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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정박하지 않는 시정신, 고은 문학 50년

등단 50주년 기념 대담

 

 

이장욱 李章旭

시인, 소설가.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장편소설 『칼로의 유쾌한 악마들』이 있음.

 

고은 高銀

시인. 시집 『피안감성』 『새벽길』 『만인보』 『백두산』 『네 눈동자』 『내일의 노래』 『독도』 『두고 온 시』 등이 있음.

 

ⓒ오성수

 

 

비가 내리는 중간중간, 흐릿하게 햇빛이 났다. 흐린 햇빛 사이로 생각났다는 듯 새들이 날아다녔다. 서교동 세교연구소에서 고은 선생을 만난 날의 날씨가 그랬다. 나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한국의 대표 시인이 아니라, 문청(文靑)시절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내 마음의 시인을 만나러 갔다. 날씨 탓이었을까. 흥분이나 설렘보다는, 오래 낯익었으되 언제나 낯설었던 그의 시들과 그 시들의 50년이 아스라하게 느껴지던 오후였다. 50년이라니. 그것은 어떤 세월이었을까. 전쟁과 허무와 민주주의를 거쳐오면서, 그의 50년은 이미 개인사적 회상의 대상이자 동시에 우리 근대문학의 한 장(章)이 되어 있지 않은가.

먼발치에서는 뵈었으되, 직접 대면한 것은 처음이었다. 선생은 자리에 앉자마자 커피 대신 소주를 청했다. 어쩐지 반가웠다. 나는 시력(詩歷) 50년을 기념하고 회고하는 대담 자리가 아니라, 아마도 사적인 술자리에서 시인의 말씀을 듣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장욱 장마철이라 습하기도 하고 비도 자주 오는데, 요즘 건강은 어떠십니까?

고은 타고난 대로 살고 있는데, 특별히 건강을 위해서 하는 건 없습니다. 집에 있을 때는 저녁밥 먹은 다음에 아내와 함께 논길을 30분쯤 거닐지요. 여느 사람처럼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고 일하고 놀고……

이장욱 어느 대담을 보니까 먼 길을 이동해도 시차를 별로 안 느낀다고 하셨더군요. 건강체질이시라 다행입니다.

고은 새들의 이동에 좀더 가까이 가려는 운명인가 봐요. 대체로 새는 남북으로 왔다갔다 하지만 별 시차 없이 현지의 시간에 맞춰서 바로 적응하잖아요. 서쪽으로 갔을 때보다 서쪽에서 돌아왔을 때가 더 시차의 긴장을 느끼게 되지요.

이장욱 최근에 『시와 시학』에 신작시 36편을 실으셨지요. 맨 앞의 「인도양」이라는 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운다//이 멸망 같은 적도 인도양 복판 벗어나며/지난 50년을 운다”로 시작하는데, 여기서 50년이라는 게 선생님께서 등단한 1958년 이후 지금까지를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요. 시의 말미에 보니까 “어느새/시뻘건 일몰/어서어서 캄캄하거라”라고 쓰셨더군요. 어떤 비감 같은 것도 느껴지고, 또 어떻게 보면 어둠에 대해 초연해진 목소리 같다는 느낌도 들더군요.

고은 그 시는 형이 지적한 대로 나 자신의 50년이기도 하고, 또 굳이 그걸 나라고 하는 것 바깥에 의미를 부여하면 한국의 원양어업이 아마 그런 정도의 세월을 지니고 있지 않았나 싶고, 그런 것도 염두에 둘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인도양이라는 내 상상체계가 사실은 현실의 여러 일들과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을 부여하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원양어업의 50년을 돌아보는 것과 나의 50년을 기록하는 것, 두가지를 접점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50년이나 100년이란 것은 어떤 우주의 짐승이 눈을 감았다 뜨는 것일 수 있겠고, 그런데 그것이 사람인 바에 시간이라는 걸 만들어서 의미를 부여하니까 새삼스럽게 50년이다 또 100년이다, 이런 것에 우리가 구애받는지 모릅니다. 나는 나 자신 전생의 연보라는 걸 설정했습니다. 1933년부터 시작하는 내 현생의 삶이 왠지 제한적이어서 과거로 연장해보았습니다. 거기서는 지금의 시인 노릇 50년보다 훨씬 더 많은 생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엄연한 현실은 나에게 주어진 현재의 50년이고, 그럴 때 그것을 돌아보는 행위가 있을 텐데, 공교롭게도 이 50년은 내가 있게 된 한국 근대시 100년과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 근대시 절반을 내가 살아왔다, 그런 의미를 확인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이전의 50년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나는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시인 최남선(崔南善)을 만나 그와 차도 마셨고, 또 내 또래의 친구 김관식(金冠植)이라는 사람은 심지어 육당(六堂)의 수제자로 자처하고, 또 홍은동 산꼭대기에 집을 지었을 때 육당을 추모하는 집이라 해서 육모정(六慕亭)이라 이름붙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근대시인 1세대와 50년대의 우리가 같은 비구름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때 이광수(李光洙)는 납치되어서 만날 길이 없었지만 그 부인과는 자주 왕래가 있었어요. 효자동 산부인과에 가면 이광수가 『원효대사』를 쓰던 방을 기념으로 텅 비워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100년과 50년의 시적 시차 같은 게 거의 없이 한통속으로 살아왔지요. 그리고 그후에 김소월(金素月), 정지용(鄭芝溶) 같은 사람들도 요절이나 전란으로 못 만난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의 동시대 삶이었지요. 사실 내 50년은 요절 시인이 많은 근대 한국시사로 보면 두번 이상의 요절이 가능한 세월이기도 합니다.

이장욱 두번 이상의 요절이 가능한 세월이라고 하시니 또 새롭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선생님의 시력 50년은 우리 근대문학사와 겹쳐지는 시간이었을 텐데요. 최근에는 해외에도 많이 다녀오시고……

고은 해외에서 초청을 받기 시작한 게 10년 안팎입니다. 10년 전쯤에 처음 나갔을 때는 가슴이 두근댔어요.‘아, 저 사람이 활자를 통해 본 그 사람이구나’싶고. 서구시를 풍문으로 듣다가 시의 실체를 만나니까 마치 독자가 작자를 만났을 때의 고전적인 설렘 같은 것이 끼어든 셈이에요. 그런 낯선 단계가 10년 안에 다 닳아서, 오히려 그들이 나에게 더 호기심과 관심을 갖고 다가옵니다. 그렇게 바뀌었습니다.(웃음)

이장욱 긴즈버그(Allen Ginsberg)나 스나이더(Gary Snyder) 같은 시인들과 친분이 있으셨던 걸로 알고 있는데, 한국과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이 서양 시인들과 동질감이라든가 또 차이 같은 것도 느끼셨을 것 같은데요.

고은 나를 동아시아 운운으로 얘기하셨는데, 분에 넘칩니다. 그렇지만 한국시가 예컨대 일본 근대시보다 늦게 시작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의 근대시를 받아들인 일종의 2차 이식이라고 할 텐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시는 동아시아에서 일본보다 한국입니다. 그리고 유구한 고대 이후에 명시를 많이 가진 중국의 현대시조차 오늘의 한국시보다 결코 월등할 수 없다는 국제적인 긍지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곽말약(郭沫若)과 최남선의 신시 비교는 이제 벗어났습니다.

내가 최초로 만나기 시작한 서양 시인은 미국 시인들이었습니다. 긴즈버그가 한국에 왔을 때 당시 한국은 신군부정권의 강박된 사회였는데, 그것을 직감한 그가 이게 아니다 하고 다른 쪽을 찾아보았지요. 창비 주최로 그와 내가 합동 시낭독회를 가졌어요. 그렇게 해서 이 사람이 나에 대한 인상을 갖고 돌아간 후에, 스나이더와 전화하면서 한국에 가면 고아무개가 있으니 만나봐라 했더랍니다. 긴즈버그는 뉴욕에 살고 스나이더는 서쪽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어요. 그래서 스나이더도 만나기 전부터 나를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내 시집이 미국에서 최초로 나왔을 때 긴즈버그가 격찬했고 그는 얼마 후에 타계했습니다. 내가 그때 미8군 방송을 틀어보다가 긴즈버그가 죽었다는 걸 알고 술을 많이 마셨지요.

그러고 나서 버클리대 초청으로 미국에 가서 스나이더와 함께 시를 읽었는데, 그때 “긴즈버그가 나더러 뉴욕에 오면 그냥 가지 말고 서쪽에 가서 스나이더를 만나고 가라고 했는데 이제야 만났습니다” 했더니 스나이더도 “나에게도 긴즈버그가 당신을 만나보라고 했는데 이제야 만났다” 하더군요. 그때 나는‘죽은 한 시인이 살아 있는 두 시인과 함께 있다’는 시를 쓴 적도 있습니다.

