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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21세기에 던지는 김정한 문학의 의미
탄생 100주년을 맞은 요산의 문학
구모룡 具謨龍
문학평론가, 한국해양대 동아시아학과 교수. 저서로 『제유의 시학』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 『시의 옹호』 등이 있음. gumo09@chol.com
탄생 100주년을 맞은 요산(樂山) 김정한(金廷漢, 1908~96)의 삶과 문학을 다시 생각해본다. 그동안 요산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이어졌다. 하지만 아직 오롯한 정본 전집이 발간되지 못한 것처럼 메워야 할 공백들도 적지 않다. 특히 스스로 만든 절필과 복귀 담론은 요산 문학의 전체를 조감하는 데 장애가 되었다. 요산의 글쓰기의 전모를 드러낼 전집에 대한 요구는 그의 생애를 재구성할 평전에 대한 기대와 함께한다. 다행히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시점에서 그의 고향인 부산지역의 후배와 제자들이 정본 전집을 준비하는 한편, 그의 문학을 새롭게 읽으려는 노력들을 전개하고 있다.
이 글에서 나는 그동안 문학적 생애 구성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보충하고 오늘의 맥락에서 요산문학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한다. 요산의 의도를 좇을 때 그의 문학적 생애에서 1940년 절필 이전과 1966년 문단 복귀 이후가 서로 분절되어 강조될 수밖에 없다. 자연히 일제말과 해방공간 그리고 한국전쟁, 자유당 독재와 4·19혁명 등 요산의 삶에서 중요한 시기들이 균형있게 설명되지 못한다. 실제 절필과 복귀는 작가가 스스로 정한 규정에 불과하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규정은 소설가라는 자의식의 산물로, 유의미한 작품활동을 강조하려는 의도와 결부된다. 하지만 작가의 절필-복귀 발언의 심층에 내재한 여러가지 심리적인 유인들도 없지 않을 것이므로, 이를 단순한 참조사항 정도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다.
요산문학은 시대와 삶, 행동과 글쓰기를 전체적인 맥락으로 읽을 때 그 본령에 대한 설명이 가능하다. 그동안 생애와 문학을 행동과 글쓰기라는 차원에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생애와 문학을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기보다 제한적인 관점으로 읽어온 경향이 더 많았다. 요산에게 행동과 글쓰기는 상관적이다. 행동이 먼저일 때 글쓰기는 그 뒤를 잇고 글쓰기로써 행동을 대신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는 작가이기 이전에 행동하는 지성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많은 미완의 유고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남긴 미완의 유고들1은 그에 대한 문학적 기대를 지닌 이들에게 아쉬움을 더한다. 특히 장편 부재를 요산문학의 한계로 지적한 이들에게 요산이 시도하다 만 여러 미완의 장편이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실제 요산은 리얼리즘의 규범이나 완결된 소설미학을 추구하지 않았다. 이보다 그는 제국과 국가의 폭력에 신음하는 민중의 구체적인 사실을 이야기하려 했고 그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증명하려 했다.
1. 세계관 형성과 글쓰기
많은 문인들이 그러했듯 요산도 처음에 시를 썼고 여기에 인격형성기의 감상과 고뇌가 담겨 있다. 요산에게 시는 문사적 전통을 담지한 조선인으로서의 공통감각의 소산이다. 그는 생애 내내 자신의 글에서 한시를 예로 들거나 시조를 읊조리는 모습을 보였다. 특별히 시인이 되려 했다기보다 문인이 되려 한 것이다. 요산에게 근대적인 문학관습으로서의 장르는 자신을 구속하는 요인이 되지 못했다. 시를 쓰다 소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소설이라는 그릇이 그에게 필요했던 것이다. 전모가 전해지지 않은 옥중시의 존재나 허다한 산문이 말해주듯 그에게 시쓰기, 소설쓰기, 산문쓰기는 모두 글쓰기라는 하나의 행위범주에 속한다. 그는 현실상황에 응전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장르라는 그릇을 빌려 썼다.
