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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과 현장

 

화해의 장벽

2008 동아시아의 비판적 잡지 회의 후기

 

천 꽝싱 陳光興

대만 자오퉁(交通)대 사회문화연구소 교수, 『인터아시아 문화연구』(Inter-Asia Cultural Studies: Movement ) 주간. 우리말로 번역된 책으로『제국의 눈』이 있다.

* 이 글의 원제는「和解的路障: 二OO八東亞批判刊物會議後記」이며, 본지와 함께『대만사회연구』에도 게재될 예정이다-편집자.

 

 

1

 

월요일(2008년 5월 26일) 한 무더기로 대만대학 맞은편 베트남식당에서 오찬을 마친 후, 나는 직접 차를 몰아 손님들(『창작과비평』 주간 백영서, 『케시까지け-し風』 주간 토리야마 아쯔시, 『겐다이시소오現代思想』 주간 이께가미 요시히꼬)을 타오위안(桃圓) 공항까지 배웅했다.

그날 줄곧 그칠 듯 말 듯 비가 내려 사람들은 어디서 우산을 구해야 할지 몰랐다. 차에서 내린 오랜 벗 이께가미 요시히꼬(池上善彦)가 내게 말했다. 이 우산 두고 갈 테니 자네가 쓰게. 나는 웃으며 고맙게 받았다. 그는 대만이 세번째다. 이번에 사흘을 묵었는데 차에 탈 때 보니 가방이 보이지 않았다. 뜻밖에도 그는 짐이 없다며 웃는 것이었다. 내가 옷은 어떻게 갈아입냐고 묻자, 그는 자신의 몸을 가리키며 입고 있는 게 다라고 말했다. 일본 좌파낭인의 전통인가. 발길 닿는 대로 살아가는. 그는 인간관계가 넓다. 엄숙한 학자에서 공원의 노숙자에 이르기까지, 토오꾜오에 가면 어느 업계의 사람을 찾든 이 친구만 통하면 문제없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아마 1996년일 것이다. 그후 내가 토오꾜오에 갈 때마다 그는 자기 패거리들을 불러냈다.‘타께우찌 요시미를 읽는 모임’(竹內好を讀む會) 친구들을 불러내어 신주꾸역 근처 스시집에 모여 청주에 거나하게 취하면 떼지어 카부끼쪼오(歌舞伎町)를 돌아다녔다. 그는 17년 전부터 『겐다이시소오』 주간을 맡고 있다. 일년에 열두호를 내고 그밖에도 대여섯차례 특집호를 낸다. 일본의 소규모 회사들이 그렇듯 좀처럼 쉬는 날이 없다. 그런 그를 볼 때마다 안된 마음이 들던 차다. 타이뻬이로 불러낸 것도 이참에 그를 좀 쉬게 하려는 심사였던 것이다! 자신의 동아시아화를 한층 진일보시키기 위해 몇년 전 그는 한국어와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이번에 그는 특유의 액센트를 띤 푸퉁화(普通話)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늙었네. 우리 모두 늙었어!

이번에 타이뻬이에 온 오끼나와의 이웃 토리야마 아쯔시(鳥山淳)는 모두의 사랑을 받았다. 발언할 때도 적극적이어서 군소지역에서 온 사람의 주눅 든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원래는 『케시까지』의 또다른 주간 오까모또 유끼꼬(岡本有紀子)를 부를 계획이었지만, 임시로 그가 대신 왔다. 이전에 그의 아주 세련된 글을 읽은 적이 있어(영문으로 번역되었다) 그의 사유에 대해서는 익숙한 터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오끼나와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두번 가봤을 뿐이다. 그러나 오끼나와에 나는 특별한 느낌을 갖고 있다. 그곳의 풍토와 인심은 일본과 다르다. 사람들은 모두 아시아 대도시에 사는 사람보다 자유롭고 진솔하며 그곳은 고향 같은 느낌을 주는, 경제가 발전하기 이전의 마카오 같은 데다. 야심을 품은 사람들은 홍콩, 대만으로 떠나갔고 남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상냥하고 친근한 이들이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온갖 방식(달걀 혹은 고기와 볶거나 얼린 뒤 썰어 쌜러드로 만듦)으로 요리한 오끼나와의 명물 고오야(苦瓜), 그리고 특이한 맛의 독주였다. 토오꾜오, 타이뻬이 등에서도 나는 적지 않은 오끼나와 친구들을 만났다. 『엣지』(EDGE)의 주간 나까자또 이사오(仲里効)는 그 지역에서 존경받는 사상가이자 작가이며 또한 사진가였다. 신조오 이꾸오(新城郁夫)는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인물로, 타이뻬이에도 온 적이 있었다. 전에 아베 코스즈(阿部小凉)를 불러 함께 샹하이에서 열리는 『인터아시아 문화연구』 회의에 참가한 적이 있다. 막 토오꾜오의 국제기독교대학으로 간 타나까 야스히로(田仲康博) 역시 문화연구 관련 회의에서 종종 만나는 친구다. 토리야마와는 처음 만난 터라 다소 서먹했다. 떠나는 날 아침식사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푸화원자오(福華文敎)회관 식당에서 몇마디 나눌 수 있었다. 일본,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언어소통 면에서 자신의 뜻을 완전하게 전달할 수는 없었지만, 마음의 소통은 늘 정신과 느낌 그리고 열정의 상호감염을 통해 진행되는 법, 마침내 서로가 생각이 통하는 친구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며칠간 같이 점심을 먹은 터라, 떠나기 전 그에게 대만 음식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하오츠(好吃).” 듣자 하니 이께가미에게서 배운 말투다.