이장욱 긴즈버그도 불교와 연관이 있지만, 스나이더는 가까운 일본에서 불교에 깊이 몸담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친연성을 느끼셨겠습니다.

고은 긴즈버그는 티베트불교입니다. 그리고 스나이더는 일본의 임제종(臨濟宗)이고요. 임제종이지만 그의 세계는 결코 종파주의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가 나더러 지구 저쪽의 형제시인이라고 하고, 또 최근 시집에는 나에게 주는 헌시도 있고, 또 나를 노래하는 시도 따로 있을 만큼 막역한 사이입니다.

 

오늘 쓰는 시가 가장 축복받은 시

 

고은 시인은 천생 북방계다. 생김새가 아니라 영혼의 구조가 그렇다는 뜻이다. 그에게는 정주보다 유목의 삶이 어울린다. 이 유목적 삶은 그러나 현대사회의 특성으로 지목되는 소위‘탈근대적’유목이 아니라 고대적 기상을 간직한 떠돎의 유목에 가깝다. 그러니 시시콜콜한 세부묘사보다는 초원의 포효가, 도시의 뒷골목보다는 유장한 산과 폭포의 풍경이 그에게 더 어울린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근대적 시민의 영혼보다는 고대적 영매의 영혼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 호방함 이면에 존재하는 섬세한 감각이야말로 그의 힘일 것이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의 시적인‘고향’이 궁금했다. 아니, 어쩌면 떠나는 것 자체를 고향으로 삼은 시인의 내면, 혹은 고향을 끊임없이 창안해온 시인의 본능이 궁금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장욱 최근에 발표하신 시로 다시 돌아가서요. 「눈 내리는 날」이라는 시에 보면, “소월 형/지용 형/당신네들 어렴풋이 알았을 거요/인류 맨 처음의 언어가/아아/였던 것//블레이크 형/횔덜린 형/당신네들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거요/인류 맨 마지막의 언어가/아아/이리라는 것”이라고 쓰셨습니다. 아마‘아아’라는 건 언어 이전의 언어, 의미 이전의 언어일 것 같고 좀더 근원적인, 고향 같은 것이기도 할 텐데요.

고은 우리 언어는 인류사회의 시간으로 보면 극히 최근의 행위입니다. 그런데 마치 이것으로부터 시작했다는 듯이 우리는 언어에 주박당하고 있고, 또 언어 속에서 도저히 떠날 수 없이 살고 있고, 또 다른 삶의 체계와는 전혀 달리 언어 내의 독특한 자기만의 존재 자체를 살아간다는, 인문적인 허상 속에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인류사에서 언어생활은 아주 짧은 기간일 뿐이지 우리 이전에 생명계를 이끌어온 모든 생명체들은 언어 없이 존재해오지 않았습니까? 그 엄청난, 무한한 언어 부재의 시기를 지나 거기서 가까스로 태어난 것이‘아’라든지‘어’라든지 감탄, 공포, 아픔, 이런 것을 통해서 나온 소리기호일 텐데요. 그런 것들에서 우리 시의 비언어적 선사(先史)를 이어왔다는 그 까마득한 시의 고향, 거기에 한번 닿아보자는 의미에서 소월(素月) 형, 또 저쪽의 횔덜린(Hölderlin) 형, 이런 분들에게 우리 언어의 시작과 끝을 상기시켜본 것이지요. 그리고 이 언어라는 것이 세계의 자기 한계와도 한통속인지, 결코 영구적이지 않습니다. 언어라는 것은 언젠가 다 없어집니다. 그처럼 엄연한 불안으로서의 공간을 언어로 채우고 있다는 것, 이런 점에서 시 또는 언어의 고향이 어디쯤인가, 그 끝이 어디쯤인가, 비언어도 언어도 아닌‘아’‘어’이런 감탄사의 행방에 다가가보았습니다.

이장욱 언어의 한계랄까, 그런 걸 누구보다 예민하게 느끼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를 통해 말할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한 존재가 시인이겠습니다. 선생님은 지금까지 150권 이상의 책을 펴내고, 2002년에는 각권 600면 안팎의 분량으로 38권짜리 전집을 내셨지요.

고은 그것도 온전한 전집은 아닌 셈입니다. 누락된 것도 있고 못 찾은 것도 있고. 그런 것까지 전집에 넣는다면 40권쯤 될 겁니다. 2002년에 나왔으니까 장차 추가해야 될 분량도 있습니다. 당시 그 전집이 나왔을 때 러쎌(Russell)이 생각났어요. 얼마나 썼냐고 누가 물으니까 “나의 저서는 나의 키만큼이다”라고 말했다는데 실제로 내 전집도 내 키 173쎈티미터 정도는 됩니다. 어린아이처럼 “우리 집에 보리가 몇가마니 있다, 쌀이 몇가마니 있다” 하고 자랑하는 것 같은데, 술 마시고 일하고 놀고 하다 보니 그 자취입니다. 아마도 이 성과들은 근대시 100년 전기의 선각시인들이 기껏 시 몇편 내서 시집 한권쯤으로 생애를 마감해온 사례들에 대한 반동일 것입니다.

이장욱 지금까지 내신 방대한 양의 시집들 중에서 그래도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이 있나요? 일종의 시적인 고향 같은……

고은 나는 우선 내 작품을 기억하는 게 없습니다. 기껏해야 두줄짜리 짧은 시…… 가만있어보세요. 그것도 지금 당장은 생각이 안 납니다. 내가 이상해요. 『만인보』의 세계나 다른 시세계의 소재들은 기이할 정도로 기억이 아주 잘 나는데 정작 내 작품에 대해서는 아주 치매입니다.(웃음) 따라서 어떤 작품에 대한 애정 따위는 아예 성립이 안됩니다. 그리고 내게는 오늘 쓰는 시가 제일 축복받은 시이고 제일 좋은 시입니다. 그리고 이것도 내일 모레의 작품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져버리지요. 그러니까 내 체질은 자기 작품에 대해 철저하게 무책임한 구조로 되어 있어요.(웃음)

이장욱 어느 자리에서인가 선생님은 허무주의든, 민족이든, 선(禪)적인 세계든 스스로 터를 잡았던 어떤 것이든 그것들에서 끊임없이 벗어나고 극복하고 넘어서면서 지금까지 온 게 아닌가 하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는데, 오늘 쓰는 시가 제일 축복받은 시라는 말씀도 아마 그런 맥락이겠네요. 시인에게는 모종의 율리시스 콤플렉스랄까, 그런 귀향의식이 있는 것 같지만, 선생님께서는 고향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그걸 부인하면서 끊임없이 나아가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은 아까 여러 곡절을 겪고 여기까지 왔다고 했는데, 그것을 율리시스적인…… 어디 우리 현대사 속 시인의 길이 유독 나에게만 벅찬 역정이겠습니까. 하지만 율리시스의 행로에 내 세계가 반영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저기까지, 또 그다음 저기에서 다른 저기로 떠나는, 그 표류와 표착의 연속과정이 나하고 맞지, 이타카(Ithaca)로 귀향하는 율리시스와는 맞지 않아요. 그 점에서 나는 지금도 일정한 문학의 귀착점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한다는 것을…… 우선 나 자신이 허용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어느 한 곳에서는 못 견딥니다. 또 어딘가로 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끝나지 않는 율리시스의 길, 그 길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장욱 어떻게 표현하면 유목적인 삶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고은 현대 담론언어로서의 그‘유목’은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장욱 자끄 아딸리(Jacques Attali)식의 탈근대적인 유목과는 다르겠습니다만.

고은 유목이라는 것은 선사 또는 고대부터 있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인류사적, 민족지적 유목이라는 개념보다 그냥 표류와 표착의 연속이라는 개념이 나에게 더 혈연화되고 있습니다. 우리 유행가에‘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이런 노래가 있죠? 어쨌든 하나의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있으면 다음날부터 내 닻은 녹슬어버릴 것이고 배도 썩어버리고 배 안에 있는 선원도 떠도는 심장의 율동이 정지될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어디로 떠나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집조차 길입니다. 이백(李白)의 말을 빌리자면 백대(百代)의 과객(過客)이지요.

 

1950년대, 전쟁과 허무의 기록

 

시인은‘유목’이라는 표현 대신 “표류와 표착의 연속”이라는 표현을 택했다. 당연한지도 모른다. 유목이라는 표현에는 어떤 여유로움이 배어 있지만, 선생의 지난 삶은 그런 여유로움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표류와 표착, 이 어휘들에는 어떤 절박함이 배어 있다. 나는 그 절박함의 오랜 기원이 1950년대라고 생각했다. 그는 50년대가 저물어갈 무렵 등단했지만, 50년대는 오롯이 시인의 영혼에 화인(火印)을 남겼을 것이다. 그 시절은 전쟁과 참화의 시절인 것이다.