요산이 소설을 쓴 것은 와세다(早稻田)대학 유학시절이다. 당시 쓴 소설인 「구제사업(救濟事業)」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요산은 시를 쓰다 소설을 쓰게 되는 과정을 “우에노동물원에 갇혀 있는 조선학을 보고 꺼적거려 본 이런 비분강개조의 시조(「조선학」)를 『대조』에 발표한 뒤로는, 쓰는 걸 당분간 그만두었다. 몇군데의 문학단체에 이름을 걸어두었지만, 그 뒤 소설이라고는 「그물」(1932)이란 걸 국내 잡지에 발표했고, 「구제사업」이란 건 『집단』인가 『신계단』인가에 목차만 들어가고 원고는 압수되고 말았다”(「저항의 물결 속에서」)고 진술한 바 있다.2 “「그물」이란 걸 국내 잡지에 발표했고”라는 대목에 유의할 때 이 두편의 소설이 유학시절에 씌어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요산은 유학시절 시쓰기에서 소설쓰기로 나아간다.
요산의 문학적 생애에서 와세다 유학시절은 대단히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요산의 주된 관심은 사회과학이었다. 와세다대학은 당시 오오야마 이꾸오(大山郁夫)를 비롯한 사회주의 지성계의 중심이었다. 요산이 공부단체인‘동지사(同志社)’에 신고송(申鼓頌), 이찬(李燦), 박석정(朴石丁) 등과 함께 이름을 내보인 것은 1931년 11월이다. 주지하듯이‘동지사’는 카프(KAPF) 토오꾜오지부 해체와 더불어 등장한‘무산자사(無産者社)’를 뒤이은 재일조선인 예술단체이다. 1931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과 관련하여 고경흠(高景欽) 등이 체포되면서 조직 와해의 위기에 처한‘무산자사’와 카프 맹원들이 결성한 것이다. 『무산자』는 카프 토오꾜오지부 기관지 『예술운동』을 이은 매체로, 김두용(金斗鎔), 임화(林和), 이북만(李北滿), 김남천(金南天), 이찬 등이 관여했다. 김남천, 임화, 안막(安漠)이 귀국한 것은 1930년 봄이다. 여기서 우리는 안막이나 이찬과 요산의 교분을 염두에 둔다면 요산이 카프 토오꾜오지부의 자장 안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30년에 집중적으로 해오던 시쓰기가 1931년 초에 이르러 뚝 그치게 되는 까닭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3 1932년 여름 귀국하기까지 2년여 동안 요산은‘무산자사’‘동지사’와 더불어 활동한 것이 분명하며, 이 시기 요산의 세계관도 형성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물」은 소품이지만 요산의 세계관을 잘 반영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요산은 식민지 하위주체인 소작농민의 각성에 자신의 시선을 두면서, 이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상위계급과 억압적 국가기구의 의미를 그려낸다. 이 소설이 시사하듯 제국과 국가의 폭력 앞에 놓인 민중이라는 개념은 요산문학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주제이다. 소작농민과 마름과 지주와 국가기구인 주재소의 관련양상에 착목하는 이 소설의 시점은 징병과 징용이라는 제국의 폭력적 개입과 국제적 노동분업으로 이산하는 민중의 삶을 그린 「오끼나와에서 온 편지」(1977)에 이르기까지 지속된다. 요산의 소설에서 주목되어야 하는 것은 그의 작품이 리얼리즘을 어떻게 구현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서술자의 위치와 서술방식이다. 요산은 거의 대부분의 소설을 민중의 위치에서 서술한다. 또한 구체적인 경험적 사실에 입각하여 서사를 전개하고 있다. 따라서 추상적 관념이나 이념이 전제되지 않는다. 가령 「사하촌(寺下村)」(1936)은 두가지 이념이 개입하고 있다. 하나는 맑스주의적 반(反)종교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주체적 저항과 국제적 연대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이러한 이념들은 구체적인 민중적 사실 위에 있지 않다. 이 소설은 농민들의 주체적 자각과 자발적 저항을 그리고 있어, 국제적인 민중연대조차 한 인물이 들려주는‘일본의 탄광 이야기’로 암시되는 데 그친다. 이러한 요산 소설의 특징을 리얼리즘의 이상에 미달하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차라리 요산 소설의 미덕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리라 생각한다. 그가 주어진 현실과의 맥락을 놓치지 않으면서 구체적인 것을 탐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제국과 국가와 지식인
