었고 90년대에도 1991년의 이른바‘분신정국’, 1997년 초의 노동법 개악저지 투쟁 등에서 대중이 거리로 밀려나왔다. 2000년대 들어서는 2002년의 미선이-효순이 추모 촛불집회, 2004년의 탄핵반대 촛불집회가 있었고, 2008년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런 거리의 정치는 모두 대의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오작동했을 때 나타나곤 했다. 1987년 6월항쟁은 박정희의 유신쿠데타 이후 국민들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긴 데 반발하여 직선제를 요구한 것이었다. 2002년의 촛불집회는 길을 가던 두 여중생이 불쌍하게 죽었는데 그것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고, 또 우리 정부도 별다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지 못한 답답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 대하여 정치권이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고 별다른 대응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작되었다. 2004년의 촛불집회는 임기가 한달밖에 남지 않은 국회가 민의를 배반하여‘의회쿠데타’라 불릴 만한 대통령 탄핵을 감행하는 등 대의정치제도 자체가 오작동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다.

지난 20년간 거리의 정치의 주요 사례들은 모두 대의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났지만, 역설적으로 대의정치의 기본 메커니즘에 흡수되어 대중은 집으로 돌아갔고 투쟁은 잦아들었다. 1987년에는 군사독재정권이 예상을 뒤엎고 대중의 가장 직접적인 요구인 직선제를 수용했다. 이제 대중은 직선제로 민주적인 대통령을 뽑아 군사독재를 종식시킬 기회를 갖게 되었다며 집으로 돌아갔다. 2002년 촛불집회가 벌어진 시기는 연말의 대선을 앞두고 각 후보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때였다. 선거 결과,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라고 말하던 노무현(盧武鉉)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이제 새로운 대통령이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바로잡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촛불을 껐다. 2004년에는 국민들이 아예 새로운 국회를 만들어주었다. 그 결과 1988년 민주화가 시작된 후 최초로 여소야대 국면을 벗어나 집권여당이 단독 과반수를 차지했다. 여기에 5·16군사반란 이후 맥이 끊겼던 진보정당이 10명의 의원을 배출했다. 국민들은 대통령에 이어 의회까지 민주개혁세력의 지배 아래에 두게 함으로써 선출되는 중앙권력은 모두 위임해준 것이다. 그때 시민들은 민주개혁세력이 행정부와 의회를 장악했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정치를 펼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했는가? 1987년에는 양김씨가 분열함으로써 민주진영은 지려야 질 수 없는 선거에서 져버렸다.‘죽 쒀서 개 줬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2002년에는 불평등한 한미관계를 바로잡는 긍정적인 변화가 있기를 기대했으나,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반미감정 좀 가지면 어때?”라고 호기를 부리던 노무현 후보는 대통령이 되자 미국에 건너가 “미국이 아니었더라면 자신이 북한의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이라크 파병, 전략적 유연성의 수용과 주한미군의 성격 변화 그리고 한미FTA등에서 보듯이 한미관계는 기존의 군사동맹을 넘어 경제동맹, 가치동맹으로 심화되었다. 노무현정권 5년간 한미관계에는 지난 50년 동안 일어난 일보다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6 2004년 국민들이 축출의 위기에 놓인 노무현 대통령을 구해준 것은 무언가 새로운 정치를 한번 제대로 펴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노무현정권은 의회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별다른 개혁을 추진하지 못했다. 열린우리당은 어떤 의미에서는 한나라당보다 더 한나라당스러웠다. 노무현 대통령은 급기야 “한나라당과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에 대연정을 추진하겠다”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말한다.“빨리 집에 가면 안된다”라고. 혹자는 거리의 정치는 비정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국회에 맡기고 빨리 집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과연 지금의 국회와 정당제도가 촛불의 뜻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인가? 주위의 훈수꾼들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 촛불을 든 시민들 다수는 현재의 국회나 정당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면 어찌해야 하는가? 거리에서 언제까지 촛불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옛날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은 간절한 소원이 있을 때 촛불을 켜놓고 천일기도를 하기도 했다. 지금 많은 시민들은 국회에 맡기느니 차라리 길바닥에서 촛불을 들고 천일기도를 하자는 심경일 것이다. 아무리 길어야 4년 6개월이다. 대중이 쉽게 촛불을 끌 수 없는 이유는 과거 1987년, 2002년, 2004년과는 달리 촛불을 끌 수 있는 제도적 계기가 마련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선 세번의 대중적 진출(한번은 항쟁으로, 두번은 촛불집회로)과 2008년 촛불집회의 공통점은 모두 대의민주주의 제도가 민의를 반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이 2008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모두 대통령선거(1987, 2002)나 국회의원 총선(2004)이 임박했던 시기라는 것이다. 대중은 선거때 보자며 항쟁을 중단하거나(1987) 선거의 승리에 만족해 촛불을 거두었다(2002, 2004). 그런데 2008년의 경우, 대선은 촛불집회 5개월 전에, 총선은 한달 전에 이미 지나갔다. 대중으로서도 스스로 촛불을 끌 수 있는 제도적 계기를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시민들이 촛불을 끌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대신, 검찰과‘백골단’을 내세운 공안몰이 등 강경일변도로 대응하고 있다. 촛불이 장기화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6. 즐거운 촛불, 유쾌하고 자발적인 저항