그 시절을 그는 현실에는 없는‘누이’의 안타까운 병과 더불어 견뎠다. 저 유명한 등단작 「폐결핵」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의 시달리는 홑이불의 日曜日을/누님이 그렇게 보고 있다./언제나 오는 것은 없고 떠나는 것뿐/누님이 치마 끝을 매만지며/化粧 얼굴의 땀을 닦아 내린다.” 그 시달리는 홑이불의 일요일, 언제나 오는 것은 없고 떠나는 것뿐이었을 그 시절에 대해 질문했다.

 

이장욱 선생님 시력 50년에서 몇몇 대목을 찬찬히 짚어가면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선생님 산문 중 『식민지의 집시』라는 이상(李箱) 평전과 함께 『1950년대』라는 에쎄이를 인상깊게 읽었는데요. 풍부한 자료조사에 아주 구체적인 소묘가 가미된 성찰적 글로 기억합니다. 선생님이 등단하신 게 1958년이니까 전쟁시절의 문단…… 김동리(金東里)식으로 비유하자면‘밀다원시대(密茶苑時代)’라는 걸 직접 겪지는 않으셨을 텐데, 아주 생생하게 묘사돼 있었습니다. 그 책에 적으셨듯이 1950년대라는 시대는‘전쟁’과‘허무’가 문학적인 키워드일 텐데, 이 시대가 선생님 초기시에 미친 영향 같은 게 있었을 것 같습니다.

고은 첫째로 50년대는 시에 아주 적합한 환경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시는 당나라 시가 있고 그다음에 송나라 시가 있다, 가령 당나라 이백이 있은 다음에 송나라에 와서 소동파(蘇東坡)가 있었다, 이렇게 얘기하면 시는 죽어버립니다. 당나라가 없어도 소동파는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태초성(太初性)이 있습니다. 애비가 없는 것입니다, 에미도 없고. 우주의 고아로 떨어진 것이 시인이고 시입니다. 그에게 애비가 있고 과거의 유산이 있다면, 유산의 흔적으로 머물 수밖에 없겠습니다. 반영론으로서 시가 있다면 그 시를 뭐 하러 씁니까? 시는 그런 점에서 아주 거센 발기의 혁명행위죠.

그런데 왜 50년대냐면 50년대는 다 망해버린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집들이 다 무너졌고 명동 어디를 가도 풀밭이고 억새밭이었습니다. 겨우 서양에서 온 기독교 구교의 성당 하나를 미공군이 놔두어서 폭격당하지 않았을 뿐, 거의 폐허였거든요. 그 폐허가 곧 50년대의 제로(zero) 공간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살아남은 폐허의 고아로 내가 시를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나는 그 전후의 영점(零點)만치 시의 축복이 되는 장소가 없다고 보지요.

또 하나는 그런 현실로서의 폐허만이 아니라, 이미 내 마음도 폐허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이데올로기의 저질 노예가 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생존의 한계상황에서 순박한 시골농촌의 소년은 무지막지한, 감당할 수 없는 정신의 외상을 받은 거예요. 내 가슴속에 잿더미가 한가마니쯤 들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허무예요. 굳이 얘기하면 서구 19세기말의 니힐리즘에 가닿았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동양의 노장(老莊)세계라든지 불교의 무(無)사상이라든지 이런 것이 갑작스럽게 나에게 임박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거의 생득적으로 그런 폐허의식, 허무의식의 원점에서 시작한 셈입니다. 굳이 말한다면 그것이 초기시의 허무라는 지적이었을 겁니다.

이장욱 잿더미로서의 허무, 대단히 물질적인 허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런 허무감이 선생님 초기시에서는 혈연적으로‘누이’의 존재로 연결된 듯합니다. 많이 얘기되어온 것이긴 합니다만, 데뷔작 「폐결핵」도 그렇고 「요양소에서」나 「사치」 같은 시들에 누이 얘기가 많이 나와서, 평자들이‘누이 콤플렉스’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요. 뒤집어 말하면 누이 콤플렉스라는 것, 누이와 형수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은 또 아버지와 형이 부재하는 상황에 대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김윤식(金允植) 선생의 경우에는 아버지와 형의 부재상황을 메우기 위한 것이 그후 생의 의지로 나타나고, 바로 이 생의 의지가 표출된 공간이 종로와 광화문이라는 (정치적인) 공간이다, 이렇게 설명했는데요. 이렇게 보면 선생님의 60년대 시와 7, 80년대의 시를 나누어 단절적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지만, 두 시기 사이의 내적인 필연성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은 좋은 지적인데요. 하나의 진실에는 반드시 우연과 필연이 교차합니다. 초기시와 중기시를 단절적인 개념으로 얘기하는 경우를 알고 있습니다. 편의상으론 얼마든지 가능하겠지만 실제로 시인의 자기확인에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단절적으로 파악해버릴 수 있겠습니까? 나는 초기시와 중기시라는 이름을 붙일 때 그 경계의 접점이 참 어려웠어요. 경험적인 얘기인데요. 나는 실제로 현실참여 행위로서는 거리 한복판에 있었는데, 내 문학은 과거의 변두리 어딘가에서 떨쳐나지 못한 북을 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중반 이후에 이르러 당시의 내 문학 전환의 위상과 시의 행위가 일치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딱‘이제부터는 뒤로 돌아서!’하면서 군령에 의해서 움직이는 그런 보병의 동작이 아니었습니다.

이장욱 이후 선생님의 세계와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할 텐데, 전집 서문에 쓰셨듯이, 이 누이라는 존재 자체가 애초부터 세계의 병을 대신 앓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지요.

고은 누이에 대해서 몇마디 하겠습니다. 나는 사실로서는 누나가 없습니다. 김춘수(金春洙) 같은 사람은 워낙 평면적이고 정직하니까 “나에게는 누님이 없다, 누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노래해서는 성에 안 차요. 나에게는 누님이 없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없는 누님이 있는 누님으로 설정되었습니다. 나에게는 그 허구가 또 하나의 현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어린 시절 집안에 여성이라고는 어머니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님을 만든 거지.

이장욱 ‘은희’라는 이름도 붙이셨고요.

고은 아주 미인이었습니다(웃음)…… 나와 반대되는 이미지로 누이를 만들었지요. 그리고 나는 폐결핵을 앓은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런 허구와 함께 나에게 늘어붙어 있던 죽음에의 지향이 치열해집니다. 폐병으로 기침하다 죽는 것이 당시 나에게는 가장 이상적인 죽음의 이미지였어요. 자정까지 기침하다가 새벽쯤 되면 기침소리가 없어지는 것. 그런 죽음 말입니다. 마산 가포리 요양소, 그 가포리에 가서 폐결핵 환자로 요양하다가 죽는 것, 그게 내 꿈이기도 했습니다. 가포리가 어디인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내가 폐결핵에 걸렸다, 그런데 그 누나가 나를 치료해주다가 그 병이 옮겨가서 대신 죽습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박테리아로써의 근친상간이지. 그 누님의 주검을 화장해서 유골상자를 가지고 떠도는 겁니다. 그러다가 서부 다도해의 배 위에서 뼛가루를 뿌리고 입산했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런 뒤 나에게 누이 콤플렉스라는 말이 당장에 붙었습니다.

이장욱 어느 글에 보니 선생님께서 건강검진을 받아보니까……

고은 1980년대에 내란음모로 잡혀들어갔다 돌아와서 최초로 건강진단을 받았을 때 한쪽 폐가 아주 없어져서 시멘트화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나는 감기는 앓아봤어도 폐결핵은 앓아본 적이 없고 피를 쏟아본 적도 없습니다. 내가 「각혈」이라는 시도 써봤지만, 하얀 백지 위에다 검붉은 피를 토하는 색감의 황홀성, 이것의 허구를 만들기는 했어도 한번도 내 신체가 그런 색감으로서의 피를 내지 못했는데, 어느새 앓을 만큼 다 앓아 3기를 끝낸 뒤 한쪽 폐만 살아남아 있게 되었어요. 지금도 한쪽짜리 폐입니다. 그래서 내가 강의를 할 때면 허구는 결국 사실 혹은 진실로 귀결된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허구와 진실의 차이는 끝내 없어진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허구를 지향해라, 그것은 궁극적으로 현실의 예외가 아니다,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요.

이장욱 『해변의 운문집』에 보면 「내 안의 농업」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거기에 “내 만혼의 시절”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시집이 나온 게 60년대 중반이라 아직 결혼을 안하셨을 때잖아요?(웃음) 보이지 않는 진실을 끌어내는 것으로서의 허구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고은 그래서 나는 내 허구를 믿어요. 현실은 어쩌면 허구의 물질적 단계인지도 몰라요. 역사라는 것에도 사실의 영역보다 허구의 영역이 많이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도 시입니다.