백영서(白永瑞)와는 2001년 전후로 알게 되었다. 당시 대만중앙연구원(臺灣中央硏究院) 방문학자로 대만에 반년간 와 있던 그를 내가 주관하는 아시아연대 심포지엄에서 만나 우연히 알게 되었고, 금세 친해졌다. 이번에 그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지난주 화요일(5월 22일) 백낙청(白樂晴) 선생과 함께 와서 인터뷰, 강연, 토론을 했다. 이께가미나 토리야마와 달리, 백영서는 대만의 오랜 손님이다. 6월초부터는 다시 한학쎈터(漢學中心)에 석달간의 일정으로 체류중이다. 그는 진정한‘동아시아인’이다.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 영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늘상 동아시아 각지를 누비고 다닌다. 일본과 중국대륙 각지에서 비교적 오랜 기간 체류한 경험도 있다. 그의 폭넓은 인간관계의 도움을 받고자, 『대만사회연구(臺灣社會硏究季刊)』는 2004년부터 그를 정식 편집위원으로 영입했다. 서울에서도 그는 여러 곳에 몸담고 있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 외에도, 2006년부터 『창작과비평』 주간을 맡아 잡지 및 단행본 편집일을 하고 있으며, 연세대 국학연구원 원장이기도 하다. 글은 글대로 회의는 회의대로 감당하면서도 좀처럼 피곤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다. 일반적인 한국 남자들과 달리 격의 없고 자유로워 나의 학생들과도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고 노래 부르고 춤도 춘다. 요 몇년 그는 국제주의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인터아시아 문화연구』 격년간 회의는 늘 경비가 부족한 편인데, 그때마다 그가 나타나 힘이 됐다. 지난번 샹하이회의 때도 그가 동분서주하여 힘을 쓴 결과 비로소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서아시아의 친구들을 불러올 수 있었다. 대만에도 종종 오기 때문에 여기저기 맛있는 곳을 잘 안다. 그는 잘 먹고 술도 잘 마신다. 회의 첫날 밤 와인 세 종류를 섞어 마셔 다음날 두통으로 쩔쩔매던 나에 비해, 맥주로 시작하여 와인 그리고 얼꿔터우(二鍋頭)로 마무리한 그는 다음날 멀쩡하게 일어났다!

한참 이야기하고 나니 다 술 이야기다. 동아시아 남자들의 문화 같지만 사실 꼭 그렇진 않다. 나의 대만, 대륙, 한국, 일본 등의 페미니스트 여성친구들은 모두 남자들보다 술을 잘 마신다(욕먹을지 모르니 거명은 않겠다). 다만 말하고 싶은 것은, 술을 매개로 하는 교제의 역사는 종종 가려져 토론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식, 감정, 믿음, 서로에 대한 이해와 애정은 사실 어느 곳에서든 음주의 역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런 성격의 회의가 조직될 수 있는 기초는 회의 내용이나 구조 자체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평소 바쁜 일상에 얽매여 이삼일의 시간을 내는 것조차 매우 힘든 이 편집자들에게 음주 역사의 정서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번 회의의 동력은 찾지 못했을 터다. 회의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이 회의 주제와 관계를 맺게 되는 데는 서로 다른 역사가 있으며, 거기에는 불균형적이고 비균질적인 정서적 요소가 개입한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맞게 될 결과를 영원히 예측할 수 없다. 경험으로 보아, 분명한 목적을 가지려 하면 할수록, 전체 구조를 장악하려 하면 할수록 결과는 더 비관적이다. 틀은 갖되 느슨하게 유지하고 열어두면, 회의는 오히려 기대 이상의 효과를 얻게 된다. 이번 회의 역시 그랬다.

 

 

2

 

배웅을 마치고 신주(新竹)로 돌아오는 길에 한바탕 장대비를 만났다. 한주간의 피로가 말끔히 씻겨내려간 듯했다. 이번 학기의 가장 중요한 일을 마치고 나니 긴장이 풀어졌는지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았다. 오후 내내 정신과 육체가 따로 노는 듯, 온몸이 나른했다. 그러나 대뇌의 휴식을 방해하기라도 하는 듯, 뇌리 한켠에서는 회의의 한막 한막이 마치 영화 장면처럼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이것은 내가 두번째로 조직하고 세번째로 참가한 아시아간행물회의다.1 2000년 12월 『인터아시아 문화연구』 회의의 일환으로 ARENA (Asian Regional Exchange for New Alternatives, 새로운 대안사회 건설을 위한 아시아 교류)의 지원하에 개최된 후꾸오까(福岡)의 큐우슈우(九州)대학 회의 당시, 잡지연대 논단 부분을 담당해 추진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아주 간절하고도 중대한 임무였다. 아시아 각지의 지식계를 연결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각지의 잡지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일 텐데, 각 잡지 주변에는 대체로 각각의 지식인집단이 있고 잡지는 사실 그들의 중요한 전략적 기반이라, 주간들끼리만 서로 알게 되어도 아시아의 비판적 지식계의 연합은 가속화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통로와 관계를 통해 우리는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잡지의 주간과 대표들을 초청했다. 12월 1일 오후 3시, 회의는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삐봅 우도미띠뽕(Pibop Udomittipong)은 태국의 『빠짜라야사라』(Pacarayasara)의 주간이고 이께가미 요시히꼬는 『겐다이시소오』의 대표이며, 오랜 친구이자 일본‘중생대(中生代)’좌파의 지표 격인 사끼야마 마사끼(崎山政毅)는 운동과 사상 그리고 국제연대를 결합한 『임팩션』(Impaction)의 대표였다. 『창작과비평』에서는 김영희(金英姬)가 나왔다. 대륙에서 온 두명의 주간 역시 나의 오랜 친구였다. 중국사회과학원의 사회학자 황 핑(黃平)이 『뚜슈(讀書)』의 주간이었고, 동아시아에서 최대의 동력을 가졌다는 허 자오톈(賀照田) 사회과학원 문학연구소 연구원은 『학술사상평론(學術思想評論)』의 주간이었다. 운동에 오랜 기간 참여해온 링난(嶺南)대학 문화연구과의 류 젠즈(劉健芝)는 ARENA의 기관지 『아시아교류』(Asian Exchange) 대표로 참가했다. 라틴아메리카 지식계에서 활동하는 인물도 있었다. 베네수엘라중앙대학 전지구화 및 사회문화변천 쎈터의 다니엘 마또(DanielMato) 역시 이 회의에 참가했다.2

