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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마이크 데이비스 『조류독감』 돌베개 2008
세계화의 모순이 탄생시킨 참혹한 ‘괴물’
김명진 金明振
성공회대 강사, 시민과학쎈터 운영위원 walker71@empal.com
올봄에 우리나라는 조류독감(Avian Influenza, AI)의 유행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조류독감은 4월초 전북 김제에서 보고된 후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됐고,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도 처음으로 발견돼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이번 유행에 대응한 방역과정에서 1천만마리에 가까운 닭과 오리가‘살처분’되어 손실액만도 수천억원대에 달할 정도로 피해규모가 컸다. 그런데 지난 몇년 동안 조류독감 발생이 연례행사에 가깝게 반복되어서인지, 질병 유행에 대한 사회적인 반응도 점점 미적지근해지는 듯하다. 전문가들은 당국의 초기대응이 미흡해 사태를 키웠다며 비판하고, 일반 시민들은 식품에 대한 불신으로 일시적으로 닭고기와 오리고기 소비를 기피하며, 언론은 근거없는‘막연한 불안감’때문에 양계업계와 외식업계가 피해를 본다며 볼멘소리를 늘어놓았지만, 그뿐이었다. 이번 사태를 거치면서 조류독감 유행이 공중보건에 미칠 수 있는 심각한 의미에 주목한 사회적 논의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의 『조류독감』(The Monsterat Our Door, 정병선 옮김)의 출간은 매우 시의적절하게 느껴진다. 데이비스는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창비 1994)과 『슬럼, 지구를 뒤덮다』(돌베개 2007) 같은 저작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사회비평가인데, 얼른 생각하면 사회사와 도시사를 주로 연구해온 저자가 조류독감 문제같이 일견‘과학적’인 주제를 다룬 것이 다소 의아하게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조류독감의 역사와 과학적 배경지식, 그 속에 얽힌 사회적 문제들을 촘촘하게 교차시켜 엮어낸 이 책을 읽어가다 보면, 조류독감이 단지 수의학이나 전염병학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세계화의 모순을 관통하는 핵심주제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선 저자는 이 책에서 조류독감의 인체감염과 전세계적 유행이 빚어낼 대재앙의 가능성을 환기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20세기 이후 독감 대유행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기술하는데, 특히 1차대전 직후 전세계적으로 5천만에서 1억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되는 1918년 대유행(일명‘스페인 독감’) 같은 재앙이 또다시 닥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1997년 홍콩에서 처음 인체감염이 확인되어 현재까지 230여명의‘공식’사망자를 낸 H5N1 바이러스(흔히‘고병원성’조류독감 바이러스라고 불리는)가 그런 재앙을 일으킬 수 있는 유력한 후보이다. 현재까지 조류독감 환자들은 인간과 가금류(家禽類)의 직접접촉이 일어나기 쉬운 인도네시아, 베트남, 타이 등 동남아시아의 농촌지역에서 주로 발생했지만, H5N1 바이러스가 다른 바이러스와 재조합되거나 변이를 일으켜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전염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면, 이는 곧 수천만명의 사망자를 낳을 수 있는 공공보건의 악몽으로 변할 가능성이 크다고 그는 강력히 경고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좀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런 표면적 메씨지를 넘어서 오늘날 조류독감 창궐에 배경을 제공한 여러 사회적 요인들을 천착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특히 1980년대 이후 나타난 여러가지 변화들이 조류독감의 위험을 현저하게 증가시켰다고 말한다. 먼저 중국 남부 꽝뚱(廣東)지역의 급격한 도시-산업화 그리고 가금류 소비증가와 맞물린 공장형 축산의 확대는 조류독감 바이러스의 변이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인체감염의 위험을 높였다. 이와 함께 20세기 후반 이후 제3세계 도시를 중심으로 급격하게 팽창하고 있는 슬럼은 살인적인 인구밀도와 열악한 위생환경으로 인해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병독성을 발달시키는 데 이상적인 생태환경을 제공하고 있다(이는 데이비스의 후속저작인 『슬럼, 지구를 뒤덮다』와 연결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댐 건설로 인한 자연습지의 파괴도 조류독감 유행에 일조했다. 서식지를 빼앗긴 야생조류들이 댐 건설로 생겨난 저수지나 관개수로에 몰려들어 이곳에 방목되는 가금류와 접촉함으로써 조류독감 바이러스의 상호전달을 촉진했기 때문이다.
이런 변화들이 조류독감의 변이와 인체감염 가능성을 높였다면, 또다른 변화들은 질병의 유행에 대응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영향을 미쳤다. 세계화와 맞물린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많은 국가들에서 대규모 전염병 창궐에 대처할 수 있는 공공의료체계의 파탄을 초래했다. 그리고 오늘날 보편화된 항공운송은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불가능했던 엄청난 이동성을 가능케 해줌으로써 유행병을 불과 1, 2주 만에 전지구적 문제로 만들어버릴 수 있게 되었다. 2003년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일명 싸스(SARS)의 유행은 그와같은 대유행병의 가능성을 보여준 불길한 전조였다.
이 모든 요인들을 감안할 때, 조류독감의 위협은 단순히 백신이나 치료약 개발 같은 기술적인 해결책으로 손쉽게 제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이는 단지 조류독감 바이러스의 변화무쌍한 자연적 변이와 내성 증가로 백신이나 치료약 개발이 쉽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오늘날의 조류독감 문제는 어디에선가 홀연히 등장한 신종 바이러스가 제기하는‘자연적’위협이라기보다는 우리 인간 스스로가 뜻하지 않게 창조해낸 (저자 자신의 표현대로)‘괴물’(monster)에 훨씬 더 가깝다. 조류독감을 둘러싼 사회적 과제들의 해결이 난망한만큼 대재앙의 도래를 막는 것도 어려울 것임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이 책이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2006년은 동남아시아에서 인간 희생자들이 속속 보고되면서 조류독감으로 인한 전지구적 재난이 임박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점이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책의 서술 어조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지금은 당시보다 위기감이 다소 가라앉았지만, 최근의 논의를 보면 섣불리 낙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과학계에서는 조류독감 대유행의 위험 자체가 사라진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대유행은 피할 수 없는 것이고 단지 시점만 문제일 뿐이라는 견해가 여전히 주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류독감의 위협과 그 배후에 숨은 여러 요인들(비인간적인 공장형 축산 방식, 슬럼을 양산하는 제3세계의 빈곤, 야생조류의 서식지를 파괴하는 마구잡이식 개발)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 시민들에게 단지 가금류 소비를 그때그때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것 이상의 판단과 결정을 요구하고 있다. 데이비스의 책은 이를 위해 어떤 근본적 반성과 변화가 요구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출발점 구실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