이장욱 초기시 얘기가 나온 김에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문의 마을에 가서』까지의 초기시들을 모은 선집이 1974년에 나온 『부활』이라는 시집이지요. 제가 대학시절에 닳도록 읽었던 시집이기도 한데요. 그후 1983년에 민음사에서 두권짜리 전집이 나왔고, 2002년에 방대한 전집을 내면서 그때마다 개작(改作)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시 한편에 네개의 판본이 있는 경우도 있고요…… 몇몇 연구자들에게 물어보니까 판본 확정이 어려워서 애를 먹는다고 하더라고요. 앞으로 선생님을 연구하고 공부할 후학들을 위해서 한 말씀 해주시지요.

고은 내 시가 연구대상이 되든 망각의 대상이 되든 개의치 않습니다. 인간의 문학은 유한한 행위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격언이 있는데, 이런 격려도 사실 유치합니다. 철부지 같은 소리이지요. 그래서 내 시가 어떤 텍스트이기를 바랄 까닭이 없습니다. 박사논문, 석사논문들이 있지만 그것에 구애받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개작문제인데, 시사를 살펴보면 어떤 시인은 한편을 수십번 고친 사람도 있습니다. 시집 자체를 여러번 손댄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가령 소설의 경우 내 옛 친구인 『광장』의 작가도 작품에 여러번 손을 댔습니다. 내 개고행위를 그런 실례에 비추어서 견강부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예술은 완성품이 아니라 예술의 미완성성, 거의 영원한 미완성성, 이게 무한한 매혹입니다. 모든 창조행위 자체의 미완성은 완성에 대한 허상을 성찰하게 만들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어의 절대란 불가능한 탓입니다. 말라르메(S. Mallarmé)의 언어결정체라 해도 거기에 무수한 결격들이 드러날 터입니다. 우리 시 100년의 작품들이 모두 그런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저 언덕을 향하여 가노라”라는 말이 반드시 옳은 서사가 아니잖습니까? “저 언덕 쪽에서 오리라”라고 할 수도 있는 거고, 또 도저히 갈 수 없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이런 가변성들이 다 생략되고 그 한구절만 남겨진 것이 시 아닙니까? 그러면 이것 자체가 세계를 지탱할 수 없게 고독하고 불안하고, 다른 단계를 예시하는 미완성인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모든 문학 행위는 미완성성, 다시 말하면 개고의 대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주장은 나의 주장 이상으로 본질적입니다.

이장욱 그런데 예를 들어 첫시집 『피안감성』에 보면 「시인의 마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가 1974년의 시선집과 2002년 전집에도 실려 있는데요. 제목은 같은데 본문은 아주 많이 다른 경우입니다. 그런데 전집에는‘『피안감성』 1960년’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독자들이 착각을 할 우려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고은 그렇게 서지적으로 얘기하면 내가 여기에 앉아 있을 수 없고 도망가고 싶습니다.(웃음) 아마 그때마다 어떤 당위가 생겨서 그렇게 했을 겁니다. 그러고는 다른 장난감으로 곧장 옮겨갑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책임소재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고, 애기한테 너 똥을 왜 여기다 안 싸고 저기에다 쌌냐고 묻는 것과 똑같습니다.(웃음)

 

시인의 개고는 이미 유명한 얘기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을 새로운 작품으로 만든다. 60년대의‘시인의 마음’은 2002년의‘시인의 마음’으로 다시 태어난다. 선생은 “애기한테 너 똥을 왜 여기다 안 싸고 저기에다 쌌냐고 묻는 것과 똑같다”는 시인다운 현답으로 나의 우문을 간단히 일축했다. 그런 것이‘시인의 마음’일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70년대와 80년대의 그는 뜨거웠다. 70년대를 낭만적 열정의 시대로, 80년대를 이념적 저항의 시대로 구분하는 편의적인 방법으로는 시인의 이 시대를 설명할 수 없다. 낭만적 열정과 이념적 저항이라는 두 항목은 시인의 몸과 시 안에서 구분되지 않고 하나가 된다. 시적인 차원에서 그것들은‘리얼리즘’이라는 논란 많은 어휘를 중심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먼저 그의‘70년대’에 대해 질문했다.

 

아픈 누이에게서 죽은 노동자에게로

 

이장욱 최근 『문학사상』에 연재하는 일기를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1974년 3월 20일자로 시작됐는데, 저 같은 사람에게는 70년대 풍경이 흥미진진하더군요. 70년대라고 하면 정치적 자유나 문화적 자유가 공히 필요했던 시대가 아니었나 생각되는데요. 서양식으로 따지면 68세대라거나 히피세대와 차이도 있겠지만 또 비슷한 맥락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고은 70년대는 나 자신에게도 운명적인 시대입니다. 그런 70년대가 나에게 베풀어주는 의식 심화의 은혜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전에는 무교동이라는 데서 통금시대의 주란(酒亂)으로 자극을 늘 일상화하고 살았습니다. (탁자 위의 소주병을 가리키며) 이런 소주, 이런 것은 아주 우아하지 않습니까? 그때의 소주는 마시면 카아- 소리가 나와요…… 그리고 무교동 낙지도 거의 원시적인 미각의 충격 아닙니까. 그런 자기학대의 나날이었습니다. 그때는 학대가 훈장이었으니까. 그런 상태가 악화될 때면 자살에 닿아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으니까 술집에서 잡니다. 술집 탁자 위에서 자는데, 그러면 그대로 자냐? 술 취했으니까 바닥에 떨어져서 자기도 하고. 이문구(李文求)가 특히 나랑 그렇게 많이 잤어요. 문구는 턱 떨어지면 거기에서 그냥 자. 나는 그래도 깨는데. 나보다도 훨씬 둔탁해요.(웃음) 그렇게 떨어져서 자다 보면 신문 쪼가리가 있는데, 그런 걸 주워서 보니까 거기에 노동자의 분신자살에 관한 사설이나 사회면 기사도 나오고 그랬어요. 이게 뭔가. 내가 늘 죽음을 생각하고 있으니 죽음에 관한 것에는 유난히 관심이 깊었지요. 또 그 죽음과 내가 시도해온 죽음을 본능적으로 비교해보았겠지요. 그 죽음과 내가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죽음, 그러면서도 늘 예감으로 쌓아온 죽음…… 그러다가 그 노동자의 죽음에 자장이 생겨 이끌려가서 그 죽음 뒤를 돌아보았더니 거기에 현실의 모순이 있어요. 민족도 있고, 분단도 있어요. 당시에는 나 같은 사람뿐 아니라 가령 법과대학을 다녔던 장기표(張琪杓)나 조영래(趙英來) 같은 학생들도 시대를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사회 각계의 당시 뜻있는‘먹물들’이 다 그랬습니다. 그다음 유신이 오고, 지하(芝河)도 들어가고, 지식인들이 울었습니다. 김병익(金炳翼)도 술집에서 엉엉 울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내 정서 지층의 마그마도 막 열리기 시작했지요. 이를테면 내 정신의 화산의, 불덩어리가 치솟아 올라왔습니다. 그게 70년대초입니다.

이장욱 그 시대의 압도적인 현실 탓이었겠습니다만, 그 어름의 시 중에‘비유를 버려라’라는 구절이 자주 나오더군요. 『그믐밤』에 실린 「호남선」이라는 시에서도 그렇고, 88년에 나온 『네 눈동자』에서도 그렇고, 91년의 『내일의 노래』에서도 “비유 따위를 의심한 지 오래”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고은 시인은 시학과 상관없이 비유의 신도입니다. 특히 은유, 환유 없이는 시인은 자기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한순간도 견뎌낼 수 없지요. 그야말로 우리는 비유의 능력 그것밖에 없으니까. 바로 이 시의 질곡을 타파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제까지 거기에 종속되어온 시의 마당을 박차고 내달리는 비유에서의 해방을 갈망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엄마젖을 먹어야만 사는데 엄마젖이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 다른 구정물, 개울물을 먹고 살고 싶었지요.

이장욱 ‘비유를 버려라’라는 건 시인으로서는 아주 치열한 자기부정으로 이해할 수 있겠군요.

고은 그렇지요. 자기부정인 것이지요. 비유가 가진 범죄성, 또 비유가 가진 진실에 대한 기만성이 있지 않습니까? 비유는 사실, 사물 자체의 본질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고 본질을 우회하고 왜곡하고 해체하는 일도 합니다. 끝내는 본질로부터 멀리 떠내려가 다른 사실의 사생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비유의 신도이면서 비유를 역적으로 보아야 할 의무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비유를 버리자는 거의 맹목적인 강조에 이른 것 같습니다.