사회를 맡은 나는 이 회의가 갖는 역사적·상징적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언어의 장벽 탓에 모든 발언은 그 자리에서 일본어 및 영어로 동시에 번역되어야 하는만큼, 나의 심리적 부담은 무척 컸다. 심지어 의사소통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 겁이 나기도 했다. 첫 만남임을 고려해 각 잡지들은 자신의 역사, 입장, 출판상황 그리고 각자의 사회에서 처한 위치에 대해 보고했다. 긴장된 상태가 세시간 후 회장을 꽉 메운 참여자들의 박수 소리와 함께 원만하게 종결되었다.

애초에는 『인터아시아 문화연구』가 이 회의의 총책임을 지되, 이후 각지에서 잡지의 핵심인물들이 만나 신뢰가 쌓이고 자연발생적 관계가 성립되며 또 번역을 통한 합작이 이루어지면, 더이상 『인터아시아 문화연구』의 협조가 필요치 않게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몇년간 전면적 발전이 없었다. 다음 모임 때까지 개별 잡지들과 비교적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것은 역시 『인터아시아 문화연구』였다.

2006년 『창작과비평』의 창간 40주년 기념회의가, 백영서 주간의 기획하에‘동아시아의 연대와 잡지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6월 9일 서울의 프레스쎈터에서, 10일에는 연세대로 옮겨서 진행되었다. 초청받은 잡지로는 오끼나와의 『케시까지』(오까모또 유끼꼬), 『대만사회연구』(천 이중陳宜中), 『뚜슈』(왕 후이汪暉), 『민젠(民間)』(주 젠깡朱建剛), 『겐다이시소오』(이께가미 요시히꼬), 『임팩션』(토미야마 이찌로오富山一郞), 『세까이(世界)』(오까모또 아쯔시岡本厚), 『젠야(前夜)』(서경식徐京植), 『인터아시아 문화연구』(필자) 그리고 한국의 『황해문화』(김명인金明仁), 『여/성이론』(고정갑희高鄭甲熙), 『시민과세계』(이병천李炳天), 『창작과비평』(이남주李南周)이었다.3 『창작과비평』이 한국에서 차지하는 위치 때문인지, 이 회의는 서울에서도 광범위한 주목을 받았다. 언론보도 외에도 대통령 직속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이 토론자로 참석하기도 했다.

초청 당시 이 회의에서는 몇개의 주요한 토론방향이 제시되었다. 첫째, 동아시아 평화는 각 지역의 변혁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둘째, 각 지역에서‘진보’는 무엇을 의미하며 지금도 여전히 현실적 의미를 갖고 있는가? 셋째, 동아시아 통합에서 한국은 어떤 위치를 점하는가? 특히 남북 분단체제의 극복을 위한 노력과 지역은 어떤 관계를 갖는가? 넷째, 동아시아 평화의 장애물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어떻게 연대를 형성할 수 있으며 비판적 잡지는 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모든 회의가 그렇듯, 문제설정은 대부분 현장의 우선적 의제를 반영한다. 회의를 조직한 백영서가 평가회의에서 말했듯, 회의과정에서 두번째 문제는 충분히 토론되지 못했다. 아마도‘진보’가 한국사회에서(만약 그것이 있다면) 특정한 지적 맥락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06년초 한국 진보진영에서‘어떻게 진보를 재구성할 것인가’에 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1987년 이래‘진보’이데올로기를 내세워온 민주운동이 노무현정권하에서 그 개혁성을 좌절당한 상황에서,‘진보’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가 문제로 떠올랐던 것이 그 주요한 배경이었다. 그러나 이런 배경과 절박한 위기의식은 다른 참여자들과 공유되지 못했다.4 솔직하게 말해, 회의에 참가한 나 역시 세번째 문제인‘분단체제’에 관해서는 극히 표면적인 수준에서만 이해하고 있었다. 2008년 이번 회의를 기해 백낙청 교수의 관련저작을 충분히 열독한 후에야 점차 그 사상적 층의 깊이를 파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2000년 후꾸오까회의가 그저 서로간의 존재를 인식하는 데 그쳤다면, 2006년의 회의는 조금 진일보했다. 잡지가 어떻게 진보적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는 공통된 의제가 토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008년의 회의에서야 세번째와 네번째 문제가 비로소 깊이있는 토론 속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창작과비평』의 조직력이었다. 이 역시 지역 잡지들의 물질적 기초간의 거대한 격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3

 