 

지금까지 대중은 촛불집회가 오래 지속되어 조금 피곤하긴 하지만 무척 즐겁게 촛불을 들어왔다. 촛불집회의 축제적 성격은 계속 강화되어왔다. 1987년에는 차분히 촛불을 들고 자시고 할 겨를도 없었다. 2002년에는 추모집회라는 성격 때문에 매우 비장하고 엄숙하게 촛불집회가 진행되었다. 2004년 탄핵 첫날에는 사람들이 울부짖으며 격앙되었지만, 다음날부터는 “날 받아놨어. 니들은 그날 다 죽었어!”라는 승리의 확신 덕에 즐겁게 촛불을 들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밤을 새우지도 않았고 가족 단위 참가자도 많지 않았다. 2008년의 촛불은 축제이고 국민MT이고 해방구였다.‘유모차부대’라는 말이 상징하는 것처럼 소풍 나오듯, 마실 가듯 즐겁게 집회에 참여했다. 지금 겉으로는 촛불집회가 소강상태에 빠진 듯하지만, 시민들은 어떻게 좀더 일상적인 공간과 지역으로 파고들어가 즐겁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촛불을 들 것인가를 모색하고 있다.

2008년 촛불집회의 주요한 특징은 정당의 영향력이 전무하다시피 하고,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의 영향력은 급격히 쇠퇴했으며, 대중의 자발성이 놀라울 정도로 발휘되고 있다는 점이다. 1987년 6월항쟁은 국민운동본부라는 틀로 결집된 재야 민주운동세력이 주도했으며, 양김씨로 대표되는 정치집단의 가세로 대중적 기반을 넓힐 수 있었다. 2002년의 촛불집회 역시 여중생대책위에 모인 운동세력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대선이라는 정치적 국면이 촛불이 타오를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을 제공했다. 2004년은 사안 자체가 제도정치 영역을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으며, 정치권과 시민운동, 일반 시민 등이 자연스럽게 국회의원 선거로써 탄핵시도를 막아내려 했다.