간혹 피상적인 관찰자들은 요산의 삶과 문학이 지닌 굴곡을 그의 변화라고 성급하게 말하려 한다. 정세의 악화로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일정한 후퇴와 우회는 육체를 지닌 인간에게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중일전쟁(1937) 후 우리 문학은 현대주의의 추구와 탈정치주의의 길을 걷게 된다.‘동아 신질서 구상’을 통하여 제국의 질서를 재편하고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더욱 커지면서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도 크게 약화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요산은 식민지 하위주체인 농민의 입장을 벗어나지 않는다. 사회주의적 관념의 투영이 아닌 농민의 주체적인 현실인식을 통한 저항을 말하거나(「항진기」 1937) 전향하여 민중을 배반하거나 하지 않고 민중과 더불어 고난의 길을 걷는 기로(岐路)의 의미를 제시한다(「기로」 1938). 많은 이들이 이 작품 이후 요산문학의 저항성은 약화되거나 사라졌다고 말한다. 가령 「월광한(月光恨)」(1940)은 현실의 피로에서 벗어나려는 낭만적 경향이 뚜렷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도피와 망각을 칭송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다. 오히려 식민지하 무기력한 일상에 젖어든 남성인물과 대비되는 여성인물인 해녀의 건강한 삶을 제시하며 식민지 현실과 거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실제 요산은 「묵은 자장가」(1941)를 끝으로 절필한다. 이 작품은 역시 불교를 다룬 「추산당과 곁사람들」(1940)과 한참 나중에 나오는 「수라도(修羅道)」(1969)의 중간쯤의 인식을 담고 있다. 전자가 식민화된 불교의 폐단을 말하고 있다면, 후자는 민중불교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묵은 자장가」는 타락한 불교를 비판하면서 부처의 본질이 중생의 구제에 있음을 제시하고 있어, 비록 식민지 현실을 우회하고는 있으나 요산의 세계인식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이에 앞선 「낙일홍(落日紅)」(1940)은 식민주의가 내포한 인종주의적 편견을 부각함으로써 식민지적 통합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1940년대 요산의 소설은 현실의 욕망으로부터 물러나 침묵하려는 그의 입장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절필 이후의 희곡 「인가지(隣家誌)」(1943)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일차적으로 회유 또는 강제에 의한 협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망명을 선택하지 않은 식민지인에게 전시체제란 저항과 협력의 이분법이 적용되지 않는 회색지대와 같다. 이러한 가운데 지식인과 문인은 제국의 헤게모니에 동의할 것을 요구받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요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있다. 적극적으로 식민지 헤게모니에 동의를 표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협력 요구에 응하면서 일정한 일탈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을 읽어보면, 지원병으로 가야 하는 당사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다만 무지한 어른들의 대화, 당시 상황에 무지한 민중적 일상이 과장된 채 전경화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실제의 민중현실과는 상당한 거리가 발생한다. 이를 탈정치성이라고 한다면 「인가지」는 제국이 요청하는 국책극(國策劇)이 아니라 세태극에 머물게 된다.4 이 작품이 지니는 예외성은 요산의 글쓰기 전체를 통어하는 작가-서술자 원리에 견주어봐도 드러난다. 이같이 세태를 거리를 두고 과장되게 보여주는 희곡적 글쓰기는 요산의 본령이 아니다. 또한 신고송(申孤松)으로 짐작되는 고향 선배의 권유로 썼다는 점도 1943년의 상황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토오꾜오 유학시절부터 교분을 이어온 신고송은 당시 국민극 운동에 적극 가담하고 있었고, 해방 이후 요산과 함께‘희망좌’에서 연극운동을 하게 된다. 「인가지」는 조선어 허용이라는 틈새를 활용하면서 강요된 협력이라는 제국의 폭력에 대처할 수밖에 없었던 요산의 고뇌의 산물이다. 하지만 식민지 회색지대에서 그 또한 일상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정한 협력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사실이다.
