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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제8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
백상웅 白象雄
1981년생.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재학중. 2006년 제5회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 수상. bluepostman@naver.com
각목
광목으로 옷을 만들어 시집을 왔다는
어머니의 말, 각목으로 알아듣고는
나는 옹이가 빠져 구멍이 난 저고리를
생각했다, 그땐 각목이 귀했을지도 몰라
옆집 창고에서 빌려왔을지도 몰라
각목을 절구에 찧어서 질긴 실을 뽑아냈을지도
몰라, 생각하면서 나무 속을 기어다니는
딱딱하고 팍팍한 누에 한마리를 떠올렸다
각목을 광목으로 바로 알게 된 후에도
나는 누에가 각목 속에 터널을 뚫는다고
믿었다, 다리 부러진 의자가 되면서도
젖은 밭이랑에 박혀 서서히 삭아가면서도
때리는 놈의 손아귀에 붙잡혀서도
널따란 천을 짜고 싶어할 각목을 떠올렸다
어머니 같으면서도 때론 아버지 같은
각목에 녹슨 못을 박아 바지랑대를 만든다
물레를 돌리다가 두꺼운 주름을 쿵쿵 접을
누에, 각목은 길게 뻗어 빨랫줄을 치켜올렸다
지금 각목은 광목처럼 펄럭이고 싶은 것일까
말라서 주름진, 이제 쉽게 부러질 것 같은
각목, 나는 각목으로 광목같이 펼쳐진
눈 내린 들판을 후려칠 수 있을까
백년 동안의 소풍
백년 전엔 없던 물렁한 언덕이었어
나무들이 천막을 치니 꽃그늘이 통째로 빨래하러 가는 거야
눈곱 떼던 복숭아 꽃망울도 저수지 쪽으로 기어가던 참이야
벌떼가 꽃송아리를 하늘에 꽁꽁 꿰매어놓아도 꽃잎이 세상에 분홍 주름을 자꾸 만드니까,
흑염소떼가 뿔을 세우고 쇳소리 내며 몰려왔어
백년 만에 봉봉세탁공장 천막이 세워졌어
안과 밖이 헷갈리는 투명한 벽을 드나드는 염소떼,
국적은 다르지만 얼굴이 닮은 그늘이야
돗자리 위에 앉아 까맣게 수런대고 있어
소풍 와서 수면을 다림질하고 있는 거야
붓 같은 수염들의 웃음은 볕에 잘 익은 청동빛깔,
삼겹살을 굽다가 서툰 젓가락질처럼 웃는 거야
물에 뜬 능선을 따라 자맥질하는 물오리같이 입을 벌리데
천막 아래선 복숭아나무와 여권 없는 어린 뿔이 알음알음 말을 놓는 거야
쨍쨍한 놋쇠근육들도 나무들과 말을 트고 맨발이 되는 거야
하늘의 얼룩을 불법으로 지우던 흑염소떼,
주름진 하늘의 귀퉁이를 펼쳐 언덕에 널어놓았어
펄럭이는 것은 때가 빠진 언덕이야
살갗 부딪치는 소리가 저수지에 물결을 일으키데
왜 거뭇거뭇한 사랑은 방울 흔들며 언덕을 넘지 못하지?