앞서 열렸던 두차례의 회의를 기초로, 참여 잡지들은 기본적으로 이미 서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 덕에 2008년 『대만사회연구』 20주년 기념 동아시아의 비판적 잡지 회의 때는 자기소개 단계를 생략하고, 의제토론을 더 진전시킬 수 있도록 기획했다.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만사회연구』 내부에서 기획한 몇개의 활동 중 내가 맡은 것은 5월 하순의 국제회의였다. 그것은 취 완원(瞿宛文)이 맡은 9월 하순 회의를 위한 준비회의인 셈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과거의 회의에 모두 대표자만 파견했기 때문에 『대만사회연구』 내부에 참여경험이 있는 구성원은 소수였던 것이다. 대부분의 성원들이 이런 토론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대만의 비판적 지식인들은 이 회의에서 어떤 수확을 얻을 것인가. 이런 물음을 전제로, 회의의 총체적 위상은 상호‘학습’, 즉 서로 다른 사회적 배경에 처한 잡지들이 직면한 곤혹스러운 모순의 핵심을 이해하는 것에 놓였다. 이런 문제에 초점을 둔다면, 각 지역 잡지의 주간들과 회의에 참여한 대만의 벗들 및 청중이 적어도 과거엔 생소했던 지역성 문제를 배울 수 있을 것이었다. 이런 고려에서 동아시아 화해의 장벽과 관련하여 대만해협 양안, 남북한, 오끼나와라는 세개의 의제가 토론의 주축으로 선정됐다. 그렇게 2006년 서울회의에서 제시되었지만 제대로 토론되지 못했던 네번째 문제가‘화해의 장벽-동아시아의 비판적 잡지 회의’라는 주제로 재구성된 것이다.

2007년 12월초, 우리는 백낙청 교수에게 기조강연을 부탁하고 다음 잡지들에 초청장을 보냈다. 오끼나와의 『케시까지』(오까모또 유끼꼬), 한국의 『창작과비평』(백영서), 대륙의 『뚜슈』(예 퉁葉彤)와 『난펑촹(南風窓)』(닝 얼寧二), 일본의 『겐다이시소오』(이께가미 요시히꼬)와 『임팩션』(토미야마 이찌로오), 대만의 『쓰샹(思想)』(첸 융샹錢永祥) 및 동아시아에 걸쳐 있는 『인터아시아 문화연구』. 이들은 흔쾌히 초청을 수락했다. 『대만사회연구』 내부에서는 편집주간 쉬 진위(徐進鈺)가 발표를 맡기로 했다. 명단만 보면, 대부분이 이전 회의에 참여한 적 있는 잡지들이다. 비교적 특수한 경우가 『대만사회연구』의 편집위원 백영서와 허 자오톈이 각각 한국의 『역사비평』과 꽝저우(廣州)의 『난펑촹』을 추천하여, 광대한 독자군을 가진 잡지들을 대만 및 동아시아 지식계와 접속시킨 점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회의의 기획과 실제로 개최된 회의 사이에는 많은 조정과 낙차가 존재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번 회의에서는 초청받은 잡지들이 빠짐없이 모였고, 참석인원 면에서도 커다란 변동이 없었다. 아마도 이는 과거의 성과가 누적된 결과일 것이다. 참여인원간에 상호이해와 신뢰가 있어 회의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조직될 수 있었다.

물론 가장 흥분되는 것은 『창작과비평』의 창간자이자 서울대 명예교수인 백낙청이 기조강연을 맡아준 것이었다. 명성과 공신력을 기반으로 최근 6·15공동위원회 남측대표로 활동해온 그는 남북한 화해과정에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90년대부터‘분단체제론’을 제출한 바 있어, 동아시아 전체를 통틀어 우리 회의의 기조강연자로서 그보다 더 적합한 인물은 없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백낙청 교수와 알고 지낸 지는 10년이 넘는다. 전에 서울에서 여러번 만난 적이 있지만 멀리서만 앙모(仰慕)할 뿐 깊이있는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다. 이번에 그의 사상의 깊이와 미세한 결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든 진정성과 광활한 흉금을 처음으로 맛본 셈이다. 이런 모처럼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던 우리는 정식회의의 기조강연과는 별도로, 2008년 사상·역사·문화 고등강좌 교수로 그를 초빙하여 두차례의 공개강연 자리를 따로 마련했다. 하나는‘전지구화시대 제3세계와 민족문학 개념의 함의’였고 다른 하나는‘서양 고전의 지구적 접근을 향하여’였다. 그밖에도 대만 문화연구자들과의 대화 자리도 마련했다. 그의 내방을 충분히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칭화대(淸華大) 대학원에 한 학기 과정을 개설하여 그의 관련저작(한국 당대 민족문학의 대표작가 황석영의 소설을 포함하여)들을 읽었던 터다. 이번에 그와 일주일간 조석으로 마주하면서, 나와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그를 가까이 이해할 수 있었다. 백교수는 회의 개막강연, 그러니까 대만을 떠나기 전날까지 우리와 친구처럼 어울렸다. 그때 그는 우리에게 더이상 저 높은 곳에 있는‘대학자’5가 아닌, 진정한 친구가 되어 있었다.

회의의 방향과 발표자를 정한 후, 남은 중요한 문제는 참여와 토론의 질을 높이는 문제였다. 『대만사회연구』 20주년 회의인만큼 응당 『대만사회연구』의 동인들이 회의의 참여주체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대체로 각자의 장점에 따라 역할을 분담했다. 2인 1조 토론자 지정이라는 원칙하에 사람들을 주제에 맞게 안배했고 바깥에서도 토론 및 사회자를 초빙했다. 기획 당시도 그랬지만 오랜 준비과정에서 우리에겐 어떤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대만사회연구』로서는 집단적으로 외부 손님을 맞는 첫 경험이니, 예기치 못한 문제에 부딪힐 수 있다는 것이었다.

