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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유재현 劉在炫
1962년 서울 출생. 1992년 『창작과비평』에 단편소설 「구르는 돌」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소설집 『시하눅빌 스토리』, 문화기행서 『샬롬과 쌀람, 장벽에 가로막힌 평화』 『메콩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 등이 있다. hyoooo@hanmail.net
패스터 패스터
홍콩섬과 까우룽(九龍)반도를 뒤덮은 먹구름은 나흘 동안 쉬지 않고 섬을 삼킬 듯 폭우를 퍼부었다. 124년 만이라는 큰 폭우에 섬과 반도의 모든 거리는 물에 잠겼다. 섬 남부의 첵추만(赤柱灣) 오른쪽에 자리잡은 스탠리 감옥도 사정은 다를 것이 없었다. 6미터 높이의 담장 안으로 쏟아진 물들은 잘 만들어진 배수구를 통해 재빨리 만으로 흘러나갔지만 죄수들은 운동장에 나갈 수 없었고 감방과 작업장을 오가는 날들을 보내며 감방 벽에 난 직사각형의 스테인리스 창문 너머로만 검은 구름과 빗줄기들을 엿볼 수 있었다.
스탠리 감옥의 장기수들과 무기수들이 모여 있는 중형동(重刑棟)인 A사동 5유닛. 저녁배식 후 6시 반이 되자 마름모꼴의 홀을 사이에 둔 감방 문들이 열렸다. 식당이 아니라 자신들의 방에서 각자 식사를 해야 하는 중형동의 죄수들에게 이때부터의 한시간은 감방 밖에서 주어지는 하루의 마지막 자유시간이었다. 31명의 죄수들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오자 감방 사이의 좁은 홀은 왁자해졌다. 대개는 텔레비전 앞에 열지어 놓인 탁자 앞에 앉아 잡담을 나누었다.
“저쯤은 말이야. 우리 자바섬에서는 비로 쳐주지도 않는다네.”
물에 잠긴 차들과 무릎까지 물이 출렁이는 거리를 헤쳐나가는 행인들을 비춰주는 텔레비전을 건성으로 보고 있던 인도네시아 출신 누르마가 옆자리에 앉아 있던 파키스탄 출신 무디시라프에게 중얼거렸다.
“우리도 그렇다네. 나무 꼭대기나 하다못해 지붕 위에라도 사람이 매달려 있어야 비 좀 오는구나 하지.”
찢어지게 하품을 토해내던 무디시라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한동안 감옥 전체를 달구던 살인적인 폭염은 사라졌다. 광포한 바람은 감방의 스테인리스 창문으로 차가운 공기를 밀어넣어 사방을 선선하게 만들었다. 죄수들의 표정에는 모처럼 살 만하다는 기운이 역력했다. 제조대학 출신인 중국인 황(黃)은 오늘 저녁 파트너로 꼴롬비아 출신의 웅가를 택해 홍콩에서 코카나무 재배를 시도했던 자신의 경험에 대해 심각한 토론을 나누는 시간을 마련했다. 항소심에서 무기를 32년형으로 단축시키는 데 성공했던 싸이코 첸은 살인대학 무기수 학생들과 모여 음란한 스토리를 푸느라 여념이 없었다. 홍콩과 콸라룸푸르를 한달에 4번씩 왕복하며 헤로인을 운반했던 말레이시아 출신 아미르와 목은 역시 운반대학 출신인 필리핀인 아길레 그리고 한국인 박(朴)과 잡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베트남 출신의 딘은 역시 베트남 출신인 응오와 좀 청승맞게 들리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며 그밖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국인들은 끼리끼리 모여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씨즌 오픈을 앞두고 각 팀의 전력과 관련된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물론 축구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스탠리 감옥 전체에 성행하고 있는 도박 때문이었다.
그 한구석에서 일본인 아사노 아쯔시(淺野篤)는 외톨이로 10호방 앞 기둥에 등을 기대고 그 위치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향해 멍청하게 초점을 잃은 눈을 박고 있었다. 이건 스스로 생각해도 좀 한심한 일이었다. 스탠리 감옥 A사동 5유닛에 입학한 지 석달이 넘어가고 있었지만 아쯔시는 대략 8년 만에 그러니까 이바라끼(茨城)의 고등학교에서 1학년 무렵까지 당하던 이지메의 구렁텅이에 다시 빠지는 불운을 겪고 있었다. 이번엔 순전히 언어 때문이었다. 우선 A사동 5유닛에 일본인은 아쯔시가 유일했다. 자신밖에는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죄수가 없었지만 아쯔시는 무진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용어인 영어를 익히지 못했다. 천부적으로 언어 습득능력이 떨어지는 인간들이 있었는데 스탠리 감옥에서 그 방면으로는 아쯔시가 챔피언이었다. 스탠리 감옥에는 통용되는 영어가 여러종이었다. 싱가포르인들의 싱글리시나 말레이시아인들의 말글리시, 필리핀인들의 필글리시가 있었고 한국인 박이 쓰는 콩글리시도 끼었다. 물론 자글리시도 있었다. 그도 아니면 남미에서 온 죄수들이 어영부영 지껄여대는 스펭글리시도 있었다. 어차피 언어란 의사가 통하면 그뿐이었으니 원조를 따질 일도 없었다. 요행으로 각종 글리시들은 이른바 정통 잉글리시에 비해 의사소통력이 배는 뛰어났다. 반면 정통은 맥을 추지 못했다.
“내가 말이야. 2유닛에 있을 때 미국에서 온 놈이 옆방에 있었단 말이야. 꼴롬비아로 배낭여행을 갔다가 세계일주 항공권을 주겠다는 꼬임에 넘어가 코카인 한개(1킬로그램)를 넣고 홍콩에 와서 잡힌 멍청한 놈인데 이 녀석이 말을 어떻게 하느냐면 말이야 이빨이 몽땅 빠진 우리 할머니처럼 바람이 쉭쉭 새는 소리를 내질 않나, 아님 어린 계집애처럼 코맹맹이 소리를 내니 도대체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버마 출신으로 태국으로 흘러들어가 뜨랑의 생선 깡통공장에서 5년을 일하다 친구의 꼬드김에 어쩌다 정신을 차려 보니 스탠리 감옥이더라는 찌웨의 말인즉도 그러했다. 하지만 찌웨의 이 말에 ‘총알 두발 더하기 셋’(Two Bullet Plus Three)이란 별명을 가진 베트남 북부 박지앙 출신 응오는 덧니 사이로 침을 튀겼다.
“천만에.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건 프랑스놈이라네. 내가 스탠리에 오기 전 라이치콕 구치소에 있을 때 헤로인 봉지 하나를 주머니에 넣고 있다 걸려 들어온 노인네가 있었지. 물론 제가 쓸 양이어서 기껏해야 일이년 살면 고작이야. 이 영감탱이의 영어는 그야말로 끔찍했어. 마치 찢어진 작은북에서나 울리는 소리를 말이라고 울려대는 거야. 도대체가 인간의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지. 기분 나쁜 건 말이야, 이 작자가 내가 베트남에서 왔다는 걸 알더니 대뜸 자기네 나라 말을 할 줄 안다고 여기고 내게 코맹맹이 소리를 하면서 덤벼드는 거야. 베트남이 자기네 나라 식민지였다는 거지. 마더 퍼킹 프렌치. 그땐 우리 아버지도 태어나지 않았을 때였단 말이네.”