행동과 글쓰기라는 관점에서 등단 이후 30년대 후반은 요산에게 글쓰기의 시대였다. 요산의 행동은 와세다대학에서 귀국한 1932년 여름에 직접적인 사회적 실천의 형태로 나타난다. 와세다에서 체화된 사회주의 사상은 그를 양산(梁山)농민봉기사건에 개입하게 하면서 피검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요산의 사회주의는 지식인이 가지고 있는 민중지향적 성격을 띤다. 양산농민봉기사건의 경우 피해조사 과정과 조합 재건에 개입하는 형태를 보인다. 그날 이후 요산은 남해에서 교원으로 생활하며 문인-지식인으로서 일상적 수준의 저항의식을 담보한 글쓰기를 견지한다. 1940년 3월 교원직에서 물러나기까지 요산의 삶은 그리 큰 굴곡이 없었다 하겠다. 1940년 시작한 동아일보 동래지국 일도 신문 폐간과 더불어 그만두고, 이후 경남도청 상공과 산하의 면포조합 서기로 취직하여 해방될 때까지 근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이처럼 요산은 생활의 측면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처지에 있었다.
요산은 첫 소설집 『낙일홍』(세기문화사 1956) 「후기」에서 “흩어진 옛 작품을 주워 모으면서 누구나 으레 느끼는 자기 작품에 대한 불만과 과거의 문학적 정열에 대한 향수 이외에, 형편이 다른 나는, 십년을 꼬박 침묵 속에서 보내다시피 한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과 혹은 그밖에 어떤 까닭이 있었다면 그러한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막연한 반발 같은 것도 마음 아프게 느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야말로 고통스러웠던 과거에 대한 회한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그를 침묵하게 한 “그밖에 어떤 까닭”이란 무엇일까? 요산에게 닥쳐온 해방공간의 격랑이 아닐까?
강대홍(姜大洪)과 요산의 관계는 신고송과의 관계에 못지않은 듯하다. 이는 일찍이 요산이 동아일보 동래지국을 맡을 당시 강대홍이 동아일보 부산지국장을 맡고 있었다는 사실과, 요산이 그와 해방 소식을 주고받으며 활동을 시작했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강대홍은 건국준비위원회 경남지부 총무부장을 맡는 한편, 10월엔 부산시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된다. 이어서 그는 1946년 1월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 부위원장으로 선출되고 그해 3월에 남로당 부산시당 위원장이 된다.6 이러한 강대홍과 요산이 일제말기에 교분을 갖고 함께 해방을 맞았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한 바가 있다.