 

 

4

 

2007년, 더욱 안정된 운영과 동인(同人)간의 더욱 확대된 협력을 위해, 『대만사회연구』는 스신(世新)대학과 공동으로 대만사회연구국제쎈터를 만들고 이 학교 사회발전연구소의 황 떠뻬이(黃德北) 소장을 쎈터의 주임으로, 『대만사회연구』의 사장 샤 샤오주안(夏曉鵑)을 부주임으로 추대했다. 쎈터의 주요활동 중 하나가 국제회의 개최였으므로, 이번 회의의 기획과 진행은 이 쎈터에서 맡게 되었다.

5월 24일 회의 당일, 머우 쭝찬(牟宗燦) 총장 주도로 개막식이 거행되었다. 머우 총장은 마침 해외에 있다 이 회의를 위해 급히 귀국함으로써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이어서 백낙청 교수의 기조강연. 라이 띵밍(賴鼎銘) 교무장이 사회를 보고 천 이중과 내가 답사를 했다. 강연에서 백낙청은 2차대전 후 동아시아 국제정세에서 시작하여 중국과 기타 국가들과의 관계에 주목했고, 특히 남북한, 남북베트남, 양안간의 분열에 미국이 가한 거대한 영향력에 대해 분석했다. 이어서 한반도에 고도의 씨스템을 갖춘‘분단체제’가 어떻게 단계적으로 고착화되었는지 설명했는데, 그 핵심은 모든 체제가 부단히 자기재생산의 운영논리를 형성했다는 데 있었다.

그는 남북한 분단의 성격이 다른 나라의 역사경험과는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전형적인 반식민전쟁을 벌였던 베트남에서는 프랑스가 물러나면서 미국이 개입했고 마침내 베트남전쟁에서 미국을 물리침으로써 분열이 종결되었다. 또한 분열되어 있던 동서독은 냉전 종식과 함께 통일을 선언하게 되었다. 중국의 기본모형은 일국양제(一國兩制)를 통한 전(前) 식민지(홍콩)의 재통합이다. 이런 경험들과 달리, 남북한의 분단체제는 상당히 완고하다. 1972년 이미 자주·평화·민족대단결 원칙을 선언한 7·4남북공동성명을 이루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후 구체적 진전은 없었다. 2000년 두 지도자의 정상회담에 와서야 비로소,‘종국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가연합(confederation) 혹은‘낮은 단계의 연방’(low-stage federation) 형식의 과도적 중간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데 쌍방이 동의했다.

백낙청은 통일과정에서 민중의 참여가 무엇보다 관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민중의 역량이 있어야만 기존의 완고한 구조를 해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전의 단계는 극도로 느리다. 그는 눈앞의 위기가 장기화될 수 없는 핵심사항으로는 세가지가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북미간의 강한 적대감이 극복되고 있는 것, 둘째는 남한이 경제회복을 위해서라도 대북관계를 개선해야 하는 것, 셋째는 남한을 배제하고 북미회담으로 한반도문제를 처리하는 방식(通美封南)을 북한도 끝까지 고수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남북한의 경험으로 보아 최악의 선택은 현상유지(status quo) 시도이며 반드시 지역이라는 틀로 현실정치 문제에 대면해야 한다고 그는 지적했다. 이 지역적 틀이‘주권’문제를 약화하고 동시에 다각적 협력과정에서 분단체제가 유연해질 때 비로소 비폭력적 국면으로의 전환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대륙과 대만 문제에 대해서도 견해를 제출했다. 우선 그는 남북한의 경험과 분단체제론을 양안관계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륙의 입장에서 볼 때 대만은‘미완의 역사적 임무’로서 결코 남북한처럼 대등한 분열상태가 아니다. 줄곧 중화제국의 주변적 위치에 처해 있던 대만은 1895년 일본에 할양된 이래 대륙정권의 직접적 통치를 받은 적이 없으므로 평화적·점진적 방식이 가장 좋다. 한편 대만으로서는 반드시 중국대륙과 안정(settlement) 국면을 달성해야 하며, 그 안정 국면은 반드시 고도의 창의적 과정을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 광범위한 민중의 참여를 이룰 수 있다면 결국 동아시아지역 전체에 상당히 긍정적인 발전을 가져올 것이다.6

백낙청의 발언은 회의방향을 결정지었다. 이후 각 쎄션에서의 토론들은 그가 제출한 각종 문제들로 부단히 되돌아오곤 했다.

오후 쎄션의 주제는 전체 회의의 클라이맥스인 오끼나와였다. 오끼나와는 대만 바로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2차대전 후 거의 우리의 시야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오끼나와가 처한 곤경에 대한 인식과 미군기지에 반대하는 강력한 에너지는 지역관계의 변화를 추동할 강력한 잠재역량이다. 이 기회에 오끼나와 문제를 대만 비판적 지식계의 문제의식 안으로 가져오는 것은 이번 회의 조직의 동기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쎄션은 토리야마 아쯔시와 이께가미 요시히꼬의 발표, 허 춘루이(何春蕤)의 사회로 진행되었고 토론자로는 『대만사회연구』의 천 신싱(陳信行) 외에 대만의 민중사 작가이자 샤차오연합회(夏潮聯合會)7 회장 란 뽀저우(藍博洲)를 초청했다. 란 뽀저우는 오끼나와에 대해 상당한 이해를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8 토리야마의 글은 1972년, 이른바 오끼나와의 일본‘복귀’논쟁을 기점으로 삼아 1879년 일본정부의 류우뀨우왕부(琉球王府) 강제 해체 및 오끼나와현으로의 편입에 대해 논한 후, 1995년 오끼나와 내부에서 (내지內地와의) 사회구조적 차이와 변화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어 미군기지의 지속적 점유에 저항하게 되기까지를 분석했다. 그의 논점의 핵심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오끼나와 문제는 일반적인 이해와 달리 일본 국내의 문제가 아니며, 식민지 지배의 문제이자 미일연합의 오끼나와 점령 및 침략의 문제라는 것이었다.9 이께가미의 발표는 주로 1995년 미군의 오끼나와 소녀 폭행사건 후 일본 지식계가 어떻게 오끼나와 문제를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는지에 집중하고, 그 과정에서 『겐다이시소오』가 디딤돌 역할을 한 것, 이를테면 오끼나와지역 지식인의 글을 게재하고 토오꾜오와 오끼나와 지식인의 연대를 추동한 과정에 대해 보고했다.