아이스 3킬로그램으로 스탠리 감옥까지 오게 된 응오는 드물게 육로로 국경을 넘다 잡힌 디디(DD, Dangerous Drug)였다. 사실 목적이 이주노동이었던 응오는 하노이의 브로커에게 미화 2백달러짜리 월경(越境) 패키지를 사서 중국 땅을 거쳐 홍콩으로 잠입하던 중이었다. 홍콩 경계를 넘던 날 브로커는 일행 모두에게 총알 두개씩을 나누어주었다. 종류도 제각각이어서 황금처럼 빛이 나는 38구경 권총 총알도 있었고 퍼렇게 녹이 슨 M16 소총의 총알도 있었다. 그건 홍콩 경찰에 잡혔을 경우 추방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불법입국으로 추방당하면 투자한 2백달러는 고스란히 날려야 했지만 총알 두발을 갖고 있으면 불법무기소지죄로 21개월의 실형을 살 수 있었다. 홍콩 감옥에서 21개월의 실형이면 최소한 미화 6백달러 정도는 소내노동으로 벌 수 있었으므로 브로커에게 지불한 2백달러를 회수하는 것은 물론 3, 4백달러가량의 현금을 챙겨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총알로 보험에 든 월경은‘총알 두발 홍콩관광 패키지’로 불렸다. 응오의 패키지는 재수가 없어 경계를 넘자마자 발각되어 일행 모두가 체포되었다. 응오에게서는 총알 두개와 함께 아이스 3킬로그램이 덤으로 나왔다. “아 글쎄, 넘기 전에 브로커 자식이 테이프로 둘둘 만 뭔가를 주면서 홍콩의 누구에게 가져다주면 2백달러를 받을 수 있다고 하더란 말이지. 그게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덕분에 스탠리에까지 오게 된 응오는 21개월이 아니라 21년형을 받았다. 물론 그 안에는 총알 두개 몫인 21개월도 포함되어 있었다.
영어에 관한 5유닛 죄수들의 방담이 열기를 더할 때 만사에 끼어들기 좋아하는 황이 자신의 의견을 제출하지 않을 리 없었다. 이번엔 미국영어론(論)이었다.
“미국 영어란 것이 말일세……”
황이 흠흠거리며 연음(延音)이 어쩌니 저쩌니 아는 척하며 말이 길어지자 찌웨는 옆에 있던 박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글쎄 그 미국놈도 말을 꼭 이런 식으로 알아먹지 못하게 하더라니까”라는 말을 남기고 멋대로 자리를 떴다. 뒤를 따라 나머지 죄수들도 모두 없어져버리는 통에 황의 얼굴색은 붉으락해졌다. 그러나 동료들이 그런 식으로 사라져버린 이유는 도대체가 알아먹을 수 없는 단어들이 황의 입에서 줄지어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스탠리 감옥의 외국인 죄수들이 수용된 유닛의 영어세계에는‘지껄여도 2백 단어 안팎으로’라는 불문율이 존재했다.
“웬 말을 그리 어렵게 하는가. 천하가 자네 같은 작자들의 세치 혓바닥 때문에 어지러운 걸 모르나?”
마침 황의 등 뒤에 서 있던 살인 무기수 리우(劉) 노인이 핀잔을 주자 황은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미안합니다.”
“다음부턴 말을 좀 제대로 하게.”
“그러겠습니다.”
사정이 이랬으므로 누구라도 두어달쯤 지나면 얼추 이 세계에 끼어들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함은 물론, 심지어 다툼과 모략까지도 능히 수행할 수 있었지만 아쯔시는 어쩐 일인지 이게 되지 않아 외롭고 고독한 이지메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감옥 전체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휩싸인 저녁, 죄수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10호방 앞 기둥에 등을 기대고 하릴없이 고독을 씹던 아쯔시의 눈에 수인복 윗주머니에 꽂힌 작은 일영사전이 들어왔다. 아쯔시는 또 한숨을 내쉬었다. 홍콩 주재 일본대사관의 스탠리 감옥 담당직원 후꾸도메(福留)가 영치해준 물건이었다.
“아, 그렇다면 말이지요. 필담을 해보시지요. 홍콩의 중국인들이 쓰는 한자는 일본 것과도 근본과 생김새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후꾸도메는 한달에 한번 오는 면회에서 딴에는 신통한 조언을 해주었다. 아쯔시는 시간이 남아돌아 골판지 조각으로 불상은 만들어도 공책을 펼쳐놓고 흔쾌히 필담을 끄적일 상냥한 인간은 적어도 5유닛에선 찾아볼 수 없다고 변명처럼 그에게 말했지만, 상용한자(常用漢字) 1945자는 물론 1천자에 불과한 초등학교 권장 교육한자(敎育漢子)의 3분의 1도 정복하지 못한 아쯔시가 필담을 나누기란 애초에 역부족이었다. 사실은 후꾸도메가 이 말을 하기 전에도 상냥한 중국인 황이 필담 나누기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아쯔시는 황이 써갈긴 일필휘지의 필기체 한자 중에서 고작 ‘日’자 하나만을 알아보고 읽을 수 있었다.
마름모꼴의 공간을 빈틈없이 가득 흘러다니고 있는 인간의 소리들, 자신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소리들은 아쯔시를 더욱 쓸쓸하게 만들었다. 10호방 창문 너머의 빗줄기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아쯔시는 울적한 마음에 눈을 감았다. 토떼모 사비시이(참으로 쓸쓸하구나). 애인 준꼬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왠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이역만리 낯선 곳의 감옥으로 처넣어버린 니시오의 얼굴이 흐릿한 준꼬의 얼굴을 덮쳐버려 아쯔시는 분노인지 혐오인지 모를 감정이 밀려와 몸을 떨었다.
마치 환청처럼 어디선가 아쯔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일본어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소꼬 도께(저리 비켜).”
머릿속에서 울린 말일까. 흠칫 놀라 눈을 뜬 아쯔시는 11호방 앞의 기둥에 우뚝 서 있는 낯선 사내를 보았다. 그는 기둥의 그늘 쪽에 서 있었기 때문에 아쯔시는 그의 얼굴을 제대로 살필 수 없었다.
“니혼징데스까(일본인입니까)?”
후꾸도메가 면회를 온 것이 두달 전이었고 아쯔시가 일본어를 말한 것이 그때가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짧은 말이었음에도 발음이 묘하게 흔들렸다. 아쯔시는 말도 기계처럼 기름을 쳐주지 않으면 녹스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흠칫 놀랐다.
사내는 대답 대신 거칠게 손을 들어 아쯔시가 가로막고 있는 10호방의 철문을 가리키더니 역시 일본어로 말했다.
“거기 서 있으니 방해가 되지 않나.”