요산은 해방과 더불어 진정한 민족문화를 수립한다는 기치 아래‘인민예술좌’라는 연극운동에 관여한다. 아울러 1946년 2월 10일 조선문학가동맹 부산지부(서기장 류열柳烈, 서무부장 정용수鄭容洙, 재정부장 홍남식洪南植 등)의 지부장을 맡는다. 아울러 그해 2월 14일 조선예술연맹 부산지구협의회가 결성되는데, 요산은 이 단체의 위원장으로 피선된다. 이때 도인민위원장인 노백용(盧百容)이 축사를 했다. 또한 요산은 부산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한 바 있고 이후 미군정이 민전을 탄압하는 등의 정세변화에 대처하면서 1947년 7월 27일에는‘공위경축(共委慶祝) 임정촉진(臨政促進) 인민대회’에 문화인 대표로도 참석한다.7 이러한 일련의 사실에서 우리는 두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요산이 철저하게 지역을 근거로 활동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건준-인민위원회-민주주의민족전선으로 전개된 중도좌파 민족주의 노선을 실천해갔다는 것이다. 요산은 이러한 실천으로 인하여 1949년 6월 5일 이승만정권에 의해 결성된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한국전쟁 발발과 더불어 생존을 위협받는 위기에 직면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생존하게 된다.
한국전쟁으로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 권력을 공고히한 이승만정권은 주지하다시피 반공매카시즘을 통치수단으로 사용한다. 이승만정권의 매카시즘적 반공주의가 지배하면서 친일파 청산과 함께 자주적 민주주의국가를 건설하려던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와해되어 침묵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부산지역의 민주·민족 지향 인사들은 재기의 기회를 엿보며 힘을 결집한다. 1954년 무렵 부산대 교수 이종률(李鍾律)과 김정한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족문화협회에는 부산·경남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 민족문화협회의 활동은 항일민족운동을 주제로 하는 강연회가 중심이었고, 이를 통해 민주적 자주의식을 대중에게 고취시키려 했으며, 암울한 현실 아래서 민주·민족진영의 결속을 다지는 역할을 했다.8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남한 좌파 민족문학의 유일한 생존자인 요산은‘빛나는 4월’과 더불어 부활하는 것이다.
3. 국가와 민중의 고통
해방공간에서의 요산은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였다. 식민상태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국민-국가 건설에 동참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두편의 소설 「옥중회갑」(1946)과 「설날」(1947)을 발표한다. 두편 모두 김해 출신의 사회주의자 노백용 일가와 연관된다. 그런데 소품에 불과한 「옥중회갑」이 던지는 메씨지는 단순하지 않다. 먼저 일생을 민족을 위해 싸워온 노(老)지도자에 대한‘나’의 존경심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존경심은 또한‘나’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의 감정을 유발한다. 여기서 부끄러움은 주체를 변화시키는 심리적 기제, 맑스가 말한 혁명적 정서이다. 다음으로 모스끄바 3상회의의 결정을 기다리는 가운데 가해지는 우익측의 테러와 미군에 의한 노선생 체포라는 당시의 정황을 알리고 있다. 이러한 정황은 이상적 국민-국가 건설의 험난한 여정을 시사한다. 「설날」 또한 10월인민항쟁으로 투옥된 노백용 일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족의 한 단면이 아니라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노씨 일가의 영웅적인 정신을 전하는 한편, 이들이 지닌 낙관적 전망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의 이러한 의도와 달리 객관적인 정세는 크게 악화된다.
아래로부터의 국가 건설이 좌절되면서 요산의 행동은 침묵으로 바뀌게 된다. 남한만의 단독국가가 건립되면서 국가에 의한 사상탄압과 폭력이 계속되는 가운데, 요산은 1947년 교사의 길을 선택한다. 앞서 말한 대로 해방공간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후일 국민보도연맹에 연루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위기를 피하게 된다. 그러나 옥중에서 그에게 호를 지어준 김동산과 해방후 그를 이끌어준 강대홍은 희생되고 만다. 그는 자전적 소설 「슬픈 해후」(1985)에서 당시 그의 처지를 전하고 있다. 이후 이 소설에 이어지는 자전적 연작소설을 구상했으나, 아쉽게도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요산의 문학적 생애 재구성에서 한국전쟁 전후와 이승만정권 초기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러편의 꽁뜨와 연재소설 『농촌세시기』(1954~55) 그리고 단편 「액년(厄年)」(1956)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아울러 50년대 후반부터 신문과 잡지 등에 쓴 산문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산문쓰기는 이후 평생 지속된다. 요산의 글쓰기에서 산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유달리 커 보인다. 그는 산문을 통하여 시대와 현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4월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무너졌지만 요산의 고난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다시 군사정권에 의한 해직과 복직의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고통 이후에 스스로 복귀라고 규정한 「모래톱 이야기」(1966)가 등장하는 것이다. 실로‘복귀’라는 말에 값하는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그럼에도 이것이 단순한 문단 복귀로 해석될 수는 없는 일이다. 작가측에서 볼 때 이것은 자신의 세계관을 다시 소설쓰기를 통해 표출하는 것이고,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측에서는 억압되었던 전통의 복원이라는‘문학사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의 복귀는 “단절된 카프 전통의 복원”“해방 직후 좌파의 부활”“‘변경의 혼’의 중심부 진입”으로 그 의미가 매겨지고 있다.9 이처럼 그의‘복귀’는‘복원’‘부활’‘진입’이라는 무게를 가진다.