이어지는 쎄션은 『임팩션』의 대표이자 오끼나와 사회사학자인 오오사까대 교수 토미야마 이찌로오가 오끼나와 근대사와 지역경제 문제를 발표했고, 『대만사회연구』 주간 쉬 진위가 양안 경제통합과정에서 출현하는 복합적 문제가 장래 양안화해에 가져올 곤경에 대해 발표했다. 대만의 주요 정치학자이자 대만대 정치학과 교수인 주 윈한(朱雲漢)이 사회를 맡고 『대만사회연구』 취 완원과 웨이 띠(魏嶔)가 토론했다.

1970년대, 즉 미일안보조약 반대운동 후반에 성립된 『임팩션』은 운동성이 매우 강한 격월간지다. 직업운동가와 대학의 운동권 지식인을 결합시켜 현실적 쟁점을 토론에 붙이고 기존의 언론공간에도 개입함으로써‘사상의 운동화와 운동의 이론화’라는 이상에 핍진하는, 아시아 전체에서도 상당히 특색있는 잡지다. 많은 편집위원들이 모두 쿄오또대 전후기 학생운동 출신으로서 잡지의 편집은 토오꾜오와 쿄오또에서 번갈아가며 맡는다. 토미야마 자신은 1980년대부터 오끼나와 사회사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1990년에 『근대 일본사회와‘오끼나와인’(近代日本社會と‘沖繩人’)』이라는 중요한 저작을 냈고, 2006년에는 다시 2차대전 당시 오끼나와를 대상으로 하는 『전장과 기억(戰場と記憶)』을 출간했다. 일본과 오끼나와 지식계의 연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다. 그의 발표는 먼저 『임팩션』이 1982년 오끼나와 특집호를 내면서 오끼나와를 일본 국내의 독립된 식민지로 정의한 바 있음을 보고했다. 이번 발표에서 그는 오끼나와의 근대사를 지역경제의 자본운동이라는 틀에서 분석했는데, 핵심논점은 다음과 같다. 즉 오끼나와는 일본 식민주의의 역사적 조작을 통해 대동아공영권 지역경제로 편입되었고, 전후에는 미제국주의가 오끼나와 본래의 지역전략적 지위를 접수하여 냉전체제의 세계자본주의 진영으로 편입시켰다. 오끼나와의 경제생활은 그로 인해 제국의 군사전략에 복무하도록 압박받아왔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오끼나와의 해방은 종족집단(ethnic group)의 해방이자 세계자본주의를 향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이런 층위에서 보면 토미야마의 결론과 백낙청의 한반도 분단체제극복론은 논리적으로 사실 일치한다.

『대만사회연구』 대표 쉬 진위의 발언은 현실적 도전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는 양안의 화해는 정치적 층위를 넘어 경제와도 직접적 관계를 갖는다고 말했다. 사실 양안 경제통합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오히려 정치가들의 통제로 인해 사회적·정치적 분화가 생긴 것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에 대한 쉬 진위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즉 경제통합의 이익은 대만의 소수 대기업에 거의 완전히 집중되어 대다수 중소기업과 노동자들은 그 혜택을 받지 못하며, 또한 지역의 발전정도를 보더라도 북부의 기술집약적 산업은 빨리 성장한 반면 중남부는 상대적으로 느리다. 이런 구조적 문제는 대만사회 양극화의 물질적 기초이다. 다시 말해, 국가의 자본촉진 정책은 소수의 산업만 육성할 뿐 공평한 이익 재분배의 기제를 결여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양안 정세가 정치가들에 의해 농단(壟斷)당하는 경제적 기반을 조성했다. 어떻게 양안의 화해를 유지할 것인가라는 전제하에, 국가에 재분배 기제 및 이미 조성된 양극화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대만사회연구』가 마땅히 주목해야 할 의제이다.

회의의 절정은 물론 만찬이었다. 피로한 하루를 보낸 후 마주앉아 맥주와 와인, 거기에 빠이주(白酒)까지 곁들였다. 분위기는 뜨겁게 무르익었다. 식사 후 젊은 친구들이 계속해서 자리를 이어갔다. 듣자 하니 한밤중이 돼서야 파했단다.

다음날 아침, 원래 양안의 세 잡지 대표가 발표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역사비평』의 박명림(朴明林) 교수가 서울로 급히 돌아가야 하는 바람에 그를 첫번째 발표로 당겨서 배치했다. 그의 발표는 동아시아공동체의 상상과 기획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대만의 참여자들에게는 가장 생소한 의제였다. 국제사회에서 지위가 모호한 대만으로서는 국제조직 차원에서 문제를 사고할 만한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한·중·일 삼국의 정부는 진작부터 동아시아공동체 운영을 토론해왔지만, 대부분의 예산이 관료씨스템간의 협력회의에 투입되고 있어 거기에 민간 개입의 여지는 거의 없었다. 이 역시 지역공동체 형성과정에 노정된 위기다. 박명림의 입론의 기점은 동아시아와 기타 지역공동체 간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으로, 특히 EU를 참조했다. 그러고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각각의 운영기제를 분석했다. 물론 특히 주목을 끈 대목은 민중의 참여와 지식인집단의 역할에 관한 부분이었다.