“스미마셍(미안합니다).”
아쯔시는 엉거주춤 기둥 앞을 피했고 사내는 10호방의 철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졌다. 깡마른 얼굴에 불거진 광대뼈. 검은 피부. 언뜻 스쳐가는 사내의 얼굴이 일본인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철문이 닫히는 둔중한 소리를 낸 다음에도 아쯔시는 그앞을 떠나는 대신 모든 감방의 철문에 문패처럼 붙어 있게 마련인 수인표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간신히 읽은 이름은 레 쭝 호아. 이름으로 보건대 베트남인이었다. 죄명은 디디. 아쯔시와 동류였다. 형기는 엘디디(LDD, 만기출소일)로 역산하면 24년이었다. 그는 이틀 전 신입이 한명 들어온 것을 떠올렸지만 그의 입에서 일본어가 튀어나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잠시 동안 우두커니 서 있던 아쯔시의 머리 위로 벨이 울렸다. 취침시간의 시작을 알리는 벨이었다. 죄수들이 저마다 감방을 찾아가는 발걸음과 철문을 여는 소리로 사방은 한동안 소란스러웠다. 경비간수 앤디가 사무실에서 나와 감방으로 돌아가는 죄수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기둥 앞에 서 있는 아쯔시를 발견하곤 입맛을 다시더니 천천히 걸어와 손에 들고 있던 잡지로 그의 어깨를 찔렀다.
“자파니, 고 백 투 유어 쎌(일본놈, 네 방으로 돌아가).”
아쯔시는 자신의 감방인 15호방을 향해 걷던 중 문득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오까시이(이상하군), 오랜만에 일본어를 들으니 말이야. 한데 내가 일본인인 줄 어떻게 알았을까?”
아쯔시는 감방문 앞의 제 문패를 무심하게 지나쳤고, 문이 닫히자 침상에 누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내내 뒤척였다.
먹구름은 사라지고 폭우도 그쳤다. 스탠리 감옥의 6미터 담장 위에는 태양이 다시금 하얗게 타올랐다. 5유닛에 붙어 있는 테니스코트 하나 반 정도 크기인 삼각형의 콘크리트 소운동장의 절반쯤은 담장과 건물의 그늘이 깔려 있었지만 나머지는 고스란히 지글거리는 땡볕에 드러나 있었다. 콘크리트 타오르는 냄새가 담장 안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달아오른 숯불의 연기처럼 운동장을 맴돌았다. 담장과 건물 사이로 인색하게 열린 하늘은 열기에 떠오른 수증기와 부유물에 가려 부옇게 흔들렸고, 그 아래 운동장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는 웃통을 벗은 한 무리의 죄수들이 갈색의 몸뚱어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농구공을 두고 다투는 고함소리가 가득했다.
“레상.”
보안문에서부터 담장을 끼고 만들어진 녹색 아스콘 보도 끝을 막고 있는 담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레를 발견한 아쯔시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주저하던 끝에 월급날에 구매한 스낵봉지를 뒤로 감추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운동장 어딘가를 바라보던 레가 힐끗 아쯔시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입감한 날부터 지금까지 레는 지독하게 말이 없었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아쯔시는 그런 레를 이해할 수 있었다. 형을 언도받고 스탠리로 이감되어 감방에 처박힌 직후의 심정은 정말이지 끔찍하고 절망적이었다. 아쯔시만 해도 남모르게 감방 침상보를 적신 밤이 몇날이던가. 아쯔시는 레가 눈치채지 못하게 고개를 돌리고 연민을 가득 담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사람은 24년, 자신은 21년. 행형법에 따라 3분의 1을 감한 이디디(EDD, 조기출소일)에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나갈 때쯤이면 환갑의 나이, 자신은 서른다섯. 그래. 이런 사람도 있는데 14년쯤이야. 아쯔시는 자신도 모르게 가벼워진 마음으로 레의 옆에 주저앉았다.
“레상, 누까니 쿠기 스메바 미야꼬(레, 맨땅에 헤딩, 살다 보면 고향입니다).”
아쯔시는 고개를 숙이고 레의 무릎 위로 두 손으로 쥔 스낵봉지를 내밀었다.
“나니(뭐야)?”
“제가 즐겨 보던 만화영화에 나오는 노래의 한 구절입니다. 싯까리시떼이랴(열심히 살면)”
“열심히 살면?”
“이이꼬또모 아루까모요(좋은 일도 있을지 몰라). 그런 노래입니다만.”
“…… 농녀티에우(빌어먹게 덥구만).”
고개를 숙인 레는 이마의 땀을 손바닥으로 훔치면서 베트남어로 중얼거렸다. 아쯔시는 알아듣지 못했다. 레의 손바닥에서 흐른 땀이 아쯔시가 들고 있던 스낵봉지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아쯔시는 재빨리 스낵봉지 든 손을 레의 무릎 위에서 치웠다. 고개를 숙인 레의 옆으로 농구공이 튀었고 이윽고 레의 머리 위쯤에서 담장을 맞고 튀어나갔다. 돌가루인지 모랫가루인지 모를 가루가 레의 머리로 떨어졌다. 레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지만 아쯔시는 눈치채지 못하고 최대한 상냥하게 다시 말을 건넸다.
“아노, 와따시따찌 토모다찌니 나로(저, 우리 친구할까요)?”
“찌꾸쇼오(제기랄). 후장이라도 뚫어달란 말이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털던 레는 불처럼 화를 내며 버럭 소리를 지른 것도 부족해 이빨까지 갈아대며 아쯔시를 노려보았다. 아쯔시는 레가 내뱉은 이 지독한 말과 행동에 입을 벌리고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얏바리(역시). 시간이 좀 흘러야.”
평상심을 찾겠다고 생각한 아쯔시는 황급히 레의 곁에서 물러났다.
홍콩조키클럽의 경마가 열리는 수요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후작업 시간이 되었을 때 4호방의 황은 작업장 한구석에서 여느 때처럼 출전표를 적은 종이쪽지를 손에 들고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두달 넘게 축구와 경마에서 연속으로 졌기 때문에 수중엔 경마에 걸 단 한갑의 담배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황은 수요일 첫번째 경기의‘패스터 패스터’(Faster Faster)란 이름의 말에게 최소한 열갑은 걸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이유는 전날밤 꿈에서 돼지란 놈이 황의 고향마을의 신작로를 달린 것도 모자라 꿀꿀거리는 대신‘패스터 패스터’를 외쳤기 때문이었다. 홍콩에서 꾸는 꿈은 고향 돼지도 영어로 말하는구나. 꿈에서 황은 그렇게 생각했다. 여하튼 운수대길(運數大吉)의 꿈이었지만 도박을 하려면 판돈이 필요했다. 판돈은 담배였다.