실제 요산문학은 몇번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연속성을 지닌다. 제국과 식민지 민중의 문제, 국가와 민중의 문제는 복귀 전후 요산문학의 일관된 주제이다. 이러한 주제는 그가 문학적으로 침묵하던 시기에도 지속적으로 고민해오던 사항이다. 해방공간에서 그는 행동으로 이상적인 국민-국가 만들기에 나선 바 있다. 이승만정권하에서 그는 폭압적인 국가가 민중의 권리를 어떻게 수탈하는가를 봐왔다. 그 또한 식민지시대와 다를 바 없이 국민-되기를 강요받았던 것이다.
이십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교원 노릇을 해오던 탓으로 우연히 알게 된 한 소년과, 그의 젊은 홀어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이 살아오던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이들에 관한 그 기막힌 사연들조차, 마치 지나가는 남의 땅 이야기나, 아득한 옛날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데 대해서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모래톱 이야기」)
복귀의 변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의 서두가 시사하는 의미는 두가지이다. 하나는 스스로 민중과 그들의 땅에 대하여 이야기하겠다는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도 이러한 민중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요산은 십년 동안 많은 민중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에게 민중은 누구인가? 그들은 자기 땅으로부터 소외되고 국가로부터 격리되거나 추방되는 자들이다. 「모래톱 이야기」와 「유채(油菜)」(1968)에서 주인공들은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오던 땅을 국가권력에 수탈당한다. 주거공간을 빼앗기고 굴에서 짐승처럼 살거나(「굴살이」) 가진 게 없어 변두리 고지대에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사는(「산거족」) 이들은 국가로부터 어떠한 보호도 받지 못한다. 이들은 국가가 만든 사회적 기준에 따를 때 유령 같은 존재들이다. 불법적으로 거주하고 노동하는 사람들에게 국가는 없다. 이들은 국가를 구성하는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스스로 주체가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인간단지(人間團地)」(1970)가 시사하듯 그들만의 세계는 구성되지 못한다. 이 소설을 두고 인간성 회복이니 인간주의 운운하는 것은 단순하다. 국가로부터 낙인이 찍혀 추방되거나 격리된 이들에게 인간주의는 가장 낮은 이념에 불과하다. 그들만의 세계를 형성하려는 노력은 어떠한 외부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가와의 투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미 요산은 식민지시대 작품에서 방화와 폭력과 자살이라는 양상들을 보인 바 있다. 저항과 폭력은 요산문학의 또다른 주제이다. 그는 비폭력을 옹호하지 않을 뿐 아니라 폭력에 폭력을 가하는 보복과는 다른 의미의 폭력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를‘대항폭력’(counter-violence)과 구별되는‘반폭력’(anti-violence)이라 할 수 있겠다.