2008년 촛불집회는 정당과 시민단체의 역할이나 지난 시기 운동의 경험이 미친 영향 등을 놓고 볼 때, 과거의 거리정치와도 다르고 또 서구의‘68혁명’과도 다르다. 촛불은 지리멸렬하던 진보진영이나 민주개혁진영에 희망의 불씨를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해결해야 할 만만치 않은 과제들을 남겼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집회현장에서 대중은 운동권에 대해 비우호적, 심지어는 적대적 태도를 보이는 등 전반적으로 불신을 표명했다. 발랄한 대중에게 운동권은 따분하고 재미없고 판에 박힌 말만 하고 게다가 권위주의적이기까지 했다. 이런 운동권이 판을 주도하려 하자 대중은 “저거 프락치 아냐?”라고 노골적인 야유를 퍼부었다. 시간이 지나며 기존 운동권과 아무런 상관이 없던 네티즌 그룹들도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깃발을 들고 나오게 되었지만, 초기에는 깃발이 거의 퇴출대상이었다. 21세기 대중이 보기에 운동권의 감성은 아직도 80, 90년대처럼 비장하고 엄숙한 것이었다. 마치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나타난 모짜르트와 쌀리에리의 차이, 경쾌함과 형식에 사로잡힌 무거움 같은 차이를 보인 것이다. 80, 90년대의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한 운동권에게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이명박정권이나 수구세력이 60, 70년대의 미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의 이같은 반응은 묵묵히 시민운동 또는 민주운동의 한 길을 걸어온 사람들에게 매우 억울하고 야속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중은 운동권 출신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문민정권’5년과‘민주정권’10년을 지내면서 운동권과 정치인을 동일시해버렸다. 이 시기에 많은 운동권 출신들이 운동경력을 기반으로 정계에 진출했다. 정계에 진출한 뒤 이들은 대중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들 중 일부는 구시대 정치인과 다를 바 없는 비리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이런 모습이 거듭되면서 대중의 생각은‘운동했던 사람도 별 수 없네’에서‘운동했던 사람이 오히려 더하네’로 바뀌어갔다. 정치권이나 운동진영이 맥을 놓고 있을 때 먼저 촛불을 든 시민들은 운동세력이 촛불집회의 전면에 등장함으로써 촛불의‘순수성’이 훼손될 것을 우려했다.

대중의 이같은‘순수성 콤플렉스’가 운동권 스스로 자초한 것이든 수구언론 탓이든 간에, 촛불집회는 운동세력에 대중과의 소통이 절실하다는 것을 깨우쳐주었다.‘명박산성’만큼은 아닐지라도 운동세력과 시민들 사이에는 어떤 장벽이 놓여 있었다. 대중의 입장에서는 그 장벽을 넘어 소통해야 할 필요성이 별로 없다. 그러나 운동세력으로선 이 장벽을 넘어 대중과 소통하는 것이 사활이 걸린 문제이다. 예컨대 과거청산 문제는 진보진영 전체에 아주 중요한 숙제였다. 박정희기념관을 짓겠다며 과거청산의 핵심과제들을 피해갔던 김대중정권과는 달리 노무현정권은 과거청산을 시도했다. 그런데 정작 여러개의 과거사위원회가 만들어지는 등 과거청산 운동이 제도 속으로 흡수되자, 과거사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은 제도화 정도에 반비례하여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제 몇몇‘선수들’외에는 과거사 문제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듯싶었다. 강풀의 만화 『26년』(2006)이 나온 것은 이런 시점이었다. 한물간‘진부’한 문제인‘광주’가 5·18과 8·15를 헷갈려하는 젊은 네티즌을 사로잡았다. 젊은 사람들은 “그‘전두환’이 바로 저‘전두환’이야?”라며 놀라워했다. 2007년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고 7백만 관객이 눈물을 흘린 사실은‘광주’가 결코 죽은 이슈가 아니란 점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진보진영의 주요 아젠다들은 죽은 이슈가 아니다.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대중의 가슴에 다가갈 수 있고 없고가 달라질 뿐이다.

촛불집회 현장에서 민주당은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운동진영 역시 학교에 비유하자면 교장선생이나 담임선생도 아니고 하다못해 반장도 못 되는, 주번 정도의 심부름이나 하고 있다. 운동진영의 자산은 헌신성, 창의성 그리고 투쟁성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촛불현장에서는 대중이 훨씬 더 헌신적이고 창조적이며 밤을 새워 즐겁게 투쟁하고 있다. 운동진영은 과거에 독보적인 비교우위를 점했던 분야에서 대중에게 오히려 뒤처지고 있다. 이 때문에 전문적인 활동가들의 지도력 또는 역할이 그 어떤 저항운동보다 최소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7. 자기이익을 위한 투쟁

 