작업을 할 수 있는 죄수들은 저마다 한달에 얼마씩 월급을 받았고 월급날이면 그 돈으로 담배나 세면도구, 볼펜 따위를 살 수 있었다.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고 오로지 감옥에서만 판매되는 붉은 갑의 지독하게 독하고 맛이 없는 홍콩제 담배는 20.5홍콩달러로 살 수 있었다. 홍콩의 감옥에서 기결수에게는 영치금 차입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담배를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노동의 댓가로 계산되는 월급이었다. 누구에게나 작업장의 초임은 150달러였고 달마다 조금씩 올라 300달러가 되기도 했지만 1년에 한번씩 작업장을 옮겨야 했으며 그때마다 월급은 다시 150달러로 주저앉았다. 또 출소일에 여비 따위를 챙겨줄 생각이 없는 홍콩 교정당국의 친절한 배려로 월급의 10퍼센트는 의무적으로 저축해야 했다. 때문에 한 죄수가 한달에 손에 넣을 수 있는 담배는 대여섯갑에서 열세갑쯤이 최대였다. 담배는 늘 부족했기 때문에 제 몫의 담배를 건 노름이 벌어질 수 있었지만 스탠리의 프로 갬블러의 세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 사람이 왜 그리 도박에 열심이시오?”
언젠가 박이 황에게 물었다.
“담배 때문에 도박을 한다? 만약 그렇다면 7유닛의 만(文)이란 녀석은 오래전에 폐암으로 죽었을 테지.”
황은 그때만 해도 이제 막 A사동에 입학한 신입생이었던 박의 어깨를 두드리며 폭소를 터뜨렸다.
“스탠리에서 담배가 오가면 바깥에서는 진짜 돈이 오간다네. 자네 카지노에 가봤겠지. 담배는 도박 칩이야. 간밤에 좋은 꿈이라도 꾸어서 한판 크게 걸어보고 싶은데 담배가 없나? 바깥의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계좌에 돈을 넣게. 1천달러에 열세갑이라네. 돈을 넣은 만큼 담배가 들어올 거야. 아니면 담배를 돈으로 바꾸고 싶나? 누군가 자네 계좌에 돈을 넣을 테니 그 친구에게 담배를 주게. 그렇게 스탠리에선 담배가 돌고 바깥에선 돈이 돈다네.”
황은 표정을 짓궂게 만들고 박에게 덧붙였다.
“모두들 꿈을 꾸며 베팅을 하지. 출소한 날 저녁에 몇만달러, 아니 몇십만달러가 들어 있는 통장의 잔액을 확인하는 꿈 말이야. 그러곤 밖의 피붙이들을 윽박질러 제 통장이 아닌 남의 통장에 돈을 넣게 하지. 하지만 헛된 일일세. 도박이란 밖이나 안이나 마찬가지라네. 도박꾼들의 손을 잡고 있지만 도박이란 놈, 입술로는 엉뚱한 놈의 주둥이를 빨고 있지. 그게 도박이라네.”
“그렇게 믿는다면 댁은 뭣 때문에 도박을 하시오?”
박이 딱하다는 표정을 짓고 황을 바라보았다. 황은 또 파안대소에 가까운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건 말이야. 동전 한닢 필요하지 않은 혈혈단신의 무기수들이 피우지도 않는데 담배 따위를 걸고 도박을 하는 것과 같은 이유지.”
황은 그쯤에서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원해서 세상에 나온 것도 아니니 그것부터 누군가의 도박 아닌가.”
작업대와 절삭기, 제본기 사이를 두리번거리던 황의 시선은 이윽고 책의 표지를 덮고 있던 홍콩 출신 리우 노인에게 멈췄다. 강도살인으로 40년형을 언도받은 리우 영감은 26년째 복역중으로 몇년 전에 환갑을 넘겼다. 홍콩으로 본다면 최장기 복역수 2인자의 자리를 꿰차고 있지만 33년으로 1인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노인이 스탠리가 아닌 셱픽(石壁) 감옥에 들어앉아 있기 때문에 스탠리에서는 리우 노인이 1인자였다.
“담배 좀 빌릴까요.”
황은 리우 노인 앞에서 헛기침을 내뱉곤 정중하게 부탁했다. 책 옆구리에 풀칠을 하고 있던 노인은 놀리던 손도 멈추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되물었다.
“어떤 말〔馬〕인가?”
“좋은 말입니다.”
“딴 데 가서 알아보게.”
“…… 1번 경기에 출전하는 패스터란 놈인데요. 뭐니뭐니 해도 간밤에 꾼 꿈이 기가 막힙디다.”
“무슨 꿈을 꾸었는가?”
“좋은 꿈입니다.”
“딴 데 가서 알아보라니까.”
“……”
황은 망설였다. 돼지가 뛰어다녔다곤 하지만 입 밖으로 털어놓아서야 아무리 돼지라도 기분좋게 재수를 가져다 줄 리가 없었다. 그걸 모를 턱이 없을 텐데 말의 이름을 찍어준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으니 탐욕스러운 노인이었다. 그렇다고 핏대를 세울 수도 없었다. 노인이라고는 하지만 70년대 홍콩에서 피스톨 리우라면 모르는 작자가 없었다는 소문은 황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무장갱단을 조직해 불법도박장을 털다 재수없게도 그때 도박장에서 마작알을 굴리던 사복경찰 몸뚱어리에 구멍을, 그것도 여덟개나 뚫은 탓에 40년을 먹은 노인이었다. 리우 노인은 스탠리 감옥 안의 조직깡패들에게도 자신의 전력에 합당한 예우를 받고 있었다. 잠시 머리를 굴리던 황은 딴 데서 알아보기로 마음을 정하고 묵묵히 리우 앞을 물러났다. 5유닛에서는 딴 데라고 해봐야 하나밖에 없었다. 베트남 출신의 딘이었다.
“담배 좀 빌리세나.”
“엉클. 몇갑이나 필요하세요?”
절삭기 옆에 놓인 작업대에서 담배 케이스를 만들던 딘은 놀리던 손을 멈추고 황을 엉클이라 부르며 여느 때처럼 살가운 태도로 황을 맞았지만 늘 그랬던 것과는 달리 입가에 미소를 띠지는 않았다.
“열갑.”
“저녁에 드리지요. 담배로 돌려주시겠어요, 입금을 하시겠어요?”
월급날이 보름 남짓 남아 있었다.
“담배로 갚지.”
“열다섯갑인데 열네갑만 주세요.”
딘이 반대편 작업대의 리우 노인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리우 노인보다 한갑이 많은 이자였다.
“그러세나.”
황은 시큰둥한 얼굴로 작업대 한편에 놓여 있던 완성된 담배 케이스를 집어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20개비가 들어가도록 하드커버 용지로 만든 여닫이식 담배 케이스로, 제법 정교했다. A사동에서 돌아다니는 종이 담배 케이스는 모두 5유닛의 제본 작업장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솜씨가 좋구나.”
“마음에 들면 가져가세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내겐 필요없는 물건이네.”
이 녀석이 담배 케이스를 만들면 머리가 복잡하다는 뜻인데. 황은 딘의 손놀림을 살폈다. 이제 막 뚜껑식 담배 케이스 하나가 그 손끝에서 탄생하고 있었다. 황은 딘이 잉크가 떨어진 볼펜심의 끝을 이용해 마지막으로 케이스 모서리에 자기 이름을 음각으로 새겨넣을 때까지 잠자코 지켜보았다.