다음 발표자는 『난펑촹』의 편집인 닝 얼과 『뚜슈』의 편집인 예 퉁이었다. 스신사회발전연구소 소장 황 떠뻬이가 사회를 봤고, 『대만사회연구』의 뤼 정후이(呂正惠)와 펑 젠싼(馮建三)이 각 잡지들이 동아시아 문제를 처리해온 역사에 초점을 맞춰 토론을 진행했다. 1985년 창간된 『난펑촹』은 중국정부의 적극적 외교정책에 발맞춰 2002년부터‘국제’란을 개설했다. 주로 미국과 서방세계를 다루었고 동아시아 문제에는 간혹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였다. 아마도‘대국심리’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만문제는‘시사’란에서 다룬다고 했다. 대부분이 선거와 양안정치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는 대체로 그것이 외재적 묘사에 불과하며 대만 민중의 시각에서 실제 내부상황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하지 못했다고 반성했다. 이런 인식에 기초하여 『난펑촹』은 2006년부터 대만 특집을 마련하여 대만사회에 대한 대륙 인민들의 인식을 심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 예 퉁은 『뚜슈』에서 동아시아 문제를 의식적으로 토론한 것은 1996년부터였으며, 주요 동력은 서구중심주의를 넘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세계지도를 재구성하는 데 있었다고 회고했다. 지난 10여년간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인도 등지에 대한 상당히 많은 글들이 쌓였고 그중 상당부분이 현지 학자들에 의해 집필되어, 『뚜슈』는 대륙 지식계에서 명실공히 아시아 문제를 탐구하는 근거지가 되었다고 했다. 이어서 예 퉁은 『뚜슈』가 어떻게 일본과 한반도, 오끼나와 그리고 대만을 표상했는지 구별하여 분석함으로써 참여자들에게 동아시아 문제에 대한 대륙 지식계의 인식의 판도를 그려주었다.

오후 마지막 발표자는 『쓰샹』 주간 첸 융샹과 『창작과비평』 주간 백영서였다. 이번 회의에 참여하진 못했지만 쑨 꺼(孫歌)의 글 「동아시아 시각의 인식론적 의의(東亞視角的認識論意義)」가 토론과정에서 주목받으며 유통됐다. 이 쎄션은 출판인 린 짜이쥐에(林載爵)가 사회를 맡았고 『쓰샹』 편집위원 션 쑹차오(沈松僑)와 『대만사회연구』 편집위원 닝 잉삔(寗應斌)이 토론을 했다. 첸 융샹이 제기한 문제는 상당히 도전적인 것으로, 그는 현재 대만에 진보적 잡지가 있을 수 없으며 진보의 지향이 있다 해도 그저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일 뿐이라고 했다. 진보적 간행물의 존재를 불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조건으로 그는 대만에서 좌파의 전통이 수립되지 못한 점을 들었다. 좌파 관념은 오로지 지식인에 제한되어 있어 그 사회적 역량이 부재하다는 점, 즉 엘리뜨는 있어도 민중은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대만에서 좌파임을 자부하는 지식인들은 중국혁명의 역사를 설명하는 데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밖에도 대만의 좌익사상이 도달한 성취는 매우 미미하다. 다른 사상적 조류와 대화하지 못하고 줄곧 자기폐쇄적 길을 걸어온 탓에 외부세계의 발전을 이해하지도 못한다. 그의 이런 논지는 이후 격렬한 논쟁을 야기했다.

백영서는 동아시아공동체가 목하 형성중이라는 문제의식하에서 논의를 진행했다. 먼저 인문학자들의 논의가 문화 및 가치의 영역에 집중되는 반면, 사회과학자들은 정책실현이라는 측면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는 반드시 이 두 측면을 통합해야만 동아시아공동체 발전의 동향을 살필 수 있다고 말했다. 가장 주목받은 대목은 한반도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국가형식인‘복합국가’(compound state)론이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복합국가란 남북한 두 국가 존재의 상이한 형태를 인정하면서 양자를 결합하는 것으로, 한편으로는 원래의 민족국가의 작용을 유지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한반도 복합국가의 형성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동아시아공동체를 향한 과정이며, 또한 그것이 세계자본주의체제의 극복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닝 잉삔은 백영서의 논지로부터 사회를 여러개의 사회로 구성된 것으로 보는‘복합사회’(compound society)의 상상을 연역해냄으로써 강한 사회가 그 주변부의 주체들에 가하는 압박을 해체하려고 했다. 이런 논리적 확장에 대해 백영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바로서 상당한 지적 자극을 받았다고 말했다.