지난 몇달간 촛불을 든 대중이 운동권에 거리를 두고 과거의 운동전통이나 문화를 거부한 이유는 한국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대중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운동진영은‘독수리 5형제’세대였다고 할 수 있다. 독수리 5형제의 사명이 지구를 지키는 것이었듯이, 1980년대 운동세력은 숭고하고 거대한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다. 그 시절은‘민주화’를 우리의 목표라고 하면 선배들에게 “너는 시각이 너무 좁아서 문제다”라고 비판받곤 했다. 민주화된다고 민중이 해방되는 것도 아니고, 민족의 자주성이 회복되는 것도 아니며, 갈라진 조국이 통일되는 것도 아닌데, 겨우‘민주화’가 목표냐며 구박받아야 했다. 이 불행했던 독수리 5형제의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은 민주화, 민중해방, 민족자주, 조국통일이라는 엄청난 과제를 실현하기 위해 이 한몸 기꺼이 다 바쳐야 했다.

21세기의 젊은이들은 어느 광고카피가 날카롭게 포착한 것처럼,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세대이다. 이들은 당당하게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추구한다. 80년대 같으면 극도의 이기주의자라고 비판받았을 젊은이들이 지금 촛불을 들고 있다. 자신의 이익이나 권리를 추구하는 것이 과연 비판받을 일인가? 이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익이나 권리가 사회 공동선 실현에 도움이 되느냐 저해가 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독수리 5형제 세대가 지난날의 방식에 빠져 떳떳하게 자기이익을 추구하면서 공동선의 증진을 모색하는 젊은이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면, 이는 스스로를 왕따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촛불집회 중에 진행된 화물연대 파업은 아마도 한국전쟁 이후 노동운동사에서 최초로 시민의 지지 속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며 마무리된 파업일 것이다. 화물연대는 정부가 쇠고기협상 결과를 발표하자 발빠르게 미국산 쇠고기 운송거부를 선언하면서 촛불과 결합했다. 화물연대는 시청앞 광장에 천막을 치고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나눠주는 한편, 자신들의 파업을 열정적으로 홍보했다. 집회에 참여하는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화물연대를 같은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터무니없이 오른 기름값도 한 요인이 되었지만, 화물연대의 적극적인 촛불집회 참여는 한국에서 보기 드물게‘시민의 지지’를 받은 파업을 낳았다.

한편 촛불현장에서 비정규직들은 여전히 소외되어 있었다. 이랜드 노조위원장의 말처럼 그들은 끝없이 타오르는 촛불을 보며 한없는 절망에 빠져들었다. 시민들이 이명박정부가 몰고 온 어둠을 거부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촛불을 들었을 때, 1년여 파업투쟁 끝에 전기도 가스도 끊긴 캄캄한 집에서 조합원 자녀들은 촛불을 켜고 숙제를 해야 했다. 조합원들은 아이들 생각에 차마 촛불을 들 수 없었다.7 오랜 투쟁에 지친 비정규직들은 자신들이‘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에 촛불광장에 선뜻 자신들의 문제를 들고 나오지 못했다. 촛불의 순수성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은 논점을 흐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원래 촛불이란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비정규직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짙게 드리운 어둠이다. 그런데 지난 몇달간 광장의 촛불은 건강권과 민주주의 같은, 보편적이기는 하나 아무래도 당장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절박한 위협을 받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더 호소력있는 과제를 중심으로 타오르고 있다.8 앞으로 촛불이 우리 사회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 오래오래 타오르려면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고통받는 이들 스스로 촛불을 들 수 있어야 한다.‘촛불과 비정규직이 만날 수 있는가’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문제이다.