이장욱 백낙청(白樂晴) 선생이 「선시(禪詩)와 리얼리즘」이라는 글에서 선생님 시를 논의하면서‘비유를 의심하되 비유를 쓸 수밖에 없고, 심지어는 새로운 비유를 창안까지 하는 것이 시인의 운명’이라는 취지로 쓴 문장이 떠오릅니다. 아마도 비유를 떠날 수 없으되 그것을 끊임없이 버리고 의심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 대한 말씀과도 맞닿는-

고은 그렇겠습니다. 「선시와 리얼리즘」은 미국 잡지에 발표한 영문 작품론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된 글도 발표됐지요. 사실 나는 선시의 가능성, 직관 자체를 고도의 리얼리즘 행위라고 봅니다. 무언가를 직관하는 것, 뭘 설명하고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연역과 귀납을 다 제치고 곧바로 직관하는 것, 그것 자체가 리얼리즘의 한 생태라고 생각하지요. 그 점에서 선시와 리얼리즘의 접합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비유를 걷어내라, 그곳에 장대한 세계가 있다

 

특히 선시를 말할 때 고은 시인의 리얼리즘은, 도스또옙스끼식으로 표현하자면 소위‘고차원적 리얼리즘’이라고 할 만한 어떤 것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그의‘고차원적 리얼리즘’에는 도스또옙스끼식의 종교적 사유가 아니라 시적 직관의 힘이 강조된다. 이 직관이 한 단독자의 감정과 세계인식을 넘어 공공의 영역으로 확장되는 순간, 그의 연작시와 장시들이 태어난다. 그것은 한반도의 시적 지리지(地理誌)로, 백두산의 역사적 드라마로 그리고 만인(萬人)의 삶에 대한 방대한 시적 보고서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장욱 선시 이후 2000년에 나온 시집이 『남과 북』입니다. 백두산에서 휴전선 그리고 광화문에서 제주도에 이르는, 어떻게 보면 한반도 전체를 아우르는 시적인 지리지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요.

고은 내가 UC버클리에서 한국시론을 강의할 때였어요. 학기가 끝나 졸업식을 보고 가야 하나 어쩌나 하다가 그냥 동부의 하바드로 가야 했습니다. 거기 가기 직전 숙소에서 자는데 꿈에 시가 나왔어요. 『남과 북』 같은 시였어요. 누가 나더러 이런 시를 써야 된다고 강권해요. 나도 그게 누군지는 몰라. 하여간 누군가가 그렇게 쓰라고 해요. 그래서 꿈속에서 내가 그러겠다고 맹세했어요. 아침에 아내하고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데 그 꿈이 새삼스레 떠올랐습니다. 하바드로 건너가 가을학기 직전까지 30일 동안 쓴 것입니다. 나에게는 한(恨) 못지않게, 아니 한 이상으로 신명이 있는 듯합니다. 내 시는 바로 이 신명의 놀이이지요.

이장욱 요즘도 펜으로 쓰시죠? 컴퓨터를 쓰는 세대도 글을 빨리 쓴다고들 하는데 선생님처럼은 안될 것 같아요. 뭔가에 들린 듯한……

고은 나는 글쓰지 않을 때는 폐인 같은 존재입니다. 신이 내리면 시가 나오고, 안 그러면 그냥…… 술꾼이야.(웃음)

이장욱 이쯤에서 『만인보』 말씀도 들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완간을 앞두고 있는데, 1980년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수감되었을 적에 구상하고, 86년부터 쓰기 시작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30권에 3500명이 목표였는데요.

고은 굳이 편수에 의미가 부여될 이유는 없으나 3500명은 넘었을 겁니다. 사실 분량으로 보면 초기에는 한권에 110편 정도 나왔다면, 지금은 한권에 그보다 많은 편수가 담기니까 초기 편수대로 따지면 진작 30권이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올해 다 마칠 생각입니다. 초고는 다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는 80년 광주가 들어갑니다. 또 6월항쟁과 80년대 후기 무렵으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물론 그것뿐만 아니라 일정한 시기에 구애받지 않는 인물들이 함께 배열됩니다.

이장욱 내년에는 완간되겠습니다.

고은 아마 올가을에는 창비에 원고를 넘길 겁니다.

이장욱 몇몇 해외저널들을 보니 주로 『만인보』를 두고 얘기하더군요. “이미 불이 꺼진 세계가 빛을 얻었다”는 평도 있고 또 “방대한 프레스꼬화”라는 평도 있고요. 전반적으로 보면 『만인보』가 선생님의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분위기이더군요.

고은 모르겠습니다. 뭐라고 낙인찍히면 대개 그것이 하나의 당위성으로 굳어지기 마련인데, 어찌 『만인보』만이 내가 쓴 것이겠습니까? 다른 허섭스레기들도 저마다 자기의 존엄성을 강렬하게 내재하고 있겠지요. 그래서 나는 무엇이 내 대표작이다 말하는 것을 시의 타자화라고 의심하게 됩니다.

이장욱 그런데 해외에서는 『만인보』에만 주목을 하더군요.

고은 그렇게 보는 것에 감지덕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웃음) 가령 『뉴욕 리뷰 오브 북스』(The New York Review of Books) 같은 데서는 “20세기 세계문학의 최대기획이다”라고 칭찬도 해주고, 스웨덴 같은 데서는 2005년에‘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외국 번역본이 올해의 책에 선정된 건 처음이고, 더군다나 시가 그렇게 된 일은 이제까지 없었답니다. 그뿐 아니라 『만인보』에 이어서 『순간의 꽃』도 올해의 책이 되었고, 소설 『어린 나그네』도 2007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더군요. 연속 3년이었습니다.

이장욱 『만인보』가 굉장히 방대한 작품이잖습니까? 우리 문학사에서 20년대 말에 임화(林和) 같은 사람 시를‘단편 서사시’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30년대로 오면 백석(白石)이나 이용악(李庸岳) 같은 시인들의 시를 비슷하게‘이야기시’같은 용어로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 『만인보』와는 성격이나 용량 자체가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전례가 없는 경우가 아닌가 싶은데, 오히려 졸라(Zola)의 루공 마까르(Rougon-Macquart) 총서나 발자끄(Balzac)의 『인간희극』(La Comédie Humaine) 같은 산문적 기획의 시 버전으로 비유할 수도 있겠습니다.

고은 최원식(崔元植) 교수가 “일찍이 발자끄는 빠리의 호적부와 경쟁하겠다고 했는데 『만인보』는 우리 민족의 호적부와 겨루는 것”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 『만인보』가 완간된 다음 나의 시세계는 하나의 마루턱을 넘어 다른 세계에 발디뎌지지 않을까 하는 예감으로 차 있습니다. 『만인보』 이후라는 내 후기의 시들이 대기하고 있으니까요.

이장욱 쓰신 기간이 오래 걸리기도 했고, 분량도 방대하다 보니 『만인보』에 대해서 선생님 스스로 느끼시는 바도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만족스러운 점도 있을 것 같고 불만족스러운 점도 있을 것 같습니다.

고은 대개 속편은 실망의 대상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만인보』에도 어찌 지적할 사항이 없겠습니까. 다만 한가지, 『만인보』는 다채로운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담겨 있지요. 그때그때는 이 시를 시작하던 80년대의 눈이 아닙니다. 그때의 인물을 지금 쓴다면 다르게 쓸 것 아닙니까? 그런 점에서 여러 시기와 시제(時制)의 다양성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 하나는 자연스레 보장되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쓰다 보니 작업에 대한 집념 자체가 부도체가 되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도 없지 않았고, 또 이완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은 심지어 신문기사처럼 구성된 것도 있을 겁니다. 뼈의 문체도 나타납니다. 내가 좋아하는 베케트(Beckette)식 문체의 레토릭 사상(捨象) 말입니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시의 실감을 응결시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든 작품의 실재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내 예술적 역량이 부족하거나 그전에 있었던 집중적인 애착이 지금 풀어졌거나 하는 점이 여실하게 드러나는 경우가 왜 없겠습니까? 그것은 또 내가 저승에 가서라도 내 시의 혼백이 개작의 본능을 발휘할지 모르지요.

이장욱 『백두산』의 경우는 어떠신지요? 같은 제목을 가진 조기천(趙基天)의 『백두산』도 있습니다만.

고은 예전에 죽은 채광석(蔡光錫)이 내가 『백두산』을 쓴다고 하니까 “선생님, 조기천은 이기셔야죠” 하고 다그친 적이 있지요. 그래 내가 “조기천을 이기면 혁명이 죽는다”고 대답한 적이 있어요.(웃음) 물론 조기천의 『백두산』과는 이름만 같지 전혀 다른 서사입니다. 소규모의 서사이지요. 다만 한국시에서 그동안 달밤에 하소연하는 정서에만 노닐고 있었는데 그의 시세계가 웅혼한 기상을 형상화했다는 것 자체는 최고의 문학행위로 평가할 만합니다. 찬가(讚歌)라는 것과는 별도로 말입니다. 나의 『백두산』은 그런 게 아니고 민족 전체를 담보하는 서사행위이지요. 민중의 이야기입니다. 특정인물은 차경(借景)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지 화자 주체는 아니지 않습니까? 북한에서도 『백두산』이 처음 나왔을 때 호평이었어요.