요산이 민중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또한 국가의 조건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국민-국가라고 했을 때 국민은 누구이고 국가는 무엇인가? 요산문학의 핵심은 이러한 질문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하거나 농민운동을 한 사람들이 해방된 국가에서 핍박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민중을 위한 나라를 만들자는 사람들이‘빨갱이’로 내몰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또한 국가는 왜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의 입을 막으려 하는가? 모든 해답이 국가(state)의 상태(state)에 있다. 복귀 후 요산의 문학은 식민지 지배질서하의 국가와 해방 이후의 국가가 그 상태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이야기한다. 「수라도」에서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안보다 친일파 집안이 득세하며 독립유공자 후손인 「독메」(1970)의 주인공은 가난의 대물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옥변(地獄變)」(1970)과 「오끼나와에서 온 편지」는 일제하 강제징용 피해자의 후손들이 겪는 비참한 삶을 서술한다. 「과정(過程)」(1967)에서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양심적인 학자가 심문과 고문을 당한다. 허약한 국가의 상태를 국가보안법이라는 제도적 폭력을 통해 지키려 하는 것이다.
4. 땅과 지역의 의미
요산의 민중은 특정 계급으로 환원되지 않는 유연한 범주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의 문학이 농적(農的) 가치 위에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한 농민문학이 아니라 땅이라는 근본적인 토대를 말하고 있기에, 그의 문학이 거듭 새롭게 읽힐 소지는 크다. 그의 민중은 오늘날 소수자, 사회적 약자, 하위주체(subaltern) 등으로 그 개념이 이월되면서 재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하위주체가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설정될 수 있다면, 요산의 민중문학은 이제 하위주체의 문학이 된다. 원래 프롤레타리아에서 출발한 개념인 하위주체는 오늘날 성, 인종, 문화적으로 주변부에 속하는 사람들로 확장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로 자본과 국가로부터 소외되는 하위주체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그렇다면‘따라지’들을 천착해온 요산의 문학은 이제 하위주체에 대한 탐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민중 개념이 그러하듯 요산의 문학을 사실주의로 제약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글 첫머리에서도 말했듯이, 요산은 사실주의를 자신의 창작방법론으로 전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서 인용한 「모래톱 이야기」의 서두나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먼 옛날의 인류생활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도처에서 열심히 고분을 파헤치듯이, 나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진실의 한 부분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여름 강원도의 탄광지대를 몇군데 돌아다닌 일이 있다”라는 「오끼나와에서 온 편지」의 첫머리처럼, 그는 고고학자가 그러듯이 민중 사실을 파헤쳐 그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려 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참여-관찰이라는 변증법적 방법을 선택하여 민족지(民族誌)를 기술하는 인류학자를 닮았다. 요산의 소설, 나아가 그의 글쓰기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개방성이다. 그의 글은 변증법의 끝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실제 그는 대화상대인 독자가 누구인가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10 이야기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매개물이다. 어찌 보면 요산은 소설을 이야기하듯 써왔다 하겠다.