촛불집회에서 그 역할이 축소된 것은 진보적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내로라하는 비판적 지식인들은 엄청난 규모의 대중 속에 그저 n분의 1로만 존재했다. 극소수의 광우병 전문가나 통상 전문가, 현장에서 자신들의 전문성으로 기여한 민변 변호사들,‘칼라TV’진행자로 맹활약한 진중권 교수 등이 예외였을 뿐이다. 촛불집회라는 정말 새로운 현상 앞에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혹시 아직도 대중을 지도하거나 그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려고 조급해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과연 진보적 지식인들이 촛불을 든 대중을 이끌 능력이 있기나 한 것일까? 촛불을 예상하지 못했던 지식인들은 처음 촛불을 든 소녀들 또는 대중에게 모든 것을 맡겨야 할 것이다. 조급해할 이유 없이 대중을 믿어야 할 것이다. 촛불집회에 참여한다면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대중이 사용하는 언어를 사용하면서, “대중을 따라서 좌고우면하지 말고 끝까지 터벅터벅” 가보자.9 촛불집회가 시작된 후, 우리는‘집단지성’이니‘다중(多衆)’이니‘68혁명’이니 하는 외국 사회과학 개념이나 사례연구를 끌어다가‘촛불집회’라는 전세계에서 유례없는 새로운 현상을 분석하려 한 글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비교하려는 68혁명 등은 “역사적 배경에서 지금 우리와 크게 다른데다, 나라마다 특유의 발전과정을 보이기 때문에 곧바로 비교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10 이 새로운 현상을 분석하는 데 서구 사회과학의 분석틀에 자꾸 기댄다면 역사의 구체성을 놓치기 쉬울 것이다. 촛불집회는 오히려 서구의 대가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이론이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현상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지 검증해보도록 요구하고 있다. 한국의 사회과학자들은 좀더 용감하고 과감해져야 한다. 이 새로운 현상을 한국의 역사적 맥락에서 분석하면서, 그 바탕을 관통하는 세계사적 보편성을 끌어내는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 이런 작업은 한국 사회과학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릴 것이고, 자기 사회에 대한 분석에서 나온 이론으로써 한국 사회과학의 세계화를 이룰 것이다.

지금 촛불은 잠시 사그러든 것처럼 보인다. 우리 주변에는 지친 사람도, 좌절한 사람도, 실망한 사람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초조해할 이유는 없다. 역사는 원래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촛불은 원래 우리가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운동진영이나 비판적 지식인들이 촛불이 타오르는 데 일 개인 이상의 역할을 한 것도 아니다. 촛불이 타오르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을 것이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어도 이명박정권이 저렇게 막무가내로 나가는데 만약 촛불마저 없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러니 그렇게 많이 촛불을 켰는데 쇠고기도 들어오고 이명박도 바뀌지 않았다고 억울해할 이유는 없다.

조·중·동 등 수구언론은‘무능한 진보’라는 담론을 만들어내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그러나 채 석달도 되지 않아 너무나 허망하게‘수구본색’이 드러나버렸다. 진보운동진영도 대중의 변화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했지만, 수구 기득권세력은 해도해도 너무할 정도로 대중의 상태를 읽어내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과거 그들이 수십년간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공안기관의 물리력을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다. 70, 80년대에는 중앙정보부나 안기부, 보안사 같은 정보기관이, 90년대 이후에는 검찰이 정권의 방패 노릇을 충실히 수행했다. 끝없이 타오르는 촛불을 보자마자 배후를 떠올리고 누가 돈을 대서 저 많은 양초를 샀냐고 묻는 것이야말로 국가보안법을 자기정체성의 근원으로 삼는 자들의 전형적인 태도이다.11 일본을 방문했을 때‘일본 국민과의 대화’를 마다하지 않은 이명박 대통령은 “소통이 문제”라고 하면서도 한사코 국민과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다. 자기 돈으로 촛불을 사고, 돗자리까지 들고 나와 밤을 지새우는 촛불시민들과 무조건 배후를 떠올리는 이명박 대통령은 굳이‘명박산성’을 쌓지 않더라도 쉽게 소통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주변에 초조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작 진짜 초조해해야 할 사람들은‘명박산성’너머에 숨어 있는 수구세력이다.‘잃어버린 10년’이란 구호를 외치던 자들은 “어떻게 잡은 정권인데 석달도 안되어 들어먹게 생겼다”고 대통령을 원망하고 있다. 『조선일보』에조차 “잘못 보았다”“우리가 속았다”같은 이야기가 지면에 오르내리고 있다.12 7.4%까지 내려갔던 이명박의 지지율은 일시적이나마 20% 선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이런 지지율 회복은 떠나간 민심이 되돌아온 것이 아니다. 18대 총선을 거치면서 돌아섰던 박근혜 추종세력이 “이명박도 밉지만 촛불은 위험하니 일단 보수세력이 힘을 모아 끄고 보자”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회복된 것일 뿐이다. 68혁명 당시에는 저항세력이 바리케이드를 쳤다. 그런데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볼 때 장기전이 되면 분열하는 것은 바리케이드 안쪽이다. 2008년 한국에서 바리케이드를 친 것은 이명박정권이다. 촛불이 일시적으로 소강상태를 보이는 지금, 명박산성 안은 분열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민주국가라고 불리는 많은 나라들은 대의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친숙한 대의민주주의란 대개 19세기에 기본틀이 잡히고, 2차대전이 끝날 무렵에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후 세상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경제수준은 놀랄 정도로 향상됐고 그에 따라 교육수준 역시 1940년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1940년대에 전세계에 한두대 있을까 말까 했던 수준의 고성능컴퓨터를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노트북으로 들고 다닌다. 그런데 대의민주주의 제도는 이런 변화를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세계 각국은 투표율의 극단적인 저하로 대변되는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촛불시위에 대해서‘비정상적인 거리의 정치’라는 비판도 강하다. 그러나 정당과 선거와 의회가 시민들의 뜻을 원활히 반영하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에서 거리의 정치는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성을 띨 수밖에 없다.13