이장욱 선생님의 장시에 대해서는, 워낙 방대하니까 학문적으로나 비평적으로 조명이 아직 덜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만……

고은 조명 안됐습니다. 그냥 창고에 쌓여 있습니다.(웃음)

이장욱 선생님께서 처음 쓴 장시가 『니르바나』 맞지요?

고은 네. 그게 제주도에 있을 때입니다.

이장욱 그다음에 『사형』(『일식』) 하고 『수미산』이 있는데……

고은 『수미산』은 80년대의 어느날 갑자기 쓴 것입니다.

이장욱 그런데 흥미롭게도 『니르바나』는 불교적인 구도의 해탈을 담고 있고, 또 『사형』은 복음서에 기초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어 종교적인 주제를 횡단하려는 의지 같은 게 전면에 나와 있습니다.

고은 내가 제주도에 있을 때 스피노자적인 신이라는 걸 설정해봤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아직 신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가? 어떤 천재가 아무리 시를 부정해도 여전히 신은 왜 있는가? 이게 뭔가? 나도 그 단순한 집중에 한번 기울어보자 해서 예수의 마지막 며칠을 그려본 것이지요. 나중에는 신이 지쳤는지 내가 지쳤는지 모르지만 곧 그런 관심에서 떠났어요. 그때 제주도에서는 인간 일상보다 그런 종류의 형이상학적 발상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지요. 왜냐하면 바다는 절경으로서의 풍경 그다음으로는 온통 하루 내내 파도뿐이고 수평선에는 아무것도 없는 일종의 정신적인 적거(謫居)의 공간일 때, 관념의 파편으로 왔든지 혹은 이미지로 왔든지 혹은 내 의존본능이 갈구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신이라는 것이 내게 잠시 다가왔었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것을 체현한 사람이 예수였으니까 이것의 결말을 그려보자 해서 그렇게 한번 해본 거예요.

그리고 내가 62년에 환속할 때 강화도 마니산에 올라가서 밤을 새웠어요. 여름이지만 추웠지요. 문학의 길이냐 아니면 종교의 길이냐를 선택해야 했지요. 당시의 나로서는 하나는 다른 하나를 버려야 했습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그 양단(兩斷)의 경계에서, 나는 문학을 선택하고 난 다음 무턱대고 세상에 나와버리게 되었지요. 나는 내 문학이 종교로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종교라는 것이 내 문학의 한 질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내 예술적 자존심을 지켜왔습니다. 나는 문학을 위해서 저것들을 자료로 쓰는 거지 내가 거기에 귀의하고 거기의 뭐가 되고 이런 걸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결코 문학이 모든 것이다, 토탈이다라고 우겨대는 것은 아니지만 문학은 모든 것을 담는 일체의 거처이다, 아니 문학행위가 세계의 구원과 치유 그리고 위로의 능력을 낳고 있다, 그뿐 아니라 문학만이 인간의 자유를 박제하지 않는다고 믿게 되었지요. 그런 점에서 나는 문학을 통해서의 해방인입니다. 또한 시인은 특정 종교에의 결착에 따르는 단순한 전문화 현상을 경계해야 합니다. J. M. 머리가 일찍이 재미난 말을 했어요. 시를 신의 상위에 놓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실 시인은 세계의 복합성이나 카오스 안으로 휘저어 들어가야지요. 그런 점에서 시는 텍스트가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이장욱 종교조차 하나의 문학적 질료라는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고은 네. 나는 문학의 노예가 될지언정 종교의 적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요.

 

문학의 노예로서 문학의 경계를 넘다

 

문학의 노예는 될지언정 종교의 적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당연하게도 이 문장은 소위‘문학주의’같은 것과는 질이 전혀 다른 것일 터이다. 문학이 현실변화의 도구적 계기로만 이해될 수 없듯, 문학의 내적 가치에 대한 신성시 역시 근원에서 허구적인 것일 테니 말이다. 나는 그의 말을 이렇게 이해했다. 어떤 의미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구원과 초월을 거부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것은 안간힘을 다해 이 세속세계의 좌충우돌에 머무는 일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끝내 압도하지 못하는 지점, 그 인간성이 신성에 종속되지 않는 고통스러운 영혼의 위치, 문학은 그 세속의 십자가에 매달려서야 문학일 것이라고 말이다. 62년 마니산에서 선생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과 대답은 아마도 우리 근대문학에는 다행스러운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후 그가 각혈하듯 쏟아낸 창작물들은 시에서 장시로, 장시에서 소설로, 소설에서 평전과 평론과 연구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전방위에 걸쳐 있다. 장르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우리 근대문학으로 뻗어나갔다.

 

이장욱 장시라는 게 서사적인 얘기지 않습니까? 선생님의 어떤 대담을 보면 “내 허영은 서사에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백한테도 콤플렉스가 없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보면 초기에 나왔던 누이 콤플렉스라는 것이 서정적인 뉘앙스를 풍긴다면, 호메로스 콤플렉스는 서사적인 것과 연관이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고은 내게는 계보가 있습니다. 내 체질에 맞는 것들이 있어요. 우선 장자(莊子)가 있고, 신라의 혜숙(惠宿)이 있지요. 원효(元曉), 그다음에 이백도 있고, 굴원(屈原)이 있고. 그런데 굴원은 너무 계급적이에요. 굴원은 잡초와 난초를 너무 구별하는 사람이야. 그런 자기 차별성을 너무 드러내버리는 계급주의예요. 어쨌든 굴원이 있고, 그다음에 향가를 쓴 신라의 월명(月明), 피리 부는 월명이 있습니다. 그다음에 페르시아의 오마르 카얌(O. Khayyam)이 있고, 이딸리아의 깜빠넬라(Campanella)가 있습니다. 『태양의 도시』의 깜빠넬라. 그리고 명나라 말기의 이탁오(李卓吾), 그리고 허균(許筠)이 나하고 참 맞아요. 근대에 와서는 이데올로기적 편향과 상관없이 임화가 체질에 맞고, 물론 횔덜린의 말기의 경우도 내 성향과의 동질성이 있어요. 이런 것들이 내 시의 내력인지도 몰라요.

이장욱 대부분 사상가나 시 쪽에 가까운 사람들인데, 소설가 쪽으로는 어떠신가요?

고은 그런데 소설가는 따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위고(Hugo)가 시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소설가로서도 좋아하지 소설가만으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괴테도 위대한 시인이라는 것 때문에 『빌헬름 마이스터』 등도 따라서 좋아하는 것이지요. 소설의 극점 역시 시의 불가결성 없이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장욱 선생님께서도 시뿐만 아니라 소설도 쓰셨습니다만……

고은 이장욱 형도 보니까 시, 소설을 다 아우르고 있더군요. 그래서 한집안 식구로구나 하는 친연을 느꼈어요.(웃음) 나는 전방위 행위를 좋아합니다. 특히 지금 현대문화의 경향이 미분화(微分化)되어서 그 영역에만 충실하고 있는데, 그것들 하나하나가 유기적으로 통하는 전일성이나 그 교향악적인 융합이 있어야 하거든요. 한 사람이 여러 분야, 여러 활동의 계곡에 자기를 부착시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개화기 문예운동에 그런 가능성이 있었지요. 육당도 그런 사람이고 단재(丹齋)는 언론인에다 역사가에다 시인에다 소설가에다 평론가에다 저널리스트에다, 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전일성은 과도기 이후의 평범한 시대에도 일정하게 갖춰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현대사회의 전문성 이외에도 우리나라 문화행태에 좀 폐쇄적인 결벽이 있어요. 오직 시인은 시만 써야 하고, 소설가는 소설만 써야 한다는 정조주의가 있는데, 이건 좋지 않습니다.

이장욱 초입에 조금 말씀을 하시기는 하셨는데요, 선생님의 시력이 우리 근대문학사의 중요한 부면을 통과해오지 않았습니까? 최근에 해외에 나가보시면서 바깥의 시선으로 우리 근대문학을 볼 때 색다른 느낌도 있을 것 같아요.

고은 어디서나 요즘 담론의 서론들이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문학에서도 예외가 아니지요. 나는 오히려 이 보편성 맹신이 큰 함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문학행위는 특화될수록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의 특수성을 더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아니, 보편성 자체가 특수성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특수성이 많이 퍼져나가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면 그게 보편성이 되고 맙니다. 보편성이 헤겔의 역사법칙처럼 이미 그 액자가 짜여진 무류성(無謬性)이고 특수성은 그 보편성의 위대함에서 소외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 두가지는 늘 만나야 합니다. 보편성도 특수성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두가지는 끊임없이 이율배반적 소통을 해야 하는 하나의 공명관계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는 보편성을 얘기할 때 서구적인 문학의 보편성을 받아들이는 것만 얘기합니다. 서구인들이 대개 기계적으로 한국에서 문학의 보편성이 앞으로 가능하다고 얘기하면 그게 칭찬인 것 같지만, 이처럼 바보 같은 언어에 속아 넘어가면 안됩니다. 이게 하나고요.