요산이 땅의 문학을 옹호한다고 하여 그가 특정한 장소라는 소재주의에 머물렀다고 보는 것은 한계가 있는 인식이다. 그는 무엇보다 자기 땅으로부터 소외된 삶을 경계했다. 여기서 땅은 국가와 지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산서동 뒷이야기」(1971)와 「오끼나와에서 온 편지」에서 읽을 수 있듯이, 그의 관심은 아시아 민중연대로 발전할 소지가 있다. 제국과 식민의 경험, 국가폭력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아시아 민중의 사랑 이야기는 이미 요산에게서 시사되고 있는 것이다. 요산은 또한 땅의 문제를 생태환경의 문제로 보았다. 매립과 매축(埋築)이 가져다주는 환경재앙을 고발하는 「모래톱 이야기」와 「지옥변」, 공업화로 인한 해양오염을 말하고 있는 「교수와 모래무지」(1976)는 한국 생태환경문학의 시발로 평가하기에 족하다.‘낙동강의 파수꾼’요산은 이러한 소설뿐 아니라 많은 산문을 통하여 생태환경문제를 제기했다. 땅과 민중에 대한 관심의 기저에 모든 생명체에 대한 사랑이라는 의식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문학은 새로운 글쓰기의 과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인간 중심의 문학에서 인간과 자연을 하나의 전체로 바라보는 글쓰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산문학은 철저한 지역문학이다. 그의 문학만큼 지역의 장소와 공간에 뿌리를 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땅으로부터의 소외는 생활로부터의 소외, 궁극적으로는 민중으로부터의 소외를 뜻한다.11 요산은 항상 대지의 경험을 근거로 글을 썼다. 오늘날 이러한 경험적 글쓰기는 크게 후퇴하고 있다. 다시 땅으로, 생활로, 민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왜 이러한 아름다운 산들이 몇몇 사람들에게만 독차지돼야 하는가?” 「산거족(山居族)」(1971)의 주인공이 부르짖는 말이다. 국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민중은 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왜 저항으로써만 자기를 확인할 수밖에 없는가? 요산의 물음은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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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결성을 지닌 「새양쥐」(1936)라는 단편을 비롯하여 미완의 장편 여럿이 요산문학관에 유고로 남겨져 있다.↩
- 현재 접할 수 있는 『집단』과 『신계단』의 목차 어디에도 「구제사업」은 등장하지 않는다. 『신계단』 창간호가 나온 게 1932년 10월이고 이후 1933년 초까지 발간된 이 잡지에서 제목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투고된 잡지가 아직 확인되지 않은 1932년 1월의 『집단』 창간호가 아닌가 한다.↩
- 이순욱은 요산의 시 30편을 조사했다. 이 가운데 23편이 토오꾜오 유학시절에 쓴 것으로, 1929년 6편, 1930년 15편, 1931년 2편이다. 이순욱 「습작기 요산 김정한의 시 연구」, 경남·부산지역문학회 『지역문학연구』 제9호(2004), 46~47면.↩
- 하정일(河晸一)은 「인가지」를 순응과 일탈의 경계선에 놓여 있는 혼종성을 지닐 뿐 아니라, 그 맥락이 만드는 효과가 일탈을 지향하는 작품이라 해석하고 있다. 하정일 「일제말기 김정한 문학과 탈식민저항의 세 유형」, 『탈식민의 미학』, 소명 2008, 388~89면.↩
- 당시 면포조합은 도청 상공과의 귀퉁이를 빌린 민간물자 통제단체였고, 조합의 상무는 소설가 한무숙(韓戊淑)의 부친이었다. 조갑상 「시대의 질곡과 한 인간의 명징함」, 강진호 엮음 『김정한』, 새미 2002, 19면.↩
- 강대홍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강만길·성대경 엮음 『한국 사회주의 인명사전』, 창비 1996 참조.↩
- 박철규 「미군정기 부산지역의 대중운동」, 『한국 근현대 지역운동사』, 역사문제연구소 1993, 320면.↩
- 『부산 민주운동사』, 부산민주운동사편찬위원회 1998.↩
- 최원식 「90년대에 다시 읽는 요산」, 『문학의 귀환』, 창비 2001, 228면.↩
- 요산은 「수라도」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창작의 방법을 말한 바 있다. “이 작품도 대부분의 나의 작품과 다름없이 배경도 농촌이고 또 독자도 농촌 출신의 청년을 상대로 하였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작품들에 있어서는 기교-기발한 구성이라든가 소위 재치있는 표현 같은 건 처음부터 안중에 두지 않았다. 그저 농촌 출신의 사람이 쉬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소설을 쓰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외양과 기교보다 항상 소박한 것을 좋아하는 성벽을 가졌기 때문이다.” 「수라도-역사와 사회의식의 주력」, 『월간문학』 1970년 8월호.↩
- 최원식 「지방을 보는 눈」, 『황해에 부는 바람』, 다인아트 2000, 3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