많은 사람들의 지적대로, 한국이 세계 최고의 정보통신기술을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촛불집회는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직접 참여한 대중이 토론으로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촛불집회는 직접민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전국민이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란 여전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촛불집회 같은 직접민주주의나 거리의 정치가 대의민주주의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촛불집회는 위기에 빠진 대의민주주의 제도에 활력을 불어넣는 보완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석달째 지속되는 자발적 평화시위로서의 촛불집회는 지금까지만으로도 세계사적인 사건이다. 꼭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더라도 대의제를 민의의 변화에 좀더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변화시키는 것은 민주주의 발전사가 당면한 과제이다. 지금 장기화되는 촛불은 이 과제의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때 유행했던‘한류(韓流)’가 대중가요나 드라마에만 국한되란 법은 없다. 대중의 역동적 참여로써 우리는 지금‘민주주의의 한류 창출’이라는 긴 실험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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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경구 「김근태 “국민이 노망 든 게 아닌가” 구설수」, 『프레시안』 2007.11.26.
  2. 진보논쟁에 대해서는, 강명구 「진보논쟁, 무엇을 놓치고 있는가」, 『인물과 사상』 2007년 4월호; 김성칠 「소위‘진보논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정세와 노동』 2007년 4월호 참조.
  3.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 연표』, 2006.
  4. 연도별 노동쟁의 통계는 김동춘 『한국사회 노동자 연구』, 역사비평사 1995, 58면 참조.
  5. 군대내 사망사고 통계는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자료집 『군내 자살처리자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2006) 6면 참조.
  6. 정욱식 『21세기의 한미동맹은 어디로?』, 한울 2008, 21면.
  7. “광화문 뒤덮은 촛불물결 보며 절망했다”: 〔인터뷰〕 파업 1년 맞은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 『프레시안』 2008.6.24.
  8. 박노자 「촛불 안에도 두개의 사회 존재한다」, 『오마이뉴스』 2008.7.25.
  9. 김훤주 「광우병 국면에서 운동권이 남길 성과는?」, 경남도민일보 블로거 기자단 『김주완·김훤주의 지역에서 본 세상』(http://100in.tistory.com/220) 2008.6.12.
  10. 유재건 「서구의 68혁명을 떠올리며 촛불을 본다」, 『창비주간논평』 2008.7.16.
  11. 국가보안법 정체성에 대해서는, 졸고 「21세기의 망령 레드콤플렉스-국가보안법에 갇힌 대한민국」, 『경향신문』 2008.8.1 참조.
  12. 최보식 「과연 속았을까?」, 『조선일보』 2008.7.9.
  13. 이남주 「‘거리의 정치’, 비정상과 일탈이 아니다」, 『창비주간논평』 2008.6.18.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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