또 하나는 우리는 서구의 보편성을 자기의 방식으로 읽을 독법에 덜 익숙합니다. 우리 문학이 이제 근대문학의 이식론(移植論)은 극복했습니다. 이장욱 형의 시론을 보니까 우리도 바깥의 시나 바깥의 문학행위를 눈치 안 보고 영위한다는 관점이 있어서 동감했습니다. 지난날에는 심지어 토속적인 시인의 경우에도 늘 바깥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이 당당하지 않습니까? 이것만 해도 우리 문학사의 주체가 공고해진 것입니다. 이제는 지난날처럼 엘리엇(T.S. Eliot)의 모더니즘에 무조건 경배하지 않잖습니까? 60년대만 해도 서구시의 어떤 것들은 신적인 대상이었어요. 지금은 아니잖습니까? 다만 현재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놓은 보편성이라는 데에 갇혀서 정말 경탄할 만한 새로운 보편성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 점에서 아직도 우리는 경계주의에 함몰되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앞으로 이 경계가 허물어져야겠지요.

 

촛불, 예술적으로 정치적인

 

보편과 특수에 관한 시인의 말은 이 둘의 이분법을 멀찌감치 넘어서 있었다. 보편과 특수는 서로 불화의 관계에 있으되, 그 불화 자체를 통해서 서로를 구성한다. 보편은 특수와의 불화를 조건으로 삼아 스스로를 이루는 것이며, 특수는 보편과의 갈등에 의지해서 자신의 존재를 정립한다. 이때의 특수란 일반화로 수렴되지 않는, 대체 불가능한 단독성에 가깝다고 해야겠다. 그의 말대로, 문학의 역사도 이런 긴장에 의지할 것이다. 촛불은 어떨까? 민주주의의 역사는 이 특수한 현상을 어떻게 수용할 것이며, 어떻게 스스로의 보편사를 재구성할 것인가? 시인은 이 질문에 대해 본능적인 대답을 갖고 있을 것 같았다. 저 치열했던 7, 80년대를 감옥과 거리에서 보낸 분이 아닌가. 나는 그의‘육감’이 궁금했다.

 

이장욱 5월에 시작된 촛불집회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뭔가 새로운 정치적 에너지가 나오는 것이 아니냐는 얘기들도 많이 하는데요.

고은 책에서 보면 프랑스대혁명 때 태양왕이나 왕실 귀족들만이 황금마차를 타고 다니던 거리를 평민과 노예들, 거지들이 한데 어울려 강강술래 같은 축제를 벌였지요. 민중들의 신명나는 놀이판이 되었던 겁니다. 그런 것과도 또다른 인류사적 미학이 이번 촛불축제에서 한국적인 미학으로 구현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정치지상주의가 이렇게 생활예술에 용해되어 그 어디에서도 정치의 허세가 허용되지 않는, 일차 시민의 다양성과 통합성이 함께 어우러졌습니다. 경이로운 일입니다. 한국의 촛불은 지구상의 축복입니다. 나는 너무 황홀해서 촛불시 한편도 쓸 수 없었습니다. 시인에게 절망의 행복이었습니다.

이장욱 학생들을 비롯해서 시민들이 거리에서 놀면서 자기주장을 하는데, 해학적인 문구들, 또 촌철살인의 유머러스한 구호들을 외치잖습니까?

고은 타자의 거리와 광장이 자아의 공간, 공동체의 뜨락이 되었지요. 지난 세기 80년대 시민시위의 역량들이 한층 시민의 삶 속에 체화된 것 같습니다. 유모차라니 가족의 소풍이라니…… 참 근사한 풍경이었어요.

이장욱 어떤 사람들은 촛불을 횃불로 과대평가하지 말라고도 하고, 조직화가 안된다거나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들이 제도권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다거나 하는 한계를 지적하는 이야기도 있는데요.

고은 나는 촛불축제를 정치적 유효성만으로 축소해서 얘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자체, 어떤 결과론 없이 그 행위 자체로서 우리 사회가 이만큼 멋진 자화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눈부십니다. 그런 다음에 우리 정치현실은 이런 멋진 도달점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는 점도 이번에 실감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요. 못 따라옵니다. 그런데도 이런 경지를 배반하고 왜곡하고 이것을 모독하는 행위를 앞으로 얼마나 계속할 것인가. 이제 삶의 직접성은 문화에 대한 야만성이나 비속성이 전혀 아닐 때가 왔는지 모릅니다. 지금 위정자들은 촛불의 현실에 귀의하고, 거기에 자기 위치를 설정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이전처럼 군사적 탄압으로 일관한다면 앞으로 더 무서운 정치대중의 폭발을 초래할 것입니다.

이장욱 정치가들에게 경고성 말씀을 해주신 것으로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은 정치인은 끊임없이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정치인은 무엇이 답답하냐면, 경고에 둔하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하나의 정권이 세워지면 그 정권 이전의 과거에 대한 계승과 극복이라는 두 축의 정치행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아직 피어나지도 않은 꽃을 과시합니다. 민주주의 이행으로서의 정권은 혁명이 아닙니다. 잃어버린 10년이라니요. 그러면 이 사람들이 지나간 다음에 잃어버린 10년이 또 안 오겠습니까? 이런 바보 같은 계산법이 어디 있습니까? 이전에 있었던 것은 악이든 선이든 나의 부채입니다. 그걸 지고 가야지요.

이장욱 게다가 최근에는 대북관계도 안 좋은 면이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안팎의 흐름들도 좋지 않고요. 2000년대 이후에는 통일의 방법은 물론 통일 이후를 부정적으로 보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는 느낌입니다.

고은 나는 집회에서도 늘 얘기합니다만, 우리의 통일은 점(點)이 아니라 선(線)이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것 같은 하나의 사건, 극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은 그 어딘가에서부터 어딘가까지 가는 긴 시간의 과정이다, 그래서 진정한 통일은 언제 통일이 됐는지 모르는 통일일 것입니다. 백낙청 선생이 통일의 현재진행형을 주창했습니다. 통일은 어떤 단일한 귀결이 아닙니다. 지금의 이 분단시대의 변화 자체가 통일의 어느 접점에 와 있는 것이지요. 여기에 고비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 고빗길은 숨차서 올라가는 것이지요. 이 고비고비에 어떤 장애도 없이 어떻게 통일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통일의 길고 긴 열망이야말로 생활화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장욱 낙관적으로 보시는군요.

고은 통일의 생명력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할 일이 태산같이 많아요. 거대한 미래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죽은 화산이 아니라 살아 있는 화산의 역사이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완전히 새롭고 싱싱한 역사공간에 살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휴전선이 나의 청춘입니다.

이장욱 그 미래를 위해서 나온 책 중의 하나입니다만, 얼마 전에 『통일문학』이라는, 남북이 합작해서 만든 잡지가 나왔습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언젠가는, 남과 북의 시인이나 작가들이 함께 글을 쓰고 섞여가게 될 텐데, 사실 한편으로는 상상이 잘 안되기도 합니다.

고은 나는 1980년대 중반부터 남북의 작가들이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이런 말 한마디로도 엄청난 고초를 겪었지요. 80년대 후반에 와서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남북작가의 만남을 추진했습니다. 이런 씨앗들이 나중에 싹터서 결국 2005년에 남북작가회의라는 대형축제에 이른 것입니다. 백두산에 올라갔을 때 달이 아직 지지 않아 서천에 떠 있고 해가 올라와서 동천에 떠 있고, 그렇게 일월이 상조하는 가운데 그 정상에서 시를 읽고 선언을 외쳐댔습니다. 아주 감격적인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하산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통일문학』이라는 책, 정부에서는 이것이 나온 것 자체를 금기의 대상으로 만들어 배포할 수도 없게 하고, 또 북에서는 거의 유치할 정도로 어떤 낱말 하나를 넣어야 한다며 고집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처음엔 이렇게 못난 얼굴로 나옵니다. 다만 강조해둘 일은 남과 북 공동의 민족문학잡지 하나 만든 게 지금은 누가 알아주지도 않지만, 그것은 서지학을 넘어 역사적으로 큰 기점이 될 것입니다.