나무껍질 같은 얼굴에 꽃잎이 내려앉아 흑염소떼의 나라는 백년 동안 찾을 길이 없어
강철손이 보송보송 말라가는 하늘을 주무르고 있는 언덕이야
거인을 보았습니다
방 한칸의 옆구리를 터서 또다른 방을 만든 집에 세를 들었습니다. 그해 겨울 저는 양철지붕을 밟고 다니는 수상한 거인이 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번도 발자국을 본 적 없지만, 그는 지붕에 엉덩이를 대고 한참 쉬었다 가면서 처마 끝 고드름을 뜯어가곤 하였으니까요. 해가 저물면 가로등마다 성냥불을 그어대던 놈도 거인이었습니다. 저는 소란스러운 불빛 때문에 귀가 불편해서 잠들지 못했습니다. 방은 외로운 기타 같았기에 저는 두칸의 방에서 하루씩 번갈아 묵었습니다. 방이 쓸쓸해지면 목소리가 금방 상할까 봐 걱정했던 까닭입니다. 멀리서 열차소리가 들리면 거인은 귀를 막고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휘파람소리는 제 심장 속에 서늘한 골짜기를 팠습니다. 거인은 분명 엉덩이가 매우 무거운 놈일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동네의 담벼락은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고, 대들보가 뽑혀갔으며, 지붕이 움푹 내려앉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거인은 하릴없이 태양을 잡아당겨 어둠을 길어지게 하고, 태양에 얼음을 용접해서 눈발을 자주 마을로 불러들였습니다. 눈송이가 날리면 팽팽한 전깃줄을 손가락으로 튕기며 배고픈 새떼를 쫓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거인은 구름을 뒤집어쓰고 어떤 날은 적막한 통장을 들여다보고는 창문에 성에를 가득 채워놓고 갔습니다. 아마도 하늘 가장자리에 묻어둔 쌀독이 텅 비어버린 날이었겠지요. 폭설이었습니다. 거인도 잠을 뒤척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뚝뚝 부러뜨려 이를 쑤실 때, 이미 하늘은 텅 비고 먹구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거인은 천장을 두드리고 처마를 움켜잡고 지붕을 열어보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두려워서 함박눈처럼 울었습니다. 지붕과 지붕을 잘못 겹쳐 올렸는지, 날이 풀리기도 전에 천장에서 거인의 녹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검은 벌레들이 방구석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와 젖은 벽지를 뜯어먹었습니다. 거인은 곰팡이 핀 벽에다 제 그림자를 걸어두고 또 어디에서 저의 낡은 기타소리를 뜯어먹고 있을까요?
매화민박의 평상
네모난 짐승이 매화나무 그늘을 등에 업고 기어간다
부러진 한쪽 다리를 벽돌로 괴고도 절뚝이지 않는다
발바닥이 젖어 곰팡이가 피었는데 박박 긁지 않고
마당에 네개의 발자국을 천천히 찍고 있다
나도 짐승의 널따란 등에 그늘보다 무겁게 엎드린다
짐승은 매화나무 그늘을 담벼락 쪽으로 밀어낸다
틀림없이 한곳에 뿌리내리는 법을 배우지 못해
나처럼 숲속에서 도망쳐 매화민박에 묵었을 짐승,
평상이 되는 줄도 모르고 납작 엎드려 단잠에 들었다
등허리에 문신처럼 박힌 나이테가 성장을 멈춘 것은
놀러온, 도망친, 연애하는, 슬픈, 엉덩이 때문은 아니다
숲을 떠난 나무가 뿌리를 찾기 위해 남겨놓은 증거이다
네모난 짐승이 햇볕을 향해 남몰래 발자국을 뗀다
네모난 황소 같은 평상에, 평상이 될 것만 같은 나를
단단히 업고 숲속으로 돌아갈 것 같은 매화민박이다
오동나무 아파트
우리가 세든 이 아파트는 공교롭게도 계단이 없지만 옥상은 딱딱한 하늘과 이어져 있단다
이 동네에 정착한 주민들이 처음 한 일은 베란다 가득 꽃밭을 가꾸는 일
채송화가 자작자작 걸음을 뗐고 해바라기와 능소화가 한줄기에서 피어났지
넝쿨이 치렁치렁 아래층 창문을 가리기도 하는 우리의 아파트는 한때 몇그루의 오동나무였거든
우리가 건너 동에 걸린 얼굴만 넌지시 바라보는 건 서로를 보살필 수 있는 시간의 전부였기 때문
느닷없이 등을 돌려 떠나버리는 이들이 없었기에 주민들의 눈두덩은 젖을 일이 없지
나이테가 박혀 있는 단칸방에선 둥근 뼈가 항아리를 빚어 오동나무 숲에 걸어두었어
항아리가 식은 달처럼 둥둥 떠서 동강난 세상을 밝히면 우리는 꽃잎을 갉아먹다가 들킨 벌레 같았단다
오동나무 아파트가 층을 높여가자, 항아리의 배는 고치처럼 볼록하게 불러갔어
주민들은 뚜껑을 섣불리 열어보려 하지 않았거든
뼈가 익어가는 계절이 다가오면 아파트에 젖은 날개들이 기어다니고 꽃밭엔 더듬이가 앉아 있을 테니까
누구나 화로 속에 누워 꿈을 꾸다가 뜨거운 항아리를 안고 아파트에 올라와야 했단다