“멋지군.”
작업대에 걸터앉아 딘의 손놀림을 지켜보던 황은 딘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패스터 패스터. 너무 뻔한 이름이 아닌가.
베트남 출신의 딘. 살인으로 열넷에 청소년교정시설 픽욱(壁屋)을 거쳐 스탠리 A사동에 들어와 이미 10년을 살았고 세상 밖으로 나가려면 아직 10년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나마 무기였던 형기가 상고심에서 32년으로 줄었기 때문이었다. 성은 짠이었지만 스탠리에서는 이름인 딘으로 불렸다.
“베트남 성으로 짠이면 중국 성으론 첸(陳)이야.”
바깥에서 뭘 하며 굴렀는지 잡학으로는 당할 재간이 없는 황은 딘을 첸으로 불렀다. 살인 무기수 중에는 최고로 상냥한 편이어서 디디들과도 허물없이 지내는 편이었지만 딘은 황이 자신을 첸으로 부르는 것은 질색이었다.
“부모님이 주신 성을 왜 댁이 맘대로 바꾸세요. 그럼 누가 댁을 흐엉이나 호앙으로 불러도 좋아요?”
“음. 호앙이면 황이라네. 그렇게 부르게나. 어차피 마찬가지야.”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러셔요. 댁도 호앙이 아니고 나도 첸이 아니에요.”
“흥분하지 말게. 자넬 첸으로 부른다고 해서 자네가 아니고 날 호앙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내가 아니겠는가?”
“나 참. 맘대로 하셔. 댁이 뭐래도 간수들과 다른 사람들은 날 짠이라고 부를 테니.”
“간수들은 짠이 첸과 같은 줄 모른다네. 누가 알겠나? 내가 그 친구들에게 짠이 첸이라고 알려주면 자넬 첸이라고 부를지.”
“이 아저씨가.”
급기야 숨이 거칠어진 딘은 황을 노려보다 바람소리를 내며 돌아서 제 감방 쪽으로 걸어갔다. 마침 옆에 서 있던 박이 보기에 황의 처사는 희롱에 가까웠다. 게다가 어리다고는 해도 죄목이 살인이어서 딘이 돌아서며 눈을 번득일 때 박은 제 가슴 한편이 슬쩍 서늘해지기도 했다.
“멀쩡한 남의 성을 두고 왜 억지를 부리시오.”
박이 그런 황을 탓하자 황은 오히려 싱글거렸다.
“성이 뭐 대수인가. 왕(王)씨라고 해서 왕인 것도 아니요 하물며 형이 줄어들 것도 아닌데. 그나저나 저 녀석이 그동안 내게서 이자로 뜯어간 담배가 쉰갑이 넘는다네.”
박도 그저 헛웃음을 날렸다.
스탠리 감옥의 젊은 고리대금업자 딘의 감방 침대 밑에는 자신이 직접 만든 종이박스가 놓여 있었다. 물론 박스는 담배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정작 딘은 담배도 피우지 않았고 도박에도 손을 대는 일이 없는 모범생이었다. 꽝뚱어(廣東語)도 흠잡을 데 없이 구사하는 딘은 자신을 하노이 출신이라 말하지만 사실 그는 메이드 인 홍콩이었다.
“들어보게. 딘이란 녀석은 말이야, 홍콩에서 태어났어. 짠이 아니라 첸이라고 해도 섭섭할 것이 없는 녀석이라네. 홍콩 아이디도 있어.”
“홍콩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베트남 아이가 아이디를 얻을 수 있나?”
“그렇지는 않지. 모르긴 해도 저 녀석이 아이디를 얻었을 때는 열살은 넘었을 거야. 그전까지는 무국적이었겠지. 자네 마온샨(馬鞍山)의 팍셱(白石)이라고 가본 적이 있나?”
“…… 홍콩에 아는 곳이라곤 침샤추이(尖沙咀)가 전부요.”
“그런가. 그럼 나중에라도 한번 가보게나. 해변 풍경이 아주 좋다네. 지금은 골프연습장이 들어섰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밖에 있던 5년 전까지만 해도 말이야. 뭐, 지금도 달라지진 않았겠지만.”
“골프연습장 전에는 뭐가 있었단 말이오?”
“베트남 난민수용소가 있었지. 홍콩에 서너개가 있었지만 팍셱은 그중에서 가장 큰 수용소였어. 많을 때에는 수용인원이 3만명이 넘었다고 하니까 말이야.”
“홍콩에 베트남 난민수용소가 있었소? 금시초문이네.”
“있는 게 다 뭐야. 내가 처음 홍콩에 왔을 때만 해도 길바닥에서 베트남말로 떠드는 인간들을 지나치지 않고는 하루를 온전히 보낼 수 없었다네. 보트피플들이 줄을 이어서 홍콩에 도착할 때였어. 주로 북베트남에서 뜬 배들이 홍콩 쪽으로 왔지.”
“하긴 그즈음에 한국에도 베트남 보트피플이 오기도 했던 것 같은데.”
“남한까지? 흠. 보트로 남한까지 갈 수는 없지. 아마 중간에 남한으로 항해중인 화물선을 만났든지 했을 것이야.”
“그랬을지도.”
“하여간. 이 녀석은 어머니가 보트를 탔어. 집안에서 한명밖에 보낼 수가 없었다고 하더군. 마침 임신까지 한 몸이었으니까 한명 값으로 두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간신히 홍콩까지 와서 수용소에 들어와 다섯달 만에 애를 낳았어. 1984년인가 85년이었을 텐데 마침 금폐령〔禁閉營政策〕이 떨어진 후여서 감옥신세나 다를 바가 없었지.”
“금폐령은 또 뭐요?”
“보트피플들이 처음 홍콩에 왔을 때에는 수용소 밖 출입이 자유로웠어. 아침이면 신제(新界)의 공장들이나 아파트를 오가면서 품을 팔고 저녁이면 돌아갔지. 물론 불법이야. 수가 점점 늘어나고 수용소에 돌아오지 않고 어딘가 눌러앉거나 사고들이 빈번해지면서 1982년에 아예 수용소 문을 닫아버렸어. 게다가 심사도 까다로워지고 난민 쿼터를 받아들이는 나라들도 줄면서 수용소 생활에 기약이 없어졌을 때가 저 녀석이 태어났을 때야. 그나마 없는 쿼터에라도 올라타려면 이리저리 사정을 엮어서 정치적 난민이니 뭐니 주워섬겨야 되는데 홍강(紅江) 삼각주 언저리에서 농사짓다 부지불식간에 남편이 등을 밀어서 온 농사꾼 아낙이 뭘 아는 게 있어야 주워섬기지.”
“그러게 홍콩엔 쥐뿔이나 뭐 먹을 게 있다고 왔다는 것이오?”
“쥐뿔이나 먹고살기 어려워서 왔겠지. 보트 타고 오다가 남중국해에서 물귀신 된 인간들도 많았어. 딴엔 모두들 목숨 걸고 떠났던 것이야.”
“그래도 고향이 좋은 것인데.”