이장욱 작품 차원에서 북의 시인이나 작가들이 쓴 작품들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고은 우선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습니다. 분단문학사가 문학사적으로 세계의 어느 현대문학사보다 찬란하다는 것, 만약 남북이 통일이 돼서 해방 45년 이후 한반도가 하나로 살았다면, 지금 우리의 근대문학사 양상과 별로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단이 되어서 전혀 이질적인 두개의 문학이 있어오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 사실이 나중에 문학사가들에게 얼마나 풍부한 자료가 되겠습니까? 그것만으로도 우리 문학의 현단계는 풍요롭습니다. 이것을 먼저 인정하고 얘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북쪽에서는 지도이념을 관철하는 문학밖에 허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당의 문학 밖에서 생활의 문학이 이것저것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나중에는 남북문학의 총화광장에서 다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저 사람들의 문학의 실체를 인정하면 결국 우리 민족 전체 문학의 자양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과거보다 미래가 풍부한 사람입니다”

 

많은 시민들에게 고은 시인은 노벨문학상 후보이자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만찬장에서 시를 낭송한 시인으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이미 공인(公人)이다. 나는 그 공인의 이면에 잠복해 있는 사사로운 생활이 궁금했지만, 그가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을 나누는 분이 아니라는 데 곧 생각이 미쳤다. 그저 단순하게, 근황과 앞으로의 계획을 질문했다.

 

이장욱 선생님 근황을 여쭙는 것으로 대담을 마무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최근에는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고은 내 천직(天職)은 연중무휴입니다. 그리고 나의 일이 나의 놀이이지요. 나는 동물이에요. 손이 움직이고 눈이 움직이고 입이 움직이고 몸이 움직여야 나는 살 수 있습니다. 잠잘 때도 아마 움직일 겁니다.(웃음) 나는 쓰는 작업, 읽는 작업을 내 숙명으로 삼고 있습니다. 아마 나처럼 신간을 많이 읽는 사람이 있을까 자만할 정도로 내 책읽기의 눈은 탐욕적입니다. 이런 책읽기 말고는, 신간 시집과 산문집이 나올 예정이고 가을에는 오랜 숙원인 서화전시회도 열 계획입니다.

이장욱 브리태니커 사전에도 인명등재가 되었다고 들었는데요.

고은 2007년 브리태니커 연감에 한국인으로는 셋이 나왔더라고. 이명박 대통령하고, 비하고, 나하고.(웃음) 그런데 지난 4월 독일 베를린‘세계문화의 집’초청으로 1주일간의 행사를 마칠 때 한 인도 시인이 나에게 “너는 시인이 아니라 시다”라는 찬사를 했습니다. 이게 올해 내가 격려받은 한 사례이기도 하지요.

이장욱 현 대통령과 선생님이 같이 등재된 걸 보니, 모든 면에서 상극이다 싶어 묘한 아이러니 같은 게 느껴지네요.

고은 상극일 게 뭐 있어? 그 사람은 공적으로 술을 못하고 나는 공적으로 사적으로 술을 잘하는 차이가 있겠지.(웃음)

이장욱 지난달에는 캐나다에 다녀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시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큰 상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리핀상 평생공로상을 받으셨습니다.

고은 썩 괜찮은 상이었습니다. 나는 국내외의 상을 어느새 14개인가 받았습니다. 상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기도 하고 수혜자로서는 좀 염치가 결여되었습니다. 해외의 것으로는 하나는 노르웨이에서 훈장을 받고, 그밖의 새로 제정된 것을 받았어요. 이번에 캐나다에서 받은 그 상 시상식은 토론토대학 대극장에서 거행되었는데 장엄했어요. 유료입장객 8백여명이 만원을 이루었지요. 그리핀상 재단이사장은 아버지가 재벌이었는데 어릴 때 “너 시 하나 외워” 해서 외우면 용돈을 받곤 했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용돈 받는 재미로 시를 좋아했던 사람이에요. 그러다가 아버지의 사업을 계승했는데 나더러 썰매 타고 북극여행에 동행하자는 권유도 했지요. 나는 10여년 전 히말라야에 갔을 때 사경을 헤맨 적도 있어서 북극모험은 몹시 겁나요.(웃음)

이장욱 많은 상들 중에도 특별히 기억이 남는 게 있으실 것 같아요.

고은 상은 틀림없이 기쁨을 누리게 하지요. 그러나 문학의 표면장력이라고 할까, 그런 긴장을 느슨하게 만듭니다. 상을 타면 쓸데없는 자만도 생기고 세상에 대한 안이한 시각도 만들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늘 스스로를 경계해야겠지요. 그리고 베푸는 자에 대해서 받는 자의 의무도 생기지요. 받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걸 다른 방식의 기여로 갚아야 한다는 것, 이건 절대로 무상이 아니라 유상이라는 것, 그런 무서운 사실을 인지해야 합니다. 미국 시인 로빈슨 제퍼스(Robinson Jeffers)가 포크너와 헤밍웨이를 거명하며 상이 그들을 타락시켰다는 탄핵시를 쓴 적이 있습니다. 타산지석으로 삼아야지요.

이장욱 지금 선생님 작품이 해외에 번역된 게 40여종이 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라로는 18개국이고요. 초기 작품들이 상대적으로 더 그렇습니다만, 선생님 작품들은 행간의 거리, 어휘와 어휘 사이의 거리, 정서와 정서 사이의 거리, 이런 차원에서 시적 비약이 극대화된 경우들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외국어로 번역하는 게 쉽지 않은 한국시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만.

고은 그런데 나는 번역시의 문맹자니까.(웃음) 하지만 나에게는 경험적으로 번역의 질을 짐작하는 직감이 있어요. 개의 후각 같은 것이 있어요.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 작품이 번역되기 시작했는데 70년대까지는 대개‘떡잎 번역’입니다. 떡잎은 그다음을 위한 시도일 뿐이지요. 90년대 들어와서야 번역이 제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자연현상과 문화현상 또는 정치경제의 수준과 문화의 수준은 특이한 경우 외에는 일치되기 십상입니다.

이장욱 그렇군요. 이제 마무리를 지을 시점인데, 앞으로의 작품계획은 어떠신지요?

고은 나는 과거보다 미래의 허영이 큰 사람입니다. 아직 말할 단계는 아니지만 『만인보』가 낼모레 끝난다고 하면, 그후엔 『처녀』라는 장시를 쓰려고 합니다. 『처녀』는 형이상학 시가 될 것입니다. 심청인데요, 오랫동안 구상한 것입니다. 육지와 용궁세계를 연관시키는 형이상학의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다음은 『운명』을 쓸 것입니다. 그 시는 내 후기의 모든 역량이 담길 꿈입니다. 동과 서의 사상, 관념, 그밖의 모든 것이 들어갈 것 같아요.

이장욱 『남과 북』이 공간적 차원에서 한반도를 아우르는 장시였고, 『만인보』가 이 공간에서 역사적으로 살아온 인간들의 이야기였지요. 앞으로 쓰실 작품들은 이런 시공간을 넘어서서, 어쩌면 형이상학적으로 종합하는 작업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고은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한반도 구석구석을 다니고 싶습니다. 다니고 나면 마땅히 거둘 열매가 있겠지요. 그리고 러시아대륙에 가고 싶어요. 모스끄바 행사에 잠깐 다녀온 것 말고 젊은 날의 릴케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 시의 후기에 그 광대한 대륙체험을 담고 싶습니다. 어떤 텔레비전 방송에서 내가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는 프로를 만들자고 했는데 안했어요. 마지막 여행공간으로 남겨뒀어요. 한 여든쯤 됐을 때 해보고 싶습니다. 시베리아가 내 샤먼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나의 문학적 체질과도 맞아요. 나는 스무살 무렵 어떤 별에서나 시베리아에서 죽고 싶었지요.

 

결국 소주는 두세병이 비워졌다. 나는 이미 얼근했다. 선생은 대담이 끝나자마자 몇병의 술을 더 비운 후, 총총히 다음 약속지로 떠났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디오니소스적 열정을 잃지 않은 시인의 뒷모습이 거기 있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하듯, 나에게 선생은 카오스를 시의 질서로 육화하는 데 탁월한 시인이다. 손에 닿는 것은 무엇이든 시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매력이 그에게는 있다. 차이가 절대화된 악무한적(惡無限的) 혼돈을 경계해야 하듯이, 창조적 혼돈과 균열을 내장하지 않은 질서에 대해서도 우리는 경계해야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카오스를 횡단하여 모종의 시적 로고스에 이르는 시인이다. 질서라고 부를 수 없는 질서, 혼돈 자체를 통해 구성되는 질서, 그것이 시력 50년을 맞은 시인의 창조성인지도 모른다.‘카오스 속으로 휘젓고’들어가‘삶 자체’가 되는 것 말이다.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창밖을 응시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시베리아만큼 그에게 잘 어울리는 공간도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샤먼의 고향, 샤먼으로서의 여로. 나는 그가 꼭 그 너른 땅을 횡단할 수 있기를 마음으로 기원했다. 그것은 지난 삶의 허무와 혼돈과 열정과 영광을 지나, 보이지 않는 고향을 확인하는 시인의 여로일지도 모른다. (2008년 7월 22일, 세교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