회의의 엔딩파티는 롄징(聯經)출판사의 편집인 린 짜이쥐에가 주최하여 모두들 풍성하고 여유있는 만찬을 즐겼다. 자리가 파한 후 해외에서 온 친구들은 과거의 역사를 느껴보기 위해 마창팅(馬場町)10을 참관하러 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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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번 회의에서 얻은 성과는 무엇일까? 마지막 정리토론이 끝나가던 차였다. 이께가미가 토론과정에서 오끼나와가 남북한이나 양안처럼 상호간의 참조가 되지 못한 데 불만을 느낀 반면, 토리야마는 오끼나와의 존재형식 자체가 의미가 있으며 동아시아 이웃들에게 참고가 되기 족하다고 말했다. 둘의 발언으로 돌연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애초에는 생각지 못했던바, 동아시아 각 지역의 경험의 차이가 이틀간의 토론에서 상호참조의 체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분명 그러했다. 이번 회의를 2006년의 서울회의와 비교해보면, 그때의 토론은 상호인식과 상호학습의 단계였으며 상호참조의 조건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회의를 보면, 가령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이 엄연히 양안관계를 이해하는 주요한 참조점이 되었으며, 백낙청 역시 양안과 한반도의 경험의 차이를 토론의 의제에 넣고 있었다. 회의 말미에 백영서는 다음에는 분단체제와 띵 나이페이(丁乃非)가 말한 분열국가(partition) 간의 차이를 주제로 회의를 조직할 수도 있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이는 우리가 아시아간 상호참조의 방법을 심화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인도-파키스탄, 싱가포르-말레이시아의 분열 그리고 남북한 및 남북베트남의 분단경험은 양안문제에 새로운 지적 생명력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오끼나와의 상황은 이께가미가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오끼나와에 대해 잘 몰라 함부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일부 참여자들에게 이번 회의의 최대 수확은 오끼나와가 그들의 시야 안에 들어와 이후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이었다. 이틀 동안 회의에 참석한 칭화대 대만문학연구소의 대학원생 천 윈셩(陳運陞)은 오끼나와의 상황을 듣고 나니 사고의 창이 활짝 열린 듯하다며 소감을 밝혔다. 『대만사회연구』의 리 샹런(李尙仁) 역시 오끼나와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오래전부터, 지난 한두세기 동안의 식민제국주의사로 인해 제3세계지역의 참조체계는 오로지 서양(구미)이었고 이러한 황당함에 가까운 단일화가 지식계 최대의 위기임을 재삼 강조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아는 실체이거나 중대한 문제임을 넘어, 아시아에 참여하고 있는 서로 다른 주체들에게 어떤 상상의 정박지를 제공하고 정박한 땅의 역사 속으로 진입할 수 있게 만드는 참조점(點)이자 선(線)이자 면(面)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자신의 주체성을 훨씬 다원적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자아전환의 매개이다. 동일시의 대상 및 참조좌표의 다원적 전이를 적극적으로 추구할 때, 우리는 비로소 증오에 찬 탈식민운동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더이상 과거를 부정적으로 대면하지도, 강고한 제국주의적 정체성에 갇히지도 않게 된다. 그러나 이처럼 목이 쉬도록 외쳐도 듣는 사람들에겐 구호에 불과할 뿐이다. 지난 10여년간의 무수한 회의 중 이런 문제가 구체적으로 체현된 회의는 극소수였다. 회의 조직자로서, 이것이 바로 이번 회의의 최대 성과였다.

사실 어떤 회의든 사람마다 그 주제에 진입한 역사시간이 다르고 진입속도와 자기 안에 보유한 자양이 다르므로, 기대치 역시 다르기 마련이다. 회의를 마친 후 기분이 좋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도 시간낭비가 아니었다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회의였던 셈이다. 거기다 회의장을 나서는 순간 벌써 다음 만남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정력적으로 떠올리며 이후 활동의 방향을 그리기 시작했다면, 상당히 성공적인 회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솔직하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상 밖의 성과였을 뿐이다.

번역: 백지운/인하대 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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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밖에도 2005년 8월의 ICAS제4차 회의가 샹하이에서 열렸고, 싱가포르국립대학 아시아연구소의 미까 토요따(Mika Toyota)가 아시아간행물 원탁회의를 조직하여,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Asia Studies(浜下武治), Asian Journal of Women Studies(김용실), Journal of Southeast Asian Studies(Paul H. Kratoska), 중국대륙 지난(ズ南)대학의 『東南亞硏究』 그리고 Inter-Asia Cultural Studies(필자)를 초청한 적이 있다. 이 회의는 아시아 연구의 맥락에서 진행된 것이었다.
  2. 이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기록으로는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2 No.3, 2001 참조.
  3. 이에 관한 회의발표문에 대해서는 「東亞批判刊物連帶」, 『臺灣社會硏究季刊』 2006년 9월호, 특히 백영서의 편집자주 참조.
  4. 백영서 「關於形成東亞認識共同體的呼籲: 記<東亞的連帶與雜志的作用>國際學術會議」, 『臺灣社會硏究季刊』 2006년 9월호 223면.
  5. 백낙청 교수의 토론을 맡았던 펑 핀자(馮品佳)는 후에 그의 학문적 풍모에‘대학자(大儒)’라는 말로 경의의 뜻을 표했다.
  6. 백낙청의 완전히 정리된 발표문은 『臺灣社會硏究季刊』 2008년 9월호 참조.
  7. 1976년 대만사회 각 계층에서 정치민주·경제민주·사회민주라는 목표 실현을 위해 조직된 단체‘샤차오(夏潮)’의 후신으로, 1986년 잡지 『샤차오』의 편집자, 작가, 독자들을 기반으로 하여 샤차오연의회(夏潮聯誼會)가 발족되었으며 1990년 정식 명칭을‘샤차오연합회’로 개칭했다-옮긴이.
  8. 1990년대 중반 재일(在日)한국인 서승(徐勝)과 대만의 천 잉전(陳映眞), 오오사까대 교수 스기하라 토오루(杉原達) 등을 주축으로 하여‘동아시아 냉전과 국가테러리즘’이라는 주제로 몇차례의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거기서도 오끼나와 문제는 줄곧 중요한 위치에 놓였다. 그래서 대만의 좌익 및 진보단체 중 샤차오연합회는 오끼나와 문제에 대해 작으나마 기본적인 인식을 갖추고 있었다.
  9. 토리야마의 발표문은 참가후기와 함께 본지 이번호의 159~69면에 실려 있다-편집자.
  10. 일제시대 타이뻬이시의 행정구역으로, 계엄기의 형장(刑場)으로 유명하다. 현재 그 자리에 마창팅기념공원이 있다-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