“살다 보면 다 거기서 거기라네. 공연히 고향을 두고 다투는 녀석들이 괴팍한 놈들이지.”
“한데 그런 녀석이 어쩌다 여기 들어와 있는 것이오?”
“수용소에서 어머니와 10년을 살았다는구만. 그동안 모친은 베트남으로 돌아갈 생각도 했던 모양인데 남편이 그새 무슨 일로인지 횡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주저앉았어. 그러다 운좋게 난민 판정도 얻고 종국엔 흔치도 않은 현지 정착프로그램에 걸려서 모자가 홍콩 아이디를 받은 것이지. 그 뒤엔 어머니가 파출부 따위를 해서 간신히 먹고살았던 모양인데 이 녀석은 이 녀석대로 그렇고그런 쪽으로 흘러간 거지. 어린 나이에 주머니에 든 칼 하나 믿고 껄떡거린 모양인데 결국 사고를 치고 진짜 감옥에 들어온 것이야.”
“모친은 아직 살아 있소?”
“그러니 예까지 와서도 열심이지 않나. 내 담배를 쉰갑이나 뜯어가면서 말이야. 모르긴 해도 저 녀석 통장으로 들어가는 돈이면 그럭저럭 연명은 하고 있을 것일세.”
황의 그 말에 박은 문득 마지막으로 보았던 아내의 수척한 얼굴이 떠올라 마음이 저릿해졌다. 어떻게 밑천이라도 마련해 돈을 벌 궁리라도 해볼까나.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한국도 아닌 이역만리 홍콩에서 밑천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남의 사정을 어떻게 그리 잘 아시오.”
“내가 처음 홍콩에 왔을 때 샨뚱(山東)의 외가쪽 친척 하나가 팍셱 수용소에 있었지. 사이공에서 온 사람인데 난민이라곤 해도 쫄롱에서 도매를 했던 사람이라 홍콩에 와서도 제법 형편이 넉넉했어. 한동안 신세도 좀 지고 사업도 같이 한 덕에 내가 저쪽 친구들 내력은 좀 안다네.”
자카르타에서 마약과 도박으로 그 허구한 밤들을 지새운 누르마는 월급밖에는 쥐뿔도 가진 것이 없었고 통장이 있어봐야 돈을 넣어줄 인간이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기껏해야 담배 서너갑을 가지고 축구와 경마에 손을 댔다. 자카르타에서처럼 결과는 늘, 번번이 맹탕이었다. 지난 월급을 계산한 지 보름이 지났으므로 담배는 벌써 지난주에 동이 나 도박은커녕 지금은 꽁초나 얻어볼까 두리번거리는 신세였다. 그런 누르마가 안달을 낼 일이 생겼다. 황이 들고 있던 경마 쪽지를 슬쩍 훔쳐본 것이었다.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누르마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고 쪽지는 황의 수인복 윗주머니로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지만 도박 관련이라면 거의 평생을 전업하다시피 해온 누르마의 농익은 시선을 피하지 못했다. 물론 누르마가 그 찰나의 순간에 훔쳐본 것은‘패스(Fas)’라는 앞글자뿐이었지만 그게 패스터 패스터라는 걸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홍콩조키클럽의 경마에 출전하는 말들에 대한 누르마의 지식으로 보건대 도대체 우승후보에 올려놓을 만한 말이 아니었고 전적 또한 보잘것없었다. 따라서 만에 하나 우승한다면 배당률이 높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봐야 스탠리 클럽의 불법경마여서 밖의 세상과 비교한다면 배당금이 조족지혈이긴 하지만.
누르마는 패스터 패스터가 아니라 황의 운수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황은 벌써 두달째 공을 치고 있었다. 그 두달 동안에 축구경기가 6건, 경마가 16건이 있었다. 아마도 황은 그중 적어도 10건쯤에 손을 댔는데 연전연패였다. 뿐만 아니었다. 오죽하면 작업장에서 개비 담배를 놓고 심심풀이로 치는 포커판에서도 예닐곱번을 내리 잃었다. 그러나 누르마가 생각하기에 도박이란 숙명적으로 연전연패가 불가능했다.
“백번 베팅을 해서 백번을 잃는다면 어느 놈이 도박에 손을 댄단 말인가?”
이게 누르마의 도박관이었고 그런 누르마가 볼 때 황은 이제 한번쯤 딸 때가 되었다. 게다가 딘에게 담배까지 빌린 것으로 보아서는 누르마가 알 수 없는 다른 무엇도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판돈인 담배였다. 먹고 죽고 싶어도 없는 담배였다. 최고의 친구인 무디시라프에게 사정해봐도 될 일이 아니었다. 이래저래 깔아놓은 누르마의 빚은 벌써 열다섯갑이 넘었고 그 빚에 진즉 무디시라프의 목덜미도 끌어댄 누르마였다. 사정을 뻔히 아는 정도가 아니라 그 빚의 채권자인 리우 노인과 딘이 담배를 더 대줄 이유가 없었다. 일절 바깥의 도움 없이 오직 노동을 담보로 홍콩 교정당국이 지불하는 쥐꼬리만도 못한 월급으로만 지내는 누르마 같은 끈 없는 수인에 대한 대출은 사실 담배 열갑이 꼭지였다.
누르마는 오후작업 시간에 전날 황이 그랬던 것처럼 작업장의 구석구석을 두리번거렸다. 어차피 작업량은 오전시간에 모두 끝이 나는 정도여서 오후작업이란 자유시간이나 다름이 없어 작업대 밑으로 들어가 낮잠을 때리거나, 죽이 맞는 인간들끼리 모여 잡담을 나누거나, 예술적 취향에 따라 담배 케이스나 종이액자, 달력 따위를 만드는 시간이었다. 누르마의 시선은 베트남인 레 쭝 호아에게 머물렀다. 전날 아쯔시에게 일본말을 내뱉은 바로 그 사내였다. 신입이었으므로 레는 작업장 규칙에 따라 다음 신입이 들어올 때까지는 청소담당이었고 그에 걸맞게 빗자루를 사타구니 사이에 끼고 벽에 기대어 앉아 눈을 가늘게 뜨고 작업장 벽 3미터 높이의 손바닥만하게 뚫린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거진 광대뼈에 치켜 올라간 눈,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얼굴은 정이 가다가도 질색하고 돌아올 만했다. 그러나 신입이니 당연히 신용도 신품이었고 담배도 안 피우는 것처럼 보였다. 잘하면 저치의 신용으로 리우 노인에게서 다섯갑 정도는 땡길 수 있지 않을까. 누르마는 한동안 레의 거동을 살폈다. 마네킹처럼 움직임이 없는 사내였다. 하긴 사흘이 되었는데도 주변의 인간들에게 말을 거는 꼴을 보이지 않는 사내였다.
“헬로우 미스터.”
누르마는 천연덕스럽게 레의 옆으로 다가가 최대한 혓바닥을 부드럽게 굴려 영어로 말을 걸었다. 창문을 보고 있던 레의 시선이 천천히 누르마를 향했다. 빌어먹을. 무슨 짓을 하며 굴렀는지 백보를 양보해도 서늘한 눈빛이었다. 누르마는 뒷골이 조금 당겨오는 것을 느꼈다.
