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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이정식 『여운형』 서울대출판부 2008
인물 평전과 시대배경의 인식
박찬승 朴贊勝
한양대 사학과 교수 pcshistory@hanyang.ac.kr
한 인물에 대한 평전을 쓰는 것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평전을 쓰기 위해서는 대상이 되는 인물만이 아니라 주변인물에 대해서도, 더 나아가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원로학자 이정식(李庭植) 교수는 최근 서재필(徐載弼)과 이승만(李承晩) 그리고 이번에 여운형(呂運亨)까지 세 사람에 대한 평전을 연이어 세상에 내놓아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 평전들을 읽으면서 우리는 우선 그의 해박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말부터 해방 직후에 이르는 시기까지의 수많은 사건과 인물에 대해 그처럼 자세하게 정리해 쓸 수 있는 학자는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된다.
한국 근현대사의 인물 가운데 여운형은 평전이 가장 많이 나온 사람 중 하나다. 그의 생애가 매우 드라마틱하고, 또 인물 자체가 매력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동안 이만규, 여운홍, 이기형, 정병준, 여연구, 강덕상 등이 여운형 평전을 썼다. 특히 최근에 일본에서 나온 강덕상(姜德相)의 『여운형 평전』(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역사비평사에서 1권이 번역되어 나왔다)은 아직 해방 이전 부분만 출간되었지만, 방대한 자료와 세밀한 서술을 담고 있어 누가 봐도 기가 질릴 정도이다. 그럼에도 이정식은 이번 평전 『여운형-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에서 여러모로 새로운 여운형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가 평생 여운형에 관심을 갖고 자료를 모아왔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 책은 그의 출생부터 시작하여 청년시절, 3·1운동 전후, 일본에서의 동양평화론 설파, 고려공산당과 중국혁명운동 시기, 귀국 후 조선중앙일보 사장 시절,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와 인민공화국 시기, 인민당 시기 그리고 그의 사로당(사회로동당) 결성과 좌우합작운동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해방 이전 민족운동에 참여하던 시기에 책의 3분의 2가량을 할애하고 있어, 민족운동가로서의 여운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저자는 특히 여운형의 기독교 전도사 시절의 모습, 토오꾜오에서 동양평화론을 펼칠 때의 모습, 동방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모스끄바로 가는 모습,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하던 시절의 모습 등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동양평화론을 높이 평가하여 오늘날까지도 생명력을 지니는 이론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여운형이 직접 쓴 「나의 회상기」라는 글을 1936년의 잡지 『중앙』에서 발굴하여 책의 부록에 싣고, 본문에서는 이를 인용하여 당시 여운형의 여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하던 시절에 대해 서술하는 대목에서는 당시 여운형이 만났던 주요 인물들에 관해 상세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해방 직후의 여운형에 대해서는 건국준비위, 인민공화국, 인민당, 좌우합작 등을 중심으로 서술했는데, 한국과 미국측 자료뿐 아니라 최근에 발견된 『슈띠꼬프일기』 같은 러시아쪽 자료를 자주 인용하고 있다. 이같은 폭넓은 자료 인용은 그가 오랫동안 여운형에 관심을 기울여왔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이정식은 이 책에서 여운형의 성격, 인간관계 등 인간적 면모에 상당한 비중을 두어 그를‘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는 이전의 정병준(鄭秉埈)이나 강덕상의 평전이 여운형의 활동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던 것과 다소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평전의 성격상 개인의 퍼스낼리티에 비중을 두어 서술하는 것은 미덕이라 할 것이다. 다만 이 책의 경우, 부록에 실린 이란(李欗)의 증언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은 있다.
앞에서 살핀 것처럼 이 책은 여러 면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는 평전이다. 하지만 몇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 우선 1921년부터 1924년 사이 여운형이 관계했던 국민대표회의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여운형은 이 시기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국민대표회의 개최 준비의 가장 큰 후원자 역할을 했고, 개최 뒤에는 개조파로서 활동했다.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실패로 끝났고, 이후 여운형은 상해교민단장과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장직만 맡아 활동했다는데 이런 부분이 누락되어 있다. 또한 여운형과 1925년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의 관계에 대해서도 서술하고 있지 않다. 주지하듯이 제1차 조선공산당이 조직된 후, 조봉암(曺奉岩)이 당 결성을 꼬민떼른에 보고하기 위해 상해에 왔을 때 여운형은 상해 주재 소련 부영사에게 그를 소개했고, 1926년 2차 조선공산당 결성 뒤에는 홍남표(洪南杓)와 구연흠(具然欽) 등이 상해에 오자 그들이 중국공산당 상해한인지부를 결성하는 일을 지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운형은 이때 자신이 직접 조선공산당이나 중국공산당 상해한인지부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여운형은 이러한 당적 조직에 속하기보다는 표현단체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또한 1946년과 47년 여운형의 해방후 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는‘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소략하게 다루고 있다. 대신 저자는 여운형과 소련군정, 김일성(金日成), 박헌영(朴憲永)의 관계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이는 최근 발견된 소련측 문서에 비중을 두고 이 시기를 서술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물론 여운형과 그들의 관련도 중요하지만, 이 시기 가장 중요한 것은 좌우합작운동과의 관련이 아닐까 생각된다.
해방후 여운형의 활동을 서술하는 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 시기 소련의 한반도정책에 대한 해석이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에서 이미 1945년 9월 20일 스딸린이 소련군 극동사령관에게 내린 지령에서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단체의 광범위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을 수립하는 데 협력할 것”이라고 한 대목을 들어, 소련은 이때부터 이미 북한지역에 단독정권을 세우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고 단정했다. 이로써 38도선의 철폐는 불가능해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후 진행된 모스끄바 3상회의나 미소공동위원회는 소련의 제스처에 불과한 것이고,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남북한에 통일된 임시정부가 들어서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고 본다.
하지만 9월 20일자 스딸린의 지령에 나오는‘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이‘단독정부’를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후 북한에서 조직된 것은 임시인민위원회였고, 임시인민위원회는 대체로‘통일될 때까지’의‘북조선 중앙행정기관’으로 당시 문서들에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945년 9월 스딸린의 지령에 나오는‘부르주아민주주의정권’은‘행정기관’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학계에서 더욱 면밀하게 검토할 문제인데, 저자와 같은 관점을 갖게 되면 1945년 9월 이후의 모스끄바 3상회의,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운동, 미소공동위원회, 좌우합작운동, 남북협상 등은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이 책이 해방후 여운형의 활동, 특히 좌우합작운동에 대해 소략하게 쓰고 대신 소련군정과 여운형의 관계를 비중있게 서술한 것은 해방 직후의 정세에 대한 이같은 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처음으로 돌아가, 한 인물에 대한 평전을 쓰는 일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그 인물이 살았던 시대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평전을 쓰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