“인사가 늦었어요. 5유닛에 온 것을 환영해요.”
슬쩍 긴장한 탓인지 누르마의 혓바닥은 원래대로 풀렸고 멋대로의 영어가 흘러나오다 문득 멈추었다. 젠장. 누르마는 고개를 저었다. 홍콩에 둘밖에 없는 맥시멈 씨큐러티(maximum security) 감옥 중 하나이며 해변의 콘크리트 성냥갑이나 다름없는 A사동에 들어앉은 자에게 환영이란 말을 쓰다니. 이게 될 말인가. 누르마는 적당한 인사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웰컴’은 이미 입 밖으로 흐른 다음이었다.
“누르마. 그 친구 영어 못해.”
뒤쪽 작업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제본중인 책을 뒤적이고 있던 말레이시아인 목이 헛수고하지 말라는 듯 누르마에게 말레이어로 말했다. 인도네시아말이나 말레이시아말이나 거기서 거기였으므로 둘은 불편함이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못해?”
말이 안 통하면 무슨 일인들 될까. 게다가 트고 지내봐야 유쾌할 일이 결코 없을 것처럼 여겨지는 친구였다. 잠시 망설이던 누르마는 신용 빌리기를 포기하고 돌아섰지만 못내 아쉬웠다.
“저 사람, 베트남말밖에 못하는가?”
목의 옆에 앉은 누르마가 레를 옆눈길로 훔치며 물었다.
“웬걸. 간수하고 말하는 걸 들으니까 꽝뚱어도 유창하고 아쯔시란 녀석이 추근대는 걸 보니까 자파니말도 하는 모양이더군.”
“자파니말까지? 신기한 친구구만. 말레이어는 못하던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누르마가 묻자 목은‘그게 알고 싶어?’하더니 느닷없이 말레이어로 버럭 목청을 돋웠다.
“오랑 비엣남 디안쿳(씨팔 베트남놈아)!”
“어쿠쿠. 이 친구가.”
누르마는 불에 덴 것처럼 놀라 작업대에서 엉덩이를 떼고 벌떡 일어서며 레를 바라보았다.
“어때. 알아듣는 것처럼 보이나?”
목이 낄낄거리며 눈이 희둥그레진 누르마의 뒤통수를 쳤다. 레는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다. 누르마는 문득 작업장 한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손바닥만한 책에 코를 박고 있던 아쯔시에게 눈을 돌렸다. 그렇지. 누르마는 무릎을 쳤다. 담배 피우는 꼴을 보질 못했고 편지봉투 하나 사질 않았으며 기껏해야 스낵 쪼가리나 구매하는 친구였으니 신용은 만빵일 것이었다. 누르마는 목의 옆구리를 찔렀다.
“자네. 자파니말 좀 할 줄 아나?”
“몰라.”
누르마가 오전부터 발정난 수캐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죄수들을 집적거리는 이유를 뻔히 알고 있던 목은 혀를 찼다.
“매번 잃기만 하는 주제에 왜 이리 난리야. 월급날도 보름밖에 남지 않았잖아. 여기서 나가려면 15년을 넘게 기다려야 할 텐데 겨우 보름을 못 기다리나?”
“모르는 소리. 운이란 때를 시험한다네. 기회란 뒷대머리와 같아서 지나가면 잡을 수가 없어.”
“지난밤 꿈에 알라께서 무슨 말이라도 주시던가?”
“당치 않은 소리. 알라께선 이런 일에는 절대로 말씀을 주시지 않는다네.”
누르마는 고개를 흔들었다. 거의 평생을 도박에 몸담은 경험에 비추어볼 때 알라에게 운을 받는 꿈을 꾼 적이 많았지만 한번도 진짜였던 적이 없었다. 모두 알라를 가장한 진(이슬람의 악마)의 흉악한 꼬드김이었다.
“자네 꽝뚱어는 좀 하지 않는가.”
“좀 하지.”
목은 헤로인 운반업에 뛰어들기 전 8년 동안 홍콩에서 각종 저급노동력을 팔며 구른 이력을 갖고 있었다. 누르마는 걸터앉았던 작업대에서 뛰어내렸다.
“헬로우 미스터 아쯔시.”
작업장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아쯔시는 별안간 눈앞에 시커먼 작자가 얼굴을 들이밀자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미니 일영사전을 떨어뜨렸다.
“플리즈 컴 위드 미.”
“하이. 하이.”
동문서답이 계속되면서 결국 누르마는 아쯔시의 손을 잡아끌었다.
“콘나 헨따이야로오(이런 변태자식).”
느닷없이 손을 잡힌 아쯔시는 벽에 등을 붙이고 완강하게 저항하며 누르마의 손을 뿌리쳤다. 누르마가 자신이 음흉한 의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일본식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손을 모아 싹싹 비비자 태도는 누그러졌지만 아쯔시를 이해시킬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던 아쯔시는 바닥에 떨어뜨렸던 일영사전을 주워 누르마에게 내밀었다. 이번엔 누르마가 당황했다. 바하사 인도네시아(인도네시아어)는 라틴문자를 이용한 것이어서 영어문자나 진배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어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또다른 차원으로, 그따위는 모쪼록 학교 문턱을 넘어야 가능했다.
“글쎄, 가보자니까.”
누르마는 목이 걸터앉아 있는 작업대 쪽을 가리켰다. 그옆 구석에는 레가 앉아 있었다. 아쯔시는 레를 보자 그제야 주춤거리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섰다.
이렇게 아쯔시나 레에게 담배를 빌리기 위해 누르마가 힘들게 마련한 4인의 대화는 그야말로 시작부터 끝까지 엉망진창 난장판이었다. 우선은 레가 예기치 않게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뭐 하자는 짓이야?”
갑자기 주변을 에워싼 세명의 죄수들을 보고 레는 신변의 위협을 느꼈는지 재빨리 방어자세를 취하며 목에게는 꽝뚱어로, 아쯔시에게는 일본어로 외쳤다.
“이봐. 그게 아니라 말이야.”
목이 손을 내저으며 레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내저은 손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게 아니거나 저게 아니거나 뭐야?”
레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무기가 될 만한 것을 찾다 손이 뻗치는 곳에 있던 책뭉치에서 제일 두툼한 양장본 책 한권을 손에 들고 벌떡 일어나 마치 벽돌이나 되는 듯이 휘둘렀다.
“너희들 내가 만만해 보여?”
“아니야. 아니야. 이 친구가 이야기 좀 하자는 것이야.”
목은 서둘러 누르마를 가리켰고 레의 급작스러운 거친 행동에 얼이 빠져 있던 누르마는 게걸음을 치다 엉겁결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던 아쯔시를 가리켰다. 레는 민첩한 동작으로 아쯔시에게 몸을 돌렸다.
“고레 니혼징, 시니따이(이 일본놈, 죽고 싶어)?”
레는 손에 든 것이 마치 칼이라도 되는 양 날뛰었다.
“히도이(끔찍하군).”
아쯔시는 우선 목의 등 뒤로 몸을 숨겼고 곧이어 날렵한 걸음으로 제본구멍을 뚫는 드릴머신 뒤편으로 달아났다.
“끗세오응아이(꺼져버려)!”
레는 홀로 남은 목의 눈앞에 책의 모서리를 사납게 흔들며 모국어인 베트남어로 외쳤다. 목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누르마도 아쯔시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비겁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었다.
“디안쿳(씨팔놈들)!”
급한 김에 목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딱히 손에 잡을 것이 보이지 않았다.
“음호우이시 음호우이시(미안해 미안해).”
급한 김에 목은 꽝뚱어로 레를 달래면서 공격을 피했다. 손바닥만한 작업장이라 한놈이 미쳐 날뛰면 제대로 몸을 숨길 곳도 없었다. 목은 이 생각지도 못한 청천벽력의 궁지에서 헤어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누르마 이 자식. 그깟 담배 몇갑 때문에. 목은 누르마를 찾기 위해 그 와중에도 두리번거렸지만 어느 작업대 밑에 숨어 있는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게 목의 실수였다. 한눈을 파는 바람에 목은 레가 휘두른 제목도 알 수 없는 양장본 책의 모서리에 이마를 정통으로 맞고 쓰러졌다. 잠시 의식을 잃기 전에 목은 쥐어짜듯 중얼거렸다. “오랑 인도네시아 디안쿳.”
“글쎄, 그 친구 건드리지 마. 죄목은 운반이지만 어디서 사람 하나 골로 보낸 것이 분명해. 이야기를 들으니 첵랍콕 공항 검색대에서 들어가기도 전에 난동을 부렸다는 거야. 아이스 두개(2킬로그램)를 가방에 넣고 말이지. 그게 날 잡아 잡수라는 짓이지 뭐였겠어. 재판받을 때도 말이야, 판사석에 뛰어올라가 멱살을 잡고 흔든 것도 부족해 머리로 들이받는 통에 판사 이빨에 금이 갔다고 하더군. 그러니 두개로 24년을 먹지 않았겠어. 법정소란에 폭행, 괘씸죄까지 보너스로 더해서.”
오후 운동시간에 딘은 목과 꽝뚱어로 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게 사람 골로 보낸 것과 무슨 상관이야?”
“일본에서 살다 왔다는데 일본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거지. 하지만 일본이 아무리 살기가 팍팍하다 해도 여기보다 못하겠어? 돌아갈 수 없으니까 눌러앉은 것인데 뭐, 다른 이유가 있을까?”
“그나저나 저놈은 너처럼 베트남놈 아닌가.”
“그렇지.”
“어쩌다 일본으로 간 거야?”
“홍콩에 있던 난민이야. 일본 쿼터를 받았지.”
“어떻게 아는가?”
“그냥 알아.”
“그냥 알아?”
뭔가 사연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밀려온 통증에 목은 어금니를 깨무느라 정신이 없어졌다. 이마에 갓난애 주먹만한 크기로 튀어나온 혹은 간헐적으로 지독한 통증을 선물했다. 목은 혹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혹을 쓰다듬던 손목도 함께 욱신거렸지만 그건 레의 탓이 아니었다. 목과 딘이 서 있던 맞은편 담장 앞에서 리우 노인과 함께 서 있던 누르마가 힐끗 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목은 그런 누르마의 시선을 피한 후 딘에게 낮은 목소리로 허풍을 떨었다.
“하여튼. 이놈 나중에 걸리면 내 손에 아주 요절이 날 것이야.”
수요일. 홍콩조키클럽의 경마는 여느 때처럼 여덟 경기 모두 별 탈 없이 열렸지만 스탠리 감옥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화요일 오후 죄수들이 작업장에 있는 동안 일제 감방검색이 있었고 경마 베팅카드가 나온 죄수들은 모두 징벌을 받았다. 스탠리 감옥의 도박조직이 벌이는 수요일 경마는 각 유닛의 소지들이 베팅카드를 전달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이미 화요일 오전 감옥당국과 조직이 좋게좋게 협상한 결과 취소하기로 되어 있었다. 한동안 신문들이 홍콩에 만연한 불법도박에 대해 떠들어댄 후유증이었다. 5유닛에서는 인도네시아인 누르마와 말레이시아인 목 그리고 리우 노인이 걸렸다. 셋 모두 징벌위원회에 회부되는 신세를 피하지 못했다.
“이봐. 노인을 공경할 줄 알아야지.”
간수 앤디가 징벌위원회 호출을 알리는 자리에서 리우 노인은 살인 무기수답게 점잖게, 그러나 완고하게 저항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공경은 집에 가서 받으셔.”
앤디는 깐죽였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한때 홍콩을 피스톨로 주름잡던 리우 노인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지만 어쨌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작업도 운동도 금지된 독방 일주일 이상은 따놓은 당상이었지만 더욱 가슴 아픈 문제는 위원회가 판정한 일수만큼 조기출소일이 뒤로 밀린다는 것이었다. 이 경우에는 무조건 한달 이상이었고 석달이 될 수도 있었다.
“흥. 그깟 한달쯤이야.”
무기수인 리우 노인은 담담했지만 처지가 다른 목과 누르마는 징벌위원회에서 어떻게 하면 조기출소일의 연기를 막아볼까 하는 궁리에 잠을 못 이룰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카드를 없앴어요?”
한바탕의 소란이 지나간 수요일 저녁 휴식시간. 딘이 넌지시 황에게 물었다.
“소지인 아길레가 7유닛의 만이 보낸 쪽지를 전해주더군. 어제 감방검색이 있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어. 그 친구 작업반장만 10년이라 발이 넓잖아.”
“그걸 혼자만 알고 있었어요?”
“가끔씩 틀릴 때도 있거든. 모두 제 운이지.”
황은 히죽 웃었다.
“여하튼 열네갑이에요.”
“알고 있네. 경마야 이번 일요일에도 열리지 않나. 다음주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도 시작할 테고.”
감방문이 열렸다. 하루 일과를 다른 날과 달리 번거롭게 끝낸 죄수들은 모두 감방 안으로 사라졌다. 철커덕 소리를 내며 문들이 닫혔고 온종일 달구어진 열기로 후끈한 5유닛에는 이내 정적이 주저앉았다.
감방문이 닫히기 15분 전인 7시 15분. 섬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홍콩조키클럽의 해피밸리 경마장에서는 첫번째 경주가 시작되었다. 휘황한 조명 아래 다른 열한마리의 경주마들과 함께 코스의 출발점을 박차고 뛰어나간 패스터 패스터는 전력을 다해 결승점을 향해 뛰었다. ‘어메이징 포춘’(Amazing Fortune)에 뒤이은 5위였다. 우승과는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올해 들어 가장 좋은 기록을 세운 패스터 패스터는 푸르르 콧바람을 내뿜으며 헐떡거렸고 기수는 대견한 듯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세번째 경주가 시작하기도 전에 죄수들은 저마다의 감방 안에서 숨을 틀어막는 열기에 일제히 뒤척이며 헐떡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